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나의 출애굽기(5)나의 출애굽기(5) 드보라 14. 남편과 단란한 가정을 꾸리다. 지난날을 생각해보면 고난이 유익이라는 고백이 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온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북한에서의 일들도 그 당시에는 괴롭고 끔찍한 일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아픔 속에 절망한 나를 구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다. 지난 이야기에서 나누었던 것 같이 친부모와 가족들에게는 천덕꾸러기였던 나지만 남편과는 사이가 좋았고 큰 사랑을 받았다. 남편을 통해 채움 받으려고 했다. 아마 남편이 계속 함께 있었다면 나는 절대 탈북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편은 성품도 보통의 북한 사람처럼 우락부락하지 않고 속 깊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며 절대적으로 먹을 것이 부족했던 그 어려운 상황을 이겨냈다. 15. 시댁에 불어닥친 줄초상 그러던 어느 단옷날이었다. 명절이라고 친척들이 셋째 시형네 모였다. 우리 집은 막내였다. 사실 고난 행군의 기근이 시작된 이후 우리 시댁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첫째 시형네는 아이가 무엇을 잘못 먹었는지 정신이 이상해져서 고생하다가 죽었다. 슬퍼할 새 없이 시형도 배고픔에 풀을 뜯어 죽을 쑤어먹다가 배앓이를 해서 일주일 만에 못 일어나고 돌아가셨다. 가정이 풍비박산 났다. 가정의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첫째 시형께서 돌아가시고 2개월 후에 둘째 시형이 돌아가셨다. 농장에서 감자농사를 했었는데 너무 먹을 것이 없어서 감자 껍질 발라먹다가 결국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집안에 줄초상이 났다. 멀리 있던 우리를 포함한 다른 형제들은 깊은 촌에 살아서 제때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장례에 가보지도 못했다. 알았다면 없는 살림이지만 조금이라도 도왔을 텐데… 비통하고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집안에 어려운 일이 있다 보니 일단 남은 형제들이 단옷날을 맞아서 모이긴 했지만, 흥이 날 리가 없었다. 그렇게 우울한 분위기 속에 원체 술을 좋아하는 집안이라 그래도 없는 살림에 명절이라고 어디서 술을 구해왔다. 남은 세 형제가 술을 마셨는데 남편을 제외한 나머지 두 분 시형은 술버릇이 고약했다. 넷째 시형은 술만 먹으면 동네 사람을 패고 다니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고 다섯째 시형은 밖으로 돌아다니지는 않았지만 대신 아내를 팼다. 고약한 술버릇 때문에 문제가 많았다. 이번에도 오랜만에 가족끼리 술자리가 만들어진 데다 집안에 안 좋은 일이 많았던지라 금세 술잔이 비워지고 다들 얼큰하게 취하셨다. 그런데 그때 고약한 버릇대로 넷째 시형이 또 동네 거리로 박차고 나갔다. 우리 남편은 형님이 또 누구와 싸우는 건 아닌가 싶어서 급하게 따라나섰다. 그러고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
