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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제일교회 필리핀 두마게티 동성비전교회 의료선교 사역봉화제일교회(담임목사 권정호) 의료선교단은 지난 10월 26일부터~31일까지 필리핀 네그로스 오리엔탈의 수도인 두마게티 동성비전교회에서 의료선교사역을 실시했다. 이번에는 특히 봉화제일의원 최예환 원장(봉화제일교회 안집), 영주 김대순치과의원 김대순 원장(영주동산교회 장로)이 함께 참여했으며, 총 16명의 봉사자들이 5박6일 동안 419명을 치료하며 의료사역을 펼쳤다. 두마게티 지역 주민들은 평균 연령이 60세로, 가난하여 병원을 갈 수도 없고 이들에게 의사는 한 번 만나기도 어려운 사람들이다. 권정호 목사는 “치료를 받으면서 감사의 말을 하는 그들이 하나님을 알아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기를 간절히 기도했다”고 말했다. 김대순 장로와 최예환 집사는 “의료환경이 열악한 섬 지역의 주민들을 진료하며 마음이 아팠지만, 오히려 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소감을 말했다. 선교팀장 안병주 장로는 “필리핀 두마게티는 봉화제일교회 선교팀이 3번째 실시한 의료선교지다. 김대순 원장과 최예환 원장은 진료받기 위해 밀려오는 지역주민들을 위해 점심도 거른 채 구슬땀을 흘리며 진료에 임했으며, 모든 봉사자들이 예수 사랑을 실천하는 기회가 되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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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 목사의 논문 원문(4)- 목사 · 애국자 · 인간 박상동 목사목사·애국자·인간 박상동 목사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박상동 목사 (朴尙東, 1894~1949) 들어가면서 안동교회 제4대 담임목사(1925~1927)로 시무한 박상동(朴尙東, 1894~1949) 목사는 아버지가 목사였고, 목사의 아들을 두었으며, 한국교회에서는 단 한자리 수에 불과한 직계목사 손자를 둔 4대 목사가문(家門)의 중심이었다. 그의 조부(祖父)·부친(父親) 뿐 아니라 그 역시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였다. 그래서 고등학생 신분으로 6개월의 옥고(獄苦)를 치르기도 했다. 극일(克日)하기 위해 박상동 목사는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일본유학을 떠났다. 일본에서 4년 동안 신학을 공부하며 오사카(大版)와 고베(神戶)에 거주하고 있던 재일교포를 위해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했다. 귀국한 후 안동교회를 섬기면서 전도, 사회봉사, 교회조직의 변화, 다음세대의 신앙교육 등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의 헌신을 통해 안동교회는 새롭게 리모델링(Remodeling)되어 시대에 맞는 교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박상동 목사는 누구보다 재일교포를 사랑했기 때문에 이민자의 삶의 고단함과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고 안동교회 사역을 중단한 채 일본으로 건너간 예민한 영성의 사람이었다. 그는 오사카와 나고야, 그리고 인근 지방의 복음화와 교회개척에 거룩한 발자취를 남겼다. 박상동 목사는 현해탄을 넘나들며 한국과 일본에 복음을 전한 위대한 전도자였던 것이다. 그는 당시 한국과 재일교회를 위한 사도바울과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일제 말엽 그는 교포들의 인권개선노력과 민족독립운동의 죄목으로 또 다시 옥고를 치렀다. 생사(生死)의 고비에서 해방과 함께 석방되어 귀국한 박상동 목사는 끝없는 복음의 열정으로 교회를 섬기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박상동 목사는 복음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초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의 등에 십자가를 지는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성도와 자녀에게는 인자하고 겸손한 목사요 아버지였다. 그는 음악을 좋아했으며 자식들에게 사랑의 아버지로 기억되고 있다. 이 글은 박상동 목사의 일생을 기록한 소고(小考)이다. 하지만 이 글에는 잊지 않고 기억해야할 믿음의 가문, 믿음의 사람의 거룩한 흔적을 포함하고 있다. 이제 독립운동가요, 복음전도자요, 교육자요, 아버지요, 음악을 좋아한 사람이요, 목사요, 인격자인 인간 박상동을 감사한 마음, 기대하는 마음으로 만나보자. 1. 마태복음 1장의 ‘낳고, 낳고, 낳고’를 재현(再現)한 가정 마태복음 1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 그 족보는 아담에서 시작하지 않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한다. 비록 아담이 인류 최초의 사람이긴 하지만 범죄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고,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신 믿음의 역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육신의 족보라기보다는 믿음의 족보요 하늘나라 백성의 계보라고 할 수 있다. 안동교회 4대 담임목사로 사역한 박상동(朴尙東, 1894~1948) 목사 집안도 초창기 한국교회 믿음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는 명문가문이다. 오늘도 박상동 목사의 가문은 한국교회의 살아있는 믿음의 역사를 중단 없이 써가고 있다. 130년의 한국기독교 역사에서 현재까지 4대 직계목사 가문을 이어가고 있고, 곧 5대 목사가 배출될 예정이라고 한다. 사실 목사의 아들이 목사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목사 아버지는 자신이 겪은 험난한 목회의 길을 자녀들이 겪기를 원치 않을 뿐 아니라 목사 자녀들도 목사 아버지의 좁은 목회의 길을 보며 쉽게 그 길을 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상동 목사는 아버지가 걸어간 목회의 길을 걸었을 뿐 아니라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목사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다. 1) 1대 박영화 목사 박상동은 1894년 경북 의성군 비안면(比安面) 쌍계리(雙溪洞)에서 박영화(朴永和, 1859~1923)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박영화는 1902년경에 김인옥, 이성준의 전도를 받고 전 가족(부친인 박용한과 3남 8녀) 모두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군위군 호암교회에 출석하다가 그 다음 해인 1903년, 많은 핍박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쌍계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하지만 박영화는 1908년 세례를 받았다. 그는 특별히 교육에 관심을 갖고 1910년 농촌지역 복음화와 인재양성을 위해 쌍계교회에 정림학교(1920년 폐교)를 설립하여 운영한 명망 있는 지역의 지도자였다. 더욱이 박영화는 당시 선교사의 조사(助事, Helper)로 활발히 사역한 인물이었다. 경안노회 70년사는 그가 의성 지역의 유력한 조사였음을 밝히고 있다. 더욱이 경상노회록에 의하면 박영화는 쌍계교회 장로로 임직 받고 노회 총대로 참석할 정도로 당시 의성 지역의 교회지도자였다. 1914년 12월 30일 부산진 여학교에서 회집된 제9회 경상노회 회의록에는 그의 이름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서기가 회원을 조명하니 참석원은 목사의 방혜법, 권임함, 김기원, 홍승한, 심취명, 김영옥, 왕대선, 매견시, 맹호은, 예알배, 라대벽, 권일두, 권찬영, 인로절, 제씨요. 장로의 허 일, 황재은, 정재순, 박영화, 박상순, 최경호, 리준섭, 권덕생, 김덕경, 김응진, 김복명 제씨라. 이런 박영화는 1914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8년 제 11회로 졸업하고 동년 6월 19일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쌍계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시무했다. 그는 1919년 3·1 의성만세운동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룬 후 경남 거제시 사능면에 위치한 사능교회 초대담임 목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박영화 목사는 거제도와 통영 등 경남지역 초기 교회의 존경받는 목회자로 자리매김하였다. 2) 2대 박상동 목사 이러한 신앙적 분위기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박상동은 아버지와 기독교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기독교학교인 대구의 계성학교 출신으로, 부친과 함께 3·1 만세운동의 옥고를 치룬 후 일본 고베에 있는 칼빈계 고베중앙신학교(神戶中央神學校)를 졸업하였다. 졸업한 박상동은 1925년 귀국하여 안동교회 강도사로 부임하였다. 1925년 6월 17일 안동교회에서 소집된 제8회 경안노회록은 “신학졸업생 박상동씨를 노회장이 임시노회를 소집하는 대로 강도사로 세워주기로 가결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박상동은 안동교회 강도사로 시무하면서 평양신학교에서 별신학(別神學) 과정 1년간을 수학하였다. 그 당시 외국에서 공부한 사람이 장로교 목사가 되려면 평양신학교에 가서 1년 동안 공부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1926년 6월 16일 안동교회에서 회집된 제10회 경안노회에서 안동교회는 박상동 강도사를 동사목사로 청원하였고, 노회는 임사부에 맡겨 처리하도록 결의하였다. “안동교회에서 박상동 강도사를 동사목사로 청원하노니 허락 주시되 헌법대로 오는 9월에 장립허락까지 달라는 청원은 임사부로, 박상동에 목사장립을 위하여 별노회 소집은 회장에게 위임하기로 가결하다.” 