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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회 봉화시찰회 회의 열려예장통합 영주노회 제75회 봉화시찰회가 지난 3월 2일(화) 오전 10시 30분 재산교회에서 목사, 전도사, 장로, 시찰위원 등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제1부 예배는 시찰 서기 이종수 목사(두문) 인도로 드렸으며, “우리 모두가 두기고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시찰위원장 정영욱 목사가 말씀을 전한 후 재산교회 하재수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제2부 회의는 정영욱 목사의 사회로 진행했으며, 목사회원 25명 중 24명 출석, 장로총대 26명 중 19명 출석, 29처 교회 중 27처 교회가 출석하여 회장이 개회를 선언한 후 회의가 시작됐다. 이어 회계보고, 기관보고(아동부연합회, 중·고등부연합회, 여전도회연합회) 등이 있었다. 신입회원 하재수 목사, 장우철 목사, 정종필 전도사, 김성수 목사가 인사했다. ▲하재수 목사, 장우철 목사, 정종필 전도사, 김성수 목사(왼쪽부터)의 인사. 봉화 우병백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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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노회 여전도회연합회 제38회 정기총회 열려신임회장에 윤삼선 권사 추대 ▲신임회장 윤삼선 권사. 예장(통합) 영주노회 여전도회연합회는 2월 18일(목) 오후 1시 영주 동산교회 예배당에서 제38회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신임회장에 윤삼선 권사를 추대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주제 아래 모인 이번 총회는 코로나19 거리두기 지침을 지키는 가운데 진행됐으며, 영주노회(영주시, 봉화군, 예천군) 105개 지역회 304명이 참석했다. 개회예배는 회장 이설희 권사 인도로, 부회장 윤삼선 권사 기도, 김창진 목사(영주동산)가 ‘일상을 회복하는 헌신(창26:19-22)’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또 부노회장 김영수 목사(예천) 축사, 여전도회전국연합회 회장 김미순 장로 격려사, 여전도회전국연합회에서 풍기성내교회 최효열 목사에게 감사패 증정, 여전도회전국연합회에서 회장 이설희 권사에게 감사장 수여 후 김창진 목사 축도로 개회예배를 모두 마쳤다. 이어진 총회에서 신임회장으로 추대된 윤삼선 권사는 “하나님의 은혜로 성총회가 되게 하심을 감사한다”며 “여전도회 2,800여 회원들과 신임임원진은 본회 목적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지상에 이루기 위해 교회와 사회에 필요한 일꾼이 되도록 섬김을 다하겠다”고 인사했다. 총회 후에는 헌신예배가 이어졌다. 예배는 신임회장 윤삼선 권사 인도로, 부회장 서순자 권사 기도, 김정옥 목사(직산교회)가 ‘혀 밑에 감추인 것은?(약3:1-12)’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했으며, 작은자선교부장의 봉헌기도, 김정옥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폐했다. ◎제38회기 신임임원 ▲회장: 윤삼선(영주동산) ▲부회장: 서순자(신영주) 이승연(영주제일) ▲직전회장: 이설희(성내) ▲총무: 유은경(신영주) ▲서기: 손성순(풍기동부) <부>백점순(영주반산) ▲회의록서기: 권혜란(영주제일) <부>장혜숙(봉화제일) ▲회계: 조미희(봉화중앙) <부>석미경(신광) ▲정기총회를 마치고 내빈들과 역대회장들, 신임임원이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영주 우병백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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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 목사의 논문 원문(7)- 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목사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목사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임학수 목사(林鶴洙, 1884-1969) 임학수 목사는 안동 땅에서 출생하고 안동 땅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나라에 갔다. 그는 안동 땅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안동지역에 있는 교회를 섬겼다.