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김예희 장로의 수필 - 특별한 선물특별한 선물 김 예 희 장로(수필가) 새빛행복가정컨설팅 대표 휴대전화기가 울리자 나는 반사적으로 메시지를 확인한다. “여보, 귀걸이 한 개 집에 있나 찾아 봐, 연락 바람.” 한 시간 전쯤에 아내가 생활 쓰레기를 분리 배출하고 와서 아파트 뒷산에 산책하러 나갔는데 귀걸이 한 개를 잃어버렸나 보다. 산길을 뒤지며 눈에 불을 켜고 찾는 모습이 선하다. 일전에 퇴임한 친구들 간의 부부모임에 가려고 시내에 나갔다가 지인의 매장에 들렀다. 금은 및 시계를 취급하는 영업점이다. 안부를 묻고 수인사를 나누는데 아내는 귀걸이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러자 여주인이 홍보에 적극 나선다. 평소 귀걸이 타령을 한두 번 들었던 터라 내가 나섰다. “당신 생일도 다가오는데 내가 선물할게.” 아내는 여주인이 권하는 귀걸이를 거울 앞에서 걸어본다. “예, 잘 어울리네요. 요즘 많이 선호하는 품목입니다.” 18K 금으로 만든 귀걸이다. 아내가 좋아하기에 선뜻 결제를 했다. 아내 눈에 쏙 드는 물건이 있어 흥정과 구매까지 단 몇 분 안에 이뤄졌다. 참으로 오랜만에 때맞추어 선물을 하게 되어 흐뭇하고 발걸음도 가벼웠다. 그날 이후 생일 지난 지가 한참 되었는데도 귀걸이 한 모습을 못 봤다. 그런데 아파트 단지 내 정원에 봄꽃이 피고 날씨가 너무 화창해서 오늘 귀걸이를 걸고 셀카봉을 들고 나가 사진 몇 장을 건졌는데 그 차림대로 산행에 나섰다가 난처하게 된 모양이다. 나도 눈에 쌍심지를 켜고 화장대며, 침대 위, 거실 소파, 주방을 두루 살펴봤으나 소득이 없었다. 혹시나 싶어서 쓰레기 분리수거하는 곳까지 가 보았으나 흔적을 알 길이 없다. 급히 휴대전화기를 열어 가족채팅방의 사진을 살펴본다. 오전에 아내가 올려놓은 사진을 찬찬히 보니 그때는 귀걸이를 하고 있다. 그럼 틀림없이 산행 길에서 분실한 것이 맞다. 휴대전화기가 울리고 아내의 전화를 받는다. 지금 길에 흘렸는지 찾으면서 하산하고 있단다. 나는 재차 방안을 수색한다. 쓰레기장을 다시 들러 보며 아내의 동선(動線)을 샅샅이 훑는다. 아예 우리 집에서 내놓은 쓰레기봉투를 들고 와서 거실에 쏟아놓고 혹시 귀걸이가 딸려 갔을까 일일이 확인한다. 그 사이 아내가 들어온다. 다시 화장대부터 온 집안을 뒤진다. 쓰레기봉투를 직접 재확인해 본다. 귀걸이는 온데간데없다. 허망하다. 돈으로 치면 십만 원 내외인데, 짝을 잃으면 나머지 한 개는 쓸모가 반감되니 아깝다. 모처럼 생일날 선물한 것인데 그 의미가 퇴색되면 어쩌나? 어쨌든 찾아야만 한다는 일념에 꽂혔다. 나보다 아내가 훨씬 더 속상할 것 같다. 아내의 마음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그래서 기분 상할 말을 뱉지 않으려 애쓴다. 예전 같았으면 벌써 타박하는 몇 마디를 날려서 아내 가슴에 불을 질렀을 것이다. 이 순간은 그럴 마음도, 생각도 전혀 동하지 않는다. 제대로 익어가는 것인지? 일시적인 현상인지? 더 두고 스스로를 돌아봐야 알 일이다. 이번엔 먼저 내가 제안한다. “여보, 산행 길을 따라 다시 찾아보자.” “그래, 그래야겠지?” 부창부수? 오늘은 아내가 앞서고(婦唱) 나는 뒤따라간다(夫隨). 한 발 한 발 길섶을 뒤지며 기어가듯 산길을 오른다. 진달래 군락지에 이르자, 아내가 걸음을 멈춘다. 여기서 셀카를 찍었다고 한다. 꽃그늘에서 아래위로, 좌우로 앉은뱅이를 돌며 뒤져도 허탕이다. 검불밭에서 바늘 찾는 격이다. 순간 나는 ‘우리는 찾을 수 없다. 하늘이 도와 눈에 띠게 해야 가능하다.’라는 생각이 일었다. 정신을 추스르고 다시 산을 오른다. 능선을 따라가며 길섶을 살핀다. 드디어 아내가 머물렀던 마지막 지점이다. 여기서 모자를 벗고 잠시 쉬면서 휴대폰 갤러리에서 사진을 감상했단다. 앉은자리를 꼼꼼하게 훑어보고 신갈나무 마른 잎을 뒤져봐도 귀걸이는 없다. 몇 번을 확인해도 보람이 없다. “그만, 가자.” 포기하자는 의미로 한 마디 던졌다. “난 찾아야 돼. 못 가.” 아내는 단호하다. 할 수 없이 나도 아내 있는 곳을 향해 돌아선다. 바로 그때였다. 내 눈에 들어온 반짝이는 물체가 있었다. 그 물체는 고리 형상이다. 귀걸이였다. “여보, 찾았어!” 