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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노회(백석) 제84회 정기노회, 신임 노회장에 이상춘 목사예장백석 경북노회(노회장:박경원 목사) 제84회 정기노회가 4월 10일(월) 오전 11시 청송 산림조합중앙회 연수원 컨퍼런스홀에서 개최된 가운데, 신임 노회장에 이상춘 목사(목계교회)가 선출됐다. 이상춘 목사는 포항에서 목회하다 12년 전 고향인 청송으로 들어와 농촌목회에 전념하고 있으며, 한국문인협회에 등록된 시인으로 지역 주민들과도 적극 소통하고 있고, 지난해에는 청송군기독교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다. 이날 신임 노회장에 취임한 이상춘 목사는 “노회 산하 교회들이 부흥 발전하고, 목사님들이 더욱 힘을 내어 목회할 수 있도록 사명감을 갖고 최선을 다해 노회를 섬기겠습니다”라고 인사했다. 1부 개회예배는 부노회장 이상춘 목사의 사회로 서기 김주광 목사의 기도, 노회장 박경원 목사의 ‘충성된 종’ 제하의 설교, 김정애 목사(주찬양교회)의 특별찬양, 증경노회장 이종만 목사의 축도 순서로 드렸다. 설교에서 박경원 목사는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종들이기에 자기 생각대로 무슨 일을 하면 안 된다. 최소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주님을 볼 수 있는 눈을 갖추어야 한다. 다른 데 마음 뺏기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남은 생을 살아가길 바란다”고 말씀을 전했다. 이어진 회무처리는 회무기도, 총회 윤리강령낭독, 개회선언, 감사위원회 보고, 임원회 보고, 헌의 및 청원건 보고, 각 부서 및 위원회 보고, 시찰회 보고, 임원선거 및 임원교체, 각부 모임 및 조직보고, 총회 총대 선출, 기타 안건 토의 등의 순서로 진행했다. 특별히, 이번 노회 기간 중 장학위원회에서는 2023년도 장학생 총 6명(목회자 자녀 및 목회자 후보생)에게 총 4,800,000원의 장학금을 전달하고 격려했다. 다음은 제84회기 신임 임원 명단. △노회장:이상춘 목사(목계) △부노회장:강홍대 목사(행복한) △서기:김주광 목사(우계) △회록서기:김삼일 목사(가흥동) △부회록서기:김경순 목사(세계반석) △회계:최기성 목사(금호) △부회계:이경희 목사(포항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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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나의 어머니, 김해선 권사님!나의 어머니, 김해선 권사님! 최 점 식 목사 길부교회 나의 어머니의 일생(1933년 9월 9일~) 어머니는 경북 군위군 의흥면에서 무남독녀로 어렵게 살아온 전형적인 가난한 농민의 딸이었다.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홀로 계시는 아버지 밑에서 살아오셨다. 그러면서도 바느질을 배워, 동네 어르신들의 옷과 버선도 만들어 드리며 살아오셨다. 손재주가 남달라 동네 어른들로부터 사랑과 칭찬을 많이 받으셨고, 아버지를 정성으로 섬기며 집안일도 어머니를 대신하여 잘 해내셨다. 그러던 어느 날 군위 우보 5일장에 다녀오신 외할아버지께서 당시 15세인 어머니에게 시집이라도 가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그렇게 자신보다 아홉 살이 많은 내 아버지를 만나 16세의 어린 나이에 5남매 중 장남과 결혼하여 시부모님과 함께 경북 군위군 우보면 이화동 1189번지에 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행복한 신혼의 꿈을 뒤로한 채 아버지는 군 입대를 하셨다. 남편도 없는 시집살이는 쉽지 않았고, 가정 형편 또한 넉넉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조금의 불평도 하지 않으셨고, 부모님께는 효도하고 형제들과는 우애를 다지며 힘든 환경 속에서 살아오셨다. 그러던 중에 농촌에서의 삶이 어려워지자 대구 산격동으로 이사를 하셨다. 생각해보니, 도시로 이사를 나온 것은 어머니의 커다란 용기였다. 지금도 종종 이러한 결단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도시의 생활이 시작됐으나, 별 직업이 없었던 아버지께서는 시장에서 리어카로 채소장사를 하면서 가정의 생계를 꾸려나가셨다. 동시에 어머니께서는 우리 4형제를 공부시키시기 위해 40대 초반의 나이에 식당에서 일을 하셨다. 