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교회, 크고 작은 교회를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섬겼다. 그래서 그가 시무한 교회는 든든히 설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가 교회를 섬긴 시대 상황은 결코 만만한 세월이 아니었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강압적으로 통치하던 시대였다. 보통 사람들인 백성의 삶도 고단했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삶은 더 고난의 연속이었다. 황국신민화를 강요하는 일제의 정책 하에서 예수 믿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임학수 목사는 단순한 성도로서가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인 목사로 살아야 했기 때문에 더 큰 믿음과 용기, 그리고 인내와 소망이 필요했다. 그러나 임 목사는 어려운 시기에 교회의 지도자와 경안노회의 중심인물로 그 사명을 잘 감당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황금만능주의와 세속화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위기를 맞고 있다. 거룩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교회, 영적 리더십을 가진 존경받는 주의 종,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성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현실을 보며 낙망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다가 교회가 영영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게 된다. 그러나 교회의 능력은 분명히 회복될 수 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교회는 과거의 교회와 과거의 선배들이 남겨놓은 교훈을 배워야 한다. 교회역사를 올바로 이해해야 하며, 거룩한 영향력을 끼친 믿음의 선배의 삶을 본받아야 한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임학수 목사다. 그는 분명한 소명의식을 갖고 헌신한 사명자였다. 그는 신실한 하나님의 일꾼인 동시에 도전하는 교회의 일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학수 목사의 신앙과 삶을 연구하고 정리한 글은 이교남 목사가 쓴 ‘한학자 임학수 목사’ 외에는 거의 없다. 그가 안동지역이라는 복음의 변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선교부가 위치해 있었지만 안동은 작은 도시였기 때문에 안동지역에서 활동한 교역자나 평신도들은 한국교회에 알려지기 보다는 묻혀 있을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한계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임학수 목사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흔적을 남긴 주의 종이었다. 그래서 임학수 목사의 성품, 인격, 신앙을 포함한 삶은 오늘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큰 도전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소논문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연구되었다. 연구 결과 필자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고 영원히 잊혀 질 수 있었던 임 목사의 신앙과 삶을 새롭게 발굴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 일평생 단 한 번도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고 충성을 다한 믿음의 대선배인 임학수 목사가 걸어간 거룩한 구원사역의 흔적을 찾아보도록 하자. 1. 임학수(林鶴洙), 믿음의 조상(祖上)이 되다 임학수는 1884년 6월 23일 부친 임보현과 모친 정덕희 사이에서 장남으로 안동군 녹전면 매정리(일명 갈골)에서 출생했다. 특히 1885년은 원두우(元杜尤, Horace Grant Underwood) 선교사와 아편설라(亞扁薛羅, Henry Gerhard Appenzeller) 선교사가 인천 제물포에 첫발을 밟은 해로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임학수의 본관은 부안으로 호는 영온(嶺穩) 혹은 영루(嶺樓)이다. 령(嶺)은 재, 산봉우리라는 의미를 갖는다. 온(穩)은 ‘평온하다’와 ‘곡식을 거두어 모으다’는 뜻을 갖는다. 따라서 영온(嶺穩)은 ‘평온한 산봉우리’라는 의미로 산봉우리가 조용하고 평안한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가 평온하기를 소망했던 것 같다. 