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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일손 부족 우리가 해결, 안동과학대학교 농촌일손 돕기 실시안동과학대학교(총장 권상용/서후면 소재)는 농촌 지역의 고령화와 부녀화 등으로 반복되는 수확 철 영농에 어려움을 겪는 농업인들을 위해 농촌일손 돕기에 나섰다.이번 가을철 농촌일손 돕기에는 지난 3일부터 4일까지 이틀 동안 교직원과 학생 100여 명이 참여했다.특히 올해 이상저온, 폭염과 태풍 등으로 피해가 심한 과수 재배 6 농가에 대해 일손을 지원했으며 사전에 작업 요령과 농작업 시 주의사항 등을 교육해 농가에 실질적인 도움을 줬다.학교 관계자는 “매년 일손 부족으로 고초를 겪는 농가들을 위해서 파종기와 수확기에 농촌일손돕기를 시행할 계획”이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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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회의 지역사회를 위한 사랑의 봉사지난 127호에 이어 계속(총 3회)해서 안동교회 사역이 연재됩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로부터 ‘참좋은교회상’을 수상한 예장(통합) 경안노회 소속 안동교회를 알아보는 코너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 주의 뜻을 이뤄가는 교회를 만들어가고자 노력하고 애쓰는 교회들이 이 시대에 많이 있지만, 섬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물론, 경험의 부족으로 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하게 된다. 주님 허락하신 시간과 물질이기에… 시대가 악하고 사역의 시간이 무한하지 않기에 우리는 지혜로운 청지기처럼 알뜰하게 모든 것을 관리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먼저 간 믿음의 선진들의 모범을 배우고 익힐 수 있다면, 그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 안의 동역이며 선하다 칭찬받을 일인가? 이에 아름다운 섬김과 다양한 교육, 분쟁 없이 화목을 이루어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로부터 ‘참좋은교회상’을 수상했던 안동교회를 찾아 이 시대 진정한 섬김과 온전한 구제와 봉사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 섬김의 귀한 기록들과 자료들을 제공해 준 안동교회 김승학 담임목사와 당회원, 성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경북하나신문 편집자- 지난 127호 6면: ▲ 안동교회의 시작과 교회의 담을 넘어 지역사회를 섬기는 교회 금번 128호 6면: ▲ 지역사회 위한 사랑의 봉사 다음 129호 6면: ▲국가와 민족을 사랑한 교회, 새로운 패러다임을 통한 교회의 발전 안동교회의 지역사회를 위한 사랑의 봉사 4. 지역사회를 위한 사랑의 봉사 1) 사(私) 교육사업 안동교회는 초기부터 지역사회를 섬기고 봉사하는 공적 교회였다. 지역사회에 대한 관심으로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지역 주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창립한 지 2년이 채 지나기도 전인 1911년 계명학교를 개교하였다. 설립초기 계명학교는 당시 교육에서 소외받고 있던 여학생들에게만 입학을 허락했을 정도로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기 위해 설립하여 그 목적이 뚜렷한 학교였다. 교과 내용으로는 조선어, 일어, 산수, 한문, 습자, 도화, 받아쓰기, 작문, 음악 등이었으며 2~3명의 교사가 분담하여 지도했다. 특히 안동교회가 1919년 기미년 안동의 만세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였을 때, 계명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은 안동 만세운동에 사용할 태극기를 제작하고 3·1 만세운동 선언문을 등사했다. 이 만세 운동으로 지역 주민들은 교회를 보는 시각이 일신되어 많은 주님들이 만세 운동 다음 주일 아침 교회 주변에 모여 다시 만세 운동을 선도해 줄 것을 원했다고 한다. 또한 1921년부터 야학을 통해 경제적 형편이나 다른 사정으로 공립보통학교나 계명학교에 다닐 수 없는 어린이들을 모집하여 하루 2시간씩 조선어, 일어, 산수, 성경과목을 지도하였다. 또한 1924년에는 경안중학원이라는 중등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이처럼 안동교회는 설립 초기부터 지역사회가 요구하고 필요로 하는 공적 사역에 관심을 갖고 공적 참여를 통해 공적 교회로서 확실하게 자리를 매김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48년 3월 안동의 최초 유치원인 안동유치원을 개원함으로써 유아교육 기회를 시민들에게 제공했을 뿐 아니라 오늘 까지 67년 동안 안동시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2) 안동중앙신용협동조합 1965년 11월 17일, 안동교회 교인들 사이에 신용협동조합 발기 준비위원회가 발족되어 안동교회 본당 1층 예배실에서 1965년 11월 29일부터 12월 1일 까지 3일 동안 창립의 목적과 취지에 관한 강습회를 가졌다. 이 강습회를 통하여 신용협동조합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1965년 12월 2일 오후 8시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이 때 가입자는 34명, 출자금은 4,260원으로 공동유대는 안동교회 교인으로 규정하는 정관을 통과시켰다. 당시 이사장, 부이사장, 회계, 서기, 여신위원장, 감사위원장, 교도위원장 등 모든 임원은 안동교회 교인들로 구성되었다. 