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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안동교회(1909년~1952년) 예배에 관한 연구(2)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론 1. 김영옥 목사(초대) 시대의 예배 2. 이대영(2대)·정재순 목사(3대) 시대의 예배 3. 박상동(4대)·임학수(5대)·김영옥 목사(6대) 시대의 예배 4. 김광현 목사(7대) 시대의 예배 결론 1. 김영옥 목사(초대) 시대의 예배 / 1909년~1920년 말(2) 1) 예배형식과 순서(2) 선교 초기 전국 곳곳에 설립된 교회의 예배를 선교사들이 직접 인도할 여유가 없었고, 한국어가 서투른 선교사들이 예배 전체를 인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함께 동역하는 조사들을 교육시켜 예배를 인도하게 했다. 당시 한국인 평신도가 인도한 예배는 3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예배 순서를 가급적 단순하게 구성하고 진행함으로써 예전적 요소가 충분히 포함되지 않았다. 둘째, 주제를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설교가 선교사들에게 쉽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공부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셋째, 지역에 산재한 교회들이 연합하여 예배를 드렸다. 1887년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의 1890~1900년 초 주일 오전예배는 10:30에 시작해 11:30에 마쳤다. 예배 순서는 찬송→기도→성경봉독→전도설교→기도→봉헌→찬송 등의 순서로 매우 간단했다. 이 순서는 마포 삼열 선교사가 제안한 예배순서와도 흡사한데, 마포 삼열 선교사의 제안은 찬송→기도→성서봉독→회중의 기도→찬송→성서교훈→기도→봉헌→찬송의 순서로, 찬송으로 시작하여 찬송으로 끝났다. 안동교회는 1909년 8월 8일(주일) 첫 예배를 드렸는데 매서 김병우를 포함하여 8명이 첫 예배에 참석했다. 첫 예배를 인도한 사람은 안동의 기독서원을 운영하고 관리하던 매서인 김병우였다. 안동교회의 주일 오전예배, 주일 오후예배, 외국인영어예배, 또한 새벽기도회의 시간과 장소는 오월번 선교사의 부인 새디(Sadie Welbon) 선교사와 안동주재 선교사들의 선교보고와 편지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하지만, 예배 순서와 내용을 알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는 1900년대처럼 거의 전무하다. 다만 당시 장로교 선교사가 활동했던 지역의 예배 형식과 내용은 거의 유사하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마포 삼열 선교사가 제안한 예배 순서가 초기 안동교회의 예배 순서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또 이 시기에는 1911년 가을, 안동교회 초대 담임으로 부임한 김영옥 목사가 안동교회 예배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 김영옥은 평양신학교 교수로 사역한 곽안련 선교사에게 사사 받았기 때문에 예배 신학 및 예배내용과 순서 등에 있어서 곽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2) 주일 오전예배 및 오후예배 안동교회의 첫 예배의 형태와 시간에 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새디 선교사의 다이어리와 다른 선교사의 선교편지, 선교보고에 따르면 주일 오전예배, 오후예배, 외국인예배가 존재했다. 특히 주일 오전예배는 10시 30분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사료된다. 또 주일 외국인예배, 즉 선교사와 가족들을 위한 영어예배 시작 시간이 오후 4시 혹은 4시 30분으로 추론되는 바, 주일 오후예배는 오전예배를 마치고 점심 식사 후인 1시부터 4시 30분 사이일 것으로 추측된다. 주일 오전예배의 정확한 순서도 찾을수는 없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따른 예배원칙과 미국 북장로교 출신 선교사가 인도한 예배순서에 따랐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주일 오전예배 시간은 안동교회가 창립된 지 1년이 지나 ‘ㄱ’자 예배당을 신축하고, 1910년 11월 13일(주일)부터 20일(주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 길선주 목사를 초청하여 가진 특별부흥집회 시간에서도 짐작해볼 수 있다. “평일 집회는 오전 10시에 속개되었고, 집회 마지막 날인 20일은 주일로 오전 10시 30분에 시작됐으며 만원을 이루어 예배당이 꽉 찼다”는 기록이 있다. 