또한 영온(嶺穩)은 ‘곡식을 거두어 모으는 산봉우리’라는 의미로 산봉우리 같은 하나님의 교회가 자신의 사역을 통해 구원받은 알곡과 같은 성도들이 넘쳐나기를 소원했던 것 같다. 또한 루(樓)는 다락의 뜻으로 영루(嶺樓)는 산봉우리에 있는 다락과 같은 망대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임학수 목사는 악한 세력이 성도들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조망하고 감시함으로써 교회와 성도들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학수는 1894년 박계남과 결혼하여 임상경, 임상교 남매와 손자 1명과 손녀 4명을 두었다. 1911년 10월 23일, 임학수는 매정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모친인 정덕희는 1913년 6월 14일에, 처(妻)인 박계남은 1916년 2월 16일에, 장남 임상경은 1922년 매정교회에서 각각 세례를 받았다. 임학수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난 후에 모든 식구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임학수는 한 가문에 있어서 믿음의 조상(祖上)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1909년 9월, 임학수에 의해 설립된 매정교회를 섬기던 임학수 가정은 1923년 5월 10일 안동의 어머니(母) 교회인 안동교회로 이명(移名)했으며, 이명한 후에는 온 가족이 줄곧 안동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임학수 목사의 장남(長男)인 임상경은 안동교회에서 장립집사와 장로의 직분을 받았으며, 오랫동안 제직회 서기, 당회서기로 봉사했다. 임학수 목사의 자부(子婦)인 강신덕은 교회학교 교사, 청년회, 성가대에서 헌신했다. 특히 강신덕은 당시 내매교회를 섬기고 있던 백부(伯父) 강병주 목사의 조카로 대구 신명여학교를 졸업한 신식 여성으로 학창시절에는 육상, 테니스 등 운동도 잘 했다고 한다. 당시 임학수 목사와 강병주 목사가 친밀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임상경과 강신덕은 결혼하게 되었다. 임학수 목사의 손녀인 임화자 권사는 어머니 강신덕를 이렇게 기억한다: 어머니 강신덕은 신앙이 두터운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 신학문을 배운 여성으로 깊은 신앙과 지혜로 슬기롭게 어려운 목사 가정의 살림을 잘 꾸렸다. 대가족 집안일도 많았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주일학교 반사, 여전도회 임원, 구역권찰로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 열정적으로 헌신했다. 사경회나 교회행사 때마다(크리스마스 새벽송 찬양대 식사) 식사 준비로 봉사를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목사관 뜰에서 몇 백 명의 밥을 큰 가마솥 3개에 불을 지펴서 하는 일은 늘 어머니의 몫이었다. 강신덕의 가정은 초기 한국교회부터 오늘날 까지 믿음의 큰 산맥을 이룬 가정이다. 큰 아버지인 강병주 목사는 평양신학교 14회 졸업생으로 내매교회, 영주교회, 그리고 풍기교회를 담임하면서 6차례 경안노회장을 역임했으며, 1933년 총회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임지를 옮겨 총회 산하교회의 신앙교육과 교사양성과정을 책임지며 교사양성에 주력한 분이다. 또한 서울의 새문안교회를 담임한 강신명 목사는 강병주 목사의 장남이기도 하다. 이처럼 임학수 목사의 후손은 뿌리 깊은 믿음의 가정으로 어디서나 주님의 교회에 헌신하는 일꾼들이 되었다. 노후에 장남을 따라 부산으로 이사한 강신덕은 거성교회에서 권사로 임직을 받았다. 임상경 부부는 거성교회를 섬기다가 별세하였다. 임학수 목사의 장녀인 임상교는 권사로 대구 신암교회에서 시무하였으며, 손자 임재오는 부산 거성교회에서 장로로 시무하였다. 친손녀인 임순오는 부산 수영로 교회에서 권사로, 임양자는 안동교회에서 집사로, 임화자는 서울 밀알교회에서 집사로 헌신하고 있다. 부모세대의 믿음과 헌신을 계승하여 후손들이 계속해서 아름다운 믿음의 가문을 이어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임학수 목사의 평소의 삶은 비단 신앙 뿐 아니라 인격, 품성 등에 있어서 자녀손들에게 선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적어도 임학수 목사로 인해 교회를 이탈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만큼 임학수 목사는 목사로서의 삶도, 부모로서의 삶도, 또한 인간으로서의 삶도 모자람이 없는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임학수가 한 가정의 믿음의 조상이 됨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하 내용은 논문원문 첨부파일 참조)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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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6)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6)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론 1. 