결국 1926년 9월 1일 영주읍 교회에서 개회된 경안노회(제11회) 임시노회에서 안수 후 안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885년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41년 만에 직계(直系)로 부자(父子)가 목사 임직자가 됨으로써 아버지, 아들 목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3) 3대 박대선 목사 박영화 목사 가문의 직계 3대 목사인 박대선 목사는 1916년 경북 의성군 비안면에서 박상동 목사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1928년 파송 받아 오사카에서 순회목사로 일본에 파송된 부친 박상동 목사와 함께 일본에 체류하면서 1940년 일본관서학원대학교 영문과와 1942년 동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1955년 미국 보스톤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구약신학전공으로는 한국인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에 체류할 당시인 1940년부터 1942년까지 니시노미야시 한인교회의 담임전도사로 사역했으며, 귀국하여 1942년부터 1950년까지 평양 창광산교회, 박구리교회, 중앙교회, 서평양교회 등을 섬겼다. 박대선이 어렸을 때 사람들이 “넌 이담에 커서 무엇이 될래?”라고 물으면 서슴없이 “난 목사가 될 겁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 한 이 대답은 대학생이 되어서도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을 정도로 박대선은 소명의식이 투철했다. 특히 1945년부터 1950년 까지 평양성화신학교 교장대리로 학교를 책임지고 경영하였다. 박대선 목사는 1955년부터 1964년까지 서울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를 역임했고, 1959년부터 1962년까지는 서울 광화문감리교회 담임으로 목회를 이어갔다. (이하 내용은 논문원문 첨부파일 참조)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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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도내 4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통일광장기도회“아버지여! 저 북한 땅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에스더기도운동 대표 이용희 교수 집회 인도 제210회차 구미역광장기도회, 4주년 기념 예배 ‘통일선교사’·‘통일5분대기조’ 되어 복음통일 이뤄내자 지난 2일 저녁 8시 구미역 광장에는 “나가세 나가세 주 예수만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바치고 싸움터로 나가세”라는 씩씩한 찬송 소리가 온 거리에 메아리쳤다. 전국통일광장기도연합 소속 구미통일광장기도회가 4주년(제210회차)을 맞은 날 기도회 현장의 광경이다. 이날 구미와 인근 지역에서 모인 목회자와 성도 40여명은 “아버지여! 저 북한 땅을 구원해 주시옵소서”라며 한 목소리로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했다. 특히, 이날은 4주년을 기념해 에스더기도운동 대표 이용희 교수가 직접 구미를 찾아 말씀을 증거하기로 되어있어 기도회의 의미가 여느 때보다 한층 더 뜻 깊은 날이었다. 이날 이용희 교수는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딛전5:8)를 살펴볼 때 그리스도인은 가족과 친척, 민족, 열방에 대한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다”고 말했다. 특히, “하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심(보내신 지역)과 이 시대를 살게 하신 것(보내신 시대)을 볼 때, 조국(祖國) 대한민국에 통일(統一)을 숙제로 주셨고, 이 일을 잘 섬기라고 우리를 보내셨다”고 강조했다. 또, 북한 주민의 생존권 확보와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하고 개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법인 북한인권법이 미국에서는 2004년, 일본에서는 2006년 통과되어 북한 주민들을 보호해 왔건만, 부끄럽게도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금년 3월3일 우여곡절 끝에 통과된 점. 게다가 통일 당사국으로 통일을 준비해야 할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통일에 대해 무관심하고, 전혀 지식이 없는 것에 안타까워하며 독일처럼 통일광장기도회를 통해 더욱 많은 이들이 기도의 자리로 나와 ‘복음통일’을 앞당기자고 당부했다. 이 교수는 “기도가 식어가고 기도하지 않는 시대라지만, 놀랍게도 통일광장기도회만은 지역마다 새롭게 일어나고, 갈수록 늘어나 전국 40여곳으로 확대되었다”고 말하며, “이는 통일이 임박함을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징조이기에 도둑같이 다가올 통일 시대, 각자 감당해야 할 사명을 기도함으로 받고, 미리 잘 준비해 실제 통일이 이뤄졌을 때 사기꾼들과 이단들 보다 먼저 그들을 찾아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성애에 대해서도 큰 우려를 표했다. ‘동성애와 차별금지법은 교회를 파괴하는 법’으로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소리를 높였다. 성경을 거스르면 모두가 죄이지만 동성애는 이와는 수준이 다르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된 후, ‘동성애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이다’라고 설교하거나 말만해도 ‘2년 이하의 징역’에까지 처해지는 중죄가 된다는 것이다. 결국, 교회는 설교도 제대로 할 수 없어 교회로서의 사명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크리스천은 비(非) 성경적인 법이 만들어지지 말고, 성경적인 법이 세워지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날 기도회는 양무리교회(담임목사 진상권) 찬양팀의 찬양 인도 후 송정교회 최문선 목사의 기도회 인도, 이용희 교수의 말씀 증거, 김아브라함 목사의 기도회 인도, 진상권 목사(성시화운동본부 대표회장)의 축도로 진행됐다. 구미통일광장기도회에서는 4주년 기념으로 떡을 준비, 함께 나누며 이날을 축하했다. 연락처(010-3519-8967) 한편, 안동통일광장기도회는 2014년 9월 벧엘내과의원 손수인 원장(승리하는교회 담임목사)을 중심으로 매주 월요일 저녁 7시 안동역 광장에서 10여명의 안동 지역 목회자와 성도 등 40여명이 모여 북한 복음화와 평화통일, 동성애와 이슬람 반대를 위한 기도회를 계속하고 있다. 연락처(010-4061-9176) 울진통일광장기도회는 2014년 2월25일 2교회로 시작, 매주 화요일 저녁 8시 연호정공원에서 지역의 13개 교회를 중심으로 20여명이 복음통일을 위해 부르짖어 기도하고 있다. 기도회가 시작된 지, 만 2년2개월이 된 울진통일광장기도회는 1주년과 100회차를 기념, 강사초청 집회를 통해 울진 지역 교회와 성도들에게 통일 대비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연락처(010-7763-2134) 포항통일광장기도회는 한동대생을 중심으로 2014년 가을부터 2015년 겨울까지 이어지다 현재는 중단된 상태이다. 지역 교계 주도로 포항지역에 다시금 복음통일을 향한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되길 염원해 본다.(JESUS ARMY 학생대표 010-6318-3280) ‘눈물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12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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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113년을 맞은 ‘칠곡 숭오교회’(1904)경북 칠곡군 지역교회 가운데 1904년 4월 27일 설립됨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경복노회 숭오교회 113년 약사 1962년 1월 12일 칠곡군 시찰 사경회 기념사진 1950년대의 숭오교회 정경 2017년 현재의 교회정경- 우측에 증축된 모습(엘리베이터 4층 운행 및 화장실 2개 층)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진 1906년도 당시 사진(숭오동 715번지) 건평 18평 토관 예배당 여성도 두 사람이 찬송 부르는 모습과 둘러앉은 당시 성도들 정경 ‘행복과 미래가 있는 공동체’ 서성수 목사 숭오교회 숭오교회는 칠곡군 북삼읍 태평1길 21-8번지에 위치한 교회로 1904년 4월 27일 설립되어 올해로 113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현재 서성수 목사가 담임하고 시무장로 김태영 장로, 조영복 장로, 이상근 장로, 한광현 장로, 김경식 장로, 이재학 장로로 당회가 구성되어 있고 원로장로에 김장우 장로, 이상인 장로, 이시역 장로 은퇴 장로로 한재학 장로가 현재 출석하며 장립 집사 9명, 은퇴 권사 11명, 시무권사 10명과 서리집사 남녀 40명과 성도들이 섬기고 있다. 2017년 현재 세례교인 약 160명, 주일학교(유치부, 유초등부, 중고등부, 청년부)포함 약 220여 명이 금오산 뒷자락에서 신앙생활 하고 있다. 교회 장기 표어는 ‘행복과 미래가 있는 공동체’이며 2017년 표어는 ‘복음 진리로 삶의 우선 가치를 바로 세우자’(마6:33) 실천사항으로 ①진리의 말씀에 길들임 받는 성도. ②축복의 통로 되어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성도. ③열방과 이웃을 품고 선교에 주력하는 성도. 숭오교회의 설립 유래는 1901년 선산군 구미면의 상모교회 정인명 전도인의 전도로 당시 창립교인이 된 장운환 씨가 최초 신자가 되어 동년에 이해기, 조수근, 안명석, 박원실, 김성환, 한복동, 홍년표 등 제씨의 남신도와 이달선, 김분이, 이달년, 박두리 등 제씨의 여신도들이 매주일 30여 리의 먼 거리를 걸어서 선산 상모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1903년 정재봉, 오제세, 오인종, 장교린, 배암이, 한경빈 등 제씨와 다수의 여신도를 더 얻었으며, 동년 가을부터 많은 인원이 주일마다 상모교회로 가는 것이 불편하고 거리가 먼 관계로 김천의 월명교회로 출석하기로 의논하고 출석하게 된다. 