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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거룩한 흔적을 남긴 사역자, 김영옥 목사(2)김 승 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영옥 목사 (金泳玉, 1871-1952) 4. 안동지역에 복음의 씨를 뿌린 교회개척자, 김영옥 안동에 복음이 처음으로 전해진 것은 부산을 거점으로 선교하던 배위량(W.M.Baird) 선교사에 의해서다. 그는 1893년 4월 17일 부산 동래를 출발하여 밀양, 청도, 대구, 낙동, 안동. 의성, 영천, 경주, 울산을 거처 5월 20일 부산으로 돌아가는 무려 1,240 리(里)나 되는 전도여행을 통해 복음을 전했다. 5월 5일, 그의 역사적인 안동 방문이 있었고, 이 날은 안동에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진 날이다. ▲1909년 9월부터 안동의 북부지역은 사우대 선교사가, 서쪽은 오월번 선교사가 책임지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전도여행을 떠나기 전의 모습으로 추측된다. 좌측 말에 탄 사람은 사우대 선교사이며 말 옆에 있는 사람은 당시 조사인 김영옥(1911년 안동교회 초대담임목사로 부임)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마부, 그리고 오른쪽 말에 탄 사람은 오월번 선교사이다. 이후 미국 북장로교는 1897년 대구선교부를 설립했고, 1902년부터 경북 지방을 세 구역으로 나눠 동부 지역은 안의와(J.E.Adams) 선교사, 안동을 포함한 북부는 방위렴(W.M.Berret) 선교사, 그리고 서부는 부해리(H.M.Bruen) 선교사가 각각 담당해 전도사역을 감당함으로써 경북북부지역의 복음화가 본격화되었다. 특히 안의와 선교사는 1902년 3월, 김기원과 함께 안동을 순행하였는데 이때 이들은 시장에서 전도를 하면서 복음서를 판매했다. 이 해에 안동 국곡과 풍산, 그리고 의성 비봉에도 교회가 설립되었다. 1908년 장로교 선교사 총회에서 안동선교부 설립 결의가 이루어졌다. 그후 안동 최초 주재 선교사로 사우대(C.C.Sawtell) 선교사가 안동에 도착했으며, 1909년 8월 8일 안동교회가 설립됨으로써 안동지역의 복음화가 활기를 띠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원주에서 선교하던 미국 북장로교 소속 오월번(A.G.Welbon) 선교사와 조사 김영옥도 1909년 선교지를 안동으로 임지를 옮김으로써 안동 땅에 복음의 바람이 강하게 불기 시작했다. 안동에 도착한 김영옥은 선교사들을 돕는 조사로 안동을 중심으로 경북 북부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는 이미 세워진 교회들을 돌보았으며, 특히 8월 둘째 주일 설립된 안동읍 최초의 교회인 안동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다. 5. 영남지역 독노회에서 최초로 안수 받은 한국인 목사, 김영옥 언더우드 선교사의 전도로 세례를 받은 김영옥은 여러 해 동안 선교사의 도움으로 성경을 공부했다. 당시 언더우드가 운영하고 있던 성경훈련반은 1년에 한 달씩으로 그 과목은 성경주해, 제목별 성경공부, 성경입문, 교회사, 성경지리, 교회정치, 찬송, 설교 등을 포함했다. 한국교회 최초의 신학교라고 할 수 있는 그곳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은 김영옥은 매서와 조사가 되었다. 조사로 활발하게 사역하던 김영옥은 1901년 개교한 장로교 최초의 신학교인 평양신학교에 만 30세에 입학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조사와 영수, 장로 등 여러 사역으로 인해 학교 공부에만 전력투구할 수 없었던 김영옥은 졸업하기 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만 40세인 1911년(제4회)에 마침내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9월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에서 개회된 제4회 독노회에서 홍승한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다. 따라서 1891년 영남지역(부산·경남·대구·경북 등)에 복음이 전해진 이후 대구에서 열린 첫 노회에서 김영옥, 홍승한은 목사로 임직을 받은 것이다. 한편, 영남지역에 있던 교회에서 목사 직분을 가지고 처음으로 시무한 한국인으로 경북교회사나 대구제일교회는 김천일 목사를 기록한다. 그러나 김천일 목사의 안수 일자는 자료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혼선을 준다(경북교회사는 1911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하편은 1912년으로 기록). 따라서 존재하는 자료를 종합할 때 영남지역 교회에서 최초로 목사로 시무한 한국인은 김천일이나 혹은 김영옥, 홍승한이라고 할 수 있다. 6. 안동지역의 복음화에 주춧돌을 놓은 사람, 김영옥 김영옥 목사의 부임(赴任)으로 안동교회는 경상도에서 처음으로 한국인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가 되었고, 그의 뛰어난 영적 지도력은 안동을 포함한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복음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안동교회는 놀랍게 부흥하여 1년이 채 지나기 전에 무려 75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발돋움했다. 