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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애국자·인간 박상동 목사(5‧끝)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박상동 목사 (朴尙東, 1894~1949) 4) 나고야 동부교회 사역 ① 전도사역 개척정신이 누구보다 강했던 박상동 목사는 1938년 5월 29일 나고야교회를 사임하고 나고야교회가 분립한 나고야 동부교회로 이임하였다. 동부교회에 부임한 박상동 목사는 끊이지 않는 전도의 열정을 가지고 나고야교회의 추인봉 목사와 서부교회의 김은석 목사와 함께 연합하여 나고야 지방의 전도에 진력하였다. 그 결과 나고야교회 70년사에 따르면 나고야 동부교회는 등록교인 75명, 주일아침예배 출석 65명, 저녁예배 출석 38명, 금요기도회 36명, 헌금총액은 2,908엔(円)의 교세를 보였다. 이처럼 나고야 동부교회가 순조롭게 부흥하고 있을 때 일본제국주의의 핍박의 손길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② 일제의 탄압과 투옥1940년 4월 실시된 종교단체법의 실시로 교회에 대한 탄압은 점점 심해져 갔다. 일제는 복음의 기수인 교포교회를 민족주의 온상지로 생각했기 때문에 탄압의 강도는 점점 심해졌다. 1941년 12월 일제는 나고야 지방 교포교회의 지도자 11명을 검속하였는데, 이때 박상동, 추인봉, 김은석 목사도 포함되었다가 1943년 1월 26일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박상동 목사는 석방되어 후협(厚狹)교회에 부임했지만 거기서도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명으로 체포되어 옥중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5) 해방 후 사역 ① 대구중학교 영어교사해방을 맞아 1945년 10월 귀국한 박상동 목사는 미군정시대 통역을 하다가 당시 신우식 목사가 교장으로 있던 대구중학교에서 영어교사 생활을 하였다. 교사생활을 하면서도 반야월 교회를 섬겼는데, 콜레라(호열자)가 발생하여 거주하고 있던 대구 시내 중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한다. 대구중학교로 출근하기 위해서는 거주하던 대구 칠성시장 바깥으로 나가야 했지만 갈 수 없어 결국 박상동 목사는 교사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이 없었다면 아마 박상동 목사는 전임목회를 위해 교회로 돌아오는 시간이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고국에서 목회자로서의 사명을 마지막 순간까지 감당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남산교회 70년사에 의하면 박 목사는 강직한 성품과 인자한 성품으로 목양한 것으로 기록한다. “강직한 성품과 사리판단에 분명하지만 인자하고 겸손한 면이 특히 박상동 목사의 특징이다. 박 목사께서는 부임 후 지키며 가꾸어 나갈 여러분의 일꾼을 선발하여 일을 맡겼으며, 그의 심금을 울리는 설교와 생활에서 오는 단정하고 기품 있는 인격에다가 전도활동에 대한 열의로 전도목사제도까지 도입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오늘날까지도 그의 삶과 인생과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두고두고 기억하면서 그리워하는 성도들이 있음을 생각할 때 비록 그의 목회 기간이 짧은 기간이고 그의 활동영역이 제한되었지만, 성도들에게 남긴 애국자 박상동, 목사 박상동, 인간 박상동의 봉사 정신은 지금까지도 남산 가족의 가슴과 가슴으로 뜨겁게 전달되는 것이다.” ② 남산교회 사역남산교회에 부임한 후에도 박상동 목사의 영혼 사랑은 계속되었다. 박상동 목사는 부임 후 중단 없는 전도의 열정을 가지고 전도목사제도를 도입하여 지역 복음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특히 1948년 3월 6일 전도목사로 부임한 이명석 목사가 대봉기도실을 시작하였고, 그해 9월 12일 분교식을 거행했다가 11월 14일 대봉교회로 완전히 분립되었다. 남산교회를 섬길 때 일본에서 선교사들이 와서 다시 일본에 가서 함께 동포교회를 섬기자고 요청했을 때 남산교회에서 위임받은 목사인데 돌아갈 수 없다고 거절함으로써 투철한 소명감을 보여주었다. 6) 박상동 목사의 별세 박상동 목사의 3녀(女)인 박은수 사모에 따르면 목회 말년 박상동 목사는 직장암으로 고생했다. 처음에는 병명(病名)이 무엇인지를 몰랐다고 한다. 당시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경북대병원 고병관 박사에 의해 직장암으로 밝혀졌고, 수술을 거부하던 박상동 목사를 설득하여 3월말 입원하였고 결국 수술을 받게 되었다. 첫 수술은 약 4시간 30분 걸렸고, 이때 경북대학교 학생들이 수혈했다고 한다. 상태가 좋지 않아 병원에서 다시 수술을 권유했다. 