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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강동교회 국광승 목사 위임식 열려구미강동교회의 국광승 목사 위임식이 지난 11월 25일(토) 오전 11시 본 교회당에서 내빈과 축하객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축하 내빈으로는 김영식 국회의원(구미시‧을), 도의원, 시의원, 기관‧단체장, 경북노회장 서성수 목사를 비롯한 노회 임원, 경북노회 산하 목회자와 장로, 부산 수영로교회 교인 등이 함께했다. 1부 예배는 위임국장 김성길 목사(인동교회)의 인도로 드렸으며, 전용남 목사(신월교회)의 기도, 이성하 목사(기성교회)의 성경봉독 후 김재현 목사(오산제일교회)가 “진짜 교회를 꿈꾸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김재현 목사는 “초대교회는 가르치기에 힘썼고, 떡을 떼는(교제하는) 사역을 했고, 오직 기도하기에 힘쓰는 교회였다”면서 “국광승 목사가 사역하는 구미강동교회가 초대교회를 모델로 삼고, 말씀과 기도, 교제에 힘씀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교회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어 2부 목사위임식이 진행됐다. 국광승 목사는 “구미강동교회에 대하여 충심으로 목사의 직분을 다할 것”을 서약했고, 교우들은 “국광승 담임목사의 교훈을 받으며 치리에 복종할 것”을 서약했다. 이에 김성길 목사는 국광승 목사가 구미강동교회 위임목사가 된 것을 공포했고, 위임목사와 교우들에 대한 권면을 임용택 목사(동명교회)와 조무웅 목사(동신교회)가 했다. 축하 및 감사 시간에는 위임패 증정, 예물 증정, 축사, 격려사, 수영로교회 교역자 일동의 축가 후 경북노회장 서성수 목사가 축도했다. 국광승 목사는 “언제나 성령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기도로 씨름하고, 성도들과 사랑과 기쁨의 교제를 나누는 목사가 되겠다”면서 “구미강동교회가 복음으로 충만하여 예배마다 감격과 기쁨이 넘치고, 지역사회와 열방을 섬기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고 인사했다. 한편, 국광승 목사는 부산경성대학교 음악과(첼로) 졸업, 미국가톨릭음악대학 음악과(첼로) 석사 졸업 후 총신신대원 목회학석사(M.div)를 졸업했으며, 부산 수영로교회에서 사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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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군, 군도11호선(기성∼봉산간) 연차적으로 개설 추진기성교 건설사업 준공으로 미개통 구간 개설 추진 탄력 ▲기성교.(사진=울진군 제공) 울진군(군수 전찬걸)은 군도11호선(평해읍 직산2리∼기성면 망양2리)의 미개통 구간인 기성면 기성리에서 봉산1리 사이의 지방하천(척산천)을 횡단하는 기성교를 지난 5월 준공하였다. 군도11호선(직산∼망양) 구간에 있는 기성교 건설사업은 2018년 9월에 기본 및 실시설계를 완료하고, 2018년 12월에 착공하여 2년 5개월 만에 완공하였으며, 연장 L=145m(B=8.0m, 2차로), 총사업비 37억5천만 원이 투입되었다. 이번 기성교 건설사업으로 향후 군도11호선 미개설 구간(기성면 기성∼봉산) 개설에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군도11호선의 미개설 구간공사는 총연장 1.2km, 총사업비 88억 원이 투자되는 사업으로 해당 도로가 개설되면 단절된 해안도로가 전 구간 연결되어 관광객 유치는 물론, 우회도로 기능으로 농수산물 운반 등 교통소통에도 크게 기여할 전망이다. 표남호 건설과장은 “이번 기성교 건설로 지역주민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기성리에서 봉산1리 미개설 구간 1.2km를 연결하는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향후 잔여구간 공사에 국·도비를 지속적으로 투입하여 편입토지 및 지장물 보상 시행 후 연차적으로 사업을 시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혜경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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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CBS ‘신천지상담사 양성 아카데미’ 개강60여 상담사 배출 지역교회로 파송 ▲제1기 신천지상담사 양성 아카데미(2020.6.25.