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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거룩한 흔적을 남긴 사역자, 김영옥 목사(4·끝)김 승 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영옥 목사 (金泳玉, 1871-1952) 9. 한국교회의 목사 대가족 · 명문가문을 이룬 사람, 김영옥 김영옥 목사의 아들 故 김은석 목사 김영옥 목사의 손자 故 김형태 목사 김영옥 목사 가문은 목사 대가족과 명문가문을 이루었다. 1대 김영옥 목사로부터 4대에 걸쳐 무려 9명의 목사가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1대 김영옥 목사, 2대 김영옥 목사의 장남 김은석 목사, 3대 김은석 목사의 자녀인 김형칠 목사, 김형일 목사, 김형태 목사, 김형달 목사, 김형숙 목사, 4대 김형규 목사, 김대규 목사 후보생 등 4대에 걸쳐 9명의 교역자가 배출되었다. 김영옥 목사의 장남인 김은석 목사는 193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풍기성내교회(1909년 설립)를 담임으로 섬겼다. 김영옥 목사도 풍기성내교회 3대 담임목사로 섬긴 적이 있었는데, 부친의 뒤를 이어 그는 4대 담임목사로 5년 동안 풍기 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했다. 그는 성내교회를 사임한 후 일본 나고야 한인교회에 부임하여 나고야에 거주하는 교포들을 목양했다. 하지만 1941년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던 날 새벽, 나고야 민족주의 및 종교그룹 사건인 조선독립단사건에 연류 되어 일본 경찰에 검거당해 1년 넘게 옥고를 치렀다. 귀국 후 1944년 8월에는 여운형이 중심이 된 건국동맹사건으로 서대문 감옥에서 4개월간 옥고를 치르면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해방과 함께 출옥한 김은석 목사는 경북 문경으로 내려가 정치일선에 나섰다가 낙선한 후 다시 목회현장으로 돌아왔다. 그 후 김은석 목사는 자신이 여러 차례 감옥생활을 경험한 탓으로 수감자를 전도하는 사역에 헌신했다. 1956년 김천의 소년원 교화사로 시작하여 1966년 정년으로 퇴임하기 까지 10년을 수형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사명을 감당했다. 정년퇴임 후에 인천에 거주한 김은석 목사는 계속해서 인천 소년원생들의 선도에 힘쓰면서 별세하기 전 까지 25년 동안 교도소 전도에 온 힘을 다 쏟았다. 2대 김은석 목사 자녀들은 대부분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 김은석 목사의 자녀는 모두 6남 1녀로 이중 5형제가 목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다. 더욱이 외동딸의 남편인 사위까지도 목사였다. 장남인 김형칠 목사는 서울 신학대학교를 나와 부산노회장을 역임했으며, 2남인 김형일 목사는 고려신학교 출신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 신학교를 거쳐 롱비치대학교에서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현지 한인교회를 목회하고 있다. 3남인 김형태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교와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교, 피츠버그 대학교를 거쳐 연동교회를 섬겼다. 4남인 김형달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원과 미국 풀러신학대학교를 거쳐 미국에서 외항선원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했다. 5남인 김형숙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원를 졸업하고 미국 볼티모어 한인교회를 섬겼으며, 6째인 외동딸 김순자의 남편인 이성식 목사도 흑석동 교회에서 목회했다. 막내인 김형준은 연세대학교 신학과 출신으로 목사지망이었으나 전공을 경영학으로 바꿔 미국으로 건너가 장로로 교회를 섬겼다. 그러나 풍성한 3대와는 달리 4대에 와서는 1명이 목회자로 살고 있다. 장남인 김형칠 목사의 아들인 김형규 목사는 미국 퀸즈연합장로교회를 섬기며 목사의 길을 걸었다. 김형태 목사는 4대에 걸친 목사 집안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에 대해 “목사는 다른 직업과는 달리 무언가 남다른 ‘어떤 소명의식’이 없어서는 안 되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그 고귀한 소명이 형제 모두에게 고루 나눠진 것을 우리 가문에 대한 하늘의 축복으로 믿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김형태 목사는 연동교회가 세워진 지 73년 후인 1967년, 연동교회 제5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볼 수 있다. 연동교회 출발에 큰 공(功)을 세운 조부 김영옥 목사(당시 조사의 신분)의 뒤를 이어 손자인 김형태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한 것이다. 그는 1989년 조기 은퇴하기 까지 22년 동안 연동교회와 총회, 그리고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할아버지가 전도한 사람들에 의해 개척된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했을 때 손자의 심정이 어땠을까? 아마 감격 그 자체였을 것이다. 