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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3)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3)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안대선 선교사(W.J.Anderson, 1890~1960) 목차 서문 1. 안대선의 출생지 2. 안대선의 출신대학과 신학대학원 3. 안대선의 결혼과 사별 4. 안대선의 안동선교부 부임 5. 안대선과 안동기독청년면려회 6. 안대선과 전국기독청년면려회 7. 안대선의 그 외 사역 8. 안대선의 퇴임 및 별세 5. 안대선과 안동기독청년면려회(1) 1) 기독청년면려회 기독청년면려회는 미국에서 특정 교파를 배경으로 한 것이 아니라 청년들의 기도회를 통해 자발적으로 생겨난 운동이다. 면려운동은 미국 포틀랜드 시에 있는 윌리스톤교회를 섬기는 클락(F.E.Clark) 목사에 의해 처음으로 시작됐다. 1881년 2월 2일 교회 청년들과 함께 기독교청년면려회(CE)를 조직한 클락 목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For Christ and the Church)라는 표어를 갖고 기도와 성경연구 전도운동에 힘을 쏟았는데, 얼마 되지 않아 미국 전역에 번지게 됐다. 이후 인도, 영국, 캐나다 등에도 면려운동이 전해졌으며 1892년에는 클락 목사가 중국을 방문하면서 아시아에서도 조직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안대선은 미국에서 일어난 면려운동의 성과를 듣고 한국에 소개하기 위해 클락 목사와 여러 차례 서신교환을 하며 그에 대한 자료를 얻어 기독청년면려회를 안동교회 청년회에 소개했다. 면려운동의 근본정신은 기독교 청년의 품격을 교육하여 교회와 사회를 위해서 봉사하는 데 있다. 면려회의 표어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하여’(For Christ And The Church)이다. 3대 결의로는 다음과 같다. 표어는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자, 정직한 나가 되자, 사람에게 신의를 지키자”이고, 주장은 ‘쉬지 않고 나를 교양하자, 나의 교회를 돕자, 방방곡곡에 전도하자, 외지 전도에 힘쓰자’이며, 작정으로는 ‘매 회원 매년 1인 전도주의자가 되자, 회원마다 십일조를 바치자, 내 동리에 신앙운동을 일으키자, 외지의 한국 동포를 구하자’이다. 특히 강령(綱領)은 다음과 같다. ① 우리는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문답을 우리의 신조로 한다, ② 우리는 개혁주의 신앙과 생활을 확립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됨을 우리의 목적으로 한다, ③ 우리의 사명은 다음과 같다: 개혁주의 신앙의 한국교회 건설과 사회의 복음화와 개혁주의 신앙의 세계교회 건설과 세계의 복음화. ④ 우리의 생활 원리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 안대선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안동교회에서 청년면려회 조직 승인을 위한 분위기가 점차 무르익게 되었다. 청년면려회원은 실제로 그리스도를 위한 삶, 교회를 위한 삶을 살아야 했다. 특히 회원은 실생(實生)회원, 학습회원, 명예회원 등으로 구분되었다. 특히 실생(實生)회원의 자격은 나이 17세 이상 40세 이하의 세례교인이었으며, 그리스도의 품성을 가지고 그의 삶을 본받아 살겠다(實生)고 서약해야 했다. 서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봉행(奉行)하기로 힘쓸 것. ② 내가 정한 뜻으로 매일 기도하기와 성경읽기를 끝까지 힘쓸 것. ③ 내가 있는 교회의 진흥하는 일에 힘써 그리스도인의 본분인 의무를 지키기로 힘쓸 것. ④ 내가 본회의 일체 의무를 다 실행하되 매 주일 본회 예배시간에 출석하여 찬송하며 기도하며 성경 읽고 증언하는 일분자(一分子)의 직책을 담임하기로 힘쓸 것. ⑤ 내가 매삭 헌심회(獻心會) 때에 혹 출타하여 돌아오지 못하였든지 또는 부득이한 사고로 참회치 못할 경우에는, 호명할 때에 대답으로 성경말씀 외울 절수를 기록하여 본회 회원에게 편지로나 전편으로나 신실하게 송부하여 대신 외워 정신적으로 참석함을 표하기로 힘쓸 것. 2) 안동교회 기독청년면려회 조직 19세기 말부터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국내에 여러 회(會)를 소개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기독청년운동도 소개했지만 신앙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하고 있었다고 안대선은 증언한다. 하지만 3·1만세운동 후 안동의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1919년 안동의 만세운동이 안동교회의 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나게 되자 의식 있는 많은 청년들이 안동교회로 모여들었고, 1920년 4월 8일 안동기독청년회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기독청년회는 시작할 때의 열정이 점점 식어져 유명무실한 청년회가 되었고, 신앙적인 면에서도 덕이 되지 않고 있었다. 더욱이 안동 기독청년회 조직을 이끌어가던 회장 김원진을 포함한 다수의 회원들은 불신자로 활동의 목적이 신앙운동이 아닌 사회운동에만 전념하게 되자, 당시 안동교회 동사목사인 권찬영 선교사는 일제의 교회탄압이 심해져 신앙생활이 방해받을 것을 염려했다. 교회는 안동기독청년회를 지도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순수한 신앙중심의 청년회 조직을 새로 구상하게 되었다. 당시 청년들은 전국적인 기미년(1919년) 3·1운동의 실패로 인해 좌절을 경험하고 있었고, 일제의 탄압이 날로 심해져 독립의 희망은 점점 사라지고 국민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 겨우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한 청년들은 신학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교회를 통해 애국 운동을 하려는 의욕이 더해졌다. 이때 안대선 선교사가 소개한 면려운동은 청년들에게 호감을 끌기에 충분했다. 안대선 선교사는 1921년 1월 하순, 청년면려회를 조직키로 작정하고, 당회의 허락을 받고 1월 23일 안동교회에서 청년면려회 창립총회를 개최하며 임원과 위원을 선정하였다. 면려운동을 활발하게 추진한 안동교회 주요회원들은 권연호, 권중윤, 김재성, 홍범순, 서순이, 장경영 등이었고, 권중윤은 회원들의 만장일치로 초대회장에 선출되었다. 안동교회 당회는 1921년 2월 5일 전국 최초로 기독청년면려회를 승인함으로써 청년신앙운동으로서 교회봉사와 대사회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으며 안동교회는 한국 기독청년면려회의 발상지 교회가 되었다. ▲안동교회 당회는 1921년 2월 5일 기독청년면려회 조직을 승인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전국에서 최초로 기독청년면려회가 출범하게 되었다. 당시 당회장은 권찬영 선교사였으며, 안동교회 2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이대영 목사도 참석했다.