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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군, 경기도 안산시와 자매결연 협약 체결지역 발전과 공동 번영 노력 청도 농·특산물 수도권 판로 개척 기대 및 민간 차원의 교류 활성화 협의 ▲자매결연 협약 체결 후 윤화섭 안산시장(좌)와 이승률 청도군수가 협약서를 들고 악수하고 있다.(사진=청도군 제공) 청도군(군수 이승율)은 경기도 안산시(시장 윤화섭)와 지방화 시대의 동반자로서 상호 신뢰와 우의를 증진하고 지역 발전을 위해 지난 11일 안산시청 제1회의실에서 자매결연 협약을 체결했다. 이번 협약은 당초 지난 1~2월 중 체결할 계획이었으나 전국적으로 코로나19 발생 및 확산으로 무기한 연기되었으나 최근 사회적거리두기가 완화됨에 따라 방역 수칙을 지켜 양 지자체 군수, 시장을 포함한 지역 주요인사 20여 명이 참석하는 소규모 협약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날 자매결연을 체결한 양 지자체는 상호 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문화·관광자원 연계 및 홍보 △지역 생산품 구매·판로 지원 △주요 행사 상호 초청 및 협력 △우수 정책 공유 △주민 간 상호 교류를 통한 지역경제 발전 도모 등에 협력하기로 했다. 특히 이번 협정을 체결한 안산시는 지난 3월 코로나로 힘든 청도군을 위하여 청도 농·특산물 팔아주기 행사를 개최하였으며, 4월 29일에는 윤화섭 안산시장이 청도군을 직접 방문하여 코로나 19 감염 확산 방지를 위하여 노력한 의료진과 공무원 등을 위로하고 방역물품 안전 주머니 1만 개와 안산시 직원들이 십시일반 모은 성금 2천만 원을 맡겼다. 윤화섭 안산시장은 “경상북도 청도군과 지속적인 사전 교류를 통하여 이렇게 뜻깊은 자매결연 맺게 되었다”며 “앞으로 다양한 분야에 걸쳐 양 지자체가 우호 증진 속에 공동 발전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에 이승율 청도군수는 “청도군의 질 좋은 우수 농·특산물을 수도권까지 바로 연결하여 소비자와 생산자 모두를 살리는 착한 소비 생태계가 만들어질 것”이라며 “지역 상생의 파트너로 앞으로 지속적인 공동 발전을 이룰 수 있길 기대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청도 최점식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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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성동 갓뒤마을 주민·교회 환경정비 실시주민과 지역 교회가 힘을 모아 마을 청소에 나서다 ▲갓뒤마을 대청소 및 환경정비에 앞서 마을주민과 경주황성교회, 경일교회 교인들이 기념촬영하고 있다.(사진=경주시 제공) 지난달 24일 경주시 황성동 갓뒤마을에서는 배진석 도의원과 경주황성교회(담임목사 권선호) 및 경일교회(담임목사 이왕재)의 교인, 마을 주민 등 30여 명이 모여 마을 골목길 등지에서 환경정비를 실시했다. 갓뒤마을에 위치한 두 교회(경주황성교회, 경일교회)는 코로나19로 어려운 시기 마을 주민들을 위해 골목길 등지의 쓰레기를 치우기로 담임목사들이 뜻을 모아 이날 환경정비 활동을 실시해, 마을회관과 골목길 등지에 수북이 쌓여 있던 책상, 탁자, 휴지, 폐비닐 등 쓰레기 2톤가량을 집중 수거했다. 수거한 쓰레기는 황성동행정복지센터의 도움으로 매립장으로 운반함으로써 환경정비를 마무리했다. 한마을 주민은 “일이 바빠 내 가게 앞도 청소하지 못했는데, 주민과 교회 신도들이 깨끗하게 치워줘 고맙고 미안하다”며, “다음부터는 스스로 가게 앞을 청소하겠다”며 고마워했다. 환경정비에 참여한 주민들은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의 집 앞은 스스로 깨끗이 청소해 나가길 바란다”고 전했다. 한편, 경주황성교회는 평소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지역주민들을 위해 불우이웃돕기 성금 기탁, 겨울철 김장김치 나누기, 부활절 달걀 나누기, 추수감사절 첫 수확물 이웃과 나누기, 성탄절 이웃과 함께하는 발표회, 연말연시 떡국 나누기 등 다양한 활동으로 이웃을 위한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경주 김치현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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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어도 충분합니다.