안동교회의 첫 학습자는 강복영 외 14명(1910년 8월 18일), 첫 세례교인은 권중한 외 8인(1911년 3월 2일)이었다. 또한, 김영옥 목사가 담임으로 섬겼던 1911년부터 1921년까지 안동교회는 안동지역의 중심교회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다. 1911년에는 오늘의 초등학교 수준인 계명학교를 설립함으로써 교회가 섬김과 봉사로 지역사회와 소통할 수 있게 했다. 특히 1913년에는 김병우를 장로 장립함으로써 안동지역에서 최초로 당회가 구성되었다. 주일학교와 여름성경학교를 통해 어린이들의 신앙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1913년 경북북부지방에서는 처음으로 여전도회를 조직하고 도사경회를 개최함으로써 여성들의 신앙교육에도 집중했다. 1920년 안동 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했으며, 1921년 전국 최초로 기독청년면려회를 조직함으로 청년의 신앙교육과 계몽에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안동에 주재하고 있던 안동선교부의 선교사들은 자신들에게 집중되었던 리더십을 김영옥 목사에게 조금씩 이양(移讓)해 한국인 목사의 지도력을 배양했다. 1913년 8월 9일에 있었던 안동교회의 역사적인 첫 번째 당회록은 이 사실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안동교회는 1909년 8월 8일 첫 예배를 드림으로 설립된 지 4년이 지나지 않은 1913년 7월 20일에 김병우를 장립함으로써 안동지역에서 첫 당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장로장립 20일 후인 1913년 8월 9일 안동교회 제1회 당회가 오월번 목사 댁에 모여 문답건과 예배당 건축 등 안건을 처리하였다. 위 사진 중 왼쪽은 제1회 당회록을 포함한 안동교회 당회록 제1권이며, 우측은 김병우의 장로장립을 확인할 수 있는 당회기록이다. 1913년 8월 14일에 있었던 제2회 당회록에는 8월 17일 있을 첫 세례와 성찬의 집례자로 초대 김영옥 목사를 기록한다. 교회의 사역에 중요한 역할을 하던 선교사가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회가 조직되자 첫 세례식과 성찬식 집례를 한국인 담임 목사에게 양보한 것이다. 이것은 선교사들의 크나큰 배려였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불과 5일 전에 있었던 안동교회 첫 당회의 회장은 오월번 선교사였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비록 자신들의 조사였지만 목사 임직을 받고 안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김영옥 목사를 존중하며 현지인 목사를 세워줌으로써 점차 자국민 중심의 리더십을 키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안동교회는 100년이 넘는 역사에서 부속건물이 아닌 본당을 단 3번 건축했는데, 첫 예배당은 그가 조사로 섬길 때인 1910년 10월 30일 준공한 16칸 ‘ㄱ’자 예배당이다. 이 예배당 건축을 위해 교인들은 10월 9일 주일 오후예배 시 특별헌금을 했으며, 당시 조사인 김영옥도 선교사들이 준 지방 순회 때 타고 다니던 노새를 팔아 건축헌금에 보탰다. 더욱이 예배당을 신축한 이후 특별부흥집회가 열렸는데 당시 최고의 부흥강사인 길선주 목사도 강사 중의 한 분이었다. 또한 여성과 소녀들을 위해 활발한 성경공부도 이루어졌다. ▲1913년 11월부터 공사가 착수되어 이듬해인 1914년 2월에 준공한 안동교회의 두 번째 신축 예배당으로 오늘의 100주년 기념관 바로 그 위치에 서 있었다. 예배당은 목조 함석지붕을 가진 건물로 반(半) 2층 구조형식으로 약 50~60평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건축기법 상 2층은 작은 규모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안동교회의 두 번째 예배당인 2층 목조 함석지붕 예배당은 첫 번째 예배당이 준공된 후 급속한 교인의 증가로 인해 1914년 초 준공되었다. 이때도 김영옥 목사는 선교사가 사준 가옥을 팔아 헌금했을 정도로 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두 번째 예배당의 준공으로 주일학교의 활성화가 이루어져 양적으로 또 질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1920년 7월, 안동지역에서 최초로 여름성경학교가 열렸으며, 이듬해에는 주일학교가 조직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더욱이 인근 지역 교회들이 연합하여 모일 수 있는 부인도사경회 등 대형집회가 가능하게 되었다. 김영옥 목사의 부임으로 안동교회는 사역의 내용, 교회의 건물과 조직 등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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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거룩한 흔적을 남긴 사역자, 김영옥 목사(1)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 영 옥 목사 (金泳玉, 1871-1952) 1893년 베어드 선교사에 의해 안동지역에 복음이 전해진지 124년이 지났다. 오늘의 교회는 믿음의 선배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우리 모두는 너무도 잘 안다. 