그리고 어릴 때 배워둔 삯바느질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셨다. 어린 내가 봐도 두 분은 참으로 열심히 사셨고,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두 분의 모습이 지금 우리 형제들의 성실과 부지런함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믿음의 가문을 일구어내신 어머니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세 들어 살던 곳의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교회를 다니면서 나 혼자만 예수님 믿지 말고 어머니도 함께 믿게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어머니를 설득했고 하나님의 은혜로 어머니도 40대에 처음 교회에 나가시게 되었다. 어머니는 평소 몸이 좋지 않으셨는데, 교회를 다니신 후로 건강을 회복하며 하나님의 큰 은혜를 체험하셨다. 하지만 제사 문제 등을 이유로 주위 친척들의 심한 반대가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믿음이 성장하면서 제사를 없애고 추도 예배를 드릴 것을 제안하셨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족들이 예수를 믿게 해야 했다. 어머니는 기도하면서 최선을 다해 가족들을 전도하셨고,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우리 4형제도 교회에 출석하게 됐다. 그 후 우리는 형편이 나아지면서 새로운 집으로 이사도 하게 되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우리 형제들은 모두 중·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으나, 시장에서 채소를 운반하시던 아버지께서 갑자기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셨다. 하루아침에 우리 집은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나 아파 목이 메어 온다. 아버지 없이 우리끼리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하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이 점점 더 커졌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식당 일 등 돈이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밤낮으로 일하셨다. 어머니의 희생으로 우리 형제들은 굶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었다. 온 가족이 힘든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았으니,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장남인 나는 집안을 위해 사업을 시작했고 사업체를 운영하게 됐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업의 길이 아닌 목회자의 길로 인도하셨고, 신학의 길을 걸어가고자 마음먹었을 때도 어머니는 반대하지 않으셨다. 지금은 우리 4형제 중 2명이 목사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지난날 불신자의 가정에서 목회자가 배출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비록 농촌목회와 자비량 선교사의 길을 걷고 있으나 최선을 다해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어머니의 희생으로 무사히 고등학교를 입학하게 된 것이다. 입학 당시, 입학등록금이 없어 어머니는 끼고 계시던 금반지 세 돈을 팔아 입학등록금을 마련해주셨다. 또 2012년 어머니의 팔순 때, 어머니께서는 동생들은 모두 좋은 차가 있는데 장남인 내가 목사이면서도 소형 자동차를 가지고 있다며, 그랜저 3.0을 구입해 주셨다. 섬유공장에 다니시면서 모아두신 돈으로 새 차를 사주신 것이다. 나의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는 사실을 70대를 바라보며 다시금 느끼고 있다. 현재 어머니는 경산에 거주하시는데 지금도 아들이 오면 커피를 손수 끓여주시며, “부모는 한 번 죽으면 다시 볼 수 없는데, 내가 살아있으니 커피라도 끓여준다”라고 말씀하신다. 