주일 오후예배 시간의 경우, 당회록은 보다 구체적인 예배시간을 추측하게 한다. 1916년 11월 8일 당회록에 따르면 주일 오후 2시 30분에 세례 7인, 학습 5인에 대한 성례식이 있었다. 그 이후의 당회록에도 성례식은 계속해서 주일 오후 2시 30분에 있었다. 세례식과 성찬식만 별도로 가졌기 보다는 오후예배 시 함께 가졌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1910년대 주일 오후예배시간은 2시 30분으로 적시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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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량 선교 130주년 기념, 제12회 안동지역 역사포럼경안노회 유지재단과 안동교회(김승학 목사 시무)는 6월 22일 안동교회 100주년기념관 영곡아트홀에서 ‘130년 전(前) 배위량 선교사의 첫 걸음 - 안동지역 근대화의 시작’을 주제로 기독교 역사포럼을 개최했다. 안동교회는 지난 2012년부터 안동지역 기독교 역사포럼을 통해 그동안 잊혀진 믿음의 선배들과 거룩한 사건들을 발굴하고 조명해 왔다. 이번 포럼은 그 일환으로 배위량 선교사 안동선교 130주년을 기념하고자 마련됐다. 경안노회장 임보순 목사의 기도를 시작으로 황석웅 박사(애명복지교회), 이교남 목사(한국기독교 교회역사 주영연구소), 김승학 목사가 △안동지역 복지 근대화 △안동지역 학원 근대화 △안동지역 의료 근대화를 주제로 발제했다. 첫 발제자 황석웅 박사는 안동지역 복지선교사역을 소개했다. 그는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북 북부의 복지선교는 지난 100여 년 동안 경안기독자매원, 신행원, 경안신육원, 경안성로원, 안동복지원, 노인대학과 지역아동센터, 돌보미 사업 등으로 확대했고,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을 공감하며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국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한 섬김과 나눔으로 교회가 복지선교의 사명을 감당함으로써 기독교 사회복지 측면에서 지역사회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전했다. 두 번째 발제자 이교남 목사는 경안신학원을 통한 학원선교 사명을 조명하며 “경안신학원은 1912년 지역교회를 지도해 갈 여성 지도자를 양육할 목적으로 세워진 여자성경학원에서 시작되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폐원되었다가 ‘경안고등성경학교’라는 이름으로 다시 개교했고, 그 후 ‘경안성서신학원’과 ‘경안신학원’으로 개명되었다”면서 “경안신학원은 지난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많은 영적 지도자들을 양육하여 대한민국과 지구촌 곳곳에 파송해온 작지만 강한 선지학교라고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김승학 목사는 안동의 의료 사역을 소개했다. 김 목사는 “의료선교는 1909년 10월 1일 의료선교사 별리추가 안동선교부에 부임함으로써 문을 연 안동성소병원으로부터 시작됐다”며 “당시 성소병원은 현재 안동교회 내 선교사 임시사택에서 환자를 진료하기 시작하다가 1914년 금곡동 177번지로 이전하여 109년 동안 한 자리에서 영육을 치료하는 하나님의 병원으로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김승학 목사는 이번 포럼과 관련해 “130년 전 배위량 선교사의 첫 발걸음이 단순히 교회 역사가 아니라 안동의 근대화를 이루는 첫 발걸음이었음을 알게 되었다”면서 “안동지역 기독교 역사포럼이 코로나로 인한 침체를 극복하고 복음의 열정을 새롭게 하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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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노회, ‘구미강동교회 목사 최광락 씨의 위임목사 공동의회 위임해약 결정’ 받아들여예장합동 경북노회(노회장:서성수 목사)가 제192회 1차 임시회를 5월 12일 구미강동교회당에서 갖고, 구미강동교회 대리당회장 서성수 씨가 청원한 ‘목사 최광락 씨의 위임목사 공동의회 위임해약 결정’에 대한 청원을 허락했다. 앞서 경북노회는 4월 3일 열린 제192회 경북노회 정기회에서 구미강동교회 장로 박세관 씨 외 15인이 청원한 ‘구미강동교회 담임목사 위임해지를 위한 공동의회 소집’ 청원을 허락하고, 공동의회 소집을 위한 대리당회장으로 서성수 목사를 파송했다. 이후 구미강동교회에서는 4월 16일에 실시된 공동의회를 통해 최광락 목사의 위임목사 해약이 결정된 바 있다. 이로써 최광락 목사는 예장합동 헌법 정치 제17장 제2조(권고 사면)에 의해 5월 12일 자로 구미강동교회 위임목사의 지위를 상실하게 됐다. 이날 회의에 앞서 개회예배는 노회장 서성수 목사의 인도로 드렸다. 