그러던 중 성도들이 뜻을 정하고 기도하면서 이 지역에 교회설립을 작정하여 본격적인 기도와 함께 구체적인 추진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1904년 4월 27일에 교회가 세워지는데 교인은 약 50여 명이었다. 당시는 아직 예배당이 마련되지 못했기에 성명 미상이지만 성도의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다. 그것이 오늘날 숭오교회의 시초가 된 것이다. 이후 교인의 수는 나날이 늘어 가고 개인 집에서 예배드리기에 비좁고 불편하여 교회건축을 위해 온 성도들이 정성 들여 헌금하고 힘을 모아 1906년 숭오동 715번지에 건평 18평의 토관으로 예배당 건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진하게 된다. 숭오교회 설립 연월일 구체적인 자료는 소실되었지만 연로하신 분들의 구전을 통해서, 1904년 4월 27일이라고 전해지게 된다. 설립연도는 1904년이 확실하고 4월 27일 역시 오랜 역사 가운데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것을 연로하신 교우들의 증언을 취합하여 4월 27일로 확정하게 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교회사’에 보면 총회에 보고한 것이 1905년도에 숭오교회가 창립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우리 교회가 설립 될 그 당시 1903년도에 선산의 상모동 교회와 금릉의 월명교회가 설립되었고, 1904년도엔 칠곡의 왜관교회, 1905년도에는 칠곡의 숭오교회 외 20여 개 교회가 개척되었으며, 1906년도엔 칠곡의 복성교회가 설립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 숭오교회가 왜관교회보다 1년 늦게 기록된 것은 필자의 견해로 볼 때, 왜관교회는 당시 군청과 읍사무소와 인접한 관계로 행정적인 보고와 함께 설립연도의 기록이 쉬웠을 것이라고 생각되고 상대적으로 숭오교회는 당시 칠곡군과 금릉군과 경계선에 있는 관계로 행정적인 보고와 기록 등이 늦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에 보면 북삼면에 숭오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1905년 선교사 부혜리(傅惠利)의 전도로 신자를 얻어 설립자로 정재봉에게 성수로 인도자가 되면서 교회가 시작되었는데, 오제세를 집사로 하고 조사에는 정윤삼이 시무하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계속되는 특기할만한 숭오교회의 역사는 차기 호에 연재하기로 한다. 주소: 경북 칠곡군 북삼읍 태평1길 21-7번지 전화:054-973-1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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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자천교회(永川 慈川敎會)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52호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 773 이 교회는 1903년에 미국인 선교사 어드만(Erdman)이 신자(信者)들과 합심(合心)하여 지은 것으로 전국에서 보기 드문 한옥교회이다. 건물은 동서쪽으로 약간 긴 네모형태의 우진각(모임)지붕이며, 주 출입구는 양 측면에 두었다. 내부는 후면의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중앙부는 칸막이를 설치하여 남·녀석을 구분한 예배공간을 마련하여 구한말의 남녀칠세부동석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였다. 구조는 나지막한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그 위에 네모기둥을 세워 절충식 지붕틀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양식의 건물은 선교 초기에 구미인(毆美人) 선교사들이 지은 한·양 절충식(韓·洋 折衷式)으로, 개신교사(改新敎史)와 건축사(建築史) 연구의 자료적 가치를 담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안이와 선교사와 권헌중 장로의 노고재에서 만남 자천교회 설립 이야기 자천교회 이야기는 1898년 안의와 선교사의 경북 동부와 동북 지방의 2개월 전도여행에서 시작한다. 그는 대구에서 출발하여 영천을 거쳐 청송으로 전도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반면 권헌중은 안의와 선교사와 반대되는 길을 가고 있었다. 원래 자천교회 설립자 권헌중 장로는 경주의 작은 마을의 선비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서당 훈장이었다. 그가 서당 훈장으로 살아가고 있던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지배를 당하고 있는 시절이었다. 이로 인하여 일본 헌병들이 각 군 소재지를 장악하고 있었다. 민족의 암울한 현실을 바라보며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지사들은 일본 헌병들과 맞서 싸웠다. 이러한 탓에 낮에는 일본 헌병의 천국이요. 밤은 의병 천지였다. 일제로부터 당하는 고통은 면소재지에 있는 양반과 천민들이나 할 것 없이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 때문에 견디기 힘든 일제의 고통을 피해 고향을 등지고 자신들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권헌중에게 있어서도 고통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경주에 있는 한적한 곳의 선비로서 서당 훈장의 생활을 접고 청송군 현서면 수락이라는 곳에 이주하여 살게 된다. 하지만 수락에서의 생활도 길지 않았다. 그곳의 생활도 접고 또 다른 보금자리를 찾아 현서면 수락에서 대구를 향하고 있었다. 안의와 선교사는 영천을 거처 청송으로 선교 여행을, 권헌중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서 대구로 각자의 목적을 향하여 길을 가고 있었다.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던 이들의 만남은 영천시와 청송군의 경계를 잇는 ‘노고재’라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권헌중은 노고재에서 휴식을 하던 중 안의와 선교사를 만나게 된다. 권헌중은 당시 처음 만나는 외국 사람이었고, 모양새도 우리나라 사람과 달리 키와 눈과 코가 클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말을 서툴게 한 탓에 잘 알아듣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또 권헌중과 함께 동행하던 가족들과 노비, 머슴들은 자신들의 모습과 많이 다른 안의와 선교사의 모습을 보고 괴물이 나타났다고 소리를 치는 바람에 한바탕 웃는 일도 벌어졌다는 우스운 일화도 있다. 권헌중은 노고재에서 안의와 선교사와 첫 만남에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복음에 관해서 듣게 되었다. 안의와 선교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복음에 관하여 들은 권헌중은 대구로 이주 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보현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신촌면 자천리에 작은 초가삼간을 구입하여 그곳에 머물며 안의와 선교사와 왕래하면서 성경 말씀을 배웠다. 한국 초기 교회들의 역사가 대부분 그러하듯 자천교회 역시 작은 초가집의 사랑방에서 시작이 되었다. 권헌중은 자기가 살고 있는 초가집을 예배당 겸 서당으로 사용했다. 낮에는 서당으로 사용하며 한문을 가르쳤다. 저녁에는 함께 성경을 공부하였다. 초가집으로 시작된 자천 교회의 당시 교인은 서당에 다니는 문동과 권헌중을 따라온 노비와 머슴들이 전부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인 권헌중은 당시 나라에서 처음으로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 자신이 먼저 상투를 자르므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도 개방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데리고 있던 노비들의 문서를 태워버리고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었다. 복음을 받아들이므로 계급과 신분을 타파하고, 그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누었다. 복음에 대한 권헌중의 열심에 안의와 선교사도 덩달아 신이 나서 대구에서 자천까지 열악한 도로 상황을 뒷전으로 하고 자주 방문하여 성경에 관하여 토론하며 확실한 교인들로 만들어 나갔다. 초가집 사랑방의 자천교회의 모임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신자가 점점 늘어나면서 공간이 협소하였다. 따라서 초가집 사랑방이 아니라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대구 지방의 기독교 사립학교인 희도학교가 안의와 선교사에 의해서 대구제일교회 구내 초가집에서 1900년 11월 11일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1907년 10월 23일에는 신명학교가 부해리 선교사에 의해서 개교하게 된다. 대구를 중심으로 학교를 개교한 후 안의와 선교사는 1902-1910년 사이에 경북 각처 교회들에게 400원씩 보조하여 학교를 설립하게 하였고, 각 교회는 학부대신(현 문교부장관)의 인가를 얻어 소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당시 영천지방에 있는 교회도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름이 밝혀진 학교는 평천교회의 기독양덕학교, 신령교회의 흥화학교, 우천교회의 기독진도학교와 더불어 권헌중은 운영하던 서당을 폐하고 자천교회를 중심으로 2년제 학교인 신성소학교의 설립을 하였다. 하지만 자천교회가 설립한 신성소학교의 설립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권에서 ‘1913년 남학교를 설립하여 생도(生徒) 50명을 교육하다’ 라는 기록이 있다. 