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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TS, ‘2023 대한민국 목회 컨퍼런스, 세상과의 연결’ 개최CTS기독교TV(감경철 회장)가 주최하고 CTS안동방송 서부지역운영이사회가 주관한 ‘2023 대한민국 목회 컨퍼런스’가 2월 14일 구미시민교회(조민상 목사)에서 개최됐다. 이번 컨퍼런스는 코로나 이후 한국교회의 변화 및 향후 목회 방향 등을 제시하고자 마련됐으며, 유튜브를 통해 온라인으로 동시 진행했다. CTS는 “지난 코로나 3년 동안 넘어지지 않고 오히려 역동성과 생명력을 얻게 된 교회들의 공통점이 ‘세상과 연결된 교회’였다는 점에 주목하여 ‘세상과의 연결’을 주제로 컨퍼런스를 개최하게 됐다”고 밝혔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지용근 대표,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정재영 교수, 소망교회 조성실 목사의 주제강연에 이어 질의응답 및 패널 토론이 있었으며, 전체 진행은 구미시민교회 조민상 목사가 맡았다. 주제 강연에서 정재영 교수는 “한국교회는 코로나 사태 중에 하락했던 사회적 신뢰도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모든 상황에서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 ‘마을 목회’, ‘마을공동체 운동’ 등의 목회 방향을 제안했다. 지용근 대표는 코로나 이후 한국교회 성도들의 신앙 약화 현상, 3040세대의 위기, 소형 교회의 존립 위기 등을 지적하고, “소그룹 활동을 활성화 하면 교인들의 신앙 회복과 안정감에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조성실 목사는 “하이브리드 교회(Hybrid Church)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두 영역 모두를 진정성 있게 돌보는 교회”라며, “교인들의 실질적인 필요를 온·오프라인이라는 넓은 영역속에서 제공할 필요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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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3)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3)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안대선 선교사(W.J.Anderson, 1890~1960) 목차 서문 1. 안대선의 출생지 2. 안대선의 출신대학과 신학대학원 3. 안대선의 결혼과 사별 4. 안대선의 안동선교부 부임 5. 안대선과 안동기독청년면려회 6. 안대선과 전국기독청년면려회 7. 안대선의 그 외 사역 8. 안대선의 퇴임 및 별세 5. 안대선과 안동기독청년면려회(1) 1) 기독청년면려회 기독청년면려회는 미국에서 특정 교파를 배경으로 한 것이 아니라 청년들의 기도회를 통해 자발적으로 생겨난 운동이다. 면려운동은 미국 포틀랜드 시에 있는 윌리스톤교회를 섬기는 클락(F.E.Clark) 목사에 의해 처음으로 시작됐다. 1881년 2월 2일 교회 청년들과 함께 기독교청년면려회(CE)를 조직한 클락 목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For Christ and the Church)라는 표어를 갖고 기도와 성경연구 전도운동에 힘을 쏟았는데, 얼마 되지 않아 미국 전역에 번지게 됐다. 이후 인도, 영국, 캐나다 등에도 면려운동이 전해졌으며 1892년에는 클락 목사가 중국을 방문하면서 아시아에서도 조직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안대선은 미국에서 일어난 면려운동의 성과를 듣고 한국에 소개하기 위해 클락 목사와 여러 차례 서신교환을 하며 그에 대한 자료를 얻어 기독청년면려회를 안동교회 청년회에 소개했다. 면려운동의 근본정신은 기독교 청년의 품격을 교육하여 교회와 사회를 위해서 봉사하는 데 있다. 면려회의 표어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하여’(For Christ And The Church)이다. 3대 결의로는 다음과 같다. 표어는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자, 정직한 나가 되자, 사람에게 신의를 지키자”이고, 주장은 ‘쉬지 않고 나를 교양하자, 나의 교회를 돕자, 방방곡곡에 전도하자, 외지 전도에 힘쓰자’이며, 작정으로는 ‘매 회원 매년 1인 전도주의자가 되자, 회원마다 십일조를 바치자, 내 동리에 신앙운동을 일으키자, 외지의 한국 동포를 구하자’이다. 특히 강령(綱領)은 다음과 같다. ① 우리는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문답을 우리의 신조로 한다, ② 우리는 개혁주의 신앙과 생활을 확립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됨을 우리의 목적으로 한다, ③ 우리의 사명은 다음과 같다: 개혁주의 신앙의 한국교회 건설과 사회의 복음화와 개혁주의 신앙의 세계교회 건설과 세계의 복음화. ④ 우리의 생활 원리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 안대선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안동교회에서 청년면려회 조직 승인을 위한 분위기가 점차 무르익게 되었다. 