당시는 6·25 전쟁 이후 비록 1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1인당 국민소득은 1328달러로 세계에서 하위에 속했다. 리어카 하나만 있어도 함께 하루 일해 한 가족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이것조차 갖고 있지 못해 경제적으로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안동교회 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안동중앙신용협동조합은 신용을 바탕으로 이들에게 용자를 해주고, 가정경제를 일으킬 수 있게 했다. 안동중앙신용협동조합은 해를 거듭할수록 발전하여 2014년 12월 현재 조합원 5,182명, 자산 573억 원으로 건강한 중견 신협협동조합으로 지역주민을 섬기고 있다. 3) 다문화 가정, 장애우 및 새터민을 위한 복지사업 수년 동안 계속된 안동교회의 다문화 가정을 위한 사역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수년 전부터 시행되고 있는 다문화 가정을 위한 섬김의 사역은 이미 열매를 맺고 있다. 지역 병원과 연계하여 무료로 건강 검진을 받게 하며, 정기적으로 다문화 가정을 초청하여 그들 나라의 고유문화를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갖고,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가정을 대상으로 결혼식과 피로연, 그리고 신혼여행까지 제공하는 프로그램은 아름다운 섬김의 사역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또한 안동으로 이주한 새터민이 새로운 삶의 터전에서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사역 역시 섬김의 모범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새터민이 안동에 왔을 때 안동 적십자사와 연계해 이들이 필요로 하는 가전제품 등을 교회에서 제공할 뿐 아니라 안동교회 교인 가정과 연결시켜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형성해 새터민들이 보다 빠르게 안동 생활에 정착할 수 있도록 힘쓰고 있다. 또한 안동 근교에 있는 장애우 기관 및 시설과 연계하여 자원봉사를 실시하고 정기적으로 이들을 초청하여 온 성도들과 예배를 드리고 교제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교우들이 장애우에 더욱 큰 관심을 갖도록 하고 있다. 4) 노인복지사업 (1) 안동경로대학 ‘안동경로대학’은 1993년 4월 7일 설립한 안동노인학교로 시작되었다. 처음 114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노인학교의 학생회 모든 임원이 본 교회 교인들일 정도로 교회 중심으로 진행이 되었다. 수요일 오전 10시에 모임을 시작했던 첫해의 프로그램은 매우 제한되어 건강강좌와 지역 기관장들의 특강이 전부였다. 노인학교가 문을 열고나서 몇 해 동안의 초기 프로그램은 오전강좌 중심이었다. 이것은 ‘안동노인학교’가 교회 내 노인을 위한 프로그램을 갖춘 학교로서 교회 밖으로 나가기 힘든 구조적 특징을 보여준다. 하지만 당시 노인학교는 시대를 앞서가는 지혜였고, 2014년까지 연인원 5,000명 가까운 노인들이 안동경로대학의 문턱을 밟고 지나갔다. 특히 안동경로대학 20주년을 맞는 2012년에 UN이 정한 세계노인의 날을 기념하여 지역사회에 거주하는 어르신 1,200명을 초청하여 사랑의 잔치를 베풀었다. 위에서 언급한 구조적인 한계점을 가지고 시작했지만 ‘안동노인학교’는 2000년 초까지 여러 차례의 구조적, 외향적 변화를 시도하였다. 첫째, ‘안동노인학교’의 ‘노인’이라는 명칭에서 오는 부담감을 줄이기 위해 ‘안동경로대학’으로 그 명칭을 변경하였다. 둘째, 어르신들을 단순히 위로하는 프로그램에서 탈피하여 다양한 교육기회와 양적, 질적으로 수준 높은 교육을 제공하기 위하여 체제를 ‘학교’에서 ‘대학’으로 격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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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여년만에 방문한 첫 목회지(구미인동교회) 강단에서 설교!옛 성도들과 함께 한 최태원 목사(오른쪽에서 4번째), 김성길 담임목사(5번째 “가는데 마다 화평을 만드셨다”, “분란이 있는 교회, 나뉘어서 어려움을 겪던 교회를 찾아다니며 화평과 안정을 통해 부흥을 일궈내고, 건축까지 마치는 귀한 목사님” 미국 이민목회 사역 후 원로목사로 은퇴한 목회자가, 50여년 만에 목사 안수 후 국내 첫 담임 목회지였던 교회를 방문, 옛 성도들과의 감격스러운 만남과 함께 은혜로운 말씀을 증거, 뜻깊고 의미 있는 시간을 가졌다. 구미인동교회(담임목사 김성길)는 지난달 15일 주일 오후 예배시간에 제2대 담임목사로 부임, 5년간 목회를 통해 교회를 안정시키고 부흥의 기반의 다진 목회자인 최태원 목사(84)의 방문을 받았다. 48년만의 방문인지라 머리칼은 색이바래고 몸은 야위었지만 반짝이는 눈빛과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전해지는 말씀은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의 마음 깊이 새겨졌다. 지난날을 기억하는 몇몇 교인들은 곧 이어질 이별이 아쉬운 듯 설교를 마치고 내려온 최 목사와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함께한 옛 교인들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외진 곳에 ‘호야’라고 불리던 호롱불 유리를 매번 닦아가며 저녁예배를 드려야했던 어려웠던 지난날을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개척 초기라 많은 것이 부족했고, 생각들이 나누어져 어려움 겪었던 최 목사의 부임 전 인동교회는 교인들이 오전과 오후로 나뉘어져 따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전도사로 교회를 개척, 강도사로 8년을 목회했던 최 목사는 간절한 기도와 평안의 말씀을 증거, 이내 성도들을 위로하고 교회의 안정을 이뤄냈다. 