천석길 목사 구미남교회 코로나로 인해서 우리의 모임이 힘을 잃었습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예전에 비해서 사람이 많이 모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모임을 중단하거나 그 열심이 식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많이 모인다고 해서 사람이 많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한 사람의 가치관이 바뀌는 것은 누군가가 한 사람을 향한 애정과 기도가 있을 때입니다. 천안아산제자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교회에 한 분이 전도되어 나오셨는데, 그분은 교회에 관심은 있지만 중국집을 하고 있어서 늘 점심시간을 중심으로 하루의 일정을 맞추다 보니 주일 오전예배는 나오고 싶어도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목사님께서 그러면 주일 아침 7시에 예배를 드릴 테니까 그 시간에 나와서 예배를 드린 후에 가서 일해 보시라고 권했답니다. 그 다음 주일부터 한 사람의 교인을 앉혀 놓고 목사님은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한 달, 두 달, 육 개월이 지나고 마침내 일 년 육 개월이 지난 어느 날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된 그분이 더 이상 1부 예배는 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하더랍니다. 왜냐하면, 이제 하나님이 믿어졌기에 주일에는 가게 문을 닫겠다는 고백과 함께 그리스도인답게 장사를 하겠다는 결단으로 중국집을 하면서도 일체의 배달은 하지 않고, 술은 팔지 않고, 곱빼기를 주문하는 분에게도 보통과 같은 음식값만 받기로 했다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삼일반점이라는 그 음식점은 점심시간에 줄을 서서 음식을 먹는 집이 되었고, 준비한 음식재료가 떨어지는 오후 서너 시가 되면 그분은 가게문을 닫고 오히려 전도를 했고, 마침내는 신실한 목자가 되었습니다. 오래도록 기다려준 목사님의 사랑에 변화된 그 목자는 자신이 배운 그대로 목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섬겨 주어서 여러 목장이 분가되었고, 그 목장을 통해서 변화된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분은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직원에게 마트의 경영기법을 가르쳐서 여러 곳에 개업하게 했고 그분처럼 목자가 되는 놀라운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마음에 큰 감동을 끼칠 때 그 한 사람으로 인해서 또 다른 한 사람이 구원을 받고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얼마나 많이 모이느냐? 라는 숫자 보다는 한 사람을 변화시킨 간증이 더 중요합니다. 많은 숫자가 모이지 않아도 한 사람을 향한 섬김은 언제나 가능하지 싶습니다. 목장, 한 사람이어도 힘을 내셔야 합니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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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읍지역사회보장협의체, 사랑듬뿍 손뜨개 나눔지역 취약계층 영·유아 및 아동·청소년 100명에게 직접 전달 영양읍지역사회보장협의체(공동위원장 김상준, 정휘대)는 10월 21일(화) 영양읍행정복지센터에서 목도리, 귀마개, 가방 등 손뜨개 작품 100점을 지역 취약계층에게 나누는 「사랑뜸뿍 손뜨개 나눔 행사」를 개최했다. 이번 행사는 영양읍지역사회보장협의체가 주관하여 코로나19 여파로 ‘집콕’ 생활이 늘면서 집에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자 하는 손뜨개 재능기부 봉사자들의 뜻을 모아 개최됐다. 영양읍지역사회보장협의체 위원 및 재능기부 봉사자 10여 명은 틈틈이 손뜨개로 만든 목도리 75개를 기부했으며, 손뜨개 ‘쑥이’를 운영하는 우정숙 대표는 목도리, 귀마개, 망토, 가방 등 25개의 물품을 기부했다. 올해에 착한가게에 가입하여 나눔 문화 확산에 동참하고 있는 쑥이(대표 우정숙)는 “나눔을 통해 아이들이 따뜻한 겨울을 보냈으면 하는 바람이며 앞으로도 매년 재능기부를 계속 이어나가고 싶다”며 소감을 밝혔다. 기부된 손뜨개 100점은 지역 취약계층 영·유아 및 아동·청소년 100명에게 영양읍지역사회보장협의체 위원들이 직접 전달할 예정이다.