청년면려회원은 실제로 그리스도를 위한 삶, 교회를 위한 삶을 살아야 했다. 특히 회원은 실생(實生)회원, 학습회원, 명예회원 등으로 구분되었다. 특히 실생(實生)회원의 자격은 나이 17세 이상 40세 이하의 세례교인이었으며, 그리스도의 품성을 가지고 그의 삶을 본받아 살겠다(實生)고 서약해야 했다. 서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봉행(奉行)하기로 힘쓸 것. ② 내가 정한 뜻으로 매일 기도하기와 성경읽기를 끝까지 힘쓸 것. ③ 내가 있는 교회의 진흥하는 일에 힘써 그리스도인의 본분인 의무를 지키기로 힘쓸 것. ④ 내가 본회의 일체 의무를 다 실행하되 매 주일 본회 예배시간에 출석하여 찬송하며 기도하며 성경 읽고 증언하는 일분자(一分子)의 직책을 담임하기로 힘쓸 것. ⑤ 내가 매삭 헌심회(獻心會) 때에 혹 출타하여 돌아오지 못하였든지 또는 부득이한 사고로 참회치 못할 경우에는, 호명할 때에 대답으로 성경말씀 외울 절수를 기록하여 본회 회원에게 편지로나 전편으로나 신실하게 송부하여 대신 외워 정신적으로 참석함을 표하기로 힘쓸 것. 2) 안동교회 기독청년면려회 조직 19세기 말부터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국내에 여러 회(會)를 소개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기독청년운동도 소개했지만 신앙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하고 있었다고 안대선은 증언한다. 하지만 3·1만세운동 후 안동의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1919년 안동의 만세운동이 안동교회의 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나게 되자 의식 있는 많은 청년들이 안동교회로 모여들었고, 1920년 4월 8일 안동기독청년회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기독청년회는 시작할 때의 열정이 점점 식어져 유명무실한 청년회가 되었고, 신앙적인 면에서도 덕이 되지 않고 있었다. 더욱이 안동 기독청년회 조직을 이끌어가던 회장 김원진을 포함한 다수의 회원들은 불신자로 활동의 목적이 신앙운동이 아닌 사회운동에만 전념하게 되자, 당시 안동교회 동사목사인 권찬영 선교사는 일제의 교회탄압이 심해져 신앙생활이 방해받을 것을 염려했다. 교회는 안동기독청년회를 지도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순수한 신앙중심의 청년회 조직을 새로 구상하게 되었다. 당시 청년들은 전국적인 기미년(1919년) 3·1운동의 실패로 인해 좌절을 경험하고 있었고, 일제의 탄압이 날로 심해져 독립의 희망은 점점 사라지고 국민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 겨우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한 청년들은 신학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교회를 통해 애국 운동을 하려는 의욕이 더해졌다. 이때 안대선 선교사가 소개한 면려운동은 청년들에게 호감을 끌기에 충분했다. 안대선 선교사는 1921년 1월 하순, 청년면려회를 조직키로 작정하고, 당회의 허락을 받고 1월 23일 안동교회에서 청년면려회 창립총회를 개최하며 임원과 위원을 선정하였다. 면려운동을 활발하게 추진한 안동교회 주요회원들은 권연호, 권중윤, 김재성, 홍범순, 서순이, 장경영 등이었고, 권중윤은 회원들의 만장일치로 초대회장에 선출되었다. 안동교회 당회는 1921년 2월 5일 전국 최초로 기독청년면려회를 승인함으로써 청년신앙운동으로서 교회봉사와 대사회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으며 안동교회는 한국 기독청년면려회의 발상지 교회가 되었다. ▲안동교회 당회는 1921년 2월 5일 기독청년면려회 조직을 승인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전국에서 최초로 기독청년면려회가 출범하게 되었다. 당시 당회장은 권찬영 선교사였으며, 안동교회 2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이대영 목사도 참석했다.(사진4)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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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경안노회남선교회연합회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며“감사의 100년, 새 역사의 100년” 임 만 조 장로 경안노회남선교회연합회 창립 100주년 준비위원장, 안동교회 원로장로 2021년은 경안노회남선교회연합회가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역사적인 해입니다. 1921년 2월 5일 그 어려웠던 시절에 안동 선교부 주재 안대선 선교사의 지도로 한국 최초로 안동교회 기독청년면려회가 조직되고, 당회에 정식으로 허락을 받아 노회와 총회와 선교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경안지역으로, 전국으로 확산하여 100년이 지나, 