첫 번째: 기독서원(基督書院) 2. 두 번째: 선교사 임시주택 3. 세 번째: 선교사 주택 4. 비공식 예배처소: 텐트 교회 5. 네 번째: 16칸 ‘ㄱ’자 예배당 6. 다섯 번째: 목조 2층 예배당 7. 여섯 번째: 2층 돌집 예배당 결론 6. 다섯 번째 예배처소 : 목조 2층 예배당(2) 교회 외적으로는 2층 목조 함석지붕 예배당의 신축에 따라 경북북부 지방에 여러 교회가 모일 수 있는 대형집회를 가능하게 했다. 신축 예배당은 많은 성도들이 한꺼번에 모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914년 공식적으로 조직된 안동교회 여전도회는 1917년 1월 31일, 처음으로 인근 교회의 성도들이 함께 모이는 부인도사경회가 열렸는데 참석자의 수는 230명이었다. 1924년에는 남자도사경회가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1928년 3월에는 1주일 동안 여전도회 주최로 당대의 대부흥사인 길선주 목사를 초청하여 도사경회가 열렸으며, 1934년 6월의 두 번 도사경회에는 400명, 317명이 각각 참석하였다. 또한, 경북 북부지역 교회의 교사교육을 위한 집회도 2층 목조 함석지붕 예배당에서 열렸는데, 가장 큰 규모의 집회는 제1회 경안주일학교대회로 1928년 9월 21일부터 26일까지 8일간 개최되었다. 열기가 대단하여 정회원 1,300여 명 외 방청인원 1,000여 명 등 도합 2,300여 명이 참석하였는데, 2층 목조예배당에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외부에서도 강단이 보일 수 있도록 출입구 쪽 남쪽 벽을 헐고 교회 마당에 대나무로 비닐하우스처럼 지지대를 세우고 광목을 덮어 천막을 만들었다고 한다. 특히 경북노회로부터 분립된 경안노회가 1921년 12월 20일 경안성서학원에서 조직을 위한 모임을 한 후, 제1회 경안노회는 1922년 1월 18일부터 19일까지 안동교회 목조 2층 함석지붕 예배당에서 회집되었다. 경안노회가 1936년 12월, 30회로 회집되기까지 30회의 노회 회집 장소 중 안동교회 17회, 성서학원 8회, 예안만촌교회·영주교회·영덕교회·예천교회·풍기교회 각 1회씩으로 안동교회에 집중되었다. 이처럼 안동교회의 두 번째 예배당인 목조 2층 함석지붕 예배당은 교회 내적으로도 새로운 변화를 가져와 교회성장을 이끌었을 뿐 아니라 외적으로도 지역 복음화의 산실이 되었던 것이다. ▲사진 뒷면에는 1923년 성탄절 안동교회(Christmas 1923, Andong Church)라고 권찬영 선교사가 친필로 쓴 글이 있다. 예배당 지붕 바로 아래 ‘祝聖誕(축성탄)’이란 글을 볼 수 있다. 중앙 가운데 검은색 양복을 입고 앉아 있는 분이 권찬영 선교사이다.(사진 11) 7. 여섯 번째 예배처소 : 2층 돌집 예배당(1) 안동교회의 돌집 예배당 신축 명분은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예배당을 건축할 당시 일제의 수탈이 더욱 심해지고 1934년 7월 안동시가 물에 잠기는 대수재(水災)로 인해 경제적으로 몹시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안동교회가 대형 예배당을 신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계속된 교회 부흥 때문이었다. 예배 시 성찬 참여 수는 두 번째 예배당인 목조 2층 예배당의 준공 이후 계속 증가하였다. 경안노회록에 따르면 1931년 6월 1일부터 1932년 5월 31일까지 안동교회 교인 수는 장로 4명, 세례교인 198명, 유아세례인 73명, 교인 총수 549명으로 교회가 크게 부흥하였다. 또한, 여성성경공부반, 장년성경공부반, 어린이와 소년소녀반, 청년 모임 등을 위해 더욱 넓은 공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또 안동교회는 당시 경안노회 지역의 중심교회였고, 경상북도 북부지역 교회의 성장과 함께 노회의 모임이 주로 안동교회에서 회집되었기 때문에 더욱 넓은 공간이 필요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1914년에 건축된 목조 2층 함석지붕 예배당은 20여 년이 경과하면서 노후 되어 수리의 빈도가 증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새로운 예배당 신축의 필요성이 검증되었고, 안동교회는 1926년부터 준비를 시작하여 병자년인 1936년 더운 여름에 2층 돌집 예배당을 기공할 수 있었다. 