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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전도의 불을 지핀 사람, 정재순 목사(2)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 정재순 목사 (鄭在淳, 1878~1948) 4. 선교사의 동역자인 조사(助事), 정재순 부해리 선교사의 전도로 회심하고 예수를 믿게 된 정재순은 기독교 학교의 교사로 활동하다가 교회를 돌보는 조사로 사역하게 된다. 1908년에는 방혜법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상주 속산교회, 사산교회, 금혼교회, 등 상주지역에서 시무했다. 1909년에는 안의와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경산 삼복교회(현 경산교회), 사월교회, 전지교회(현 남산교회), 금곡교회, 복사교회(현 자인교회)를 섬겼으며, 1912년 경산 사월교회, 전지교회, 복사교회, 대구신정교회(현 서문교회)에서 조사로 활동했다. 그 당시 조사(助事, Helper)는 초기 한국교회가 든든히 세워지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들은 선교사의 가옥, 선교사들이 설립한 학교나 병원에서 일했으며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이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선교사들의 따뜻한 사랑과 헌신을 발견하고 최초의 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적으로 복음전파에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선교사들의 통역자 역할을 했고, 선교사 대신 일정 지역을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훗날 많은 조사들이 교회를 전적으로 섬기는 주의 종으로 부름을 받고 목회자가 되었다. 장로교 선교사의 조사요 지역 교회의 장로로 수년 동안 이미 교회사역에 충성을 다하고 있던 정재순도 이 공식에 예외 없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5.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노(老)학생, 정재순 정재순은 1912년 봄, 35세 나이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정재순은 1912년 3월 6일 대구남문교회당에서 모인 제1회 경상노회에 입학을 청원하였고, 허락을 받았다. 이때 경상노회에 신학입학을 청원하여 허락을 받은 사람은 정덕생, 김기원, 서성오, 김공명, 박영조, 정재순, 김상삼, 박성애, 박덕일, 김응진 제씨였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정재순은 3년간의 신학 교육을 받았으며, 1915년 6월 15일 평양신학교 제8회로 졸업하였다. 평양신학교는 ‘신령(神靈)한 목사’라는 교육목표처럼 교역자 양성을 위하여 1901년 평양 대동문 옆 마포삼열 자택에서 개교되었다. 1938년 1학기를 끝으로 폐교되기까지 34회 졸업식이 거행되었는데, 37년 동안 총 798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제8회 평양신학교 졸업생은 28명이다. 이때 뛰어난 인물들이 배출됐는데, 이자익, 방효원, 정재순 제씨가 바로 그들이다. 1915년 제8회 평양신학교 졸업 앨범으로 사진 중앙에 교사로 수고한 선교사들이 있고, 그 주위로 졸업생들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정재순 목사는 맨 아래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이다. 6. 대구·경북지역의 복음 전도자(前導者), 정재순 정재순 목사는 조사로 사역할 때도 복음 전파에 최선을 다했다. 1901년부터 1906년까지 칠곡 지역에 설립된 16곳 교회 중 2곳이 정재순 목사가 개척한 교회이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정재순 목사는 1915년부터 1922년까지 대구 신정교회 위임목사로 시무하면서 대구 침산교회, 남산교회, 대구 범어교회에서도 사역을 감당했다. 1919년 대구 3·1만세운동으로 체포되어 투옥되어 있다가 출옥한 후에는 신정교회를 사임하고 1922년 안동교회 제3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925년 5월 안동교회를 사임하고 다시 대구로 돌아온 정재순은 1925년부터 1938년까지 대구 동산병원(현 대구 동산의료원) 직원 전도회 담당 목사로 시무했다. 비교적 주일에 자유로웠던 정재순 목사는 한 교회에 매여 있지 않고 약한 교회들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가 섬긴 교회는 경산 고모교회(폐지), 영천 사창교회(폐지), 영일 기계교회, 달성 덕지교회, 금릉 봉곡교회, 성주 구릉교회, 영천 삼귀교회(폐지), 청도 예리교회, 칠곡 금암교회(현 동명교회), 달성 조암교회(폐지), 달성 방촌교회, 청도 구촌교회(폐지), 청도 대천교회, 영천 대제교회(폐지), 칠곡 기성교회, 월성 입실교회, 상주 양촌교회, 경주 유담교회, 경산 경동교회, 고령 유동교회(현 운수제일교회), 외동교회(폐지), 군위 삼산교회(폐지), 고령 평지교회(폐지), 선산 석우교회, 청도 음지교회(폐지), 상주 화령교회, 의성서제교회, 오로교회 등이다. 