박 목사는 거부 의사를 밝혔지만 결국 2차 수술을 마치고 난 며칠 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직장암으로 밝혀졌을 때 교회를 사임할 의사를 표했지만, 교회는 만류했고, 참을 수 없는 통증 속에서도 말씀을 선포하는 주의 종의 사명에 충성을 다하며 매 주일 어김없이 강단을 지키다가 1949년 5월 4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결론 박상동 목사는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는 주의 충성스러운 종(從)이었다. 그는 고단한 영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치 않고 달려갔다. 그의 투철한 소명의식은 구령(救靈)의 열정이 식은 오늘의 목사들을 부끄럽게 한다. 박상동 목사는 암으로 투병하면서도 자신의 몸을 돌보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붙잡고 강단을 지킨 주의 종이었다. 그의 사명감은 순간순간 사명감을 잃고 일신(一身)의 안락을 추구하는 오늘의 목사들이 얼굴을 들지 못하게 한다. 박상동 목사는 일본에서 두 차례, 한국에서 두 차례의 목회를 통해 하나님의 의(義)를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사역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이런 그의 삶은 목사가 걸어가야 할 표상(表象)과도 같았다. 그는 목사가 어떻게 교회를 섬겨야 하고 성도들 위해 봉사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박상동 목사는 국가와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였다. 그래서 그는 한국에서 한 차례, 일본에서 두 차례 투옥되는 고초를 당했다. 그는 이러한 삶을 통해 목사가 어떻게 국가와 민족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박상동 목사는 비록 강직한 성품을 갖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자상하고 인자함을 소유한 아버지였다. 삶 속에서 보여준 아버지의 사랑과 애정을 9남매 자녀들은 가슴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 이것은 가정의 위기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오늘날 목사들의 가정에 치유의 메시지가 된다. 이런 박상동 목사님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다. 다만 필자의 능력 부족으로 박상동 목사님이 품고 있던 하나님 사랑과 민족 사랑에 관한 그의 생각과 그의 의도, 그리고 그의 비전을 다 그려내지 못함에 아쉬움이 남을 뿐이다. 후일 이 소고가 박상동 목사님의 일생을 보다 완전하게 조명(照明)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뿐이다. ▲박상동 목사는 해방 후 귀국하여 대구남산교회에서 남은 목회 열정을 쏟았다. 박 목사는 마지막 투병 몇개월 동안에도 매 주일 간단을 지키다가 1949년 5월 4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사진은 1930년 대구남산교회 전경.)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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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시민 ‘하늘 길’ 이용 편리해진다상주시와 인천국제공항을 운행하는 교통편이 2월 12일부터 하루 왕복 두 차례에서 네 차례로 늘어난다. 상주시는 지금까지 코리아와이드경북에서 하루 왕복 2회 운행하는 상주↔인천공항 노선버스를 코리아와이드진안에서 2월 12일부터 왕복 4회로 늘려 운행한다고 밝혔다. 출발 장소도 동대구터미널에서 북대구터미널로 변경됐다. 버스는 북대구 - 상주(경북대상주캠퍼스) - 인천공항을 연결하며, 도착 지점은 인천공항 T1(제1여객터미널), 인천공항 T2(제2여객터미널)가 된다. T1에서 T2까지는 20분 정도 소요된다. 첫차는 00시 40분 출발하고 이어 04시 10분, 09시00분, 막차는 12시50분 상주를 출발한다. 인천공항에서 출발하는 첫차는 T2의 경우 06시30분이다. 이어 10시20분, 15시10분, 19시00분이며, T1은 06시50분, 10시40분, 15시30분, 19시20분이다. 상주에서 인천공항까지 운행요금은 일반운임이 26,500원, 심야할증은 29,200원이다. 초등학생은 50% 감면되어 13,300원이며 소요시간은 T1(3시간10분), T2(3시간30분)이다. 버스표는 경북대상주캠퍼스 앞에 있는 승강장 매표소와 ‘버스타고’(www.bustago.or.kr)에서 구입할 수 있다. 이번에 인천국제공항 직통버스가 증설됨으로서 상주 시민들은 하늘 길을 좀 더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인근 문경, 예천, 의성군의 주민들도 많이 이용할 것으로 기대된다. 