아들로서 어머니에게 해드린 것이 한 가지 있다면 6년 전에 아내와 함께 의논해서 지금의 아파트로 모신 것이다. 다만, 더 해드리지 못해 항상 죄송한 마음이다. 부모 없는 자식이 어디 있겠는가? 자녀들에게 모범이 되신 어머니 어머니는 지난 1988년 88세로 세상을 떠나신 할머니를 수십 년간 모신 결과로, 1997년 5월 8일 어버이날에 대구광역시장으로부터 ‘장한 어버이상’을 수상하셨다. 이는 우리 가문의 영광이었다. 또 2020년 9월에는 아버님이 6·25 참전 국가유공자란 사실을 인정받게 되어 너무나 감격해하시기도 하셨다. 어머니는 지금은 89세로 연로하시지만, 40여 년간 출석하신 교회의 권사로서 주일예배, 삼일기도회, 금요구역예배 등 경산에서 대구까지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다니시는 모습에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언젠가 교회 화장실을 청소하시다가 락스가 눈에 들어가서 고생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교회 관리집사님도 있었지만 더러운 화장실을 그냥 볼 수 없어서 청소하셨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그런 분이시다. 어머니는 지금도 교회 어르신들에게 옷을 만들어 드리고, 봉사하시며, 길흉사에 빠짐없이 참석하신다. 국가에서 받는 노령연금과 자녀가 드리는 용돈으로 십일조, 감사헌금, 선교헌금을 내시며 교회 권사로 그 의무를 다하시니 아들로서 부끄러운 것밖에 없다. 아무쪼록 남은 삶 건강한 몸으로 계시다가 언젠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조용히 천국 가실 수 있도록 기도한다. 60대 중반에 있는 큰아들을 마치 어린아이로 생각하시는 것을 보면 부모의 마음이 어떠한지 가히 짐작해 본다. 나의 어머니 살아계실 동안에 건강하세요. 존경합니다. ▲2021년 2월 설날에 어머니(뒷줄 왼쪽 세 번째)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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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 강병주 목사의 생애와 사상 학술 포럼’ 열려영주노회 역사위원회와 농어촌부, 내매교회 공동 주관 ▲‘강병주 목사 학술 포럼’이 영주 내매교회당에서 열렸다.(포럼을 마친 후 참석자들의 기념 촬영) 지난 5월 13일(월) 오전 11시 영주시 평은면에 위치한 내매교회(윤재현 목사 시무)당에서 영주노회 역사위원회와 농어촌부, 내매교회 공동 주관으로 학술 포럼이 열렸다. “농촌운동 세미나 <농촌운동의 선구자 백남 강병주 목사 생애와 사상 포럼>”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세미나에는 70여 명의 목회자와 장로, 내매교회 교우들, 강병주 목사 후손 등이 참석했다. 1부 예배는 강병주 목사(농촌목회협의회 회장) 인도로 천정명 목사(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농어촌부장)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2부 학술 포럼은 ‘한국장로교회의 농촌운동 선구자 강병주 목사’ ‘일제 강점기 총회의 농촌운동’ ‘내명학교 교사(校舍)의 보존관리 및 활용방안에 관한 제언’을 주제로 임희국 교수(장신대, 역사신학) 백명기 목사(총회 농어촌 선교부 총무) 손산문 목사(영천자천교회, 영남신학대 특임교수)가 강의를 진행했다. 우병백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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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취재> “마을이 살아야 교회가 산다”201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 103회 총회 주제는 “영적부흥으로 민족의 동반자 되게 하소서”이다. 100년 전 위기에 빠진 국가와 민족을 위해 ‘3.1 만세운동’에 앞장섬으로 민족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었던 교회가, 다시 한 번 이 시대에 민족의 동반자가 되자는 의미에서 이와 같은 주제를 정한 것이다. 지난 2월 21일(목) 10시 안동교회(김승학 목사 시무) 영곡아트홀에서는 경북 북부지역(경서노회, 경안노회, 영주노회) 목회자와 장로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농촌 목회의 비전을 제시하는 연합세미나가 열렸다. 