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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나의 어머니, 김해선 권사님!나의 어머니, 김해선 권사님! 최 점 식 목사 길부교회 나의 어머니의 일생(1933년 9월 9일~) 어머니는 경북 군위군 의흥면에서 무남독녀로 어렵게 살아온 전형적인 가난한 농민의 딸이었다.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홀로 계시는 아버지 밑에서 살아오셨다. 그러면서도 바느질을 배워, 동네 어르신들의 옷과 버선도 만들어 드리며 살아오셨다. 손재주가 남달라 동네 어른들로부터 사랑과 칭찬을 많이 받으셨고, 아버지를 정성으로 섬기며 집안일도 어머니를 대신하여 잘 해내셨다. 그러던 어느 날 군위 우보 5일장에 다녀오신 외할아버지께서 당시 15세인 어머니에게 시집이라도 가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그렇게 자신보다 아홉 살이 많은 내 아버지를 만나 16세의 어린 나이에 5남매 중 장남과 결혼하여 시부모님과 함께 경북 군위군 우보면 이화동 1189번지에 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행복한 신혼의 꿈을 뒤로한 채 아버지는 군 입대를 하셨다. 남편도 없는 시집살이는 쉽지 않았고, 가정 형편 또한 넉넉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조금의 불평도 하지 않으셨고, 부모님께는 효도하고 형제들과는 우애를 다지며 힘든 환경 속에서 살아오셨다. 그러던 중에 농촌에서의 삶이 어려워지자 대구 산격동으로 이사를 하셨다. 생각해보니, 도시로 이사를 나온 것은 어머니의 커다란 용기였다. 지금도 종종 이러한 결단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도시의 생활이 시작됐으나, 별 직업이 없었던 아버지께서는 시장에서 리어카로 채소장사를 하면서 가정의 생계를 꾸려나가셨다. 동시에 어머니께서는 우리 4형제를 공부시키시기 위해 40대 초반의 나이에 식당에서 일을 하셨다. 그리고 어릴 때 배워둔 삯바느질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셨다. 어린 내가 봐도 두 분은 참으로 열심히 사셨고,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두 분의 모습이 지금 우리 형제들의 성실과 부지런함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믿음의 가문을 일구어내신 어머니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세 들어 살던 곳의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교회를 다니면서 나 혼자만 예수님 믿지 말고 어머니도 함께 믿게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어머니를 설득했고 하나님의 은혜로 어머니도 40대에 처음 교회에 나가시게 되었다. 어머니는 평소 몸이 좋지 않으셨는데, 교회를 다니신 후로 건강을 회복하며 하나님의 큰 은혜를 체험하셨다. 하지만 제사 문제 등을 이유로 주위 친척들의 심한 반대가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믿음이 성장하면서 제사를 없애고 추도 예배를 드릴 것을 제안하셨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족들이 예수를 믿게 해야 했다. 어머니는 기도하면서 최선을 다해 가족들을 전도하셨고,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우리 4형제도 교회에 출석하게 됐다. 그 후 우리는 형편이 나아지면서 새로운 집으로 이사도 하게 되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우리 형제들은 모두 중·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으나, 시장에서 채소를 운반하시던 아버지께서 갑자기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셨다. 하루아침에 우리 집은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나 아파 목이 메어 온다. 아버지 없이 우리끼리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하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이 점점 더 커졌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식당 일 등 돈이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밤낮으로 일하셨다. 어머니의 희생으로 우리 형제들은 굶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었다. 온 가족이 힘든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았으니,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장남인 나는 집안을 위해 사업을 시작했고 사업체를 운영하게 됐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업의 길이 아닌 목회자의 길로 인도하셨고, 신학의 길을 걸어가고자 마음먹었을 때도 어머니는 반대하지 않으셨다. 지금은 우리 4형제 중 2명이 목사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지난날 불신자의 가정에서 목회자가 배출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비록 농촌목회와 자비량 선교사의 길을 걷고 있으나 최선을 다해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어머니의 희생으로 무사히 고등학교를 입학하게 된 것이다. 