이후 정재순 목사는 1938년부터 1946년까지 신정교회에서 두 번째 위임목사로 시무하였다. 한편 정재순 목사는 기존의 경상노회에서 분리된 경북노회에서 1919년, 1939년, 1945년 세 번에 걸쳐 노회장을 역임하며 대구지역의 기독교 지도자로 영적 리더십을 발휘했다. 7. 대구 3·8만세운동의 주역(主役), 정재순 대구지역의 3·1만세운동은 1919년 3월 8일, 3월 10일, 3월 30일에 걸쳐 총 세 차례 있었다. 당시 기독교 지도자인 남성정교회의 이만집 목사와 신정교회의 담임목사이며 당시 경북노회장인 정재순 목사, 남산교회의 김태련 조사, 백남채 장로, 계성학교 교감선생인 김영서 등이 시위를 주도했다. 이 만세운동으로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는데, 당시 동원 담당이었던 정재순 목사도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정재순의 아들인 정원조도 6개월의 형을 받았다. 정원조는 당시 계성학교 학생이었는데, 일제에 의해 심한 고문과 구타를 당하고 6개월 동안의 징역으로 오래 살지 못하였다. 부자가 함께 3·1만세운동에 참여했고,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는 것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 남을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정재순 목사는 일제 말엽, 친일(親日)에 가담하게 된다. 1938년 6월 중순경, 총독부의 종용에 따라 자발적인 총후봉사활동을 내세우며 조직한 친일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 그는 기독교에 대한 일제의 간섭과 탄압이 절정에 이르렀던 1939년을 지나면서 노회장이란 직함으로 인해 이 단체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활동은 정재순 목사의 분명한 과오이지만 그는 회심한 이후 40여 년 동안 신앙, 사역과 헌신을 통해 교회와 민족과 역사에 긍정적인 기여도 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초창기 대구에 소재한 교회의 지도들로 좌측으로부터 박영조, 이만집, 김기원, 정재순 목사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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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용 구미시장, 국회 방문 국비확보 위한 전방위 대응!▲장세용 구미시장(좌)과 안민석 문화체육관광위원장(우) 장세용 구미시장은 10월 11일 국회를 방문하여 안민석 문화체육관광위원장 및 산업위․과기위․국토위․문체위 간사, 예산결산위원 등을 직접 만나 내년도 국비확보를 위한 총력전에 나섰다. 이번 방문은 11월 국회 상임위원회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심사를 앞두고 있는 만큼, 국회와 중앙차원의 적극적인 지원을 이끌어 내기 위해 안민석 문화체육관광위원장, 김성수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간사, 윤관석 국토교통위원회 간사, 손혜원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간사, 송갑석 예산결산위원을 차례로 방문하여 지역 현안사업에 대한 국비지원 필요성을 적극 설명하기 위해 마련하였다. 이날 장세용 시장은「구미 국가5공단 조성사업」,「5G테스트베드 구축」, 2020「제101회 전국체전」지원,「생활환경지능 홈케어가전 산업화 기반구축사업」등 총 11건에 2조 1천억원 규모의 현안사업에 대한 국비지원을 요청하였다. 장세용 시장은 “풍부한 중앙의 인적네트워크 활용과 지역 국회의원들과 협력을 통해 지역 역점사업과 현안 해결을 위한 내년도 국비 확보를 위해 끝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한편, 장세용 시장은 지난 7월 16일 기획재정부 예산실장을 시작으로 7월 25일 여성가족부장관과 민주당 추미애 당대표, 홍영표 원내대표를 비롯한 주요 당직자, 7월 30일 국토교통부장관, 8월 6일 문화체육관광부장관, 8월 31일 국회 및 KOTRA, 9월 4일 국회 및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 10월 1일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 등 주요당직자, 국회 위원회별 상임위원장을 방문하는 등 바쁜 일정 가운데에도 내년도 국비확보를 위한 전방위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구미시에서는 국회 상임위원회 예비심사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심사를 앞두고 있는 만큼 향후에도 국회 방문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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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지역아동센터 정정숙 생활복지사 구미시장 표창장 받다!▲구미시장상을 수상한 정정숙 생활복지사.