(사진4)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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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로 가정과 교회에 죄를 짓지 않게 하소서이 나라로 가정과 교회에 죄를 짓지 않게 하소서 조병우 목사 김천제일교회 사람의 삶에서 가장 큰 단위는 국가라는 단위고, 가장 작은 단위는 가정이라는 단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특성은 국가라는 단위보다는 가정이라는 단위를 가지고 있는 조직입니다. 때문에 성도는 문제를 볼 때 한 가정의 문제로 적용해 답을 찾는 것도 하나의 방식입니다. 가정이 가진 가장 귀한 은혜는 바로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기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어떤 조직과 기관도 가정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가정은 생명이 출생하고 그 생명을 양육하기 위한 숭고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국가나 사회는 이러한 가정의 숭고한 기능을 보호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악한 정부는 삶의 다른 이유들로 가정이 가진 이 귀한 사역을 파괴하려는 정부입니다. 예를 들어 동성애니 평등법이니 하는 것은 가정을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악법이 됩니다. 그것은 가정의 소중한 생명 출산과 양육의 구도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가정과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을 구원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세상이 결코 대신할 수 없는 교회의 소중한 목적입니다. 교회가 없으면 생명을 구원하는 조직이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는 모든 영혼이 출생하고 양육을 받는 영적 어머니와 같은 사역인 것입니다. 종말 세대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두 가지 방향성은 생명 창조의 질서를 파괴하는 운동일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을 파괴하고 교회를 파괴하는 구도를 모든 조직 속에 심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동성애를 조장하고, 평등을 말하면서 가정이나 교회를 허물려고 하는지를 우리는 분명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정부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악한 죄악은 가정과 교회를 파괴하도록 하는 제도와 법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회의 미래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지금 국민을 위한다는 이름으로 가정을 파괴하는 문화와 제도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을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교회가 없는 세상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사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길을 잃어버린 세상이 될 것이고, 온갖 거짓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여 사람을 미혹하는 적그리스도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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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애굽기(28)나의 출애굽기(28) 드보라 67. 백인 선교사님을 통해 지식을 익히다 그렇게 도움을 받다가 하루는 그 백인 선교사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제안을 하셨다. “저희 생각에 드보라 씨는 더 나은 교육을 받고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저희가 드보라님께 성경뿐만 아니라 다양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나에게는 너무나 고마운 제안이었다. 고난의 행군과 중국 생활 속에서 주로 생계를 걱정하고 먹고살기 바빴던 나로서는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마치 꿈과 같았다. 나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을 귀하게 생각해주시다니 ···. 감사한 마음이었다. 그렇게 나는 권유대로 선교사님을 따라 좀 더 큰 도시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2일에 한 번씩 그 선교사님 집에 찾아가 여러 가지 지식을 익혔다. 선교사님 집에서 처음 접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컴퓨터였다. 선교사님은 나에게 컴퓨터도 가르쳐주시고 여러 동영상도 보여주셨는데 특별히 북한에 대한 영상을 많이 보여주셨다. 차인표씨 주연의 탈북자의 애환을 담은 영화 ‘크로싱’도 그 집에서 봤다. 그 영상을 함께 보면서 나는 거기 나오는 악역들을 보며 ‘이 나쁜놈들 저 나쁜놈들’ 하고 있는데 슬쩍 옆의 백인 선교사님을 보니 퍼런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북한 사람이 받는 고통에 나보다도 더 마음 아파하시는구나 ···. 무덤덤했던 내 마음도 왠지 뭉클해졌다. 내가 감동받을 일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 선교사님 댁에는 한 탈북민 갓난아기가 있었다. 아기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북송되면서 남겨진 아이였다. 마침 백인 선교사님의 사모님은 생후 10개월 되는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은 이유식 먹이고 그 젖을 그 아이에게 먹이셨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북한의 아이를 이 백인 선교사 가정이 얼마나 귀하게 돌보는지를 옆에서 지켜보며 나는 북에서 배웠던 각종 교육이 잘못되었음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백인 선교사라고 하면 미제 승냥이다 스파이다 악마 같은 사람이라고 욕했는데 이 사람은 자기를 원쑤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이렇게나 사랑하는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내가 북한에서 자유롭게 발언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북에서 가르친 내용이 다 거짓이라고 폭로하고 싶었다. 남조선 괴뢰도당이, 미제 승냥이가 오히려 우리를 더 생각하고 불쌍히 여기고 있다고 꼭 북의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68. 중국을 벗어나 복음 전할 기회를 갖기로 하다 그렇게 선교사님 덕분에 공부도 하고 생활도 지원받으면서 나는 중국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선교사님을 통해 공부도 하고 복음 안에서 나를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서 가만히 숨어서 생활해야 하는 이곳에 머물기보다는 더 자유롭게 복음도 전하고 기회 되는대로 북한의 형제자매들을 위해 일하고 싶었다. 