입학 당시, 입학등록금이 없어 어머니는 끼고 계시던 금반지 세 돈을 팔아 입학등록금을 마련해주셨다. 또 2012년 어머니의 팔순 때, 어머니께서는 동생들은 모두 좋은 차가 있는데 장남인 내가 목사이면서도 소형 자동차를 가지고 있다며, 그랜저 3.0을 구입해 주셨다. 섬유공장에 다니시면서 모아두신 돈으로 새 차를 사주신 것이다. 나의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는 사실을 70대를 바라보며 다시금 느끼고 있다. 현재 어머니는 경산에 거주하시는데 지금도 아들이 오면 커피를 손수 끓여주시며, “부모는 한 번 죽으면 다시 볼 수 없는데, 내가 살아있으니 커피라도 끓여준다”라고 말씀하신다. 아들로서 어머니에게 해드린 것이 한 가지 있다면 6년 전에 아내와 함께 의논해서 지금의 아파트로 모신 것이다. 다만, 더 해드리지 못해 항상 죄송한 마음이다. 부모 없는 자식이 어디 있겠는가? 자녀들에게 모범이 되신 어머니 어머니는 지난 1988년 88세로 세상을 떠나신 할머니를 수십 년간 모신 결과로, 1997년 5월 8일 어버이날에 대구광역시장으로부터 ‘장한 어버이상’을 수상하셨다. 이는 우리 가문의 영광이었다. 또 2020년 9월에는 아버님이 6·25 참전 국가유공자란 사실을 인정받게 되어 너무나 감격해하시기도 하셨다. 어머니는 지금은 89세로 연로하시지만, 40여 년간 출석하신 교회의 권사로서 주일예배, 삼일기도회, 금요구역예배 등 경산에서 대구까지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다니시는 모습에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언젠가 교회 화장실을 청소하시다가 락스가 눈에 들어가서 고생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교회 관리집사님도 있었지만 더러운 화장실을 그냥 볼 수 없어서 청소하셨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그런 분이시다. 어머니는 지금도 교회 어르신들에게 옷을 만들어 드리고, 봉사하시며, 길흉사에 빠짐없이 참석하신다. 국가에서 받는 노령연금과 자녀가 드리는 용돈으로 십일조, 감사헌금, 선교헌금을 내시며 교회 권사로 그 의무를 다하시니 아들로서 부끄러운 것밖에 없다. 아무쪼록 남은 삶 건강한 몸으로 계시다가 언젠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조용히 천국 가실 수 있도록 기도한다. 60대 중반에 있는 큰아들을 마치 어린아이로 생각하시는 것을 보면 부모의 마음이 어떠한지 가히 짐작해 본다. 나의 어머니 살아계실 동안에 건강하세요. 존경합니다. ▲2021년 2월 설날에 어머니(뒷줄 왼쪽 세 번째)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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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인터뷰 - 김광림 국회의원김 광 림 국회의원 ‘경제, 일자리, 편안한 삶이 있는 경북을 만들고 싶습니다!’ 경북도지사 출마 선언 이후 90여 일 동안 하루하루 바쁘게 일정을 이어가고 있는 김광림 의원(안동, 자유한국당)을 지난 3월 초, 안동교회의 로뎀나무 카페에서 만났다. 김 의원은 영남대학교 행정학과 4학년 때 행정고시 14회에 합격했고, 32년을 경제부처 현직에서 공직 생활을 한 후, 세명대학교 총장을 거쳐 지금은 3선 국회의원으로 10년 째 지역민을 위해 일하고 있다. 다음은 김 의원의 신앙관(안동교회 장립집사)에 대해, 그리고 도백을 향한 포부 등에 대해 김 의원과 나눈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Q: 최근들어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이 있다면요? 지난 평창동계올림픽에서 경북의 아들, 딸들이 위대한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습니다. 특히 의성 출신 컬링 여자대표팀의 은메달 획득은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은 선수들의 투지와 열정으로 더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제 경북은 ‘할 수 있다’는 정신으로 열정과 자부심을 끌어 모아 ‘제 2의 경북 부활’을 꿈꾸며 같이 나갔으면 합니다. Q: ‘민심 청취 노트’를 소중히 여긴다고 들었습니다만… 저는 윗옷 주머니에 작은 노트를 넣고 다니며 중요한 사항들을 메모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벌써 수십 년이 넘었고 그 노트가 40~50권이 됩니다. 23개 시·군의 도민들을 만날 때도 그들과 나눈 대화 내용과 제안 사항 등을 적었습니다. 도민의 목소리가 담긴 이 노트가 정책과 공약의 기반이 되니 제게는 소중한 자산입니다. 최근에는 이 노트에 유독 “경제가 어렵다, 취업이 어렵다…” 등 가슴 아픈 내용들이 많습니다. 도민들의 손을 잡을 때마다 그들의 안타까움이 절실히 다가옵니다. Q: 어린 시절 이야기와 어머님(故 박금자 여사)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우리 집안은 ‘어머님의 기도’로 이루어진 집안입니다. 제가 10살 무렵 저희 집은 대가족제도를 벗어나 독립하게 됐는데, 얼마 후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다섯 남매를 키우기 위해 삯바느질을 시작하셨습니다. 장남인 저는 어머님을 돕고자 중학교 시절 열차에서 신문을 돌리기도 했고 농림고에 진학한 것도 경제적 이유였습니다. 어머님은 힘든 삶 속에서 붙잡은 하나님을 놓지 않으셨고 매일 새벽 교회에 나가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가정 형편이 조금 나아진 노년에는 매일 10시간 씩 10년 동안 총 10번에 걸쳐 성경 말씀을 손수 노트에 옮겨 적으셨습니다. 