(나눔지역아동센터)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봉사와 섬김으로 이웃을 돌보는 삶을 실천해온 정정숙 생활복지사의 헌신이 화제다. 정정숙 생활복지사(구미남부교회 권사)는 지난 2003년부터 구미남부교회에서 운영한 ‘나눔공동체사회복지협회’ 사무국장을 맡아 맞벌이 가정 영유아 돌봄, 미용봉사, 목욕봉사, 의료봉사 활동 등을 통해 이웃을 돌보는 일을 시작했다. 이후 2006년부터 현재까지는 나눔지역아동센터(구미남부교회 부설) 생활복지사로 재직하면서 지역의 소외계층아동돌봄서비스를 통해 아동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데 힘쓰고 있다. 정정숙 생활복지사는 구체적으로 매년 아동농촌체험 프로그램, 민속놀이 프로그램, 하계캠프 프로그램, 아동 학습지도 및 예절 교육, 학부모 및 연고자 교육 등을 진행하며 아동들이 정서적·문화적으로 보다 안정적인 환경에서 성장하도록 지원해왔다. 구미시에서는 지난달 19일 ‘제19회 사회복지의 날 기념식’에서 정정숙 생활복지사와 같은 사회복지 증진 유공자 20명을 발굴·선정해 시장상, 국회의원상, 시의장상 등을 표창함으로 그 공적을 치하하고 격려했다. 구미남부교회 최성수 목사는 “교회 설립 초기부터 지역사회 돌봄 사역을 시작했는데, 그동안 묵묵히 봉사와 헌신을 다 한 정정숙 권사와 같은 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마치 내 일인 양 기쁘고 자랑스럽다”고 축하의 마음을 전했다. ▲장세용 구미시장과 수상자들.(뒷줄 오른쪽 세번째가 정정숙 생활복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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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전도의 불을 지핀 사람, 정재순 목사(1)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정재순 목사 鄭在淳, 1878~1948) 1900년 초 어느 날 정재순 목사는 부해리(傳海利, H.M. Bruen) 선교사와 만났다.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만났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정재순이 20을 갓 넘은 나이에, 경산 어느 마을에서 부해리 선교사를 만났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이후 정재순은 단 한 번도 교회를 떠난 적이 없이 초창기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그는 교회 안에 세워진 기독교학교의 교사생활을 시작했으며,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함께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돌보는 일을 했다. 조사로 여러 교회를 섬기던 정재순은 1912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던 1914년, 그가 섬기고 있던 대구 신정교회(현 대구 서문교회)에서 신정교회 초대장로로 임직하게 된다. 이후 1915년 평양신학교 제8회로 졸업한 후 목사임직을 받고 신정교회 첫 한국인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초임지인 대구 신정교회에서 정재순 목사의 사역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사역이었다. 여자 청소년을 위한 야간 학교를 개설했고, 대구 3·1만세운동에 깊이 관여했다. 1922년 6월 안동으로 사역지를 옮긴 후, 그는 전도중심의 사역을 통해 안동 땅을 기경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는 계속적인 그의 관심사인 학원선교를 위해 청소년을 위한 기독교학교를 설립했으며, 교회분립을 통해 안동 땅의 부흥을 위한 새로운 도전을 감행하기도 했다. 안동을 떠난 이후 대구를 근거지로 둔 정재순 목사는 본격적인 복음전파자의 길을 걸었다. 청도, 영천, 경산, 달성, 고령, 월성, 경주, 영일, 칠곡, 상주, 군위, 선산, 의성군 등에 28개 예배처소를 개척했다. 이때 그의 부인인 손주안 사모는 함께 교회를 개척하고 함께 성도를 섬기고 돌봄으로써 그의 소중한 동역자가 되었다. 정재순 목사는 60세에 그의 첫 담임 목회지인 대구 신정교회로 돌아가 사역을 마무리했다. 정재순 목사는 목회 전반전과 후반전을 똑같은 열정과 투철한 사명감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불꽃을 불사르며 살았을 뿐 아니라 성도들의 심장에 전도의 불을 지핀 믿음의 사람이었다. 1. 목사 임직 이전의 인간(人間), 정재순 정재순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으며 극히 단편적인 것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 교회역사 주영연구소장 이교남 목사의 연구에 의해 2013년 새롭게 밝혀진 정재순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부해리(傅海利, H.M. Bruen) 선교사 정재순은 1878년 5월 24일, 경북 경산군 남천면 신기동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정진호, 모친은 김소사의 2남 4녀 중 장남이며, 부인은 손주안이다. 