대내외적으로 평안을 회복하자 교회가 부흥되기 시작했다. 안정되고 힘이 있는 교회로 지역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가 되자, 30대 초반의 최 목사에게 하나님께선 새로운 소망을 주셨다. 당시 성도들의 만류가 심했지만, 장로님의 “보내 드립시다”란 호소에 모든 성도가 순종해 사역지를 옮길 수 있었다. 일주일을 계획하고 금식 기도에 들어갔던 최 목사는 4일 만에 응답을 받고 부산 초량교회 부교역자로 갔다. 이후 대구사월교회 담임 목회자로 3년 시무하던 중 미국 유학을 떠나 2년 만에 박사(예배학) 학위를 받고 귀국, 대구남부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교회는 부흥해서 2부로 예배를 나눠드려야 했고 예배당을 신축했다. 후진 양성에도 힘을 써 대구신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총신에서 목사 재교육을 위한 예배학(피종진 목사 등 300여명을 대상)도 강의했다. 이후, 그는 유학 시절 하나님께서 보여 주셨던 이민목회에 대한 비전을 가슴에 품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최 목사가 정착한 곳은 한인들이 많지 않은 지역으로, 당시 분란을 겪고 있었던 시애틀에 소재한 평강장로교회였다. 최 목사의 부임 후 이내 교회는 이름처럼 평강을 회복했고, 담임 목회자로 시무한지 24년 만에 그는 원로 목사로 추대됐다. 또한, 그는 후진 양성에도 힘써 미주총회교단신학교인 워싱턴 신학대학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했고, 학장으로 15년을 더 섬기고 은퇴했다. 당시 신학교 제자들이 현재 은퇴할 나이가 되었을 정도로 원로가 된 최 목사는, 인근 지역에선 제일가는 원로로 추앙받고 있으며 지역 교계의 중대사엔 자문역을 맡아 상담해 주고 있다. 한편, 1962년 2월에 설립된 구미인동교회는 대한예수교 장로회(합동) 경북노회에 소속된 교회로 올해로 설립 54주년을 맞이했다.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과 섬김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품고, 같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진력을 다하는 인동교회는 현재, 김성길 담임목사를 중심으로 500여명의 성도들이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 (現)강동교회에서 분립된 인동교회는 이후, 미소교회와 동부교회, 동신교회를 분립시키고, 성장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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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자비량 목회자 김경환 목사목록 본문 국내 자비량 목회자 김경환 목사 취재·정리: 편집부장 최영열 장로 사도 바울처럼 선교사역을 자비량(장막업-Tent maker)으로 감당하는 해외 선교사들이 있기는 하지만 국내 목회에 있어 자비량으로 사역을 감당하는 목회자는 많지 않아 보인다. 목회라면 당연히 풀타임 사역이라는 인식이 자리매김한 탓인가? 뭔가 자연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이 땅엔 아직도 많은 수의 미(未)자립교회들이 존재하고 시골 벽지엔 고령화된 성도들로 구성된 어려운 농촌교회들이 지역마다 산재해 있다. 그 삶의 터전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농촌교회 성도들을 위해 묵묵히 사역을 감당해 가고 있는 목회자들의 삶 또한 각박한 처지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때, 어려운 농촌목회자의 삶을 도우면서, 시골 교회를 세워가는 자비량 목회자가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경북 예천군 용문면에 소재한 ‘용문하금교회’ 김경환 담임목사가 그 주인공이다. 김 목사는 괴산에서 목회하던 중 고향인 울릉도에서 함께 신앙생활 했던 곽일부 목사가 용문하금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인사차 방문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만남은 곽 목사와의 은퇴로 인해 이뤄지지 못했고, 다만 목자 없는 양떼와 허물어져 가는 예배당의 모습을 보면서 이곳을 찾은 김 목사의 마음은 아파왔다. 당시 교회는 사례금을 드릴 수 없는 형편이라 목사님을 모시지는 못하고, 다만 은퇴 시점에 갈 곳 없는 목회자가 와서 물질에 상관없이 사역해 주길 기대하는 정도였다. 김 목사가 기도 후 교인들과 다시 만나 교인들이 조건을 들어 준다면 사역을 하겠다고 말했다. 먼저, 맡아 오던 기업이 있기 때문에 사택은 필요 없다. 둘째, 사례비는 전혀 없어도 된다. 마지막으로 거처하는 숙소가 멀기에 새벽기도는 인도할 수 없다는 조건이었다. 성도들이 근근이 예배를 인도하며 지켜오던 시골교회, 목회자 모시기를 위해 기도하던 성도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하여 2014년 8월, 김경환 목사는 용문하금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됐다. 김 목사는 먼저 비가 새는 예배당 공사를 비용을 들여 마쳤다. 이어서 공사용 철근이 밖으로 튀어나와 있을 정도로 농사용 창고보다 못한 교회 식당을 리모델링해야겠다고 제안하자 대부분의 교인들이 반대했다. 비용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김 목사는 출향 교인들의 지원과 김 목사의 부담, 은혜 받은 이들의 헌신을 합하여 결국 공사를 마무리했다. 또 외부 지원을 받아 종탑을 깔끔하게 해결했고, 식당에 비용을 들여 화목보일러를 설치, 교인들이 훈훈한 겨울을 날 수 있게 도왔다. 고난주간에는 교인들을 상대로 세족식 행사를 열어 섬겼고, 추수감사주일이 되면 김 목사가 직접 생산한 꿀을 교인들에게 선물했다. 명절엔 일체 목사에게 선물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김 목사가 준비한 현금 봉투를 교인들에게 나눠줬다. 