영주사과축제, 부석사 입구에서 ‘27일 개막’▲장욱현 영주시장이 사과를 나눠주고 있다. 전국 최대의 사과 주산지 영주에서는 가을을 맞아 10월 27일부터 11월 3일까지 8일간 ‘2018 영주사과축제’를 개최한다. 이번 행사는 ‘세계유산 부석사와 함께하는 영주사과축제’를 주제로 전국적으로 이름난 단풍명소인 부석사 일원에서 열려 더욱 큰 의미와 아름다움을 전달할 예정이다. 영주사과축제는 부석사의 은행나무가 가장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시기에 맞추어 개최되어 영주 지역의 대표 관광지인 부석사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것은 물론, 영주사과의 맛과 우수성을 알리고 있다. 부석사 은행나무로 시각을, 행사장 곳곳에 진열된 사과로 미각을, 축제 기간 내내 개최되는 음악회를 통해 청각을 즐겁게 하는 등 관광객들에게 1석 3조의 즐거움을 선사한다는 계획이다. 특히 ‘2018 가을여행주간 특별프로그램’과 연계해 부석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축하하는 의미 있는 프로그램도 마련된다. 10월 27일(토)과 11월 3일(토)에는 처음으로 부석사를 야간 개방하는 ‘그리운 부석사 달빛걷기’ 행사를 개최한다. 참가자들은 부석사의 아름다운 석양을 감상하는 것은 물론 부석사 연등 투어, 범종 타종식,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듣는 힐링 명상 미니강좌와 부석사 풍경 만들기 등 체험 행사에 참여할 수 있다. 축제의 흥을 더할 공연행사도 열린다. 10월 27일 국악인 송소희를 비롯해 팝페라 배은희, 강선율 KB 콰르텟의 현악 4중주, 지역 문화예술 공연 인들이 참여하는 ‘소확행 힐링 DAY 음악회’가 개최되어 깊어가는 가을 정취와 아름다운 선율을 관광객에게 제공할 계획이다. 또 축제 기간에는 방문하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영주사과 나눠주기 행사를 시행해 부석사를 거닐며 영주사과를 맛보는 기회를 제공해 관광객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유니세프 아동친화도시에 걸맞게 가을 여행철을 맞아 온 가족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사과 따기 체험, 사과 그림 그리기 대회 출품작 전시 등 도시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다양한 참여형 프로그램이 진행되어 축제를 한층 풍성하게 만들 예정이다. 한편 영주시는 전국 13% 이상을 차지하는 전국 최대의 사과 주산지로 소백산 지형 해발 300m 이상의 고랭지를 중심으로 3천여 농가에서 연간 6만여 톤을 생산하고 있다. 영주사과는 착색과 품질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일조량이 전국 사과 주생산지 평균인 240시간에 비해 272시간으로 월등히 높아 색상이 선명하고 식감과 당도가 우수해 전국의 소비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 문의 : (재) 영주문화관광재단 http://www.yctf.or.kr/ ▲2018 영주사과축제 현장의 사과홍보 부스
-
예천군, 11월 말까지 “가을철 농촌일손돕기” 적극 나서예천군은 본격적인 수확기 영농철을 맞아 공무원, 군인, 학생, 기관단체, 민간단체 등 1,000여 명의 인원을 투입해 11월 30일까지 “가을철 농촌일손돕기”에 나선다. 군은 11월 말까지 읍·면 행정복지센터, 지역농협, 농업인상담소에 “일손돕기 지원 창구”를 운영해 재해농가, 고령자와 부녀자 농가 등 일손 부족으로 적기 수확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농가를 선별 지원할 방침이다. 올해 가을 첫 일손 돕기 지원으로 지난 10월 22일 농협중앙회 대구지역본부 및 대구 고향주부모임 회원 80여 명이 사과수확 돕기를 하였으며, 앞으로도 군은 관내 기관단체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사과, 무, 콩 등의 수확에 본격적인 일손을 지원할 계획이다. 특히, 일손돕기 참여자들에게 작업도구와 도시락 등을 자체로 준비하게 하여 농가의 부담을 없애고, 전문기술이 필요한 작업에 대해서는 전문가의 사전교육으로 농가에 피해가 되지 않는 실질적인 도움을 주게 했다. 예천군 관계자는 “본격적인 수확 철을 맞아 부족한 농촌 일손의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도록 기관단체, 민간단체, 군부대, 군 산하기관 등의 적극적인 참여”를 당부했다.