~8.6).(사진 대구 CBS 제공) 대구CBS(대표 정인효)가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신천지)에서 탈퇴한 신자들을 치유하는 상담사 훈련프로그램인 ‘신천지상담사 양성 아카데미’를 10월 29일 개강한다. 지난 2월 코로나19로 대구·경북의 신천지 신도가 10% 이상 탈퇴한 것으로 추산되는 가운데, 대구CBS가 이탈 신천지 신자를 기성교회로 수용하도록 돕기 위해 한국기독교이단상담소협회(회장 진용식 목사)와 함께 신천지상담사 양성아카데미를 개최하고 있다. 지난 8월 처음 개강한 아카데미에서는 60여 명의 신천지 상담사들을 양성해 지역교회로 파송한 바 있다. 29일 개강하는 제2기 신천지상담사 양성 아카데미는 목회자, 사모, 신학생, 장로 및 새가족 담당자 등을 대상으로 7주간 교육을 실시하며, 선착순 100명을 모집하고 있다. 아카데미에는 진용식 목사, 신현욱 목사, 김종한 목사, 이동헌 목사 등이 이단상담학, 구원론, 신천지상담 등을 강의한다. 입학원서 및 관련 서류는 이메일(dgcbs@cbs.co.kr)로 받으며, 대구CBS 총무국(053-426-8001)으로 문의하면 안내받을 수 있다. 이혜경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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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예배 편리해도 현장예배 선호합니다”기성교단 설문조사, 41%가 온라인 예배 “불만족스럽다” 답해 <자료: 한국성결신문> 코로나19 사태로 많은 교회가 현장예배와 온라인 예배를 병행하고 있는 가운데, 성도들은 대체로 온라인 예배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현장예배만큼 집중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총회장 한기채 목사, 기성) 교단지인 <한국성결신문>이 창간 30주년을 기념해 교단 내 목회자와 성도를 대상으로 ‘코로나19 이후 신앙의식 변화와 교회의 대응’에 관해 온라인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총 2,555명이 참여해 응답한 이번 설문에서 온라인 예배 만족도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41%가 “불만족스럽다”고 답했다. 이는 “만족스럽다”(24.2%)의 두 배에 가까운 수치다. 불만족의 이유(복수응답)는 ‘현장예배만큼 집중할 수 없어서’(71.6%), ‘예배의 현장 생동감이 떨어져서’(65.1%), ‘성도들을 직접 만날 수 없어서’(46.1%), ‘예배는 교회에서 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28.1%) 등의 반응을 보였다. 만족의 이유 중 가장 많은 지지를 얻은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의 소중함을 일깨워서 좋았다’(66.7%) 의견도 역시 현장예배에 대한 갈급함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 외에 ‘장소 제약이 없어서 좋았다’(45.6%), ‘가족이 함께 예배를 드려서 좋았다’(36.4%), ‘주일날 시간이 많이 남아 여유가 있어서 좋았다’(23.1%) 등의 이유로 온라인 예배 만족을 표시했다. 코로나19 이후 교회가 직면할 가장 큰 어려움으로는 ‘모이는 예배 감소와 주일성수 약화’(37.7%), ‘성도 간 교제 및 공동체성 약화’(32.6%)를 우려했다. 코로나19 이후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에 대해서는 ‘예배의 중요성 등 신앙 기본의식 재정립’이라는 응답이 67.7%로 가장 높았다. 이번 설문조사는 지난 6월 16일부터 22일까지 온라인을 통해 실시했다. 직분별 참여 비율은 장로가 29.6%로 가장 많았고, 오차 범위는 95% 신뢰 수준 시 ±1.94% p이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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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에 ‘신천지상담사 양성 아카데미’ 운영대구CBS‧한상협 공동주최, 6월‧10월 7주 과정 개설 대구·경북지역에서 처음으로 신천지 상담사를 양성하는 과정이 열린다. 