부노회장 설경환 장로의 대표기도 후 서성수 목사는 설교에서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 나가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축도는 증경노회장 김진덕 목사가 했다. 한편, 이날 경북노회는 부노회장 전용표 목사의 반계교회 위임목사 시무사면 청원 건, 전용표 목사의 경중노회로 이명 청원 건 등의 안건도 함께 처리했다. 전용표 목사는 경중노회 소속 의성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됐다. 아울러 경북노회는 공석이 된 목사부노회장에 대한 보선을 시행하기로 결의하고, 동암교회 한유도 목사를 부노회장으로 선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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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13·끝)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13·끝) 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13. 안동지역 최초의 성경학교, 안동여자성경학교 / 1914 (2) ‘인노절기념성경학교’는 일제 강점기 때는 일제에 의해서 강제로 학교가 폐쇄되었지만, 해방 후에 이원영 목사는 무너진 교회를 위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경안고등성경학교’라는 이름으로 다시 개교했고, 그후 ‘경안성서신학원’으로 개명되었다가 ‘경안신학원’으로 다시 개명되었다. 뿐만 아니라 2005년 3월 10일 개교한 경북 북부지역의 유일한 대학원 대학교인 ‘경안신학대학원대학교’가 개교하게 되었는데, 여자성경학교가 경안대학원대학교의 모체(母體)가 되었다. 비록 경안신학원은 안동이라는 소도시에 위치했지만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을 생각한다면 진정으로 큰 학교라고 할 수있다. 이 학교에서 가르치고 공부하고 신학훈련을 받았던 사람들 중 한국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많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69회에 걸쳐 배출한 경안신학원의 총동문은 무려 1,800여 명이나 된다. 이들은 국내에서, 혹은 세계 열방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살아가고 있다. 동문으로는 배흥직·박승팔·권오현·문은식·김원진(1기), 진정수·이기형·김봉태(2기), 이금석·박명서·김달훈(3기), 임기석·김태환(8기), 조기홍(9기), 김점향·장성덕(10기), 천병선·강태원(11기), 김광식(15기), 김삼환·신종대·장세문(16기), 이광선·조석규(17기), 조준래·이만규(20기) 등이다. 교사로 가르쳤던 사람들 중 이원영, 김광현, 김기수 목사는 교단 총회장을 역임했으며, 신학교에서 수학했던 인물 중 교단 총회장이 된 사람은 이원영, 이광선, 김삼환, 김태영 목사 등이다. 경안신학원은 지금까지 9명의 총회장과 전국적으로 100여명의 노회장을 배출한 명문(名門) 신학원이 되었다. 결론 안동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신 땅이다. 베어드 선교사가 탐색을 위한 목적으로 1893년 5월 5일 안동을 방문함으로써 안동 땅에 복음의 씨가 뿌려졌고, 그후에 발생할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에 맡겨졌다. 그 후 권서인과 매서인들의 헌신적인 성경판매, 그리고 대구에 주재하던 선교사들의 순회전도는 안동의 복음화를 위한 기경(起耕)과도 같았다. 더욱이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한 선교사 총회에서 1908년 안동 선교부(Andong Mission Station) 설립이 결정됨으로써 안동지역의 체계적인 복음화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선교를 책임지는 안동선교부의 설립으로 안동지역에 복음이 본격적으로 전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09년 안동선교부 주재 초대 선교사인 소텔의 순교는 안동 땅에서 앞으로 펼쳐질 복음의 개화(開花)를 미리 볼 수 있게 하였다. 더욱이 비교적 다른 지역에 비해 빠른 1911년 11월 16일 한국인 김영옥 목사에게 안동에서 목회 할 기회가 주어진 것과 안동선교부에 속한 선교사들의 헌신 또한 결정적으로 복음전파의 속도를 가속화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안동은 오묘한 섭리 가운데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은혜의 땅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안동 땅에 처음 복음이 전해진 후 얼마 되지 않은 기간 동안 있었던 잊혀지고 잃어버린 거룩한 일들을 최대한 찾아 본 소고(小考)에 기술했다. 