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23 (목)

  • 맑음속초10.2℃
  • 맑음8.9℃
  • 맑음철원8.6℃
  • 맑음동두천9.2℃
  • 맑음파주9.6℃
  • 맑음대관령7.8℃
  • 구름조금백령도7.5℃
  • 맑음북강릉10.0℃
  • 맑음강릉12.1℃
  • 맑음동해9.8℃
  • 연무서울9.6℃
  • 연무인천7.6℃
  • 맑음원주10.4℃
  • 흐림울릉도9.0℃
  • 맑음수원10.4℃
  • 맑음영월11.6℃
  • 맑음충주10.3℃
  • 맑음서산9.8℃
  • 구름많음울진10.7℃
  • 맑음청주11.4℃
  • 맑음대전12.0℃
  • 흐림추풍령5.8℃
  • 박무안동6.3℃
  • 흐림상주7.4℃
  • 흐림포항9.1℃
  • 맑음군산10.9℃
  • 흐림대구7.1℃
  • 구름조금전주10.7℃
  • 비울산8.0℃
  • 박무창원6.8℃
  • 구름많음광주10.8℃
  • 흐림부산10.1℃
  • 흐림통영8.9℃
  • 구름조금목포7.1℃
  • 흐림여수9.5℃
  • 구름조금흑산도8.9℃
  • 흐림완도9.9℃
  • 맑음고창10.7℃
  • 흐림순천7.9℃
  • 맑음홍성(예)9.9℃
  • 흐림제주11.2℃
  • 흐림고산10.8℃
  • 흐림성산12.4℃
  • 흐림서귀포14.2℃
  • 흐림진주10.1℃
  • 구름조금강화8.6℃
  • 맑음양평11.4℃
  • 맑음이천10.7℃
  • 맑음인제11.0℃
  • 맑음홍천10.8℃
  • 맑음태백9.0℃
  • 맑음정선군11.9℃
  • 맑음제천10.6℃
  • 구름조금보은9.3℃
  • 맑음천안11.1℃
  • 맑음보령11.0℃
  • 맑음부여12.6℃
  • 흐림금산7.5℃
  • 맑음부안10.0℃
  • 흐림임실8.6℃
  • 구름조금정읍9.6℃
  • 흐림남원8.0℃
  • 흐림장수6.8℃
  • 구름조금고창군9.1℃
  • 구름조금영광군9.0℃
  • 흐림김해시7.9℃
  • 흐림순창군9.3℃
  • 흐림북창원7.2℃
  • 흐림양산시10.3℃
  • 흐림보성군10.5℃
  • 흐림강진군9.4℃
  • 흐림장흥8.9℃
  • 흐림해남10.3℃
  • 흐림고흥9.2℃
  • 흐림의령군7.5℃
  • 흐림함양군11.9℃
  • 흐림광양시10.7℃
  • 구름조금진도군8.7℃
  • 흐림봉화8.1℃
  • 흐림영주8.2℃
  • 흐림문경6.8℃
  • 흐림청송군7.0℃
  • 흐림영덕9.7℃
  • 흐림의성6.1℃
  • 흐림구미7.3℃
  • 흐림영천7.1℃
  • 흐림경주시8.0℃
  • 흐림거창9.3℃
  • 흐림합천9.3℃
  • 흐림밀양9.1℃
  • 흐림산청9.4℃
  • 흐림거제8.0℃
  • 흐림남해9.0℃
기상청 제공
김승학 목사의 논문원문(6) - 안동지역 최초의 순교자, 소텔 선교사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승학 목사의 논문원문(6) - 안동지역 최초의 순교자, 소텔 선교사

한국기독역사의 발자취(6)
김승학 목사 논문 연재(6)
안동지역 최초의 순교자, 소텔 선교사

안동지역 최초의 순교자, 소텔 선교사

 

김승학목사(서재).jpg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소텔 선교사.jpg

소텔 선교사

Chase C. Sawtell, 1881-1909)

 

남북 전쟁이 끝났을 때 미국은 분열된 상태였다. 1865년부터 1918년까지의 미국의 역사는 남북 전쟁 후에 미국 재건이 시작되어, 산업화가 진전된 시대였다. 사회의 급격한 변화로 많은 노동조합이 탄생했고 파업이 이어졌다. 특히 약 50여 년 동안(1865~1918) 유럽을 중심으로 다른 대륙에서 2,750만 명이나 되는 이민자가 미국으로 몰려들어 저렴한 노동력을 제공했고, 캘리포니아 주()와 같이 개발되지 않은 지역에 다양한 지역사회가 형성됐다. 대부분의 인디언 부족은 작은 거류지로 이주 당했고, 백인 농장주와 목장주의 소유가 되었다. 공장 노동자는 학대와 폭력에 시달렸고, 그것에 수반하여 노동 운동을 낳게 되었다.