선교사님도 내 생각을 듣자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나섰다. 처음에는 미국을 알아보았지만 미국으로 난민 신청을 하거나 이민을 가기란 쉽지 않았다. 난민 신청을 하고 국적취득 하는 데 최소 수년은 걸린다고 했다. 반면 한국은 국적취득이 어렵지 않다. 게다가 TV에 탈북민들 활동하는 것을 보고 남조선에 가도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오픈도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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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신앙을 위해 교회를 옮기는 것, 옳은가요?자신의 신앙을 위해 교회를 옮기는 것, 옳은가요? Q 질문 : 자신의 신앙관에 맞는, 혹은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 교회를 옮기는 것은 부정적인가요, 허용 가능한가요? 대부분 교회에서는 타지로의 이사 등,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한 교회를 일평생 섬기며 헌신하는 것을 가르치고 권유하는데, 이것의 성경적 근거가 있나요? 항간에서는 고정적인 신도를 두기 위해 이런 문화를 만들어 냈다고도 하는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요. A 답변 : 지금의 교회가 자신의 필요를 채우지 못할 때, 자기 신앙을 위해 교회를 옮기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 같군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간단한 것 같으면서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교회가 무엇인지, 구원받은 신자가 누구인지 교회관과 신자의 정체성에 대한 근본 문제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하나님이 임하시는 특별한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너와 나’,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라는 특별한 관계성을 통해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여 주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내가’ ‘내 뜻’으로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내가 그 교회에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 교회 속에서 다른 지체들과의 깊은 관계성을 통해 내가 영적으로 성장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나님이 나를 그 교회로 불러 주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단지 교회의 예배나 설교를 통해서만 내가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로서 주님이 부르신 자리에서 내가 스스로 의무와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다른 성도와 함께 내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내 필요에만 초점을 맞추어 교회를 옮기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만약 그런 이유로 교회를 옮긴다면 아마도 계속해서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녀야 할지도 모릅니다. 지상에 나의 모든 만족을 채워 주는 완전한 교회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에 어떤 면이 부족하다면 하나님은 다른 것을 통해 자기 백성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렇다고 교회를 절대로 옮겨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부득이하게 교회를 옮겨야 할 경우가 있을 수 있지요. 문제는 그런 경우에도 반드시 주위의 다른 성도들과 그 문제를 신중하게 의논한 뒤, 기도로 진지하게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자기 필요와 자기 뜻대로 사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답변자 : 김순성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실천신학) -'크리스천 큐앤에이'(도서출판 등과 빛) 中 요약 발췌-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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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에서 크리스천들은 왜 박해를 받는가?아프가니스탄에서 크리스천들은 왜 박해를 받는가? 아프가니스탄은 이슬람 공화국으로 아프간 국민이 크리스천이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공식적으로 아프가니스탄에는 국제군, 외교관, NGO 사역자들과 같은 외국인들 외에는 기독교인이 없다. 모든 현지인 아프간 크리스천들은 이슬람에서 개종한 비밀신자들로 공개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아프간에서 이슬람을 떠나는 것은 이슬람법에 의해 죽음으로 처벌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가족과 친족, 부족은 자기들 중 개종한 크리스천을 제거함으로써 ‘명예’를 지켜야 한다. 개종한 자는 죽이거나 또는 정신이상자로 분류하여 정신병원에 보낼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크리스천들의 삶은 어떤가? 사회가 조밀하게 친족 중심이기 때문에 사회적 통제가 높고 사적 생활이 드러나지 않기 어렵다. 외국인조차 기독교 자료나 상징물을 소지하기 어렵다. 아프간 교회는 없고 유일하게 교회로 기능하는 하나의 외국인 교회도 그 활동을 감시받는다. 모든 형태의 모임은 탈레반 또는 감시기관의 높은 주목을 받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럽게 작은 소그룹으로 나누어 모인다. 지하교회 비밀신자들 역시 극도로 조심하여 만남을 가진다. 오픈도어는 아프가니스탄의 크리스천 수를 ‘수천 명’으로 추산한다. 아프간 여성인권과 크리스천 여성 아프간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신체적 학대를 받기 쉬우며 경제적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자율권은 거의 없다. 집에 감금상태가 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노예나 창녀로 팔릴 수 있고, 심한 매질을 당하거나 성적 학대를 당할 수 있다. 강제결혼과 강간은 크리스천이 된 여성을 이슬람으로 재개종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UN보고(2018년 5월)에 의하면, 아프간 여성 51%가 평생 신체적 성적 폭력을 경험한다. ▲아프가니스탄의 얼굴들.(사진=한국오프도어)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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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애굽기(27)나의 출애굽기(27) 드보라 65. 