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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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지역자율방재단, 태풍 피해복구에 구슬땀경상북도지역자율방재단(회장 이중규)은 10일(수) 제25호 태풍 ‘콩레이’로 피해를 입은 영덕지역 주민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피해복구 활동을 실시했다고 밝혔다. 영덕군은 지난 10월 5~6일 발생한 태풍으로 309mm의 폭우와 강풍으로 사망 1명의 인명피해와 1,113동의 주택침수, 328세대 551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경북도 지역자율방재단원 300여명은 태풍으로 침수된 영덕군 강구면․축산면에서 배수작업, 집안가재도구 정리와 도로변 쓰레기를 정리하는 등 하루라도 빨리 영덕 주민들이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피해복구에 힘을 보탰다. 지역자율방재단은 지난 1967년 제정된 풍수해대책법에 따라 지역의 지리와 실정에 밝은 이․통장, 민방위대원을 주축으로 구성된 수방단이 2013년 자연재해대책법 개정에 따라 전국 시도에서 지역자율방재단을 구성하였으며, 경북도는 23개 시군 278개단 5천191여명의 단원들이 도내 거주지에서 재난예방활동과 복구지원을 하고 있다. 김남일 경북도 재난안전실장은 “재난 예방과 복구에는 행정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이번 태풍과 같은 재난에는 지역자율방재단 등과 같은 단체들의 봉사활동이 실질적인 큰 도움이 된다”며 많은 도민들의 동참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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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이 배출한 첫 해외선교사, 이대영 목사(1)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이 대 영 목사 (李大榮, 1887~1968) 1887년 경상북도 예천군에서 출생한 이대영 목사는 시대를 앞서간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 믿기 힘든 유학이 강한 마을과 가정에서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도 혹독했다. 그는 더 이상 고향 땅에서 살지 못하고 객지로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일정한 훈련을 거친 후 하나님께서는 그를 고향으로 보내셨고, 뛰어난 복음전파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그 후 전도인, 조사로 활동하면서 평양신학교의 신학교육을 마치고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시무하며 기독청년면려회와 주일학교를 통해 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갈 뿐 아니라 지역복음화와 교회 부흥을 선도했다. 이후 총회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안동을 떠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파송 선교사로 1922년 6월 13일 중국 래양에 도착한 이대영은 그 땅에 머무는 동안 중국인들과 함께 중국인처럼 살았다. 1949년 중국의 공산화로 인해 선교를 포기하고 1955년에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이대영 목사는 33년 동안 중국인을 동족으로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함으로서 산동반도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수 있게 하였다. 그후 그는 오직 하나님 나라, 교회와 총회를 위해 헌신하다가 1968년 하나님이 부르심을 받은 믿음의 선배이다. 1. 이대영, 금당실 마을에서 출생하다 백사(白沙) 이항복의 후손인 이대영은 1887년 4월 23일,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에서 이유성(李裕成)과 김도혜(金道徯)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이대영이 출생한 마을은 금당실로 불러졌는데 선교사가 동네에 와서 복음을 전하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했다. 이대영은 괴당교회가 설립될 당시인 1907년 경, 복음을 소개받고 믿음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부모의 반대로 고향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가족과 함께 1910년 영일군 흥해면으로 이사했다. 