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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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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6)

한국기독역사의 발자취(7)
김승학 목사의 논문 연재(7) - 임학수 목사(6)

김승학목사(서재).jpg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임학수 목사.jpg

 

 

목차

서론

1. 임학수, 믿음의 조상이 되다

 ……………………………

15. 사경회 강사(講師)로 활동하다

16. 지역의 중심(中心) 교회를 섬기다

17.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지 않다

18. 최고의 한학자(漢學者)가 되다

19. 은퇴 후에도 목회를 계속하다

20. 후학을 위해 매진하다

결론

 

 

15. 사경회 강사(講師)로 활동하다

 

임학수 목사는 안동교회 시무 동안 여러 교회로부터 사경회 강사로 요청을 받았다. 19291121일 안동교회 당회는 임학수 목사에 대한 오대교회의 사경회 강사 요청을 허락했다. 또한, 19301월에는 의일교회 사경회 강사로, 1931113일부터 18일까지는 아곡교회, 동년 915일부터는 서사교회, 1932년 음력 정월부터 1주일 동안은 춘양교회의 부흥사경회 강사 요청이 있었고 당회는 이를 허락했다.

 

안동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고 주일학교를 다닌 경안노회 배흥직 공로목사는 임학수 목사님이 친근감 있는 매력적인 목소리를 갖고 있었고, 그의 음성은 맑고 분명하여 알아듣기 쉬웠다고 기억한다. 임학수 목사는 설교자가 가져야 할 자질들을 잘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임학수 목사는 전형적인 부흥강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성령 충만했다. 회중들은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웃고, 눈물을 흘렸다. 그는 언변도 뛰어났지만 인품이 그의 설교에 묻어났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학을 전공하고 한학 선생까지 한 그의 지식은 누구보다 성경을 잘 이해하게 했고, 또한 잘 풀어 설교할 능력을 갖추게 했던 것이다.

 

따라서 임학수 목사는 당시 경안노회 경내의 교회들에게 1주일 가까이 진행된 여러 교회의 사경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말씀의 종으로 사명을 잘 감당했다.

 

16. 지역의 중심(中心) 교회를 섬기다

 

일제는 1937년 중국 대륙을 침략했으며,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해 국가를 전시 체제로 바꾸었다. 이러한 시국에서 일제는 지역사회 중심 교회의 담임목사가 자신에게 우호적인 사람이기를 원했을 것이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임학수 목사는 19393월 사임했으며, 경안노회는 515일 안동교회 사임을 허락했다. 안동교회 80년사는 임학수 목사의 사임이 일제 말엽의 기독교 박해에 따른 것으로 적고 있다. 그가 안동교회를 떠날 때 모든 성도는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임학수 목사가 전도, 교육과 봉사로 교회를 부흥시켰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2층 석조 예배당을 건축한 헌신을 성도들은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학수 목사는 여러 지역의 중심 교회를 섬기며 사역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안동교회를 사임한 후 1940, 임학수 목사는 영양지역의 중심 교회인 영양교회를 섬겼으며, 풍기로 임지를 옮겨 1941년부터 1946년까지 영주의 모교회인 풍기교회(현 풍기성내교회)를 담임했다. 풍기교회를 섬기면서 1년 동안은 예천의 중심 교회인 예천교회를 겸하여 섬겼다.

    

또 임학수 목사는 194612월부터 예천교회를 섬기면서 194710월부터 36개월 동안 예천 상락교회를 동시에 담임으로 시무했다. 임학수 목사가 예천교회와 상락교회를 왕래하면서 동시에 시무할 수 있었던 이유는, 1938년에 신사참배문제로 평양신학교가 폐교되면서 교역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임학수 목사가 각 지역 중심 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했던 시기는 이처럼 어렵고 힘든 기간이었다.

 

그러나 일제 말엽, 교회들이 문을 닫아야 하는 위기 속에서 그는 교회를 지키려고 부단히 헌신했다. 또한, 광복과 함께 찾아온 극심한 혼란 속에서 무너진 교회를 세워나가야 할 사명이 그에게 있었다. 예천교회를 섬기던 1947, 임학수 목사는 미군정 하에서 정부 수립을 위한 예천군 건국준비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사회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예천지역의 치안과 행정을 맡아 그 책임을 잘 감당했다. 그는 국가·사회적 현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행동하는 신앙인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임학수 목사는 일제 말엽과 광복이라는 격변기 속에서도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교회를 지키고 보수(補修)한 신실한 주의 종이었다.

 

17.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지 않다

 

일제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기독교를 만들기 위해 19399월 신의주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8회 총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연맹의 결성을 강요했다. 총회 직후, 각 노회는 지역별 노회지맹을 결성하여 교회의 모든 조직을 국민정신총동원 운동의 추진을 위한 조직으로 탈바꿈시켰다. 경안노회는 19391212, 국민정신총동원 결성식을 강압적으로 가졌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임학수 목사는 19401217, 경안노회장으로 취임했다. 일제는 194012월 경안노회 시에도 궁성요배, 출전 명령과 장사를 위하여 황국서사낭송, 천황페하 만세 삼창을 하고, 국방헌금과 교회 안에 신사(神祠)를 봉안하는 것을 결의하게 했다. 이러한 강압적인 일제의 기독교 탄압정책은 1945년 해방될 때까지 극에 달했다. 손녀인 임순오 권사는 조부인 임 목사가 당시 경안노회장이었기 때문에 일제에 형식적으로 협조했다고 하면서, 8·15 해방을 맞을 때 임학수 목사는 감옥에 있었다고 증언했다. 일제로부터 해방되기 바로 직전 임학수 목사가 감옥에 간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투옥 이유가 일제의 눈 밖에 났기 때문임에는 틀림이 없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신사참배, 황국신민서사 암송, 지원병제도 등과 함께 19402월부터 창씨개명을 시행했다. 그러나 임학수 목사는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당시 일제가 창씨개명을 위해 가한 압박은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비록 일제 말엽 어떤 이유로든 임학수 목사가 일제의 정책에 협력한 것은 분명한 오점이지만,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일제의 강압을 버티며 해방을 맞이했던 것은 뒤늦게라도 올바르게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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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19402월부터 창씨개명을 시행하고,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학교에 갈 수도 없고 식량 배급도 받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강압 속에서도 애국 인사들은 끝내 이를 거부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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