북송 당했던 집사님의 소식을 듣게 됨 다시 그 집사님에 대해서 듣게 된 것은 남한에 와서였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그날은 특별히 탈북자 강연이 있었다. 같은 탈북자로서 이야기가 쏙쏙 귀에 들어와 집중해서 듣고 있는데 그 탈북자가 감옥에서 만난 어떤 집사님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감옥에서 집사님을 만났는데 원래 어디 살던 사람이고 중국의 어느 동네에 있었다가 북송 당해서 자기와 같은 감옥에 갇혔다고 한참 이야기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아는 바로 그 집사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강연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그 강연하신 탈북자를 만나서 인사를 하고 혹시 그 집사님 성함이 ○○○ 아니냐고 물었다. 그분은 그 이름을 듣더니 눈이 똥그래져서 나를 보며 어떻게 그분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분께 집사님이 어떻게 되셨는지 계속 여쭈었더니 자초지종을 들려주었다. 그 집사님은 감옥 안에서도 복음을 열심히 전하다가 기독교 간첩으로 소문이 나서 결국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셨다고 했다. 너무나 안타까운 소식에 나는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강연하신 분과 나는 한동안 눈물지으며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집사님을 함께 추억했다. 비록 이 글에서도 공개적으로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봉사와 수고를 베푼 집사님이시지만 주님께서는 기억하시고 큰 상급으로 보답하시리라···. 지금도 그분의 사랑을 생각하며 혹시나 살아계실지 모르는 집사님의 안위를 위해 기도한다. 66. 중국 땅에서 백인 선교사님을 만나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나를 영적으로 인도해주셨던 집사님의 북송 소식을 듣고서 나의 마음은 크게 낙심되었다. 그렇게 별 기력 없이 해야 할 일만 하면서 지내고 있는데, 같이 성경공부 하던 한 탈북자 동생이 나에게 북한 출신 엄마를 잃어버린 고아들과 아이들을 돕는 좋은 분이 계신다면서 만나보면 격려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초청을 했는데 오시기로 했던 조선족 선생님뿐 아니라 또 다른 사람이 함께 오셨다. 머리가 노랗고 피부는 하얀데 털이 복슬복슬하고 콧대가 높은 서양 사람이었다. 전에 이런 외국인을 본 일이 없었을 뿐 아니라 북에서부터 서양 사람, 특히 미국 사람은 악한 사람, 승냥이로 배웠던 것이 생각이 나서 너무 무서웠다. 그런데 그 무서운 사람이 나를 보고는 “안녕하십니까?”라고 했다. ‘조선말을 할 줄 알다니···’ 너무 깜짝 놀란 나에게 그분은 “저 나쁜 사람 아닙니다”라고 하며 웃었다. 당황스러웠지만 조선말을 잘하는 것을 보고 나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분들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내 깜짝 놀란 모습이 아니라 식탁 위에 놓여 있었던 성경책이었다고 한다. 그분들은 그 책을 보고 내가 신앙 안에서 더 성장하도록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그분들과 교제하게 되면서 나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분들은 나에게 신앙 교육도 해 주셨을 뿐 아니라 어려운 우리 살림에 보태라고 딸 아이 생활비도 지원해주시고 쌀도 가져다주셨다.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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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 때의 내 신앙환난 때의 내 신앙(다니엘 12장 1~13절) 장 재 효 목사 서울성은장로교회 내가 들은즉 그 세마포 옷을 입고 강물 위쪽에 있는 자가 자기의 좌우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영원히 살아 계시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반드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지기까지이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 하더라(7절)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할 가증한 것을 세울 때부터 천이백구십 일을 지낼 것이요 기다려서 천삼백삼십오 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10~12절) 이 시대를 살면서 지금 코로나 유행병으로 인해 국민들이 상당히 어려움을 겪고 경제가 바닥에 허물어지면서 인간관계도 단절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가 하나님 앞에 대면예배마저 제지당하는 입장이 되어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신앙인으로서의 말이나 행동이 하나님을 실망시키고 여러 가지로 기대를 어긋나게 해드렸기 때문에 당하는 시련으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모든 교회가 각성분발하며 회개운동을 일으킬 때입니다. 민족이 회개함으로 하나님께 용서받으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오늘의 불행을 회복의 역사를 통하여 영적인 기쁨이 넘치게 하시고 경제도 다시 활성화되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원인을 돌리고 원망이나 불평을 할 것이 아니라 나부터 먼저 하나님 앞에 솔직히 자신의 신앙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애통하며 철저히 회개해서 모두가 각자의 죄를 온전히 용서받을 때 회복의 날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앞당겨지게 될 줄 믿습니다. 이 시간 바벨론 포로 시절에 많은 환난 속에서도 순교적 신앙의 정절을 지켰던 다니엘과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1) 다니엘의 신앙의 정절 오늘 본문에 다니엘이라고 하는 사람은 그 이름 자체가 ‘하나님은 나의 재판장이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그 이름의 뜻대로 하나님이 자기의 재판장이신 줄로 생각하며 아무리 어려운 환난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육신의 생명까지 하나님의 뜻에 의탁하고 믿음의 정절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당시 유대나라가 신앙이 변질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을 일으켜 유대나라를 B.C 605년에 1차 침공하게 하셨습니다. 그 때에 많은 포로를 잡아갔는데 소년이었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과 아벳느고도 함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과 친구들은 느부갓네살 왕의 수종드는 소년들로 선발되었습니다. 