훌륭한 믿음의 선배 중에는 교역자들 뿐 아니라 평신도들도 포함된다. 이 분들의 헌신의 결과로 척박한 이곳 안동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뿌리를 내리고 자라 마을마다 교회가 서게 되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수고임을 알기에 감사할 뿐이다. 김영옥 목사는 한국선교 초기 거룩한 발걸음을 통해 거룩한 흔적을 남긴 위대한 선배이다. 필자는 그에 대한 조명이 너무 늦었음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그리고 경상북도에서 초개와 같이 모든 것을 버리며 교회와 국가를 위해 헌신한 김영옥 목사를 연구하여 탈고하니 그동안 목사님에게 가졌던 죄송스러운 마음이 조금이라도 보상받는 느낌이다. 이제 자애로운 아버지요 할아버지, 지역의 초대교회의 기초를 든든히 세워 중심교회로 서게 한 목사, 그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믿음으로 두려움 없이 애국한 김영옥을 소개한다. 1.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 결신한 청년, 김영옥 경상도의 첫 한국인 목사는 김영옥(金泳玉, 1871-1952)이다. 김영옥이 비록 영남지역 최초의 한국인 목사이지만 그의 고향은 북한으로, 그는 1871년 4월 12일 황해도 연백군에서 출생했다. 가난했던 그는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해 미국 하와이로 갈 꿈을 갖고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18세가 되던 1888년 어느 날, 평산 누님 댁에 갔다가 장로교 최초의 선교사였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선교사가 소래(松川)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미국으로 갈 방법을 찾기 위해 그를 찾아갔다. 그러나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제시받은 김영옥은 미국 갈 결심을 포기함과 동시에 회심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결국 그는 장로교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로부터 세례까지 받게 되었던 것이다. 전혀 뜻하지 않게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은 김영옥은 세례 까지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언더우드 선교사의 마부로 복음사역의 적극적인 도우미가 되었다. ▲1909년 9월부터 안동의 북부지역은 사우대 선교사가, 서쪽은 오월번 선교사가 책임지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전도여행을 떠나기 전의 모습으로 추측된다. 좌측 말에 탄 사람은 사우대 선교사이며 말 옆에 있는 사람은 당시 조사인 김영옥(1911년 안동교회 초대담임목사로 부임)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마부, 그리고 오른쪽 말에 탄 사람은 오월번 선교사이다. 2. 목사 임직 이전의 복음전도자, 김영옥 회심 이후 김영옥은 복음사역을 위해 하나하나 착실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복음전파사역에 관한 김영옥의 결심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까지 중단 없이 계속되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후 그는 단 한 번도 곁길로 간 적이 없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기 위한 준비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그는 능동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 1년 만에 한문 신·구약 성경 모두를 통독(通讀)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또한 선교사들로부터 전도법과 장로교회에 관해 배웠으며 선교사들과 간단히 대화할 수 있는 영어실력도 갖추게 되었다. 모든 과정을 이수한 김영옥은 실력 있는 매서인(賣書人)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선교사를 도와 공식적인 매서인으로서 사역할 수 있었다. ▲황해도 솔래(松川)에서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 18세 때(1888년) 회심하고 결신한 김영옥은 휴식도 없이 64년(1952년) 동안 서울, 강원도 철원과 원주, 경북 안동, 사월, 포항, 영주, 경주, 풍기, 문경, 그리고 의성 삼분 등 전국에서 교회를 세우고 돌보며 애국하다가 하나님의 나라에 입성하였다. 이후 서울로 올라온 김영옥은 1893년 모삼열(Samuel. F. Moore)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순교를 각오하고 서울 종로 5가, 4가 등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그 결과 몇 명의 성도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1894년 이들이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와 그의 조사(助事)인 서상륜과 함께 연지동 초가(草家)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오늘의 연동(蓮洞)교회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또한 김영옥은 조사로서 서울의 승동교회와 동막교회 설립에 관여함으로써 이 땅에 교회를 세우는 사역을 쉬지 않고 감당했다. 