그는 흥해교회에 출석하면서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특히 이곳에서 선교사로부터 신앙훈련과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전통적인 양반가문의 후예로서 비록 예수 믿는다고 집에서 버림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품으셨고, 훗날 중국 땅에서 복음전파의 귀한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이다. ▲이대영 목사의 가족사진 2. 이대영, 부해리 선교사를 만나다 안동을 포한한 경북북부지역에 복음이 처음으로 전해진 것은 1893년 배위량 선교사에 의해서이다. 이후 1902년 3월에 안의와 선교사가, 1903년 봄에 방위렴 선교사와 부해리 선교사가 안동을 직접 방문해 복음을 전했다. 특히, 부해리 선교사는 1899년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미국 북장로교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파송 받아 1899년 10월 26일 대구에 도착, 초창기 대구·경북 지역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941년 일제의 탄압으로 추방되기 까지 40여 년 동안 한국선교에 평생을 바쳤다. 부해리 선교사를 포함한 여러 선교사들의 헌신의 결과, 1903년 미국 북장로교 연회보고에 의하면 경북·대구 지역 7개 고을에서 12명의 교인이 생겨났고, 1905년에는 20개 고을에 8개 교회, 2명의 세례교인, 19명의 학습교인, 79명의 원입교인이 생겨났다. 이러한 영적 분위기 가운데서 이대영의 회심에 관한 이야기는 두 가지 설로 나뉘어진다. 우선 박용규는, 1907년 경 이대영이 나만기에 의해 복음을 소개받고 예수를 믿게 된 것으로 추측한다. 이미 예천에 존재했던 그리스도인 나만기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고 복음을 들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러 자료들은 이대영이 부해리 선교사에 의해 예수를 믿게 되었음을 증거한다. 이대영은 한국교회의 최초의 대부흥이 일어난 1907년 당시 대구선교부 소속 선교사로 있던 부해리 선교사에 의해 복음을 전달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구·경북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부해리 선교사와의 역사적 만남으로 이대영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됐으며, 이후 전도인, 조사를 거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 임직한 이후 한국교회와 중국선교의 거룩하고 위대한 한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3. 이대영, 경북 북부지역 전도인·조사가 되다 복음을 접한 뒤 집안 어른들의 반대로 흥해로 이사한 이대영은 흥해교회에 출석하면서 본격적인 전도인 훈련을 받게 되었다. 특히 대구선교부의 중심교회인 남성정교회(대구제일교회의 전신)에서 열렸던 겨울남자성경반에서 수 년 동안 수학할 기회를 가짐으로써 목회자로서의 전문적인 소양을 쌓을 수 있었다. 선교사의 지도와 신학훈련을 받은 이대영은 전도인으로 본격적인 전도사역을 하게 되었다. 흥해교회에 출석하면서 훈련받은 6년 여 동안 이대영은 이미 전도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고, 경북노회는 그를 유급 전도인으로 인정하고 복음전도사역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그는 고향인 금당실에서 전도인으로 활동하기 이전에 예천 신전교회를 왕래하며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오게 됨으로써 신전교회가 부흥했다. 신학 기초과정을 거친 이대영은 목사로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는 당시 규정에 따라 목회자 수업을 위한 문답절차를 거쳐야 했다. 그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경북노회에서 목사후보생고시를 치러야 했으며, 1916년 6월 대구남성정교회에서 개회된 제1회 경북노회에서 평양신학교 입학을 허락받았다. 신학 입학을 허락받은 후 처음으로 이대영이 섬긴 교회는 경주군 외동면 말방리의 장산(長山)교회다. 이 때 이대영은 전도인에서 조사신분으로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4. 이대영,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 임직하다 이대영은 1917년 5년 과정의 평양신학교에 30세에 입학하여 목사를 위한 수학을 시작했다. 결혼한 지 10년이 지나 10살 난 아들 이 있었는데, 평양에서 공부하는 기간 동안 가족들은 섬기는 교회에 머물러 있었으며 이대영은 혼자 기숙사에서 동료들과 함께 생활했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후 이대영은 신학공부의 적응을 위해 섬기던 장산교회를 1917년 사임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918년 다시 부임하여 장산교회를 섬겼다. 