특별한 날이 되면, 성도들에겐 김 목사가 키우는 염소를 잡아서 대접하고, 마을 잔치에는 돼지를 잡아 대접했다. 이렇게 선한 사업을 계속하다 보니 이젠 주위의 돕는 손길도 생겨 훨씬 더 즐겁고 보람되게 섬길 수 있게 됐다. 현재, 교회에서 헌금 1등은 김 목사이다. 이렇게 많은 물질로 지역 사회와 교회를 섬기고 교인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은 바로 김 목사가 운영하고 있는 사업체가 있기 때문이다. 김 목사가 현재 경영하는 사업은 양봉과 염소 농장이다. 군 제대 후 울릉도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던 중 양봉을 처음으로 접했다. 몇 번의 어려움을 겪고 난 후 깨달은 것은 벌을 지으신 하나님 관점에서 벌을 키워보자는 확신이었다. 새로운 시도로 인해 당시 벌을 키우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듣기도 했지만 결국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방법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늘었고, 현재는 많은 이들이 그를 따라 양봉을 하고 있다. 김 목사는 현재 선진 양봉을 교육하는 농업기술센터 주최 전국 강의를 제일 많이 다니는 강사이다. 목회자로서 김 목사는 양봉 강의의 기회도 놓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삼고 있다. 강의 중간중간 하나님과 인간, 구원에 관해서 설명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교육생들에 증거 하고 있다. 3박4일 강의 시엔 반드시 하루는 예배당에서 강의해 기독교엔 친근감을 느끼도록 노력하고 있다. 김 목사가 양봉(국사골양봉농원)을 통해 올리는 수익은 연간 약 1억원 이상, 그 중 1억원 가량을 선교비로 사용하고 그 나머지를 생활비로 사용한다. 생산한 꿀은 미자립 교회가 판매해 자립할 수 있도록 목회자들에게 저렴하게 공급해 준다. 또 양봉교육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꿀 생산이 어려운 이들에겐 꿀을 나눠주고 다음 해 생산을 많이 하면 그때 갚으라고 공급해 주기도 한다.(진대법 개념, 회수율 10%에 불과) 현재 특히 김 목사가 역점을 두고 시작한 사업은 염소농장이다. 호주산 염소인 ‘보아’ 종을 70여두를 사육하고 있는데, 300마리를 목표로 하고, 우수한 형질의 보아 원종 염소를 구하고 있다. 숙소도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셨다. 김 목사가 숙소와 농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집(유천면 소재)은 과거 법당으로 사용되던 건물로 칡넝쿨이 집안으로 들어올 정도로 폐허가 된 상황이었다. 부동산 중개업자 조차도 일반인이 살 수 없는 곳이기에 목사님 정도 되는 사람이라야 살 수 있는 곳이라고 할 정도로 기가 센(?) 곳이었다. 그곳은 과거 전국의 무당들이 모여 큰 굿을 하던 집이었으며 집 둘레 곳곳이 촛불을 켜고 지성을 드리던 곳이었다. 따라서 그 누구도 범접(?)지 못한 탓에 김 목사는 시가의 1/4 가격으로 건물을 구입할 수 있었고 지금껏 잘 사용하고 있다. 김 목사가 이렇듯 나눠주는 목회를 하게 된 데에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다섯명의 자녀를 잃고 낙심한 아버지는 무당을 찾아가 안타까움을 호소하자 무당이 말하길 “나하고는 안 맞고, ‘오랑캐당’에 가라 ‘야수교당’” 해서 절박한 심정으로 교회를 찾았고 예수님을 만났다. 이후 5자녀를 더 낳고 건강하게 양육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신 아버지는 이후 평신도로서 교회를 개척(울릉도 중령교회)하신 것은 물론, 좋은 것은 모두 교회에 갖다 드리며 하나님을 섬기기를 시작해, 형제들과 함께 무척이나 어렵고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어린 시절 점심식사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을 정도) 공무원으로, 성공한 사업가로 성장한 김경환 청년은 하나님 말씀인 성경의 실생활 적용에 많은 괴리감을 느끼고 갈등하고 방황하던 중 하나님의 큰 은혜를 경험했다. 곧 하나님의 심정을 깨달은 것이다. 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에서, 성경을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기록하신 하나님 심정으로 바라봄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 은혜에 감사해 신학을 하려 했지만 고생길을 가려는 아들을 어머니가 막으셨다. 수년이 흐른 후 37의 늦은 나이인 1997년 거부할 수 없는 부르심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울릉도에서 육지로 나왔다. 사역을 시작하면서 김 목사는 물질과 관련된 굳은 결심을 하게 된다. ‘목회자가 되면 나눠줄 수 있을 정도의 준비가 될 때 사역을 시작하자. 자비량 목회자가 되자. 생계도 어려울 정도로 가난한 교인 가정에서 헌금하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수입원 없어 생계를 걱정할 정도로 살아가는 용문하금교회 노인 성도들과 이웃 주민들이 헌금이 부담스러워 교회 못 나오는 일이 없도록 김 목사는 헌금을 하지 말라고 독려(?)한다. 헌금 부담 때문에 교회 못 나오는 것보단 차라리 하나님 말씀을 한번이라도 더 듣게 하는 것이 목회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현재, 교회는 귀농 2가정과 교회 인근 주민들, 공무원 가정 등 20여명이 출석해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 김 목사 1년에 1번씩 북한 땅과 철책이 보이는 통일전망대를 찾아간다. 굶주리고 있는 북한 주민들을 마음껏 먹이고 싶은데 안타까워 혼자 울고 내려온다. 또 세계 곳곳의 미(未) 전도 종족을 찾아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지원해 주고 싶은 큰 소망이 있다. 