정재순은 외동아들을 두었는데 아들은 정원조, 자부는 손기순이며, 그의 후손은 현재 대구에서 교회를 잘 섬기고 있다. 정재순 가문은 당시 여느 가문처럼 유학의 집안이었다. 따라서 그는 어릴 때부터 한문을 배우고 한학을 수학하며 유학을 따르는 집안에서 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재순 목사의 묘는 칠곡에 있었는데, 1982년에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정재순 목사가 안동교회에 시무할 때 교인으로 생존한 성도들이 기억하고 있는 정재순 목사는 천성이 어질고 중후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성도들은 후덕하고 인정이 많은 교육자요 목회자인 그를 신앙과 인격 모든 면에서 존경하며 영적 리더십에 순종했을 것이다. 정재순 목사는 교인들을 포함한 주변의 여러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주는 주의 종이었다. 2. 선교사를 만나 회심(回心)한 사람, 정재순 유교가 뿌리 깊은 가정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정재순은 처음에 기독교에 심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재순 목사의 증손자에 따르면 정재순이 선교사를 구타하고 쫒아내려고 선교사를 찾아갔다가 부해리 선교사를 만나 전도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정재순 목사는 부해리 선교사를 찾아갔을 때 선교사의 사냥개가 빵을 다리 위에 놓고 주인이 먹으라는 명령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개도 기도하고 난 후에 밥을 먹는데, 사람인 나는 당연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되지 않겠는가?”하고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1900년 초 대구·경북 지방은 대구선교부 소속 선교사들이 지역을 정해 선교에 열심을 내고 있었다. 부해리 선교사, 안의와 선교사, 방위렴 선교사는 각각 경북 서부지방, 동부지방, 북부지방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선교사들은 다른 지역의 선교와 교회에 어느 정도는 관여하고 있었다. 정재순의 거주지인 경산 사월교회는 1898년 4월 안의와 선교사가 설립했으며, 부해리 선교사와 맹의와 선교사가 뒤이어 2대, 3대 담임 목사를 맡았다. 부해리 선교사는 1905년 사월교회에 부임했지만, 이미 1903년 이전에 경산을 방문해 복음을 전했던 것으로 추측되며, 따라서 정재순은 1903년 이전에 부해리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 회심했다고 보여진다. 3. 어린이 기독교학교의 교사(敎師), 정재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정재순은 당시 어린이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교사로 봉사하기 시작했다. 정재순의 증손자의 증언에 따르면 1905년 그는 경산 사월교회가 문을 연 계동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계동학교의 초대교사는 정재순, 전기식, 문사인 제씨였다. 계동학교는 오늘날 초등학교 수준의 학교로 신교육에 힘쓰며 인재양성에 앞장섰다. 이후 1910년경 경산에서 대구로 온 정재순은 대구 남성정교회가 운영하는 기독교 초등학교인 희도보통학교 전신(前身) 대남소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당시 교회 중심으로 세워진 기독교 학교들은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던 백성들에게 복음 뿐 아니라, 근대교육의 통로로 큰 역할을 감당하였다. 정재순은 경산에 이어 대구에서도 기독교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다음세대의 기독교 교육에 관심과 열정을 갖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의 주된 관심사 중의 하나인 다음세대 신앙교육에 관한 애정은 안동교회에 부임한 이후 곧이어 기독교 학교를 설립한 것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1911년 개교한 계동학교를 포함한 사월교회의 예배당과 종탑, 교회 정문과 화장실을 기억을 되살려 추정하여 그린 사진이다. 종탑을 사이에 두고 예배당과 계동학교가 나란히 서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아마 계동학교를 통한 다음세대의 교육을 그만큼 중시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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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경북선관위, 전국최초 기관협업 주민소통 플랫폼 구축!이강덕 포항시장과 경북선관위 김종대 사무처장이 주민참여 온라인 정책투표 업무협약서를 들고 있다. 