황천모 상주시장은 이번 인천국제공항 직통버스 증설로 인근 구미로 가거나 차를 전세해 가는 불편을 해결하고, ㈜캐프, 대평 등 지역 기업을 방문하는 외국의 바이어들이 편리하게 상주를 방문할 수 있게 돼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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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전한 음주 문화 형성을 위한 유관기관 합동상주시 보건소(소장 김용묵)는 지난 21일 경북대학교 상주캠퍼스에서 상주경찰서와 함께 “줄어드는 술잔, 여유 있는 아침 이라는 슬로건 아래 음주 폐해 예방 체험부스를 운영하고 홍보 캠페인을 했다. 이들은 알코올은 중독 물질이자 발암물질로 각종 질병과 암 발생의 원인이 된다는 점을 알렸다. 폭탄주를 즐겨 마시고 술잔을 돌리는 음주 습관은 과음, 폭음으로 이어지기 쉬우며 지나친 음주는 알코올성 간질환, 치매 등을 유발할 뿐 아니라 음주운전, 가정폭력 등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 시키고 있다는 사실도 홍보했다. 김용묵 보건소장은 “바람직한 음주문화 조성으로 자신의 건강을 지키고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갖자”며 “모두의 행복을 위해 음주폐해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실시 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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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자비량 목회자 김경환 목사목록 본문 국내 자비량 목회자 김경환 목사 취재·정리: 편집부장 최영열 장로 사도 바울처럼 선교사역을 자비량(장막업-Tent maker)으로 감당하는 해외 선교사들이 있기는 하지만 국내 목회에 있어 자비량으로 사역을 감당하는 목회자는 많지 않아 보인다. 목회라면 당연히 풀타임 사역이라는 인식이 자리매김한 탓인가? 뭔가 자연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이 땅엔 아직도 많은 수의 미(未)자립교회들이 존재하고 시골 벽지엔 고령화된 성도들로 구성된 어려운 농촌교회들이 지역마다 산재해 있다. 그 삶의 터전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농촌교회 성도들을 위해 묵묵히 사역을 감당해 가고 있는 목회자들의 삶 또한 각박한 처지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때, 어려운 농촌목회자의 삶을 도우면서, 시골 교회를 세워가는 자비량 목회자가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경북 예천군 용문면에 소재한 ‘용문하금교회’ 김경환 담임목사가 그 주인공이다. 김 목사는 괴산에서 목회하던 중 고향인 울릉도에서 함께 신앙생활 했던 곽일부 목사가 용문하금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인사차 방문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만남은 곽 목사와의 은퇴로 인해 이뤄지지 못했고, 다만 목자 없는 양떼와 허물어져 가는 예배당의 모습을 보면서 이곳을 찾은 김 목사의 마음은 아파왔다. 당시 교회는 사례금을 드릴 수 없는 형편이라 목사님을 모시지는 못하고, 다만 은퇴 시점에 갈 곳 없는 목회자가 와서 물질에 상관없이 사역해 주길 기대하는 정도였다. 김 목사가 기도 후 교인들과 다시 만나 교인들이 조건을 들어 준다면 사역을 하겠다고 말했다. 먼저, 맡아 오던 기업이 있기 때문에 사택은 필요 없다. 둘째, 사례비는 전혀 없어도 된다. 마지막으로 거처하는 숙소가 멀기에 새벽기도는 인도할 수 없다는 조건이었다. 성도들이 근근이 예배를 인도하며 지켜오던 시골교회, 목회자 모시기를 위해 기도하던 성도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하여 2014년 8월, 김경환 목사는 용문하금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됐다. 김 목사는 먼저 비가 새는 예배당 공사를 비용을 들여 마쳤다. 이어서 공사용 철근이 밖으로 튀어나와 있을 정도로 농사용 창고보다 못한 교회 식당을 리모델링해야겠다고 제안하자 대부분의 교인들이 반대했다. 비용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김 목사는 출향 교인들의 지원과 김 목사의 부담, 은혜 받은 이들의 헌신을 합하여 결국 공사를 마무리했다. 또 외부 지원을 받아 종탑을 깔끔하게 해결했고, 식당에 비용을 들여 화목보일러를 설치, 교인들이 훈훈한 겨울을 날 수 있게 도왔다. 고난주간에는 교인들을 상대로 세족식 행사를 열어 섬겼고, 추수감사주일이 되면 김 목사가 직접 생산한 꿀을 교인들에게 선물했다. 명절엔 일체 목사에게 선물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김 목사가 준비한 현금 봉투를 교인들에게 나눠줬다. 특별한 날이 되면, 성도들에겐 김 목사가 키우는 염소를 잡아서 대접하고, 마을 잔치에는 돼지를 잡아 대접했다. 이렇게 선한 사업을 계속하다 보니 이젠 주위의 돕는 손길도 생겨 훨씬 더 즐겁고 보람되게 섬길 수 있게 됐다. 