평양신학교 졸업반인 1920년 이대영은 이만집 목사가 담임으로 있던 대구 남성정교회 조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이만집 목사는 3·1 만세운동으로 투옥된 상태로 있었기 때문에 조사로 청빙을 받은 이대영은 실질적으로 대구제일교회 전신(前身)인 남성정교회를 담임하게 된 것이다. 남성정교회는 대구·경북지역 최초의 교회로 이미 이 지역의 중심교회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는 동년 12월 2일, 17명의 동기생들과 함께 평양신학교 제14회로 졸업하고, 이듬해인 1921년 1월 12일 대구동산성경학원에서 개회된 제9회 경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 임직예식을 마친 이대영 목사는 안동지역의 중심교회인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청빙허락을 받아 부임했다. 이후 이대영 목사는 1921년 6월 15일 개회된 제10회 경북노회에 정식 노회원으로 참석하여 본격적인 노회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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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거룩한 흔적을 남긴 사역자, 김영옥 목사(3)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 영 옥 목사 (金泳玉, 1871-1952) 경산사월교회, 포항제일교회, 영주제일교회, 풍기성내교회 등에서 사역 … 안정과 성장에 기여 7. 경북지역의 초대교회를 든든히 세운 주의 종, 김영옥 김영옥 목사는 안동지역과 경북 북부지역에 산재한 지역 교회들을 든든히 세운 교회지도자였다. 그는 1921년 사임하고 1년 동안 영주, 지곡, 명동, 풍산, 수동 등 교역자가 없는 미약한 교회들을 순행하며 자청하여 순회목사로 사역함으로써 이들 교회가 중심을 잡고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게 했다. 또한, 그는 안동교회를 떠난 후 경북 경산사월교회, 포항제일교회, 영주제일교회, 풍기성내교회 등에서 사역함으로써 경북 북부 지역 교회가 이전보다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사월교회 9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김영옥 목사는 목회뿐 아니라 경북 일대 장로교 지도자들에게 점조직으로 독립공채모집을 독려했는데, 독립공채모집운동은 상해 임시정부를 후원하고 태평양 국제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모금하는 운동이었다. 더욱이 김영옥 목사는 교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을 뿐 아니라 이웃에게 인정 많은 목사였다. 그 결과 4년 동안 사월교회를 섬긴 후 포항으로 이사할 때 이삿짐을 소달구지에 싣고 많은 교인이 포항까지 따라갔다고 한다. ▲경산 사월교회 전경 또한, 포항제일교회는 1924년 1월 김영옥 목사가 부임한 이후 주일학교가 급성장했는데, 그 이유는 김 목사가 주일학교에 관심을 갖고 열심을 다했기 때문이다. 당시 포항제일교회는 오전에는 주일학교만 하고 오후에 주일예배를 드렸는데, 김영옥 목사 부임 후 학습·세례자가 매년 평균적으로 40~50명씩 증가했다. 교인의 증가로 교회를 건축할 때도 김영옥 목사는 건축기성회 회장을 맡아 교인들과 함께 건축에 적극 참여했다. 이처럼 김영옥 목사가 시무하는 동안 포항제일교회는 부흥하였고, 포항의 복음화를 위해 더 큰 준비를 하였다. ▲포항제일교회 전경 1929년 권징문제로 분열된 영주제일교회를 수습하기 위해 당시 경안노회에서 원로였던 김영옥 목사가 12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김영옥 목사의 부임과 함께 혼란했던 교회는 일단 안정을 찾게 되었다. 특히 열심히 전도하는 분위기가 조성된 결과 많은 새신자가 교회를 찾게 되었고, 영주제일교회는 분열의 아픔을 극복하고 새로운 활로를 찾을 수 있었다. 영주제일교회가 안정을 되찾고 다시 빠르게 부흥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김영옥 목사 덕분이라고 「영주제일교회 100년사」는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영주제일교회 전경 1907년 설립된 풍기성내교회는 교인들 사이의 의견대립으로 1934년 6월 20일 공동의회를 통해 교회분립을 결정하였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1934년 12월 풍기성내교회 제3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그의 역할은 풍부한 목회경험을 바탕으로 어려움에 처해있던 교회를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김영옥 목사가 성내교회에 시무한 기간은 단 6개월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짧은 기간 동안 지도력을 십분 발휘하여 빠르게 교회를 안정시켰다. 