여기에 근거한 경안노회남선교회연합회 창립 100주년을 맞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하여(For Christ And The Church)’라는 표어 아래 선배들이 이루어온 역사를 잘 보존하고, 더욱 발전해 가기 위하여 경안노회남선교회연합회 창립 100주년 기념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장로교(長老敎) 통합 측 남선교회와 청년회뿐 아니라, 한국의 모든 장로교단의 현존하는 청장년면려회(靑壯年勉勵會)가 경안노회 안동교회에서 시작했다고 연혁에 밝히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큰 자부심(自負心)을 품게 되고, 여기까지 인도하여 주신 에벤에셀 하나님의 크신 은총(恩寵)을 송축(頌祝)합니다. 안동은 한국 기독청년면려회의 발상지입니다. 여기에 부응하는 탁월한 인물로 안대선 선교사와 권중윤 초대 회장이 배출되어 면려회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지사충성(至死忠誠)하여 지금도 그 업적이 샛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배들의 아름다운 업적을 이어나가야 하는 사명을 다 함과 동시에 큰 보람을 가져 왔기에 오늘의 100주년을 뜻깊게 맞이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기독청년면려회를 허락한 안동교회 당회록이 남아있었다는 것은 기적이요,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은혜가 있었음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안동은 6·25로 시가지가 전소하다시피 한 곳이지만, 당시 김광현 담임목사님이 피난길에 오르시기 전에 당회록과 노회록 등을 땅에 묻으셨기에 역사가 살아남았습니다. 여기를 근거로 해서 금번에 경안노회남선교회연합회 100년사를 발간하게 되고, 100주년 기념교회를 필리핀에 세우고 해외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통일 후 북한선교를 위해 교회건축기금을 적립하고 있습니다. 2003년 시작한 전남노회남선교회 회원들과 매년 교차 방문해 영·호남 친선교류를 하면서 친목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학교장학금·선교비 지원, 미자립교회후원 그리고 사회봉사 기관 지원사업 등도 경안노회남선교회연합회 주요 사역들입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한국 교회사적지 제17호(기독청년면려회발생지-안동교회)’를 2014년 5월 20일에 지정했고, 남선교회 전국연합회 창립 90주년 기념식과 표지석 제막을 2014년 12월 2일 안동교회에서 거행했습니다. 금번에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갖고 있습니다. 단순한 한 노회의 일이 아니라 장로교단이면 더욱 관심과 배려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기독청년면려회는 초창기 교회와 사회봉사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야간학교 개설, 금주운동, 물산장려운동, 문명퇴치, 농촌사업 등 범국민적인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어려운 일제의 강점기 시절과 6·25전쟁으로 폐허와 잿더미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복음 사역과 이웃사랑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기독청년면려운동은 교회의 담을 넘어 지역사회로 나가 믿음과 헌신을 통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100년 전 이 땅, 한반도를 기경(起耕)한 기독청년면려운동! 믿음의 선배들이 가졌던 믿음, 그 정신으로 돌아가 그들의 열정과 헌신을 계승해야 합니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조국의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기독청년면려회를 통해 헌신했던 믿음의 선배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기독청년면려회의 선배들이 가졌던 믿음과 열정, 용기와 헌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때 오늘의 교회가 살아나고, 민족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남선교회는 보배와 같습니다. 보배는 늘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갈고 닦아야 빛을 발합니다. 무한한 관심과 애정을 쏟을 때 우리 남선교회는 발전하고, 성장해 나갈 것입니다. 지난 100년도 찬란한 빛을 발하였지만 보다 앞으로의 100년은 더욱 귀중하고,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려드리는 단체로 발돋움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창립 100주년 기념대회에서 준비위원장 임만조 장로가 ‘경안노회남선교회연합회 100년 약사’를 주제로 강의를 하고 있다. ▲경안노회남선교회연합회가 필리핀에 세워질 100주년 기념교회에 동판을 전달하고 있다. ▲100주년 기념대회를 마치고 남선교회 임원들과 내빈들의 기념촬영.