이후 김영옥은 서울을 벗어나 더욱 활발하게 전도사역을 감당했다. 그는 경기 동쪽과 황해도 이남(以南)으로 순행하며 전도하여 백천, 평산, 금북, 금성, 양구, 화천, 양주, 포천, 등지에 여러 교회를 설립에 기여했다. 특히 김영옥은 1898년 모삼열 선교사와 함께 전도하고 개척한 고향인 황해도 백천군 운교(雲橋)교회에서 영수(領袖)와 장로로 섬기기도 했다. 운교(구름다리)교회는 교인들의 헌금으로 큰 한옥을 사서 새롭게 단장하여 예배처소로 사용한 그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로 김영옥은 주일예배를 인도하였다. 그는 새 신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신자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2주 내지 3주간씩 연속으로 사경회를 열기도 하였다. 김영옥은 전문적인 훈련을 거친 한국교회 초기 매서와 조사, 그리고 영수와 장로로 초기 한국교회의 뛰어난 평신도 지도자였던 것이다. 3. 영적 지도력을 갖춘 한국 장로교 평신도 리더, 김영옥 조사(助師)는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들이 그들의 고국과는 모든 것이 완전히 다른 이 땅에서 적응해갈 수 있도록 도운 사람들이다. 선교사들은 이들에게 한국어를 배우고, 부동산을 구입할 때 도움을 받았으며,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각 지방으로 순행할 때 큰 도움을 받았다. 만일 어느 누구도 선교사들의 복음사역과 현지 적응을 돕지 않았다면 이렇게 빠른 시간에 이 땅에서 복음의 씨가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여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김영옥은 조사로서 초기 한국교회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었다. 한국선교 초기 많은 조사들이 있었지만 조선장로교사기에 따르면 김영옥은 당시 활동하던 많은 조사 중에서도 영향력 있는 발언권을 가진 조사였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그는 공식적인 회의석상에서 중요한 발언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김영옥은 1903년 9월, 1904년 9월, 1906년 9월 세 차례에 걸쳐 선교사들과 함께 모인 장로교공의회 경성소회 총대 장로로 참석하여 발언하기도 했다. 1906년 9월 회의에서는 “교인으로는 교회를 순종하고 국민으로는 국가에 순종할 방침이란 문제”에 대하여 발언했는데, 이것은 분명한 기독교적 국가관을 가진 김영옥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7명의 한국인 목사가 처음으로 배출되기 전 까지 김영옥은 당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평신도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따라서 당시 활동하던 많은 조사 중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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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신앙이정우 목사 안동서부교회 한 시대를 평가하고 진단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사람들의 행동양식과 집단 행태를 알아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행동양식과 삶의 방향성이 그 시대의 거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사기는 BC.1390년~BC.1055년까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대적 상황과 신앙적 행태를 알 수 있는 주요한 단서가 되는 성경입니다. 당시는 여호수아가 죽고 난 후, 아브라함부터 모세를 거쳐 여호수아까지 단일 지도자를 중심으로 신정 체제를 유지했던 이스라엘에 신앙의 혼란이 불어 닥친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정복전쟁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몰아내라고 하신 가나안 족속들을 다 몰아내지 못하고 그들의 사상과 신앙과 삶의 패턴에 젖어 살거나 오히려 가나안 문화에 압도되어 점점 신앙의 가치를 상실해 갔습니다. 그래서 사사기의 악순환이라는 불리는 범죄-징계-회개-구원-재타락 이라는 악순환의 구조에 빠지게 됩니다. 사사시대의 잘못된 신앙을 한 마디로 진단한다면,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라고 사사기 마지막 구절은 기록합니다. 그 특징적인 삶을 사사기 17장에서 ‘미가’ 라는 사람의 가정을 통해 고발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아들이 물질을 범함으로 신앙적인 행위에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책망보다 오히려 복을 선포합니다. 