또 ‘경북교회사’에서는 ‘1914년 자천교회는 학교를 설립하여 생도 50여 명을 교육하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연대를 학교의 설립 연대로 볼 수 없다. 이는 학교가 설립한 후에 노회나 총회에 보고된 연대이기 때문이다. 노회 보고 연대를 기준과 2년 재 학교라는 것을 고려하고, 초가집 교회에서 목조건물 교회 건립을 고려해 볼 때 신성소학교 설립 연대는 대략 자천교회 목조 건물을 헌당 하던 때와 비슷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권헌중 장로가 자천교회를 중심으로 세운 신성소학교는 처음 남자 반을 모집했다. 그러던 중 안의와 선교사가 여자반도 모집할 것을 권헌중에게 권유했다. 그는 권유를 받아들여 여학생을 모집했지만 지원자가 없었다. 아무리 설득해도 지원자가 없어서 자신의 딸인 권수기씨를 입학시켜 여학생 1호가되었다. 후에 권수기씨는 신명여교에 입학하여 제2회 졸업생이 되었으며, 그 곳에서 교편을 잡았다. 권헌중은 자천교회를 중심으로 신성소학교를 설립하므로 복음의 요람으로 자천교회뿐만 아니라 교육의 요람으로도 자리를 잡게 되었다. 조용한 시골에서 글을 가르치던 선비 권헌중은 안의와로부터 받은 복음에서 출발하여 자천이라는 시골 동네에 초가집 예배당과 서당, 그리고 목조 기와의 ‘一子’형 예배당을 건립하여 복음 전도와 교육 사업에 힘을 기울어 왔다. 권헌중은 새롭게 건립된 예배당에서 여러 동역자들과 함께 영수의 직분을 가지고 교회를 섬겼다. 1915년 당시 권헌중과 더불어 서석희와 정해민이 자천교회 영수로 섬기고 있었다. 세 명의 영수를 중심으로 교회가 든든히 서가던 중 첫 번째 장로를 장립 할 수 있는 시기가 자천 교회에 찾아왔다. 교회는 권헌중을 장로로 세워줄 것을 결정하고 1920년 6월 11일 제8회 경북 노회에 청원을 하여 허락을 받은 후 공부하였다. 노회의 절차를 밟아 권헌중은 장로 청원이 있은 후 1년 반이 조금 넘은 1922년 2월 26일 오전 11시 새롭게 건립된 본교회 목조 예배당에서 위철지 목사의 주례로 장로 장립을 가지게 됨으로 교회 설립이후 첫 장로로 취임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자천교회는 처음으로 당회가 조직되는 감격의 순간을 맞이하였다. 권헌중이 장로로 임직하던 해인 1922년 5월 13~18일까지 자천교회는 새롭게 건립된 목조 예배당에서 김성로 목사를 초빙하여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부흥회에 참석한 사람은 본 교회 성도들 50여 명과 각처 교회에서 온 신자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중에 풍성한 은혜를 받았다. 또 저녁에는 200명이 넘는 신자들이 말씀을 청강하는 동시에 새로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60여 명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이가 40여 명이 되었다. 부흥회를 통하여 교회를 보수하기 위해서 헌금 5백10여 원이 드려지므로 더 풍성한 은혜와 결실이 있었다. 권헌중은 장로 장립을 기점으로 하여 교회의 활동도 왕성하게 할 뿐만 아니라 경북노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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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자비량 목회자 김경환 목사목록 본문 국내 자비량 목회자 김경환 목사 취재·정리: 편집부장 최영열 장로 사도 바울처럼 선교사역을 자비량(장막업-Tent maker)으로 감당하는 해외 선교사들이 있기는 하지만 국내 목회에 있어 자비량으로 사역을 감당하는 목회자는 많지 않아 보인다. 목회라면 당연히 풀타임 사역이라는 인식이 자리매김한 탓인가? 뭔가 자연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이 땅엔 아직도 많은 수의 미(未)자립교회들이 존재하고 시골 벽지엔 고령화된 성도들로 구성된 어려운 농촌교회들이 지역마다 산재해 있다. 그 삶의 터전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농촌교회 성도들을 위해 묵묵히 사역을 감당해 가고 있는 목회자들의 삶 또한 각박한 처지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때, 어려운 농촌목회자의 삶을 도우면서, 시골 교회를 세워가는 자비량 목회자가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경북 예천군 용문면에 소재한 ‘용문하금교회’ 김경환 담임목사가 그 주인공이다. 김 목사는 괴산에서 목회하던 중 고향인 울릉도에서 함께 신앙생활 했던 곽일부 목사가 용문하금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인사차 방문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만남은 곽 목사와의 은퇴로 인해 이뤄지지 못했고, 다만 목자 없는 양떼와 허물어져 가는 예배당의 모습을 보면서 이곳을 찾은 김 목사의 마음은 아파왔다. 당시 교회는 사례금을 드릴 수 없는 형편이라 목사님을 모시지는 못하고, 다만 은퇴 시점에 갈 곳 없는 목회자가 와서 물질에 상관없이 사역해 주길 기대하는 정도였다. 김 목사가 기도 후 교인들과 다시 만나 교인들이 조건을 들어 준다면 사역을 하겠다고 말했다. 먼저, 맡아 오던 기업이 있기 때문에 사택은 필요 없다. 둘째, 사례비는 전혀 없어도 된다. 마지막으로 거처하는 숙소가 멀기에 새벽기도는 인도할 수 없다는 조건이었다. 성도들이 근근이 예배를 인도하며 지켜오던 시골교회, 목회자 모시기를 위해 기도하던 성도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하여 2014년 8월, 김경환 목사는 용문하금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됐다. 김 목사는 먼저 비가 새는 예배당 공사를 비용을 들여 마쳤다. 이어서 공사용 철근이 밖으로 튀어나와 있을 정도로 농사용 창고보다 못한 교회 식당을 리모델링해야겠다고 제안하자 대부분의 교인들이 반대했다. 비용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김 목사는 출향 교인들의 지원과 김 목사의 부담, 은혜 받은 이들의 헌신을 합하여 결국 공사를 마무리했다. 또 외부 지원을 받아 종탑을 깔끔하게 해결했고, 식당에 비용을 들여 화목보일러를 설치, 교인들이 훈훈한 겨울을 날 수 있게 도왔다. 고난주간에는 교인들을 상대로 세족식 행사를 열어 섬겼고, 추수감사주일이 되면 김 목사가 직접 생산한 꿀을 교인들에게 선물했다. 명절엔 일체 목사에게 선물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김 목사가 준비한 현금 봉투를 교인들에게 나눠줬다. 특별한 날이 되면, 성도들에겐 김 목사가 키우는 염소를 잡아서 대접하고, 마을 잔치에는 돼지를 잡아 대접했다. 이렇게 선한 사업을 계속하다 보니 이젠 주위의 돕는 손길도 생겨 훨씬 더 즐겁고 보람되게 섬길 수 있게 됐다. 현재, 교회에서 헌금 1등은 김 목사이다. 이렇게 많은 물질로 지역 사회와 교회를 섬기고 교인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은 바로 김 목사가 운영하고 있는 사업체가 있기 때문이다. 김 목사가 현재 경영하는 사업은 양봉과 염소 농장이다. 군 제대 후 울릉도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던 중 양봉을 처음으로 접했다. 몇 번의 어려움을 겪고 난 후 깨달은 것은 벌을 지으신 하나님 관점에서 벌을 키워보자는 확신이었다. 새로운 시도로 인해 당시 벌을 키우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듣기도 했지만 결국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방법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늘었고, 현재는 많은 이들이 그를 따라 양봉을 하고 있다. 김 목사는 현재 선진 양봉을 교육하는 농업기술센터 주최 전국 강의를 제일 많이 다니는 강사이다. 목회자로서 김 목사는 양봉 강의의 기회도 놓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삼고 있다. 강의 중간중간 하나님과 인간, 구원에 관해서 설명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교육생들에 증거 하고 있다. 3박4일 강의 시엔 반드시 하루는 예배당에서 강의해 기독교엔 친근감을 느끼도록 노력하고 있다. 김 목사가 양봉(국사골양봉농원)을 통해 올리는 수익은 연간 약 1억원 이상, 그 중 1억원 가량을 선교비로 사용하고 그 나머지를 생활비로 사용한다. 생산한 꿀은 미자립 교회가 판매해 자립할 수 있도록 목회자들에게 저렴하게 공급해 준다. 또 양봉교육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꿀 생산이 어려운 이들에겐 꿀을 나눠주고 다음 해 생산을 많이 하면 그때 갚으라고 공급해 주기도 한다.(진대법 개념, 회수율 10%에 불과) 현재 특히 김 목사가 역점을 두고 시작한 사업은 염소농장이다. 호주산 염소인 ‘보아’ 종을 70여두를 사육하고 있는데, 300마리를 목표로 하고, 우수한 형질의 보아 원종 염소를 구하고 있다. 숙소도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셨다. 김 목사가 숙소와 농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집(유천면 소재)은 과거 법당으로 사용되던 건물로 칡넝쿨이 집안으로 들어올 정도로 폐허가 된 상황이었다. 부동산 중개업자 조차도 일반인이 살 수 없는 곳이기에 목사님 정도 되는 사람이라야 살 수 있는 곳이라고 할 정도로 기가 센(?) 곳이었다. 그곳은 과거 전국의 무당들이 모여 큰 굿을 하던 집이었으며 집 둘레 곳곳이 촛불을 켜고 지성을 드리던 곳이었다. 따라서 그 누구도 범접(?)지 못한 탓에 김 목사는 시가의 1/4 가격으로 건물을 구입할 수 있었고 지금껏 잘 사용하고 있다. 김 목사가 이렇듯 나눠주는 목회를 하게 된 데에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다섯명의 자녀를 잃고 낙심한 아버지는 무당을 찾아가 안타까움을 호소하자 무당이 말하길 “나하고는 안 맞고, ‘오랑캐당’에 가라 ‘야수교당’” 해서 절박한 심정으로 교회를 찾았고 예수님을 만났다. 