김영옥 목사는 한국교회 130년 역사 가운데 다시 배출되기 힘든, 그러나 한국교회에 거의 알려지지 않고 까맣게 잊혀진 최고의 명품 목사 중의 한 분인 동시에 그의 후손들은 신앙의 명문가정을 이루었던 것이다. 10. 아들과 손자를 돌보고 그의 사역을 도운 할아버지, 김영옥 김형태 목사에 따르면 조부인 김영옥 목사는 매우 가정적인 분으로 8명의 손자를 친히 키우셨다고 기억한다. 부친인 김은석 목사는 교회 일이나 정치에는 열심이었지만 가정에는 무관심했기 때문에 조부인 김영옥 목사가 거의 모든 일을 맡아 하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실제로 광복 후 김은석 목사가 건국운동을 위해 서울로 상경한 다음 김영옥 목사는 김은석 목사 가정을 인솔해서 문경으로 이사할 정도로 책임감이 강했다. 한편, 김은석 목사는 풍기성내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을 때 전임자였던 부친 김영옥 목사와 함께 6개월 여 동안 동역하는 진기록을 남겼다. 김영옥 목사는 아들의 목회를 염려하면서 그의 목회사역이 연착륙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그 결과 풍기성내교회는 안정적으로 리더십의 전환을 가져올 수 있었다. 또한, 김영옥 목사는 마지막 목회지인 의성 삼분교회에서도 장손인 김형칠이 경성신학교를 졸업하고 삼분교회에서 전도사 사역을 시작할 때 장손의 목회를 도왔다. 이듬해에 발발한 6 25 한국전쟁으로 피난 갔다가 1951년 삼분으로 돌아온 후 동년 5월 10일 김형칠이 목사 장립을 받았다. 장손이 목사로 임직했을 때 조부인 김영옥 목사는 얼마나 기뻤을까? ▲1941년 안동교회 본당인 석조예배당 앞에서 찍은 사진으로 김영옥 목사는 당시 안동교회 6대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었다. 중앙에 김 목사 부부와 장남 김은석 목사 부부, 그리고 장손 김형칠 목사 및 8남매를 볼 수 있다. 한국 땅에 복음이 처음으로 전해진 것은 1884년 4월 5일이다. 복음의 씨가 뿌려진 지 67년이 경과한 1951년 5월 10일, 직계로 3대 목사 가정이 탄생한 것이다. 장손이 목사가 된 후 김영옥 목사는 1952년 3월 27일 81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당시 삼분교회 당회장 직분으로 세상을 떠나시는 날 아침 교회 장로들을 사택으로 불러 “간밤에 하늘에서 불자동차(?)가 내려왔는데 빈자리가 하나 있어 아마도 내가 탈 자리인 것 같더라. 내 어린 손자 형칠 전도사의 목회를 잘 도와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장로들이 나간 후 자리에 누우셔서 조용히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나셨다. 마지막 하늘나라에 가는 순간까지 김영옥 목사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책임을 감당한 자애로운 분이었다. 김영옥은 가정에서는 아버지와 할아버지로, 교회에서는 선배목사요 전임교역자로 후배목사와 후임교역자에게 교회를 잘 섬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 믿음의 선배였던 것이다. 결론: 거룩한 흔적을 남긴 위대한 사역자, 김영옥 목사 김영옥 목사는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이후 일평생 동안 복음전도와 교회 목회에 전념한 목회자들의 롤 모델(Role Model)과도 같은 분이었다. 따라서 경상북도 북부지역과 그 중심교회인 안동교회 초대담임인 김영옥 목사는 당연히 존경받아야 하고 기억되어야 할 믿음의 선배인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 단 한 번도 예수님을 실망시키지 않았 다.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 살았다. 교회에서는 매서인으로, 조사로, 영수로, 장로로, 그리고 목사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고 또 헌신했다. 그는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또한 하나님의 집이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어느 누구보다도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 결과 일평생 하나님을 위해 살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품에 안겼다. 김영옥 목사는 일제 강점기, 광복, 건국, 6·25 전쟁 속에서 치열한 삶을 살았다. 그의 전 생애는 믿음 없이는 결코 설명될 수 없다. 김영옥 목사는 교회에서는 사랑의 목자였고, 지역 사회와 국가를 사랑한 공의의 지도자였다. 날마다 경건한 신앙생활을 통해 얻은 영적 통찰력과 지도력은 교회나 사회적으로나 지도자가 되게 했다. 더욱이 그는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모 교회와 같은 교회들을 든든히 세움으로써 교회가 지역사회의 중심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했다. 그가 섬긴 안동교회, 사월교회, 포항제일교회, 경주제일교회, 영주제일교회, 풍기성내교회 등은 설립된 지 1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역교회의 중심교회로서 영적인 리더십을 갖고 있는 동시에 지역사회를 잘 섬기는 교회로 소문나있다. 김영옥 목사에게는 교회를 섬기는 일이나 국가를 위한 일이 모두 같은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긴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요 위험을 무릎 쓰고 국가와 민족을 사랑한 사회 지도자요, 독립운동가요 애국자였다. 그 결과 그의 자리는 늘 고난의 자리였지만, 동시에 거룩한 흔적을 남긴 자리였던 것이다. 