이번 세미나는 경안노회 노회장 이위철 목사(청송 안덕제일교회)의 제안으로 3개 노회 농촌선교부와 국내선교부가 실무를 담당하며 협력함으로 성사되었다. 세미나는 3부로 나누어 진행됐으며, 조환철 사무관(경상북도 농업정책팀장), 김현권 국회의원(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위원), 천정명 목사(총회 농어촌선교부장, 봉화 옥방교회)가 강사로 나서, “경상북도 농업정책”, “농촌사회 발전에 따른 교회의 역할”, “총회 농어촌선교부 정책”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경상북도 농업정책"을 설명하는 조환철 사무관. 조환철 사무관 … 경북은 “농업의 다원적 가치 창출 및 스마트팜 혁신밸리 조성하고 있다” 먼저, 조환철 사무관은 통계 자료를 통해 경북도의 농업현황이 인구감소, 인구 고령화 등으로 인해 공동화 현상이 심각하고 농가소득도 저조함을 지적했다. 그러나 유통 전담기관을 설립하고, 차세대 청년농부 육성을 추진함으로 귀농인구가 꾸준히 늘고 있다고 했다. 또한, 앞으로도 농업의 다원적 가치 창출, 청년농부 육성 및 정착 지원, 유통기반 확충, 스마트팜 혁신밸리 조성 등의 정책으로 “더불어 잘사는 농촌”이 되도록 정책적으로 지원해나갈 것이라고 경북도의 농정 방향을 밝혔다. ▲"농촌사회 발전에 따른 교회의 역할"을 강의하는 김현권 국회의원. 김현권 국회의원 … 농가 직불금 도입 필요, “가장 빠른 농업의 혁신은 ‘청년의 농업 정착’이다!” 김현권 국회의원은 농부 출신 의원으로, 도시와 농촌 간의 소득 격차를 줄일 수 있는 국가 차원의 거시적인 농정 방향을 소개했다. 무엇보다 쌀값 안정과 농가 직불금 제도 도입의 필요성, 지역 식품의 안정적인 유통구조의 필요성에 관해 설명했다. 아울러 가장 빠른 농업의 혁신은 ‘청년의 농업 정착’이라면서 “젊은 세대가 스스로 미래 농업을 기획하고 설계해 농촌에 정착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총회 농어촌선교부 정책"을 소개하는 천정명 목사 천정명 목사 … “도시교회와 농촌교회와의 활발한 교류 및 농촌목회 전문가 양성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총회의 농어촌선교부장이며 농어촌목회자 전국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는 천정명 목사는 총회의 농어촌지역 중점사업을 소개했다. 또한, 도시교회와 농촌교회와의 활발한 교류, 자발적 역량을 가진 농촌목회 전문가 양성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면서, ‘총회 산하단체 간 협력을 통한 농촌지역교회의 활성화’에 대해 강연을 펼쳤다. 세미나를 마친 후 천정명 목사는 “농촌교회가 국가의 농정정책과 총회의 농어촌지역 선교 사업들을 잘 이해해야 목회 현장에 된다는 점에서 이번 연합세미나는 매우 유익했다”며 “앞으로 농촌교회가 부흥할 수 있도록 총회 농어촌선교부에서도 지원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번 세미나를 준비한 실무자인 상주 낙동신상교회 김정하 목사는 “교회는 지역사회와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지역 주민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소신을 밝혔다. 김 목사는 ‘마을이 살아야 교회가 산다’는 취지에서 주민들과 함께 직접 해바라기를 심어 마을경관을 조성하고 관광객이 찾아올 수 있는 ‘꽃피는 신상마을’을 만들고 있어 농촌교회 목회의 모범 사례로 꼽히고 있다. 농촌교회는 영혼을 구원하는 ‘영적 방주’의 역할은 물론이고 침체하여가는 지역을 살리는 일에 주민과 함께 협력할 때 지역도 살고 교회도 살아날 것이다. ▲경북 북부지역 3개(경서, 경안, 영주)노회는 지난 21일 안동교회에서 농촌 목회의 비전을 제시하는 연합세미나를 열었다. ▲“‘꽃피는 신상마을’로 놀러오세요~!” …상주 낙동신상교회 김정하 목사는 주민들과 함께 해바라기밭을 가꾸는 등 ‘마을 목회’의 모범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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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노회(통합) 제68회 정기노회 열리다.