이후 5자녀를 더 낳고 건강하게 양육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신 아버지는 이후 평신도로서 교회를 개척(울릉도 중령교회)하신 것은 물론, 좋은 것은 모두 교회에 갖다 드리며 하나님을 섬기기를 시작해, 형제들과 함께 무척이나 어렵고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어린 시절 점심식사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을 정도) 공무원으로, 성공한 사업가로 성장한 김경환 청년은 하나님 말씀인 성경의 실생활 적용에 많은 괴리감을 느끼고 갈등하고 방황하던 중 하나님의 큰 은혜를 경험했다. 곧 하나님의 심정을 깨달은 것이다. 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에서, 성경을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기록하신 하나님 심정으로 바라봄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 은혜에 감사해 신학을 하려 했지만 고생길을 가려는 아들을 어머니가 막으셨다. 수년이 흐른 후 37의 늦은 나이인 1997년 거부할 수 없는 부르심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울릉도에서 육지로 나왔다. 사역을 시작하면서 김 목사는 물질과 관련된 굳은 결심을 하게 된다. ‘목회자가 되면 나눠줄 수 있을 정도의 준비가 될 때 사역을 시작하자. 자비량 목회자가 되자. 생계도 어려울 정도로 가난한 교인 가정에서 헌금하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수입원 없어 생계를 걱정할 정도로 살아가는 용문하금교회 노인 성도들과 이웃 주민들이 헌금이 부담스러워 교회 못 나오는 일이 없도록 김 목사는 헌금을 하지 말라고 독려(?)한다. 헌금 부담 때문에 교회 못 나오는 것보단 차라리 하나님 말씀을 한번이라도 더 듣게 하는 것이 목회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현재, 교회는 귀농 2가정과 교회 인근 주민들, 공무원 가정 등 20여명이 출석해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 김 목사 1년에 1번씩 북한 땅과 철책이 보이는 통일전망대를 찾아간다. 굶주리고 있는 북한 주민들을 마음껏 먹이고 싶은데 안타까워 혼자 울고 내려온다. 또 세계 곳곳의 미(未) 전도 종족을 찾아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지원해 주고 싶은 큰 소망이 있다. 그래서 해외로 나갈 기회가 있으면 1달러짜리를 많이 바꿔서 나간다. 비판도 하는 이들도 있지만 복음을 30분 듣는 아이들에게 1달러씩 나눠줬다. 김 목사는 신령한 영적 양식인 복음을 전할 수 있어 좋고, 또한 가난한 아이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어 너무 기쁘다고 했다. 그는 또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너무나 좋지만, 머릿속 이론으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며, 추상적이지 않고 현실적인 설교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말씀이 실생활에 이뤄질 때까지 무슨 일에든 중간에 평가하려 말고, 말씀을 보고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라고 강조했다. 그 말씀의 열매들을 분명히 거둬 본 체험들이 확실하기에 그의 설교는 힘이 있다. 그는 이후에 하나님 주신 복음을 인근에 소재한 안동대나 경북대 상주캠퍼스 대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열망을 갖고 있다.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야 할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자신이 받은 은혜를 더 많이 전해주고 싶은 열망 때문이리라. 그의 나이 50대 중반, 세월이 유수처럼 빠르다는 것을 느끼기에 더욱 시간의 소중함을 생각하고 믿음으로 달려가길 열망하는 김 목사의 꿈이 주님 안에서 조속히 이뤄지길 두 손 모아 기도해 본다. 김 목사의 가족으로는 강은숙 사모와 2남인 정혁(대전침례신학대학원 재학), 창혁(대학 2년)이 있다. 국사골양봉농원(대표 김경환 목사 010-3795-2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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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교회 건축선교회’ 선교현장 보고-이해견 장로지난 10년 우리 선교회에서 C국 M족들에게 13개의 예배당을 지어주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러나 갈수록 출입의 위험을 느껴 촛대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블랙리스트에 오르면 나만 어떻게 되고 마는 것이 아니고, 1번부터 13번까지 내가 관계된 곳도 온전치 못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2017년도 11월에 V국으로 옮겨서 선교 사역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손자하고 둘이 들어가 14, 15, 16호를 착공하고 돌아왔고, 이후 방송출연, 간증집회, 광고, 지인들의 후원 등으로 올해에는 5개 교회의 착공 준비를 하게 되었다. 다음은 3개 교회 헌당예배와 5개 교회 착공예배를 위해 최근 V국을 다녀온 선교현장 보고이다. 9월 17일, 목사님 두 분, 장로님 세 분, 권사님 집사님 등 모두 13명으로 이루어진 선교팀은 인천공항으로 출발했다. 해마다 이쯤이면 연례행사처럼 선교지를 방문하기에 이제는 망설임, 두려움 없이 집을 나서게 된다. 그동안 혼자 가서 헌당하고 착공하고 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13명을 인솔하게 되서 오히려 부담되었다. 지병이 있으신 분, 노약하신 분, 해외에 처음 나가는 분 등 기도해야 할 분이 여럿 계셨다. 그러나 우리는 관광하러 가는 것도, 해외 사업을 위해 가는 것도 아니고 오직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선한 목적으로 가는 것이기에 크게 염려는 되지 않았다. 첫날 4시간 반 정도 걸려 하노이 공항에 도착하고, 현지 파송된 선교사님의 안내로 호텔에서 1박을 했다. 그리고 둘째 날 아침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체험했다. 인도차이나 반도를 정면으로 통과할 것으로 예보되었던 태풍 라이온의 예상 경로가 어긋난 것이다. 태풍이 북상하면서 대만과 중국 남부를 지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날씨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태풍의 진로를 바꾸시면서까지 우리와 함께하고 계심이 느껴졌다. 또한, 이 사역을 위해 수많은 한국의 성도들과 현지 교인들이 합심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도 우리에게 큰 힘이 되었다. 날씨가 딱 좋았다. 열대의 후덥지근한 날씨는 바람이 날려버렸고, 하늘에는 구름기둥이 덮여있었다. 7~8시간을 버스로 달려 현지 호텔 근처까지 왔을 때, 어둑어둑해지더니 금방 고산지대의 어둠이 내려 깜깜해질 무렵, 타고 간 버스가 고장이 나고 말았다. 고장 난 버스는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아 현지 호텔 차를 불러놓고 바깥 깜깜한 어둠 속 길가에서 기다릴 때는 걱정 때문에 마음이 매우 힘들었다. 교회 건축은 영적 전쟁임을 실감했다. 현지 차로 응급 대치하여 겨우 호텔에 도착했다. 사역지의 첫날 밤, 힘든 여정 가운데에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며 나는 몸살약을 한 봉지 먹고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호텔에서 쌀국수 등 현지 음식으로 든든히 아침 식사를 하고 일정을 시작했다. 오전에 4개 교회, 오후에 4개 교회가 예정되었다.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는 14호 ‘넘제교회’ 헌당예배이다. 지천교회의 지원으로 건축한 교회다. 도착할 때 가슴이 뛰었다. 지난해 손자하고 와서 풀밭에서 현수막을 들고 사진 찍고 기도하던 그곳에 하나님의 성전이 아름답게 지어져 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뛰고 희열과 감격이 솟구쳤다. 이렇게 좋을 수가 있을까? 누가 이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속으로 기도했다. 몰려든 현지 아이들에게 가방과 주머니에 있던 과자나 간식거리들을 나누어 주었다. 드디어 새 성전 앞에 도착했다. 출입문 기둥을 부여안고, 흐느끼며 감사의 눈물을 쏟았다. 헌당 감사예배가 시작되었다. 우리 13명은 힘차게 찬송을 불렀고, 감격해서 오열하는 권사님도 계셨다. 현지인 통역을 세워 현지 성도들과 우리 모두 은혜로운 예배가 진행되었다. 모든 진행을 맡은 나는 “N교회 성도 여러분! 교회 건축하느라고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헌금도 많이 하셨지요? 일도 많이 하셨지요? 이렇게 아름답게 잘 지은 예배당을 볼 때마다 행복하시지요? 이곳에 와서 기도하십시오. 예배드리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소원에 다 응답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 나라 백성들이 다 예수 믿게 기도하십시오.”라고 당부했다. 두 번째 ‘은푹교회’로 출발했다. 이 교회는 경산계당교회 홍갑연 권사님이 12호에 이어 15호 교회를 지원하여 지으신 교회다. 내가 계당교회에 간증 갔을 때, 간증에 은혜 받았다고 하시면서 교회 헌당에 참여하신 것이다. 자동차가 현지까지 못 가서 성도들이 제공한 오토바이로 우리 13명은 ‘앵앵앵...’하며 새 성전에 도착했다. 지금까지 지원한 교회 중에 가장 넓게 잘 지은 예배당이다. 눈짐작으로 60평은 족히 될 듯하다. 권사님이 헌당 감사로 플라스틱 의자를 지원하였고, 교인도 많이 모였는데 재적 교인이 300명이 넘는다고 한다. 계당교회 이종덕 목사님은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이곳에 나타나게 됨을 감사하다”며, “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이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축복하셨다. 현지 성도들은 권사님 이름으로 감사패를 마련해 주었다. 