우리는 충성스럽게 거룩한 사역을 감당한 김영옥 목사와 같은 믿음의 선배가 그리운 혼란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살고 있다. 누구보다 교회를 사랑하고 민족과 국가를 사랑했던 김영옥 목사와 그의 거룩한 사역이 그리운 시간이다. 한국교회가 김영옥 목사의 믿음과 혜안(慧眼), 그리고 용기와 끈기를 기초로 한 거룩한 삶을 믿음의 표상으로 삼을 때 거룩한 교회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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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거룩한 흔적을 남긴 사역자, 김영옥 목사(2)김 승 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영옥 목사 (金泳玉, 1871-1952) 4. 안동지역에 복음의 씨를 뿌린 교회개척자, 김영옥 안동에 복음이 처음으로 전해진 것은 부산을 거점으로 선교하던 배위량(W.M.Baird) 선교사에 의해서다. 그는 1893년 4월 17일 부산 동래를 출발하여 밀양, 청도, 대구, 낙동, 안동. 의성, 영천, 경주, 울산을 거처 5월 20일 부산으로 돌아가는 무려 1,240 리(里)나 되는 전도여행을 통해 복음을 전했다. 5월 5일, 그의 역사적인 안동 방문이 있었고, 이 날은 안동에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진 날이다. ▲1909년 9월부터 안동의 북부지역은 사우대 선교사가, 서쪽은 오월번 선교사가 책임지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전도여행을 떠나기 전의 모습으로 추측된다. 좌측 말에 탄 사람은 사우대 선교사이며 말 옆에 있는 사람은 당시 조사인 김영옥(1911년 안동교회 초대담임목사로 부임)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마부, 그리고 오른쪽 말에 탄 사람은 오월번 선교사이다. 이후 미국 북장로교는 1897년 대구선교부를 설립했고, 1902년부터 경북 지방을 세 구역으로 나눠 동부 지역은 안의와(J.E.Adams) 선교사, 안동을 포함한 북부는 방위렴(W.M.Berret) 선교사, 그리고 서부는 부해리(H.M.Bruen) 선교사가 각각 담당해 전도사역을 감당함으로써 경북북부지역의 복음화가 본격화되었다. 특히 안의와 선교사는 1902년 3월, 김기원과 함께 안동을 순행하였는데 이때 이들은 시장에서 전도를 하면서 복음서를 판매했다. 이 해에 안동 국곡과 풍산, 그리고 의성 비봉에도 교회가 설립되었다. 1908년 장로교 선교사 총회에서 안동선교부 설립 결의가 이루어졌다. 그후 안동 최초 주재 선교사로 사우대(C.C.Sawtell) 선교사가 안동에 도착했으며, 1909년 8월 8일 안동교회가 설립됨으로써 안동지역의 복음화가 활기를 띠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원주에서 선교하던 미국 북장로교 소속 오월번(A.G.Welbon) 선교사와 조사 김영옥도 1909년 선교지를 안동으로 임지를 옮김으로써 안동 땅에 복음의 바람이 강하게 불기 시작했다. 안동에 도착한 김영옥은 선교사들을 돕는 조사로 안동을 중심으로 경북 북부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는 이미 세워진 교회들을 돌보았으며, 특히 8월 둘째 주일 설립된 안동읍 최초의 교회인 안동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다. 5. 영남지역 독노회에서 최초로 안수 받은 한국인 목사, 김영옥 언더우드 선교사의 전도로 세례를 받은 김영옥은 여러 해 동안 선교사의 도움으로 성경을 공부했다. 당시 언더우드가 운영하고 있던 성경훈련반은 1년에 한 달씩으로 그 과목은 성경주해, 제목별 성경공부, 성경입문, 교회사, 성경지리, 교회정치, 찬송, 설교 등을 포함했다. 한국교회 최초의 신학교라고 할 수 있는 그곳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은 김영옥은 매서와 조사가 되었다. 조사로 활발하게 사역하던 김영옥은 1901년 개교한 장로교 최초의 신학교인 평양신학교에 만 30세에 입학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조사와 영수, 장로 등 여러 사역으로 인해 학교 공부에만 전력투구할 수 없었던 김영옥은 졸업하기 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만 40세인 1911년(제4회)에 마침내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9월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에서 개회된 제4회 독노회에서 홍승한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다. 따라서 1891년 영남지역(부산·경남·대구·경북 등)에 복음이 전해진 이후 대구에서 열린 첫 노회에서 김영옥, 홍승한은 목사로 임직을 받은 것이다. 한편, 영남지역에 있던 교회에서 목사 직분을 가지고 처음으로 시무한 한국인으로 경북교회사나 대구제일교회는 김천일 목사를 기록한다. 그러나 김천일 목사의 안수 일자는 자료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혼선을 준다(경북교회사는 1911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하편은 1912년으로 기록). 따라서 존재하는 자료를 종합할 때 영남지역 교회에서 최초로 목사로 시무한 한국인은 김천일이나 혹은 김영옥, 홍승한이라고 할 수 있다. 6. 