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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풍각제일교회, 소장자료 경상북도 등록문화재 제1호 지정 감사예배 드려청도 풍각제일교회(위임목사 김영호)는 지난 11월 19일(주일) 본 교회당에서 교회의 소장자료 중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공문과 보고서 등 31건(1,008점)이 경상북도 등록문화재 제1호로 문화재 등록된 것을 감사하는 예배를 드렸다. 풍각제일교회(당시 송서교회)는 우리나라 개신교 선교 140년 역사상 19세기에 경상북도 지역에 최초로 세워진 교회 중 한 교회이다. 그렇기에 풍각제일교회의 소장자료가 경상북도의 첫 번째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매우 의미가 있는 일이다. 풍각제일교회는 앞서 지난 2월 청도군청 문화관광과에 교회의 소장자료들에 대한 등록문화재 지정 신청을 했고, 경상북도 문화재위원회의 현장조사와 심의를 거친 후 지난 8월 24일 소장자료 31건(1,008점)이 경상북도 등록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 특별히 이번 등록문화재 중에는 故 이춘중 목사의 ‘독립선언서 필사본’이 포함돼 눈길을 끌었다. 풍각제일교회 김영호 목사는 “이춘중 목사의 기미독립선언서 필사본은 문화재위원들도 큰 관심을 보인 것이었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당시 이춘중 목사는 이 독립선언서 필사본을 청도 유천 독립만세운동에 사용하려고 필사했으며, 이후 자전거 프레임에 숨겨서 평양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교회들을 방문하여 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면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을 알리는 데 사용한 귀중한 독립선언서”라고 밝혔다. 현재 문화재가 된 기미독립선언서 가운데 필사본은 이것이 유일하다. 당시 독립만세운동 현장에는 인쇄본 독립선언서가 절대 부족하여 등사해서 사용하기도 했고, 그것도 부족하여 필사한 독립선언서를 사용했다는 증거물이 바로 이춘중 목사의 필사본 독립선언서이다. 등록문화재에는 그 외에도 풍각제일교회당회록 제1권(1916.10.29.~1954.7.4., 총68장)과 제2권(1954.8.14.~1974.12.29., 총100장),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공문 및 보고서(1922년 발행, 총14장), 김병호 목사 강도기(풍각제일교회 초대목사인 김병호 목사의 설교집, 1910~1920년대), 복음요사(기포드(Gifford) 선교사 번역, 1896년 출판) 등이 포함돼 있다. 그리고 참으로 뜻깊은 문화재는 선교사들의 한자 학습 카드이다. 재한 선교사들은 한글 공부도 해야 했지만, 한국에서 글을 읽기 위해서는 한자 공부도 해야 했다. 선교사들이 한자 공부를 어떻게 했는지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날 1부 감사예배는 대구동노회(노회장:이하규 장로) 주관으로 드렸다. 서기 박재수 목사의 인도로, 장로부노회장 장원덕 장로의 기도 후,직전노회장 박병욱 목사(대구중앙교회)가 ‘영원히 기념이 되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박 목사는 “풍각제일교회의 유물이 경상북도 문화재로 등록된 일로 말미암아 과거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생생하게 기억될 것”이라며, “과거의 기억은 현재에 교훈을 주고, 미래를 향한 도전에 힘을 줄 것”이라고 전했다. 2부 감사와 축하는 풍각제일교회 김영호 목사의 사회로 진행했다. 풍각제일교회 김성권 장로의 경과보고, 경상북도 문화재위원 김무진 교수의 풍각제일교회 소장자료 가치에 대한 설명, 대구동노회장 이하규 장로, 이선희 경북도의원, 김효태 청도군의회 의장, 청도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김진모 목사의 축사가 있었다. 이어서 故 이춘중 목사의 손자 이철우 집사(문화재 19점 기증)의 인사, 영파 박용묵 목사의 자료 6점을 기증한 박재천 목사의 축시 낭독이 있었다. 특히 청도문인협회장 박영환 선생은 “소중한 유산-청도 풍각제일교회 소장자료 문화재 지정을 축하하며”라는 축시에서 “북극성처럼 빛나는/십자가 아래/125년을 지켜온 풍각제일교회의/거룩한 성전에는/걸어온 발자국마다/고귀한 문화유산이 깃들어 숨 쉬고 있다”고 노래하며, 풍각제일교회 신앙유산은 “고고한 함성”이며 “큰 등불”이고 “밝은 거울”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김영호 목사는 “이번에 선정된 유물들이 기독교 선교 과정과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믿는다”면서 “그동안 도움을 주신 모든 분께 감사를 드린다”고 인사했다. 아울러 “아직은 본 교회에 있는 역사관 장소가 협소해 아쉬움이 있다. 하루속히 수장고와 박물관이 건축되어 유물과 자료가 잘 보존되고 전시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경상북도 등록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청도풍각제일교회 소장자료 31건의 목록. 1. 