특히 본고는 안동 땅에서 처음 발생한 기독교와 관련된 일들을 찾아내려는 작업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안동 땅을 밟은 첫 선교사인 베어드, 비봉·국곡·풍산 등 안동지역의 첫 교회들, 안동지역의 첫 학습자인 홍재삼, 안동선교부 초대 주재선교사인 소텔, 안동지역의 최초 근대서점인 기독서원, 안동의 첫 근대병원인 성소병원, 안동지역에 건축된 첫 선교사 사택, 안동지역의 첫 한국인 목사인 김영옥(金泳玉), 안동지역에서 최초의 당회인 안동교회 당회, 맥클렁·캐더린·샤록스 선교사 등 안동지역 초기 교회음악 지도자들, 안동지역 최초의 여전도회인 안동교회 여전도회, 그리고 안동지역에 건축된 최초의 신학교인 안동여자성경학교 등으로 그동안 깨어져 단절 상태로 있던 안동지역의 초기 기독교 이해를 위한 작은 작업이라고 사료된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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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서노회남선교회, 베트남 선교활동 펼쳐경서노회남선교회연합회(회장:편학봉 장로)는 지난 3월 20일~25일까지 베트남 선교활동을 다녀왔다. 이번 방문은 상주지역 초교파 모임인 실로암회(회장:김동봉 장로)가 베트남의 꼰돔 닥그라이 지역에 세 교회를 건축하고 헌당 예배를 드리는 일정에 함께 참여한 것으로, 현지에 200만원 상당의 의약품과 생필품을 전달했다. 실로암회는 상주교회에서 파송한 퐁 목사가 현지 지도자와 긴밀한 협의를 함으로 4,000만원을 지원해 세교회(닥독교회, 닥호이2교회, 브롱미교회)를 건축하게 됐다. 위 세 교회는 다낭시에서 버스로 약 5시간 걸리는 소수민족 지역에 있으며, 대부분 기존 교회 예배당이 협소하고 낡아 재건축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경서노회남선교회연합회는 2019년 3월 상주시찰회와 베트남 다낭지역 의료봉사활동을 한 바 있다. 그 후 4년만에 의료선교단장(이상기 장로)이 실로암회와 동역할 수 있는 가교역할을 하여 함께 선교활동을 펼칠 수 있게 됐다. 한편, 이번 베트남 선교활동에서는 베트남기독선교회 총회를 방문하고 총회 형편을 청취하는 시간을 가졌다. 베트남기독선교회총회는 건축 중인 총회 건물을 통해 베트남뿐만 아니라 동남아지역의 선교 전초기지를 확보하여 목회자들의 교육, 각종 선교 활동 지원 등을 목적으로 건축하고 있다. 그러나 재정이 어려워 10여년간 겨우 6층 건물 골조만 완성한 형편이었다. 이에 참석한 회원들은 베트남기독선교회총회를 위해 함께 통성기도를 한 후 적은 물질이지만 선교비를 전달했다. 이번 선교지 방문에는 경서노회남선교회연합회 편학봉 회장을 비롯해 김광현 장로, 김재수 장로, 김봉동 장로, 이재원 장로, 구정환 장로, 장일규 장로, 서정태 장로 등 15명이 참여했다. /자료 제공=김재수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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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12)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12) 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문 1. 안동 땅을 밟은 첫 선교사, 베어드 2. 첫 교회들, 비봉·국곡·풍산교회 3. 안동지역 최초의 학습자, 홍재삼 4. 안동선교부 초대 주재선교사, 소텔 ............................................... 11. 안동지역 교회의 첫 당회 12. 안동지역 최초의 여전도회 13. 최초 성경학교, 안동여자성경학교 결론 13. 안동지역 최초의 성경학교, 안동여자성경학교 / 1914 (1) 1908년 안동선교부가 세워진 후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성경공부 열풍이 불게 되었다. 안동선교 초기인 1910년 선교사들의 보고에 의하면 영주 내매에서 개설되었던 6일간의 성경공부 모임에 무려 270여명의 남자들이 참여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듬해인 1911년에는 더욱 빈번한 성경공부 모임이 있어, 8차례에 걸쳐 1,340명이 성경공부 모임에 참여했다. 안동지역의 성경공부는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것을 본 선교사들은 앞으로 지역 교회를 지도해 갈 지도자를 양육할 목적으로 1912년 여자성경학원을 세웠다. 여자성경학원이 먼저 세워진 이유는 당시 교회에서 예배조차 중간에 휘장을 치고 드리고, 정서상 작은 공간에서 남성과 여성이 함께 공부할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여성이 여성을 가르칠 수 있는 여자성경학원이 먼저 세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여자성경학원은 별도로 신축된 건물이 아니라 선교사 사택을 이용하였는데 로드는 마룻바닥에 150명이 앉을 수 있는 규모였음을 밝히고 있다. 