안동지역의 복음화에 주춧돌을 놓은 사람, 김영옥 김영옥 목사의 부임(赴任)으로 안동교회는 경상도에서 처음으로 한국인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가 되었고, 그의 뛰어난 영적 지도력은 안동을 포함한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복음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안동교회는 놀랍게 부흥하여 1년이 채 지나기 전에 무려 75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발돋움했다. 안동교회의 첫 학습자는 강복영 외 14명(1910년 8월 18일), 첫 세례교인은 권중한 외 8인(1911년 3월 2일)이었다. 또한, 김영옥 목사가 담임으로 섬겼던 1911년부터 1921년까지 안동교회는 안동지역의 중심교회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다. 1911년에는 오늘의 초등학교 수준인 계명학교를 설립함으로써 교회가 섬김과 봉사로 지역사회와 소통할 수 있게 했다. 특히 1913년에는 김병우를 장로 장립함으로써 안동지역에서 최초로 당회가 구성되었다. 주일학교와 여름성경학교를 통해 어린이들의 신앙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1913년 경북북부지방에서는 처음으로 여전도회를 조직하고 도사경회를 개최함으로써 여성들의 신앙교육에도 집중했다. 1920년 안동 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했으며, 1921년 전국 최초로 기독청년면려회를 조직함으로 청년의 신앙교육과 계몽에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안동에 주재하고 있던 안동선교부의 선교사들은 자신들에게 집중되었던 리더십을 김영옥 목사에게 조금씩 이양(移讓)해 한국인 목사의 지도력을 배양했다. 1913년 8월 9일에 있었던 안동교회의 역사적인 첫 번째 당회록은 이 사실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안동교회는 1909년 8월 8일 첫 예배를 드림으로 설립된 지 4년이 지나지 않은 1913년 7월 20일에 김병우를 장립함으로써 안동지역에서 첫 당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장로장립 20일 후인 1913년 8월 9일 안동교회 제1회 당회가 오월번 목사 댁에 모여 문답건과 예배당 건축 등 안건을 처리하였다. 위 사진 중 왼쪽은 제1회 당회록을 포함한 안동교회 당회록 제1권이며, 우측은 김병우의 장로장립을 확인할 수 있는 당회기록이다. 1913년 8월 14일에 있었던 제2회 당회록에는 8월 17일 있을 첫 세례와 성찬의 집례자로 초대 김영옥 목사를 기록한다. 교회의 사역에 중요한 역할을 하던 선교사가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회가 조직되자 첫 세례식과 성찬식 집례를 한국인 담임 목사에게 양보한 것이다. 이것은 선교사들의 크나큰 배려였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불과 5일 전에 있었던 안동교회 첫 당회의 회장은 오월번 선교사였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비록 자신들의 조사였지만 목사 임직을 받고 안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김영옥 목사를 존중하며 현지인 목사를 세워줌으로써 점차 자국민 중심의 리더십을 키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안동교회는 100년이 넘는 역사에서 부속건물이 아닌 본당을 단 3번 건축했는데, 첫 예배당은 그가 조사로 섬길 때인 1910년 10월 30일 준공한 16칸 ‘ㄱ’자 예배당이다. 이 예배당 건축을 위해 교인들은 10월 9일 주일 오후예배 시 특별헌금을 했으며, 당시 조사인 김영옥도 선교사들이 준 지방 순회 때 타고 다니던 노새를 팔아 건축헌금에 보탰다. 더욱이 예배당을 신축한 이후 특별부흥집회가 열렸는데 당시 최고의 부흥강사인 길선주 목사도 강사 중의 한 분이었다. 또한 여성과 소녀들을 위해 활발한 성경공부도 이루어졌다. ▲1913년 11월부터 공사가 착수되어 이듬해인 1914년 2월에 준공한 안동교회의 두 번째 신축 예배당으로 오늘의 100주년 기념관 바로 그 위치에 서 있었다. 예배당은 목조 함석지붕을 가진 건물로 반(半) 2층 구조형식으로 약 50~60평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건축기법 상 2층은 작은 규모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안동교회의 두 번째 예배당인 2층 목조 함석지붕 예배당은 첫 번째 예배당이 준공된 후 급속한 교인의 증가로 인해 1914년 초 준공되었다. 이때도 김영옥 목사는 선교사가 사준 가옥을 팔아 헌금했을 정도로 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두 번째 예배당의 준공으로 주일학교의 활성화가 이루어져 양적으로 또 질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1920년 7월, 안동지역에서 최초로 여름성경학교가 열렸으며, 이듬해에는 주일학교가 조직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더욱이 인근 지역 교회들이 연합하여 모일 수 있는 부인도사경회 등 대형집회가 가능하게 되었다. 김영옥 목사의 부임으로 안동교회는 사역의 내용, 교회의 건물과 조직 등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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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거룩한 흔적을 남긴 사역자, 김영옥 목사(1)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 영 옥 목사 (金泳玉, 1871-1952) 1893년 베어드 선교사에 의해 안동지역에 복음이 전해진지 124년이 지났다. 