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온라인 수업 및 가정 돌봄 시간이 길어져 가정에서 답답함을 느끼는 아이들에게 손뜨개 나눔을 통해 독감 및 코로나19를 예방하고 정서적 지원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김상준 공공위원장은 “지역복지를 위해 항상 고민하고 수고해 주시는 영양읍지역사회보장협의체 위원님들에게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도 협의체는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행복공동체를 만드는 데 앞장서겠다”고 하였다. 이혜경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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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부르심(6)브라더 앤드류 오픈도어 설립자 우리는 쿠바 교회에 대량의 성경을 전달하는 일 외에 쿠바의 열악한 경제 상황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목회자 가족을 어떻게 도울까 고민했다. 나는 이미 앞에서 쿠바 목회자는 나라에서 나눠주는 식량과 의복을 지급 받지 못한다는 말을 했다. 당시 많은 목회자가 감옥에 갇혔는데 가장이 옥살이를 하기 때문에 뒤에 남아 있는 가족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쿠바 화폐는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에 돈은 아무런 도움이 못 되었다. 우리는 네덜란드 대사의 도움으로 시내에 있는 외교관 면세점에서 달러를 지불하고 침대 덮개, 옷, 휘발유, 음식 등을 구입했다. 그러나 모든 가족에게 나눠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자 목사님들이 좋은 아이디어를 내었다. 돈보다 금이 훨씬 가치 있는 통화 수단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만약 패물이나 금 장신구를 가져올 수만 있다면 높은 가격에 팔아 상당한 기간 동안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 300달러에 구입한 금시계 하나가 쿠바에서는 반년 치 월급과 맞먹었다. 그래서 한번은 우리 팀원들이 모두 바람둥이 계모임 회원처럼 온몸에 주렁주렁 금시계, 금반지, 금목걸이, 금팔찌 등으로 치장한 적도 있었다. 나는 묵고 있던 호텔로 여러 목사님을 초대해 식사를 대접했다. 목사님들은 모두 고맙게 식사를 했지만, 집에 있는 가족에게 가져다주고 싶다면서 비닐봉지를 찾았다. 식사하는 도중에 그들은 닭고기며 밥이며 빵 같은 것을 조용히 봉지에 담았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어느 목사님 집에 가게 되었는데, 아이들이 목사님이 가져간 음식을 허겁지겁 집어삼키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나는 동행했던 동료와 함께 패물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목사님, 이것은 네덜란드 성도들의 선물입니다. 친구가 선물한다고 생각하시고 받아주십시오. 이것을 가족을 부양하는 데 쓰시고 다른 가족을 위해서도 사용해주십시오. 우리의 사랑과 기도를 늘 잊지 마시고 용기를 내십시오.” 그들은 고마운 마음으로 선물을 받아 각자 필요에 따라 나누어 가졌다. 선교 여행 마지막 날 한 목사님이 우리를 배웅하러 호세마티 국제공항으로 나왔다. 목사님은 따라올 수 있는 곳까지 나를 배웅해주었다. 나는 들어가면서 혹시나 하고 목사님에게 물었다. “목사님, 더 필요하신 건 없습니까?” “저기, 사실 신발이 필요합니다.” 목사님이 빨리 대답했다. 나는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목사님의 발과 내 발을 번갈아 가늠해보았다. 발 크기가 거의 같아 보였다. 나는 일단 비행기에 오르면 암스테르담에 도착할 때까지 그저 앉아만 있을 것이고, 집에 돌아가면 신발 하나 정도는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나는 신발을 벗어 목사님 손에 쥐여주었다. “목사님, 가지세요. 목사님 겁니다.” 목사님이 신발을 받아 쥐고 고마워하던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간단히 작별 인사를 하고 양말만 신은 채 천천히 세관을 지나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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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2)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2)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론 1. 