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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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대면 시대의 목회와 예배” ··· 해답은?김병삼 목사, ‘올라인 all-line(online+offline) 사역’ 제시 ▲김병삼 목사가 발표하고 있다.(인터넷 캡처) 만나교회 김병삼 목사가 지난 4월 9일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 최이우 목사) 4월 월례 조찬기도회 및 발표회에서 ‘비대면 시대의 목회와 예배’에 대한 목회 방향을 제시했다. ‘만나교회 사역을 중심으로 본 all-line(online+offline) 시대의 목회’를 제목으로 발표한 김병삼 목사는 “코로나19로 인해 함께 모여 예배하는 공동체가 곧 교회였던 전통적 사고를 뒤엎고, 이제는 더 이상 교회가 함께 모여 예배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교회의 정체성을 흔들어 놓은 변화의 시작”이라고 설명했다. 김 목사는 “이런 불가피한 변화들에 대해 성경적·신학적으로 응답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이제는 목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고 준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전과 전혀 다른 목회적 환경 속에서, ‘온라인이냐 오프라인이냐’를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제 전혀 새로운 교회, 새로운 목회적 시도인 ‘올라인(all-line)’을 생각할 때”라면서, “하지만 ‘오프라인’ 기반이 없는 ‘온라인’은 허상에 불과하다. ‘올라인’은 ‘오프라인’을 기반으로 ‘온라인’ 사역을 가능하게 하는 사역”이라고 말했다. 또 “만나교회는 코로나19 이전부터 ‘미디어 교회’를 만들어, 건물 아닌 곳에서 미디어로 예배하고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섬기는 일에 힘써왔다”며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만나교회가 가지고 있는 교회론에서 기인한다”고 했다. 실제로 만나교회는 2018년 4월 ‘미디어 교회’라는 이름의 온라인 교회를 시작했는데, 이는 ‘선교적 교회론’에 근거한 것이었다. 김 목사는 “미디어 예배는 유학, 이민, 질병, 출산 등으로 현장 예배에 참여할 수 없는 성도들을 위한 배려였는데, 이제는 ‘예배와 돌봄’을 위한 사역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됐다”고 설명했다. 김 목사는 “‘올라인 교회(All-line Church)’는 전체 교회가 온라인 역량을 갖추고 목회를 해야 할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목회 방향”이라며 “현재 만나교회는 교회에 소속된 모든 부서가 온라인 목회를 하고 있다”고 정리했다. 끝으로 김병삼 목사는 “코로나19가 끝나도 성도들은 이전과 같은 신앙 패턴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교회는 비대면 시대를 사는 성도들을 위해 설교 영상뿐 아니라 다양한 양육‧훈련 콘텐츠를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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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6)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6)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론 1. 첫 번째: 기독서원(基督書院) 2. 두 번째: 선교사 임시주택 3. 세 번째: 선교사 주택 4. 비공식 예배처소: 텐트 교회 5. 네 번째: 16칸 ‘ㄱ’자 예배당 6. 다섯 번째: 목조 2층 예배당 7. 여섯 번째: 2층 돌집 예배당 결론 6. 다섯 번째 예배처소 : 목조 2층 예배당(2) 교회 외적으로는 2층 목조 함석지붕 예배당의 신축에 따라 경북북부 지방에 여러 교회가 모일 수 있는 대형집회를 가능하게 했다. 신축 예배당은 많은 성도들이 한꺼번에 모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914년 공식적으로 조직된 안동교회 여전도회는 1917년 1월 31일, 처음으로 인근 교회의 성도들이 함께 모이는 부인도사경회가 열렸는데 참석자의 수는 230명이었다. 1924년에는 남자도사경회가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1928년 3월에는 1주일 동안 여전도회 주최로 당대의 대부흥사인 길선주 목사를 초청하여 도사경회가 열렸으며, 1934년 6월의 두 번 도사경회에는 400명, 317명이 각각 참석하였다. 또한, 경북 북부지역 교회의 교사교육을 위한 집회도 2층 목조 함석지붕 예배당에서 열렸는데, 가장 큰 규모의 집회는 제1회 경안주일학교대회로 1928년 9월 21일부터 26일까지 8일간 개최되었다. 