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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이 배출한 첫 해외선교사, 이대영 목사(2)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이 대 영 목사 (李大榮, 1887~1968) 5. 이대영, 낙심하고 있던 청년들의 부흥을 꿈꾸다 1919년 3·1만세운동의 실패로 많은 청년들이 낙심하며 실의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안동의 3·18 만세운동을 모의하고 주도했던 안동교회는 주민들에게 새로운 대안으로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분위기 속에서 성경공부를 통해 민족혼을 일깨우고, 절망에 빠진 청년들에게 소망을 주는 종교로 기독교가 인식되면서 의식 있는 청년들이 당시 안동읍 유일한 교회인 안동교회로 모여들게 되었다. 그 결과 1919년 9월 안동교회에서 안동기독교청년회 창립총회가 열리게 되었다. 하지만 다수 회원들이 비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에 신앙에서 벗어난 행동으로 인해 신앙에 기초한 청년회 조직을 새롭게 구상하게 되었고, 기독청년면려회(C.E.)가 대안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당시 안동선교부 주재 안대선 선교사는 기독청년면려회가 이에 가장 부합하는 청년운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하여’라는 목표를 가진 기독청년면려회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에 관한 책자를 홍콩으로부터 입수해서 번역하고, 그 지침에 따라 안동교회 청년회에서 도입하게 되었다. 이후 1921년 2월 당회의 허락을 얻어 한국 최초로 기독청년면려회 운동이 시작되었다. 당시 당회장은 안동교회 동사목사인 권찬영 선교사였으며, 이대영 목사는 안동교회 2대 담임목사로 막 부임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대영 목사는 기독청년면려회 운동의 출범에 가장 앞장서서 중요한 결정을 이끌었던 것이다. 기독청년면려회는 태동 이후 빠른 속도로 전국에 확산되어 1921년 6월 안동교회에서 경북연합대회가 개최되었다. 1921년 제10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안동의 청년면려회 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전국교회에 면려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함으로써 1923년에는 전국에 약 200여 교회에 기독청년면려회가 조직되게 되었다. 급기야 1923년 8월에는 조선연합 창립총회가 개최되어 기독청년면려회는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기독청년면려회는 오늘의 청년회전국연합회, 남선교회전국연합회로 이어져오고 있으며, 해방 후 고등CE, 청년CE, 장년CE로 분할되었으며 오늘의 고등부, 청년회, 남선교회 전국연합회로 발전했다. ▲1954.4.22안동교회에서 제 5차 기독청년 면려연합회 전국대회 6. 이대영, 다음세대의 주역인 주일학교를 활성화하다 이대영 목사는 1921년 1월 제9회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921년 2월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1922년 5월 중까지 교회를 섬기다가 사임하였다. 비록 14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대영 목사는 수려한 외모와 인격적 호감, 각별한 사역의 헌신으로 초기 안동교회가 든든히 서 갈 수 있는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그가 추구한 사역은 비단 개(個) 교회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성장에 롤 모델(Role Model)이 될 수 있었다. 이대영 목사가 각별히 관심을 가진 분야는 주일학교였다. 안동교회는 1921년에 접어들면서 주일학교 조직을 체계적으로 갖추기 시작했다. 안동교회의 주일학교 조직을 갖추고 교사들을 임명한 것은 초대 담임인 김영옥 목사였다. 그러나 이대영 목사는 주일학교 조직을 보안하기 위해 1921년 5월 제67회 당회에서 교사를 새롭게 임명하였다. 또한, 1922년 1월 30일에는 어린이들이 모이는 소아회가 운영되는 안기, 동부, 성내교회 등 3개 처소에 칠판과 분필을 보내기 위해 헌금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대영 목사는 자신이 담임으로 있는 안동교회에만 집중한 것이 아니라 안기, 풍기의 동부교회와 성내교회 등을 후원함으로써 안동지역의 전체에 걸쳐 어린이 부흥에 힘썼던 것을 알 수 있다. ▲제 1회 주일 학교대회(1928년) 7. 