첫 번째: 기독서원(基督書院) 2. 두 번째: 선교사 임시주택 3. 세 번째: 선교사 주택 4. 비공식 예배처소: 텐트 교회 5. 네 번째: 16칸 ‘ㄱ’자 예배당 6. 다섯 번째: 목조 2층 예배당 7. 여섯 번째: 2층 돌집예배당 결론 2. 두 번째 예배처소 : 선교사 임시주택 1909년 8월 8일 주일 첫 예배를 드린 안동교회는 1년이 지난 후 무려 75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5칸의 작은 기독서원은 예배드리기에는 너무도 공간이 협소하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 신축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마땅한 예배처소가 없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거주하고 있던 임시주택으로 예배처소를 옮겼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안동교회 80년사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오늘날 안동교회 부지 안에 선교사 임시주택(구 교육관 건물 자리)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안동교회 80년사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진술한다: “안동교회는 처음에 매서 김병우의 인도로 서원(기독서원)에서 모이다가 그해 11월 원주 주재 선교사 오월번 목사와 조사 김영옥 씨가 내안(來安)하여 정착하게 되므로 교회를 인도하기에 이르렀다. 선교사들의 임시주택(1910년)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니 장소는 현 교육관 자리에 있었던 한옥집이었다.” ▲독신인 안동성소병원의 초대 원장인 별의추 선교사와 권찬영 선교사의 임시 선교기지로 사용된 가옥의 일부로 여겨진다. 오월번 선교사의 편지에 의하면 이 가옥에는 200여 명이 충분히 앉을 수 있는 규모의 공간을 소유한 대저택으로 안동교회가 첫 번째 ‘ㄱ'자 예배당을 건축하기 전에 예배처소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사진 3) 1910년 2월부터 3명의 선교사들이 모두 안동에 체류함으로써 안동선교부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하자 몇 채의 선교사 사택이 필요하게 되었을 것이다. 김광현 목사는 이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 해에 안동에 새로 선교부가 설치되었다. 선교부는 선교사 임시주택으로 쓰기 위하여 바로 그 서점 북쪽에 있던 큰 기와집 두 채를 사들여 수리하고 한 집(옛 교육관)은 독신 선교사였던 별의추 의사와 권찬영 목사가, 다른 한 집(지금의 예배당 자리)은 오월번 목사 가족이 살게 했다. 그래서 서점에서 모이던 교회는 선교사들의 임시주택인 별·권 양씨가 사는 집에서 모이게 되었다.” 에비여사는 당시 선교부가 세 채의 가옥을 구입했음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안동선교부를 시작할 때 하나님의 압도하는 섭리에 의해 선교사들이 거주하기에 가장 편안한 가옥을 구입했다. 18칸짜리 기와지붕의 한옥을 구입해 선교사 가정이 거주할 수 있도록 수리를 하고, 다른 두 채의 한옥도 구입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수리하였다.” 1911년 3·4월 선교캘린더에 수록된 한 장의 사진은 별리추 선교사와 권찬영 선교사가 사용한 가옥이 임시 선교기지였음을 추정하게 한다. 사진 3에는 당시 의료선교사인 별리추와 권찬영 선교사가 머물렀던 임시 선교기지 내 가옥 앞에서 별리추 선교사가 검은색 양복을 입고 손을 뒤로 한 채 서 있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임시선교기지 내에 있던 가옥 일부가 계속 부흥하고 있던 안동교회의 예배처소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에비여사는 추측하기도 한다. ▲안동선교부의 첫 임시주택으로 오월번 선교사 가족이 거처했던 골기와 한옥으로 안동교회의 두 번째 예배처소로 잠시 동안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월번 선교사 가정은 1910년 6월 3일 안동에 도착하여 7월 7일 안동읍 동편 끝에 위치한 두 번째 주택으로 이사함으로 이 임시가옥에서는 한 달 남짓 동안 잠시 거처한 것으로 오선교사의 부인인 새디 선교사는 선교편지에서 밝히고 있다.