풍각제일교회당회록 제1권 2. 풍각제일교회당회록 제2권 3.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공문 및 보고서와 교회 역사 4. 김병호 목사 강도기 5. 복음요사 6. 변증론 7. 강도학(講道學) 8. 사도행전 9. 신학공과(神學工課) 10. 요리문답 11. 구약총론/고등비평/갈라디아서 12. 1921년 가을학기노트 13. 1922년 노트 14. 성경공부 교안 15. 잡기장(雜記帳) 16. 이사야서/종교심리학/주교교수법 17. 교회사기복습문답기/주일학교조직/예레미야 18. 선지서/요엘서/아모스/요나서/에스겔/묵시 19. 구원/로마서/골노새설교강해 20. 말세론/베드로전서 21. 설교집:눌어기(訥語記) 22. 이춘중 목사 필사본 독립선언서 23. 길림신학교 강의 노트 24. 신학 논문 25. 연구지(해방 후 연구와 설교 제2권) 26. 잡기장(해방 후 연구와 설교 제3권) 27. 설교·교안 연구지(해방 후 제4권)/요나서 강해부(附) 28. 연구(해방 후 설교집 제6권) 29. 근저당권설정계약서 30. 기독교 포교일지 그날 그시 31. 선교사 한자 공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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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학교아동부전국연합회, 제32회 전국어린이대회 성료예장통합 교회학교아동부전국연합회(회장:조성현 장로)가 주관한 제32회 전국어린이대회가 8월 17일(목) 광주 무등교회(오용선 목사 시무)에서 개최돼, 전국에서 모인 500여 명의 주일학교 학생들이 실력을 겨루는 시간을 가졌다. 1부 예배는 수석부회장 한상식 장로 인도로 직전회장 김삼문 장로 기도, 서기 주금노 장로 성경봉독, 광주영락교회 어린이찬양단의 찬양 후 총회교육자원부장 윤마태 목사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제하의 설교, 회계 권경주 장로 헌금기도, 교육부장 박남규 장로가 ‘온 땅의 어린이를 그리스도에게로!’ 표어제창, 광주무등교회 오용선 목사의 축도로 마쳤다. 2부 축하 시간에는 총무 최영만 장로 사회로 대회장 조성현 장로의 대회사, 총회 교육훈련처 총무 김명옥 목사의 격려사, 대회 선언, 최시원·정민 어린이가 대회 선서 후 종목별 대회 진행을 위해 지정된 장소로 이동했다. 3부에서는 총 9개 종목(성경고사/성경암송/영어성경암송/성경동화구연/글짓기/그리기/독창/중창/찬양율동)에서 1시간 30분 동안 대회가 치루어졌고, 레크레이션 이후 시상식을 진행하고 마무리했다. 회장 조성현 장로는 “봄에 시작해 여름에 끝나는 어린이대회 기간 동안 많은 어린이와 교사들이 수고한 것으로 안다. 그러나 이 과정들이 수고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주님을 만나는 귀한 시간이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전국어린이대회에서 영남협의회 소속 16개 노회는 대상 11팀, 특별대상 1팀, 금상 16팀, 은상 32팀, 동상 21팀 등 총 81개 팀이 상을 받게 돼 기쁨을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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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안동교회1909년~1952년 예배에 관한 연구(3)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론 1. 김영옥 목사(초대) 시대의 예배 2. 이대영(2대)·정재순 목사(3대) 시대의 예배 3. 박상동(4대)·임학수(5대)·김영옥 목사(6대) 시대의 예배 4. 김광현 목사(7대) 시대의 예배 결론 1. 김영옥 목사(초대) 시대의 예배 / 1909년~1920년 말(3) 3) 수요예배 수요예배에 관해 처음으로 기록된 1917년 2월 22일 당회록에는 수요저녁예배라는 명칭으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수요저녁예배에는 설교만 할 것이 아니고 모든 교인이 신구약성경 좋은 구절을 택하여 암송도 하고 통독도 하기로 결정하다.” 안동교회의 수요저녁예배가 정확하게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1917년에 안동교회는 수요저녁예배를 가졌는데, 수요저녁예배는 주일오전예배에 비해 보다 간단했다. 따라서 1910년대 안동교회의 수요예배는 마포삼열 선교사가 제안한 예배순서, 즉 찬송→기도→찬송→성경→강도→찬송의 틀을 그대로 유지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4) 새벽기도회 길선주 목사의 특별집회 기간 중에 새벽기도회가 실시되었다. 평양 대부흥운동의 결과 한국교회의 전통으로 길선주 목사에 의해 확산된 새벽기도운동이다. 이후 새벽기도회는 한국교회 공예배의 하나로 정착되었다. 사실 평양 대부흥 이전에도 새벽기도회로 모이는 교회가 있었다. 한국 새벽기도에 관한 기록 중에서 1903년에 로스 선교사의 글에서 “왕 목사(현지인 목사)는 새벽에 일어나 손자들과 함께 새벽기도를 드렸다”라는 기록과 만주에서 세례를 받은 백홍준이 새문안교회에 출석하고 있을 때 매일 새벽기도를 가졌다. 