이대영, 전국적인 부흥사경회 강사로 사역하다 안동교회 당회록에 따르면 이대영 목사가 안동교회에서 시무하는 14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전국 각지를 방문하며 부흥사경회를 인도했음을 알 수 있다. 전국의 여러 교회는 이대영 목사를 부흥회, 사경회, 훈련 등 강사로 줄이어 초청하였다. 당회록에 기록된 첫 번째 초빙은 1921년 3월 29일부터 4월 6일까지 대구에서 갖게 되는 여 도사경회(都査經會)에 강사로 초빙 받았다. 그러나 3월 20일부터 이미 안동교회에서 부흥회를 결정했기 때문에 초빙에 응할 수가 없었다. 이후 이대영 목사는 중평교회, 웅천교회, 천촌교회(경주군 서면), 경남 함안읍교회, 상주읍교회 등의 교회에서 부흥사경회를 이끌었다. 또한, 전주군교회, 동산신명학교, 양림교회(전라도 광주), 남문외교회, 만촌교회, 하회교회, 대구지역 도사경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는 등 그는 전국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부흥강사였다. 이대영 목사는 평균적으로 한 달에 한번 꼴로 일주일 정도의 부흥집회 강사로 출타하였다. 그는 안동지역을 넘어 전국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강사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8. 이대영, 경안노회 창립회원이 되다 1907년 조직된 독(獨)노회는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세워지기까지 사실상 총회적 기능을 수행했다. 독노회가 조직된 이후 한국교회의 교세는 날로 부흥되어 독노회 산하에 경기, 충청(경충), 평북, 평남, 황해, 전라, 경상, 함경 등 7대리회(代理會)를 조직하여 각 지방을 관할하게 하였다. 이후 1911년 독노회에서 1912년에는 7대리회를 노회로 승격시켜 총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함에 따라 1911년 12월 부산진 예배당에서 경상노회가 조직되었다. 또한, 1916년 제5회 총회에서는 경상노회가 헌의한 노회분립안이 가결되어 경상노회를 경북노회와 경남노회로 분리하기로 결의하였다. 1921년 제10회 총회는 경북노회와 경안노회의 분립을 결의했다. 총회에서 정한 노회 경계선은 안동군, 영주군, 봉화군, 청송군, 의성군, 영양군, 예천군, 상주군, 영덕군 및 문경군 일부지역이 포함되었다. 경안노회는 조직회장인 권찬영 선교사의 소집으로 1921년 12월 경안성서학원 전신인 안동 여성경학교에서 개회되었다. 당시 경안노회의 한국인 목사회원은 김영옥, 이대영, 강석진 목사였고, 선교사 회원은 권찬영, 인노절, 안대선이었다. 그리고 장로회원은 신택희 외 22명이었다. 개회 후 임원이 조직되었는데 투표결과 회장 김영옥 목사, 부회장 권찬영 선교사, 서기 강석진 목사, 부서기 이대영 목사, 회계 조학규 장로, 부회계 인노절 선교사가 피선되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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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이 배출한 첫 해외선교사, 이대영 목사(1)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이 대 영 목사 (李大榮, 1887~1968) 1887년 경상북도 예천군에서 출생한 이대영 목사는 시대를 앞서간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 믿기 힘든 유학이 강한 마을과 가정에서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도 혹독했다. 그는 더 이상 고향 땅에서 살지 못하고 객지로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일정한 훈련을 거친 후 하나님께서는 그를 고향으로 보내셨고, 뛰어난 복음전파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그 후 전도인, 조사로 활동하면서 평양신학교의 신학교육을 마치고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시무하며 기독청년면려회와 주일학교를 통해 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갈 뿐 아니라 지역복음화와 교회 부흥을 선도했다. 이후 총회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안동을 떠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파송 선교사로 1922년 6월 13일 중국 래양에 도착한 이대영은 그 땅에 머무는 동안 중국인들과 함께 중국인처럼 살았다. 1949년 중국의 공산화로 인해 선교를 포기하고 1955년에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이대영 목사는 33년 동안 중국인을 동족으로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함으로서 산동반도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수 있게 하였다. 