그래서 해외로 나갈 기회가 있으면 1달러짜리를 많이 바꿔서 나간다. 비판도 하는 이들도 있지만 복음을 30분 듣는 아이들에게 1달러씩 나눠줬다. 김 목사는 신령한 영적 양식인 복음을 전할 수 있어 좋고, 또한 가난한 아이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어 너무 기쁘다고 했다. 그는 또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너무나 좋지만, 머릿속 이론으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며, 추상적이지 않고 현실적인 설교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말씀이 실생활에 이뤄질 때까지 무슨 일에든 중간에 평가하려 말고, 말씀을 보고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라고 강조했다. 그 말씀의 열매들을 분명히 거둬 본 체험들이 확실하기에 그의 설교는 힘이 있다. 그는 이후에 하나님 주신 복음을 인근에 소재한 안동대나 경북대 상주캠퍼스 대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열망을 갖고 있다.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야 할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자신이 받은 은혜를 더 많이 전해주고 싶은 열망 때문이리라. 그의 나이 50대 중반, 세월이 유수처럼 빠르다는 것을 느끼기에 더욱 시간의 소중함을 생각하고 믿음으로 달려가길 열망하는 김 목사의 꿈이 주님 안에서 조속히 이뤄지길 두 손 모아 기도해 본다. 김 목사의 가족으로는 강은숙 사모와 2남인 정혁(대전침례신학대학원 재학), 창혁(대학 2년)이 있다. 국사골양봉농원(대표 김경환 목사 010-3795-2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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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제일교회, 박영호 담임목사 위임식 개최▲ 위임식에서 선서하는 박영호 목사 포항제일교회 박영호 담임목사 위임식이 지난 14일 본교회당에서 진행됐다. 이날 오후 5시에 시작된 ‘제16대 포항제일교회 박영호 목사 위임예식’에는 김정재 국회의원, 이강덕 포항시장, 조중의 포항CBS 본부장, 교계 지도자와 교인 등 1,500여 명이 참석했다. 제1부 감사예배는 예장통합 포항노회장 박석진 목사의 인도로 드려졌으며, 강양훈 장로(부노회장) 기도, 김계주 목사(포항시찰장) 성경봉독, 연합찬양대 찬양 후 김지철 목사(서울소망교회)의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 제하의 설교가 이어졌다. 김 목사는 설교에서 “목사에게는 ‘말씀과 사랑’이란 두 가지의 권위가 있어야 한다”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과 나눌 때 목사에게 권위가 생긴다”고 말했다. 이어 “성도들을 사랑하고 기도하고 위로할 때 권위가 생긴다”고 했다. 또한, 김 목사는 대한민국을 넘어 지구촌 곳곳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적 역할을 감당하는 포항제일교회가 되기를 축원한 뒤, “각종 사역을 성령의 역사에 맡길 것”을 당부했다. 이어 제2부 위임예식은 박석진 목사의 집례로 진행됐으며, 서약, 위임기도, 선포, 신성환 목사의 권면, 황수석 목사의 권면, 허원구 목사와 김종렬 목사의 축사, 박영호 목사 답사 등의 순서가 있었다. 박영호 목사는 부산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장로회신학대학교와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시카고대학교에서 신약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또한, 2005년에는 시카고 약속의교회를 개척했으며, 2015년부터 최근까지 한일장신대학교 신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박영호 목사는 “부족한 저를 불러 주시고 이 자리에 설 줄 있도록 해주심에 감사한다”며, “목사다운 목사가 되겠다. 열심히 달려가겠다. 부족한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길 원한다”고 말한 뒤 기도를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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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 김광열 교수 총장직무대행 선임김광열 교수(총신신대원 조직신학)가 총신대 총장(직무대행)의 직무를 감당하게 된다. 총신대학교 법인이사회(이사장 김동욱 교수)는 지난 16일 김광열 교수(조직신학)를 총장직무대행으로 임명했다. 앞서 지난 13일 법인이사회는 임시로 15일까지 심상법 교수를 총장직무대행에 임명했다가 이날 김 교수를 정식 대행으로 다시 임명했다. 이는 심상법 교수가 현재 경력이 가장 오래된 교수이기는 하지만, 총신대 내부 구성원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사회를 앞둔 11일과 12일 총신대 학생·교수 등으로 구성된 내부대책위원회와 총동문회는 성명을 발표해 “심상법 교수는 지난 10년간 김영우 총장의 뜻을 받들어 학사 행정 파행에 앞장서 온 당사자”라고 규탄한 바 있다. 당시 13일 이사회에선 대학 부총장에 김광열 교수, 신학대학원 부총장 겸 신학대학원장에 이상원 교수, 목회신학전문대학원 포함 6개 대학원장에 정희영 교수가 각각 임명됐었다. 이들의 임기는 모두 2018년 10월 15일부터 2020년 10월 14일까지 2년이다. 또 이사회는 김영우 전 총장뿐만 아니라 교육부 징계 대상자인 전직 부총장들과 원장 등 관계자들을 직위 해제했다. 이어 이사와 교수 등 8인으로 교직원징계위원회를 구성해서 교육부가 징계대상자로 선정한 27명의 교직원에 대한 징계 수위를 결정하게 했다. 