웰번 선교사의 부인인 새디(Sadie) 선교사가 1910년 6월 미국에 있는 친구들과 후원자들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구(舊) 안동교도소에 위치했던 오월번 선교사 사택에서 여성을 위해 매주 목요일마다 부인성경공부반이 열렸는데 첫 번째 모임에 무려 75명이 모였지만 진심으로 성경공부를 원하는 사람을 추려낸 결과 25명으로 한 반을 구성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여성성경공부반은 일주일에 두 번씩 웰번 선교사 사택에서 모여 새디 선교사가 월요일에는 젊은 여성반, 목요일에는 중년 여성반을 인도하였다. 특히 1914년 안동선교부에 부임한 윈(Winn) 선교사는 보다 체계적이고 확대된 성경학교를 운영하게 되었다. 그 결과 여자성경학교는 1920년 4월 10일 남녀 성경학교로 확대개편 되었다. 이때 윈 선교사는 성경학교의 교장이었고, 당시 안동선교부에서 동역하던 크로더스 선교사와 앤더슨(W. J.Anderson) 선교사는 교사였다. 개교 첫해인 1920년 가을, 비록 독립된 학교 건물은 없었지만 무려 130명이 등록했으며 성소병원 진료실에서 수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위생, 산수, 한문, 음악, 개인전도법도 가르쳤다. 안동의 기독교를 흔히 학자들이 ‘성경 기독교’라고 하는데 이것은 1912년부터 시작된 성경학교의 공(功)이 큰것 같다. 선교사들은 기독교 경전(經典)인 성경을 가르치고 성경대로 살 것을 가르쳤고, 이미 유교의 경전을 배우고 경전대로 살던 안동의 사람들은 이것을 비교적 쉽게 수용할 수 있었다. 이런 안동인의 정서와 초기 선교사들이 지향한 성경공부가 절묘하게 일치해 안동에 복음이 순조롭게 정착하는 데 일조하게 된 것이다. 1920년 성경학교가 개원된 후에도 윈 선교사는 교장으로서 학교에 필요한 교사와 생활관 건립을 위해서 전력을 다했다. 하지만 1922년 이질로 별세한 후 이 노력은 중단되는 듯했다. 더욱이 윈 선교사의 부인인 캐더린 선교사도 평양신학교 강사로 안동을 떠났다. 이즈음 안동의 교회들은 윈 선교사를 기억하며 성경학교 건물을 건축할 계획을 세우고 모금운동을 하고 있었고, 미국으로 간 윈 선교사의 부인인 캐더린 선교사 역시 이 사실을 알고 미국 교회와 친지들로부터 모금을 해 안동으로 돌아와 성경학교를 건축하게 된 것이다. 학교 이름은 처음에 단순히 ‘성경학교(Bible Institute)’였지만, 새로운 교사와 생활관 건물이 준공된 1925년부터 ‘인노절기념성경학교(Roger E.Winn Memorial Bible Institute)’로 개명되게 되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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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목사】 - 교회의 본질김 영 식목사 영남지역총연합회 총회장 순복음구미교회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3:14~15) 본문은 사도 바울이 그의 제자인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에 파송하면서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즉, 우리는 먼저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고 사역과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교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교회는 이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딤전3:15상) 사도 바울은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이 ‘집’은 헬라어로 ‘오이코스’라는 단어인데 ①보이는 건물을 가리키는 집 ②보이지 않는 집 즉, 가정, 가족을 의미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의 의미는 “하나님의 가정, 가족”이란 뜻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즉, 교회는 이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가족이요, 가정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성씨는 다르고 자라온 배경과 환경은 다를지라도 예수님의 보배로운 그 피로 죄에서 씻음을 받아 거듭나고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입니다.