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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지역 최초의 순교자, 소텔 선교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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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지역 최초의 순교자, 소텔 선교사(2)

한국기독역사의 발자취(6)
김승학 목사 논문 연재(6)- 소텔 선교사(2)

김승학목사(서재).jpg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소텔 선교사.jpg

소텔 선교사

(Chase C. Sawtell, 1881-1909)

 

 

목차

1. 서론

2. 소텔 선교사의 가정(家庭)

3. 소텔 가정의 신앙(信仰)

4. 소텔 선교사의 소명(召命)

5. 소텔 선교사의 성품(性品)

6. 소텔 선교사의 파송(派送)

7. 소텔 선교사의 사역(使役)

8. 소텔 선교사의 순교(殉敎)

9. 소텔 선교사의 부인, 캐더린

10. 캐더린 선교사의 특별한 공헌(貢獻)

11. 결론

 

 

4. 소텔 선교사의 소명(召命)

1880년대 말에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의 대부분은 구(舊)학파의 신학 경향을 그대로 가지고 있던 프린스턴 신학교와 시카고 맥코믹 신학교 출신들이었다. 구학파는 원죄를 인정하고 회심이나 중생이 하나님의 전적인 사역이라고 하는 은혜의 교리를 견고히 지키려 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칭의 교리를 굳게 붙잡고 있었다. 당시 뜨거운 전도 열정을 갖고 미국과 영국을 누비면서 사역하던 복음전도자 무디(D.L. Moody)는 칼빈주의 개혁신앙을 고수하던 미국 장로교회 구학파의 신앙유산을 공유하고 있었고, 당시 미국 청년들에게 선교사의 소명을 불어넣은 주의 종이었다. 따라서 선교 초기 한국에 입국한 선교사들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 파송된 선교사들, 선교를 위해 동역한 많은 사람들은 무디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99년 9월, 소텔은 네브라스카 주 소재 밸리뷰 대학에 입학했다. 그가 입학한 기독교 대학인 밸리뷰 대학교도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대학이었다. 밸리뷰 대학에서 소텔은 자치활동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로티-퍼스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대학 토론 클럽에서도 활동했다. 또한 1902년에는 운동에 관심을 갖고 미식 축구부에서 활동했다. 이처럼 소텔은 대학 시절 활발하게 친구들을 사귀며 리더십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소텔의 대학 시절 중 가장 중요한 활동은 YMCA에서였다. YMCA는 소텔에게 선교사적 소명과 비전을 심어준 공간이었다. 1890년대 말 미국 YMCA는 해외선교에 큰 관심을 갖고 깊이 동참하고 있었다. 소텔이 직접 작성한 선교사 지원서에 따르면 19세인 1900년부터 선교사가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기록됐다. 여러 문헌을 검토한 결과 소텔은 두 가지 이유로 해외 선교사로 지원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밸리뷰 YMCA에서 받은 소명이다. 또한, 1904년 모친인 제시(Jessi)의 죽음도 소텔에게 선교를 결심하게 한 큰 요인이었음이 지원서에 기록되어 있다.

 

소텔선교사 미식축구.jpg

1902년 당시 밸리뷰 대학의 풋볼 팀 사진. 1898년부터 1916년까지 7번이나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강팀이었다.

 

5. 소텔 선교사의 성품(性品)

소텔은 매사에 즐거운 마음으로 일했던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기쁜 마음으로 선교사역을 준비했을 것이며, 선교사로 파송 받은 한국에서도 열악한 환경을 인내하면서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사역을 잘 감당했을 것이다. 특히 소텔은 온화하고 친절한 성품을 갖고 있었다. 신학교를 다닐 때 학비를 벌기 위해 양로원에서 일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노인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무엇이든지 도와드려서 칭찬을 들었다. 이와 같은 그의 따뜻한 성품은 선교지에서 동료 선교사들을 대할 때도 잘 드러났다. 그는 대구선교부에 있던 선배 선교사들에게 호감을 주었으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소텔의 대학생활 모토는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는 것으로 이 생각은 선교사로 내한할 때도 동일했다. 그는 이 모토를 정할 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기억했을 것이다. 소텔은 이 모토를 늘 기억하면서 언제 어디서나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비전을 품고, 믿음으로 준비하고, 믿음으로 행동했을 것이다. 또한, 신장이 6피트(약 183cm)이며 갈색 눈에 코가 곧게 솟았고, 중간 크기의 입에 턱이 뾰족했던 그는 돋보이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내적인 품성과 외적인 모습을 가진 소텔 선교사는 늘 기쁘고 즐거운 성격을 가진 매력적인 청년이었다.

 

특히 1908년 안동선교부의 신설이 결정되었을 때 안의와 선교사는 자원하여 사역할 선교사를 찾았다. 이때 소텔 선교사는 스스로 안동선교부로 갈 것을 결심했다. 소텔 선교사는 대구선교부에 도착하여 어느 정도 환경에 익숙해질 즈음인 1년 후, 정말 떠나기 힘든 시간에 스스로 안동으로 떠날 것을 결심했던 것이다. 당시 대구 선교부에는 여러 명의 선교사가 사역하고 있었지만, 대구보다 열악하고 불확실한 땅인 안동에서 사역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단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소텔 선교사는 하나님의 일이라면 환경과 조건의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 편에 서는 결단의 사람이었다.

 

6. 소텔 선교사의 파송(派送)

1904년 5월, 밸리뷰 대학을 졸업한 소텔은 동년 9월 오마하 장로교 신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에 졸업하였다. 신학교 재학 시절 소텔은 3개 교회를 섬김으로써 목회자로서 필요한 자격을 갖추는 데 열심을 다했다. 목회 현장인 지역교회에서 목사로 임직을 받기 위한 과정을 잘 소화하고 훈련받은 소텔은 오마하 신학교를 졸업한 1907년, 네브라스카 대회 소속 베네치아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대학교 1학년 때인 1900년 이미 선교사 소명을 받은 소텔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있던 수많은 이방인들에게 예수님이 유일한 그리스도가 되심을 전하고 싶어 했다. 처음에 소텔은 남아메리카의 푸에르토리코에서 사역할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는 자신의 뜻과는 전혀 다른 한국으로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텔은 기쁜 마음으로 한국으로의 파송을 받아들였다. 오마하 신학교 친구인 레이놀즈에 따르면 1907년 6월 어느 날 오후, 레이놀즈가 소텔을 만났을 때 “어떻게 조선인을 전도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소텔은 주저하지 않고 웃으면서 “나는 조선인을 사랑하겠노라(I am going to love them)”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1907년 5월 29일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뉴욕 본부 사무실에서 열린 제10차 연례 신임 선교사 대회에서 소텔은 한국으로 파송 받은 신임 선교사 6가정(8명) 중의 한 선교사였다. 이후 소텔 선교사 부부는 내한하기 위해 오마하를 떠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여권을 발급받은 지 일주일이 지난 9월 24일, 소텔 선교사 부부는 다른 세 선교사와 함께 샌프란시스코 항구에서 출발하여 임지인 한국을 향했다. 약 22일간의 항해 끝에 10월 16일 마침내 한국에 도착했다. 소텔 선교사는 한국에 도착 이후 얼마 동안은 임지를 배정받지 못하고 있다가 미국 북장로교 대구선교부에 배속되어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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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9월 소텔이 한국에 오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작성한 여권신청서.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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