그래서 왕이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고 또한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넉넉히 먹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벨론제국 세력 확장을 위하여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강탈해서 빼앗아 온 불의한 것들임을 알았기에 그들은 신앙 정절을 지키기 위해 왕이 제공한 음식과 포도주를 거절합니다. 오히려 채식만 먹어도 왕의 음식을 먹은 다른 소년들과 비교해서 전혀 손색이 없도록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을 믿으며 환관장에게 열흘 동안 시험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결국 다니엘이 말한 대로 왕의 음식을 먹은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게 나타나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이들이 온전히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2) 다니엘을 높이신 하나님 5장에서 보면 벨사살 왕이 그의 귀족 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고 술을 마시며 신들을 찬양하고 있을 때에 연회장 벽에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자를 쓰는 것을 보고 박사들을 불러서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글자를 읽지 못하며 해석도 하지 못하자 벨사살 왕이 크게 번민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다니엘이 부름을 받아 왕 앞에 나와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영감적 계시로 그 글자가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글자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하나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곧 죽게 될 것이라고 하는 뜻이었습니다. 결국은 그 꿈을 해몽함으로 해서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이 셋째 치리자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다리오 왕이 즉위했을 때 다니엘은 용모가 준수하고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고관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다니엘을 시기하여 죽일 계획으로 한 금령을 세우고 다니엘을 모함하게 됩니다. 결국 다니엘은 규례를 어긴 죄로 사자 굴에 들어가 사자 밥이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을 사자들의 입을 봉해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않도록 안전하게 지켜주셨습니다. 다니엘이 사자굴 안에서도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믿음의 정절이 육신이나 주변상황이나 어떤 권력 앞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하나님 절대주의 신앙으로 믿음의 정절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신앙으로 사는 사람은 아무리 세상 시대와 형편이 바뀌어 간다 할지라도 그런 것에 굴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영적인 믿음을 알차게 가꾸어서 하나님께 인정받고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3) 다니엘이 본 환상 다니엘은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에 대해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4절)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것은 이 시대처럼 인류역사 이래로 사람들의 이동이 가장 짧은 기간에 먼 곳을 왕래하고, 또 TV나 인터넷 그 외에 여러 가지 전자기기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지식이 넘쳐나게 전달되고 있는 때일 것입니다. 그리고 다니엘이 환상을 봅니다. “나 다니엘이 본즉 다른 두 사람이 있어 하나는 강 이쪽 언덕에 섰고 하나는 강 저쪽 언덕에 섰더니 그중에 하나가 세마포 옷을 입은 자 곧 강물 위쪽에 있는 자에게 이르되 이 놀라운 일의 끝이 어느 때까지냐 하더라 내가 들은즉 그 세마포 옷을 입고 강물 위쪽에 있는 자가 자기의 좌우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영원히 살아계시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반드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지기까지이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 하더라”(5~7절). 이것은 바벨론에게 망한 유대나라가 포로 신세의 불행이 언제쯤 끝날 것이냐 하는 것에 대한 예언으로 일차적으로는 안디오쿠스 에피파네스의 박해의 때를 가리키나 종말론적으로는 말세에 있을 대 환난의 때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는 3년 반을 말합니다. 42달이고 1260일 이것은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교회를 허물어뜨리기 위하여 핍박과 온갖 악랄한 박해를 가하는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교회가 완전히 깨어지기까지 박살난다는 것입니다. 안디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유대인들을 악랄하게 박해를 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예루살렘을 쳐들어가 성전과 성벽도 불태웠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 안에 하나님을 경배할 때 쓰인 모든 기물들을 바벨론으로 다 빼앗아 간 적그리스도의 모형을 한 자였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세상 권력을 가진 정치인들과 또 그 권력의 시녀가 되어서 상대국 신앙과 종교를 말살시키려고 하는 사탄의 세력들이 동시에 역사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니엘이 듣고도 깨닫지 못하여 “내 주여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나이까?(8절) 하고 질문을 했을 때 예수님이 ”다니엘아 갈지어다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라“(9절)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그 당시도 일차 실행되겠지만 이중적 예언이고 또 종말론이기 때문에 이 세상 역사가 끝날 때도 똑같이 되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한다는 것입니다(10절). 