준비한 헌당기념 타올을 나누어 주고 모든 행사를 끝낸 뒤 착공할 20호 ‘라오짜이교회’로 이동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한 해도 빠짐없이 1개, 2개, 또는 3개의 교회를 착공하게 해주셨다. 올해 초에도 처음에는 걱정했지만, 곧 상림교회 신일균 장로님이 은퇴기념으로 17호 ‘시온교회’를, 본회 회장 차순규 장로님도 장로은퇴기념으로 18호 ‘신짜이교회’를 지원해 주셨다. 상림교회 이종수 집사님은 100교회 건축 선교회의 광고문을 읽고 감동하여 19호 ‘쭈케오교회’를 부인 김지은 집사님 이름으로, 20호 ‘라이짜이교회’를 본인 이름으로 지원을 작정하고 건축비 전액을 입금해 주셨다. 그리고 지천교회 김귀화 권사님이 21호 ‘바오까오교회’를 결정해주셨다. 1년에 3교회 헌당에 5교회 착공이라니…. 라오짜이교회로 이동하면서 나는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해외 선교는 돈만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어떤 분들은 ‘100교회 건축선교회’의 사역을 이해 못하고 조롱하는 분도 있다. 예배당 지어주는 일은 헛된 일이라고 말하는 현지 선교사도 있다. 그러나 본선교회는 지원해주신 건축비를 직접 현장에서 그 나라 돈으로 지불하고 영수증까지 받는 등 선교비 전액을 100% 선교 명목으로 지출한다. 또한, 착공하는 교회에 가서 ‘100교회 건축선교회’의 취지를 설명한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예배당을 지어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과 함께 예배당을 지어가려고 합니다. 이곳에 예배당을 짓기 위해서는 여러분도 열심히 헌금 하고 땀 흘려 일도 해야 합니다. 예배당 지을 땅은 마을에서 가장 좋은 곳을 선택하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성도가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원금을 한 번에 다 드리지 않습니다. 착공할 수 있게 지원 금액의 절반을 오늘 드리고, 골조 공사가 완공되면 남은 금액의 절반을 선교사님을 통해 전해드립니다. 나머지 금액은 내년 헌당 때 드립니다. 이 모든 공정을 죄송하지만 확인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이와 똑같은 메시지를 이번에도 5개 교회에 전달했다. 본회가 지원해 헌당한 세 번째 ‘후깜교회’에서는 한 성도의 간증을 듣게 되었다. 비가 많이 오는 주일날 8시부터 예배인데 온 식구가(7~8명) 같이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집에 가니까 살던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산사태로 집채만 한 바위와 흙이 집을 덮쳐 버린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그 가족의 생명은 하나님이 살리신 것이다. 만약 그 집안 식구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비 오는 날 귀찮다고 식구들 중 한 명이라도 예배드리러 가지 않고 집에 있었다면?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날 사건은 그 가족들이 큰 믿음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믿음은 곧 생명이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날이었다. 출국수속 후 탑승게이트에 대기하고 있을 때 권사님 한 분의 팔이 부어올랐다. 차에서 내릴 때 어딘가에 부딪혔다고 했다. 상비약을 드시게 하고 탑승구 직원들에게 협조를 구했다. 그러자 공항 의사, 담당기장, 항공사 지점장, 승무원 등이 떼로 모여들었다. 혈압측정을 하니 권사님은 당황해서 혈압이 점점 상승했다. 공항 의사는 체류하여 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모두가 무사히 귀국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 여러 가지 염려 속에 우리는 합심해서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 채 “우리가 책임진다”는 각서를 쓰고 탑승할 수 있었다. 다행히 권사님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잠이 드셨고, 우리는 4박 5일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무탈하게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100교회 건축선교회는 수많은 개미군단 성도들의 기도와 헌신으로 이제 21개 교회가 건축돼 간다. 하나님 나라 확장에 협력하신 교회와 모든 성도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올려 드린다. 할렐루야! 100교회 건축선교회 이해견 장로 010-3531-7354 (주일오후 간증예배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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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전도의 불을 지핀 사람, 정재순 목사(4·끝)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정재순 목사(鄭在淳, 1878~1948) 11. 청소년 기독교학교의 설립자(設立者), 정재순 안동으로 이임하기 전 경산과 대구에서 기독교 초등학교의 교사로 근무한 적이 있었던 정재순 목사는 누구보다 교육에 관한 많은 관심이 있었다. 당시 안동교회는 이미 1911년 안동 최초의 여자 학생을 위한 초등학교인 계명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계명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신앙과 무관한 공립학교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중등학교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따라서 부임한 지 2년이 경과한 1924년 4월, 정재순 목사가 의욕적으로 추진하여 경안중학원이 설립되었다. 경안중학원은 오늘날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포함한 중등교육기관으로 경안노회 산하기관으로 편성하여 경안노회가 운영토록 했다. 이때 노회가 결의한 내용은 경안중학원의 발기인은 경안노회 경내의 교역자로 하고, 운영자금은 10세 이상 교인마다 의무금은 50전(1100환)으로 하고, 그 외 생일연보와 특별연보도 학교운영을 위한 예산으로 편성했다. 특히 학생들이 납입해야 하는 입학금과 월사금은 2300환으로 정했다. 초대교장에는 당시 안동교회 담임인 정재순 목사, 교사는 4명, 학생 수는 무려 100여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경안중학원은 오래 지속할 수 없는 한계가 내재해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학교운영에 필요한 재원의 부족이었다. 당시 각 교회는 부족한 재정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더욱이 안동선교부의 외부지원 없이 중등교육기관을 운영한다는 것은 당시 교회 형편으로 볼 때 힘겨운 일임에 틀림없었다. 이에 1926년 제10회 경안노회에서는 안타깝게도 경안중학원의 폐교를 보고하게 된다. 하지만 경안중학원이 설립된 지 30년 만인 1954년 경안노회 설립인가를 받고 경안고등학교가 개교하였으며, 1961년에는 경안중학교가, 1966년에는 경안여자중학교와 경안여자상업고등학교가 개교하였다. 따라서 정재순 목사가 30년 전에 시작한 경북북부지역의 중등학교의 꿈이 비로소 이루어져 수많은 기독교 인재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12. 교회의 질서(秩序)를 세운 사람, 정재순 초기 한국교회는 철저한 권징과 치리를 통해 교회의 질서를 잡아갔다. 초기 한국교회 권징의 특징은 올바로, 공평하고, 바르게 행해진 권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재순 목사 역시 성도들이 성경이 제시하는 길을 가지 않으면 책벌을 통해 방향을 수정할 수 있게 했다. 당시 안동교회의 당회록에 따르면 교회에서 행한 책벌의 이유는 다양했다. 예를 들면, 부부 사이에 불화가 있으면 교회는 그들을 당회로 불러 화해를 권면하거나 책벌하여 화평한 가정을 이루어 가도록 개입했다. 또한, 주일성수를 못하는 교인들을 책벌하거나 권징함으로써 성도의 의무를 다하게 했다. 그 외에도 교회법을 따르지 않고 세상적으로 결혼예식을 한 경우, 중직자의 자녀가 방탕한 생활에 빠져 죄를 범한 경우, 교인 사이에 불화가 생긴 경우, 일상생활 속에서 교인의 생활에 어긋난 행위들도 예외 없이 책벌의 대상이 되었다. 교회법에서 권징의 목적은 잘못을 한 형제를 교정하고 다른 형제들이 잘못하지 않게 하는 데 있다. 권징은 교회를 든든히 세우고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다. 안동교회는 당회가 조직된 이후 권징을 통해 교회의 질서를 잡아갔다. 정재순 목사는 안동교회에서 시무한 3년 동안 죄를 범한 교인들을 차별 없이 공평하게 치리함으로써 안동교회를 든든히 세워가는 기초를 닦았다고 할 수 있다. ▲1913년 7월 20일 김병우 장로가 장립함으로써 안동교회는 안동지역 최초의 당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안동교회의 역사적인 첫번째 당회는 초대장로인 김병우 장로가 기도함으로8월 9일에 개회되었다. 13. 부인이 전도의 동역자(同役者)인 사람, 정재순 정재순 목사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사도 바울처럼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던 복음전파자였다. 마찬가지로 그의 부인인 손주안(孫主安) 사모도 생명을 걸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에 순종했던 믿음의 사람이었다. 정재순 목사의 부인인 손주안은 사모보다 전도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사모로서 단순히 남편을 돕는 역할을 넘어 보다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인의 사명을 누구보다 잘 감당한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안동교회를 사임하고 대구 동산병원 직원전도회 담당목사로 사역한 1925년 6월부터 1937년 3월까지 정재순 목사는 28개 교회를 개척했다. 마지막으로 의성의 두 교회를 개척한 것은 그의 나이 60세가 되던 해이다. 