<영주노회 제68회 신임임원> ▲회장: 김기태 목사(원리) ▲부회장(목사): 강성효 목사(장수) ▲부회장(장로): 우병열 장로(부석) ▲서기: 강병주 목사(와현) ▲부서기: 조성계 목사(운계) ▲회록서기: 김건우 목사(망월) ▲부회록서기: 황현석 목사(축동) ▲회계: 전상욱 장로(영동) ▲부회계: 안병주 장로(봉화제일) <신임 노회장 김기태 목사 인사말>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사람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노회장직을 맡았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지나고 있는 오늘의 세계교회는 강력한 교회개혁의 필요성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성장이 멈춘 시기에 이 직을 감당하기 위해서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하여야 할 때입니다. 총회에서는 ‘거룩한 교회 다시 세상속으로’라는 주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나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농촌목회가 중심이 된 영주노회는 마을마다 어른들을 찾아가서 그들과 함께 하는 놀이문화와 먹거리를 공동으로 만들어 가는문화 등, 세상과 함께 하는 모습 속에서 교회가 부흥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역 공동체와 함께 어울리는 교회들의 한마당 잔치의 모습들을 조심스럽게 제시해 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사랑과 성령의 충만함으로 늘 행복이 넘치는 교회와 영주노회를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늘 깨어서 기도하면서 주어진 일을 감당하겠습니다. 오직 예수로만, 성경으로 ,믿음으로 일을 하여서 온 교회들이 화평하고 지역 마을교회들이 든든히 서가도록 온 힘을 다하여 일을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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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자비량 목회자 김경환 목사목록 본문 국내 자비량 목회자 김경환 목사 취재·정리: 편집부장 최영열 장로 사도 바울처럼 선교사역을 자비량(장막업-Tent maker)으로 감당하는 해외 선교사들이 있기는 하지만 국내 목회에 있어 자비량으로 사역을 감당하는 목회자는 많지 않아 보인다. 목회라면 당연히 풀타임 사역이라는 인식이 자리매김한 탓인가? 뭔가 자연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이 땅엔 아직도 많은 수의 미(未)자립교회들이 존재하고 시골 벽지엔 고령화된 성도들로 구성된 어려운 농촌교회들이 지역마다 산재해 있다. 그 삶의 터전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농촌교회 성도들을 위해 묵묵히 사역을 감당해 가고 있는 목회자들의 삶 또한 각박한 처지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때, 어려운 농촌목회자의 삶을 도우면서, 시골 교회를 세워가는 자비량 목회자가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경북 예천군 용문면에 소재한 ‘용문하금교회’ 김경환 담임목사가 그 주인공이다. 김 목사는 괴산에서 목회하던 중 고향인 울릉도에서 함께 신앙생활 했던 곽일부 목사가 용문하금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인사차 방문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만남은 곽 목사와의 은퇴로 인해 이뤄지지 못했고, 다만 목자 없는 양떼와 허물어져 가는 예배당의 모습을 보면서 이곳을 찾은 김 목사의 마음은 아파왔다. 당시 교회는 사례금을 드릴 수 없는 형편이라 목사님을 모시지는 못하고, 다만 은퇴 시점에 갈 곳 없는 목회자가 와서 물질에 상관없이 사역해 주길 기대하는 정도였다. 김 목사가 기도 후 교인들과 다시 만나 교인들이 조건을 들어 준다면 사역을 하겠다고 말했다. 먼저, 맡아 오던 기업이 있기 때문에 사택은 필요 없다. 둘째, 사례비는 전혀 없어도 된다. 마지막으로 거처하는 숙소가 멀기에 새벽기도는 인도할 수 없다는 조건이었다. 성도들이 근근이 예배를 인도하며 지켜오던 시골교회, 목회자 모시기를 위해 기도하던 성도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하여 2014년 8월, 김경환 목사는 용문하금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됐다. 