심지어 그의 어머니는 미가를 위하여 에봇과 드라빔과 같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물을 서슴없이 만들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돈으로 매수해 레위인을 자신의 집에 고용하여 제사장으로 삼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완벽한 절도요, 사기행각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미가가 자칭 제사장을 세우고 한다는 말이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라고 스스로 안위했습니다. 이는 사사시대의 잘못된 신앙의 한 일면입니다. 신앙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독교 용어 가운데 ‘실천적 무신론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무신론자들은 교회도 나오고 하나님이 계심도 믿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삶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신앙을 가졌지만, 내가 믿는 방식이 정답인 줄 알고 사는 삶입니다. 이론적 무신론자들보다 더 해악을 끼치는 자들이 바로 실천적 무신론자들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힘 있는 교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힘센 사람의 말이 정도(正道)가 되고, 사람들의 생각이 진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신앙 모습은 세상과 친숙해 지고 세상과 가까워진 편리주의 신앙으로 흘러 기복주의 신앙이 되었습니다. 내 교회에 유익이 되는 것이 곧 법이 되어 편법과 반칙이 난무함으로 하나님을 잃어버린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없고, 십자가 없는 신앙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오늘날 미가의 신앙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 유일신 신앙이 아닌 짬뽕신앙입니다.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편리주의 신앙입니다. 의를 위한 고난의 신앙이 아닌 기복주의 신앙입니다. 잘못된 신앙에서 바른 신앙으로 말씀의 원칙과 신앙의 절대가치를 지킴으로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하나님의 종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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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기업체 탐방 인터뷰 - 삼우연합정형외과의원 김 식 원장<화제의 인물 : 단독 인터뷰> 만나고 싶었습니다! 구미 삼우연합정형외과 김 식 원장 “소통”과 “공감”의 의술 펼치다! 소통이 없어진 시대, 지식과 정보는 넘쳐나는데 막상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생기면 마음 놓고 찾아가 대화를 나눌 곳이 점점 없어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구미시 형곡동에 위치한 삼우연합정형외과에 가면 마음씨 따뜻한 의사 선생님이 한 분 계신다. 병원을 방문한 환우들은 진료뿐 아니라 인생 문제 상담까지 오랫동안 의사 선생님과 대화를 나눈다. 김 식 원장의 “공감” 의술이 빛나는 의료 현장이다. 본지에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일터 사역을 펼치고 있는 김 원장을 만나 그의 생각을 들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다음은 그와 나눈 진솔한 대화들을 정리한 것이다. Q. 환자들과 특별히 많은 얘기를 나눈다고 알고 있습니다. 원장님의 의술 철학이 있다면요? 현대는 의료 분야에서도 지식과 학문이 놀랍게 발전했습니다. 의료 장비도 최첨단으로 발달하고 진료 과목은 더 전문적으로 세분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가진 문제, 즉 몸이 아플 때 그것을 치료하는 패턴은 아직도 그에 못 미치고 있습니다. 어디가 아픈지 묻고, 엑스레이 찍고, 주사, 약, 물리치료… 저는 그런 획일적인 치료에서 벗어나 환자들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자 진정성 있는 대화를 많이 합니다. “소통”이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Q. 매일 아침 진료를 시작하기 전, 직원들과 15분씩 스트레칭과 운동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는 운동을 안 하면서 환자들에게만 하라고 하는 것은 진실성이 없으니까요. 저는 치료하면서도 환자가 꼭 해야 하는 운동은 저도 같이 따라 합니다. 의사의 권위는 강요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신뢰를 얻을 때 저절로 형성되는 것입니다. 병원 경영에서도 저는 직원들의 의견을 최대한 들어주고 인정해줍니다. 지난 6월 18일부터 저희 병원은 주 5일 진료로 바뀌었습니다. 직원들의 근무 여건을 존중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끊임없이 서로를 신뢰해주는 것, “공감”의 형성은 기독교인들의 일터 현장에서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Q. 