악한 자는 자기 죄악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멸망을 재촉하며 하나님 앞에 무서운 형벌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회개하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하늘나라 갈수 있는 믿음을 가꾸기 위하여 자신을 더 정결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권면의 말씀) 본문에서 다니엘이 본 환상 가운데 ‘적그리스도의 세력들이 권력을 잡고 세상을 지배하여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게 한다’(11절)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환난과 핍박의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신앙이 환난 때에 어떤 믿음을 보여주겠는가를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는 믿음들이 되시고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믿음의 정절을 지켜 나갑시다. 이 모든 환난의 때를 타개하고 극복하면서 끝내 승리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 실현될 때에 영생의 상급을 보장받게 될 것입니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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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나의 어머니, 김해선 권사님!나의 어머니, 김해선 권사님! 최 점 식 목사 길부교회 나의 어머니의 일생(1933년 9월 9일~) 어머니는 경북 군위군 의흥면에서 무남독녀로 어렵게 살아온 전형적인 가난한 농민의 딸이었다.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홀로 계시는 아버지 밑에서 살아오셨다. 그러면서도 바느질을 배워, 동네 어르신들의 옷과 버선도 만들어 드리며 살아오셨다. 손재주가 남달라 동네 어른들로부터 사랑과 칭찬을 많이 받으셨고, 아버지를 정성으로 섬기며 집안일도 어머니를 대신하여 잘 해내셨다. 그러던 어느 날 군위 우보 5일장에 다녀오신 외할아버지께서 당시 15세인 어머니에게 시집이라도 가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그렇게 자신보다 아홉 살이 많은 내 아버지를 만나 16세의 어린 나이에 5남매 중 장남과 결혼하여 시부모님과 함께 경북 군위군 우보면 이화동 1189번지에 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행복한 신혼의 꿈을 뒤로한 채 아버지는 군 입대를 하셨다. 남편도 없는 시집살이는 쉽지 않았고, 가정 형편 또한 넉넉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조금의 불평도 하지 않으셨고, 부모님께는 효도하고 형제들과는 우애를 다지며 힘든 환경 속에서 살아오셨다. 그러던 중에 농촌에서의 삶이 어려워지자 대구 산격동으로 이사를 하셨다. 생각해보니, 도시로 이사를 나온 것은 어머니의 커다란 용기였다. 지금도 종종 이러한 결단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도시의 생활이 시작됐으나, 별 직업이 없었던 아버지께서는 시장에서 리어카로 채소장사를 하면서 가정의 생계를 꾸려나가셨다. 동시에 어머니께서는 우리 4형제를 공부시키시기 위해 40대 초반의 나이에 식당에서 일을 하셨다. 그리고 어릴 때 배워둔 삯바느질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셨다. 어린 내가 봐도 두 분은 참으로 열심히 사셨고,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두 분의 모습이 지금 우리 형제들의 성실과 부지런함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믿음의 가문을 일구어내신 어머니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세 들어 살던 곳의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교회를 다니면서 나 혼자만 예수님 믿지 말고 어머니도 함께 믿게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어머니를 설득했고 하나님의 은혜로 어머니도 40대에 처음 교회에 나가시게 되었다. 어머니는 평소 몸이 좋지 않으셨는데, 교회를 다니신 후로 건강을 회복하며 하나님의 큰 은혜를 체험하셨다. 하지만 제사 문제 등을 이유로 주위 친척들의 심한 반대가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믿음이 성장하면서 제사를 없애고 추도 예배를 드릴 것을 제안하셨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족들이 예수를 믿게 해야 했다. 어머니는 기도하면서 최선을 다해 가족들을 전도하셨고,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우리 4형제도 교회에 출석하게 됐다. 그 후 우리는 형편이 나아지면서 새로운 집으로 이사도 하게 되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우리 형제들은 모두 중·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으나, 시장에서 채소를 운반하시던 아버지께서 갑자기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셨다. 하루아침에 우리 집은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나 아파 목이 메어 온다. 아버지 없이 우리끼리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하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이 점점 더 커졌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식당 일 등 돈이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밤낮으로 일하셨다. 어머니의 희생으로 우리 형제들은 굶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었다. 온 가족이 힘든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았으니,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장남인 나는 집안을 위해 사업을 시작했고 사업체를 운영하게 됐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업의 길이 아닌 목회자의 길로 인도하셨고, 신학의 길을 걸어가고자 마음먹었을 때도 어머니는 반대하지 않으셨다. 지금은 우리 4형제 중 2명이 목사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지난날 불신자의 가정에서 목회자가 배출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비록 농촌목회와 자비량 선교사의 길을 걷고 있으나 최선을 다해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어머니의 희생으로 무사히 고등학교를 입학하게 된 것이다. 입학 당시, 입학등록금이 없어 어머니는 끼고 계시던 금반지 세 돈을 팔아 입학등록금을 마련해주셨다. 또 2012년 어머니의 팔순 때, 어머니께서는 동생들은 모두 좋은 차가 있는데 장남인 내가 목사이면서도 소형 자동차를 가지고 있다며, 그랜저 3.0을 구입해 주셨다. 섬유공장에 다니시면서 모아두신 돈으로 새 차를 사주신 것이다. 나의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는 사실을 70대를 바라보며 다시금 느끼고 있다. 현재 어머니는 경산에 거주하시는데 지금도 아들이 오면 커피를 손수 끓여주시며, “부모는 한 번 죽으면 다시 볼 수 없는데, 내가 살아있으니 커피라도 끓여준다”라고 말씀하신다. 