1935년 노회에 보고된 교세는 성찬 참여 교인의 수는 188명, 유아세례인은 51명, 학습교인은 46명, 원입교인은 287명으로 전체 교인의 수가 591명이었다. 이것은 김 목사의 부임과 함께 교회가 급속도로 안정과 평화를 찾았다는 증거가 된다. ▲풍기성내교회 전경 이처럼 경안노회 지역을 복음화하고 교회를 잘 섬기고 돌본 것을 인정하여 경안노회는 최초로 김영옥 목사를 ‘노회 공로목사’로 추대하였다. 1948년 9월 28일 개회된 제45회 조선예수교장로회 경안노회에서 “김영옥 씨를 공로목사로 추대하고 월 5,000원씩 사례하기로 가결”하게 된다. “신앙과 애국은 별개가 아니다” … 교회를 지키면서 독립운동에 앞장선 애국지사 8. 국가와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 김영옥 김영옥 목사는 신앙에 기초한 분명한 국가관을 갖고 있던 인물이었다. 1906년 9월에 개최된 장로교 공의회 경성소회 회의에서 “교인으로는 교회를 순종하고 국민으로는 국가에 순종할 방침이란 문제”에 관해 발언했다. 그는 일제의 강점기 동안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지침을 분명하게 밝히면서 신앙과 애국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의식은 김영옥 목사로 하여금 비록 일제의 강압적인 지배하에서도 교회를 지키면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독립운동에 헌신하게 했던 것이다. 안동지방의 기미년 3·1만세운동 시작은 두 사람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모두 김영옥 목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첫째 인물은 당시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재학생인 김재명(金在明)이 서울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족운동의 실태와 독립만세운동에 관한 정보,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그의 부친인 김병우 장로를 통해 안동교회로 제공하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인물은 당시 동경 유학생으로서 2·8 독립선언에 참여하였던 강대극(姜大極)이 일본에서 안동으로 귀국하여 당시 안동군청 서기였던 김원진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들은 비교적 집회가 자유로웠던 안동교회를 찾아와 김영옥 목사와 이중희 장로 등 안동교회 지도자들과 의논한 결과 구체적으로 안동 3·1만세운동 날짜를 3월 13일 장날로 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안동의 3·1만세운동은 3월 12일, 김영옥·이중희·강대극·김원진 등 주역 4인이 거사 하루 전날에 검거되어 조사를 당함으로써 좌절되었다. 일경은 만세운동 계획에 관한 단서를 잡지 못해 이들을 석방하게 되고, 다만 이중희 장로(당시 60세)는 투옥 중 얻은 질병으로 석방된 지 6일 만에 별세하게 된다. 첫 거사일은 놓쳤지만, 만세운동의 주도자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음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계획을 수립했다. 결국 3월 18일 낮 12시경, 김병우 장로와 김익현 조사의 선창 신호에 맞춰 안동교회 교인 30여 명, 유림에 의해 주도된 다른 시위대, 그리고 장터에 모인 읍민들이 모두 합세하여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앞세우고 안동읍 최초의 대규모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수많은 읍민들이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는데, 안동교회 교인으로 김병우 장로는 2년, 김익현은 1년, 김재성·김계한·이인홍·황인규·권점필은 6개월씩 각각 복역했다. 김영옥 목사는 1922년 1~2월 경 9명의 장로교회 목사들과 함께 평북 중강진 감옥 또는 경찰서에 압송되었다. 9명은 당시 그 지역의 대표적인 지도자들이었는데 김영제 목사(길주 명천교회), 정덕생 목사(부산 초량교회), 이자익 목사(전북 금산교회), 최영택 목사(충북 청주읍교회), 장사성 조사(안동신세교회) 등이었다. 그들은 태평양회의와 관련하여 상해 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 관련 피의자로 50일 동안 취조를 받고 석방되었다. 