영적인 원리가 의료 현장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남기시고 싶은 말씀은요? 모든 병에는 원인이 있기 마련입니다. 정형외과적인 질병은 잘못된 생활 습관과 자세에서 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그 근본 원인을 고치지 않으면 재발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의사는 병 고치는 능력을 100%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효율적인 해결 방법을 알고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일 뿐입니다. 환자와 의사는 서로 존중해야 하고 신뢰할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그것은 약간의 시간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 상처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저를 의사의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환자들을 그분의 마음으로 대하고자 항상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인터뷰 후기> 삼우연합정형외과 병원에는 아늑한 분위기의 병실과 물리치료실, 비수술 로봇형 척추 디스크 치료기 등 최첨단 장비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시스템보다도 더 병원에 신뢰가 가는 것은 바로 환우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의사 선생님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 놓고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병원, 궁금한 것은 무엇이든 대답해주는 의사 선생님, 김 식 원장의 하얀 가운은 우리에게 그렇게 기억되길 바래본다. /대담·정리=박은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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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평신도”기독교대한감리회 제34회 삼남연회 평신도수련회가 지난 8월 24일~25일까지 부곡로얄관광호텔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평신도’라는 주제로 7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임경엽 장로(준비위원장)의 사회와 신종규 장로(남선교회연합교육부회장)의 기도, 남선교회 지방연합회 회장 일동의 특송으로 진행된 개회예배에서 삼남연회 권영화 감독(사진)은 ‘하나님이 기억하신 한 사람’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권 감독은 “고넬료의 구제와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 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기억되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 시대에는 삶으로 그리스도인임을 보여주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또한, “경건의 능력은 항상 기도하는 데서 나온다”며 “기도 없이는 죄와 세상과 정욕을 이길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서 김재성 장로(사회평신도국 총무)·김철중 장로(남산교회전국연합회장)가 격려사를, 이풍구 장로(장로회 전국연합회장)·김진열 장로(교회학교 전국연합회회장)가 축사를 전했다. 대회장인 안승준 장로(남산교회 삼남연회연합회 회장)는 인사말에서 “이번 수련회를 통해 스스로를 점검해보고 우리들의 연합으로 하나님의 선한 사업에 즐겁게 쓰임 받는 모두가 되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이번 수련회에서 주제강연은 김성태 목사(삼척큰빛교회)가 ‘함께 걸어가는 우리’라는 제목으로, 영성의 시간에는 백동조 목사(목포사랑의교회)가 ‘행복하십니까?’, 도준순 감독(서울남연회 세광교회)이 ‘복음의 숲을 이루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둘째 날 마지막 특강은 김대희 목사(당진기지시교회)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계십니까?’라는 제목으로 메시지를 선포했으며, 연회총무 장석재 목사의 축도로 모든 순서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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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대학교 임영효 신학대학장 정년퇴임고신대학교 임영효 교수(사진)의 정년퇴임 감사예배와 정년퇴임식이 지난 3일 부산 진목교회 본당에서 열렸다. 퇴임준비위위원회에 따르면 이날 행사에는 황만선 고려학원 이사장, 안민 총장을 비롯한 내빈들과 고신대 신학과 교수들, 제자들과 축하객이 참석했다. 제1부 감사예배에서 김성복 목사는 ‘끝이 아름다운 생’이라는 설교를 통해 “임 교수가 24년간 교수로 재직하고 아름답게 매듭짓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자 임 교수의 진실된 삶의 결과”라고 치하했다. 이어서 황만선 이사장은 “평생을 지켜본 친구인 임 교수는 참으로 선비 같은 학자”라고 축하했다. 