하지만 새벽기도회는 대부흥 이후 전국 교회로 확산되었다. 기독교에 입문하기 전 도교와 선불교에서 새벽기도를 경험한 적이 있던 길선주 목사는 한국교회에 새벽기도회를 도입하였다. 길선주 목사의 집회가 시작된 다음 날 11월 14일(월) 오월번 선교사가 새벽 6시 새벽기도회(Sunrise prayer meeting)에 참석했음을 새디(Sadie)의 다이어리는 기록한다. 부흥사경회 이전까지 안동교회가 새벽기도회로 모였다는 기록은 새디의 다이어리에서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집회가 끝난 후 새벽기도회가 지속되었다는 기록 역시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길선주 목사를 통해 안동교회에 새벽기도회가 소개되어 길 목사 집회 기간 중에 한시적으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5) 외국인예배 외국인예배는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드린 예배였다. 새디 선교사가 안동에 도착해서 함께 동역하던 권찬영 선교사와 별리추 선교사는 모두 독신이었다. 오월번, 새디 선교사 부부만 자녀를 둔 가정이었다. 따라서 안동에서의 외국인 예배는 자연스럽게 오월번 선교사 사택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오월번 선교사 가족이 안동에 도착한 지 1달 후인 7월 3일, 공식적으로 감격적인 첫 외국인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새디의 다이어리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4시 30분을 외국인 영어 예배시간으로 기록하고 있다. 오후 예배를 마치고 선교사들이 오월번 선교사 사택에서 식사한 기록도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6) 주일학교 성경공부 안동교회 80년사에 따르면 주일학교는 1914년 2월에 준공된 2층 목조 함석지붕 예배당에서 아침 9시 예배를 시작하여 1시간 동안 예배를 드린 후 계속해서 분반(分班)하여 지정된 교사에 의해 성경공부를 계속했다. 남장년부에는 청·장·노년의 광범위한 연령층이 함께 모여 성경공부를 했으며, 공부시간은 주일 아침 유년부(오늘의 초등학생부)의 예배와 성경공부가 끝난 뒤 곧바로 10~11시부터 예배당을 사용하였다. 성경공부교재는 아동부와 마찬가지로 선교본부로부터 가져온 교재 원본을 등사하여 담임목사와 선교사들이 교사들에게 가르친 후에 학생들과 분반공부를 하게 하였다. 여장년부는 세 부서 중에서 가장 활성화된 부서였으며, 유년부 예배가 끝난 후 남장년부와 동일한 시간에 휘장으로 분리된 예배당에서 운영되었다. 7) 예배당의 구조와 예배모습 오월번 선교사의 부인인 새디 선교사의 1910년 9월 23일 일기에는 ‘ㄱ’자 예배당 부지를 구입하여 대지를 고르게 했음을 기록한다. 당시 안동교회 성도들은 예배당 건축을 위한 헌금을 했다. 에비여사에 따르면 1910년 10월 9일 주일 오후 예배 시 16칸 ‘ㄱ’ 예배당 건축을 위해 특별헌금을 했다고 기록한다. 16칸 예배당은 30평 가까운 공간으로 결코 작지 않은 규모였다. 남녀유별의 유교적 풍습에 따라 남자와 여자의 출입 동선을 분리해야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ㄱ’자 예배당으로 건축되었다. 또한, 50평 규모의 안동교회 두 번째 신축예배당은 1913년 11월에 공사를 착수하여 1914년 2월에 준공되었다. 안동교회의 두 번째 예배당인 2층 목조 함석지붕 예배당은 가운데 남녀 분리를 위한 휘장이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 예배는 의자 없이 마루로 된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기도할 때는 모두 꿇어앉아 머리를 땅에 대고 절하는 형식을 취했다. 당시 풍속에 따라 휘장(Curtain)으로 남녀를 분리했다. 일반적으로 강대상을 바라보며 오른쪽은 여성이, 남성은 왼쪽을 사용하였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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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노회 여름성경학교 교사강습회 개최예장합동 구미노회 주일학교연합회(회장:허광숙 권사) 제37회기 여름성경학교 교사강습회가 6월 16일(금)~17일(토) 이틀 동안 구미제일교회당에서 개최됐다. ‘여호와 샬롬, 기드온과 함께하는 샬롬 이야기’(요16:33)를 주제로 모인 올해 교사강습회에는 300여 명의 교사와 아이들이 참석해 찬양율동, 특강, 교사부흥회 및 기도회, 코너학습, 공과 교육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특히 첫째날 저녁에 열린 교사부흥회에는 김신근 목사(서울 해성교회)가 강사로 나서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는 교사’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했으며, 기도회는 김경택 목사(구미제일교회)가 인도했다. 