이때 일제는 각 지역에서 시무하면서 이미 요시찰 인물로 감시 대상이었던 당시 교회 지도자들이 비록 청원서 명단에는 빠져 있었지만 중강진 감옥이나 경찰서로 압송해 혹독한 취조를 했던 것이다. ▲1922년 일명 태평양회의로 인해 중강진 감옥이나 경찰서로 압송되어 큰 고초를 겪는 당시 장로교 지도자들로 ①김영옥목사, ②김영제목사, ③정덕생목사, ④이자익목사, ⑤최영택목사, ⑥장사성조사 등으로 석방된 후 찍은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김영옥 목사는 포항교회(현 포항제일교회)를 담임으로 섬길 때 1927년 4월 교회 중직자들과 상의하여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를 포항에 설치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신간회 영일지회를 발기하고 간사로 활동하면서 대회 의장까지 지내며 책임을 다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일경으로부터 계속 감시와 탄압을 받음으로써 목회와 가정에 많은 고난을 받게 되었다. 그는 교회를 섬기면서 독립운동에 관계하다가 무려 네 번이나 일경에 체포 기소되어 재판을 받는 등 고난을 당했다. 그의 이러한 정신은 해방 후에도 계속되어 그는 남조선과도정부 문경군과 예천군의 민선 입법의원으로 피선돼 혼란한 국가를 위해 1년 동안 봉사했다. 그는 정통보수주의 편견에서 벗어나 에큐메니칼 정신이 투철했다. 그는 교파주의의 편협한 사상에서 자유하여 교회와 국가를 함께 사랑하고 헌신 봉사한 애국지사였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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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합동) 경북교직자협의회 친선체육대회 성료예장(합동) 경북교직자협의회(대표회장 최재덕 목사) 친선체육대회가 지난 9월 6일 영천실내체육관에서 경동노회 주관으로 열렸다. 올해로 16회를 맞는 친선체육대회는 매년 1,000명 이상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참여하는 예장합동 경북지역 10개 노회 연합 최대 행사이다. ‘경북의 교회여 함께 뜁시다!’는 주제로 열린 이번 체육대회에서 개회예배는 최재덕 대회장의 사회로 드려졌으며 총무 한상봉 장로의 기도 후 김관선 목사(산정현교회)는 ‘트랜스포머’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김 목사는 “세상을 바꿀 힘은 연합에서 나온다”며 “교회가 연합하여 세상의 흐름을 바꾸고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자”고 강조했다. 이어 증경회장 이기택 목사·전국영남대표회장 설정수 목사의 격려사, 경동노회장 류광하 목사의 환영사, 증경회장 장재덕 목사의 축도 등의 순서로 예배를 마쳤다. 2부 체육대회에서는 배구, 족구, 발볼링, 농구공 던지기, 장애물 달리기 등 다양한 종목으로 경기를 진행했으며 성도들은 소속 노회를 힘껏 응원하며 친교를 도모했다. 대회 결과 종합우승은 경동노회가 차지했고 2위는 경청노회, 3위는 경신노회에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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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합동 경북교직자협의회 제7회 하기수련회 성료예장(합동) 경북지역 10개 노회로 구성된 경북교직자협의회(대표회장 최재덕 목사)는 지난 8월 23일 구미 호텔금오산 대연회장에서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7회 하기수련회를 개최했다. 오전 10시에 드린 개회예배에서는 대회장 최재덕 목사의 사회, 공동회장 윤종오 목사의 기도, 사천교회 정계규 목사의 설교, 구미노회장 정순봉 목사의 환영사, 나눔의교회 김상윤 목사의 축사, 명예회장 설정수 목사의 축도, 증경회장 이종형 목사의 내빈소개 등의 순서가 있었다. ‘경북의 교회여! 함께 뜁시다!’를 제목으로 설교한 정계규 목사는 “한국 교회는 초기부터 눈물과 피와 헌신으로 세워진 교회이다”며 “복음을 위해 헌신한 선교사들의 공로가 헛되지 않게 교회가 연합하여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자”고 외쳤다. 개회예배에 이어 두 차례의 특강이 진행됐다. 이를 위해 서울두란노교회 이종철 목사와 주다산교회 권순웅 목사가 강사로 나서 ‘사명’과 ‘섬기는 자의 행복’이란 주제로 각각 강의했다. 이종철 목사는 “맏아들의 입장으로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는 목회자가 되자”고 말했고, 권순웅 목사는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주님 주시는 축복을 누리자”고 강조했다. 폐회예배는 증경회장 김승동 목사(구미상모교회)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라는 주제로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큰일을 해낼 수 있다. 총회와 총신을 위해 막중한 책임과 사명을 감당하자”고 말씀을 전해 큰 은혜를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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