나는 빛나는 귀걸이를 건져 올렸다. 아내는 반신반의하며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의기양양하게 귀걸이를 흔들어 보이자 환한 미소와 함께 반색을 한다. “정말이네. 어떻게 찾았어?”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찾은 것이 아니다. 하늘이 내 눈에 띠게 도와준 것이다. 기쁨도 잠시잠깐. 조금은 허탈한 기운이 감싼다. 틀림없는 현실이다. 세 시간가량 딴 세상에 살다온 듯하다. 아내가 그간의 마음고생을 꺼낸다. 내가 뭐라고 좀 나무라고 핀잔을 주면 오히려 마음이 더 편할 것 같았는데, 원망도 불평도 없이 본인이 하자는 대로 수긍하며 열심히 귀걸이 찾는 일에 함께하니 심기가 더욱 고단했단다. 중간에 ‘못 찾으면 한 개만 걸고 다니지.’, ‘다른 금붙이 갖다 주고 똑같은 것으로 한 개 만들지.’ 등 혼잣말을 되뇌며 속 풀이를 했다고 한다. 나는 나대로 한 순간도 못된 생각이나 아내를 타박하는 마음을 품지 않았다. 하늘이 찾게 해 줘야 찾는다는 일념으로 공감과 성심을 보탰을 뿐이다. 세 시간가량 하늘이 남편의 함량을 달아본 건가? 그럼 생명의 날 동안, 끝까지 믿어도 될 짝꿍으로 나는 아내한테 합격점을 받았을까? 하여튼 몇 해 만에 바친 생일 선물은 귀걸이보다 더 반짝이는, 아내를 향한 ‘절대긍정’의 믿음이 아닌가 싶다. 편집부 www.gbhana.com
-
나의 출애굽기(1)나의 출애굽기(1) 드보라 1. 어린시절 우리집 나의 아버지는 동네 유명한 깡패였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를 보더니 홀딱 반해서 따라다니다가 나중에는 억지로 결혼하자고 했다고 한다. 단순한 억지 수준이 아니라 결혼 안 해주면 집에 해코지 하겠다고 협박까지 했다고 한다. 우리 어머니는 반면에 그 당시 여자들이 가기 힘든 대학도 나오신 분이었고 외할아버지도 해외에 유학을 다녀온 학식 있는 집안이었기에 길길이 뛰면서 반대를 하셨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너무 무섭고 겁이 나서 할 수 없이 아버지와 결혼을 하셨다. 이렇게만 이야기가 이어졌다면 매우 안타까운 일일 뿐이지만 다행히 아버지는 결혼 후에 마음을 고쳐먹으셨다. 결혼한 순간부터 싸움을 그만두고 깡패 친구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항상 잘해주셨다. 아버지는 직장으로 한 화학 공장에 다니셨다. 그 공장은 살인무기를 만들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공장이었다고 기억한다. 인체에 나쁜 매연과 환경 때문에 건강이 계속 나빠지셨다. 그렇지만 마음대로 직장을 옮길 수 없는 군수품 공장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많으셨다. 그러다가 선택한 방법이 바로 벌목공으로 해외 노동을 하러 가는 것이었다. 비록 몸은 고되다하지만 3년 정도만 일하고 오면 다른 곳으로 배치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위험을 무릅쓰고 벌목공으로 지원해서 가셨다. 낯설은 타향의 추운 지방에서 콧구멍에서 얼음을 뜯어내면서 당과 수령을 위해 온몸 바쳐 충성했다. 2. 노동력을 착취당한 아버지 아버지가 해외로 간 후 우리 가족은 시골 외갓집으로 이사를 갔고 그 후로 계속 거기서 살았다. 언니와 동생들은 해외의 추운 곳에서 고생하는 아버지에게 위로와 격려의 편지를 써서 한 달에 한 번씩 아버지에게 보냈다. 그렇지만 나는 무슨 심술이었는지 한 번도 편지를 안 썼다. 돌이켜보면 예쁜 짓 사랑스러운 짓을 한 번도 안 했다. 벌목공으로 가셨던 아버지는 3년 만에 돌아오셨다.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우리 가족은 충격에 빠졌다. 가기 전에는 건장하고 듬직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몰라보게 핼쑥해졌기 때문이다. 