(딤전3:15중) 교회는 단순한 집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인데 그 하나님은 살아 계신 분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이 표현이 특히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과 살아 계신 하나님을 대비하여 사용할 때에 의도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에베소 시에는 당시에 세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아데미 신전이 있었는데, 그 아데미 신은 젖이 9개가 있어서 무엇이든지 만족하게 먹일 수 있다는 풍요를 주는 신이라면서 숭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아데미 신은 죽은 신이요 우상이요, 따라서 그 신전은 공허한 건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이 거하는 교회만이 참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로,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 입니다.(딤전3:15하) 여기서 “진리의 기둥과 터”는 은유적 표현으로서 “진리를 견고하게 지지한다, 진리를 확고히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 주일마다 또는 교회에서 모일 때마다 진리가 선포되고,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되고 있습니다. 또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성도들이 배우고, 묵상하며, 실천하는 데 힘써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 위에 세워져서, 이 말씀이 교회와 모든 성도를 치리하고, 인도하고, 이말씀의 원리대로 우리는 세상을 분별하고, 이 말씀의 가치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진리의 터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증거하여야 합니다.(딤전3: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리가 무엇입니까? 여기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은 다양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럼 진리가 무엇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했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더욱 교회를 아끼고, 성경을 가까이하며,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고, 부지런히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성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올바른 진리’를 더욱 분명하게 전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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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10)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10) 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문 1. 안동 땅을 밟은 첫 선교사, 베어드 2. 첫 교회들, 비봉·국곡·풍산교회 3. 안동지역 최초의 학습자, 홍재삼 4. 안동선교부 초대 주재선교사, 소텔 ............................................... 11. 안동지역 교회의 첫 당회 12. 안동지역 최초의 여전도회 13. 최초 성경학교, 안동여자성경학교 결론 11. 안동지역 교회의 첫 당회, 안동교회 당회 / 1913년 안동지역에는 안동교회보다 앞서 설립된 교회들이 있었지만, 안동지역 교회 중에서 첫 번째로 당회가 조직된 교회는 안동교회였다. 해방과 6·25 전쟁의 혼란 가운데서도 보존된 안동교회 당회록 제1권의 표지에는 ‘안동읍예수교장로회당회록’라고 쓰여 있다. 다음은 1913년 7월 20일에 있었던 조직당회의 기록이다. 이때 김병우가 장로로 장립함으로써 안동교회 최초로 장로가 탄생하였는데, 그 결과 당회가 조직되었던 것이다. “1913년 7월 20일 주일에 안동읍 예배당에서 남녀 교우들이 모여 예배할 때에 김영옥 목사가 디모데전서 3장 1절-7절과 베드로전서 5장 1절-6절 말씀을 봉독하고 설교를 하고 기도한 후 오월번 목사가 노회의 허락을 의지하여 김병우씨를 장로 장립함을 공포하고 김영옥 목사가 장로와 교우에게 문답한 후 오월번 김영옥 권찬영 목사들이 안수하고 권찬영 목사의 기도로 장로장립하여 당회를 조직하고 찬송가 3장을 부른 후 오월번 목사의 축복기도로 폐회하다.” 다음은 안동교회의 역사적인 첫 번째 당회록의 내용이다. “1913년 8월 9일에 안동읍교회 제1회 당회가 오월번 목사 댁에 모여서 김영옥 목사가 오월번 목사를 회장으로 공천하매 회장이 회장석에 앉아 시편 15편을 낭독하고 김병우 장로로 기도케한 후 개회하다. 