찬양율동 지도는 정이나 사모(대구동문교회), 중고등부 특강은 김 맥 목사(초량교회)와 이길호 목사(제자로교회)가 했으며, 영유아부/유치부/유년부/초등부 공과 교육은 김희정 전도사(대구부광교회), 최 란 전도사(신부산교회), 안은정 전도사(부산중앙교회), 문찬호 목사(온천제일교회)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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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구미남부교회 ‘어린이 총동원 전도주일’ ··· 80명의 기적!긴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사랑스런 아이들이 하나 둘 교회를 떠나 어느덧 세 명의 아이들만 남아 예배드린 지 벌써 3년이 흘렀고···. 주일학교 교사들이 지쳐서 낙심하고 있을 무렵, 코로나 엔데믹 선언이 눈앞에 다가오던 지난 3월 말이었습니다. 목사님(구미남부교회 최성수 담임목사)께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다시 한번 힘을 내시고, 주일학교 회복을 위해 ‘총동원 전도주일’을 갖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전도주일 목표를 100명으로 세우고 목사님께서 선포하시자 모두 자신 없어 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주일학교는 교회의 미래이다. 우리같이 작은교회가 이 일을 이루어내면 주위의 교회들도 다시 한번 다음세대의 부흥을 꿈꾸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격려하셨습니다. 그리하여 5월 21일 주일을 총동원 전도주일로 정하고, 전국적으로 ‘가스펠매직’을 사역하시는 정민우 전도사님을 초청해 특별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아울러 이 행사를 위해 전 교인이 협조했습니다. 4월부터 기도로 준비했으며, 5월 8일부터 두 주간은 성도들이 매일 밤 집중적으로 릴레이 기도로 밀어주셨습니다. 또 4월과 5월은 토요일마다 주일학교 아이들을 교회로 초대해 맛있는 점심과 놀이로 함께 하며 교회로 오는 것이 익숙해지도록 했습니다. 행사를 앞둔 두 주간 동안은 주일학교 교사들과 함께 매일 학교 앞, 공원 등을 다니며 직접 전도를 했습니다. 드디어 전도주일 당일, 80여명의 아이들이 우리 교회를 방문해 자리를 가득 채우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대부분은 처음 교회에 나온 아이들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오직 구원은 예수님께만 있다”는 복음을 전하셨고, 결단하며 기도하는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행사 후 2주가 지난 지금은 30여명의 아이들이 출석하고 있고, 다녀간 아이들도 계속 교회에 오도록 연락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도전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각 교회의 주일학교에도 더 큰 부흥이 일어나 하나님 나라가 더욱 확장되기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구미남부교회 강순영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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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척곡교회 창립 116주년, ‘교회 사료 전시회’ 열어봉화척곡교회(박영순 목사 시무)가 교회 창립 116주년을 맞아 지난 5월 28일(주일) ‘감사예배 및 교회사료 전시회’를 개최했다.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교회인 봉화척곡교회는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257호,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문화재자료 제590호, 총회사적 제3호, 영주노회사적 제1호로 지정된 교회이기도 하다. 감사예배는 박영순 담임목사의 인도로 춘양시찰장 노태진 목사의 기도, 김병호 장로(경북항공고등학교 이사장)의 특송, 장로회신학대학교 명예교수 임희국 목사의 ‘하나님의 약속이 깊은 낙향’ 제하의 설교, 최갑도 목사(성내교회 원로)의 축도 순서로 드렸다. 이어 2부 교회 사료 전시회(개관식)에서는 서원석 장로(새문안교회 원로)가 축사를 하고, 테이프 커팅과 축하 순서를 가졌다. 교회 측은 이날 예배당 옆에 있는 ‘명동서숙’에 교회 자료 전시관을 개관했다. 당일에 전시된 자료들은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문화재자료 제590호로 등록된 봉화척곡교회 학습 세례교인 명부, 척곡장로교회 면려회 회의록, 봉화척곡 면려회 출석부, 척곡교회 기본금 기성회의록, 당회록 2호 등의 원본 전적 자료들이었다. 아울러 교회 창립자이신 故 김종숙 목사의 소장 도서인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1930년 개정판), 예수교장로회 예식서(1925), 신학지남(1919년), 요한복음공과(1925), 조선예수교장로회 종교교육부 교사양성과(1927), 주일학교교습법(1927) 등 14점, 그 외에 1920년~30년대의 신앙도서들이 전시됐다. 