열기가 대단하여 정회원 1,300여 명 외 방청인원 1,000여 명 등 도합 2,300여 명이 참석하였는데, 2층 목조예배당에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외부에서도 강단이 보일 수 있도록 출입구 쪽 남쪽 벽을 헐고 교회 마당에 대나무로 비닐하우스처럼 지지대를 세우고 광목을 덮어 천막을 만들었다고 한다. 특히 경북노회로부터 분립된 경안노회가 1921년 12월 20일 경안성서학원에서 조직을 위한 모임을 한 후, 제1회 경안노회는 1922년 1월 18일부터 19일까지 안동교회 목조 2층 함석지붕 예배당에서 회집되었다. 경안노회가 1936년 12월, 30회로 회집되기까지 30회의 노회 회집 장소 중 안동교회 17회, 성서학원 8회, 예안만촌교회·영주교회·영덕교회·예천교회·풍기교회 각 1회씩으로 안동교회에 집중되었다. 이처럼 안동교회의 두 번째 예배당인 목조 2층 함석지붕 예배당은 교회 내적으로도 새로운 변화를 가져와 교회성장을 이끌었을 뿐 아니라 외적으로도 지역 복음화의 산실이 되었던 것이다. ▲사진 뒷면에는 1923년 성탄절 안동교회(Christmas 1923, Andong Church)라고 권찬영 선교사가 친필로 쓴 글이 있다. 예배당 지붕 바로 아래 ‘祝聖誕(축성탄)’이란 글을 볼 수 있다. 중앙 가운데 검은색 양복을 입고 앉아 있는 분이 권찬영 선교사이다.(사진 11) 7. 여섯 번째 예배처소 : 2층 돌집 예배당(1) 안동교회의 돌집 예배당 신축 명분은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예배당을 건축할 당시 일제의 수탈이 더욱 심해지고 1934년 7월 안동시가 물에 잠기는 대수재(水災)로 인해 경제적으로 몹시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안동교회가 대형 예배당을 신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계속된 교회 부흥 때문이었다. 예배 시 성찬 참여 수는 두 번째 예배당인 목조 2층 예배당의 준공 이후 계속 증가하였다. 경안노회록에 따르면 1931년 6월 1일부터 1932년 5월 31일까지 안동교회 교인 수는 장로 4명, 세례교인 198명, 유아세례인 73명, 교인 총수 549명으로 교회가 크게 부흥하였다. 또한, 여성성경공부반, 장년성경공부반, 어린이와 소년소녀반, 청년 모임 등을 위해 더욱 넓은 공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또 안동교회는 당시 경안노회 지역의 중심교회였고, 경상북도 북부지역 교회의 성장과 함께 노회의 모임이 주로 안동교회에서 회집되었기 때문에 더욱 넓은 공간이 필요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1914년에 건축된 목조 2층 함석지붕 예배당은 20여 년이 경과하면서 노후 되어 수리의 빈도가 증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새로운 예배당 신축의 필요성이 검증되었고, 안동교회는 1926년부터 준비를 시작하여 병자년인 1936년 더운 여름에 2층 돌집 예배당을 기공할 수 있었다. 경안노회 중심교회의 상징으로서 2층 돌집 예배당 건축계획은 안동교회 4대 담임인 박상동 목사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예배당 건축 추진은 후임인 5대 임학수 목사 시무 때부터 본격화되었다. 안동교회 80년사에 따르면 1929년 1월 부임한 임학수 목사는 동년 3월 4일 제직회에서 그동안 신세교회 분립을 위해 저축해오던 것을 본당 건축비로 전용하기로 결의하고 본당 신축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예배당 신축을 위해 임학수 목사는 선교사들을 꾸준히 설득했으며, 그 결과 다른 지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도 건축에 협력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당시에는 선교회에서 노회 중심의 교회 건축에 건축비의 1/3을 보조해 주는 규정이 있어서 보조를 받을 수 있었다. 아울러 임학수 목사가 가가호호(家家戶戶) 방문하는 등 건축을 위한 본격적인 행보를 해서 교인들이 건축헌금을 작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돌집 예배당은 본격적으로 건축에 돌입할 수 있게 되었다. 돌집 예배당의 터는 이미 계명학교가 폐교가 된 후였기 때문에 계명학교가 서 있던 위치에 예배당을 건축할 수 있었다. 당시 계명학교를 다녔던 분들의 증언에 따르면, 돌집 예배당을 신축하기 위해 계명학교를 철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계명학교의 위치는 본당 출입구의 서편 벽과 큰 소나무 위치로 추정된다. 더욱이 오늘날 교회의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돌집 예배당 전면의 넓은 마당은 전에 계명학교의 운동장으로 쓰던 자리였기 때문에 계명학교의 폐교 후에는 자연스럽게 넓은 부지를 교회가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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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3)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3)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론 1. 