그후 그는 오직 하나님 나라, 교회와 총회를 위해 헌신하다가 1968년 하나님이 부르심을 받은 믿음의 선배이다. 1. 이대영, 금당실 마을에서 출생하다 백사(白沙) 이항복의 후손인 이대영은 1887년 4월 23일,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에서 이유성(李裕成)과 김도혜(金道徯)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이대영이 출생한 마을은 금당실로 불러졌는데 선교사가 동네에 와서 복음을 전하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했다. 이대영은 괴당교회가 설립될 당시인 1907년 경, 복음을 소개받고 믿음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부모의 반대로 고향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가족과 함께 1910년 영일군 흥해면으로 이사했다. 그는 흥해교회에 출석하면서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특히 이곳에서 선교사로부터 신앙훈련과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전통적인 양반가문의 후예로서 비록 예수 믿는다고 집에서 버림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품으셨고, 훗날 중국 땅에서 복음전파의 귀한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이다. ▲이대영 목사의 가족사진 2. 이대영, 부해리 선교사를 만나다 안동을 포한한 경북북부지역에 복음이 처음으로 전해진 것은 1893년 배위량 선교사에 의해서이다. 이후 1902년 3월에 안의와 선교사가, 1903년 봄에 방위렴 선교사와 부해리 선교사가 안동을 직접 방문해 복음을 전했다. 특히, 부해리 선교사는 1899년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미국 북장로교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파송 받아 1899년 10월 26일 대구에 도착, 초창기 대구·경북 지역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941년 일제의 탄압으로 추방되기 까지 40여 년 동안 한국선교에 평생을 바쳤다. 부해리 선교사를 포함한 여러 선교사들의 헌신의 결과, 1903년 미국 북장로교 연회보고에 의하면 경북·대구 지역 7개 고을에서 12명의 교인이 생겨났고, 1905년에는 20개 고을에 8개 교회, 2명의 세례교인, 19명의 학습교인, 79명의 원입교인이 생겨났다. 이러한 영적 분위기 가운데서 이대영의 회심에 관한 이야기는 두 가지 설로 나뉘어진다. 우선 박용규는, 1907년 경 이대영이 나만기에 의해 복음을 소개받고 예수를 믿게 된 것으로 추측한다. 이미 예천에 존재했던 그리스도인 나만기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고 복음을 들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러 자료들은 이대영이 부해리 선교사에 의해 예수를 믿게 되었음을 증거한다. 이대영은 한국교회의 최초의 대부흥이 일어난 1907년 당시 대구선교부 소속 선교사로 있던 부해리 선교사에 의해 복음을 전달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구·경북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부해리 선교사와의 역사적 만남으로 이대영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됐으며, 이후 전도인, 조사를 거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 임직한 이후 한국교회와 중국선교의 거룩하고 위대한 한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3. 이대영, 경북 북부지역 전도인·조사가 되다 복음을 접한 뒤 집안 어른들의 반대로 흥해로 이사한 이대영은 흥해교회에 출석하면서 본격적인 전도인 훈련을 받게 되었다. 특히 대구선교부의 중심교회인 남성정교회(대구제일교회의 전신)에서 열렸던 겨울남자성경반에서 수 년 동안 수학할 기회를 가짐으로써 목회자로서의 전문적인 소양을 쌓을 수 있었다. 선교사의 지도와 신학훈련을 받은 이대영은 전도인으로 본격적인 전도사역을 하게 되었다. 흥해교회에 출석하면서 훈련받은 6년 여 동안 이대영은 이미 전도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고, 경북노회는 그를 유급 전도인으로 인정하고 복음전도사역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그는 고향인 금당실에서 전도인으로 활동하기 이전에 예천 신전교회를 왕래하며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오게 됨으로써 신전교회가 부흥했다. 신학 기초과정을 거친 이대영은 목사로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는 당시 규정에 따라 목회자 수업을 위한 문답절차를 거쳐야 했다. 