특별히 전시관 한쪽 벽에는 교회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돌아보고’(과거 사진과 간단한 교회 소개)와 ‘내다보고’(현재 성도들과 교회학교 학생들 사진)라는 타이틀 아래 사진들이 꾸며져 있었다. 박영순 담임목사는 “이 첩첩산중에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된 지 23년여 만에 교회가 세워지고 학교가 세워진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선조들의 기도와 헌신으로 세워지고 지켜져 우리에게 맡겨진 이 교회를 흥왕하게 하기 위해 다음 세대 양육에 더 힘쓰고 있습니다. 생명력 있는 교회가 되도록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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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 봉황교회, 설립 122주년 기념감사예배 드려군위 봉황교회(담임목사 김상인)가 설립 122주년을 맞아 지난 4월 29일 본교회당에서 기념감사예배와 홈커밍데이 및 은퇴임직추대식 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는 봉황교회 출신의 목회자와 장로, 성도들이 오랜만에 고향 교회에서 만나 얼굴을 대하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특별히 홍석환 장로(강북성산교회)를 비롯한 봉황교회 출신 장로 10여 명은 이번에 설립 122주년을 기념하는 ‘기념석’을 기증해 교회 앞마당에 세움으로써 모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표하기도 했다. 1부 기념예배는 당회장 김상인 목사의 인도로 드렸으며, 고무칠 장로(효목교회 은퇴, 봉황교회 출신)가 기도하고 홍동명 목사(강북성산교회 원로, 봉황교회 출신))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이어 2부 기념식에서는 교회역사 영상 상영 및 연혁 소개, 기념석 전달식, 봉황교회 출신 장로 일동의 특송 순서가 있었다. 3부 은퇴&임직 추대식에서는 홍재식 장로와 홍상일 김종배 집사, 박순화 권사가 은퇴를 했으며, 홍익표 집사가 집사장립을, 김춘옥 권사가 권사취임을 했다. 아울러 이재화 박순늠 김영애 권사가 명예권사로 추대받았다. 임직자와 교우들을 위한 권면은 하윤도 목사(소보교회)가 했다. 이어서 최석천 목사(서경교회)의 축사, 김찬양(하늘꿈교회)의 축가, 기념품 증정, 임직자 대표의 인사가 있었고, 경신노회장 육수한 목사의 축도로 폐회했다. 김상인 담임목사는 “지금까지 모든 길을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면서 “지나온 122년을 뒤로 하고 다시 복음으로 100년을 향해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길 소망한다”고 인사했다. 봉황교회 출신으로 예장합동 제107회 총회 재정부장인 홍석환 장로는 “어린시절 봉황교회 주일학교에서 배웠던 신앙교육이 신앙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한편, 봉황교회는 1901년 김점권 외 2~3명이 예수를 믿고 교회를 설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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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7)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7) 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문 1. 안동 땅을 밟은 첫 선교사, 베어드 2. 첫 교회들, 비봉·국곡·풍산교회 ............................................... 8. 안동지역의 첫 한국인 목사, 김영옥 9. 안동지역 초기 교회음악 지도자들 ............................................... 13. 최초 성경학교, 안동여자성경학교 결론 8. 안동지역의 첫 한국인 목사, 김영옥(金泳玉) / 1911년 김영옥(1871~1952)은 1871년 4월 12일 황해도 연백군에서 출생했다. 18세가 되던 1888년, 그는 가난에서 탈출하기 위해 미국 하와이로 이민 갈 계획을 하던 중 평산 누님댁에 갔다가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 세례까지 받게 되었다. 이때 세례를 받은 김영옥은 수년 동안 선교사의 도움으로 성경을 공부했는데, 1년 만에 한문 신·구약 성경을 모두 읽고전도법과 장로교회, 그리고 간단한 영어공부도 했다. 또한, 한국교회 최초의 신학교라고 할 수 있는 평양신학교 성경훈련반에서 매서인(賣書人) 집중교육을 받았다. 그 결과 김영옥은 공식적인 매서인으로 사역할 수 있었다. 1893년 모삼열 선교사의 조사가 된 김영옥은 서울 종로에서 전도를 통해 회심한 성도들이 연동교회를 설립하도록 도왔으며, 승동교회와 동막교회 설립에 협력하다가 경기 동편과 황해도 이남으로 순행 전도하여 백천, 평산, 금북, 금성, 양구, 화천 등지에 교회들을 설립했다. 