경안노회 중심교회의 상징으로서 2층 돌집 예배당 건축계획은 안동교회 4대 담임인 박상동 목사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예배당 건축 추진은 후임인 5대 임학수 목사 시무 때부터 본격화되었다. 안동교회 80년사에 따르면 1929년 1월 부임한 임학수 목사는 동년 3월 4일 제직회에서 그동안 신세교회 분립을 위해 저축해오던 것을 본당 건축비로 전용하기로 결의하고 본당 신축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예배당 신축을 위해 임학수 목사는 선교사들을 꾸준히 설득했으며, 그 결과 다른 지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도 건축에 협력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당시에는 선교회에서 노회 중심의 교회 건축에 건축비의 1/3을 보조해 주는 규정이 있어서 보조를 받을 수 있었다. 아울러 임학수 목사가 가가호호(家家戶戶) 방문하는 등 건축을 위한 본격적인 행보를 해서 교인들이 건축헌금을 작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돌집 예배당은 본격적으로 건축에 돌입할 수 있게 되었다. 돌집 예배당의 터는 이미 계명학교가 폐교가 된 후였기 때문에 계명학교가 서 있던 위치에 예배당을 건축할 수 있었다. 당시 계명학교를 다녔던 분들의 증언에 따르면, 돌집 예배당을 신축하기 위해 계명학교를 철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계명학교의 위치는 본당 출입구의 서편 벽과 큰 소나무 위치로 추정된다. 더욱이 오늘날 교회의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돌집 예배당 전면의 넓은 마당은 전에 계명학교의 운동장으로 쓰던 자리였기 때문에 계명학교의 폐교 후에는 자연스럽게 넓은 부지를 교회가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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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중앙교회, 창립 60주년기념 감사예배와 임직예식 열려▲신임장로에게 회원패를 증정하고 있다. 예장(통합) 봉화중앙교회(담임목사 윤신율)는 9월 13일(주) 오후 3시 본교회당에서 ‘교회창립 60주년기념 감사예배와 임직예식’을 열었다. 이날 행사에는 본교회 성도와 이웃교회 목회자, 성도 등 140여 명이 참석했으며, 코로나19 방역수칙에 따라 1층, 2층, 3층, 3개 장소로 분산한 가운데 안전하면서도 은혜롭게 예식이 진행됐다. 1부 감사예배는 당회장 윤신율 목사 인도로 드려졌으며, 박지현 목사(전 봉화시찰장) 기도, 정영욱 목사(봉화시찰장) 성경봉독, 이규철 목사(봉화중앙) 찬양, 이현세 목사(제7대 담임목사)의 ‘먼저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갈2:19~21)’ 제하 말씀 선포가 있었다. 이어 2부에는 후원 선교사 파송(선교사 후원 약정식)이 진행됐다. 선교위원장 고주환 장로가 우정구, 전은미(남아프리카공화국) 선교사 소개, 당회장의 약정서 전달, 전은미 선교사 인사 등의 순서가 있었다. 3부 원로장로 추대는 당회서기 고주환 장로가 권영태 장로 약력소개, 당회장의 추대사, 선포, 추대패 증정 후 권영태 장로가 감사 인사를 했다. 4부 임직예식은 2명의 장로임직, 4명의 집사임직, 10명의 권사임직식이 정해진 순서(임직자 소개, 서약, 안수기도, 악수례, 선포, 성의 착용, 임직패 증정 등)에 따라 은혜롭게 진행됐다. 이어 조영광 목사(영주노회 부노회장), 김병문 목사(제8대 담임목사)가 권면과 축하의 메시지를 전했고, 영주노회 장로회장 나인식 장로가 신임장로에게 회원패 증정, 노회 남선교회연합회장 황강섭 장로가 기념품 증정, 노회 여전도회연합회장 이설희 권사가 기념품 증정, 영주노회 노회장 송인화 장로가 축사, 우정권 장로 답사, 최창동 원로목사(영주노회 전 노회장)의 축도로 모든 순서를 마쳤다. 한편, 봉화중앙교회는 교회창립 60주년 기념사업으로 △더드림센터 건축(58평) △본당 영상장비 교체 △감사예배 및 임직예식 △후원 선교사 약정식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60주년 기념 부흥회/기념 음악회 △60주년 기념 성지순례 △60주년사 발간 등을 진행해오고 있다. ◎임직자 명단 ▲원로장로 추대: 권영태 ▲장로임직: 우정권 민병덕 ▲집사임직: 박성환 김희권 우주하 김태윤 ▲권사임직: 이미애 강선자 박현숙 사공숙희 이명남 김영숙 황향희 허선희 김창진 이미경 ▲임직예식을 마치고 당회원과 임직자들의 단체 기념촬영. 봉화 우병백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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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땅 의성! “영남의 순교성지”로 떠올라경동노회 여전도회, 주기철 목사·권중하 전도사·엄주선 강도사 순교지 밟다! ▲경동노회 여전도회는 주기철 목사 수난지인 ‘옛 의성경찰서’를 탐방하는 등 의성군 일대 순교유적지를 둘러보는 성지순례행사를 가졌다. 