정재순 목사는 경상북도 거의 전 지역인 청도, 영천, 경산, 달성, 고령, 월성, 경주, 영일, 칠곡, 상주, 군위, 선산, 의성군 등에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사역을 감당했다. 교통환경이 열악한 당시 상황을 생각해보면 정재순 목사가 감당한 사역범위는 매우 넓어 마치 해외선교사의 사역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정재순 목사가 설립한 교회는 고모교회, 삼창교회, 기계교회, 덕지교회, 봉곡교회, 구릉교회, 삼귀교회, 예리교회, 금암교회, 조암교회, 방촌교회, 구촌교회, 대천교회, 대제교회, 기성교회, 입실교회, 양촌교회, 유금교회, 경동교회, 유동교회, 와동교회, 삼산교회, 평지교회, 석우교회, 음지교회, 화령교회, 서제교회, 오로교회이다. 그런데 손주안 사모는 정재순 목사가 개척한 28개 교회 중에서 무려 10개 교회를 함께 개척하고 돌보았다. 손주안 사모는 정재순 목사와 동산병원을 섬겼을 뿐 아니라 대구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위치한 도시에 교회들을 개척하고 돌보았던 것이다. 그는 자기 부부가 개척한 교회가 든든한 교회로 세워지기를 소원하며 어머니의 마음으로 자식처럼 사랑하며 헌신적으로 섬긴 참된 복음전도자였다고 할 수 있다. 결론 정재순 목사는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사역자였다. 복음을 위해 생명을 건 하나님의 종이었다. 그가 행한 거룩한 사역은 참으로 많다. 그는 부해리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수용하고 예수를 영접한 이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았다. 그는 단 한 순간도 교회를 떠나본 적이 없는 교회를 위한, 교회의 사람이었다. 정재순 목사는 교회가 지역사회 속에 있음을 인식하며 주민을 위한 사역을 숙고했던 인물이다. 그 결과 청소년을 위한 경안중학원을 설립했다. 그가 다니는 곳에는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 또한, 그는 치밀한 계획을 세워 안동 땅을 복음화시킨 전도전략가였다. 안동에서 사역을 마친 정재순 목사는 부인 손주안 사모와 함께 거의 경상북도 전 지역인 청도, 영천, 경산, 달성, 고령, 월성, 경주, 영일, 칠곡, 상주, 군위, 선산, 의성군 등에 교회를 개척하는 복음전도자로 살았다. 또한, 그는 첫 담임목회지인 신정교회에서 거룩한 사역을 마감했다. 그는 목회 전반전과 동일하게 목회 후반전에도 복음을 위해 불꽃을 불사르며 살았던 열정의 사람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신실한 주의 종, 정재순 목사가 걸어온 길은 참으로 고단한 길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그의 삶은 때로 감옥에서 생활하게 했으며, 복음에 대한 열정은 60이 넘어서까지 먼 길에 찾아가 교회를 개척하고 성도들을 돌보게 하였다. 그는 일평생 변방에서 예수의 참 제자로 살았다. 1878년 출생한 정재순 목사는 부르심에 감사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다가 1948년 71세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에 입성하였다. ▲정재순 목사와 손주안 사모. 전도부인처럼 손주안 사모는 남편 정 목사를 도와 경산, 영천, 성주, 달성, 월성, 청도, 상주, 칠곡 등에 있는 힘들고 어러운 형편에 있는 작은 교회들을 돌보았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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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전도의 불을 지핀 사람, 정재순 목사(3)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정재순 목사(鄭在淳, 1878~1948) 8. 안동교회 담임으로 칭빙(請憑) 받은 목사, 정재순 대구 3·8만세운동으로 체포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루고 석방된 후 정재순 목사는 신정교회로 복귀했다. 그러나 이미 요시찰 인물이 된 정재순 목사가 일제의 감시 속에서 계속해 담임목사로 시무하는 것은 신정교회 입장에서 매우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또한 정재순 목사 자신도 교회에 부담을 주기 싫었을 것이다. 따라서 정재순 목사는 새로운 임지로 안동이 결정되어 안동교회로 전임하였다. ▲1913년 11월부터 공사가 착수되어 이듬해인 1914년 2월에 준공한 안동교회의 두 번째 신축 예배당으로 오늘의 100주년 기념관 바로 그 위치에 서 있었다. 예배당은 목조 함석지붕을 가진 건물로 반(半) 2층 구조형식으로 약 50~60평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동교회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의 지도자인 정재순 목사를 청빙한 것은 큰 결단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실 안동교회는 안동 3·18만세운동을 모의하고 실행에 옮긴 교회였다. 안동 3·18만세운동은 기독교와 안동교회의 위상을 높여주었지만 일제 탄압의 빌미를 제공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구 3·8만세운동의 주역 중의 한 사람인 정재순 목사가 안동으로 부임해 오는 것은 안동교회나 정재순 목사 개인적으로도 큰 부담이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동교회는 주저하지 않고 정재순 목사를 담임으로 결정했다. 투철한 신앙, 영적 리더십, 다양한 목회 경험과 민족과 함께하는 애국정신을 가진 정재순 목사는 안동교회에 적임자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1922년 6월 14일에 안동교회 3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정재순 목사는 1925년 5월까지 만 3년 동안 사역을 잘 감당하였다. 9. 안동 땅을 갈아엎은 기경자(起耕者), 정재순 정재순 목사가 가지고 있던 최우선의 목회방침은 지역전도였다. 그는 마치 복음전파를 위해 안동에 온 것처럼 안동교회를 전도중심의 교회로 만들어 나갔다. 전도를 통해 복음이 척박한 땅인 안동이 영적으로 기경되기 시작하였다. 정재순 목사가 시무하던 시기는 처음으로 현지 교회인 안동교회를 중심으로 복음이 널리 전파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정재순 목사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지역뿐 아니라 이미 복음이 전해졌지만 구원의 열매가 없는 땅에 전도인을 파송하였다. 그는 분명한 정책과 방법으로 지역전도에 매진했다. 그래서 그가 시작한 전도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또한, 정재순 목사가 추진한 전도는 무계획적인 것이 아니라 계획적이고 전략적이었다. 지금까지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는 우선으로 전도단을 보내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대중 집회를 가졌다. 그리고 전문적인 전도인을 파송하여 가가호호 방문하며 복음을 전했다. 뿐만 아니라 헌신적인 전도인들을 파송한 것도 정재순 목사의 전도전략이었다. 당시 안동교회 조사나 장로 중에는 전도에 헌신한 전문가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장로임직도 뒤로 미룬 채 전도하는 일을 가장 우선으로 감당했다. 또한, 당시 여자 성경학교의 학생들도 전도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안동교회의 전도활동은 노회적으로도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1924년 5월 노회록에 의하면, “안동교회 부인들이 가사를 중단하고 전도에 힘써 많은 신자를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 결과 척박한 땅이 기경되었고, 구원의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도의 결과로 호암교회(현 송현교회)와 수하리교회(현 수상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정재순 목사의 전도활동은 안동지역 복음전파에 변곡점이 된다. 정재순 목사가 안동에 와서 복음을 전파하기 이전은 선교사 중심의 전도였다고 할 수 있다. 안동선교부에 주재하고 있는 선교사들이 주로 전도를 주도했고, 한국인 조사나 남·녀 전도인들은 소극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경향이었다. 그러나 정재순 목사의 부임은 이러한 전도의 패러다임(Paradigm)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한국인 목사와 성도들에 의해 지역전도가 계획되었고 진행되었다. 이후부터 지역에 세워진 교회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교회 자체적으로 계획을 세워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정재순 목사는 열정적으로 여러 지역에 복음을 전한 전도자였다. 그는 안동교회를 전도에 집중하는 전도중심의 교회로 만들었고, 이것은 안동교회의 부흥뿐 아니라 교회가 없던 안동 읍 외곽지역에 교회가 세워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0. 교회분립을 통한 부흥의 촉진자(促進者), 정재순 1914년 1월, 안동교회의 두 번째 목조 함석지붕 2층 예배당(현 100주년 기념관 자리)이 신축됨으로써 교회와 경북북부 지역은 영적 지형의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교회 내적(內的)으로 넓은 예배 및 활동 공간의 확보로 인해 예배와 주일학교의 활성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부흥하고 있던 안동교회는 발상(發想)의 전환을 하게 된다. 안동교회는 설립된 후 10여 년 동안 계속적인 부흥을 이루었지만, 효과적인 안동 땅의 복음화를 위해 안동 읍을 세 개 지역으로 나누고 분가식(分家式)으로 교회를 분립(分立)하기로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게 된다. 