-
포항 기쁨의교회, “초막절 페스티벌” 개최▲ 초막절 페스티벌 포스터 포항 기쁨의교회(담임목사 박진석)는 오는 10월 22일(월)~27일(토)까지 전 교인이 참여하는 ‘팡팡(pangpang) 초막절 페스티벌’을 하영인관, 복지관, 야외광장에서 개최할 예정이다. 이 기간에는 ‘새벽 집회’(매일 새벽 4시 50분) 외에도 ‘성막 체험&교육 초막절 재현 부스’(월~수 10:00~16:30), ‘곽은득 목사의 시골 전시회’(목~토 11:00~17:00), ‘이웃 초청 프리마켓’(목~금), ‘어린이 경제 캠프’(토 10:00~15:00), ‘부모와 함께하는 유대인 가족 식탁’(금 18:00~19:30)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또한, 저녁 집회가 월~금까지 매일 열리며 최영환 대표, 황은혜 목사, 이호 목사, 김종철 감독, 이성준 소장이 집회를 인도한다. 그 외에도 ‘초막절 가족 캠프’(월~수)와 ‘이스라엘 모임’(목), ‘야시장&음악공연’(금)이 저녁 9시부터 펼쳐진다. 특히, 구약 성경에 나오는 실제 크기의 성막이 하영인관 만남의 장소 야외광장에 설치돼 성막을 체험할 수 있으며, ‘부모와 함께하는 유대인 가족 식탁’을 통해서는 유대인의 신앙이 어떻게 역사교육으로 이어지는지를 배우고 크리스천 가정에서 실천할 식탁을 실제로 체험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
순교지를 찾아서(5)-문준경 전도사▲문준경 전도사(1891~1950)는 생전에 복음 전도자의 삶을 살다가 공산군들의 총칼에 순교당했다.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 ▷문준경 전도사 순교 이야기 문준경 전도사는 1891년 전남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에서 태어났다. 17세에 결혼했지만 남편이 제대로 돌보지 않아 20여 년을 시부모와 함께 살았다. 이후 목포에서 어렵게 살다가 전도를 받아 북교동성결교회에 나가게 된다. 그리고 이성봉 목사의 영향으로 열성적인 전도자의 삶을 살게 된다. 문 전도사는 나이 40세에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해 공부했으며, 학생 시절부터 신안군 섬 전 지역을 순회하며 중동리교회를 중심으로 진리교회와 대초리교회 등 여러 교회를 설립했다. 그녀는 지역을 순회하는 도중 주민들의 부탁으로 우체부의 역할도 했고, 여러 섬을 왕래하느라 1년에 아홉 켤레나 고무신을 바꾸어 신었다고 한다. 1943년 일본강점기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모진 옥고를 겪었다. 그리고 1950년 10월 4일, 당시 신안군을 장악하고 있던 좌익 세력들은 국군이 증도에 들어온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교인들을 처형하기 시작했다. 10월 5일 새벽, 문 전도사를 비롯한 많은 주민들도 중동리교회 앞바다에서 총살당했다. 공산당원들은 문 전도사를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라며 몽둥이로 내리쳤고, 문 전도사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총탄에 쓰러졌다. 문 전도사는 생전에 증도에 11개의 교회를 세웠고, 그녀의 직간접적인 영향으로 신안군에는 100개가 넘는 교회들이 세워졌다. 현재 증도는 복음화율 90%가 넘는 천사의 섬으로 변화되었다.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 2013년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기념관이 신안군 증도면에서 개관하였고, 중동리교회에는 문준경 전도사의 추모비가 있다.
-
나의 출애굽기(4)나의 출애굽기(4) 드보라 11. 대학생 시절, 남편과의 첫 만남 대학 생활 중에 가장 중요했던 일이라고 한다면 남편을 만난 것이었다. 그 당시 우리 집은 꽤 살림살이가 괜찮았다. 집에서 술도 만들어 이웃에게 팔기도 했다. 옆집 아줌마는 우리 집에 술 받으러 자주 오셨었는데 오실 때마다 나에게 자기 시동생을 소개해주고 싶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나는 그리 귀담아듣지 않고 웃어넘기곤 했다. 그런데 하루는 아주머니가 억지로 심부름 거리를 만들어서 나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셨다. 가보니 이웃집의 가족들이 모여 있는데 그 중 눈에 띄는 청년이 한 명 있었다. 까까머리의 훤칠한 청년이었다. 아주머니는 그 청년과 가족들에게 나를 소개하셨다. 심부름을 마치고 집에 가려는데 그 청년이 문을 열고 나와서는 씩씩하게 인사를 했다. 아주 우렁찬 목소리였다. 알고 보니 아직 군 복무 중인데 휴가를 나왔다고 했다. 그 당시 연예와 결혼 문화 풍토에서 자유연애는 매우 생소한 것이었고 이렇게 이성을 직접 소개받는 일은 처음이었기에 나는 이런 분위기가 너무 어색했지만 씩씩한 청년의 모습이 싫지만은 않았다. 나중에 첫 만남 때 어땠냐고 물어봤더니 첫인상이 매우 여자답다 생각했다고 한다. 그 청년은 아직 군 복무가 남았기에 부대로 복귀했지만, 곧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이성으로부터 편지를 받는 기분은 참 묘했다. 