대구CBS(대표 정인효)는 한국기독교이단상담소협회(한상협, 회장 진용식 목사)와 공동으로 코로나19 이후 이탈 신천지 신도를 기성교회로 수용하기 위한 ‘신천지상담사 양성 아카데미’를 운영한다. 대구시와 한상협 등에 따르면 코로나19 사태를 겪은 신천지 신자들이 대구·경북 신천지(다대오 지파)의 경우 많게는 30%, 적게는 10%(약 1,400명) 정도 이탈할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에 대구CBS는 그동안 수도권과 전국 각 지역에서 ‘이단 상담사’를 배출해온 한상협과 함께 대구·경북 신천지 상담사를 양성하기로 하고 추진하고 있다. 이번 아카데미에는 진용식 목사, 신현욱 목사, 김종한 목사 등 한국기독교이단상담소협회 관계자들이 이단상담학, 구원론, 신천지상담 등을 강의한다. 변상욱 YTN 앵커와 대구이단상담소장 이동헌 목사도 특강을 한다. 신천지상담사 양성 아카데미는 6월 25일~8월 6일, 10월 29일~12월 10일, 2회에 걸쳐 7주 과정으로 대구 대명교회에서 진행한다. 수강대상은 목회자, 사모, 신학생, 새가족 담당자 등이다. 선착순 100명이며, 대구CBS 총무국(053-426-8001)으로 문의하면 안내받을 수 있다. 이예진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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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전도의 불을 지핀 사람, 정재순 목사(4·끝)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정재순 목사(鄭在淳, 1878~1948) 11. 청소년 기독교학교의 설립자(設立者), 정재순 안동으로 이임하기 전 경산과 대구에서 기독교 초등학교의 교사로 근무한 적이 있었던 정재순 목사는 누구보다 교육에 관한 많은 관심이 있었다. 당시 안동교회는 이미 1911년 안동 최초의 여자 학생을 위한 초등학교인 계명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계명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신앙과 무관한 공립학교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중등학교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따라서 부임한 지 2년이 경과한 1924년 4월, 정재순 목사가 의욕적으로 추진하여 경안중학원이 설립되었다. 경안중학원은 오늘날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포함한 중등교육기관으로 경안노회 산하기관으로 편성하여 경안노회가 운영토록 했다. 이때 노회가 결의한 내용은 경안중학원의 발기인은 경안노회 경내의 교역자로 하고, 운영자금은 10세 이상 교인마다 의무금은 50전(1100환)으로 하고, 그 외 생일연보와 특별연보도 학교운영을 위한 예산으로 편성했다. 특히 학생들이 납입해야 하는 입학금과 월사금은 2300환으로 정했다. 초대교장에는 당시 안동교회 담임인 정재순 목사, 교사는 4명, 학생 수는 무려 100여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경안중학원은 오래 지속할 수 없는 한계가 내재해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학교운영에 필요한 재원의 부족이었다. 당시 각 교회는 부족한 재정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더욱이 안동선교부의 외부지원 없이 중등교육기관을 운영한다는 것은 당시 교회 형편으로 볼 때 힘겨운 일임에 틀림없었다. 이에 1926년 제10회 경안노회에서는 안타깝게도 경안중학원의 폐교를 보고하게 된다. 하지만 경안중학원이 설립된 지 30년 만인 1954년 경안노회 설립인가를 받고 경안고등학교가 개교하였으며, 1961년에는 경안중학교가, 1966년에는 경안여자중학교와 경안여자상업고등학교가 개교하였다. 따라서 정재순 목사가 30년 전에 시작한 경북북부지역의 중등학교의 꿈이 비로소 이루어져 수많은 기독교 인재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12. 교회의 질서(秩序)를 세운 사람, 정재순 초기 한국교회는 철저한 권징과 치리를 통해 교회의 질서를 잡아갔다. 초기 한국교회 권징의 특징은 올바로, 공평하고, 바르게 행해진 권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재순 목사 역시 성도들이 성경이 제시하는 길을 가지 않으면 책벌을 통해 방향을 수정할 수 있게 했다. 당시 안동교회의 당회록에 따르면 교회에서 행한 책벌의 이유는 다양했다. 예를 들면, 부부 사이에 불화가 있으면 교회는 그들을 당회로 불러 화해를 권면하거나 책벌하여 화평한 가정을 이루어 가도록 개입했다. 