그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경북노회에서 목사후보생고시를 치러야 했으며, 1916년 6월 대구남성정교회에서 개회된 제1회 경북노회에서 평양신학교 입학을 허락받았다. 신학 입학을 허락받은 후 처음으로 이대영이 섬긴 교회는 경주군 외동면 말방리의 장산(長山)교회다. 이 때 이대영은 전도인에서 조사신분으로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4. 이대영,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 임직하다 이대영은 1917년 5년 과정의 평양신학교에 30세에 입학하여 목사를 위한 수학을 시작했다. 결혼한 지 10년이 지나 10살 난 아들 이 있었는데, 평양에서 공부하는 기간 동안 가족들은 섬기는 교회에 머물러 있었으며 이대영은 혼자 기숙사에서 동료들과 함께 생활했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후 이대영은 신학공부의 적응을 위해 섬기던 장산교회를 1917년 사임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918년 다시 부임하여 장산교회를 섬겼다. 평양신학교 졸업반인 1920년 이대영은 이만집 목사가 담임으로 있던 대구 남성정교회 조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이만집 목사는 3·1 만세운동으로 투옥된 상태로 있었기 때문에 조사로 청빙을 받은 이대영은 실질적으로 대구제일교회 전신(前身)인 남성정교회를 담임하게 된 것이다. 남성정교회는 대구·경북지역 최초의 교회로 이미 이 지역의 중심교회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는 동년 12월 2일, 17명의 동기생들과 함께 평양신학교 제14회로 졸업하고, 이듬해인 1921년 1월 12일 대구동산성경학원에서 개회된 제9회 경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 임직예식을 마친 이대영 목사는 안동지역의 중심교회인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청빙허락을 받아 부임했다. 이후 이대영 목사는 1921년 6월 15일 개회된 제10회 경북노회에 정식 노회원으로 참석하여 본격적인 노회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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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거룩한 흔적을 남긴 사역자, 김영옥 목사(2)김 승 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영옥 목사 (金泳玉, 1871-1952) 4. 안동지역에 복음의 씨를 뿌린 교회개척자, 김영옥 안동에 복음이 처음으로 전해진 것은 부산을 거점으로 선교하던 배위량(W.M.Baird) 선교사에 의해서다. 그는 1893년 4월 17일 부산 동래를 출발하여 밀양, 청도, 대구, 낙동, 안동. 의성, 영천, 경주, 울산을 거처 5월 20일 부산으로 돌아가는 무려 1,240 리(里)나 되는 전도여행을 통해 복음을 전했다. 5월 5일, 그의 역사적인 안동 방문이 있었고, 이 날은 안동에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진 날이다. ▲1909년 9월부터 안동의 북부지역은 사우대 선교사가, 서쪽은 오월번 선교사가 책임지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전도여행을 떠나기 전의 모습으로 추측된다. 좌측 말에 탄 사람은 사우대 선교사이며 말 옆에 있는 사람은 당시 조사인 김영옥(1911년 안동교회 초대담임목사로 부임)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마부, 그리고 오른쪽 말에 탄 사람은 오월번 선교사이다. 이후 미국 북장로교는 1897년 대구선교부를 설립했고, 1902년부터 경북 지방을 세 구역으로 나눠 동부 지역은 안의와(J.E.Adams) 선교사, 안동을 포함한 북부는 방위렴(W.M.Berret) 선교사, 그리고 서부는 부해리(H.M.Bruen) 선교사가 각각 담당해 전도사역을 감당함으로써 경북북부지역의 복음화가 본격화되었다. 특히 안의와 선교사는 1902년 3월, 김기원과 함께 안동을 순행하였는데 이때 이들은 시장에서 전도를 하면서 복음서를 판매했다. 이 해에 안동 국곡과 풍산, 그리고 의성 비봉에도 교회가 설립되었다. 1908년 장로교 선교사 총회에서 안동선교부 설립 결의가 이루어졌다. 그후 안동 최초 주재 선교사로 사우대(C.C.Sawtell) 선교사가 안동에 도착했으며, 1909년 8월 8일 안동교회가 설립됨으로써 안동지역의 복음화가 활기를 띠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원주에서 선교하던 미국 북장로교 소속 오월번(A.G.Welbon) 선교사와 조사 김영옥도 1909년 선교지를 안동으로 임지를 옮김으로써 안동 땅에 복음의 바람이 강하게 불기 시작했다. 