오늘의 교회는 믿음의 선배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우리 모두는 너무도 잘 안다. 훌륭한 믿음의 선배 중에는 교역자들 뿐 아니라 평신도들도 포함된다. 이 분들의 헌신의 결과로 척박한 이곳 안동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뿌리를 내리고 자라 마을마다 교회가 서게 되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수고임을 알기에 감사할 뿐이다. 김영옥 목사는 한국선교 초기 거룩한 발걸음을 통해 거룩한 흔적을 남긴 위대한 선배이다. 필자는 그에 대한 조명이 너무 늦었음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그리고 경상북도에서 초개와 같이 모든 것을 버리며 교회와 국가를 위해 헌신한 김영옥 목사를 연구하여 탈고하니 그동안 목사님에게 가졌던 죄송스러운 마음이 조금이라도 보상받는 느낌이다. 이제 자애로운 아버지요 할아버지, 지역의 초대교회의 기초를 든든히 세워 중심교회로 서게 한 목사, 그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믿음으로 두려움 없이 애국한 김영옥을 소개한다. 1.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 결신한 청년, 김영옥 경상도의 첫 한국인 목사는 김영옥(金泳玉, 1871-1952)이다. 김영옥이 비록 영남지역 최초의 한국인 목사이지만 그의 고향은 북한으로, 그는 1871년 4월 12일 황해도 연백군에서 출생했다. 가난했던 그는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해 미국 하와이로 갈 꿈을 갖고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18세가 되던 1888년 어느 날, 평산 누님 댁에 갔다가 장로교 최초의 선교사였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선교사가 소래(松川)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미국으로 갈 방법을 찾기 위해 그를 찾아갔다. 그러나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제시받은 김영옥은 미국 갈 결심을 포기함과 동시에 회심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결국 그는 장로교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로부터 세례까지 받게 되었던 것이다. 전혀 뜻하지 않게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은 김영옥은 세례 까지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언더우드 선교사의 마부로 복음사역의 적극적인 도우미가 되었다. ▲1909년 9월부터 안동의 북부지역은 사우대 선교사가, 서쪽은 오월번 선교사가 책임지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전도여행을 떠나기 전의 모습으로 추측된다. 좌측 말에 탄 사람은 사우대 선교사이며 말 옆에 있는 사람은 당시 조사인 김영옥(1911년 안동교회 초대담임목사로 부임)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마부, 그리고 오른쪽 말에 탄 사람은 오월번 선교사이다. 2. 목사 임직 이전의 복음전도자, 김영옥 회심 이후 김영옥은 복음사역을 위해 하나하나 착실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복음전파사역에 관한 김영옥의 결심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까지 중단 없이 계속되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후 그는 단 한 번도 곁길로 간 적이 없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기 위한 준비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그는 능동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 1년 만에 한문 신·구약 성경 모두를 통독(通讀)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또한 선교사들로부터 전도법과 장로교회에 관해 배웠으며 선교사들과 간단히 대화할 수 있는 영어실력도 갖추게 되었다. 모든 과정을 이수한 김영옥은 실력 있는 매서인(賣書人)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선교사를 도와 공식적인 매서인으로서 사역할 수 있었다. ▲황해도 솔래(松川)에서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 18세 때(1888년) 회심하고 결신한 김영옥은 휴식도 없이 64년(1952년) 동안 서울, 강원도 철원과 원주, 경북 안동, 사월, 포항, 영주, 경주, 풍기, 문경, 그리고 의성 삼분 등 전국에서 교회를 세우고 돌보며 애국하다가 하나님의 나라에 입성하였다. 이후 서울로 올라온 김영옥은 1893년 모삼열(Samuel. F. Moore)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순교를 각오하고 서울 종로 5가, 4가 등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그 결과 몇 명의 성도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1894년 이들이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와 그의 조사(助事)인 서상륜과 함께 연지동 초가(草家)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오늘의 연동(蓮洞)교회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또한 김영옥은 조사로서 서울의 승동교회와 동막교회 설립에 관여함으로써 이 땅에 교회를 세우는 사역을 쉬지 않고 감당했다. 