그는 1898년에는 모삼열 선교사와 함께 전도하고 개척한 고향 백천군 운교교회 영수와 장로로 섬겼다. 김영옥은 전문적인 훈련을 거친 한국교회 초기 매서인과 조사, 그리고 영수요 장로로 초기 한국교회의 평신도 지도자였던 것이다. 조사 김영옥의 사역은 1903년부터 시작된 웰번 선교사와의 동역으로 빛을 보게 된다. 강원도 철원, 춘천 등지에서 전도하고 철원읍교회를 설립했으며, 1907년 원주읍교회 조사로 교회를 섬겼다. 1909년 11월 웰번 선교사와 함께 안동으로 이사한 김영옥은 안동을 중심으로 인근 지역을 순방하며 전도했으며, 안동읍 최초의 교회인 안동교회(1909년 8월 둘째 주일 설립)의 예배를 인도했다. 특히 김영옥은 만 30세에 평양신학교(1901년 개교)에 입학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만 40세인 1911년(제4회)에 졸업하고, 1911년 9월 대구제일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안동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이렇게 하여 김영옥은 안동교회의 초대목사인 동시에 경북 북부지방 최초의 한인 목사가 되었다. 김영옥 목사의 뛰어난 영적 지도력은 안동지역의 복음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김영옥 목사가 담임으로 안동교회를 섬겼던 1911년부터 1921년까지 안동교회는 안동지역의 중심교회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다. 1911년 오늘의 초등학교인 계명학교를 설립했으며, 1913년에는 김병우를 장로 장립함으로써 안동지역 최초로 당회가 구성되었고, 주일학교와 여름성경학교를 조직하여 어린이들의 신앙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13년 여전도회를 조직하고 도사경회를 개최함으로써 여성들의 신앙교육에도 집중했으며, 1920년 안동기독청년회를 조직하고, 1921년 전국 최초로 기독청년면려회를 조직함으로 청년의 신앙교육에 큰 획을 그었다. 안동교회는 100년이 넘는 역사에 단 3번 예배당을 준공했는데, 김영옥 목사가 시무하던 기간 동안 두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첫 예배당은 그가 담임조사로 시무할 때인 1910년으로 16칸 ‘ㄱ’자 예배당을 건축했는데, 이때 지방 순회 때 타고 다니던 당나귀를 팔아 건축헌금에 보탰다고 한다. 안동교회의 두 번째 예배당인 2층 목조 함석지붕 예배당은 1914년 초준공되었는데, 이때도 김영옥 목사는 선교사가 사준 가옥을 팔아 헌금했을 정도로 교회를 위해 헌신했던 분이다. 아울러 김영옥 목사는 안동지역과 경북 북부의 초대 교회들을 든든히 세운 교회지도자였다. 영주, 지곡, 명동, 풍산, 수동 등 교역자가 없는 미약한 교회들의 순회목사로 사역함으로써 이들 교회가 중심을 잡을 수 있게 했다. 그는 안동교회를 떠난 후에는 경산 사월교회, 포항제일교회, 영주제일교회, 경주제일교회, 풍기 성내교회 등 경북 북부지역의 어머니(母) 교회와 같은 교회들을 담임함으로써 이들 교회가 안정적으로 지역복음화의 중심역할을 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김영옥 목사는 평생을 복음전도와 교회 목회에 전념한 목회자 중의 롤모델(Role Model)과도 같았다. 그는 일제 식민통치 하에서 여러 번 검속과 체포 등으로 고난을 당했지만, 다시 교회로 돌아와 목회에 충실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 광복, 건국, 전쟁 속에서 치열한 삶을 살았기에 교회의 목사로서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지역사회의 리더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김영옥 목사를 통해 한국교회에 명문 신앙가문이 세워졌다. 손자인 김형태 목사에 따르면 1대인 김영옥 목사, 2대인 김영옥 목사의 장남인 김은석 목사, 3대인 김은석 목사의 자녀인 김형칠 목사, 김형일 목사, 김형태 목사, 김형달 목사, 김형숙 목사, 4대 김형규 목사, 김대규 목사 후보생 등 4대에 걸쳐 9명의 교역자가 배출되었다는 것이다. 김영옥 목사는 한국교회 130년 역사 가운데 다시 배출되기 힘든, 그러나 모두에게 까맣게 잊혀진 최고의 명품 목사라고 할 수 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 안동교회가 두번째로 준공한 목조 함석지붕 반(半) 2층 예배당을 배경으로 서 있는 당시 교회 지도자들. 앞줄 왼쪽부터 크로더스 선교사, 인노절 선교사, 김영옥 목사, 웰번 선교사로 추측됨. 뒷줄 왼쪽 첫번째는 김병우 장로, 나머지 분들은 당시 시무장로인 이중희·엄응삼 장로가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나머지 분들도 평신도 지도자였을 가능성이 높다.(사진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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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교회 ‘한국교회 섬김의 날’ 선포▲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가 한국교회 섬김의 날을 선포하며 한국교회의 부흥을 기원하고 있다. 