참석회원은 목사 오월번 김영옥 장로 김병우 제씨더라. 8월 14일에 문답하기로 회중이 가결하고 예배당 건축하기 위하여 수금위원을 남자 12인 여자 12인을 택하기로 가결하다. 회장이 김영옥 목사로 기도하게 한 후 폐회하다. 회장 오월번, 서기 김병우” 그리고 1913년 8월 14일에 있었던 제2회 당회록에는 6인 세례와 3인의 학습을 결의하고 8월 17일 주일 오후 2시에 세례와 함께 성찬을 베풀었는데 성찬에 참예한 수는 66명이었음을 기록하는 바, 이때 당회 조직 후 첫 성찬의 집례자는 초대 김영옥 목사였다. 안동교회가 설립된 후 교회의 사역에 중요한 역할을 하던 선교사가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회가 조직되자 조직을 위한 당회를 마치고 한인인 담임목사에게 첫 세례식과 성찬식 집례를 양보한 것이다. 이것은 안동에 주재하고 있던 선교사들의 크나큰 배려였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불과 5일 전에 있었던 안동교회 첫 당회의 회장은 웰번 선교사였기 때문이다. 이미 언급한 대로 1902년에 설립된 세 교회 중 비봉교회는 1915년 김충한이 장로로 장립함으로써, 풍산교회는 1920년 정봉모가 장로로 장립받음으로써, 마지막으로 국곡교회는 1923년 김병일이 장로임직을 받음으로써 첫 당회가 조직되었다. 비록 안동교회는 이 세 교회보다 7년 늦게 설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년 혹은 10년 앞서 당회가 조직됨으로써 안동지역의 중심교회로 발돋움하게 되었으며, 지난 100여 년 동안 안동의 중심교회, 그리고 모범적인 당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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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목회자 성경연구원 포항지부국제목회자 성경연구원(이하 목성연) 포항지부(회장 김형진 목사, 예닮교회)는 지난 2월 7일 오전 9시 30분부터 8일 오후 5시까지 포항장성교회(박석진 목사)에서 ‘사도행전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번 세미나 강사로는 김대복 목사(대구남광교회 파송선교사)가 초대돼 강의를 진행했으며, 40여 명의 지역 목회자가 참석해 시간마다 말씀과 기도에 집중했다. 목성연 포항지부는 그동안 ‘출애굽기 세미나’, ‘민수기 세미나’, ‘에베소서 세미나’ 등을 통해 목회자들이 구속사적 관점으로 말씀을 바르게 깨닫고, 하나님의 마음을 올바르게 전하며, 은혜로운 말씀 사역을 이어가도록 지역의 목회자들을 섬겨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지난 몇 년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세미나를 중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올해 들어 다시 세미나를 개최함으로써 지역 목회자들에게 도전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이번 세미나를 통해 큰 은혜를 받았다는 A 목사는 “사도행전 속의 초대교회 때처럼 성령의 능력을 받아 땅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완수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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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8)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8) 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문 1. 안동 땅을 밟은 첫 선교사, 베어드 2. 첫 교회들, 비봉·국곡·풍산교회 ............................................... 9. 안동지역 초기 교회음악 지도자들 10. 안동지역 최초 선교사 사택 ............................................... 13. 최초 성경학교, 안동여자성경학교 결론 9. 안동지역 초기 교회음악 지도자들 / 1912년 소텔 선교사의 부인 캐더린 선교사는 남편이 하늘나라로 간 후 대구에서 1년 2개월 동안 사역을 계속하면서 안동교회에 풍금을 기증했는데, 1912년 경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풍금이 안동에 도착했을 때 미국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엘라 맥클렁(Ella McClung) 선교사는 이미 안동 선교부에 주재하고 있었고, 그는 안동지역의 교회음악에 가장 먼저 영향을 준 사람이다. 엘라 맥클렁 선교사는 초창기 안동에서 교회음악 외에 여러 사역의 중심역할을 했다. 그는 1928년에 조직된 경안노회 여전도회 연합회의 1회부터 5회(1933년)까지 실무 책임자인 총무 역할을 맡아 수고했다. 