안동에 도착한 김영옥은 선교사들을 돕는 조사로 안동을 중심으로 경북 북부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는 이미 세워진 교회들을 돌보았으며, 특히 8월 둘째 주일 설립된 안동읍 최초의 교회인 안동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다. 5. 영남지역 독노회에서 최초로 안수 받은 한국인 목사, 김영옥 언더우드 선교사의 전도로 세례를 받은 김영옥은 여러 해 동안 선교사의 도움으로 성경을 공부했다. 당시 언더우드가 운영하고 있던 성경훈련반은 1년에 한 달씩으로 그 과목은 성경주해, 제목별 성경공부, 성경입문, 교회사, 성경지리, 교회정치, 찬송, 설교 등을 포함했다. 한국교회 최초의 신학교라고 할 수 있는 그곳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은 김영옥은 매서와 조사가 되었다. 조사로 활발하게 사역하던 김영옥은 1901년 개교한 장로교 최초의 신학교인 평양신학교에 만 30세에 입학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조사와 영수, 장로 등 여러 사역으로 인해 학교 공부에만 전력투구할 수 없었던 김영옥은 졸업하기 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만 40세인 1911년(제4회)에 마침내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9월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에서 개회된 제4회 독노회에서 홍승한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다. 따라서 1891년 영남지역(부산·경남·대구·경북 등)에 복음이 전해진 이후 대구에서 열린 첫 노회에서 김영옥, 홍승한은 목사로 임직을 받은 것이다. 한편, 영남지역에 있던 교회에서 목사 직분을 가지고 처음으로 시무한 한국인으로 경북교회사나 대구제일교회는 김천일 목사를 기록한다. 그러나 김천일 목사의 안수 일자는 자료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혼선을 준다(경북교회사는 1911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하편은 1912년으로 기록). 따라서 존재하는 자료를 종합할 때 영남지역 교회에서 최초로 목사로 시무한 한국인은 김천일이나 혹은 김영옥, 홍승한이라고 할 수 있다. 6. 안동지역의 복음화에 주춧돌을 놓은 사람, 김영옥 김영옥 목사의 부임(赴任)으로 안동교회는 경상도에서 처음으로 한국인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가 되었고, 그의 뛰어난 영적 지도력은 안동을 포함한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복음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안동교회는 놀랍게 부흥하여 1년이 채 지나기 전에 무려 75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발돋움했다. 안동교회의 첫 학습자는 강복영 외 14명(1910년 8월 18일), 첫 세례교인은 권중한 외 8인(1911년 3월 2일)이었다. 또한, 김영옥 목사가 담임으로 섬겼던 1911년부터 1921년까지 안동교회는 안동지역의 중심교회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다. 1911년에는 오늘의 초등학교 수준인 계명학교를 설립함으로써 교회가 섬김과 봉사로 지역사회와 소통할 수 있게 했다. 특히 1913년에는 김병우를 장로 장립함으로써 안동지역에서 최초로 당회가 구성되었다. 주일학교와 여름성경학교를 통해 어린이들의 신앙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1913년 경북북부지방에서는 처음으로 여전도회를 조직하고 도사경회를 개최함으로써 여성들의 신앙교육에도 집중했다. 1920년 안동 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했으며, 1921년 전국 최초로 기독청년면려회를 조직함으로 청년의 신앙교육과 계몽에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안동에 주재하고 있던 안동선교부의 선교사들은 자신들에게 집중되었던 리더십을 김영옥 목사에게 조금씩 이양(移讓)해 한국인 목사의 지도력을 배양했다. 1913년 8월 9일에 있었던 안동교회의 역사적인 첫 번째 당회록은 이 사실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안동교회는 1909년 8월 8일 첫 예배를 드림으로 설립된 지 4년이 지나지 않은 1913년 7월 20일에 김병우를 장립함으로써 안동지역에서 첫 당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장로장립 20일 후인 1913년 8월 9일 안동교회 제1회 당회가 오월번 목사 댁에 모여 문답건과 예배당 건축 등 안건을 처리하였다. 위 사진 중 왼쪽은 제1회 당회록을 포함한 안동교회 당회록 제1권이며, 우측은 김병우의 장로장립을 확인할 수 있는 당회기록이다. 