청년은 자기가 몇 년 만 지나면 제대니까 꼭 기다려 달라 했다. 그 당시 갓 20대가 된 내 가슴은 괜스레 콩닥콩닥거렸다. 12. 나의 결혼을 반대하신 아버지 그렇게 편지를 주고받는 와중에 시간은 흐르고 나는 대학을 졸업하였다. 졸업하고 유치원에 배치를 받아야 하는데 하필 빈자리가 없어서 동네 농장 유치원으로 배치를 받았다. 그렇게 시골 농장 유치원에서 교사로 있는데 갑자기 그 남자한테 연락이 왔다. 예정보다 빨리 제대가 됐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를 소개해 줬던 그 남자의 형수가 이제 대학도 졸업하고 다른 집에서 며느릿감으로 눈독 들일 텐데 돈을 쓰더라도 빨리 제대를 하라 해서 우여곡절 끝에 제대한 것이다. 그 당시 결혼은 남녀 간의 일대일의 연애사라기보다는 가족과 부모 사이의 일이었다. 아버지는 우리의 연애사실을 모르고 계시다가 나중에 아셨다. 평소에 그 남자를 씩씩하고 바른 청년이라고 좋아는 하셨지만 공교롭게도 그 집은 대대로 남자들이 술을 너무 좋아하는 집이었다. 당장 그 남자의 형도 거의 알코올 중독 수준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는 옆집 사람에 대한 신뢰가 없으셨고, 그 청년도 사위로는 생각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내가 아버지께 말씀드리기도 전에 아버지는 우리가 연예하는 것을 알게 되셨다. 주고받았던 편지가 들킨 것이다.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셨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 집사람들에 대한 믿음이 없으셨던 것도 있지만, 언니보다 내가 먼저 결혼하려고 하는 것을 아버지는 매우 못마땅해 하셨다. 그 당시 언니는 대학을 못 간 대신 5과 대상이라고 해서 국가에서 뽑혀갔다. 5과는 소위 말하는 얼굴이 반반한 여자들을 국가에서 뽑아서 위문이나 서비스업에 배치하는 것이다. 언니는 그렇게 평양으로 불려가서는 한동안 소식이 없었다가 나중에 지방에 어느 군부대 인근으로 발령받았다고 알려왔다. 여하튼 언니가 5과에서 제대되기 전에 동생이 먼저 결혼하게 생겼으니 아버지의 평소 가치관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13. 어려움을 딛고 결혼에 성공하다. 이런 상황인데도 그 청년이 옆집에 살다 보니 아버지는 청년 얼굴을 안 볼 수가 없으셨다. 그리고 만날 때마다 씩씩하고 우렁차게 인사를 하는 그이에게 아버지는 이전 같으면 하지 못할 욕을 막하시기 시작했다. 그래도 꿋꿋이 웃으며 인사하던 그이도 참 굳센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이는 결혼하기 위해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헤어지라는 우리 아버지의 말에 그이는 헤어지느니 차라리 양잿물을 먹고 죽겠다 하며 아버지 보는 앞에서 난리를 쳤다. 평소에 씩씩하고 바른 모습만 보였던 청년이 저렇게 고집을 부리니 아버지는 처음에는 너무 황당해 하셨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했던가… 이렇게 평행선을 달리던 상황은 결국 아버지의 허락으로 마무리되었다. 죽더라도 결혼해야겠다던 그이의 고집이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다. 결국은 나는 언니보다 먼저 결혼을 했다. (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
나의 출애굽기(3)나의 출애굽기(3) 드보라 8. 딸이 대학 가는 것을 반대하신 아버지 그렇지만 아버지의 태도는 모순적인 면이 있었다. 그렇게 여자가 공부하는 것을 반대하시면서도 언니는 대학을 보내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언니는 공부를 그리 잘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언니에게 경제나 회계 관련 공부를 하면 좋겠다 생각하셨다. 그래서 언니를 경제 관련 대학에 보내기 위해 억지로 학교 교장선생님 등하고 뒷문으로 사업을 해서 뇌물도 건네주었다. 당시 러시아 빵이 귀했는데 그 빵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그렇게 겨우 대학 입학권을 하나 따내고 언니는 대학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그러나 공부가 부족한 가운데 무리해서 시험을 봤던 언니는 결국 시험을 망치고 말았고 입학도 하지 못했다. 이 일을 겪고 나자 아버지는 분이 나셔서 ‘에잇, 여자는 공부시키는 게 아니야’하고는 나를 공부시키려고 하지 않으셨다. 결국 내가 대학 갈 때가 되자 집에서 논란이 있었다. 부모들은 항상 나를 제외하고 남동생과 언니 위주로 챙긴다는 생각에 나는 더 반항적으로 행동했고, 부모님은 나를 대학 보낼 생각도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갈등은 더 깊어졌다. 9. 유치원 교사를 꿈꾸다 … 교원대학에 지원 그래도 대학은 꼭 가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유치원 교사가 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에서 대학 지망을 쓸 때도 1-3순위 모두 교원대학을 썼다. 