또한, 주일성수를 못하는 교인들을 책벌하거나 권징함으로써 성도의 의무를 다하게 했다. 그 외에도 교회법을 따르지 않고 세상적으로 결혼예식을 한 경우, 중직자의 자녀가 방탕한 생활에 빠져 죄를 범한 경우, 교인 사이에 불화가 생긴 경우, 일상생활 속에서 교인의 생활에 어긋난 행위들도 예외 없이 책벌의 대상이 되었다. 교회법에서 권징의 목적은 잘못을 한 형제를 교정하고 다른 형제들이 잘못하지 않게 하는 데 있다. 권징은 교회를 든든히 세우고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다. 안동교회는 당회가 조직된 이후 권징을 통해 교회의 질서를 잡아갔다. 정재순 목사는 안동교회에서 시무한 3년 동안 죄를 범한 교인들을 차별 없이 공평하게 치리함으로써 안동교회를 든든히 세워가는 기초를 닦았다고 할 수 있다. ▲1913년 7월 20일 김병우 장로가 장립함으로써 안동교회는 안동지역 최초의 당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안동교회의 역사적인 첫번째 당회는 초대장로인 김병우 장로가 기도함으로8월 9일에 개회되었다. 13. 부인이 전도의 동역자(同役者)인 사람, 정재순 정재순 목사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사도 바울처럼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던 복음전파자였다. 마찬가지로 그의 부인인 손주안(孫主安) 사모도 생명을 걸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에 순종했던 믿음의 사람이었다. 정재순 목사의 부인인 손주안은 사모보다 전도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사모로서 단순히 남편을 돕는 역할을 넘어 보다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인의 사명을 누구보다 잘 감당한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안동교회를 사임하고 대구 동산병원 직원전도회 담당목사로 사역한 1925년 6월부터 1937년 3월까지 정재순 목사는 28개 교회를 개척했다. 마지막으로 의성의 두 교회를 개척한 것은 그의 나이 60세가 되던 해이다. 정재순 목사는 경상북도 거의 전 지역인 청도, 영천, 경산, 달성, 고령, 월성, 경주, 영일, 칠곡, 상주, 군위, 선산, 의성군 등에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사역을 감당했다. 교통환경이 열악한 당시 상황을 생각해보면 정재순 목사가 감당한 사역범위는 매우 넓어 마치 해외선교사의 사역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정재순 목사가 설립한 교회는 고모교회, 삼창교회, 기계교회, 덕지교회, 봉곡교회, 구릉교회, 삼귀교회, 예리교회, 금암교회, 조암교회, 방촌교회, 구촌교회, 대천교회, 대제교회, 기성교회, 입실교회, 양촌교회, 유금교회, 경동교회, 유동교회, 와동교회, 삼산교회, 평지교회, 석우교회, 음지교회, 화령교회, 서제교회, 오로교회이다. 그런데 손주안 사모는 정재순 목사가 개척한 28개 교회 중에서 무려 10개 교회를 함께 개척하고 돌보았다. 손주안 사모는 정재순 목사와 동산병원을 섬겼을 뿐 아니라 대구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위치한 도시에 교회들을 개척하고 돌보았던 것이다. 그는 자기 부부가 개척한 교회가 든든한 교회로 세워지기를 소원하며 어머니의 마음으로 자식처럼 사랑하며 헌신적으로 섬긴 참된 복음전도자였다고 할 수 있다. 결론 정재순 목사는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사역자였다. 복음을 위해 생명을 건 하나님의 종이었다. 그가 행한 거룩한 사역은 참으로 많다. 그는 부해리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수용하고 예수를 영접한 이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았다. 그는 단 한 순간도 교회를 떠나본 적이 없는 교회를 위한, 교회의 사람이었다. 정재순 목사는 교회가 지역사회 속에 있음을 인식하며 주민을 위한 사역을 숙고했던 인물이다. 그 결과 청소년을 위한 경안중학원을 설립했다. 그가 다니는 곳에는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 또한, 그는 치밀한 계획을 세워 안동 땅을 복음화시킨 전도전략가였다. 안동에서 사역을 마친 정재순 목사는 부인 손주안 사모와 함께 거의 경상북도 전 지역인 청도, 영천, 경산, 달성, 고령, 월성, 경주, 영일, 칠곡, 상주, 군위, 선산, 의성군 등에 교회를 개척하는 복음전도자로 살았다. 