포항시와 경상북도선거관리위원회(이하 경북선관위)는 10일 시청 중회의실에서 포항시의 주민참여 온라인 정책투표, 일명 P-voting 추진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P-voting’은 지난 7월 경북선관위 협업을 통하여 중앙선관위에 시책사업으로 공모, 지난 8월 전국최초 기관협업 주민참여 플랫폼에 선정됐으며, 10일 경북선관위와 업무 추진 협약식을 시작으로 11일부터 시민의 목소리를 청취한다. 이강덕 포항시장은 “요즘 주민들의 참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으나 광범위한 분야의 시정을 운영함에 있어 주민들의 목소리 하나하나를 반영하기는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이번 협업을 계기로 선관위와 우리시가 P-voting을 통한 시민 공감․소통이 활성화되고 다른 지자체로도 소통행정 모범사례로 확산되어, 직접 민주주의 가치를 실현하는 대표적 협업사업이 되기를 희망해 본다”고 말했다. 또한, 경북선관위 김종대 사무처장도 “사회 전반에서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커지고 공적 영역 의사결정수단으로 투표가 강조되고 있다”며, “최근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모바일 환경이 확산되어 온라인 정책투표야말로 가장 쉽고 민주적으로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통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포항시 온라인 정책투표(P-voting)는 우선, 오는 10월 11일부터 31일까지 3주간 포항불빛축제 개최시기,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주요 추진사업, 민선7기 중점 사업분야 등 5개 안건에 대해 실시한다. 포항시민은 누구든지 PC 또는 스마트폰으로 포항시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쉽게 투표할 수 있으며, 거리에 붙은 포스터나 홍보 리플릿의 QR코드를 스캔하여 투표 가능하다. 또한, 관내 29개 읍․면․동행정복지센터에 3주간 정책투표소가 설치되어 방문객들도 위촉된 투표안내도우미의 안내를 받아 투표할 수 있도록 했다. 각종 대규모 행사장에도 ‘찾아가는 현장투표소’가 설치될 예정이다. 포항시는 이번 협약을 계기로 선관위와 지속적인 협업은 물론 내년도에 중앙선관위가 개발한 앱을 활용, P-voting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시민의 의견을 바탕으로 한 시정운영으로 직접 민주주의의 가치를 높이고 전국의 대표적 상생협력의 모범사례로 발전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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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러 지방협력포럼, 성공 개최를 위한 첫발 내딛다포항시는 오는 11월 7일부터 9일까지 2박3일간 포항시 일원에서 열릴 예정인 ‘제1차 한-러 지방협력포럼’의 성공개최를 위한 추진상황 보고회 및 추진위원회 출범식이 갖고 본격적인 준비에 돌입했다. 10일 포스코 국제관에서 열린 이날 행사는 이철우 경북도지사와 이강덕 포항시장, 장경식 경북도의회 의장, 서재원 포항시의회 의장, 김재동 포항상공회의소 회장을 비롯하여 외교부와 북방경제협력위원회 등 유관기관·단체 등이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러 지방협력포럼’의 준비상황을 소개하고 성공적인 개최를 위한 적극적인 지원과 협조를 당부했다. 포럼 성공개최를 위한 구호 제창을 시작으로 경북도지사와 포항시장을 공동위원장으로 각 기관·단체 관계자, 전문가, 시민 등 33명으로 구성된 추진위원회를 출범하는 한편 분야별 세부추진계획을 설명하는 추진상황 보고회의 순으로 진행됐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한-러 지방협력포럼은 두 나라간 상생의 미래를 여는 첫걸음이자 경북도가 북방경제의 중심으로 도약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강덕 시장은 “포럼의 성공적인 개최를 통하여 포항이 글로벌도시로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무엇보다 지진과 철강경기 침체로 위축된 지역에 희망과 활력을 불어넣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러 지방협력포럼’은 지난해 9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렸던 한-러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제안하고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수락하는 형식으로 포럼 출범을 합의하고 공동 성명서를 채택했다. 오는 11월 포항에서 열리는 첫 포럼에는 서울특별시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17개 광역자치단체가, 러시아 측은 연해주를 비롯한 극동연방관구 소속의 9개 주 단위 지자체가 참가하는 대규모 국제행사로 치러질 예정이다. 이번 포럼은 두 나라 지방간의 경제·통상, 교육·과학, 문화·관광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 확대를 위한 방안들을 논의하는 상호교류의 장이 될 전망이다. 