(사진 4) 한편, 오월번 선교사의 선교편지에 의하면 오월번 선교사 가족의 임시처소는 1910년 1월에 구입하여 일주일에 사흘은 지역 교인들이 사용하였고, 나머지 나흘은 사랑방 사역과 선교지 건축을 위한 일을 하기 위하여 선교사들이 사용하였다고 밝힌다. 안동교회의 교인들이 주일을 포함한 사흘 동안 이 임시주택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안동교회 교인들이 첫 예배처소인 기독서원을 떠나 16칸 ‘ㄱ’자 첫 예배당으로 이전하기까지 이곳에서 임시로 예배를 드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선교사 임시주택이 사진 4다. 안동교회 80년사는 안동교회의 두 번째 예배처소가 1910년 선교사들의 거처였던 임시주택으로 안동교회 교육관 자리의 골기와 한옥(韓屋)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에비여사는 보관하고 있던 안동선교 여러 초기 사진 중에서 사진 4 속의 주택을 안동교회 두 번째 예배처소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안동교회 80년사의 기록과도 어느 정도는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사진 4는 안동선교부의 가장 초기 사진으로 사진 속의 가옥은 골기와 한옥이다. 사진 4의 두 사진은 동일한 사진이다. 사진 4의 우측은 당시 오월번 선교사 가족이 거주하던 주택이며, 좌측은 안동교회 교인의 일부가 기독서원에서 나와 바로 이 가옥에서 예배를 드린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당시 일부 교인들이 방 앞에 서 있는 것을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안동교회의 두 번째 예배처소로 가능한 곳으로 안동선교부 선교사들이 임시로 거처한 사택인 사진 4 속에 있는 가옥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즉 오월번 가족이 머물던 주택과 별리추 선교사와 권찬영 선교사가 함께 거주했던 임시선교기지일 가능성이 모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주택규모로 보았을 때 안동교회의 두 번째 예배처소는 별리추 선교사와 권찬영 선교사가 함께 거주했던 임시선교기지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3. 세 번째 예배처소 : 선교사 주택(1) 안동에 도착한 선교사들이 우선적으로 구입했던 임시주택에서 선교사들이 생활하기에는 당연히 불편했을 것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선교사를 위한 영구주택 건축이 제기되었을 것이다. 다만 선교사들은 영구 사택을 건축하기 전에 임시로 거주할 주택지가 필요했을 것이다. 안동교회 80년사에 따르면 당시 주임 선교사였던 오월번 선교사가 선교사 주택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작업에 착수했음을 기록한다. 실제로 안동선교부 부지(敷地)로 금곡동 북쪽 동산이 확정되어 그곳에 선교사 영구사택을 건축하기 시작된 것은 1910년 즈음이다. 안동에 체류하고 있던 장인차 의료선교사가 오월번 선교사에게 1910년 11월 26일 쓴 편지에 의하면 낙동강이 보이는 동산 기슭 앞에 100 야드 정도의 새로운 선교센터 부지는 잘 부서진 화강암 토질이고 배수도 매우 좋았다고 한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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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결혼이주여성 경주관광 SNS 홍보단 1기’ 발대식 개최경주시(시장 주낙영)는 2일 국제문화교류관에서 ‘결혼이주여성 경주관광 SNS 홍보단 1기’ 발대식을 개최했다. 이날 발대식은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마스크 착용·발열체크 등 방역수칙의 철저한 준수하에 진행됐다. 경주관광 SNS 홍보단은 7개 국적 20명의 결혼이주여성들로 구성됐으며, 자국어를 사용해 국내·외 경주관광 홍보활동을 펼쳐 나가게 되며, 위촉 기간은 1년이다. SNS 홍보단은 앞으로 관광·생활정보, 축제·행사 현장 스케치 등 경주의 다양한 소식을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SNS 매체를 통해 자국어로 전달하는 활동을 펼쳐 나가게 된다. 