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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애국자·인간 박상동 목사(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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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특집

목사·애국자·인간 박상동 목사(4)

한국기독역사의 발자취(4)
김승학 목사의 논문 연재(4)-박상동 목사(4)

김승학목사(서재).jpg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박상동 목사.jpg

박상동 목사 (朴尙東, 1894~1949)

 

2) 안동교회의 사역
⑤ 평신도 사역

평신도를 양육하는 사역에 박상동 목사는 새로운 시도를 감행했다. 그것은 ‘제1회 경안노회 주일학교대회’다. 경안노회의 첫 번째 교사대회는 1928년 9월 19일부터 26일까지 8일 동안 안동교회에서 있었다. 여기에는 경안노회 경내 지교회의 아동부, 소년소녀부(오늘날 중고등부), 청년부, 남·여장년부, 여전도회 교사 및 교역자 등 모든 교사가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다(정회원 1,300명, 방청객 1,000명, 도합 2,300여 명 참석). 주일학교 상황보고서에 따르면, 주일학교대회가 성료된 바로 다음 해인 1929년에는 주일학교 수가 104처, 장년 3,729명, 유년 2,301, 직원 수 808명에 이르게 되었다. 주일학교교사대회가 당시에 얼마나 필요한 것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상동 목사의 평신도를 위한 배려는 타지에서 오는 교인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담임목사 사택을 제공한 것에서도 발견된다. 또한, 박상동 목사는 평신도도 예배를 인도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평신도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섬김과 봉사를 이끌었다. 이것은 당시 목회상황에 비추어 보면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⑥ 다음세대 사역
박상동 목사는 주일학교를 통한 다음세대의 신앙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박상동 목사가 시무하던 1927년 5월 1일, 처음으로 어린이 주일에 유아세례를 베풀었음을 안동교회 80년사는 언급한다. 또한, 주일학교 구조를 전면적으로 개편하여 오늘날의 교회학교 조직과 거의 동일한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주일학교 조직을 교장은 담임목사, 부장은 평신도로 개편하고 조직을 새롭게 정비함으로써 주일학교 발전에 새로운 기틀을 놓았다.

 

하지만 하계아동성경학교(오늘날 여름성경학교)의 교장은 여전히 평신도가 교장을 맡게 함으로 담임목사가 모든 사역을 독점하지 않고 평신도와 함께 동역하는 성숙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주일학교를 거친 청소년의 신앙 교육을 위하여 오늘날의 중·고등부에 해당하는 안동기독소녀회를 창립하여 어린이와 장년 신앙교육 사이에 끼여 방치되었던 청소년의 신앙교육을 교회가 박차를 가할 수 있게 하였다. 주일학교의 조직 정비와 중·고등부의 신설은 다음세대를 발달단계에 맞춰 교육시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혜안이라고 할 수 있다.

 

⑦ 주일성수 강조
더욱이 박상동 목사는 철저하게 주일을 성수하는 신앙풍토를 조성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당시(1928년) 보통학교에서 주일에 학생들을 등교시키는 것을 분명하게 반대함으로써 장년과 다음세대 모두에게 주일성수를 강조하였다.

 

⑧ 미래를 준비하는 사역
박상동 목사는 미래를 위한 준비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1937년 4월 준공된 이래 지금도 주(主) 예배실로 사용하고 있는 2층 석조건물인 예배당 신축을 위한 기성회가 조직되어 1926년 9월 19일 첫 번째 회의를 갖기도 하였다.

 

3) 오사카교회 사역
① 교포의 삶에 관심

박상동 목사는 1928년 안동교회를 사임하고 일본에 전도목사로 파송 받았다. 박상동 목사가 일본으로 간 이유는 교포들이 일본인들에게 천대를 받고 비참한 생활고를 겪으면서 심한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상동 목사가 일본에서 공부한 후에 비록 귀국하여 안동교회를 섬기고 있었다 하더라도 당시 재일교포 선교를 위해 박상동 목사는 최선의 대안이었고, 일본에서의 목회가 어려움을 알고도 박상동 목사는 순종하며 출발하였다.

 

오사카에 도착한 박상동 목사는 목회의 장(場)을 넓혀 교포의 삶에 직접 개입하였다. 노동자의 인권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인간의 존엄성을 역설함으로써 기업가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지만 일부 기업가들이 교포의 인권을 무시하자 경시청과 노동청을 방문하여 교포 노동자의 권익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박상동 목사가 일경의 요시찰 인물이 되게 했다. 박상동 목사는 유학생 시절 개척한 오사카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② 전도 사역
박상동 목사는 비록 담임목사는 아니지만 순회목사로서 오사카 교회의 제직회 회장·공동의회 회장으로 오사카 교회의 사역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특히 장년들의 성경공부와 주일학교의 변화, 그리고 부인전도대의 활성화를 통해 오사카교회는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또한, 박상동 목사는 춘계전도, 하계전도, 하기천막전도대회, 신도배가운동 등 전도를 통해 교회부흥에 힘썼을 뿐 아니라 봄에는 야외예배를 실시하여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교포 성도의 교제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사역 등을 통해 오사카 교회는 많은 성장을 가져올 수 있었다.

 

4) 나고야교회의 사역
① 부흥사경회 및 전도 사역

1932년 10월 나고야 교회 2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박상동 목사는 더욱 전도에 힘썼다. 앞서 언급한 김익두 목사 초청 부흥사경회는 무려 250명이나 되는 사람이 예수를 믿기로 결심했을 뿐 아니라 온 교회로 하여금 전도에 더욱 열심을 내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또한, 나고야 교회 70년사에 따르면 1936년 3월 25일부터 29일까지 마산문창교회 담임 주기철 목사를 강사로 연합부흥회를 가졌는데 은혜가 충만해 새로 예수 믿게 된 사람이 수십 명에 이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 그는 안동교회에서 했던 전도 사역과 동일하게 1932년에는 전도대를 조직하고, 1933년에는 노변전도소를 산하전도소로 발전시켜 나고야 지역의 복음화를 한층 앞당기는 전기가 마련되었다.

 

② 다음세대 사역
박상동 목사는 교포들의 다음세대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관심은 주일학교의 신앙교육에 총력을 기울이게 하였고 큰 성장을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박상동 목사가 시무하던 기간 중에 나고야 교회는 설립된 지 7년 만에 조직교회가 됨으로써 나고야 지방의 중심교회로 발돋움 할 수 있었고 선교활동을 더욱 활발히 전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되었다. 또한, 기존의 기독청년면려회가 지역의 교회와 연합으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③ 지방회 및 총회 사역
특히 이때부터 박상동 목사는 개 교회를 넘어 지방회와 총회를 위해 헌신하기 시작하였다. 고달픈 교포의 삶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박상동 목사는 관서지방 지방목사로 사역하면서 1932년 재일조선야소교관서지방회에서 전도부장으로 피선되어 관서지방 전도에 진력을 다하였다. 또한 재일조선야소교관서지방회 부회장으로 피선되어 관서지방교회의 리더 역할을 했으며, 1938년에는 재일조선기독교회 제3회 정기대회에서 회장으로 피선됨으로써 박상동 목사는 전국 교회의 리더로 부상하였다.


/논문 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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