예장(합동) 총회에 의해 ‘옛 의성경찰서 건물’과 ‘중리교회 제1예배당’이 각각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4호’, ‘제5호’로 지정된 이후 의성이 ‘영남의 순교성지’로 새롭게 떠오르며 국내성지순례단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26일 예장(합동) 경동노회(경주, 포항, 영천지역) 여전도회(회장 허영숙 권사) 실행위원 80여 명은 의성군 일대 순교유적지를 둘러보는 성지순례행사를 가졌다. ▲권중하 전도사 순교비 참가자들은 추성환 목사(철파교회, 주기철의성수난기념관추진위 사무국장)의 안내를 받으며 먼저 주기철 목사 수난지인 ‘옛 의성경찰서’를 방문했다. 이어 권중하 전도사 순교비와 중리교회 제1예배당, 엄주선 강도사 순교지(통합총회 한국기독교사적 제10호)를 차례로 밟았다. ▲엄주선 강도사 순교지 허영숙 회장은 순교지를 돌아본 뒤 “예수님 때문에 모든 고난을 견디고 순교하신 믿음의 선진들 앞에 숙연해졌다”며 아울러 “자신의 믿음을 되돌아보고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이날 행사에는 김주수 의성군수와 신시호 의성문화원장, 김병준 의성군기독교연합회 회장 등이 찾아와 여전도회 회원들의 방문을 환영했다. 이 자리에서 김주수 의성군수는 “주기철 목사 관련 항일운동 수난기념관 사업에 힘쓰겠다”고 했다. 추성환 목사는 “의성 지역에는 100년 역사가 넘는 교회가 30여 개 있고, 3.1운동 발상지 공원, 베어드 선교사 발자취 등 여러 기독교 사적지가 있다”며 “앞으로 ‘주기철 목사 수난기념관’이 설립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을 수 있도록 기독교계의 관심과 기도를 부탁한다”고 했다. 한편, ‘의성 마늘 소녀’로 유명한 국가대표 컬링팀 김영미 김경애 자매는 의성 철파교회에 주일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출석하는 교인이라고 한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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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 강구교회, “밑반찬 만들기 봉사활동” 꾸준히 펼쳐취약계층 아동 7가구에 주1회 밑반찬 지원 ▲강구교회 주명갑 담임목사(오른쪽 세 번째)와 자원봉사 성도들.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에서 강구교회의 봉사활동이 지역사회의 귀감이 되고 있다. 영덕군 강구면에 자리한 강구교회(담임목사 주명갑)는 결식 우려가 있는 취약계층 아동들을 위해 2017년부터 밑반찬 만들기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봉사활동은 영덕군 드림스타트에서 반찬 재료비를 지원하고, 강구교회 여전도회 회원들이 음식을 만든다. 매주 금요일 강구교회 식당에서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밑반찬 3가지와 국을 자원봉사자들이 직접 만들어 취약계층 아동 7가정에 지원한다. 강구교회는 영덕군에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봉사활동을 솔선수범했고, 영덕군에 큰 피해를 주고 지나간 태풍 콩레이(2018)와 미탁(2019년)때에도 강구면 이재민 120여 명에게 임시주거시설을 마련해 숙식을 제공하는 등 태풍복구에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강구교회 여전도회 자원봉사자는 “코로나19로 어려운 시기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동들에게 정성이 담긴 따뜻한 국과 반찬을 나눌 수 있어 기쁘다”며 “앞으로도 영덕을 이끌어갈 어린이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꾸준히 이어 가겠다”고 전했다. 이혜경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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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4)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4) 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임학수 목사(林鶴洙, 1884-1969) 목차 서론 1. 임학수, 믿음의 조상이 되다 …………………………… 10. 사경회에 온 힘을 쏟다 11. 전교인 기도회에 힘쓰다 12. 교회의 분립을 결의하다 13. 구제 사역을 시작하다 14. 안동교회 돌집 예배당을 건축하다 15. 사경회 강사로 활동하다 …………………………… 20. 후학을 위해 매진하다 결론 10. 사경회에 온 힘을 쏟다 교회는 집중적으로 교인들에게 성경 교육을 하기 위해 매년 사경회를 개최했다. 