어머님의 낡은 성경책과 성경 필사본 노트들(100여 권 분량)은 지금 안동교회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아픈 몸으로도 바닥에 엎드려 매일 성경책을 필사하시던 어머님의 모습은 그대로 제게 신앙의 유산이 되었습니다. Q: 의원님의 삶 속에 함께하신 하나님에 대해 들려주세요. 지난 2003년 재정경제부 차관 재직 시절,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남측 수석대표를 맡아 평양에 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회의 첫날, 북한 대표단이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남쪽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재난을 당할 것”이라며 협박을 가했습니다. 저는 그 위협에 물러설 수 없어 즉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이후 북측과 44시간에 걸친 피 말리는 기 싸움이 이어졌고, 저는 북측의 마음을 열어달라고 그 시간 동안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결국, 북측은 사과하며 후속 만남을 제의하는 등 고개를 숙였고 회담은 무사히 마무리됐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기적’이라 말했지만, 저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것임을 믿습니다. Q: 경북의 주요 현안, 도백을 향한 포부 등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경북이 처한 주요 현안을 ‘경제, 일자리, 편안한 삶’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저는 경제기획원(現 기획재정부)의 요직을 거친 후 특허청장과 재정경제부 차관으로 공직을 마감할 때까지 경제부처에서 32년을 근무했습니다. 국회에서는 기획재정위원회에서 활동했으며, 자유한국당의 정책위원장과 최고위원을 맡아 정책을 총괄했습니다. 제가 ‘경제통·정책통’으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또한, 대학교 총장을 지내면서 취업률 1위 대학을 만들어본 경험이 있습니다. 저는 경북의 경제 부활을 위해서는 23개 시·군별로 맞춤형산업을 지원·육성해 일자리를 창출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제가 발표한 ‘광속 경북 부활(김광림이 약속하는 경북 부활) 프로젝트’는 여기에 근간을 둡니다. 그리고 우리 삶의 궁극적 목적은 ‘저녁 시간이 있는 편안한 삶’일 것입니다. 제게 기회가 주어지면 ‘믿고 맡길 수 있는 경제도지사, 일자리 도지사’가 되어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Q: 의원님의 삶의 좌우명과 평소 신념이 궁금합니다. 제 평생의 좌우명은 ‘신기독(愼其獨)’과 ‘화이부동(和而不同)’입니다. 신기독은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고자 노력하고, 혼자 있을 때 더욱 조심한다’는 뜻입니다. 화이부동은 ‘서로 조화를 이루되 같아지지 않는다’ 즉,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도 존중하고 공존하되, 의로운 뜻을 굽혀 좇지는 않는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일터에서는 늘 ‘인십기천(人十己千)’의 자세로 임했습니다. ‘남이 열 번을 하면 자신은 천 번을 한다’는 뜻으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한 자는 큰 것에도 충성한다’는 성경말씀과도 의미가 통합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작은 것에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 기독교인이자 공직자의 가장 중요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Q: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요? 얼마 전 3.1절 기념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석해 조국과 민족을 위해, 우리의 영적·사회적 각성과 통일을 위해 많은 분들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당면한 과제와 미래 세대를 위해 기도의 힘을 모아야겠습니다. 세상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섭리대로 사는 자를 어여삐 여기고 사랑하십니다. 저 또한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 후기> 김광림 의원은 “어머님의 신앙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지만 나의 하루하루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입니다”라는 말로 대화를 매듭지었다. 그리고 어머님이 남기신 성경 필사본을 보고 가라며 도서관으로 안내하는 김 의원의 뒷모습엔 한 평범한 아들의 그리움이 묻어 있었다. “어떤 결과가 주어지든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믿기에 평안하다”고 말하는 김 의원의 미소는 밝았다. /대담·정리=박은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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