김 목사는 먼저 비가 새는 예배당 공사를 비용을 들여 마쳤다. 이어서 공사용 철근이 밖으로 튀어나와 있을 정도로 농사용 창고보다 못한 교회 식당을 리모델링해야겠다고 제안하자 대부분의 교인들이 반대했다. 비용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김 목사는 출향 교인들의 지원과 김 목사의 부담, 은혜 받은 이들의 헌신을 합하여 결국 공사를 마무리했다. 또 외부 지원을 받아 종탑을 깔끔하게 해결했고, 식당에 비용을 들여 화목보일러를 설치, 교인들이 훈훈한 겨울을 날 수 있게 도왔다. 고난주간에는 교인들을 상대로 세족식 행사를 열어 섬겼고, 추수감사주일이 되면 김 목사가 직접 생산한 꿀을 교인들에게 선물했다. 명절엔 일체 목사에게 선물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김 목사가 준비한 현금 봉투를 교인들에게 나눠줬다. 특별한 날이 되면, 성도들에겐 김 목사가 키우는 염소를 잡아서 대접하고, 마을 잔치에는 돼지를 잡아 대접했다. 이렇게 선한 사업을 계속하다 보니 이젠 주위의 돕는 손길도 생겨 훨씬 더 즐겁고 보람되게 섬길 수 있게 됐다. 현재, 교회에서 헌금 1등은 김 목사이다. 이렇게 많은 물질로 지역 사회와 교회를 섬기고 교인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은 바로 김 목사가 운영하고 있는 사업체가 있기 때문이다. 김 목사가 현재 경영하는 사업은 양봉과 염소 농장이다. 군 제대 후 울릉도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던 중 양봉을 처음으로 접했다. 몇 번의 어려움을 겪고 난 후 깨달은 것은 벌을 지으신 하나님 관점에서 벌을 키워보자는 확신이었다. 새로운 시도로 인해 당시 벌을 키우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듣기도 했지만 결국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방법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늘었고, 현재는 많은 이들이 그를 따라 양봉을 하고 있다. 김 목사는 현재 선진 양봉을 교육하는 농업기술센터 주최 전국 강의를 제일 많이 다니는 강사이다. 목회자로서 김 목사는 양봉 강의의 기회도 놓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삼고 있다. 강의 중간중간 하나님과 인간, 구원에 관해서 설명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교육생들에 증거 하고 있다. 3박4일 강의 시엔 반드시 하루는 예배당에서 강의해 기독교엔 친근감을 느끼도록 노력하고 있다. 김 목사가 양봉(국사골양봉농원)을 통해 올리는 수익은 연간 약 1억원 이상, 그 중 1억원 가량을 선교비로 사용하고 그 나머지를 생활비로 사용한다. 생산한 꿀은 미자립 교회가 판매해 자립할 수 있도록 목회자들에게 저렴하게 공급해 준다. 또 양봉교육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꿀 생산이 어려운 이들에겐 꿀을 나눠주고 다음 해 생산을 많이 하면 그때 갚으라고 공급해 주기도 한다.(진대법 개념, 회수율 10%에 불과) 현재 특히 김 목사가 역점을 두고 시작한 사업은 염소농장이다. 호주산 염소인 ‘보아’ 종을 70여두를 사육하고 있는데, 300마리를 목표로 하고, 우수한 형질의 보아 원종 염소를 구하고 있다. 숙소도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셨다. 김 목사가 숙소와 농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집(유천면 소재)은 과거 법당으로 사용되던 건물로 칡넝쿨이 집안으로 들어올 정도로 폐허가 된 상황이었다. 부동산 중개업자 조차도 일반인이 살 수 없는 곳이기에 목사님 정도 되는 사람이라야 살 수 있는 곳이라고 할 정도로 기가 센(?) 곳이었다. 그곳은 과거 전국의 무당들이 모여 큰 굿을 하던 집이었으며 집 둘레 곳곳이 촛불을 켜고 지성을 드리던 곳이었다. 따라서 그 누구도 범접(?)지 못한 탓에 김 목사는 시가의 1/4 가격으로 건물을 구입할 수 있었고 지금껏 잘 사용하고 있다. 김 목사가 이렇듯 나눠주는 목회를 하게 된 데에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다섯명의 자녀를 잃고 낙심한 아버지는 무당을 찾아가 안타까움을 호소하자 무당이 말하길 “나하고는 안 맞고, ‘오랑캐당’에 가라 ‘야수교당’” 해서 절박한 심정으로 교회를 찾았고 예수님을 만났다. 