개최되는 사경회에 많은 성도가 참여했으며, 참석한 성도들은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안동교회의 최초 사경회는 1917년 1월 초에 열렸으며(강사는 이희봉 목사와 맹의와 선교사), 성경을 올바로 알고 배우기 위해 시작한 사경회는 해를 거듭할수록 열기가 더해 갔다. 많은 성도는 사경회를 통해 일제 강점기에서도 소망의 하나님을 새롭게 만날 수 있었다. 임학수 목사는 부임한 해인 1929년, 9월 18일부터 저녁부터 8일 동안 남자 성도를 위한 사경회를 열었다. 또한, 1930년 4월 14일 저녁부터 14일 동안 교회 진흥 전도회를 갖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1930년대 초 있었던 사경회는 1년에 상·하반기 두 차례 열렸으며, 기간은 6일~8일로 요즘과 비교할 때 긴 시간이었다. 특히 한 명의 강사가 초빙된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의 강사가 사경회를 인도했다. 또한, 참석자의 수도 당시 교인의 숫자와 비교할 때 높은 비율의 성도들이 참석했음을 알 수 있다. 때로는 달(月) 사경회라 해서 한 달간 혹은 2~3개월 장기간에 걸쳐 성경 전체나 혹은 몇 권씩 집중적으로 공부하기도 했다. 임학수 목사는 시무 기간 동안 사경회를 중심으로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사역에 집중함으로써 안동교회와 지역의 교회를 말씀에 기초한 든든한 교회를 이루어 나가는 기초를 마련했다. 11. 전교인 기도회에 힘쓰다 우리나라의 공식적인 새벽기도회는 1906년 가을, 평양 장대현 교회의 길선주 장로에 의해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전부터 새벽기도를 드리는 교인들이 많이 있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배당에서 혹은 산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새벽을 깨우며 또는 밤을 새워가며 기도했다. 이후 새벽마다 울려 퍼지는 교회당 종소리는 새벽 기도시간을 알렸으며, 밤마다 부르짖는 철야기도는 한국 교회의 부흥을 이룬 아름다운 전통이 되었다. 이와 같은 기도의 열정은 안동교회에서도 동일했을 것이다. 1910년 11월에 안동교회에서 있었던 길선주 목사가 인도한 특별부흥집회에도 새벽기도회 순서가 있었다. 임학수 목사는 열심히 기도하는 주의 종이었다. 때때로 그는 특별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온 교회가 함께 기도의 시간을 가졌음을 안동교회 제직회의록은 기록한다. 1929년 1월 안동교회는 새해를 맞이하면서 1주일 동안 신년기도회를 했다: “만국 연합신년기도회 매일 저녁 1주간 회집하기로 하였으며.” 만국 연합신년기도회는 세계 열방을 위해 중보(仲保) 하는 것을 뜻한다. 또한, 1935년 추수감사절에 1주일 동안 특별기도회 시간을 가졌다. 이것은 장로교 공의회의 결정 사항이기도 했으며, 임학수 목사는 이 결의를 잊지 않고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면서 한 해 동안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특별기도회를 했던 것이다. 임학수 목사는 기도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은 종이었다. 그래서 교회를 기도하는 교회로, 성도들을 기도하는 성도들로 훈련했고, 그 결과 안동교회는 기도하는 교회가 될 수 있었다. 12. 교회의 분립을 결의하다 1909년 8월 8일 세워진 안동교회는 지속적으로 부흥하고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1913년 66명에서 1932년에는 장로 4명, 세례교인 198명, 유아세례인 73명, 교인 총 수 549명으로 교회가 크게 부흥했다. 이때 안동교회는 발상의 전환을 했다. 안동 읍내에 안동교회 하나의 교회만으로는 안동을 복음화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결과 안동 읍을 세 개 지역으로 나누고 분가식(分家式)으로 교회를 분립하기로 결정했다. 안동교회의 첫 분립시도는 교회가 설립된 지 10여 년이 지난 후 시작되었다. 안동교회는 이미 오래전부터 안기동 지역에 전도인을 파송하여 집중적으로 전도를 했고, 그 결과 1924년 1월 초가 6칸을 포함한 160평 대지를 매입할 수 있었다. 이 가옥을 안동교회 안기기도실로 명명했으며, 안동교회에서 이명하여 간 성도들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렸다. 이후 안기교회가 안동교회로부터 공식적으로 분립하여 독립적 교회가 된 것은 임학수 목사가 시무하던 1932년 8월이었다. 이때 안기동 130번지 100평 대지 위에 30평 규모의 예배당을 새롭게 건축하고 안기교회(현 안동서부교회)라 칭하게 되었다. 신세교회(현 안동동부교회)의 분립도 안기교회 분립과 같은 맥락으로 이루어졌다. 안동교회는 1932년 2월, 안동교회 교인 중 경계 동편에 거주하고 있던 남성 20명, 여성 40명, 어린이 50명, 총 110명을 이명함으로써 신세교회가 분립되었다. 