사실 점수를 생각하면 1순위에는 더 좋은 학교를 써야 했다. 보통 평양이나 수도권 대학은 1순위, 지방 주요 도시의 저명한 대학은 2순위였고 내가 가려고 했던 지방 교원 대학은 3순위 정도였다. 그러니 선생님께서도 1-3순위를 왜 다 같은 곳을 썼나며 의아해하셨다. 그렇지만 나는 이상하게 어린이 교사가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학교를 지원하고 교원 대학 시험을 보았다. 약 1주일 동안 면접을 포함해서 시험을 보았다. 이때 또다시 나는 부모님께 섭섭함을 느꼈다. 언니 때는 아버지께서 손수 여관방을 잡아서 1주일 동안 함께 지내며 언니를 챙겨주시더니 내가 시험 볼 때는 출장 가신다고 그냥 버려두셨기 때문이다. 출장 때문에 못 오신 것이긴 했지만, 그것이 아니어도 오시지 않으셨을 것이 확실했다. 특히 대학 면접에는 부모도 함께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나는 혼자 면접관 앞에 못 오신 부모님 사정을 거짓말로 만들어서 설명하기 급급했다. 화가 났다. 그렇게 시험을 보고 왔더니 아버지는 출장 갔다가 돌아오셔서 교원 대학 시험을 봤다고 나에게 화를 내셨다. 여자 대학생들이 다 그렇지만 그중에 선생이 제일 입이 여물고 고집스럽다고 하시면서 나를 나무라시고는 평소 입버릇처럼 “대학을 졸업해도 팔자 안 풀린다. 시집을 잘 가야 된다.”고 말씀하셨다. 나중에 들어보니 아버지께서는 출장을 다니시면서 해안지역에 처자들이 염전에서 소금 밀차를 끌면서 고생하시는 것을 보셨는데 그 여자들이 다 대학 졸업한 여자였다고 한다. 그런 광경을 보고 아버지는 ‘여자가 공부보다 결혼을 잘해야 하는데, 괜히 많이 배워서 입이 모질면 좋은 혼사 자리를 얻을 수 있겠는가’하는 생각이셨던 것 같다. 10. 가난한 대학생 시절 어쨌든 나는 대학 합격했다. 교원 대학에서도 소학교 교사가 아닌 유치원 교사 공부를 했다. 학업 기간 2년에 훈련 6개월 해서 총 2년 6개월의 대학생활이었다. 북한은 대학 등록금은 없었다. 그대신 학교 기숙사 밥이 형편없어서 늘 배고팠다. 나는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같이 지내는 친구들 중 농사짓는 시골이 고향인 친구들은 주말에 집에 갔다 오면 군것질거리로 옥수수나 콩 볶은 것을 한 움큼씩 가져오곤 했다. 그러면 그것을 숙소에서 나눠 먹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무리에 끼지 못했다. 집에서 챙겨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집에 갔다 올 때마다 나는 그 조그마한 간식거리를 가져가지 못해서 그냥 울면서 왔다. 염치가 없어서 애들이 간식 나눠 먹을 때 공부만 했다. 그러다 보니 친구도 많이 못 만들었다. 이렇게 1년을 지내니 나중에는 그래도 자식이라고 어머니께서 조금씩 간식과 용돈을 챙겨주셨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내가 대학 공부 하는 것을 싫어하셨다. (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
나눔지역아동센터 정정숙 생활복지사 구미시장 표창장 받다!▲구미시장상을 수상한 정정숙 생활복지사.(나눔지역아동센터)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봉사와 섬김으로 이웃을 돌보는 삶을 실천해온 정정숙 생활복지사의 헌신이 화제다. 정정숙 생활복지사(구미남부교회 권사)는 지난 2003년부터 구미남부교회에서 운영한 ‘나눔공동체사회복지협회’ 사무국장을 맡아 맞벌이 가정 영유아 돌봄, 미용봉사, 목욕봉사, 의료봉사 활동 등을 통해 이웃을 돌보는 일을 시작했다. 이후 2006년부터 현재까지는 나눔지역아동센터(구미남부교회 부설) 생활복지사로 재직하면서 지역의 소외계층아동돌봄서비스를 통해 아동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데 힘쓰고 있다. 정정숙 생활복지사는 구체적으로 매년 아동농촌체험 프로그램, 민속놀이 프로그램, 하계캠프 프로그램, 아동 학습지도 및 예절 교육, 학부모 및 연고자 교육 등을 진행하며 아동들이 정서적·문화적으로 보다 안정적인 환경에서 성장하도록 지원해왔다. 구미시에서는 지난달 19일 ‘제19회 사회복지의 날 기념식’에서 정정숙 생활복지사와 같은 사회복지 증진 유공자 20명을 발굴·선정해 시장상, 국회의원상, 시의장상 등을 표창함으로 그 공적을 치하하고 격려했다. 구미남부교회 최성수 목사는 “교회 설립 초기부터 지역사회 돌봄 사역을 시작했는데, 그동안 묵묵히 봉사와 헌신을 다 한 정정숙 권사와 같은 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마치 내 일인 양 기쁘고 자랑스럽다”고 축하의 마음을 전했다. ▲장세용 구미시장과 수상자들.(뒷줄 오른쪽 세번째가 정정숙 생활복지사)
-