안동교회를 중심으로 서쪽과 동쪽으로 교회를 분립하기로 하고, 안동교회 교인들을 거주지에 따른 분가를 추진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안동교회의 분립은 교회 내 분쟁(分爭)의 결과가 아니라 안동 땅의 복음화를 위한 자발적이고 창조적이며 아름다운 분리였다. 안동교회의 첫 분립 시도는 교회가 설립된 지 10여 년이 지난 후 시작되었다. 그 교회가 바로 안기교회다. 안기교회는 오늘의 안동서부교회다. 사실 안동교회는 이미 오래전부터 안기동 지역에 전도인을 파송하여 집중적으로 전도를 했고, 그 결과 정재순 목사가 시무하고 있던 1924년 1월 초가 6칸을 포함한 160평 대지를 매입할 수 있었다. 이 가옥을 안기지역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예배처소로 사용하고 안동교회 기도실로 명명했던 것이다. 안동교회는 주일 저녁과 수요일 저녁마다 조사, 장로, 집사를 안동교회 기도실에 파송하여 예배를 인도하게 함으로써 공식적인 교회가 속히 설립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왔다. 이때 봉사한 사역자들은 옥호열 선교사, 김익현 장로, 권점필·신석준 집사였다. 하지만 안기교회의 분립은 당시 안동교회 담임인 정재순 목사의 결단도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가 시무한 기간의 제직회록에는 안동교회 전도대의 활동보고가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전도 결과에 따라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고 세우는 일에 온 힘을 쏟았다. 이후 안기교회가 안동교회로부터 공식적으로 분립하여 완전한 독립교회가 된 것은 1932년 8월이었다. 이때 1924년에 구입한 초가 6칸 가옥을 매도한 후 안기동 130번지의 100평의 대지 위해 30평 규모의 예배당을 새롭게 건축하고 안기교회라 칭하고, 그해 12월 초대목사로 이원영 목사가 부임하게 되었다. 이처럼 정재순 목사는 누구보다 안동 땅에 복음의 씨가 굳게 뿌리를 내리도록 헌신한 사람이다. 그는 안동읍의 부흥을 누구보다 소망하면서 안동교회의 분립을 결정하고 인적자원과 재정을 아낌없이 지원했던 인물이었다. 그 결과 안동읍 최초교회인 안동교회의 독점적인 지위는 사라지고 안동의 영적 부흥을 위한 선의의 경쟁시대로 돌입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안기교회의 분립을 통해 안동 땅의 부흥이 촉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재순 목사는 분립 개척을 위해 1924년 안기동에 초가 6칸을 매입, 예배처소(안동교회 기도실)를 세운다. 이후 1932년 안기교회(현 안동서부교회)가 독립교회로 세워진다. 사진은 현재 안동서부교회 모습(이정우 목사 시무).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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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전도의 불을 지핀 사람, 정재순 목사(2)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 정재순 목사 (鄭在淳, 1878~1948) 4. 선교사의 동역자인 조사(助事), 정재순 부해리 선교사의 전도로 회심하고 예수를 믿게 된 정재순은 기독교 학교의 교사로 활동하다가 교회를 돌보는 조사로 사역하게 된다. 1908년에는 방혜법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상주 속산교회, 사산교회, 금혼교회, 등 상주지역에서 시무했다. 1909년에는 안의와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경산 삼복교회(현 경산교회), 사월교회, 전지교회(현 남산교회), 금곡교회, 복사교회(현 자인교회)를 섬겼으며, 1912년 경산 사월교회, 전지교회, 복사교회, 대구신정교회(현 서문교회)에서 조사로 활동했다. 그 당시 조사(助事, Helper)는 초기 한국교회가 든든히 세워지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들은 선교사의 가옥, 선교사들이 설립한 학교나 병원에서 일했으며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이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선교사들의 따뜻한 사랑과 헌신을 발견하고 최초의 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적으로 복음전파에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선교사들의 통역자 역할을 했고, 선교사 대신 일정 지역을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훗날 많은 조사들이 교회를 전적으로 섬기는 주의 종으로 부름을 받고 목회자가 되었다. 장로교 선교사의 조사요 지역 교회의 장로로 수년 동안 이미 교회사역에 충성을 다하고 있던 정재순도 이 공식에 예외 없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5.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노(老)학생, 정재순 정재순은 1912년 봄, 35세 나이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정재순은 1912년 3월 6일 대구남문교회당에서 모인 제1회 경상노회에 입학을 청원하였고, 허락을 받았다. 이때 경상노회에 신학입학을 청원하여 허락을 받은 사람은 정덕생, 김기원, 서성오, 김공명, 박영조, 정재순, 김상삼, 박성애, 박덕일, 김응진 제씨였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정재순은 3년간의 신학 교육을 받았으며, 1915년 6월 15일 평양신학교 제8회로 졸업하였다. 평양신학교는 ‘신령(神靈)한 목사’라는 교육목표처럼 교역자 양성을 위하여 1901년 평양 대동문 옆 마포삼열 자택에서 개교되었다. 1938년 1학기를 끝으로 폐교되기까지 34회 졸업식이 거행되었는데, 37년 동안 총 798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제8회 평양신학교 졸업생은 28명이다. 이때 뛰어난 인물들이 배출됐는데, 이자익, 방효원, 정재순 제씨가 바로 그들이다. 1915년 제8회 평양신학교 졸업 앨범으로 사진 중앙에 교사로 수고한 선교사들이 있고, 그 주위로 졸업생들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정재순 목사는 맨 아래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이다. 6. 대구·경북지역의 복음 전도자(前導者), 정재순 정재순 목사는 조사로 사역할 때도 복음 전파에 최선을 다했다. 1901년부터 1906년까지 칠곡 지역에 설립된 16곳 교회 중 2곳이 정재순 목사가 개척한 교회이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정재순 목사는 1915년부터 1922년까지 대구 신정교회 위임목사로 시무하면서 대구 침산교회, 남산교회, 대구 범어교회에서도 사역을 감당했다. 1919년 대구 3·1만세운동으로 체포되어 투옥되어 있다가 출옥한 후에는 신정교회를 사임하고 1922년 안동교회 제3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925년 5월 안동교회를 사임하고 다시 대구로 돌아온 정재순은 1925년부터 1938년까지 대구 동산병원(현 대구 동산의료원) 직원 전도회 담당 목사로 시무했다. 비교적 주일에 자유로웠던 정재순 목사는 한 교회에 매여 있지 않고 약한 교회들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가 섬긴 교회는 경산 고모교회(폐지), 영천 사창교회(폐지), 영일 기계교회, 달성 덕지교회, 금릉 봉곡교회, 성주 구릉교회, 영천 삼귀교회(폐지), 청도 예리교회, 칠곡 금암교회(현 동명교회), 달성 조암교회(폐지), 달성 방촌교회, 청도 구촌교회(폐지), 청도 대천교회, 영천 대제교회(폐지), 칠곡 기성교회, 월성 입실교회, 상주 양촌교회, 경주 유담교회, 경산 경동교회, 고령 유동교회(현 운수제일교회), 외동교회(폐지), 군위 삼산교회(폐지), 고령 평지교회(폐지), 선산 석우교회, 청도 음지교회(폐지), 상주 화령교회, 의성서제교회, 오로교회 등이다. 이후 정재순 목사는 1938년부터 1946년까지 신정교회에서 두 번째 위임목사로 시무하였다. 한편 정재순 목사는 기존의 경상노회에서 분리된 경북노회에서 1919년, 1939년, 1945년 세 번에 걸쳐 노회장을 역임하며 대구지역의 기독교 지도자로 영적 리더십을 발휘했다. 7. 대구 3·8만세운동의 주역(主役), 정재순 대구지역의 3·1만세운동은 1919년 3월 8일, 3월 10일, 3월 30일에 걸쳐 총 세 차례 있었다. 당시 기독교 지도자인 남성정교회의 이만집 목사와 신정교회의 담임목사이며 당시 경북노회장인 정재순 목사, 남산교회의 김태련 조사, 백남채 장로, 계성학교 교감선생인 김영서 등이 시위를 주도했다. 이 만세운동으로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는데, 당시 동원 담당이었던 정재순 목사도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정재순의 아들인 정원조도 6개월의 형을 받았다. 정원조는 당시 계성학교 학생이었는데, 일제에 의해 심한 고문과 구타를 당하고 6개월 동안의 징역으로 오래 살지 못하였다. 부자가 함께 3·1만세운동에 참여했고,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는 것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 남을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정재순 목사는 일제 말엽, 친일(親日)에 가담하게 된다. 1938년 6월 중순경, 총독부의 종용에 따라 자발적인 총후봉사활동을 내세우며 조직한 친일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 그는 기독교에 대한 일제의 간섭과 탄압이 절정에 이르렀던 1939년을 지나면서 노회장이란 직함으로 인해 이 단체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활동은 정재순 목사의 분명한 과오이지만 그는 회심한 이후 40여 년 동안 신앙, 사역과 헌신을 통해 교회와 민족과 역사에 긍정적인 기여도 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초창기 대구에 소재한 교회의 지도들로 좌측으로부터 박영조, 이만집, 김기원, 정재순 목사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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