첫 번째: 기독서원(基督書院) 2. 두 번째: 선교사 임시주택 3. 세 번째: 선교사 주택 4. 비공식 예배처소: 텐트 교회 5. 네 번째: 16칸 ‘ㄱ’자 예배당 6. 다섯 번째: 목조 2층 예배당 7. 여섯 번째: 2층 돌집예배당 결론 3. 세 번째 예배처소 : 선교사 주택(2) 초기 안동선교 보고와 사진에 따르면 금곡동 선교사 영구사택은 1910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던 것 같다. 에비여사의 글에 따르면 1910년 10월 24일 지부를 세울 대지를 구획, 땅을 고르기 시작했음을 밝힌다. 또한, 안동교회 80년사는 4차례에 걸쳐 건축된 선교사 주택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안동선교부 초기 두 달씩 발행된 선교 캘린더에 사용된 사진의 배경은 당시 선교사 주택과 안동의 생활상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때 안동교회는 어떤 이유였는지 모르지만 선교사들이 새로 구입한 임시주택으로 세 번째 예배처소를 옮겼음을 안동교회 80년사는 기록한다. 이에 대해 김광현 목사는 선교부지 동산을 구입하고자 했지만 주민들이 쉽게 팔지 않아 할 수 없이 동문 밖 안동교도소 자리 일부를 구입했고, 이 주택을 수리해 예배처소로 사용했다고 증언한다. 선교사들이 거주할 영구사택을 건축하는 동안 임시로 사용할 주택을 구입했는데, 이곳이 안동교회 세 번째 예배처소였으며, 위치는 구(舊) 안동교도소 자리에 있던 기와지붕 건물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당시로 볼 때는 첫 번째 예배를 드렸던 처소로부터 동쪽으로 무척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새로운 예배처소는 거리뿐 아니라 1년여 동안 익숙하게 모였던 예배처소에 비해 생소했을 것이고, 따라서 회중들이 불편하게 느꼈을 가능성이 있다. 오월번 선교사 가족은 1910년 7월 7일 이곳으로 이사했다. 안동교회 첫 ‘ㄱ’자 예배당이 1910년 10월 30일 입당했기에, 약 4개월 가까이 이곳은 안동교회의 세 번째 예배당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선교캘린더 중에서 1911년 3·4월용 캘린더에 수록된 한 장의 사진과 에비여사가 소장한 사진은 안동교회의 세 번째 예배처소를 추정할 수 있게 한다. 사진 5는 오월번 선교사 가족이 기독서원 건너편에 존재하던 첫 번째 거주지를 떠나 두 번째로 거주했던 임시주택이다. 그런데 오월번 선교사 가족은 첫 번째 임시가옥에서 약 1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머물렀기 때문에 이 두 번째 주택을 안동의 ‘첫 번째 가정’(First home in Andong)으로 부르는 것으로 생각된다. 오월번 선교사의 부인인 새디(Sadie) 선교사가 1910년 6월 미국에 있는 친구들과 후원자들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오월번 선교사 가족은 안동읍 동쪽 끝에 위치한 가옥에서 살고 있었고, 안동교회의 당시 모임 장소는 수리하여 별의추 선교사가 일부 사용하고 있던 임시 선교기지였다. 바로 이 주택이 앞서 언급한 구 안동교도소에 위치한 오월번 선교사의 두 번째 가옥인 동시에 안동교회의 세 번째 예배처소로 추정된다. 에비여사에 따르면 이곳에서 여성을 위해 매주 목요일마다 부인성경공부반이 열렸는데, 첫 번째 모임에 무려 75명이 모였지만 진심으로 성경공부를 원하는 사람을 추려낸 결과 25명으로 한 반을 구성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여성성경공부반은 일주일에 두 번씩 오월번 선교사 사택에서 모여 새디 선교사가 월요일에는 젊은 여성반, 목요일에는 중년 여성반을 인도하였다. 하지만 이 주택은 사용하기 불편해 철거했고, 철거한 후 가옥에 사용되었던 목재는 폐기처분을 하지 않고 1911년 처음으로 시작한 사립 초등학교인 계명학교를 건축할 때 사용되었음을 안동교회 80년사는 기록하고 있다. ▲금곡동 선교부지에 사택을 준공하기 전 까지 오월번 선교사 가족이 생활했던 주택으로 오월번 선교사는 이 주택을 안동의 '첫 번째 가정'(First home in Andong)으로 부른다. 이 사택을 철거할 때 수거한 건축자재로 금곡동에 계명학교를 건축하였다. 후에 안동교회가 서 있는 현재 위치로 계명학교는 이전했다.(사진 5) 4. 비공식적인 예배처소 : 텐트 교회(Tent Church) 오래전부터 현재 까지 전해 내려오는 두 장의 사진은 거의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안동지역 교회에 전해져 내려오는 선교 초기 사진으로 텐트(Tent)와 초가집을 볼 수 있다. 안동에서 활동했던 선교사 중의 누군가가 직접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두 장의 사진 앞면과 후면에는 이 천막을 천막 교회(Tent church)임을 명기하고 있다. 