발대식에 참석한 몽골 결혼이주여성 바트바야르솜야 씨는 “지역과 연계된 뜻깊은 사명을 맡게 돼 큰 영광으로 생각하며, 누구보다 경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해 나갈 것”이라고 전했다. 행사에 함께한 주낙영 경주시장은 “국내외 관광객으로 한창 붐벼야 할 시기에 코로나19로 인해 대부분의 행사가 취소되는 등 큰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모두가 힘을 모아 이 위기를 헤쳐나갈 것으로 생각한다”며, “지역 내 1,700여 명 결혼이주여성 가운데 경주관광 SNS 홍보단으로 위촉된 20명은 자부심을 느끼고 활발한 활동을 펼쳐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경주 김치현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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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1)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1)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론 1. 첫 번째: 기독서원(基督書院) 2. 두 번째: 선교사 임시주택 3. 세 번째: 선교사 주택 4. 비공식 예배처소: 텐트 교회 5. 네 번째: 16칸 ‘ㄱ’자 예배당 6. 다섯 번째: 목조 2층 예배당 7. 여섯 번째: 2층 돌집예배당 결론 서론 선교사들의 보고에 따르면 1908년 안동에 선교부가 세워질 당시 안동의 인구는 약 15,000명 정도였다. 안동에 체류하고 있던 장인차(Johnson) 의료선교사가 오월번(Welbon) 선교사에게 1910년 11월 26일 쓴 편지에 의하면 안동은 소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본 도시 중에서 가장 깨끗하고 쾌적한 도시 중의 하나였다고 기록할 만큼 안동은 선교사들에게 매력적인 도시였다. 안동에 도착한 최초의 선교사는 부산에 주재하고 있던 배위량(Baird)으로 그는 1893년 4월 17일부터 5월 20일까지 경상북도 지방을 순행하며 전도했다. 이후 1899년 대구선교부가 설치되자 안동은 대구선교부의 관할 지역이 되었고, 안동을 포함하는 경북북부지역은 대구선교부의 주된 선교 타게트 지역이 되었다. 대구선교부 주재 부해리(Bruen) 선교사에 따르면 함께 안동을 순회한 방위렴(Barrett) 선교사는 1903년 안동의 첫 학습자이자 안동의 첫 열매를 얻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특히 미국북장로회 선교회가 1908년 9월 정기총회에서 안동선교부를 설립하기 위한 예비 작업을 결정하고 1909년 9월 정기총회에서 안동선교부 설립을 최종 결정한 후 안동을 중심으로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선교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10년대 안동시의 모습과 생활상으로 위 왼쪽은 낙동강으로 사진 아래의 대동강은 오기로 보인다. 마을과 낙동강 사이에 논이나 밭이 보이고 도로는 동에서 서로 향하는 안동-예천 도로이다.(사진1) 역사 기록에 의하면 안동교회는 1909년 8월 둘째 주일 8명이 첫 예배를 드린 후 몇 차례 예배처소의 변경이 있었다. 안동교회 7대 담임인 김광현 목사는 안동교회가 임시 처소까지 포함해 여섯 곳에서 예배를 드렸음을 기록한다. 특히 이 기록은 안동교회 7대 담임인 김광현 목사의 기억을 토대로 한 것으로, 김광현 목사는 안동선교부 최초의 선교사인 사우대(Sawtell)가 세상을 떠난 후 1910년 1월 안동선교부 선교사로 파송되어 1952년 한국을 떠난 권찬영(Crothers) 선교사와 그동안 안동지역에서 사역한 선교사들과 함께 오랜 세월 동역한 안동지역 교회의 리더였다. 안동교회 80년사에 따르면 안동교회의 예배장소는 임시 예배처소까지 쳐서 여섯 번에 걸쳐 옮겨졌다. 첫 번째 예배처소는 1909년 8월 둘째 주일, 최초의 교인 8명이 창립예배를 드린 곳인 대석동 129번지로 옛 대석상회가 위치한 기독서원이었고, 두 번째 예배 장소는 1910년 선교사들이 거처했던 임시주택으로 안동교회 교육관 자리의 골기와 한옥이었으며, 세 번째 임시 예배장소는 선교사들이 사택 건축을 위해 매입하여 잠시 거처 하였던 구 교도소 자리에 있던 기와지붕 건물이었다. 네 번째 예배장소는 1910년에 건축된 안동시 광석동 214번지에 소재한 ‘ㄱ’자형의 16칸 크기 예배당이었다. 다섯 번째 예배 장소는 현재 100주년 기념관에 위치했던 2층 목조 함석지붕의 건물로 1914년 2월 준공되었다. 여섯 번째 예배처소는 현재도 주 예배실로 사용하고 있는 석조 예배당으로 1936년 초여름에 건축을 시작하여 1937년 4월 6일에 준공되었다. 