진하게 검었던 아버지의 머리카락은 물이 맞지 않고, 1년 내내 여름 한번 없는 북극의 추운 지방에서 너무 고생하여서 머리카락이 다 빠져 대머리가 되어 버리셨고 두툼했던 얼굴 살은 다 어디 갔는지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고생해서 일을 했지만 북한 당국의 당자금으로 몽땅 착취당했고, 단 1원 한 푼도 못 받고 러시아 빵 3박스만 가지고 집에 돌아왔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그래도 아버지가 살아서 돌아오신 것을 위안 삼아야 했다. 나는 아버지가 그렇게 고생하고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학교에서 집에만 오면 언니와 동생들과 맨날 싸움박질을 해댔다. 이렇게 나는 학교에서는 공부도 잘하고 칭찬을 잘 받는 모범학생이지만 집에만 오면 천덕꾸러기가 되는 생활을 하며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갔다. 3. 일요일에 수상한 외할아버지 그 당시 우리가 살았던 외할아버지 댁은 함경도 산 속 시골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산에 감자나 밀, 보리 등을 심어서 생계를 유지하며 사셨다. 듣기로는 유학도 다녀오시고 원래는 평양에 계셨다고 한다. 그런데 왜 지금은 이 시골에 계시는지 어린 나로서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상하게 외할아버지는 일요일만 되면 텔레비전을 보고 싶어 놀러 오는 나와 외할머니에게 오전에는 옆집에 가서 놀다가 오라고 보내셨다. 그 날은 꼭 인근에 몇 십리 떨어진 산골짜기의 다른 집에 어른들 몇 분이 와서 회의를 한다고 하면서 오전에는 다른 집에 가서 놀다가 오후에 오라고 하곤 하였다. 우리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가 전처와 사별하고 이후에 재혼하셨다고 했는데 평소에도 순종적인 분이라 외할아버지 말씀에 묻지도 않고 하라는 대로 옆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오셨지만 나는 괜히 불만이었다. 그 당시에는 일요일만 텔레비전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봐야 되는데 왜 자꾸 딴 데 가라 하시는지, 빨간 날은 휴식하는 날인데 왜 집에서 무슨 회의를 하는 건지… 궁금은 했지만 워낙 어릴 때라 짜증만 내고 말았다. 4. 크리스천이었던 외할아버지 나중에 탈북을 해서 남한에까지 온 다음에야 나는 왜 외할아버지께서 그러셨는지 알 수 있었다. 하루는 탈북 성도들 모임이 있어서 갔는데 그 모임을 인도하시던 목사님께서 자신이 선교 사역 중에 입수한 북한에서 나온 중국어 성경책을 사진으로 보여주셨다. 한글성경이 아니라 한문으로 기록된 옛날 성경이다. 그런데 그 책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전에 어디서도 그 책을 본 적이 없어야 할 터인데 분명 내가 확실히 본 적이 있는 책이었다. ‘왜일까? 왜 내가 저 책이 낯설지 않을까’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야 나는 그 책이 외할아버지 댁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전에 북에 있을 때 골동품을 밀수해서 팔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해서 집에 팔만한 것들을 찾다가 한자가 잔뜩 적힌 책 한 권을 보고 팔려고 했다가 못 팔았었는데, 그 책이 바로 그 사진 속의 책이었기 때문에 확실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확인하자 외할아버지가 일요일마다 나와 할머니를 다른 곳으로 보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 외할아버지도 남모르게 믿음을 지킨 크리스천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외할아버지가 평양에서 함경도 산골짜기로 오게 된 것도 종교적인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 같다. 다행히 교회 내 주요 인사가 아니셨는지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서 고통을 당하지 않고 생명은 부지하셨지만 추방을 당해 이 산골짜기까지 오셨던 것이다. (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