이후 김영옥은 서울을 벗어나 더욱 활발하게 전도사역을 감당했다. 그는 경기 동쪽과 황해도 이남(以南)으로 순행하며 전도하여 백천, 평산, 금북, 금성, 양구, 화천, 양주, 포천, 등지에 여러 교회를 설립에 기여했다. 특히 김영옥은 1898년 모삼열 선교사와 함께 전도하고 개척한 고향인 황해도 백천군 운교(雲橋)교회에서 영수(領袖)와 장로로 섬기기도 했다. 운교(구름다리)교회는 교인들의 헌금으로 큰 한옥을 사서 새롭게 단장하여 예배처소로 사용한 그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로 김영옥은 주일예배를 인도하였다. 그는 새 신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신자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2주 내지 3주간씩 연속으로 사경회를 열기도 하였다. 김영옥은 전문적인 훈련을 거친 한국교회 초기 매서와 조사, 그리고 영수와 장로로 초기 한국교회의 뛰어난 평신도 지도자였던 것이다. 3. 영적 지도력을 갖춘 한국 장로교 평신도 리더, 김영옥 조사(助師)는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들이 그들의 고국과는 모든 것이 완전히 다른 이 땅에서 적응해갈 수 있도록 도운 사람들이다. 선교사들은 이들에게 한국어를 배우고, 부동산을 구입할 때 도움을 받았으며,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각 지방으로 순행할 때 큰 도움을 받았다. 만일 어느 누구도 선교사들의 복음사역과 현지 적응을 돕지 않았다면 이렇게 빠른 시간에 이 땅에서 복음의 씨가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여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김영옥은 조사로서 초기 한국교회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었다. 한국선교 초기 많은 조사들이 있었지만 조선장로교사기에 따르면 김영옥은 당시 활동하던 많은 조사 중에서도 영향력 있는 발언권을 가진 조사였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그는 공식적인 회의석상에서 중요한 발언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김영옥은 1903년 9월, 1904년 9월, 1906년 9월 세 차례에 걸쳐 선교사들과 함께 모인 장로교공의회 경성소회 총대 장로로 참석하여 발언하기도 했다. 1906년 9월 회의에서는 “교인으로는 교회를 순종하고 국민으로는 국가에 순종할 방침이란 문제”에 대하여 발언했는데, 이것은 분명한 기독교적 국가관을 가진 김영옥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7명의 한국인 목사가 처음으로 배출되기 전 까지 김영옥은 당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평신도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따라서 당시 활동하던 많은 조사 중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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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신앙이정우 목사 안동서부교회 한 시대를 평가하고 진단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사람들의 행동양식과 집단 행태를 알아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행동양식과 삶의 방향성이 그 시대의 거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사기는 BC.1390년~BC.1055년까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대적 상황과 신앙적 행태를 알 수 있는 주요한 단서가 되는 성경입니다. 당시는 여호수아가 죽고 난 후, 아브라함부터 모세를 거쳐 여호수아까지 단일 지도자를 중심으로 신정 체제를 유지했던 이스라엘에 신앙의 혼란이 불어 닥친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정복전쟁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몰아내라고 하신 가나안 족속들을 다 몰아내지 못하고 그들의 사상과 신앙과 삶의 패턴에 젖어 살거나 오히려 가나안 문화에 압도되어 점점 신앙의 가치를 상실해 갔습니다. 그래서 사사기의 악순환이라는 불리는 범죄-징계-회개-구원-재타락 이라는 악순환의 구조에 빠지게 됩니다. 사사시대의 잘못된 신앙을 한 마디로 진단한다면,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라고 사사기 마지막 구절은 기록합니다. 그 특징적인 삶을 사사기 17장에서 ‘미가’ 라는 사람의 가정을 통해 고발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아들이 물질을 범함으로 신앙적인 행위에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책망보다 오히려 복을 선포합니다. 