또한, 그는 첫 담임목회지인 신정교회에서 거룩한 사역을 마감했다. 그는 목회 전반전과 동일하게 목회 후반전에도 복음을 위해 불꽃을 불사르며 살았던 열정의 사람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신실한 주의 종, 정재순 목사가 걸어온 길은 참으로 고단한 길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그의 삶은 때로 감옥에서 생활하게 했으며, 복음에 대한 열정은 60이 넘어서까지 먼 길에 찾아가 교회를 개척하고 성도들을 돌보게 하였다. 그는 일평생 변방에서 예수의 참 제자로 살았다. 1878년 출생한 정재순 목사는 부르심에 감사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다가 1948년 71세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에 입성하였다. ▲정재순 목사와 손주안 사모. 전도부인처럼 손주안 사모는 남편 정 목사를 도와 경산, 영천, 성주, 달성, 월성, 청도, 상주, 칠곡 등에 있는 힘들고 어러운 형편에 있는 작은 교회들을 돌보았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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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전도의 불을 지핀 사람, 정재순 목사(2)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 정재순 목사 (鄭在淳, 1878~1948) 4. 선교사의 동역자인 조사(助事), 정재순 부해리 선교사의 전도로 회심하고 예수를 믿게 된 정재순은 기독교 학교의 교사로 활동하다가 교회를 돌보는 조사로 사역하게 된다. 1908년에는 방혜법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상주 속산교회, 사산교회, 금혼교회, 등 상주지역에서 시무했다. 1909년에는 안의와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경산 삼복교회(현 경산교회), 사월교회, 전지교회(현 남산교회), 금곡교회, 복사교회(현 자인교회)를 섬겼으며, 1912년 경산 사월교회, 전지교회, 복사교회, 대구신정교회(현 서문교회)에서 조사로 활동했다. 그 당시 조사(助事, Helper)는 초기 한국교회가 든든히 세워지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들은 선교사의 가옥, 선교사들이 설립한 학교나 병원에서 일했으며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이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선교사들의 따뜻한 사랑과 헌신을 발견하고 최초의 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적으로 복음전파에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선교사들의 통역자 역할을 했고, 선교사 대신 일정 지역을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훗날 많은 조사들이 교회를 전적으로 섬기는 주의 종으로 부름을 받고 목회자가 되었다. 장로교 선교사의 조사요 지역 교회의 장로로 수년 동안 이미 교회사역에 충성을 다하고 있던 정재순도 이 공식에 예외 없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5.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노(老)학생, 정재순 정재순은 1912년 봄, 35세 나이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정재순은 1912년 3월 6일 대구남문교회당에서 모인 제1회 경상노회에 입학을 청원하였고, 허락을 받았다. 이때 경상노회에 신학입학을 청원하여 허락을 받은 사람은 정덕생, 김기원, 서성오, 김공명, 박영조, 정재순, 김상삼, 박성애, 박덕일, 김응진 제씨였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정재순은 3년간의 신학 교육을 받았으며, 1915년 6월 15일 평양신학교 제8회로 졸업하였다. 평양신학교는 ‘신령(神靈)한 목사’라는 교육목표처럼 교역자 양성을 위하여 1901년 평양 대동문 옆 마포삼열 자택에서 개교되었다. 1938년 1학기를 끝으로 폐교되기까지 34회 졸업식이 거행되었는데, 37년 동안 총 798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제8회 평양신학교 졸업생은 28명이다. 