사랑의교회(오정현 목사)가 9월 26일을 ‘한국교회 섬김의 날’로 선포했다. 교단 언론 보도에 따르면, 사랑의교회는 ‘한국교회 섬김의 날’에 코로나19로 지친 목회자 부부, 신학생, 교회지도자 5,000명을 초청해 섬기게 된다. 사랑의교회는 “지난 44년 동안 한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로 세우는 사명에 전력해 왔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 새로운 사역의 돌파구가 필요한 지금, 사랑의교회 온 성도들의 진심을 담아 한국교회를 섬기고자 한다”고 밝혔다. 9월 26일부터 27일까지 양일간 열리는 한국교회 섬김의 날은 치유와 회복으로 구성된다. 26일 첫째 날은 말씀의 은혜, 고품격 문화공연 등 ‘회복’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오후 2시 개회예배에 이어 3가지 회복의 메시지가 선포된다. 회복의 메시지에 이어 문화공연이 진행되며, 산상기도회가 뒤를 잇는다. 27일 둘째 날은 ‘부흥’이 핵심 키워드다. 즉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비밀 병기’가 공개된다. 사랑의교회는 코로나 팬데믹 중에도 ‘창조적인 목회자들의 모임’(창목회)을 지속해 왔다. 오정현 담임목사가 창목회에서 나눈 핵심 메시지를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나눌 예정이다. 이어 예배, 찬양, 상담, 전도, 대각성, 새가족, 목양, 순장반, 양육, 훈련, 주일학교, 대학부, 청년부, 특새, 토비새, 가정사역, 실버사역, 메타버스 등 다양한 전문 사역자들이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 사역의 노하우를 공유하는 선택강의가 진행된다. 한국교회 섬김의 날은 단순한 행사로 끝나지 않는다. 선포를 삶으로 이어가는 ‘코로나 극복 40일 캠페인 우리가 교회입니다’가 준비됐다. 사랑의교회는 미래자립교회 1,000곳을 대상으로 ‘40일 캠페인 묵상집’과 ‘주말성경공부 교재’를 제공한다. 한편, 사랑의교회는 한국교회 섬김의 날이 천국잔치가 되도록 8월 29일부터 매일 새벽 ‘강단기도회’를 드리며 부흥의 역사를 사모하고 있다. 오정현 목사는 “사랑의교회 온 성도들이 마음 모아 한국교회 섬김의 날을 위해 기도할 때 한국교회가 회복을 넘어 부흥을 경험하는 거룩한 시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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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6·끝)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6·끝)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안대선 선교사 (W.J.Anderson, 1890~1960) 목차 서문 1. 안대선의 출생지 2. 안대선의 출신대학과 신학대학원 3. 안대선의 결혼과 사별 4. 안대선의 안동선교부 부임 5. 안대선과 안동기독청년면려회 6. 안대선과 전국기독청년면려회 7. 안대선의 그 외 사역 8. 안대선의 퇴임 및 별세 7. 안대선의 그 외 사역 1) 순회전도 및 교회개척 사역 안동선교부에서 안대선의 사역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청년면려회 사역, 성경교수 사역, 그리고 순회전도 사역이다. 안대선은 다른 선교사들처럼 골골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고, 교회가 없는 마을에는 교회를 개척했으며, 이미 세워진 교회들이 견고히 서갈 수 있도록 돌보는 등 여느 선교사들처럼 순회전도사역에 최선을 다했다. 안대선은 안동을 근거지로 영주, 의성, 예천, 청송 지역 등을 찾아가 복음을 전했다. 1922년 서울로 선교지를 옮긴 안대선은 청년면려회 사역뿐 아니라 계속해서 순회전도를 통해 복음을 전했다. 서울의 여러 곳에 교회를 개척했으며, 이미 설립된 교회가 든든히 서갈 수 있도록 평신도들을 양육하고 돌보는 일에도 열심을 다했다. 참고로 그는 1926년 6월 6일, 서울 마포교회를 개척했다. 2) 찬송가 사역 안대선은 찬송가 사역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한국의 찬송가 발전에 한 축을 담당했다. 1924년에 조선 기독교 연합공의회가 새로 조직되었는데, 그 첫 사업으로 1924년 장·감연합공의회는 새로운 찬송가의 간행을 계획하여 1931년 314곡의 찬송가를 편집 간행했다. 이것을 ‘신정 찬송가’라고 부른다. 특히 1935년 11월에는 신정 찬송가에서 70여 곡을 선정하고, 성결교회 복음가 중에서 새로운 곡 100장을 증보한 후 모두 400장으로 된 ‘신편 찬송가’가 발행되었다. 이 일에 현재명과 황재경 등이 참여했는데, 안대선은 실무적인 일을 진행했다. 신편찬송가는 장로교단이 새로운 찬송가를 제작하여 출판한 찬송가로 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에서 직접 발간하였다. 3) 어린이 문서사역 안대선은 어린이 잡지를 통해 신앙으로 어린이들을 세워가는 문서선교에도 최선을 다했다. 1926년 3월 10일에 창간된 ‘아이생활’(Children’s Friend)은 1944년 1월까지 18년간에 걸쳐 통권 218호를 발행한 우리나라 소년소녀 잡지 중 가장 장수한 잡지이다. 