한국선교 초기 사진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텐트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것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고, 특히 안동지역의 경우는 안동교회 예배당을 신축하기 전에 임시 예배처소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사진 6의 뒷면에는 안동교회의 첫 번째 신축 예배당에 관해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될 만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익명의 선교사가 사진 후면에 직접 쓴 두 글을 볼 때 사진 6은 안동교회 최초의 예배당인 16칸 ‘ㄱ’자 예배당을 건축하는 동안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는 장소로 천막(Tent)을 쳤고, 천막 옆 마당에는 예배당 신축을 위해 만든 진흙 벽돌과 건축자재가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텐트 교회는 안동 최초의 병원과 함께 사용되었다. 이 병원은 주일에는 교회로, 평일에는 병원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진 6은 오랫동안 안동 최초의 병원인 안동성소병원으로 추정되고 있는 사진이다. 또한 마당에는 진흙 벽돌과 건축 기자재가 쌓여 있는데, 선교사가 사진 뒤에 기록한 글을 보면 실제 교회(real church)를 건축하기 위한 자재라고 기록한다. 따라서 이 텐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것은 안동교회 최초의 16칸 ‘ㄱ’자 예배당을 건축하기 전의 예배처소로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텐트 교회는 사진 배경을 고려할 때 오늘날 안동교회 터의 일부에 속할 가능성이 크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는 텐트(Tent)와 초가집, 밭고랑, 인근의 여러 초가집, 그리고 마당에 있는 진흙벽돌과 건축 자재가 눈길을 끈다. 특히 분명한 흰색의 십자가가 텐트 위에 있다.(사진 6)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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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 목사의 논문원문(6) - 안동지역 최초의 순교자, 소텔 선교사안동지역 최초의 순교자, 소텔 선교사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소텔 선교사 Chase C. Sawtell, 1881-1909) 남북 전쟁이 끝났을 때 미국은 분열된 상태였다. 1865년부터 1918년까지의 미국의 역사는 남북 전쟁 후에 미국 재건이 시작되어, 산업화가 진전된 시대였다. 사회의 급격한 변화로 많은 노동조합이 탄생했고 파업이 이어졌다. 특히 약 50여 년 동안(1865년~1918년) 유럽을 중심으로 다른 대륙에서 2,750만 명이나 되는 이민자가 미국으로 몰려들어 저렴한 노동력을 제공했고, 캘리포니아 주(州)와 같이 개발되지 않은 지역에 다양한 지역사회가 형성됐다. 대부분의 인디언 부족은 작은 거류지로 이주 당했고, 백인 농장주와 목장주의 소유가 되었다. 공장 노동자는 학대와 폭력에 시달렸고, 그것에 수반하여 노동 운동을 낳게 되었다. 이러한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소텔(史佑大, Chase Cranford Sawtell) 선교사는 1881년 1월 9일, 네브라스카(Nebraska) 주(州) 소재 티케이마(Tekamah)에서 출생했다. 그는 환경이 좋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의 종(從)으로 불러 선교사로 보내시려고 했을 때 소텔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무조건 순종했다. 네브라스카 주의 밸리뷰(Bellevue) 대학을 졸업한 소텔은 오마하(Omaha) 신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 졸업했다. 그 해 목사 안수(按手)를 받고 파송 받아 1907년 10월 16일 한국에 도착했다. 소텔 선교사 부부는 처음에 대구선교부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여러 면에서 뛰어난 재목이었던 그는 대구선교부에 있던 선교사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1908년 안동선교부가 신설되었을 때 소텔 선교사는 자원(自願)하여 대구보다 열악한 환경인 안동 땅으로 이사했다. 안동선교부의 초대 주재 선교사가 된 그는 헌신했다. 특히 1909년 11월 16일 순교하기 전 까지 1년 동안 그를 통해 안동 땅에 의미 있는 전도와 새신자 양육이 이루어졌다. 복음전도의 전형적인 패러다임(paradigm)인 양육, 파송, 전도를 통해 안동지역 부흥의 기초를 마련했다. 하지만 소텔 선교사는 풍토병인 장티푸스에 걸려 28세의 젊은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소텔 선교사는 무려 109년 동안 한국교회 속에서 잃어버린 선교사였다. 이 글을 통해 우리의 뇌리 속에서 잊혀진 소텔 선교사의 삶과 사역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소텔 선교사의 가정(家庭) 소텔 선교사는 1881년 1월 9일, 미국 네브라스카(Nebraska) 주(州) 소재 티케이마(Tekamah)에서 출생했다. 소텔의 아버지는 웨스트 버지니아(West Virginia) 주에서 출생한 해리 소텔(Harry C. Sawtell)로 그는 세 번 결혼했는데, 소텔 선교사는 두 번째로 결혼한 제시 소텔(Jessie D. Sawtell)에 의해 출생했다. 