이때 뛰어난 인물들이 배출됐는데, 이자익, 방효원, 정재순 제씨가 바로 그들이다. 1915년 제8회 평양신학교 졸업 앨범으로 사진 중앙에 교사로 수고한 선교사들이 있고, 그 주위로 졸업생들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정재순 목사는 맨 아래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이다. 6. 대구·경북지역의 복음 전도자(前導者), 정재순 정재순 목사는 조사로 사역할 때도 복음 전파에 최선을 다했다. 1901년부터 1906년까지 칠곡 지역에 설립된 16곳 교회 중 2곳이 정재순 목사가 개척한 교회이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정재순 목사는 1915년부터 1922년까지 대구 신정교회 위임목사로 시무하면서 대구 침산교회, 남산교회, 대구 범어교회에서도 사역을 감당했다. 1919년 대구 3·1만세운동으로 체포되어 투옥되어 있다가 출옥한 후에는 신정교회를 사임하고 1922년 안동교회 제3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925년 5월 안동교회를 사임하고 다시 대구로 돌아온 정재순은 1925년부터 1938년까지 대구 동산병원(현 대구 동산의료원) 직원 전도회 담당 목사로 시무했다. 비교적 주일에 자유로웠던 정재순 목사는 한 교회에 매여 있지 않고 약한 교회들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가 섬긴 교회는 경산 고모교회(폐지), 영천 사창교회(폐지), 영일 기계교회, 달성 덕지교회, 금릉 봉곡교회, 성주 구릉교회, 영천 삼귀교회(폐지), 청도 예리교회, 칠곡 금암교회(현 동명교회), 달성 조암교회(폐지), 달성 방촌교회, 청도 구촌교회(폐지), 청도 대천교회, 영천 대제교회(폐지), 칠곡 기성교회, 월성 입실교회, 상주 양촌교회, 경주 유담교회, 경산 경동교회, 고령 유동교회(현 운수제일교회), 외동교회(폐지), 군위 삼산교회(폐지), 고령 평지교회(폐지), 선산 석우교회, 청도 음지교회(폐지), 상주 화령교회, 의성서제교회, 오로교회 등이다. 이후 정재순 목사는 1938년부터 1946년까지 신정교회에서 두 번째 위임목사로 시무하였다. 한편 정재순 목사는 기존의 경상노회에서 분리된 경북노회에서 1919년, 1939년, 1945년 세 번에 걸쳐 노회장을 역임하며 대구지역의 기독교 지도자로 영적 리더십을 발휘했다. 7. 대구 3·8만세운동의 주역(主役), 정재순 대구지역의 3·1만세운동은 1919년 3월 8일, 3월 10일, 3월 30일에 걸쳐 총 세 차례 있었다. 당시 기독교 지도자인 남성정교회의 이만집 목사와 신정교회의 담임목사이며 당시 경북노회장인 정재순 목사, 남산교회의 김태련 조사, 백남채 장로, 계성학교 교감선생인 김영서 등이 시위를 주도했다. 이 만세운동으로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는데, 당시 동원 담당이었던 정재순 목사도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정재순의 아들인 정원조도 6개월의 형을 받았다. 정원조는 당시 계성학교 학생이었는데, 일제에 의해 심한 고문과 구타를 당하고 6개월 동안의 징역으로 오래 살지 못하였다. 부자가 함께 3·1만세운동에 참여했고,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는 것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 남을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정재순 목사는 일제 말엽, 친일(親日)에 가담하게 된다. 1938년 6월 중순경, 총독부의 종용에 따라 자발적인 총후봉사활동을 내세우며 조직한 친일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 그는 기독교에 대한 일제의 간섭과 탄압이 절정에 이르렀던 1939년을 지나면서 노회장이란 직함으로 인해 이 단체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활동은 정재순 목사의 분명한 과오이지만 그는 회심한 이후 40여 년 동안 신앙, 사역과 헌신을 통해 교회와 민족과 역사에 긍정적인 기여도 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초창기 대구에 소재한 교회의 지도들로 좌측으로부터 박영조, 이만집, 김기원, 정재순 목사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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