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학 목사의 논문 원문(2)- 안동이 배출한 첫 해외선교사, 이대영 목사 > 뉴스 | 경북하나신문 하나굿뉴스

기사상세페이지

김승학 목사의 논문 원문(2)- 안동이 배출한 첫 해외선교사, 이대영 목사

편집부  /  기사입력 2018.10.09 12:48

SNS 공유하기

fa tw gp
  • ba
  • ks url
    한국기독역사의 발자취(2)
    김승학 목사의 논문 연재(2)
    안동이 배출한 첫 해외선교사, 이대영 목사

    안동이 배출한 첫 해외선교사, 이대영 목사

     

     

    김승학목사(서재).jpg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이대영 목사.jpg

    이 대 영 목사

    (李大榮, 1887~1968)

     

    1887년 경상북도 예천군에서 출생한 이대영 목사는 시대를 앞서간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 믿기 힘든 유학이 강한 마을과 가정에서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도 혹독했다. 그는 더 이상 고향 땅에서 살지 못하고 객지로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일정한 훈련을 거친 후 하나님께서는 그를 고향으로 보내셨고, 뛰어난 복음전파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그 후 전도인, 조사로 활동하면서 평양신학교의 신학교육을 마치고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시무하며 기독청년면려회와 주일학교를 통해 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갈 뿐 아니라 지역복음화와 교회 부흥을 선도했다. 그가 시무할 때 시작된 기독청년면려회 운동은 3·1운동의 실패로 실의에 빠져있던 이 땅의 청년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갖고 미래를 준비하게 만들었다. 총회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안동을 떠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파송 선교사로 1922613일 중국 래양에 도착한 이대영은 그 땅에 머무는 동안 중국인들과 함께 중국인처럼 살았다. 1949년 중국의 공산화로 인해 선교를 포기하고 1955년에 완전히 철수할 때 까지 이대영 목사는 33년 동안 중국인을 동족으로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함으로서 산동반도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산동반도에 거주하고 있는 재중동포들을 잘 돌보았던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19544월 산동성에서의 완전 출수 후 오직 하나님 나라, 교회와 총회를 위해 헌신하다가 1968년 하나님이 부르심을 받은 믿음의 선배이다.

          

    1. 이대영, 금당실 마을에서 출생하다

     

     백사(白沙) 이항복의 후손인 이대영(李大榮)1887423,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에서 이유성(李裕成)과 김도혜(金道徯)3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이대영이 출생한 마을은 금당실로 불러졌는데 선교사가 동네에 와서 복음을 전하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했다. 예천 땅을 처음 밟은 선교사는 부해리(傅海利, Henry Munro Bruen, 1874~1959)로 조사 이희봉과 함께 1907년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7년은 평양에서 시작한 대부흥으로 전국에 뜨겁게 부흥의 열기가 확산되고 있던 때이다. 따라서 인근지역인 안동, 영주, 문경, 상주, 의성에 선교사들과 조사들의 활동으로 이미 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있었다. 이러한 영적 분위기에 따라 예천 최초의 신자인 나만기(羅萬基)에 의해 당교회가 시작되었다.

     

     특히 금곡(금당실)교회의 시작은 이러하다. 1893년 낙향해 금당실에 머물 던 이유직(李裕稙)은 양주 목사를 한 형 이유인(李裕寅)을 추모하며 99칸의 한옥 저택을 지어 생활했다. 하지만 동학혁명에 가담해 도망하던 이유직은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고, 그 때 복음을 전해 들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유교전통이 유독 강하고 불교 중심의 마을이었던 금당실은 복음이 전파되기 대단히 어려웠다. 따라서 이유직은 때를 기다리며 1899년 전후, 자신의 집에서 은밀하게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금곡교회의 첫 출발로 알려져 있다. 금곡교회는 선교사의 지도를 받으며 상곡교회라는 공식 교회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금곡교회는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교회가 아니라 선교사가 직접 복음을 전하기 전에 쪽 복음과 전도지를 읽고 복음을 접한 평신도에 의해 세워진 자생적 교회인 것이다. 그 후 점차 예배드리는 수가 늘어가 교회는 계속 부흥하게 되었다. 예천지역 초기 3대 교회는 상곡교회, 괴당교회, 그리고 상락교회라고 할 수 있다.

     

     이대영은 괴당교회가 설립될 당시인 1907년 경, 복음을 소개받고 믿음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부모의 반대와 금당실의 영적 분위기에 의해 자신이 예수 믿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낼 수 없었다. 이대영 목사는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자신의 고집 때문임을 배태준 장로에게 고백한 적이 있다. “내가 처음 예수 믿을 때에 우리 집안에서 양반 가정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하고 못 믿게 하는 것을 참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기고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이심을 믿고 죽기로 하고 고집을 피워서 된 것이고, 일제 말엽 신사참배 문제로 그렇고 극성을 피울 때에도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신앙의 정절을 지킨 것도 내 고집 때문이었고.” 한번은 아버지가 이대영에게 소의 여물인 짚을 자르는 작두에 목을 대라고 해서 그대로 대었더니 아버지는 결국 자식을 포기하는 길을 선택했다고도 한다. 이대영은 부모의 반대로 고향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가족과 함께 1910년 연일군 흥해면으로 이사하였다. 흥해에 도착한 이대영은 가족과 함께 흥해교회에 출석하면서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특히 이곳에서 선교사로부터 신앙훈련과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전통적인 양반가문의 후예인 이대영은 비록 가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복음사역을 위해 철저히 준비시키셨던 것이다. 비록 예수 믿는다고 집에서 버림을 받아 객지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품으셨고, 훗날 당신의 필요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 가셨고, 결국 하나님의 때에 한국 땅에서 중국 땅에서 복음전파의 귀한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이다.

