2024.03.29 (금)

  • 맑음속초11.5℃
  • 황사9.5℃
  • 맑음철원6.7℃
  • 맑음동두천6.6℃
  • 맑음파주5.9℃
  • 맑음대관령3.9℃
  • 맑음춘천9.7℃
  • 맑음백령도5.3℃
  • 황사북강릉11.8℃
  • 맑음강릉11.9℃
  • 맑음동해11.9℃
  • 황사서울7.6℃
  • 맑음인천7.0℃
  • 맑음원주9.2℃
  • 황사울릉도11.6℃
  • 맑음수원6.6℃
  • 맑음영월9.2℃
  • 맑음충주9.3℃
  • 맑음서산5.9℃
  • 맑음울진12.9℃
  • 연무청주9.8℃
  • 박무대전8.4℃
  • 맑음추풍령9.8℃
  • 황사안동11.0℃
  • 맑음상주11.0℃
  • 황사포항15.6℃
  • 맑음군산7.1℃
  • 황사대구15.0℃
  • 박무전주8.7℃
  • 맑음울산14.9℃
  • 연무창원13.6℃
  • 박무광주10.5℃
  • 연무부산13.8℃
  • 맑음통영13.2℃
  • 박무목포9.8℃
  • 박무여수13.4℃
  • 박무흑산도8.9℃
  • 맑음완도12.7℃
  • 맑음고창7.1℃
  • 맑음순천11.2℃
  • 박무홍성(예)7.0℃
  • 맑음8.4℃
  • 연무제주14.8℃
  • 맑음고산13.1℃
  • 맑음성산12.9℃
  • 박무서귀포13.6℃
  • 맑음진주14.4℃
  • 맑음강화6.5℃
  • 맑음양평9.0℃
  • 맑음이천7.6℃
  • 구름조금인제10.0℃
  • 맑음홍천8.9℃
  • 맑음태백5.6℃
  • 맑음정선군7.2℃
  • 맑음제천8.0℃
  • 맑음보은9.4℃
  • 맑음천안8.8℃
  • 맑음보령5.1℃
  • 맑음부여6.5℃
  • 맑음금산8.5℃
  • 맑음8.7℃
  • 맑음부안7.9℃
  • 맑음임실8.0℃
  • 맑음정읍7.8℃
  • 맑음남원9.8℃
  • 맑음장수9.0℃
  • 맑음고창군6.4℃
  • 맑음영광군7.0℃
  • 맑음김해시13.8℃
  • 맑음순창군8.9℃
  • 맑음북창원14.1℃
  • 맑음양산시14.6℃
  • 맑음보성군11.8℃
  • 맑음강진군12.9℃
  • 맑음장흥12.6℃
  • 맑음해남12.2℃
  • 맑음고흥12.7℃
  • 맑음의령군14.4℃
  • 맑음함양군11.9℃
  • 맑음광양시12.3℃
  • 맑음진도군11.3℃
  • 맑음봉화10.0℃
  • 맑음영주9.8℃
  • 맑음문경10.2℃
  • 맑음청송군11.3℃
  • 맑음영덕13.4℃
  • 맑음의성11.8℃
  • 맑음구미13.0℃
  • 맑음영천13.1℃
  • 맑음경주시16.1℃
  • 맑음거창11.6℃
  • 맑음합천14.0℃
  • 맑음밀양15.6℃
  • 맑음산청12.9℃
  • 맑음거제13.7℃
  • 맑음남해13.9℃
  • 맑음14.2℃
기상청 제공
나의 출애굽기(8)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의 출애굽기(8)

나의 출애굽기(8)

 

드보라

 

20. 자동차 사고에서 극적으로 살아나다

 

언니네를 기차로 가려니 한 달 넘게 걸릴 것 같아서 자동차를 얻어서 탔다. 담배 한 통을 뇌물로 찔러주고 짐을 가득 실은 써비차 위에 앉아서 갔다. 그렇게 길을 얼마나 갔을까. 외진 길에 차가 가는데 갑자기 짐들이 한쪽으로 서서히 넘어가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어 넘어간다.”하면서 막 뛰어내렸다. 그렇지만 나는 몸이 둔해서 미처 피하지 못하고 짐과 함께 넘어가 버렸고, 뒤집힌 차 아래 깔렸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었던 아찔한 상황이었는데 다행히 다리만 차에 깔려서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 사고로 2명이나 죽었다. 경찰은 그 운전수를 잡아가고 나머지는 버리고 갔다. 우리는 비를 맞다가 다른 차를 얻어 타고 길을 이어갔다.

 

나는 먼저 친정엄마네를 갔다. 남편이 죽었다는 말에 부모님은 안타까워하면서 나를 집에서 쉬게 하셨다. 내가 친정에 있는 동안 아버지는 나에게 재혼을 권하셨다. 초소에서 일하는 홀아비 군인을 소개해 주시겠다고 했다. 나는 그래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다. 신랑이 사망한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재혼을 생각하겠느냐며 펄쩍 뛰었다. 그렇게 재혼 건으로 부모님과 다투다가 나는 너무 화가 나서 집을 뛰쳐나왔다.

 

21. 언니네 집에서 일을 시작하다

 

나는 이어서 언니네를 찾아갔다. 언니는 나를 마땅치 않게 생각했지만 내가 혼자되었다는 소리를 듣자 그래도 가족의 정으로 동생 살 궁리를 함께 해주었다. 그 당시 형부는 외화벌이 사업소에서 일했기 때문에 그 어려운 시대에도 먹고 살 수 있었다. 나는 나중에 안정되면 아이들을 데리고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일단 형부의 일을 도우면서 지냈다.

 

형부네 업체는 일이 참 많았다. 비록 남들에 비해 형편은 좋아 보였지만 형부도 수익을 내고 배정된 돈을 상납해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큰 부담에 시달렸다. 우리가 하는 일은 중고 물품 여러 개를 가져다 재조립해서 완제품으로 만들어 중국에 파는 일이었다. 수지가 잘 안 맞아서 물건 사이에 골동품도 끼워서 팔기도 했다. 그렇게 1년을 지냈다. 나름 일에 적응했다 생각하는 와중에 일이 터졌다. 우리와 거래하던 중국 대방이 갑자기 연락 두절이 되어서 물건의 대금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당장 당자금 입금일이 다가오는데 만약에 입금을 못 하게 된다면 큰 봉변을 겪을 것이다. 그렇지만 북한 안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22. 형부 일을 해결하기 위해 중국으로 탈북하다

 

다들 고민하고 발만 동동 굴리는 데 나라도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형부에게 중국에 잠깐 가서 거래했던 대방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형부는 미쳤냐. 여자 혼자 어딜 가냐!”며 펄쩍 뛰었다. 그렇지만 며칠이 더 지나고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형부도 마지못해 허락했다. 그렇게 나는 탈북 아닌 탈북을 했다. 당면한 일만 제때 처리하고 오겠다고 넘어간 것이 그렇게 긴 여정이 될 줄을 당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관련기사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