1913년 8월 14일에 있었던 제2회 당회록에는 8월 17일 있을 첫 세례와 성찬의 집례자로 초대 김영옥 목사를 기록한다. 교회의 사역에 중요한 역할을 하던 선교사가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회가 조직되자 첫 세례식과 성찬식 집례를 한국인 담임 목사에게 양보한 것이다. 이것은 선교사들의 크나큰 배려였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불과 5일 전에 있었던 안동교회 첫 당회의 회장은 오월번 선교사였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비록 자신들의 조사였지만 목사 임직을 받고 안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김영옥 목사를 존중하며 현지인 목사를 세워줌으로써 점차 자국민 중심의 리더십을 키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안동교회는 100년이 넘는 역사에서 부속건물이 아닌 본당을 단 3번 건축했는데, 첫 예배당은 그가 조사로 섬길 때인 1910년 10월 30일 준공한 16칸 ‘ㄱ’자 예배당이다. 이 예배당 건축을 위해 교인들은 10월 9일 주일 오후예배 시 특별헌금을 했으며, 당시 조사인 김영옥도 선교사들이 준 지방 순회 때 타고 다니던 노새를 팔아 건축헌금에 보탰다. 더욱이 예배당을 신축한 이후 특별부흥집회가 열렸는데 당시 최고의 부흥강사인 길선주 목사도 강사 중의 한 분이었다. 또한 여성과 소녀들을 위해 활발한 성경공부도 이루어졌다. ▲1913년 11월부터 공사가 착수되어 이듬해인 1914년 2월에 준공한 안동교회의 두 번째 신축 예배당으로 오늘의 100주년 기념관 바로 그 위치에 서 있었다. 예배당은 목조 함석지붕을 가진 건물로 반(半) 2층 구조형식으로 약 50~60평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건축기법 상 2층은 작은 규모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안동교회의 두 번째 예배당인 2층 목조 함석지붕 예배당은 첫 번째 예배당이 준공된 후 급속한 교인의 증가로 인해 1914년 초 준공되었다. 이때도 김영옥 목사는 선교사가 사준 가옥을 팔아 헌금했을 정도로 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두 번째 예배당의 준공으로 주일학교의 활성화가 이루어져 양적으로 또 질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1920년 7월, 안동지역에서 최초로 여름성경학교가 열렸으며, 이듬해에는 주일학교가 조직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더욱이 인근 지역 교회들이 연합하여 모일 수 있는 부인도사경회 등 대형집회가 가능하게 되었다. 김영옥 목사의 부임으로 안동교회는 사역의 내용, 교회의 건물과 조직 등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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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거룩한 흔적을 남긴 사역자, 김영옥 목사(1)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 영 옥 목사 (金泳玉, 1871-1952) 1893년 베어드 선교사에 의해 안동지역에 복음이 전해진지 124년이 지났다. 오늘의 교회는 믿음의 선배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우리 모두는 너무도 잘 안다. 훌륭한 믿음의 선배 중에는 교역자들 뿐 아니라 평신도들도 포함된다. 이 분들의 헌신의 결과로 척박한 이곳 안동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뿌리를 내리고 자라 마을마다 교회가 서게 되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수고임을 알기에 감사할 뿐이다. 김영옥 목사는 한국선교 초기 거룩한 발걸음을 통해 거룩한 흔적을 남긴 위대한 선배이다. 필자는 그에 대한 조명이 너무 늦었음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그리고 경상북도에서 초개와 같이 모든 것을 버리며 교회와 국가를 위해 헌신한 김영옥 목사를 연구하여 탈고하니 그동안 목사님에게 가졌던 죄송스러운 마음이 조금이라도 보상받는 느낌이다. 이제 자애로운 아버지요 할아버지, 지역의 초대교회의 기초를 든든히 세워 중심교회로 서게 한 목사, 그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믿음으로 두려움 없이 애국한 김영옥을 소개한다. 1.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 결신한 청년, 김영옥 경상도의 첫 한국인 목사는 김영옥(金泳玉, 1871-1952)이다. 김영옥이 비록 영남지역 최초의 한국인 목사이지만 그의 고향은 북한으로, 그는 1871년 4월 12일 황해도 연백군에서 출생했다. 