이후, 신세동 99번지에 대지 100평을 구입하여 건평 40평의 함석지붕의 목조 예배당을 신축하고 교회 이름을 신세교회라고 명명했다. 이처럼 안동 땅의 복음화는 분쟁에 의한 분열이 아닌 창조적인 분리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그 중심에 안동교회가 있었다. 그 결과 안동·안동서부·안동동부 이 세 교회가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협력해 훗날 목격할 안동지역의 복음화를 위한 기초를 다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교회분립에는 임학수 목사의 역할이 매우 컸으며, 그 결과 척박한 땅인 안동지역의 복음화를 앞당길 수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없는 경안노회 여전도회 도사경회로 많은 여전도회 회원들이 사경회를 마치고 안동교회 본당 앞에서 모여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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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10명 중 6명 “한국교회 신뢰 안해”기윤실, 1,000명 대상 설문 조사 … “윤리‧도덕‧포용력 회복” 시급하다 우리 국민 10명 중 6명은 한국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특히 30~40대에서 한국교회에 대한 신뢰도가 낮았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은 2월 7일 서울 종로구 여전도회관에서 ‘2020년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결과 발표 세미나’를 열었다. 기윤실이 지앤컴리서치에 의뢰해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지난달 시행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교회를 신뢰한다’는 응답은 31.8%,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63.9%로 집계됐다. 국민 10명 중 6명은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연령대별로는 30대와 40대에서 각각 73.4%, 74.7%가 ‘신뢰하지 않는다’고 응답해 다른 연령대보다 높았다. 60대 이상에선 ‘신뢰한다’가 48.9%로 ‘신뢰하지 않는다’(42.3%)보다 높았다. 목회자의 신뢰 여부를 묻는 항목에선 ‘신뢰하지 않는다’가 68.0%로 ‘신뢰한다’(30.0%)를 크게 웃돌았다. ‘가장 신뢰하는 종교’를 묻는 항목에선 가톨릭(30.0%) 불교(26.2%), 기독교(18.9%) 순으로 답했다. 한편, 한국교회가 신뢰를 받기 위해 개선해야 할 과제로 첫 손으로 꼽힌 것은 불투명한 재정 사용(25.9%)이었다. 교회 지도자들의 삶(22.8%), 타 종교에 대한 태도(19.9%), 교회 성장제일주의(8.5%)가 뒤를 이었다. 정연승 단국대 경영학부 교수는 “한국교회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윤리성과 도덕성 회복”이라며 “사회통합을 위해 노력하면서 세상과 소통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이번 조사의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다. 이예진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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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노회 여전도회연합회 제36회기 하기지도자수련회 열려예장(통합) 영주노회 여전도회연합회(회장 이설희 권사)가 주관한 제36회 여전도회 하기지도자수련회가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를 주제로 지난 8월 22일(목) 영주동산교회에서 열렸다. 1부 개회예배는 회장 이설희 권사의 인도로 드려졌으며 윤삼선 부회장의 기도 후 김창진 목사(영주동산교회)가 ‘감동이 필요합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이어 특강에는 장로회신학대학 임성빈 총장이 ‘새역사를 창조하는 선교여성’이라는 주제로 열강했으며, 오후에는 공동체예배로 구약의 말씀, 신약의 말씀 교독 후 결단의 기도, 작은사랑저금통 봉헌, 여전도회가 제창 등의 순서가 있었다. 회장 이설희 권사는 “이번 수련회를 계기로 연합회와 지교회가 더욱 합력해서 선교‧교육‧봉사 등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소감을 말했다. 우병백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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