한편, 지난 5일 1심 법원에서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된 김영우 전 총장은 최근 항소장을 법원에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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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식 목사 초청, 포항동부교회 10월 17일부터 3일간 심령대부흥회▲ 김의식 목사(서울 치유하는교회 담임) 포항동부교회(담임목사 김영걸)는 지난 17일 오후 7시 교회 본당에서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를 주제로 심령대부흥회를 열었다. 부흥회는 19일 오후 7시까지 매일 오전 5시, 오후 7시 두 차례씩 모두 5회 이어졌다. 이번 부흥회는 김의식 목사(서울 치유하는교회·사진)가 ‘상한 마음의 치유’, ‘어디서 떨어졌는가’, ‘행복한 가정의 회복’,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란 제목으로 설교를 한다. 김 목사는 한양대 공대와 성서침례신학교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 신학대학원과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미국 시카고 신학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 목사는 호남신학대 교수, 장로회신학대 겸임교수, 미국 미드웨스트 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영등포노회 노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치유하는교회 담임목사, 세계치유선교회장,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제103회 총회 서기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편, 포항동부교회는 지난 9월부터 “엎드려 기도하고 일어나 전도하자”라는 주제로 ‘제1차 새생명 대행진’을 진행하고 있으며, 10월 28일에는 ‘정재준 장로(안산중앙교회) 초청 전도간증집회’를, 11월 4일에는 ‘조혜련 초청 연예인간증집회’를 계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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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애굽기(4)나의 출애굽기(4) 드보라 11. 대학생 시절, 남편과의 첫 만남 대학 생활 중에 가장 중요했던 일이라고 한다면 남편을 만난 것이었다. 그 당시 우리 집은 꽤 살림살이가 괜찮았다. 집에서 술도 만들어 이웃에게 팔기도 했다. 옆집 아줌마는 우리 집에 술 받으러 자주 오셨었는데 오실 때마다 나에게 자기 시동생을 소개해주고 싶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나는 그리 귀담아듣지 않고 웃어넘기곤 했다. 그런데 하루는 아주머니가 억지로 심부름 거리를 만들어서 나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셨다. 가보니 이웃집의 가족들이 모여 있는데 그 중 눈에 띄는 청년이 한 명 있었다. 까까머리의 훤칠한 청년이었다. 아주머니는 그 청년과 가족들에게 나를 소개하셨다. 심부름을 마치고 집에 가려는데 그 청년이 문을 열고 나와서는 씩씩하게 인사를 했다. 아주 우렁찬 목소리였다. 알고 보니 아직 군 복무 중인데 휴가를 나왔다고 했다. 그 당시 연예와 결혼 문화 풍토에서 자유연애는 매우 생소한 것이었고 이렇게 이성을 직접 소개받는 일은 처음이었기에 나는 이런 분위기가 너무 어색했지만 씩씩한 청년의 모습이 싫지만은 않았다. 나중에 첫 만남 때 어땠냐고 물어봤더니 첫인상이 매우 여자답다 생각했다고 한다. 그 청년은 아직 군 복무가 남았기에 부대로 복귀했지만, 곧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이성으로부터 편지를 받는 기분은 참 묘했다. 청년은 자기가 몇 년 만 지나면 제대니까 꼭 기다려 달라 했다. 그 당시 갓 20대가 된 내 가슴은 괜스레 콩닥콩닥거렸다. 12. 나의 결혼을 반대하신 아버지 그렇게 편지를 주고받는 와중에 시간은 흐르고 나는 대학을 졸업하였다. 졸업하고 유치원에 배치를 받아야 하는데 하필 빈자리가 없어서 동네 농장 유치원으로 배치를 받았다. 그렇게 시골 농장 유치원에서 교사로 있는데 갑자기 그 남자한테 연락이 왔다. 예정보다 빨리 제대가 됐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를 소개해 줬던 그 남자의 형수가 이제 대학도 졸업하고 다른 집에서 며느릿감으로 눈독 들일 텐데 돈을 쓰더라도 빨리 제대를 하라 해서 우여곡절 끝에 제대한 것이다. 그 당시 결혼은 남녀 간의 일대일의 연애사라기보다는 가족과 부모 사이의 일이었다. 아버지는 우리의 연애사실을 모르고 계시다가 나중에 아셨다. 평소에 그 남자를 씩씩하고 바른 청년이라고 좋아는 하셨지만 공교롭게도 그 집은 대대로 남자들이 술을 너무 좋아하는 집이었다. 당장 그 남자의 형도 거의 알코올 중독 수준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는 옆집 사람에 대한 신뢰가 없으셨고, 그 청년도 사위로는 생각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내가 아버지께 말씀드리기도 전에 아버지는 우리가 연예하는 것을 알게 되셨다. 주고받았던 편지가 들킨 것이다.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셨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 집사람들에 대한 믿음이 없으셨던 것도 있지만, 언니보다 내가 먼저 결혼하려고 하는 것을 아버지는 매우 못마땅해 하셨다. 그 당시 언니는 대학을 못 간 대신 5과 대상이라고 해서 국가에서 뽑혀갔다. 5과는 소위 말하는 얼굴이 반반한 여자들을 국가에서 뽑아서 위문이나 서비스업에 배치하는 것이다. 언니는 그렇게 평양으로 불려가서는 한동안 소식이 없었다가 나중에 지방에 어느 군부대 인근으로 발령받았다고 알려왔다. 