현재, 교회에서 헌금 1등은 김 목사이다. 이렇게 많은 물질로 지역 사회와 교회를 섬기고 교인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은 바로 김 목사가 운영하고 있는 사업체가 있기 때문이다. 김 목사가 현재 경영하는 사업은 양봉과 염소 농장이다. 군 제대 후 울릉도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던 중 양봉을 처음으로 접했다. 몇 번의 어려움을 겪고 난 후 깨달은 것은 벌을 지으신 하나님 관점에서 벌을 키워보자는 확신이었다. 새로운 시도로 인해 당시 벌을 키우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듣기도 했지만 결국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방법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늘었고, 현재는 많은 이들이 그를 따라 양봉을 하고 있다. 김 목사는 현재 선진 양봉을 교육하는 농업기술센터 주최 전국 강의를 제일 많이 다니는 강사이다. 목회자로서 김 목사는 양봉 강의의 기회도 놓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삼고 있다. 강의 중간중간 하나님과 인간, 구원에 관해서 설명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교육생들에 증거 하고 있다. 3박4일 강의 시엔 반드시 하루는 예배당에서 강의해 기독교엔 친근감을 느끼도록 노력하고 있다. 김 목사가 양봉(국사골양봉농원)을 통해 올리는 수익은 연간 약 1억원 이상, 그 중 1억원 가량을 선교비로 사용하고 그 나머지를 생활비로 사용한다. 생산한 꿀은 미자립 교회가 판매해 자립할 수 있도록 목회자들에게 저렴하게 공급해 준다. 또 양봉교육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꿀 생산이 어려운 이들에겐 꿀을 나눠주고 다음 해 생산을 많이 하면 그때 갚으라고 공급해 주기도 한다.(진대법 개념, 회수율 10%에 불과) 현재 특히 김 목사가 역점을 두고 시작한 사업은 염소농장이다. 호주산 염소인 ‘보아’ 종을 70여두를 사육하고 있는데, 300마리를 목표로 하고, 우수한 형질의 보아 원종 염소를 구하고 있다. 숙소도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셨다. 김 목사가 숙소와 농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집(유천면 소재)은 과거 법당으로 사용되던 건물로 칡넝쿨이 집안으로 들어올 정도로 폐허가 된 상황이었다. 부동산 중개업자 조차도 일반인이 살 수 없는 곳이기에 목사님 정도 되는 사람이라야 살 수 있는 곳이라고 할 정도로 기가 센(?) 곳이었다. 그곳은 과거 전국의 무당들이 모여 큰 굿을 하던 집이었으며 집 둘레 곳곳이 촛불을 켜고 지성을 드리던 곳이었다. 따라서 그 누구도 범접(?)지 못한 탓에 김 목사는 시가의 1/4 가격으로 건물을 구입할 수 있었고 지금껏 잘 사용하고 있다. 김 목사가 이렇듯 나눠주는 목회를 하게 된 데에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다섯명의 자녀를 잃고 낙심한 아버지는 무당을 찾아가 안타까움을 호소하자 무당이 말하길 “나하고는 안 맞고, ‘오랑캐당’에 가라 ‘야수교당’” 해서 절박한 심정으로 교회를 찾았고 예수님을 만났다. 이후 5자녀를 더 낳고 건강하게 양육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신 아버지는 이후 평신도로서 교회를 개척(울릉도 중령교회)하신 것은 물론, 좋은 것은 모두 교회에 갖다 드리며 하나님을 섬기기를 시작해, 형제들과 함께 무척이나 어렵고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어린 시절 점심식사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을 정도) 공무원으로, 성공한 사업가로 성장한 김경환 청년은 하나님 말씀인 성경의 실생활 적용에 많은 괴리감을 느끼고 갈등하고 방황하던 중 하나님의 큰 은혜를 경험했다. 곧 하나님의 심정을 깨달은 것이다. 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에서, 성경을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기록하신 하나님 심정으로 바라봄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 은혜에 감사해 신학을 하려 했지만 고생길을 가려는 아들을 어머니가 막으셨다. 수년이 흐른 후 37의 늦은 나이인 1997년 거부할 수 없는 부르심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울릉도에서 육지로 나왔다. 사역을 시작하면서 김 목사는 물질과 관련된 굳은 결심을 하게 된다. ‘목회자가 되면 나눠줄 수 있을 정도의 준비가 될 때 사역을 시작하자. 자비량 목회자가 되자. 생계도 어려울 정도로 가난한 교인 가정에서 헌금하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수입원 없어 생계를 걱정할 정도로 살아가는 용문하금교회 노인 성도들과 이웃 주민들이 헌금이 부담스러워 교회 못 나오는 일이 없도록 김 목사는 헌금을 하지 말라고 독려(?)