단순한 거짓말?신훈식 교장 상주동부초등학교 얼마 전의 일이다. 한 선생님께서 수업을 마치고 1층의 교무실로 가기 위해서 계단을 내려가던 중, 아이들 역시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 가서 조금이라도 더 놀기 위하여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선생님은 “얘들아~! 넘어지면 다친다. 천천히 내려와!”를 연신 반복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선생님의 말씀을 들은 채 만 채하고는 계속 뛰어 내려왔다. 그중 한 학생은 친구들의 몸통을 손으로 다다다 치면서 내려오다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다행히도 1층 가까이 내려와서 넘어졌기에 크게 다치지는 않았고 멍이 들 정도의 타박상만 입었다. 문제는 이튿날 발생하였다. 아이의 멍든 모습을 본 부모가 학교에 찾아와서 강력하게 항의를 하며 난리를 치는 것이었다. “어떻게 선생님이 아이의 발을 그것도 계단에서 걸 수 있냐?”고 하면서…. 집에서 아이의 멍든 모습을 본 부모님이 아이에게 다그치자 그만 조심성 없이 다녔다고 혼날까 봐서 선생님이 계단에서 발을 걸어 넘어졌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물론 증인인 다른 아이들과의 삼자대면으로 거짓말이었음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들리는 말로는 학교가 아이들과 짜고서는 자기 아이에게 덮어씌웠다는 것이다. 사과하는 것도 부족할 판인데 뻔뻔한 정도가 도를 넘는다. 더더욱 슬픈 사실은 학부모에게 멱살 안 잡히고 머리채 안 잡힌 것만도 그나마 다행이라고 자조(自嘲)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학부모교육을 할 때면 강조하는 내용이 있다. 자녀의 이야기를 100%로는 믿지 말라는 것이다. 100% 믿게 되면 큰 실수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녀의 거짓말하는 습관을 바로 잡지 못한다는 것이다. 위의 부모 역시 자기 자녀의 말만 믿고서 여러 사람을 힘들게 했음은 물론이고 이 사실을 아는 모든 이에게 일방적인 것이겠지만 부끄러움을 당했을 것이다. 집에 가서 학교 선생님에게 혼이 났다고 이야기를 하면 부모님에게 다시 혼났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격세지감(隔世之感) 밖에는 없다. 이 아이가 자라서 얼마나 무서운 인물로 성장할지가 걱정되고 두려울 뿐이다.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크든 작든 한 번쯤은 거짓말을 해보았을 것이다. 거짓말을 할 때는 나 이외는 절대 진실을 알지 못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을 알고 있는 이는 나만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당사자인 상대방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거짓을 말하므로 죽었으나 다윗은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悔改)를 하였기에 비록 벌은 받았지만 죽음은 면할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 “다방과 카페의 차이를 아시나요?”라고 물으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답을 하는 이는 거의 없다. 다방은 안에서도 밖에서도 서로를 볼 수 없게끔 차단되어 있음에 반하여 카페는 서로를 볼 수 있다. 내 안의 내면도 타인이 볼 수 있게끔 개방한다면 거짓이 없는 나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숨기면 숨길수록 거짓을 만들게 될 것이며 이는 죄이다. 익명으로 말을 할 때 많은 사람은 무례하게 얘기를 한다. 하지만 실명으로 말을 하게 하면 점잖아진다. 나 이외에는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한다고 확신할 때에 숨기고 거짓을 말하게 된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고 언제든지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죄를 짓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자기의 욕심을 위해서라면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거짓말의 대가로 받는 징계가 너무 가볍기 때문이다. 학교는 물론이고 가정에서부터 교육이 무너진 것도 현실이다. 아이들을 금쪽같게만 생각하지 초달을 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가벼운 징계만으로도 반듯하게 키울 수 있는 자녀와 학생을 그냥 내버려 둠으로써 구불구불하게 자라도록 둔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아니 포크레인으로도 못 막는다. 그 결과는 우리 사회가 막대한 비용과 에너지를 낭비하게 되는 다시 안아야 할 재앙이다. 세계에서 사기범죄가 가장 많은 나라가 되었고 지금도 뉴스를 틀면 거짓말 때문에 온 나라가 시끄럽다. 거짓말의 근원은 욕심이고 거짓말을 가볍게 생각하는 이 나라는 결국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가 될 것이 틀림없다.
-