지난 2014년 첫 시장 취임부터 북방교류협력에 관심을 갖고 러시아와 중국 동북3성 등과의 발 빠른 교류를 펼쳐왔던 이강덕 시장은 약 한달 앞으로 다가온 이번 ‘한-러 지방협력포럼’의 성공적인 개최를 통하여 포항시가 ‘환동해중심도시’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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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에 전국 첫 ‘군단위 LPG배관망’구축경상북도는 11일(목) 청송읍 LPG공급관리소에서 전우헌 경북도 경제부지사, 윤경희 청송군수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군단위 LPG배관망 구축사업 준공식’을 갖는다. ‘군단위 LPG배관망 구축사업’은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천연가스 수급 제외지역인 전국 13개 군을 대상으로 LP가스를 중단없이 저렴하게 취사․난방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LPG공급시설을 설치하는 사업으로 경북 도내는 청송군, 영양군, 울릉군이 해당된다. 청송군은 2016년 1차사업 대상지역으로 선정돼 사업비 140억원을 투입해 2017년 6월 공사를 착공하여 LPG저장탱크(50톤, 2기)와 배관망(15km)을 매설하고, LPG공급관리소와 1,215세대에 사용시설(내관, 보일러, 안전장치 등)을 설치했다. 이번 준공으로 주민들은 LPG배관망을 통해 편리하고 안전하게 LP가스를 공급받을 수 있으며, LPG를 난방으로 사용함으로써 동절기 난방비가 크게 절감될 것으로 기대된다. 경북도는 영양군과 울릉군에도 군단위 LPG배관망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영양군은 2019년, 울릉군은 2020년까지 사업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또한, 도시가스가 공급되지 않는 농어촌마을 주민들의 에너지복지 향상과 정주여건 개선을 위해 ‘LPG소형저장탱크 보급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전우헌 경북도 경제부지사는 “청송읍이 도시수준의 가스사용 기반시설을 갖춘 만큼 앞으로 지역발전이 기대된다”며 “LPG배관망 구축사업을 확대 추진해 농어촌지역 주민들의 에너지 복지를 향상시키는 한편 청년들이 돌아오는 농어촌 정주여건 개선에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청송 군단위LPG배관망 사업현황 ▪ 사업기간 : 2016. 5월 ~ 2018. 9월 ▪ 사업장소 : 청송읍 월막1․2리, 금곡1리 일원 ▪ 사 업 비 : 140억원(국비 70, 도비 16.8, 군비 39.2, 자부담 14) ▪ 사업내용 : LPG저장탱크․배관망 및 개별세대 내관․보일러․안전설비 설치 ▪ 시설현황 : 저장탱크 30톤 2기, 배관망 15km (수혜세대) 읍지역 1,215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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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방농악보존회, 전국 농악경연대회 대통령상 수상중방농악보존회(회장 이승호)는 지난 6일 올해 처음으로 대통령배로 승격된 제20회 김제 지평선 전국농악 경연대회에서 전국 10개 팀이 참가한 가운데 경연을 펼쳐 대회 첫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중방농악보존회(회장 이승호)는 2004년 설립되어 꾸준히 활동하고 있으며, 각종 대회에서 국무총리상 3회, 장관상 15회, 도지사상 13회 등의 수상을 하여 경산의 문화를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이승호 중방농악회장은 “단원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열심히 해준 결과”라며 단원들에게 공을 모두 돌렸으며, “앞으로도 증진하여 중방농악의 맥을 계속해서 이어갈 수 있도록 하겠다.“ 며 수상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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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양검정으로 참외 건강검진 무료로 받으세요성주군(군수 이병환)은 PLS대응 안전농산물 생산과 영농비용 절감을 위해 매년 무료로 토양검정사업을 실시하여 농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특히 시설참외 재배토양 조성시기인 10월을 토양검정 집중 홍보기간으로 설정하여 운영하고 있다. 토양검정 적기는 작물재배 전 또는 수확 후 퇴비 살포하기 전이다. 특히 시설참외가 수확이 끝나는 8~9월부터 시작하여 작물재배를 준비하는 10월 한달간 매년 많은 농가에서 토양검정 수요가 집중되고 있다. 토양검정을 통해 토양산도, 전기전도도, 유기물, 질소, 인산, 칼리, 칼슘, 마그네슘 등에 대한 시비처방서를 발급받아 적절한 토양양분 소요량을 환산하면 불필요한 비료사용을 줄여 작물에 필요한 양분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고 특정양분의 부족 및 과다로 인한 장해를 사전에 예방하는 효과가 크므로,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건강검진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토양검정을 받고자 하는 농업인은 1필지 기준 5~10곳을 선정해 표면의 이물질(1cm 정도)을 제거한 후 표면에서부터 15cm 깊이로 시료 채취 후 골고루 혼합하여 500g 정도를 봉투에 담아 농업기술센터 토양검정실로 신청하면 된다. 