여하튼 언니가 5과에서 제대되기 전에 동생이 먼저 결혼하게 생겼으니 아버지의 평소 가치관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13. 어려움을 딛고 결혼에 성공하다. 이런 상황인데도 그 청년이 옆집에 살다 보니 아버지는 청년 얼굴을 안 볼 수가 없으셨다. 그리고 만날 때마다 씩씩하고 우렁차게 인사를 하는 그이에게 아버지는 이전 같으면 하지 못할 욕을 막하시기 시작했다. 그래도 꿋꿋이 웃으며 인사하던 그이도 참 굳센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이는 결혼하기 위해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헤어지라는 우리 아버지의 말에 그이는 헤어지느니 차라리 양잿물을 먹고 죽겠다 하며 아버지 보는 앞에서 난리를 쳤다. 평소에 씩씩하고 바른 모습만 보였던 청년이 저렇게 고집을 부리니 아버지는 처음에는 너무 황당해 하셨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했던가… 이렇게 평행선을 달리던 상황은 결국 아버지의 허락으로 마무리되었다. 죽더라도 결혼해야겠다던 그이의 고집이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다. 결국은 나는 언니보다 먼저 결혼을 했다. (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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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애굽기(3)나의 출애굽기(3) 드보라 8. 딸이 대학 가는 것을 반대하신 아버지 그렇지만 아버지의 태도는 모순적인 면이 있었다. 그렇게 여자가 공부하는 것을 반대하시면서도 언니는 대학을 보내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언니는 공부를 그리 잘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언니에게 경제나 회계 관련 공부를 하면 좋겠다 생각하셨다. 그래서 언니를 경제 관련 대학에 보내기 위해 억지로 학교 교장선생님 등하고 뒷문으로 사업을 해서 뇌물도 건네주었다. 당시 러시아 빵이 귀했는데 그 빵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그렇게 겨우 대학 입학권을 하나 따내고 언니는 대학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그러나 공부가 부족한 가운데 무리해서 시험을 봤던 언니는 결국 시험을 망치고 말았고 입학도 하지 못했다. 이 일을 겪고 나자 아버지는 분이 나셔서 ‘에잇, 여자는 공부시키는 게 아니야’하고는 나를 공부시키려고 하지 않으셨다. 결국 내가 대학 갈 때가 되자 집에서 논란이 있었다. 부모들은 항상 나를 제외하고 남동생과 언니 위주로 챙긴다는 생각에 나는 더 반항적으로 행동했고, 부모님은 나를 대학 보낼 생각도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갈등은 더 깊어졌다. 9. 유치원 교사를 꿈꾸다 … 교원대학에 지원 그래도 대학은 꼭 가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유치원 교사가 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에서 대학 지망을 쓸 때도 1-3순위 모두 교원대학을 썼다. 사실 점수를 생각하면 1순위에는 더 좋은 학교를 써야 했다. 보통 평양이나 수도권 대학은 1순위, 지방 주요 도시의 저명한 대학은 2순위였고 내가 가려고 했던 지방 교원 대학은 3순위 정도였다. 그러니 선생님께서도 1-3순위를 왜 다 같은 곳을 썼나며 의아해하셨다. 그렇지만 나는 이상하게 어린이 교사가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학교를 지원하고 교원 대학 시험을 보았다. 약 1주일 동안 면접을 포함해서 시험을 보았다. 이때 또다시 나는 부모님께 섭섭함을 느꼈다. 언니 때는 아버지께서 손수 여관방을 잡아서 1주일 동안 함께 지내며 언니를 챙겨주시더니 내가 시험 볼 때는 출장 가신다고 그냥 버려두셨기 때문이다. 출장 때문에 못 오신 것이긴 했지만, 그것이 아니어도 오시지 않으셨을 것이 확실했다. 특히 대학 면접에는 부모도 함께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나는 혼자 면접관 앞에 못 오신 부모님 사정을 거짓말로 만들어서 설명하기 급급했다. 화가 났다. 그렇게 시험을 보고 왔더니 아버지는 출장 갔다가 돌아오셔서 교원 대학 시험을 봤다고 나에게 화를 내셨다. 여자 대학생들이 다 그렇지만 그중에 선생이 제일 입이 여물고 고집스럽다고 하시면서 나를 나무라시고는 평소 입버릇처럼 “대학을 졸업해도 팔자 안 풀린다. 시집을 잘 가야 된다.”고 말씀하셨다. 나중에 들어보니 아버지께서는 출장을 다니시면서 해안지역에 처자들이 염전에서 소금 밀차를 끌면서 고생하시는 것을 보셨는데 그 여자들이 다 대학 졸업한 여자였다고 한다. 그런 광경을 보고 아버지는 ‘여자가 공부보다 결혼을 잘해야 하는데, 괜히 많이 배워서 입이 모질면 좋은 혼사 자리를 얻을 수 있겠는가’하는 생각이셨던 것 같다. 10. 가난한 대학생 시절 어쨌든 나는 대학 합격했다. 교원 대학에서도 소학교 교사가 아닌 유치원 교사 공부를 했다. 학업 기간 2년에 훈련 6개월 해서 총 2년 6개월의 대학생활이었다. 북한은 대학 등록금은 없었다. 그대신 학교 기숙사 밥이 형편없어서 늘 배고팠다. 나는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같이 지내는 친구들 중 농사짓는 시골이 고향인 친구들은 주말에 집에 갔다 오면 군것질거리로 옥수수나 콩 볶은 것을 한 움큼씩 가져오곤 했다. 그러면 그것을 숙소에서 나눠 먹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무리에 끼지 못했다. 집에서 챙겨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집에 갔다 올 때마다 나는 그 조그마한 간식거리를 가져가지 못해서 그냥 울면서 왔다. 염치가 없어서 애들이 간식 나눠 먹을 때 공부만 했다. 그러다 보니 친구도 많이 못 만들었다. 