가난했던 그는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해 미국 하와이로 갈 꿈을 갖고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18세가 되던 1888년 어느 날, 평산 누님 댁에 갔다가 장로교 최초의 선교사였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선교사가 소래(松川)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미국으로 갈 방법을 찾기 위해 그를 찾아갔다. 그러나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제시받은 김영옥은 미국 갈 결심을 포기함과 동시에 회심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결국 그는 장로교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로부터 세례까지 받게 되었던 것이다. 전혀 뜻하지 않게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은 김영옥은 세례 까지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언더우드 선교사의 마부로 복음사역의 적극적인 도우미가 되었다. ▲1909년 9월부터 안동의 북부지역은 사우대 선교사가, 서쪽은 오월번 선교사가 책임지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전도여행을 떠나기 전의 모습으로 추측된다. 좌측 말에 탄 사람은 사우대 선교사이며 말 옆에 있는 사람은 당시 조사인 김영옥(1911년 안동교회 초대담임목사로 부임)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마부, 그리고 오른쪽 말에 탄 사람은 오월번 선교사이다. 2. 목사 임직 이전의 복음전도자, 김영옥 회심 이후 김영옥은 복음사역을 위해 하나하나 착실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복음전파사역에 관한 김영옥의 결심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까지 중단 없이 계속되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후 그는 단 한 번도 곁길로 간 적이 없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기 위한 준비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그는 능동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 1년 만에 한문 신·구약 성경 모두를 통독(通讀)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또한 선교사들로부터 전도법과 장로교회에 관해 배웠으며 선교사들과 간단히 대화할 수 있는 영어실력도 갖추게 되었다. 모든 과정을 이수한 김영옥은 실력 있는 매서인(賣書人)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선교사를 도와 공식적인 매서인으로서 사역할 수 있었다. ▲황해도 솔래(松川)에서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 18세 때(1888년) 회심하고 결신한 김영옥은 휴식도 없이 64년(1952년) 동안 서울, 강원도 철원과 원주, 경북 안동, 사월, 포항, 영주, 경주, 풍기, 문경, 그리고 의성 삼분 등 전국에서 교회를 세우고 돌보며 애국하다가 하나님의 나라에 입성하였다. 이후 서울로 올라온 김영옥은 1893년 모삼열(Samuel. F. Moore)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순교를 각오하고 서울 종로 5가, 4가 등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그 결과 몇 명의 성도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1894년 이들이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와 그의 조사(助事)인 서상륜과 함께 연지동 초가(草家)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오늘의 연동(蓮洞)교회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또한 김영옥은 조사로서 서울의 승동교회와 동막교회 설립에 관여함으로써 이 땅에 교회를 세우는 사역을 쉬지 않고 감당했다. 이후 김영옥은 서울을 벗어나 더욱 활발하게 전도사역을 감당했다. 그는 경기 동쪽과 황해도 이남(以南)으로 순행하며 전도하여 백천, 평산, 금북, 금성, 양구, 화천, 양주, 포천, 등지에 여러 교회를 설립에 기여했다. 특히 김영옥은 1898년 모삼열 선교사와 함께 전도하고 개척한 고향인 황해도 백천군 운교(雲橋)교회에서 영수(領袖)와 장로로 섬기기도 했다. 운교(구름다리)교회는 교인들의 헌금으로 큰 한옥을 사서 새롭게 단장하여 예배처소로 사용한 그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로 김영옥은 주일예배를 인도하였다. 