한다. 헌금 부담 때문에 교회 못 나오는 것보단 차라리 하나님 말씀을 한번이라도 더 듣게 하는 것이 목회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현재, 교회는 귀농 2가정과 교회 인근 주민들, 공무원 가정 등 20여명이 출석해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 김 목사 1년에 1번씩 북한 땅과 철책이 보이는 통일전망대를 찾아간다. 굶주리고 있는 북한 주민들을 마음껏 먹이고 싶은데 안타까워 혼자 울고 내려온다. 또 세계 곳곳의 미(未) 전도 종족을 찾아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지원해 주고 싶은 큰 소망이 있다. 그래서 해외로 나갈 기회가 있으면 1달러짜리를 많이 바꿔서 나간다. 비판도 하는 이들도 있지만 복음을 30분 듣는 아이들에게 1달러씩 나눠줬다. 김 목사는 신령한 영적 양식인 복음을 전할 수 있어 좋고, 또한 가난한 아이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어 너무 기쁘다고 했다. 그는 또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너무나 좋지만, 머릿속 이론으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며, 추상적이지 않고 현실적인 설교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말씀이 실생활에 이뤄질 때까지 무슨 일에든 중간에 평가하려 말고, 말씀을 보고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라고 강조했다. 그 말씀의 열매들을 분명히 거둬 본 체험들이 확실하기에 그의 설교는 힘이 있다. 그는 이후에 하나님 주신 복음을 인근에 소재한 안동대나 경북대 상주캠퍼스 대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열망을 갖고 있다.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야 할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자신이 받은 은혜를 더 많이 전해주고 싶은 열망 때문이리라. 그의 나이 50대 중반, 세월이 유수처럼 빠르다는 것을 느끼기에 더욱 시간의 소중함을 생각하고 믿음으로 달려가길 열망하는 김 목사의 꿈이 주님 안에서 조속히 이뤄지길 두 손 모아 기도해 본다. 김 목사의 가족으로는 강은숙 사모와 2남인 정혁(대전침례신학대학원 재학), 창혁(대학 2년)이 있다. 국사골양봉농원(대표 김경환 목사 010-3795-2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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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상주 전통명주 국제패션페스티벌 개최10월 11일 상주문화회관 대공연장에서 한국 전통의 멋이 어우러진 명주를 소재로 한『2018 제12회 상주 전통명주 국제패션페스티벌』이 중국, 일본, 러시아 등에서 참여하는 국제 행사로 개최되어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상주시가 주최하고 경북대학교 산업디자인연구소가 주관한 이번 페스티벌은 천연염색 스카프 전시회, 전통한복 및 생활한복 패션쇼, 패션디자인 경진대회로 구성되었다. 전통한복 및 생활한복 패션쇼로 진행된 1부에서 전통한복 부분은 경상북도 한복 최고 장인이자 진선미한복 대표인 이봉이씨의 작품 20점을 선보여 전통한복의 우아한 선과 멋을 과시하였으며, 생활한복 부분은 함창명주 명품화 교육 강사이자 상주명주 연구원인 백현주씨의 현대적 감각이 어우러진 작품 21점이 선보였다. 2부 패션디자인 경진대회에서는 경북대학교를 비롯한 국내외 대학생 및 일반인이 출품한 작품 중 1차 심사를 거쳐 94점을 선정하였고, 1차 일러스트 심사 통과자의 무대심사를 통해 상주 전통명주에 스토리를 담아 명주를 재해석하고 명주의 포근함과 부드러움을 표현한 의상으로 패션쇼 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이번 행사를 통해 상주 전통명주를 소재로 한 한복과 의상, 스카프 등의 상품들이 현대인의 감각에 맞게 많이 개발되고 생산․보급되면서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서의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명주를 소재로 한 아름답고 실용적인 작품들이 많이 출품되어 상주 명주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황천모 시장은 “오랜 역사와 전통의 맥을 이어온 상주 전통명주가 지닌 문화적·경제적 가치를 더욱 높이고, 상주 전통명주 국제패션페스티벌을 상주의 대표적인 문화콘텐츠로 더욱 육성·발전시키는데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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