본 소고는 1909년 8월 8일 둘째 주일, 8명이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시작된 안동교회의 예배처소 위치와 예배당의 변동을 연구함으로써 안동교회의 내·외적 변화와 부흥, 선교부의 정착과 선교사의 역할 및 생활상, 그리고 초기 안동지역의 복음화 진행과정을 살펴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1. 첫 번째 예배처소 : 기독서원(基督書院) 100여 년 전 안동에는 성경과 기독 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이 존재했다. 서점의 이름은 기독서원으로 이 서점은 안동 최초의 근대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안동교회 80년사는 대구선교부의 안의와(Adams) 선교사가 서문 밖 초가 5칸을 사들여 기독서원을 개원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기독서원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교회 앞 도로 건너편 버스 정류장이 있는 대석동 129번지다. 당시 김병우가 언제 안동지역의 매서(賣暑)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안의와 선교사는 김병우를 기독서원의 매서로 활용했다. 사실 초기 한국교회가 곳곳에 세워진 것은 각 지역에 세워진 기독서원에 속한 매서와 권서의 활동과 깊은 연관이 있다. 교회가 없는 산간지방이나 외딴 지역에 매서를 통해 전해진 성경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매서들은 그 지역 그리스도인들이 모일 장소를 마련하고 예배를 인도하였으며, 이것이 훗날 교회로 발전했음을 여러 초기 자료들은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1909년 8월 8일 안동교회의 첫 예배가 당시 매서인 김병우에 의해 인도되었다는 것은 당시로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첫 예배처소인 기독서원으로 추정되는 5칸 초가집으로 1909년 8월 8일 8명이 첫 예배를 드렸다. 남성들이 주를 이룬 것을 보아 남성성경공부반 참석자 중심으로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사진2) 안동교회는 거의 1년 동안 이 기독서원에서 예배를 드렸다. 기독서원은 안동교회의 첫 예배처소로 오늘의 안동교회가 있게 했으며 안동지역 선교의 영적 자궁(子宮)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독서원의 운영에 관해 남아 있는 자료는 거의 없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 초창기에는 여러 도시에 세워진 기독서점은 그 지역의 선교부나 선교사들에 의해 직접 관리되거나 운영되었다. 따라서 안동의 기독서원도 선교사들에 의해 경영되었지만 어떤 시기부터 현지인인 한국인에게 운영권이 넘겨졌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기독서원의 규모는 5칸으로 선교사의 임시주택으로 옮기기 전까지 안동교회의 예배 처소로 사용되었는데, 위의 ‘사진2’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가옥은 초가집으로 안동교회 첫 예배를 드린 기독서원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에비(Ewy)여사(오월번 선교사의 손녀)나 필자의 소견이다. 왜냐하면, 사진2는 오월번 선교사가 남긴 초기 안동선교에 관한 사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회중들을 배경으로 한 초가집은 5칸 정도의 규모로 보인다. 또한, 1909년이나 혹은 1910년 초가집 ‘ㄱ’자 예배당을 건축하기 전에는 또 다른 예배처소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사진2의 초가집이 기독서원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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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교육청 도서관 재휴관··· 대출서비스는 계속!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격상에 따라 비대면 도서대출 시행 ▲안동도서관 전경.(사진=경북교육청 제공) 경북교육청(교육감 임종식)은 코로나19 전국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격상됨에 따라 지난 24일부터 산하 27개 도서관을 재휴관하고 비대면 도서 대출 서비스를 운영한다고 25일 밝혔다. 