특히 피아노 전공자였던 엘라 맥클렁 선교사는 1928년 1월 안동교회가 찬양대를 조직했을 때 반주를 맡아 수고한 것으로 여겨진다. 처음에는 찬양대원 전원이 여성이었기 때문에 완전하지 못한 찬양대였다. 그러나 후에는 남성대원도 참여함으로 보다 완전한 찬양대의 모습을 갖추어 4부로 찬양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에도 안동교회 찬양대의 오랜 반주자요 지휘자였던 엘라 맥클렁 선교사는 어린이들의 노래 지도도 도맡아 했다. 신월향 집사의 기억에 따르면 계명학교 학생들을 1주일에 하루는 선교사 사택으로 초청하여 찬송가를 가르쳤다는 것이다. 매 주일 하루 1시간씩 5~6곡의 찬송가를 배웠다고 한다. 따라서 엘라 맥클렁 선교사는 안동의 근대교회 음악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안동지역의 초기 교회음악에 공헌한 두 번째 사람은 1914년 안동선교부로 파송된 윈(Roger Earl Winn) 선교사의 부인인 캐더린(Catherine Winn) 선교사로 그는 안동 시(市) 피아노 선생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윈 선교사는 크로더스 선교사와 함께 안동선교부의 여자성경학교를 시작한 분이다. 그리고 그의 부인인 캐더린 선교사는 피아노 전공자로 권애라 선교사와 함께 안동지역의 교회 음악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편, 소텔 선교사의 부인인 캐더린(Katharine M. McClung) 선교사가 안동교회에 기증한 풍금은 안동지역의 교회음악 발전에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봄나들이’ ‘꽃 피는삼천리’ ‘무찌르자 오랑캐 몇백만이냐’ ‘초생달’ ‘봄 오는 소리’ 등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권태호가 어렸을 때부터 안동교회에 출석했고, 안동교회에서 선교사로부터 풍금을 배웠기 때문이다. 맥클렁 선교사와 캐더린 선교사의 열정과 영향은 훗날 권태호라는 소년에게 영향을 줌으로써 한국음악에 공헌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권태호는 1903년 9월 안동 율세동, 일명 밤샛골에서 안동의 초창기 기독교인이자 나중에 평양신학교를 거쳐 목사가 된 권중한과 모친 김귀행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권중한의 가정은 무척 부유해 안동의 3대 부호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신앙적 환경 속에서 권태호는 자연스럽게 서양음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소년 권태호는 안동교회에 다니던 1917년 안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부터 안동교회 반주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때 이미 권태호는 찬송가 172곡 전부를 4부 화음으로 연주할 수 있는 천재성을 발휘했다. 이듬해인 1918년부터 16세인 권태호는 정식으로 안동교회 반주자가 되었고, 특별예배 시에는 독창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권태호는 일본 유학을 통해 한국음악과 교회음악에 중요한 음악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세 번째로 안동의 교회음악에 공헌한 사람은 엘라 샤록스(Ella J. Sharrocks) 선교사다. 사은라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 알프레드 샤록스 선교사의 장녀다. 1899년 내한한 부친 알프레드 샤록스 선교사와 모친 모리는 의과대학 교과서인 해부학·생화학·생리학·약물학에 관한 책을 역술했다. 그 후 북장로교 평안북도 선천 선교부가 개설되면서 그곳의 의료선교사로 파견되었다. 알프레드 샤록스 선교사는 1919년 미국 미네소타주 로체스터에서 별세하였지만 그의 부인은 1938년까지 한국선교에 헌신하였다. 그 후 알프레드 샤록스 선교사의 딸인 엘라 샤록스 선교사는 간호선교사로 부친의 뒤를 이어1926년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였다. 벌코비치 선교사가 성소병원의 3대 원장으로 재임할 때 간호부장이었던 엘라샤록스 선교사는 1952년까지 안동, 대구, 서울 등지에서 사역했는데, 특히 안동에서 선교목적으로 병원직원들로 찬양대를 조직하였다. 이 찬양대는 짬짬이 시간을 내어 연습한 찬송을 환자들 앞에서 연주함으로써 환자들을 위로했다. 특히 병원에서 발표했던 곡들을 안동교회 주일예배 시 특별찬양을 가짐으로써 안동교회 찬양대의 효시가 되었다. 엘라 맥클렁 선교사, 캐더린 선교사와 엘라 샤록스 선교사는 1928년 1월부터 시작한 안동교회 찬양대 탄생의 주역이 되었던 것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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