      

    2. 이대영, 부해리 선교사를 만나다

     

     안동을 포한한 경북북부지역에 복음이 처음으로 전해진 것은 1893년으로 당시 부산선교부에 있던 배위량(William M. Baird) 선교사가 부산을 출발하여 밀양, 청도, 대구, 상주, 안동, 영천, 울산을 순회하며 전도하고 부산으로 귀환한 것이다. 이후 19023월에 대구선교부에 있던 안의와(James E. Adams) 선교사가 안동지역을 방문하여 복음을 열심히 전했다. “두 차례의 봄철 선교여행을 다녀온 후 곧 3차 여행을 시작했다. 1차는 3월과 4월에 경상도 북부지방을 다녔다. 이들 지방은 선교사들이 전혀 방문한 적이 없는 곳이었다. 이들 9명의 관리들을 만나고 많은 전도 서적을 팔았으며 장터에서 전도를 했다. 1개월 이상 장터를 돌며 전도하고, 1천 권 이상의 책을 팔았다.” 안의와 선교사의 안동 방문의 결과 안동지역을 포함한 경북북부 지방은 선교사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다. 안의와 선교사 안동 방문 후 1903년 봄 대구선교부의 방위렴(William M. Barrett) 선교사와 부해리 선교사가 안동을 직접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부해리 선교사는 1892년 미국 장로교 기숙학교인 블레어 홀 아카데미(Blair Hall Academy)에서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22세 때인 1896년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했다. 그 후 부친과 조부가 졸업한 뉴욕의 유니언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공부를 마친 후 1899년 졸업하고 그해 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어 미국 북장로교로 부터 한국 선교사로 파송 받아 18991026일 대구에 도착하여 초창기 대구·경북 지역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1년 일제의 탄압으로 추방되기 까지 40여 년 한국선교에 평생을 바친 부해리 선교사는 경북 북부지역에 복음을 전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부해리 선교사를 포함한 여러 선교사들의 헌신의 결과, 1903년 미국 북장로교 연회보고에 의하면 경북·대구 지역 7개 고을에서 12명의 교인이 생겨났고, 1904년 보고에는 12개 고을에서 6개 교회에 7명의 학습교인, 33명의 원입교인이 생겨났으며, 1905년 보고에는 20개 고을에 8개 교회에 2명의 세례교인, 19명의 학습교인, 79명의 원입교인이 생겨났다. 복음의 불모지와 다름없던 경북북부 지방에 선교사들의 헌신으로 복음의 씨앗이 뿌려짐으로써 복음화의 불씨가 발아(發芽)할 날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영적 분위기 가운데서 이대영의 회심에 관한 이야기는 두 가지 설로 나뉘어진다. 우선 박용규는 1907년 경, 이대영은 나만기에 의해 복음을 소개받고 예수를 믿게 된 것으로 추측한다. 이미 예천에 존재했던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고, 그가 복음을 전달받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박용규의 추측처럼 1900년대 초 예천의 3대 교회 중의 하나인 괴당교회(槐堂敎會)를 설립한 나만기에 의해 복음을 전해 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여러 자료들은 이대영이 부해리 선교사에 의해 예수를 믿게 되었음을 증거한다. 이대영은 한국교회의 최초의 대부흥이 일어난 1907년 당시 대구선교부 소속 선교사로 있던 부해리 선교사에 의해 복음을 전달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대영 목사가 1956941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할 당시 회계로 수고한 배태준 장로도 이대영이 20세 때 부해리 선교사를 만나 예수를 믿게 되었음을 밝힌 적이 있다고 그의 자서전에서 기록한다. “이대영 목사는 부해리 선교사에게서 복음을 들었으며 신앙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고집을 가지고 추진하였기에 중국 산동성에서도 중국인 목사나 외국인 선교사들에 비해 큰 부흥을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여러 자료들은 이대영이 부해리 선교사를 통해 전도를 받았음을 증거하고 있다. 대구·경북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부해리 선교사와의 역사적 만남으로 이대영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했으며, 이후 전도인, 조사를 거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 임직한 이후 한국교회와 중국선교의 거룩하고 위대한 한 도구가 되었던 것이었다.

     

    (이하 내용은 논문원문 첨부파일 참조)

     

    편집부 www.gbhana.com

     

     

    backward top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