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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 소그룹 모임··· 내적치유에 도움 된다요즘 사회에서나 교회에서나 키워드 중의 하나가 있다면 ‘내적치유’일 것이다. 현대사회의 발전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우리에게 안겨주었지만, 인간의 정신은 점점 피폐해져서 연일 비인간적 범죄들이 넘쳐나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삶의 대부분 문제는 마음의 병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내적치유’는 마음(영혼)의 상태가 건강하게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치유가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의 자존감은 무너지며, 관계가 깨어지어 성령의 활동도 제한을 받는다. 따라서 ‘내적치유’가 목회의 중요한 영역으로 여겨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면 내적치유에 도움이 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성도들의 경우, 강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깊은 기도를 통해, 또는 특별한 집회를 통해 치유의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교회 내에서의 정기적인 소그룹 모임(구역회, 속회, 목장, 선교회 등)을 통해 회복하기도 한다. 특히, 소그룹 모임은 성도들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신앙 고민이나 가정의 문제들을 털어놓을 수 있다는 점에서 도움이 된다. 소그룹 모임은 ‘소속감’과 ‘안정감’을 제공하고,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버팀목이 되어준다. 소그룹 모임은 성도들뿐 아니라 목회자나, 목회자 사모에게도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의 환경을 통해서,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서 문제가 해결되도록 이끄시기 때문이다. 친밀함을 전제로 한 ‘관계’는 서로 더 존중하고, 배려하고, 이해하는 힘을 기르게 한다. 아울러 목회자에게는 사역을 하는데 도움이 되는 좋은 동역자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며, 사모들에게도 대화의 공간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활력소가 될 것이다. 내적치유는 우리가 마음을 열고 대화의 공간만 찾으면 얼마든지 가까운 곳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정기적인 소그룹 모임은 건강한 신앙생활에 도움이 된다. 언제든지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신뢰할 만한 모임이라면 더 좋다. 지나치게 교제에 의존해서는 안 되겠지만, 적절한 모임은 성도들의 감정선을 건강하게 유지시켜 줄 것이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는 말씀에서 내적치유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자.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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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하는 즐거움! '한의약 자가건강 관리교실’ 운영김천시는 현대사회에 만연한 스트레스와 근골격계 질환 예방을 위하여 ‘생활습관 개선’이라는 목표로 큰 호응을 얻으며 『한의약 자가건강 관리교실』 1․2기를 운영하고 있다. 지난 6월 19일 처음 개강한 한의약 자가건강 관리교실은 건강모임을 조성하여 한의약 사상체질분류 설문검사를 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대상자들의 체질에 대해 인지하고 개개인의 체질에 맞는 한의약적 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또 매주 대상자 간 건강생활실천 내용을 토론하고 우울 및 스트레스 질환 예방을 위한 한방적 치료 및 혈자리 지압법 교육, 마음챙김명상 안내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될 예정이다. 자가건강교실에 참석한 대상자들은 “보건소에서 이런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며 “앞으로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참여하는 사람들과 함께 생활습관 개선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7주간 진행되는 한의약 자가건강 관리교실 대상자들은 프로그램이 종료 이후 개인별 증상에 따라 필요시 소내 진행 중인 기타 프로그램 연계 등을 통해 지속적인 건강생활을 실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코자 한다. 손태옥 보건소장은 “한의약 자가건강 관리교실을 첫 시작으로 앞으로 지역주민 스스로가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프로그램을 구성할 예정이다. 이러한 프로그램의 정착이 지역사회의 건강생활 실천에 밑거름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기타 문의사항은 중앙보건지소 지역 보건담당 ☎421-2787로 하면 된다. 이예진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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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생명 산업과 학생 진로지도 Win-Win 현장영주시, 농촌체험교육농장협의회와 학교 진로지도상담교사 간담회 영주시농업기술센터(소장 김교영)는 농가가 운영하는 농생명 산업 농촌체험관광 활성화를 위해 지난 20일 농촌체험교육농장인 발효체험학교 띄움에서 '농촌체험교육농장과 학교 진로지도 상담교사와의 소통 간담회'를 했다. 이날 간담회는 농촌체험관광교육농장협의회(회장 이연희) 22명과 진로지도상담교사모임(회장 유명식) 18명이 한자리에서 관내 학교 학생의 진로체험처 발굴과 체험프로그램 이해 등 학생 진로지도를 위해 WIN-WIN 해 나가는 의미 있는 자리였다. 간담회는 체험농장을 운영하는 농가 대표의 각자 농장 소개와 상품 전시 등 진로체험 프로그램을 홍보하고 교사들은 학생에 맞춤형 프로그램을 찾고 학생들의 미래 진로에 필요한 활동에 대해 질의 응답하는 방법으로 진행했다. 