이후 5자녀를 더 낳고 건강하게 양육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신 아버지는 이후 평신도로서 교회를 개척(울릉도 중령교회)하신 것은 물론, 좋은 것은 모두 교회에 갖다 드리며 하나님을 섬기기를 시작해, 형제들과 함께 무척이나 어렵고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어린 시절 점심식사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을 정도) 공무원으로, 성공한 사업가로 성장한 김경환 청년은 하나님 말씀인 성경의 실생활 적용에 많은 괴리감을 느끼고 갈등하고 방황하던 중 하나님의 큰 은혜를 경험했다. 곧 하나님의 심정을 깨달은 것이다. 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에서, 성경을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기록하신 하나님 심정으로 바라봄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 은혜에 감사해 신학을 하려 했지만 고생길을 가려는 아들을 어머니가 막으셨다. 수년이 흐른 후 37의 늦은 나이인 1997년 거부할 수 없는 부르심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울릉도에서 육지로 나왔다. 사역을 시작하면서 김 목사는 물질과 관련된 굳은 결심을 하게 된다. ‘목회자가 되면 나눠줄 수 있을 정도의 준비가 될 때 사역을 시작하자. 자비량 목회자가 되자. 생계도 어려울 정도로 가난한 교인 가정에서 헌금하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수입원 없어 생계를 걱정할 정도로 살아가는 용문하금교회 노인 성도들과 이웃 주민들이 헌금이 부담스러워 교회 못 나오는 일이 없도록 김 목사는 헌금을 하지 말라고 독려(?)한다. 헌금 부담 때문에 교회 못 나오는 것보단 차라리 하나님 말씀을 한번이라도 더 듣게 하는 것이 목회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현재, 교회는 귀농 2가정과 교회 인근 주민들, 공무원 가정 등 20여명이 출석해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 김 목사 1년에 1번씩 북한 땅과 철책이 보이는 통일전망대를 찾아간다. 굶주리고 있는 북한 주민들을 마음껏 먹이고 싶은데 안타까워 혼자 울고 내려온다. 또 세계 곳곳의 미(未) 전도 종족을 찾아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지원해 주고 싶은 큰 소망이 있다. 그래서 해외로 나갈 기회가 있으면 1달러짜리를 많이 바꿔서 나간다. 비판도 하는 이들도 있지만 복음을 30분 듣는 아이들에게 1달러씩 나눠줬다. 김 목사는 신령한 영적 양식인 복음을 전할 수 있어 좋고, 또한 가난한 아이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어 너무 기쁘다고 했다. 그는 또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너무나 좋지만, 머릿속 이론으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며, 추상적이지 않고 현실적인 설교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말씀이 실생활에 이뤄질 때까지 무슨 일에든 중간에 평가하려 말고, 말씀을 보고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라고 강조했다. 그 말씀의 열매들을 분명히 거둬 본 체험들이 확실하기에 그의 설교는 힘이 있다. 그는 이후에 하나님 주신 복음을 인근에 소재한 안동대나 경북대 상주캠퍼스 대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열망을 갖고 있다.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야 할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자신이 받은 은혜를 더 많이 전해주고 싶은 열망 때문이리라. 그의 나이 50대 중반, 세월이 유수처럼 빠르다는 것을 느끼기에 더욱 시간의 소중함을 생각하고 믿음으로 달려가길 열망하는 김 목사의 꿈이 주님 안에서 조속히 이뤄지길 두 손 모아 기도해 본다. 김 목사의 가족으로는 강은숙 사모와 2남인 정혁(대전침례신학대학원 재학), 창혁(대학 2년)이 있다. 국사골양봉농원(대표 김경환 목사 010-3795-2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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