이렇게 1년을 지내니 나중에는 그래도 자식이라고 어머니께서 조금씩 간식과 용돈을 챙겨주셨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내가 대학 공부 하는 것을 싫어하셨다. (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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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애굽기(2)나의 출애굽기(2) 드보라 5. 외할아버지에 대한 회개 기도 나는 한국에 왔을 때 ‘가족 중에서 내가 처음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남한에 와서 사는구나, 집에서 따돌림 왕따 차별받았는데 내가 드리어 쓰임 받는구나!’라고 생각했었다. 성경을 읽으면서 나는 특히 요셉 이야기에 감정이입을 많이 했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버림받았지만 결국에는 크게 되고 쓰임 받았던 요셉과 같이 하나님께서 가족들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나를 요셉과 같이 이끄신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모임에서 목사님이 보여주신 책 사진을 볼 때 하나님은 나를 깨우쳐 주셨다. 바로 외할아버지의 기도와 헌신이 나를 하나님께로 인도했고, 이 땅에 오게 했고, 통일의 비전을 꿈꾸게 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자는 중에 꿈인지 환상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중에 생생한 장면 하나를 보았다. 김일성 초상화를 바닥에 엎어놓고 무릎 꿇고 엎드려 예배하는 외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여 나는 벌떡 잠에서 깨었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나는 내가 사랑받지 못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형제들에게 버림받았던 요셉인 줄 알았는데, 그리고 나중에 가족을 구원할 믿음의 첫 사람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 핍박 속에서도 기도하셨던 할아버지의 기도가 나를 살게 했다. 나야말로 외할아버지의 눈물의 기도 열매였고, 정말 큰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다. 사실 전혀 사랑받을 자격 없었던 내가, 어릴 적부터 질투와 욕심, 짜증만 부리던 자였던 내가 그 사랑을 받았다는 감동에 나는 회개와 감사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고난 중에 가족에게도 나누지 못한 채로 그렇지만 믿음을 지키신 외할아버지를 생각하며 눈물로 고향을 위해 기도했다. 내 안에 남아있던 쓴 뿌리들이 그 눈물 속에 씻겨져 나갔다. 안타깝게도 그 당시에는 그러한 사실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6. 북한에서의 학창시절 그 당시 북한은 그래도 경제 사정이 괜찮았다. 어릴 적만 해도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김일성 수령을 신으로 받드는 북한의 교육과 사상통제 안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아니 하나님을 모욕하며 살았다. 나도 역시 김일성 수령을 민족의 어버이요 신과 같은 존재로 믿고 그렇게 살아왔다. 외할아버지의 눈물 어린 기도가 있었는지 전혀 모른 채, 사람이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임은 꿈에도 알지 못한 채 살았다. 나는 여전히 가족들은 날 미워한다 생각하며 심술을 부리면서 그렇게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갔다. 집과 학교의 이중생활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항상 집에서는 말썽꾸러기, 천덕꾸러기였지만 학교에서는 공부 잘하는 상당히 성실한 학생이었다. 그 당시 학교에서는 외국어로 2개 반을 운영했다. 러시아어 반과 영어 반이었는데 나는 영어 반을 선택했었다. 그 당시에는 영어가 우리가 그토록 증오하는 미제가 사용하는 언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고 그저 영국에서 쓰는 언어라고만 알고 있었다. 배웠던 영어 발음도 영국식이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6학년 졸업이 2년 남은 4학년 때부터 시험을 보고 경연을 해서 뛰어난 학생들을 추렸다. 그리고는 그 학생들을 따로 모아서 공부를 시켰다. 북한의 학교가 여기서 말하는 비평준화 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학교 체면이 중요하다 보니 좋은 대학을 많이 보내려고 했다. 내가 있던 학교는 한 학년에 약 200~300명 정도 됐는데 그중에 1반 정도를 수재반으로 따로 구분을 시켰다. 7. 딸의 교육을 반대하신 아버지 나는 평소 좋은 학업 성적 덕분에 그 반에 들어가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집에서는 내가 공부하고 또 대학 가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머릿속에 여자 대학생들은 ‘집안 살림은 안 하고 입만 여물어서 남자를 깔보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러시아에서 돌아오신 뒤에 배치받은 직장은 외부 출장이 잦았는데, 출장 다니시면서 여자 대학생들을 이리저리 지나칠 기회들이 많으셨다고 한다. 그렇게 요즘도 그렇지만 그 당시 아버지 세대에는 남존여비사상이 심했다. 아버지는 그래서 공부에 대해 부정적이셨고 집에서 생활 살림이나 잘하라고 하셨다. 집에서 공부를 못하게 해서 나는 숙제도 학교에서 다 해서야 귀가할 수 있었다. (오픈도어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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