코로나19의 지역 감염이 우려됨에 따라 학생과 학부모, 지역 주민들의 안전을 보호하고 감염확산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결정했다. 전국 사회적 거리 두기가 2단계로 격상되면서 도서관은 재휴관에 들어가게 되어 모든 대면서비스와 각종 행사를 중단하고 비대면 도서 대출 서비스로 전환하여 운영한다. 비대면 도서 대출 서비스로 북드라이브스루, 도서 택배 등이 운영되며 도서관별 시행 서비스와 방법은 개별도서관으로 문의하면 된다. 한편, 경북교육청은 지난 5월 7일에 1단계 자료실 도서 대출 서비스를 시작으로 5월 26일에는 2단계 디지털자료실과 열람실 개방, 6월 2일 3단계 평생교육강좌 프로그램 진행, 8월부터는 안전한 여름방학·휴가를 위해 열람실 수용인원을 확대하는 등 도서관 이용자들의 불편을 최소화하는데 힘써 왔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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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건 아니지요?천석길 목사 구미남교회 답답합니다. 들려오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요즘은 아픈 사람들이 왜 이리도 많고, 부부 사이가 안 좋은 가정들은 왜 이렇게나 심각하고, 직장의 위기를 겪는 사람들은 왜 이렇게나 많아지는지 말입니다. 거기에다 자녀들이 속을 새까맣게 타들어가게 하는 가정들도 많아집니다. 하기야 이런 일은 옛날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을 거니까 그러려니 해봅니다. 그런데 최근의 정치와 얽혀지는 교회와 신앙의 문제는 너무나 복잡해지는 듯합니다. 요즘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목사님이라고 불러 줄 때는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최근에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해 놓고 기다리는데, 그날따라 대형화면에서 광화문집회에서 생겨난 확진자와 그 근원이 어느 교회이며 그 목사님의 무지한 목회방식에서 시작되었다는 뉴스가 크게 들려지고 있는데 함께 했던 분이 저를 보고 목사님! 이라고 부르는 순간 식당에 있던 손님들이 모두가 천 목사를 쳐다보는 따가운 시선이 있었습니다. 데모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정치에 저항하는 국민으로 인하여 국가가 발전하고 시민의 의식 수준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그런 데모로 인해서 지금의 정권이 창출되었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겨난 정권이 오히려 이전보다 더 소통이 안되는듯하고, 정권을 잡은 자들이 자기 식구 감싸기에 눈이 멀어 있으니까 길거리에서 외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이겠지요? 이런 일에 앞장선 사람들은 언제나 목사님들이었습니다. 유신 때도 그랬고, 군부정권에서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데모를 선동하는 방식이나 앞서서 연설하는 사람들의 언어가 이전에 비해서 너무 값싼 용어를 쓰는 것 같아서 이건 아니다 싶은 마음이 듭니다(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며 설득하기 위한 말은 아닙니다). 더욱이나 코로나가 창궐하는 이 시기에 교회와 목사를 중심해서 확산되는 이 현실은 좀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듭니다. 신앙 이전에 다른 사람의 자유와 건강을 위해서 지켜야 할 것은 최선을 다해서 지켜 주어야 합니다. 지키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신비주의를 우리는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답답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정치라는 필요악으로 인해서 우와 좌로 나누어지는 현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정치를 뛰어넘어서 하나가 되는 지혜가 필요할 때입니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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