경산시 북부동, 사랑의 농장에서 수확한 고구마 저소득층에 전달경산시 북부동(동장 양훈근)에서는 11일 동 직원들과 미화원들이 함께 작업해 사랑의 농장에서 고구마를 수확했다. 예전 임당동 632번지 일대는 상습적인 불법 쓰레기 무단투기 지역이었으나, 2011년부터 코스모스 단지나 메밀밭을 조성해 불법 투기 방지 및 시민들을 위한 도심 속 자연 휴식 장소로 활용되어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올해 5월부터는 고구마를 재배해 수확한 작물을 저소득층에 기부하는 ‘사랑의 농장’ 운영을 시작했다. 기나긴 폭염과 태풍 등의 기상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풍작을 이루어낸 데에는 직원들의 정성과 노력이 있었다. 양훈근 북부동장은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저소득층 가정에, 직원들이 정성껏 수확한 농작물을 나눠 드릴 수 있어 기쁘다. 앞으로도 다양한 농작물을 재배하는 등 희망을 심는 사랑의 농장을 운영하겠다”고 말했다.
-
경북지역자율방재단, 태풍 피해복구에 구슬땀경상북도지역자율방재단(회장 이중규)은 10일(수) 제25호 태풍 ‘콩레이’로 피해를 입은 영덕지역 주민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피해복구 활동을 실시했다고 밝혔다. 영덕군은 지난 10월 5~6일 발생한 태풍으로 309mm의 폭우와 강풍으로 사망 1명의 인명피해와 1,113동의 주택침수, 328세대 551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경북도 지역자율방재단원 300여명은 태풍으로 침수된 영덕군 강구면․축산면에서 배수작업, 집안가재도구 정리와 도로변 쓰레기를 정리하는 등 하루라도 빨리 영덕 주민들이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피해복구에 힘을 보탰다. 지역자율방재단은 지난 1967년 제정된 풍수해대책법에 따라 지역의 지리와 실정에 밝은 이․통장, 민방위대원을 주축으로 구성된 수방단이 2013년 자연재해대책법 개정에 따라 전국 시도에서 지역자율방재단을 구성하였으며, 경북도는 23개 시군 278개단 5천191여명의 단원들이 도내 거주지에서 재난예방활동과 복구지원을 하고 있다. 김남일 경북도 재난안전실장은 “재난 예방과 복구에는 행정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이번 태풍과 같은 재난에는 지역자율방재단 등과 같은 단체들의 봉사활동이 실질적인 큰 도움이 된다”며 많은 도민들의 동참을 당부했다.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use'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8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skin'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9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use'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8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skin'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9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use'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8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skin'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