창간 이후 ‘아희생활’로 쓰다가, 1930년 11월호부터 ‘아이생활’로 바꾸었다. 허대전, 반우거, 안대선 등이 발행인으로 참여했으며, 편집인도 한석원, 정인과, 허봉락, 송관범, 전영택, 이윤재, 주요섭, 최봉칙, 강병주, 장홍범 등으로 이어오다가 종간되었다. 편집내용은 동화·동시·소설 등 문예작품과 역사사화·성경이야기·위인전기·세계명작 소개 등의 교양물, 그리고 일기·동화·동시작법 등으로 다양하여 많은 어린이에게 꿈과 소망을 심어준 잡지였다. 아이생활은 기독교 가정의 어린이와 주일학교 학생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의 모든 어린이에게 널리 읽히는 잡지가 되었다. 4) 교수사역 안대선은 안동성경학교의 교사로 헌신했을 정도로 성경을 가르치는 교수 사역에 익숙한 선교사였다. 서울에서는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의 원장으로 수고하기도 했다. 피어선성경학원은 설립초기부터 초교파적 복음주의 연합교육기관으로 북장로교와 남·북감리교 선교부가 협력하며 공동운영하였으나,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감리교 선교부가 1935년 경영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이후 북장로교 선교부가 주도하여 경영을 맡기도 하였으나 창립이념인 초교파적 연합정신을 고수하였다. 뿐만아니라 안대선은 어린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에도 열심을 내었다. 8. 안대선의 퇴임 및 별세 1917년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한국으로 출발한 20대 후반의 신혼부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오지인 안동으로 내려와서 사역을 시작한 선교사 초년병 부부. 안대선(Wallace)과 안의리(Lillian)는 한국 선교 역사에 선명한 획을 그은 선교사 부부다. 그가 소개한 청년면려운동은 기독청년들이 어떤 목적을 갖고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깨닫게 했다. 1920년대 초에 시작한 면려운동은 3년 만에 한반도를 정복하여 전국연합회를 조직할 수 있었다. 그후 안대선은 10년 동안 전국면려연합회의 상임총무로 봉사하면서 면려운동을 위해 목숨을 걸고 한반도의 남북을 오르내리고 동서로 횡단했다. 1921년에 시작하여 1938년 해산될 때까지 17년 동안 청년면려운동은 한국교회의 체질을 바꾸고, 한국교회를 건강한 교회로 만들기 위해 사용된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였다. 24년 동안 거룩한 사역을 감당한 안대선은 사랑하는 딸과 아내를 이 땅에 묻었다. 1919년 6월 12일에 출생한 첫 딸 도로시는 7개월 만인 1920년 1월 25일, 풍토병인 이질로 세상을 떠났다. 핏덩어리 도로시를 안동에 묻은 안대선은 슬픔에 잠겨 있을 여유도 없이 청년면려회를 준비하고 소개하는 데 최선을 다해 1921년 2월 5일, 안동교회에서 최초로 면려회가 조직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안의리도 1934년 11월 추수감사절을 보낸 42세 어느 날, 심장마비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안대선은 사랑하는 그를 양화진에 묻었다. 1941년 일제의 강제 추방 명령으로 안대선은 부인 안의리와 첫딸 도로시를 조선 땅에 남기고 세 딸과 함께 일본을 거쳐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다. 24년 동안 한국에서의 사역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강제로 한국을 떠나는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또한, 7년 전 하늘나라로 간 아내 안의리의 묘를 뒤로 하고 떠나는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안의리의 묘비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Till He Comes)”라고 적혀있다. 안대선은 안의리의 묘비에 새겨진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를 생각하며 로스엔젤레스 듀알트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70세가 되던 1960년 12월 5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아희생활’의 표지(사진7) ▲피어선(A.T. Pierson)은 수많은 대학 청년들에게 선교 비전을 심어주었고, 그 영향으로 많은 선교사가 한국과 중국으로 왔다. 피어선은 1910년 조선을 방문해 성경공부를 인도했으나, 병이 악화되어 1911년 6월 3일 뉴욕에서 74세로 별세했다. 사진은 1912년에 세워진 피어선기념성경학교로 출범한 피어선신학교로 현재 평택대학교로 발전했다.(사진8)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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