안동이 배출한 첫 해외선교사, 이대영 목사(1)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이 대 영 목사 (李大榮, 1887~1968) 1887년 경상북도 예천군에서 출생한 이대영 목사는 시대를 앞서간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 믿기 힘든 유학이 강한 마을과 가정에서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도 혹독했다. 그는 더 이상 고향 땅에서 살지 못하고 객지로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일정한 훈련을 거친 후 하나님께서는 그를 고향으로 보내셨고, 뛰어난 복음전파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그 후 전도인, 조사로 활동하면서 평양신학교의 신학교육을 마치고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시무하며 기독청년면려회와 주일학교를 통해 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갈 뿐 아니라 지역복음화와 교회 부흥을 선도했다. 이후 총회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안동을 떠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파송 선교사로 1922년 6월 13일 중국 래양에 도착한 이대영은 그 땅에 머무는 동안 중국인들과 함께 중국인처럼 살았다. 1949년 중국의 공산화로 인해 선교를 포기하고 1955년에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이대영 목사는 33년 동안 중국인을 동족으로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함으로서 산동반도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수 있게 하였다. 그후 그는 오직 하나님 나라, 교회와 총회를 위해 헌신하다가 1968년 하나님이 부르심을 받은 믿음의 선배이다. 1. 이대영, 금당실 마을에서 출생하다 백사(白沙) 이항복의 후손인 이대영은 1887년 4월 23일,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에서 이유성(李裕成)과 김도혜(金道徯)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이대영이 출생한 마을은 금당실로 불러졌는데 선교사가 동네에 와서 복음을 전하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했다. 이대영은 괴당교회가 설립될 당시인 1907년 경, 복음을 소개받고 믿음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부모의 반대로 고향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가족과 함께 1910년 영일군 흥해면으로 이사했다. 그는 흥해교회에 출석하면서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특히 이곳에서 선교사로부터 신앙훈련과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전통적인 양반가문의 후예로서 비록 예수 믿는다고 집에서 버림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품으셨고, 훗날 중국 땅에서 복음전파의 귀한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이다. ▲이대영 목사의 가족사진 2. 이대영, 부해리 선교사를 만나다 안동을 포한한 경북북부지역에 복음이 처음으로 전해진 것은 1893년 배위량 선교사에 의해서이다. 이후 1902년 3월에 안의와 선교사가, 1903년 봄에 방위렴 선교사와 부해리 선교사가 안동을 직접 방문해 복음을 전했다. 특히, 부해리 선교사는 1899년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미국 북장로교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파송 받아 1899년 10월 26일 대구에 도착, 초창기 대구·경북 지역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941년 일제의 탄압으로 추방되기 까지 40여 년 동안 한국선교에 평생을 바쳤다. 부해리 선교사를 포함한 여러 선교사들의 헌신의 결과, 1903년 미국 북장로교 연회보고에 의하면 경북·대구 지역 7개 고을에서 12명의 교인이 생겨났고, 1905년에는 20개 고을에 8개 교회, 2명의 세례교인, 19명의 학습교인, 79명의 원입교인이 생겨났다. 이러한 영적 분위기 가운데서 이대영의 회심에 관한 이야기는 두 가지 설로 나뉘어진다. 우선 박용규는, 1907년 경 이대영이 나만기에 의해 복음을 소개받고 예수를 믿게 된 것으로 추측한다. 이미 예천에 존재했던 그리스도인 나만기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고 복음을 들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러 자료들은 이대영이 부해리 선교사에 의해 예수를 믿게 되었음을 증거한다. 