김정애 농업기술센터소장은 "2019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PLS제도에 대비하여 토양검정 등 과학영농기술을 통한 농업 경영비 절감과 고품질 농산물 생산기반 조성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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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이 배출한 첫 해외선교사, 이대영 목사(4‧끝)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이대영 목사 (李大榮, 1887~1968) 11. 이대영, 사역을 통해 일본에 저항하다 3·1운동 이후 민족혼을 배우기 원했던 의식 있는 젊은이들이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특히 우리나라 기독교 청년운동의 출발이자 상징이 된 기독청년면려회는 1921년 2월 5일 이대영 목사가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교회를 섬길 때 안동교회에서 최초로 조직되었다. 면려회에 가입한 청년들은 성경을 공부하고, 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봉사했으며, 복음을 들고 전도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했고, 헌신을 다짐하는 예배 순서를 가졌다. 또한, 야간학교를 개설했으며 물산장려운동, 문맹퇴치, 농촌사업 등 범국민운동을 다각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대영 목사가 1921년 안동교회에 부임하자마자 이런 성격을 갖고 있는 기독청년면려회 운동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것은 비록 그가 목회자였지만 어떤 정신을 갖고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927년에 준공된 선도당. 선교센타로 이대영 선교사가 예배 인도와 성경 교육을 했다. 이와 같은 이대영 목사의 대일관(對日觀)은 산동반도에서 선교하던 시절에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약 10여 년 동안 이대영 목사와 동역했던 방지일 목사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다. “당시 일본교회는 일제치하에 있던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해 선교에 힘썼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자 일본인 목사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면서 함께 선교하자고 했고, 이대영 목사는 ‘우리가 너희 마루는 닦아 줄 수는 있지만 목사로서는 함께 못 한다’고 거절했다. 이후 일본 목사에 의해 고발되어 일본경찰에게 밤새도록 조사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너무 억울해서 이대영 목사와 손을 잡고 통곡하며 운 적이 있다.” 이대영 목사는 일제의 압제 하에 있는 조국을 위해 무력 투쟁은 할 수 없었지만 조선의 국민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또한 목사로서 최소한의 저항정신을 갖고 드러내었던 것이다. 12. 이대영, 일평생 기도의 사람으로 살다 이대영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기도의 은사가 있었고, 한 번 무릎을 꿇으면 오랜 시간동안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던 기도의 종이었다. 그는 매일 새벽기도회를 마친 후 5시부터 9시나 10시 까지 계속해 기도했다. 그래서 가족들은 이 목사와 아침 식사를 할 수 없었으며, 점심이나 저녁식사만 함께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여러 사역을 시작할 때 반드시 기도로 시작할 정도로 기도의 사람이었다. 특히 ‘성령을 충만히 받자’는 설교에서 이대영 목사는 중국 화북신학교 교장 가옥명 박사의 말을 인용하여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기도를 많이 하면 성령의 능력이 많고, 기도를 적게 하면 성령의 능력이 적고, 기도하지 아니하면 성령의 능력이 없다.” 누구보다 기도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대영 목사는 쉬지 않고 기도했으며, 그의 사역 역시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마치는 기도의 사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13. 