또한, 안민 고신대 총장은 “임영효 교수님은 목회자로서, 신학교수로서 모두가 존경하는 고결한 인격의 소유자”라고 말했다. 특히, 이날 임 교수의 생애 및 약력 소개에서 제자인 하승무 교수(한국장로회신학교 역사신학)는 임영효 교수의 성경적 교회성장과 선교 방법론을 규명하고 신학적 업적 등을 알렸다. 임 교수는 지난 1994년도에 고신대 신학교 실천신학 및 교회성장학 전공교수로 임용된 이후, 24년의 재임 동안 기독교사상연구소 소장, 교목실장, 선교목회대학원장, 신학대학장을 역임했으며 이외에도 대구서부노회 노회장, 고신총회 선교회 이사 등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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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P 독소조항 삭제 서명운동 전개국가기만 인권정책 비상대책위원회(이하 국인비)는 지난 7일 한국기독교연합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인권기본계획(NAP) 내 독소조항의 문제점과 한국교계의 대응방안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는 김지연 약사의 사회로 길원평 교수와 구자우 목사, 박요셉 목사가 발제자로 나섰다. 길원평 교수는 “국민을 속이고 동성애를 옹호하며 종교 자유를 침해하는 NAP는 우리 사회의 윤리·도덕을 파괴하는 데 활용될 게 뻔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자우 목사도 “각 교단들의 NAP와 동성애, 차별금지볍에 대한 보다 분명한 결의를 통해 한국교회가 이번 문제를 반드시 바로 잡아나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국인비 측은 이날 NAP 독소조항 반대 10대 실천계획을 발표하고 천만인 서명운동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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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훈 목사 신임총회장에 추대▲유충국 전 총회장과 공로패 수상자들(왼쪽에서 두번 째가 이진호 목사). 교단 명칭 변경 건으로 화제를 모았던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 제41회 총회가 지난 10일 ‘생명, 교회를 살리자!’를 주제로 천안 백석대학교에서 개회됐다. 첫날 총회는 교단 명칭 건을 논의하고 ‘백석대신’으로 변경할 것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또한, 총회 회기는 구 예장 백석 교단의 회기인 제41회를 사용하기로 결의했다. 총대들은 분열 대신 화합을 이루는데 최우선 순위를 두고 정통성을 지키는 범위 내에서 은혜로운 교단의 모습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둘째 날 치러진 선거에서는 이주훈 목사(동탄 사랑의교회)가 신임총회장으로 추대됐으며, 부총회장에 박경배 목사, 김우환 장로를 선출했다. 4년 동안 부총회장으로 교단을 섬겨온 이주훈 총회장은 오는 11월 목회자 영성대회를 열어 교단 통합 과정에서 받은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힐링하는 시간을 갖겠다고 밝혔다. 한편, 첫날 총회에서 이진호 목사(경울노회, 구미새에덴교회)는 지난해 구미시기독교총연합회 회장으로 구미 지역 복음 사역을 위해 헌신한 공로로 교단으로부터 공로패를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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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대한감리회 10월 2일 감독 선거 실시기독교대한감리회의 제33회 감독 선거가 오는 10월 2일(화)에 예정대로 실시된다. 지난 13일(목) 총회 선관위는 제33회 총회 감독선거 후보를 18명으로 최종 확인하고 등록증을 교부한 뒤 기호추첨을 했다고 감리회 언론매체인 당당뉴스는 밝혔다. 이로써 후보들은 20일간의 선거운동에 들어갔다. 매체에 따르면 그동안 심의과정에서 김학중 목사(경기), 임제택 목사(남부), 박명홍 목사(중부) 등 후보 자격에 관해 문제가 제기되거나 구설수에 오른 후보도 있었으나 선관위는 전체회의를 통해 모두에게 선거권을 부여하기로 했다. 기호추첨 결과 그동안 후보 자격에 대해 서로 문제를 제기해 왔던 경기연회 김학중 후보는 기호1번을, 하근수 후보는 기호 2번을 뽑았다. 삼남연회 감독후보는 모두 협성 출신으로 기호1번 김복돌(울진지방, 평화교회), 기호2번 장성만(울진지방, 다사랑교회), 기호3번 김종복(대구지방, 소명교회)이다. 또한, 이번 선거에서 단독으로 입후보한 서울, 서울남, 충청연회의 감독후보는 기호추첨 없이 인사로 대신했다. 한편, 보도에 따르면 등록증 교부와 기호추첨 시간에 선관위의 결과에 수긍하지 못하는 상대 후보들 간에 격렬한 항의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향후 몇몇 연회에서 후보등록 무효(가처분)나 선거무효 소송이 제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동안 많은 논란에 휩싸였던 감독회장 재선거는 전명구 감독과 이철 감독회장직무대행이 여러 관련 소송들을 사회법에 제기하고 판결을 기다리는 상태여서 감독회장의 공석은 당분간 더 지속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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