그는 새 신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신자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2주 내지 3주간씩 연속으로 사경회를 열기도 하였다. 김영옥은 전문적인 훈련을 거친 한국교회 초기 매서와 조사, 그리고 영수와 장로로 초기 한국교회의 뛰어난 평신도 지도자였던 것이다. 3. 영적 지도력을 갖춘 한국 장로교 평신도 리더, 김영옥 조사(助師)는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들이 그들의 고국과는 모든 것이 완전히 다른 이 땅에서 적응해갈 수 있도록 도운 사람들이다. 선교사들은 이들에게 한국어를 배우고, 부동산을 구입할 때 도움을 받았으며,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각 지방으로 순행할 때 큰 도움을 받았다. 만일 어느 누구도 선교사들의 복음사역과 현지 적응을 돕지 않았다면 이렇게 빠른 시간에 이 땅에서 복음의 씨가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여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김영옥은 조사로서 초기 한국교회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었다. 한국선교 초기 많은 조사들이 있었지만 조선장로교사기에 따르면 김영옥은 당시 활동하던 많은 조사 중에서도 영향력 있는 발언권을 가진 조사였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그는 공식적인 회의석상에서 중요한 발언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김영옥은 1903년 9월, 1904년 9월, 1906년 9월 세 차례에 걸쳐 선교사들과 함께 모인 장로교공의회 경성소회 총대 장로로 참석하여 발언하기도 했다. 1906년 9월 회의에서는 “교인으로는 교회를 순종하고 국민으로는 국가에 순종할 방침이란 문제”에 대하여 발언했는데, 이것은 분명한 기독교적 국가관을 가진 김영옥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7명의 한국인 목사가 처음으로 배출되기 전 까지 김영옥은 당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평신도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따라서 당시 활동하던 많은 조사 중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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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 청년 기-업(氣-UP) 페스티벌“로맨틱 Party”연다포항시가 청년 기-업(氣-UP)페스티벌,「로맨틱 Party」를 개최한다. 오는 10월 13일(토)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오천읍 원리(오천농협 원동지점 사거리~세븐 일레븐 사거리)일원에서 “Pohang is a dream – 포항은 꿈이다” 이라는 주제로 펼쳐질 예정. 이번 청년 기-업(氣-UP)페스티벌,「로맨틱 Party」은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는 청년층에게 위로를 전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포항시가 지난 6월 ‘Boom up 페스티벌-쌍파 Party’에 이어 준비한 거리공연으로 청년소통 강화와 함께 주변상권 활성화 하고자 기획됐다. 이날 행사는 오천농협 원동지점 강변방향 사거리에 메인 특설무대를 설치하고 좌석배치 없이 기립상태에서 무대공연자와 호흡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개그맨 윤진영이 메인 MC를 맡고 김종국, 벤, 별, 지바노프가 출연하여 「오천, 가을감성으로 물들다」라는 콘셉트에 맞춰 메인공연과 LED야광봉 이벤트 등으로 관객들에게 로맨틱한 시간을 선사할 예정이다. 행사가 열리는 10월 13일 오전 9시부터 14일 새벽 2시까지 17시간 동안 오천농협 원동지점 사거리(T World~세븐일레븐 사거리 180m)주요도로의 차량 출입을 전면통제 된다. 또한, 행사장 인근의 강변주차구역, 포은중학교, 기타 도로변 등(3,000여대 주차)에 임시 주차장을 설치·운영하여 시민들의 불편을 최소화한다는 방침이다. 손정호 포항시 일자리경제노동과장은 “이번 로맨틱파티는 청년층을 주 타깃으로 하는 행사로 새로운 거리공연문화를 만들고 지역 릴레이 형식으로 진행되어 포항지역 상권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며 “대중교통 이용, 안전 확보를 위한 지시에 잘 따라주셔서 행사가 원활하게 치러질 수 있도록 시민 분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 드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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