심지어 그의 어머니는 미가를 위하여 에봇과 드라빔과 같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물을 서슴없이 만들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돈으로 매수해 레위인을 자신의 집에 고용하여 제사장으로 삼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완벽한 절도요, 사기행각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미가가 자칭 제사장을 세우고 한다는 말이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라고 스스로 안위했습니다. 이는 사사시대의 잘못된 신앙의 한 일면입니다. 신앙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독교 용어 가운데 ‘실천적 무신론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무신론자들은 교회도 나오고 하나님이 계심도 믿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삶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신앙을 가졌지만, 내가 믿는 방식이 정답인 줄 알고 사는 삶입니다. 이론적 무신론자들보다 더 해악을 끼치는 자들이 바로 실천적 무신론자들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힘 있는 교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힘센 사람의 말이 정도(正道)가 되고, 사람들의 생각이 진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신앙 모습은 세상과 친숙해 지고 세상과 가까워진 편리주의 신앙으로 흘러 기복주의 신앙이 되었습니다. 내 교회에 유익이 되는 것이 곧 법이 되어 편법과 반칙이 난무함으로 하나님을 잃어버린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없고, 십자가 없는 신앙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오늘날 미가의 신앙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 유일신 신앙이 아닌 짬뽕신앙입니다.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편리주의 신앙입니다. 의를 위한 고난의 신앙이 아닌 기복주의 신앙입니다. 잘못된 신앙에서 바른 신앙으로 말씀의 원칙과 신앙의 절대가치를 지킴으로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하나님의 종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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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브라더 앤드류 오픈도어 설립자 몇 년 전 한 여성 기자가 나에게 익숙하고도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질문을 했다. “당신이 24시간 후에 죽는다면, 이 세상 마지막 날을 어떻게 보내시겠습니까?” 그 질문을 받고 나는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매일 산다면, 언젠가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겠지!”라고 말한 친구 생각이 나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중요하고도 좋은 질문이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질문을 자신에게 정기적으로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겨우 하루라는 시간 속에 모든 중요한 일을 압착시켜 넣어야 한다면,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고 또 어떻게 재조정할 것인가?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어디를 갈 것이며, 귀한 마지막 시간을 누구와 함께 보낼 것인가? 더구나,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우리를 위해서 뿐 아니라 우리 없이 살아갈 사랑하는 사람들과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께 무엇을 해 달라고 할 것인가? 하나님께 어떤 일에 대한 뜻을 돌이켜 달라고 구할 것인가?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운 이 마지막 때에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를 결정하기 위하여 이러한 질문으로 시작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순간을 위해서 사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비전과 기도가 제한을 받을 것이다. 우선 순위를 어디에 둘 것인가?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우리없이 살아갈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구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은 지금이다”라는 격언에는 상당한 진리가 들어 있다. 성경이 말하듯이 “지금은 구원의 날”(고후6:2)이다. 그러나 기도가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초월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 기도할지라도, 그 파문은 계속 퍼져나갈 수 있다.