이대영, 안동교회 초대 담임목사인 김영옥을 만나다 이대영 목사는 1921년 1월 제9회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고시위원 중에는 안동교회 초대 담임인 김영옥 목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대영의 목사 임직에 김영옥 목사가 깊이 관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목사 임직 후 1달도 경과하지 않은 1921년 2월, 이대영 목사는 김영옥 목사 뒤를 이어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칭따오 신의로에 있는 이대영 선교사 사역 병원과 학교. 그러나 이대영 목사는 이때 김영옥 목사를 처음으로 만난 것이 아니다. 훗날 김영옥 목사의 손자인 김형태 목사가 결혼식 장소를 부탁하기 위해 승동교회 이대영 목사를 찾았을 때 그는 자신이 김영옥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음을 김형태 목사에게 밝혔다고 한다. 이처럼 김영옥 목사는 이대영 목사의 세례와 목사 임직에 관계가 있었으며, 후에 1957년 9월 그의 손자 결혼식 주례를 이대영 목사가 승동교회에서 함으로 그 긴밀한 관계가 이어졌던 것이다. 14. 이대영, 중국을 떠나 한국교회를 섬기다 이대영 목사는 첫 번째 담임사역지인 안동교회에서의 14개월, 1948년 가족을 남겨둔 채 상해를 거쳐 귀국함으로써 두 번째 사역지인 중국 산동에서의 33년을 마치고 마지막 사역지인 서울 승동교회에 67세인 1952년 담임목사로 부임하였고, 3년 후인 1955년 위임목사가 되었다. 1955년 4월 7년 동안 중국에 떨어져 있던 가족들이 귀국하였고, 총회는 선교사역 30주년 기념예배 및 환영회를 개최하여 주었다. 이후 이대영 목사는 1956년 9월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제41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신앙의 대선배로서, 인격자로서, 또한 총회장으로서 이대영 목사는 은혜롭게 회의를 진행했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1959년 장로교단 분열 시에 이대영 목사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승동교회에서 개최된 제59회 총회에서 교단분열의 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교단 분열의 여파는 승동교회의 분열로 이어졌고, 이후 4년 동안 계속된 분쟁으로 70세가 넘은 이대영 목사는 많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분쟁이라는 난제를 잘 마무리 하고 안정을 찾은 이후 1968년 11월 2일 만 81세로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였다. ▲본국에서 개회된 장로교 총회에서 선교보고를 하기 위해 선교지인 산동성을 떠나기 전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결론 이대영 목사는 2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61년 동안 묵묵히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감당한 신실한 종이었다. 그의 신앙여정은 핍박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집안의 핍박을 피해 흥해에서 목회자로서 훈련을 받은 그는 결국 고향인 예천 금곡에 복음을 전하는 전도인이 되었고, 여러 교회의 전도인과 조사로 사역하다가 평양신학교를 마친 후 목사안수를 받고 안동지역의 중심교회인 안동교회의 제2대 담임목사로 사역하였다. 비록 14개월이라는 짧은 시무 기간에도 괄목할만한 성과를 나나낸 뛰어난 목회자였다. 특히 그는 거룩한 비전을 쫓는 순종의 종이었다. 1922년 총회의 부름을 받고 중국 산동반도에 나가 복음을 전하고 한인들을 돌보았던 탁월한 리더였다. 중국이 공산화된 후 선교사역을 중단하고 철수한 후 서울 승동교회 담임목사로, 또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제41회 총회장으로 교회와 총회를 섬긴 영적 거인이었다. 이대영 목사는 넓은 포용력이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한국뿐아니라 중국에서도 많은 이들로부터 흠모의 대상이었다. 또한 재중동포들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했던 애국자였다. 그는 때때로 오늘 해야 할 것과 하지 못할 것을 용기 있게 일본인 앞에서 증언했다. 그 결과 일본 경찰에 여러 날 동안 취조를 받아야 했다. 또한 그가 말씀을 전한 마을은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섬겼던 안동에서 어린이, 청년, 그리고 장년의 부흥이 일어났다. 중국 땅에서도 그가 섬겼던 중국교회 성도들의 믿음은 성장하고, 교회는 든든히 서 갈 수 있었다. 이대영, 그는 쉬지 않고 믿음으로 간구하는 기도의 종이었기 때문이다. 이대영 목사는 복음을 받아들인 후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예수님을 위해 헌신했던 하나님의 종이었다. 믿음의 선배인 그가 우리 마을, 안동지방에서 출생하고, 안동에서 교회를 섬겼다는 것이 자랑스러울 뿐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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