아들로서 어머니에게 해드린 것이 한 가지 있다면 6년 전에 아내와 함께 의논해서 지금의 아파트로 모신 것이다. 다만, 더 해드리지 못해 항상 죄송한 마음이다. 부모 없는 자식이 어디 있겠는가? 자녀들에게 모범이 되신 어머니 어머니는 지난 1988년 88세로 세상을 떠나신 할머니를 수십 년간 모신 결과로, 1997년 5월 8일 어버이날에 대구광역시장으로부터 ‘장한 어버이상’을 수상하셨다. 이는 우리 가문의 영광이었다. 또 2020년 9월에는 아버님이 6·25 참전 국가유공자란 사실을 인정받게 되어 너무나 감격해하시기도 하셨다. 어머니는 지금은 89세로 연로하시지만, 40여 년간 출석하신 교회의 권사로서 주일예배, 삼일기도회, 금요구역예배 등 경산에서 대구까지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다니시는 모습에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언젠가 교회 화장실을 청소하시다가 락스가 눈에 들어가서 고생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교회 관리집사님도 있었지만 더러운 화장실을 그냥 볼 수 없어서 청소하셨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그런 분이시다. 어머니는 지금도 교회 어르신들에게 옷을 만들어 드리고, 봉사하시며, 길흉사에 빠짐없이 참석하신다. 국가에서 받는 노령연금과 자녀가 드리는 용돈으로 십일조, 감사헌금, 선교헌금을 내시며 교회 권사로 그 의무를 다하시니 아들로서 부끄러운 것밖에 없다. 아무쪼록 남은 삶 건강한 몸으로 계시다가 언젠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조용히 천국 가실 수 있도록 기도한다. 60대 중반에 있는 큰아들을 마치 어린아이로 생각하시는 것을 보면 부모의 마음이 어떠한지 가히 짐작해 본다. 나의 어머니 살아계실 동안에 건강하세요. 존경합니다. ▲2021년 2월 설날에 어머니(뒷줄 왼쪽 세 번째)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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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애굽기(26)나의 출애굽기(26) 드보라 63. 도시로 나와서 다시 새 삶을 시작함 집에서 나와 집사님 집에 일주일 정도 살았다. 그런데 집사님은 항상 바빴다. 모임도 많고 일도 많았다. 나는 주인 없는 집에 그냥 있기도 미안하고 해서 며칠 머물다가 근처에 아는 동생네 집으로 옮겼다. 다시 인근 도시에 나와서 식당 일자리 구해서 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름 열심히 성경도 읽고 필사도 하고 했지만 진정한 신앙과 믿음을 가지지는 못했던 부끄러운 모습이다. 나 같은 사람을 보살피고 복음으로 양육하려고 애쓰셨던 집사님과 선생님은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그분들의 귀한 희생과 보살핌을 생각하니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동생네 집에서도 한정 없이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다시 집에 돌아가면 계속 분란과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래된 저렴한 집을 세로 빌리고 시작했다. 일해서 번 돈은 그래도 딸아이를 남편이 돌보고 있었기에 집에 생활비도 보내고, 북송 되었을 때 단련대에서 나를 꺼내준 남동생에게도 보냈다. 한참을 그렇게 지내던 중에 중국으로 나온 막내동생을 만나게 되었고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첫째 동생이 감옥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막내동생은 중국으로 나올 때는 한쪽 손이 굽은 장애를 가진 상태였고 형의 죽음에 대한 상처로 분노와 악에 받쳐 있었다. 그렇지만 조선족 선생님의 도움으로 처소에서 생활하면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치유의 기적을 경험하고 다시 북으로 돌아갔다. 이 내용은 지난번에서 이미 언급한 내용이다. 64. 남편이 한국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게 됨 집을 떠나 열심히 돈을 벌며 생활하던 중에 남편이 한국에 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 번호로 전화가 왔는데 남편이 한국에서 건 전화였던 것이다. 남편은 취업 비자로 남한에서 일을 하고 돈을 벌겠다고 했다. 애는 아는 사람한테 돈을 주고 맡겨놓고 갔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 맡긴 집을 찾아서 딸아이를 데리고 새롭게 집을 잡아서 살았다. 이제는 남편이 생활비를 보내주었다. 꼴 보기 싫은 남편이었지만 그래도 뭔가 가정을 위해서 애쓴다는 생각이 들어서 전보다는 잘 연락하고 지내보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분주하게 이곳저곳 이동해가며 지낸 것이 시간이 꽤 흘렀다. 생계를 꾸리기 바쁘다 보니 고마운 집사님과도 제대로 연락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집사님의 남편분을 길에서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했는데 인사를 받아주시는 얼굴이 매우 어두웠다. 무슨 일이 있는가 싶으면서도 집사님 잘 계시냐고 안부를 물었는데 남편분이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다그치니 나지막하게 아내가 북송 당했다고 했다. 천지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 같은 망나니 같은 년에게도 사랑을 베풀고 귀하게 보살펴주시던 집사님이었는데 북송을 당하다니…. 그날 집에 돌아오는 나의 발길은 천근같이 무거웠다. 그 이후로 집사님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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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7‧끝)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7‧끝)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정숙 전도사(金貞淑, 1880~1969) 목차 서론 1. 김정숙, 출생과 결혼 2. 최초의 순교를 목도한 시댁 3. 여성복음전도의 선구자 .............................................. 7. 안동교회 최초의 전도사 8. 경안노회 여전도회 연합회 리더 9. 일제에 저항한 애국운동가 10. 평신도 사역자 결론 10. 김정숙, 평신도 사역자 1934년 12월 17일 오후 4시 경안노회 주관으로 한국선교 50주년 희년기념식 및 기념축하예배가 안동교회에서 거행되었다. 크고 작은 축하기를 들은 안동교회, 안기교회, 신세교회 교인과 주일학교 학생들 약 1,000여 명은 찬송을 부르며 시가지를 행진하며 전도지를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4시 30분 다시 안동교회로 모여 경안노회 만세를 삼창하고 기념식을 마쳤다. 이날 오후 7시에 시작된 희년 축하예배 시 안동교회 악대의 주악과 찬양이 있었고, 권찬영 선교사의 설교 후 표창식이 있었다. 이날 20년 이상 경안노회 경내의 교회에서 시무한 교역자 12인 중 여성으로서는 김정숙 전도사가 유일했다. 참고로 12인으로는 김영옥, 권찬영, 김인옥, 강석진, 장사성, 김우일, 권수백, 김종수, 강우근, 권중한, 김익현, 김정숙 등이었다. 