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우리의 기도는 영원히 남아서 무덤을 넘어 미래의 삶과 사건을 변화시킬 수 있다. 알든지 모르든지 간에, 우리는 대부분 우리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기도의 덕을 본 사람들이다. 신실하게 중보기도를 했으나 응답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 그 기도의 직접적인 결과로 역사는 이 세상 전역에서 날마다 변화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히브리서에 기록된 믿음의 영웅들처럼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히 11:39)이다. 불가지론을 믿는 가정에서 자라난 한 친구가 자신의 그리스도인 할머니에 대하여 말한 적이 있다. 그는 할머니를 전혀 알지 못했다. 할머니는 그가 태어나기 몇 달 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복음도 듣지 못했고 그리스도인을 한 사람도 알지 못했는데, 학창시절 학교에 있는 성경을 읽다가 그리스도께 돌아오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나 그가 사역에 참여한 후 한 여성이 보낸 편지를 받았다. 그녀는 할머니가 죽기 전 수년 동안 할머니와 친분을 갖고 지내면서 함께 기도했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네가 태어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을 것을 알게 된 네 할머니는 너의 구원을 위해 함께 기도로 도와 달라고 하셨단다”라고 썼다. 할머니가 죽은 지 거의 15년 후 그 기도는 응답된 것이다. 그 이후로 그 기도의 파문은 계속되어 그 친구의 다른 가족들도 모두 주님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기도의 파문은 계속 퍼져나갈 수 있다. 우리의 기도는 영원히 남아서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다. (오픈도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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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P 독소조항 삭제 서명운동 전개국가기만 인권정책 비상대책위원회(이하 국인비)는 지난 7일 한국기독교연합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인권기본계획(NAP) 내 독소조항의 문제점과 한국교계의 대응방안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는 김지연 약사의 사회로 길원평 교수와 구자우 목사, 박요셉 목사가 발제자로 나섰다. 길원평 교수는 “국민을 속이고 동성애를 옹호하며 종교 자유를 침해하는 NAP는 우리 사회의 윤리·도덕을 파괴하는 데 활용될 게 뻔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자우 목사도 “각 교단들의 NAP와 동성애, 차별금지볍에 대한 보다 분명한 결의를 통해 한국교회가 이번 문제를 반드시 바로 잡아나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국인비 측은 이날 NAP 독소조항 반대 10대 실천계획을 발표하고 천만인 서명운동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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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부흥으로 민족의 동반자 되게 하소서”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제103회 총회가 지난 10일부터 이리신광교회(장덕순 목사 시무)에서 개회했다. ‘영적 부흥으로 민족의 동반자가 되게 하소서’를 주제로 개회된 총회는 서울동남노회를 제외한 전국 66개 노회 1,500여 명의 총대들이 참석해 시대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총회의 방향을 확인했다. 총회 개회예배에서 림형석 총회장(평촌교회, 사진)은“한국교회에 소망이 있다면 영적 부흥이 일어나는 것”이라며 “이 시대의 사명을 위해 낮은 자세로 섬기고 민족에게 다가가는 교회가 되자”고 강조했다. 이번 제103회기 총회는 명성교회 관련한 헌법 적용 여부를 두고 총회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교계 안팎으로 최대의 관심이 집중됐었다. 그런데 총회는 헌법 해석과 개정 여부, 규칙부 해석, 재판국 조직 등의 안건들에 대해 대다수의 총대들이 일관된 거부 의사를 표시했다. 림형석 총회장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무리없는 총회가 되도록 최선의 회의 진행을 이어갔다. 한편, 림형석 총회장은 취임사를 통해 한국 교회가 풀어야 할 과제로 작은 교회를 살리는 일, 민족의 동반자가 되는 일, 연합운동의 활성화 등을 제시했다. 그리고 “진정한 영적부흥은 기도와 회개를 통해서 이루어나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제103회기 총회 부총회장으로는 김태영 목사와 차주욱 장로가 각각 선출됐으며, 서기 김의식 목사, 부서기 조의환 목사, 회록서기 윤미태 목사, 부회록서기 최상민 목사, 회계 조중현 장로, 부회계 김미순 장로는 총회장 추천에 따라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인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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