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금)

  • 맑음속초17.9℃
  • 구름조금22.0℃
  • 구름조금철원21.5℃
  • 구름조금동두천22.3℃
  • 구름많음파주20.9℃
  • 맑음대관령20.7℃
  • 맑음춘천23.1℃
  • 구름많음백령도15.4℃
  • 맑음북강릉24.1℃
  • 맑음강릉25.6℃
  • 맑음동해22.7℃
  • 연무서울21.8℃
  • 구름조금인천18.5℃
  • 구름조금원주21.8℃
  • 황사울릉도18.6℃
  • 구름조금수원22.1℃
  • 구름조금영월22.3℃
  • 구름많음충주22.2℃
  • 구름많음서산20.0℃
  • 맑음울진19.9℃
  • 구름많음청주22.6℃
  • 맑음대전23.4℃
  • 맑음추풍령23.1℃
  • 맑음안동23.6℃
  • 맑음상주24.7℃
  • 황사포항25.5℃
  • 구름조금군산21.0℃
  • 황사대구24.9℃
  • 맑음전주23.9℃
  • 황사울산25.5℃
  • 황사창원23.6℃
  • 맑음광주22.9℃
  • 황사부산22.3℃
  • 구름조금통영19.3℃
  • 구름많음목포21.6℃
  • 황사여수21.1℃
  • 구름많음흑산도20.6℃
  • 구름많음완도23.4℃
  • 구름많음고창23.0℃
  • 구름많음순천24.0℃
  • 구름많음홍성(예)21.9℃
  • 구름조금21.4℃
  • 황사제주20.3℃
  • 구름많음고산20.8℃
  • 구름많음성산22.1℃
  • 황사서귀포20.6℃
  • 구름조금진주23.7℃
  • 구름조금강화19.5℃
  • 구름조금양평20.4℃
  • 구름많음이천22.5℃
  • 맑음인제23.0℃
  • 구름조금홍천23.1℃
  • 맑음태백21.8℃
  • 맑음정선군24.9℃
  • 맑음제천21.7℃
  • 구름조금보은22.6℃
  • 구름많음천안22.2℃
  • 구름조금보령20.3℃
  • 맑음부여22.2℃
  • 구름조금금산24.5℃
  • 구름조금22.8℃
  • 맑음부안22.1℃
  • 맑음임실24.0℃
  • 구름조금정읍24.4℃
  • 맑음남원24.0℃
  • 맑음장수23.3℃
  • 구름조금고창군24.2℃
  • 구름많음영광군23.4℃
  • 구름조금김해시25.5℃
  • 구름조금순창군24.0℃
  • 구름조금북창원26.5℃
  • 맑음양산시26.6℃
  • 구름많음보성군23.2℃
  • 구름조금강진군24.0℃
  • 구름조금장흥24.8℃
  • 구름많음해남24.6℃
  • 구름조금고흥24.5℃
  • 구름조금의령군25.8℃
  • 맑음함양군26.4℃
  • 구름많음광양시23.9℃
  • 구름많음진도군23.4℃
  • 맑음봉화23.0℃
  • 맑음영주23.5℃
  • 구름조금문경24.6℃
  • 맑음청송군25.0℃
  • 맑음영덕25.4℃
  • 맑음의성25.1℃
  • 맑음구미26.2℃
  • 맑음영천25.5℃
  • 맑음경주시27.0℃
  • 맑음거창24.6℃
  • 맑음합천26.2℃
  • 맑음밀양25.6℃
  • 구름조금산청25.3℃
  • 구름조금거제22.8℃
  • 구름조금남해22.4℃
  • 구름조금25.0℃
기상청 제공
나의 출애굽기(15)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정우 목사 칼럼

나의 출애굽기(15)

나의 출애굽기(15)

 

드보라

 

 

40. 조국(북한)에 대한 배신감이 들다.

 

식사를 하고 2~3시간 정도 흘렀을까. 뱃속이 엉망이 되었다. 계속 화장실에서 설사했다. 눈앞이 흐려지고 의식을 붙잡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도 먹어야 하니 식사시간에 나오는 국물을 계속 먹었다. 그렇게 먹고 설사를 하기를 3일 정도 지나니 항문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 날도 설사가 나서 화장실에 갔는데 너무 어지러운 나머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겨우 눈을 떴더니 사람들이 이년이 아직 안 죽었다하고 수군거렸다. 알고 보니 화장실에서 쓰러진 나를 사람들이 발견하고 끌고 왔지만 온종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간수는 내가 깨어난 것을 보더니 이 간나 뒤지지 않고 살았네. 명도 길다.” 하고는 별일 없었다는 듯이 지나쳤다.

 

간신히 깨어난 나는 내 처지를 곰곰이 생각했다. 너무나 억울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체포와 북송, 조사와 고문을 겪으며 정신이 없었는데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니 너무 섭섭했다. 사람이 죽을 지경인데 아무런 약도 쓰지 않고 방치했을 뿐 아니라 깨어난 사람에게 명이 길다며 조롱하며 지나가는 간부의 모습에서 조국이 나를 심하게 천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깨달아졌다.

 

비록 탈북은 했지만 내가 조국이 싫어서 강을 건넜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중국 시골 깡촌에 있었지만, 사람들이 북한의 실정을 지적하고 김정일을 욕할 때 앞장서서 김정일 장군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위해 애쓰시는지 아느냐며 변호했고, 어머니 조국을 그리워했다. 그런데 그렇게 내가 악을 쓰며 변호했던 조국은 내가 죽어갈 때 돌보는 시늉도 하지 않았고 약 한 주먹 주지 않았다. 원래 배신감이 더 억울하게 다가오는 것일까? 서러움과 억울함이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올랐다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내가 어떻게든 살아야겠다. 살아서 이 나라를 고발해야겠다.’ 라는 생각이 뼛속까지 사무쳤다.

 

41. 감옥 탈출을 결심하다.

 

두려움에 떨다가 갑자기 분노와 고발의 의지가 생기자 이상하게 담대해졌다.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탈출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 당시 중국에서 공안들의 추적에 걸려 집에서 잡혀 온 탈북 여자는 보통 노동단련대 형을 받았지만, 한국행을 하다가 걸리면 예외 없이 교화소행이었다. 기간도 최소 4년 이상이었다. 열악한 감옥의 위생과 식사, 심한 강제 노동, 악화된 건강상태 등을 생각할 때 4년 징역은 거의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한국행을 하다가 붙잡힌 나는 당연히 교화소행일 것이고, 이 몸 상태로 교화소에 가면 죽음이 가깝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했다. 살려면 도망쳐야 했다. 어떻게 도망칠 수 있을까? 그 죽음의 장소에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있었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관련기사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