김정숙 전도사는 1934년에 이미 20년 이상 교역자로 봉사한 것으로 인정받은 것으로 보아 적어도 1914년 이전부터 노회가 인정하는 여성 교역자였음에 틀림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김정숙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가 세례받은 후 1년이 지난 1912년부터 생활의 근거지를 풍기에서 안동으로 옮겨 본격적으로 선교사들의 복음 사역을 도왔다고 증언한다. 그는 회심 이후 전도부인으로 투신하여 헌신한 여성 사역자였다. 또한 평양여자성경학원을 졸업한 이후에는 교회와 노회를 위해 충성을 다했다. 이처럼 그는 경안노회 여성 지도자 중에서도 가장 앞선 선각자(先覺者) 중의 한 사람이었다. 교역자로 봉사하던 김정숙 전도사는 1937년, 15년 동안 섬겼던 안동교회에서 사임함으로써 전도사직에서 은퇴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58세로 아직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도사직에서 은퇴한 것이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등을 강요한 일제는 황국 신민서사의 암송도 강요했다. 특히 1937년 10월, 총독부 학무국에서 교학쇄신(敎學刷新)·국민정신 함양을 목적으로 보급했다. 학교·관공서·은행·회사·공장·상점 등 모든 직장의 조회와 각종 집회 의식에서 황국 신민서사는 낭송이 강요되었다. 다시 말해 이때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치가 극성기에 달했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를 섬기는 교역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김정숙 전도사는 안동 3·1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민족 운동자였다. 이러한 김정숙 전도사의 이력은 일제의 눈에 가시와 같았을 것이며, 일제는 총력을 다해 황국신민화 정책에 걸림돌이 되는 교화와 애국자들을 탄압하고 제거했을 것이다. 임학수 목사도 일제 말엽의 기독교 박해(迫害)로 사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는 교회에 김정숙 전도사의 거취에 무언 혹은 유언의 압박을 가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마 김정숙 전도사는 자신이 교회에 부담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따라서 김정숙 전도사는 스스로 사임의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정숙은 은퇴 후 교역자 신분으로서가 아니라 평신도로 안동교회를 섬겼다. 이와 같은 사실은 앞서 언급한 김정숙의 사임 이유를 지지하게 한다. 더 이상 교회에 부담을 주지 않는 평신도 신분으로 김정숙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거룩한 일이라면 하나님과 교회의 부름 앞에 철저히 순종하며 마음과 정성을 다해 동참했던 것이다. 김정숙은 안동교회의 집사와 권찰로 봉사하다가 69세인 1948년에는 권사로 피선되었고, 1949년부터 1955년까지 여장년부 부장으로 충성을 다했다. 그는 안동교회 전도사직을 내려놓고도 평신도로 돌아가 교회를 섬기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정숙은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은 어떤 직책이든지 최선을 다해 감당한 신실한 하나님의 일꾼이었다. 그래서 1963년 1월 20일에 열린 당회는 20년 이상 안동교회를 위해 봉직한 것을 기념하는 예식을 갖기로 결의했는데, 대상자는 김광현 담임목사, 김재성·조흥노·이홍구 장로, 그리고 김정숙 전도사 등이다. 안동교회는 김정숙의 전도사 사역과 평신도 사역을 남녀 차별 없이 존중했던 것이다. 11. 결론 김정숙은 보신(保身)의 길을 갈 수 있었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일평생 험지(險地)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한 믿음의 선배다. 32세가 되던 1911년, 그는 안동선교부 선임 오월번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이후 안동지역의 노회와 교회를 섬기다가 1969년 90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안동지역 여성 사역의 개척자였다. 또한 그는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가 설립될 때 산파(産婆)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초기 경북 북부지역의 여성 복음화에 초석을 놓은 여성 지도자였다. 특히 김정숙은 1919년 3월 18일에 거행된 안동의 3·1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행동하는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이었으며, 일제 말엽에는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신사 참배를 거절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애국자였다. 그의 강직한 성품과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앙, 그리고 성령 충만한 전도사역은 교회와 노회의 후배들에게 사표(師表)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김정숙은 그의 후손이 6대 신앙을 지켜 올 수 있도록 초석을 놓은 신앙의 지주(支柱)요 믿음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조사와 전도사, 전도사직을 은퇴한 후에도 평신도로서 무려 15년 동안 안동교회의 권찰로, 서리집사로, 여장년부 부장교사로, 또한 주일학교에서 어린이 사역에도 헌신함으로써 자신에게 맡겨진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한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종이요 일꾼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난 이후부터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순간까지 오직 하나님과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 살다 간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김정숙의 일생을 회고하면 할수록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한 사도 바울의 육성이 들리는 듯하다.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 10주년 사진. 김정숙 전도사는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가 설립될 때 산파(産婆)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초기 경북 북부지역의 여성 복음화에 초석을 놓은 여성 지도자였다. 연합회의 초대 회장으로 수고한 김정숙 전도사는 두 번째 줄 정중앙에 앉아 있다. 맨 아래 줄 왼쪽에서 네 번째는 역시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의 산 증인인 김점향 권사를 볼 수 있다.(사진8)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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