제시 소텔은 소텔 선교사와 리트를 낳았다. 소텔 선교사의 동생인 리트는 몬타나(Montana) 주 아나콘다 시에서 척추 전문의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텔 선교사의 부친은 1885년, 티케이마 북쪽으로 약 13Km 떨어진 실버 크릭(Silver Creek)으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소텔의 부친은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가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하이오(Ohio) 주의 댄빌(Danville)로 이사해 살기도 했다. 9세인 1900년, 소텔의 가정은 1870년에 거주한 적이 있던 아이오와(Iowa) 주 드모아 카운티 덴빌에서 살았다. 이 때 소텔 선교사 부친의 직업은 여전히 농부였는데, 상대적으로 다른 농부에 비해 가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세기 미국의 농업은 현저한 발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토지의 피폐, 자연 재해, 자급자족 비율 감소와 연방 정부의 적절한 법적 보호와 지원의 부족 등으로 농부들의 삶은 지처 있었다. 일반적으로 19세기 미국 소작농의 대다수는 빚에 쪼들렸고, 유일한 탈출구는 수확량을 높이 과잉 생산이었으나 과잉 생산은 판매 가격 하락과 소득 감소로 이어졌고, 그 결과 토지는 피폐하고 토지 소유자나 소작농 모두가 가난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따라서 다른 농부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빈곤했던 소텔의 가정은 가난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소텔 가정은 다시 네브라스카 주의 오마하(Omaha)로 이주했고, 그 이후에는 오마하 인근에서 계속 거주했다. 소텔 선교사가 한국으로 오기 전인 1907년 3월 5일에 작성한 미국 장로교 해외 선교부에 제출한 선교사 지원서에 따르면 그의 주소는 오마하 노스(North) 21가 3303번지였다. 따라서 성장한 이후 소텔 생활의 중심 무대는 네브라스카 주의 오마하라고 할 수 있다. 네브라스카 주 티케이마에서 출생한 소텔 선교사는 웨스트 버지니아, 몬타나, 오하이오, 아이오와 주를 전전하다가 오마하에 정착하였던 것이다. 소텔 가정은 믿음의 가정이었다. 비교적 자주 이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착한 지역에 있는 교회에 등록하고 출석했기 때문이다. 2. 소텔 가정의 신앙(信仰) 대구와 경북지역에서 선교 사역을 감당한 선교사의 삶과 사역을 추적하여 연구하고 있는 손상웅 목사에 의하면 소텔이 최초로 섬긴 교회는 네브라스카 주의 티케이마 교회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것이다. 여렸을 때 소텔은 여러 주(州)를 옮겨 다니며 생활했다. 4살 때인 1885년, 소텔의 가정은 티케이마에서 실버 크릭(Silver Creek)으로 이주했다. 소텔은 시골의 작은 교회인 실버 크릭(Silver Creek) 감리 교회에서 1897년 11월, 낙스 본디(Knox Bonde)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당시 실버 크릭에는 장로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가정은 감리교회를 다닐 수밖에 없었다. 소텔의 누나도 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아 소텔 가정이 실버 크릭으로 이사 온 이후 온 가족이 모두 실버 크릭교회에 출석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1861년 1월 11일, 공식적으로 오마하 제2장로교회(The Second Presbyterian Church of Omaha City)로 명명되었다가 1888년 4월, 오마하 제1장로교회(The First Presbyterian Church of Omaha)로 변경되었다. 따라서 소텔이 오마하로 이사해 교회를 정하고 등록할 당시는 교회 이름을 변경하기 이전(以前)이었기 때문에 오마하 제2장로교회가 옳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오마하에는 1867년에 설립된 또 다른 교회가 있었다. 이름은 오마하 중앙장로교회(Central Presbyterian Church)로 당시 해외선교를 특별히 강조하는 교회였다. 제1장로교회와 중앙장로교회는 오마하의 대표적인 교회로 교회가 설립된 이래 오마하 지역 교회들의 중심교회였다. 그러나 두 교회는 1950년대 최고로 성장했다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1917년 3월 11일에 준공된 오마하 제1 장로교회의 모습으로 1959년엔 교회 역사상 최고로 2188명이 등록하고 있었다. 타개책을 모색하던 두 교회는 2014년 합병(合倂)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하 내용은 논문원문 첨부파일 참조)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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