 

 이러한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소텔(史佑大, Chase Cranford Sawtell) 선교사는 188119, 네브라스카(Nebraska) () 소재 티케이마(Tekamah)에서 출생했다. 그는 환경이 좋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의 종()으로 불러 선교사로 보내시려고 했을 때 소텔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무조건 순종했다. 네브라스카 주의 밸리뷰(Bellevue) 대학을 졸업한 소텔은 오마하(Omaha) 신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 졸업했다. 그 해 목사 안수(按手)를 받고 파송 받아 19071016일 한국에 도착했다. 소텔 선교사 부부는 처음에 대구선교부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여러 면에서 뛰어난 재목이었던 그는 대구선교부에 있던 선교사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1908년 안동선교부가 신설되었을 때 소텔 선교사는 자원(自願)하여 대구보다 열악한 환경인 안동 땅으로 이사했다. 안동선교부의 초대 주재 선교사가 된 그는 헌신했다. 특히 19091116일 순교하기 전 까지 1년 동안 그를 통해 안동 땅에 의미 있는 전도와 새신자 양육이 이루어졌다. 복음전도의 전형적인 패러다임(paradigm)인 양육, 파송, 전도를 통해 안동지역 부흥의 기초를 마련했다. 하지만 소텔 선교사는 풍토병인 장티푸스에 걸려 28세의 젊은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소텔 선교사는 무려 109년 동안 한국교회 속에서 잃어버린 선교사였다. 이 글을 통해 우리의 뇌리 속에서 잊혀진 소텔 선교사의 삶과 사역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소텔 선교사의 가정(家庭)

소텔 선교사는 188119, 미국 네브라스카(Nebraska) () 소재 티케이마(Tekamah)에서 출생했다. 소텔의 아버지는 웨스트 버지니아(West Virginia) 주에서 출생한 해리 소텔(Harry C. Sawtell)로 그는 세 번 결혼했는데, 소텔 선교사는 두 번째로 결혼한 제시 소텔(Jessie D. Sawtell)에 의해 출생했다. 제시 소텔은 소텔 선교사와 리트를 낳았다. 소텔 선교사의 동생인 리트는 몬타나(Montana) 주 아나콘다 시에서 척추 전문의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텔 선교사의 부친은 1885, 티케이마 북쪽으로 약 13Km 떨어진 실버 크릭(Silver Creek)으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소텔의 부친은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가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하이오(Ohio) 주의 댄빌(Danville)로 이사해 살기도 했다.

 

 9세인 1900, 소텔의 가정은 1870년에 거주한 적이 있던 아이오와(Iowa) 주 드모아 카운티 덴빌에서 살았다. 이 때 소텔 선교사 부친의 직업은 여전히 농부였는데, 상대적으로 다른 농부에 비해 가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세기 미국의 농업은 현저한 발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토지의 피폐, 자연 재해, 자급자족 비율 감소와 연방 정부의 적절한 법적 보호와 지원의 부족 등으로 농부들의 삶은 지처 있었다. 일반적으로 19세기 미국 소작농의 대다수는 빚에 쪼들렸고, 유일한 탈출구는 수확량을 높이 과잉 생산이었으나 과잉 생산은 판매 가격 하락과 소득 감소로 이어졌고, 그 결과 토지는 피폐하고 토지 소유자나 소작농 모두가 가난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따라서 다른 농부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빈곤했던 소텔의 가정은 가난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소텔 가정은 다시 네브라스카 주의 오마하(Omaha)로 이주했고, 그 이후에는 오마하 인근에서 계속 거주했다. 소텔 선교사가 한국으로 오기 전인 190735일에 작성한 미국 장로교 해외 선교부에 제출한 선교사 지원서에 따르면 그의 주소는 오마하 노스(North) 213303번지였다. 따라서 성장한 이후 소텔 생활의 중심 무대는 네브라스카 주의 오마하라고 할 수 있다. 네브라스카 주 티케이마에서 출생한 소텔 선교사는 웨스트 버지니아, 몬타나, 오하이오, 아이오와 주를 전전하다가 오마하에 정착하였던 것이다. 소텔 가정은 믿음의 가정이었다. 비교적 자주 이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착한 지역에 있는 교회에 등록하고 출석했기 때문이다.

  

2. 소텔 가정의 신앙(信仰)

대구와 경북지역에서 선교 사역을 감당한 선교사의 삶과 사역을 추적하여 연구하고 있는 손상웅 목사에 의하면 소텔이 최초로 섬긴 교회는 네브라스카 주의 티케이마 교회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것이다. 여렸을 때 소텔은 여러 주()를 옮겨 다니며 생활했다. 4살 때인 1885, 소텔의 가정은 티케이마에서 실버 크릭(Silver Creek)으로 이주했다. 소텔은 시골의 작은 교회인 실버 크릭(Silver Creek) 감리 교회에서 189711, 낙스 본디(Knox Bonde)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당시 실버 크릭에는 장로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가정은 감리교회를 다닐 수밖에 없었다.

 

 소텔의 누나도 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아 소텔 가정이 실버 크릭으로 이사 온 이후 온 가족이 모두 실버 크릭교회에 출석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1861111, 공식적으로 오마하 제2장로교회(The Second Presbyterian Church of Omaha City)로 명명되었다가 18884, 오마하 제1장로교회(The First Presbyterian Church of Omaha)로 변경되었다. 따라서 소텔이 오마하로 이사해 교회를 정하고 등록할 당시는 교회 이름을 변경하기 이전(以前)이었기 때문에 오마하 제2장로교회가 옳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오마하에는 1867년에 설립된 또 다른 교회가 있었다. 이름은 오마하 중앙장로교회(Central Presbyterian Church)로 당시 해외선교를 특별히 강조하는 교회였다. 1장로교회와 중앙장로교회는 오마하의 대표적인 교회로 교회가 설립된 이래 오마하 지역 교회들의 중심교회였다. 그러나 두 교회는 1950년대 최고로 성장했다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1917311일에 준공된 오마하 제1 장로교회의 모습으로 1959년엔 교회 역사상 최고로 2188명이 등록하고 있었다. 타개책을 모색하던 두 교회는 2014년 합병(合倂)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하 내용은 논문원문 첨부파일 참조)

 

 

편집부 www.gbhana.com

관련기사

첨부파일 다운로드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