이대영은 한국교회의 최초의 대부흥이 일어난 1907년 당시 대구선교부 소속 선교사로 있던 부해리 선교사에 의해 복음을 전달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구·경북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부해리 선교사와의 역사적 만남으로 이대영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됐으며, 이후 전도인, 조사를 거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 임직한 이후 한국교회와 중국선교의 거룩하고 위대한 한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3. 이대영, 경북 북부지역 전도인·조사가 되다 복음을 접한 뒤 집안 어른들의 반대로 흥해로 이사한 이대영은 흥해교회에 출석하면서 본격적인 전도인 훈련을 받게 되었다. 특히 대구선교부의 중심교회인 남성정교회(대구제일교회의 전신)에서 열렸던 겨울남자성경반에서 수 년 동안 수학할 기회를 가짐으로써 목회자로서의 전문적인 소양을 쌓을 수 있었다. 선교사의 지도와 신학훈련을 받은 이대영은 전도인으로 본격적인 전도사역을 하게 되었다. 흥해교회에 출석하면서 훈련받은 6년 여 동안 이대영은 이미 전도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고, 경북노회는 그를 유급 전도인으로 인정하고 복음전도사역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그는 고향인 금당실에서 전도인으로 활동하기 이전에 예천 신전교회를 왕래하며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오게 됨으로써 신전교회가 부흥했다. 신학 기초과정을 거친 이대영은 목사로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는 당시 규정에 따라 목회자 수업을 위한 문답절차를 거쳐야 했다. 그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경북노회에서 목사후보생고시를 치러야 했으며, 1916년 6월 대구남성정교회에서 개회된 제1회 경북노회에서 평양신학교 입학을 허락받았다. 신학 입학을 허락받은 후 처음으로 이대영이 섬긴 교회는 경주군 외동면 말방리의 장산(長山)교회다. 이 때 이대영은 전도인에서 조사신분으로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4. 이대영,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 임직하다 이대영은 1917년 5년 과정의 평양신학교에 30세에 입학하여 목사를 위한 수학을 시작했다. 결혼한 지 10년이 지나 10살 난 아들 이 있었는데, 평양에서 공부하는 기간 동안 가족들은 섬기는 교회에 머물러 있었으며 이대영은 혼자 기숙사에서 동료들과 함께 생활했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후 이대영은 신학공부의 적응을 위해 섬기던 장산교회를 1917년 사임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918년 다시 부임하여 장산교회를 섬겼다. 평양신학교 졸업반인 1920년 이대영은 이만집 목사가 담임으로 있던 대구 남성정교회 조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이만집 목사는 3·1 만세운동으로 투옥된 상태로 있었기 때문에 조사로 청빙을 받은 이대영은 실질적으로 대구제일교회 전신(前身)인 남성정교회를 담임하게 된 것이다. 남성정교회는 대구·경북지역 최초의 교회로 이미 이 지역의 중심교회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는 동년 12월 2일, 17명의 동기생들과 함께 평양신학교 제14회로 졸업하고, 이듬해인 1921년 1월 12일 대구동산성경학원에서 개회된 제9회 경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 임직예식을 마친 이대영 목사는 안동지역의 중심교회인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청빙허락을 받아 부임했다. 이후 이대영 목사는 1921년 6월 15일 개회된 제10회 경북노회에 정식 노회원으로 참석하여 본격적인 노회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use'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8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skin'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9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use'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8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skin'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9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use'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8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skin'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