영주시 관계자는 “각 체험농장 간 협약을 통해 진로체험을 다양화하고 진로상담교사와의 교류를 통해 지속적인 발전과 활동영역을 확대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영주시는 농촌체험교육농장협의회는 농업과 체험, 가공 등 6차 산업에 종사하는 농가 40여 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이예진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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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 교회 분쟁에 동원된 폭력, 정당화될 수 없다!지난 5월 1일 서울의 대형교회인 A 교회에서는 같은 교회 성도 70여 명이 집단으로 얽혀 패싸움을 벌이는 가공한 만한 사건이 발생했다. 담임목사 측 한 교인이 원로목사 측에서 소집한 당회를 저지하기 위해 창문을 부수고 회의실 안에 소화기를 분사했다. 이어 원로목사 측 교인 20여 명과 담임목사 측 교인 50여 명이 3시간가량 거친 몸싸움을 벌여 부상자도 발생했다. 담임목사 측은 예전에도 2층 본당을 점거하기 위해 용역을 동원한 적이 있다고 한다. 현재 양측은 한 건물에서 1층은 원로목사 측이, 2층부터 8층까지는 담임목사 측이 점거하고 따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담임목사 측이 이렇게 폭력을 휘두르면서까지 당회를 방해한 것은 최근 법원으로부터 선임된 대리당회장 B 변호사가 당회를 소집했기 때문이다. 법원은 지난 4월 11일 교회가 양측으로 분열돼 자율적으로 대표자 결원을 해결하지 못해 혼란이 지속된다고 보고 B 씨를 임시대표자(대리당회장)로 선임했다. 그러나 B 씨는 설교나 성례 집행 등 종교적 행위를 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법적·행정적 교회 대표자로서 당회를 인도하고 그에 부합하는 안건만 의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도 담임목사 측은 결코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 법원의 이러한 결정에 대해 교계 내에서는 ‘교회의 영역과 자율권을 훼손했으며, 명백한 교권침해’라는 목소리가 높다. 예장통합 총회도 “일반 변호사가 직무대행자가 되어 시무장로들을 소집한 것은 당회로 볼 수 없으며, 그 모임의 결의사항은 무효”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사태의 근본 원인이 무엇일까를 짚어봐야 한다. 사실 현재 한국교회의 현실은 교회나 노회, 총회가 정해진 교회법이나 교단법을 정의롭게 적용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따라서 갈수록 교회 문제들이 사회법으로 달려가고 있다. 우리는 이번 법원의 결정을 ‘교권침해’라고 성토하기 전에 이러한 결과를 자초한 한국교회의 현실을 개탄해야 할 것이다. A 교회의 분쟁은 3년째 계속되고 있다. 물론 양측은 내세울 만한 충분한 사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재신임 거부에 관한 문제일 수도, 재정 비리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에 A 교회와 같은 분쟁으로 몸살을 겪은 교회는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나올 수 있다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이다. 결국, A 교회의 양태는 한국교회가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그리고 그 어떤 이유로도 교회 내에서의 폭력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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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대구경북기독교사적협의회 개최예장(통합) 총회 대구경북기독교사적협의회(회장 손산문 목사) 제2회 정기 모임이 지난 6일 대구제일교회 역사관에서 열렸다. 참석한 회원은 자천교회(사적 제2호) 손산문 목사 이상록 장로, 척곡교회(사적 제3호) 박영순 전도사를 비롯하여 9개 교회 12명이 참석했다. 이번 모임에서는 대구제일교회 역사관과 YMCA역사관 관람, 선교사들의 활동 영상 시청, 사적 지정식 보고, 각 교회와 사적지를 소개하는 팜플렛 및 소책자 제작 관련 협조 요청 등을 협의했다. 한편, 본 협의회는 대구 경북 지역에 있는 기독교 사적지를 네트워크하여 보다 체계적인 관리를 하고자 지난해 10월 창립되었다. ▲제2회 대구경북기독교사적협의회 회의에 참석한 후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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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Easter~!! “예수 부활하셨네!”예천군기독신우회(회장 박성윤 장로, 용문금곡교회)는 부활절을 앞둔 지난 20일(토) ‘부활절 계란 나눔 거리전도’ 행사를 실시했다. 이 행사는 예천군기독신우회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매년 실시하는 행사로, 회원들은 정성스럽게 준비한 계란을 시민들에게 나누어주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했다. 예천군기독신우회는 초교파 모임으로 현재 35명의 회원들이 모여 기도회와 신앙의 나눔 등을 이어가고 있다. ▲부활절 계란을 시민들에게 나누어주는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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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동안 한 교회를 섬긴 여성지도자 김점향 권사(2)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점향 권사(1907~1998) 4. 여자성경학교에서 공부한 교회의 재원(才媛) 1908년 안동선교부가 세워진 후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성경공부 열풍이 불었다. 안동선교 초기인 1910년 선교사들의 보고에 의하면 영주 내매에서 개설되었던 6일간의 성경공부 모임에 무려 270여 명의 남자들이 참여했다. 또한 이듬해인 1911년에는 더욱 빈번한 성경공부 모임이 있어, 8차례에 걸쳐 1,340명이 성경공부 모임에 참여했다. 이것을 본 선교사들은 앞으로 지역교회를 지도해 갈 지도자를 양육할 목적으로 1912년 여자성경학원을 세웠다. 여자성경학원은 선교사 사택을 이용했다. 여성성경공부반은 일주일에 두 번씩 오월번 선교사 사택에서 모여 새디 선교사가 월요일에는 젊은여성반, 목요일에는 중년여성반을 인도하였다. 특히 1914년 안동선교부에 부임한 인노절 선교사는 보다 체계적이고 확대된 성경학교 운영을 위해 1920년 4월 여자성경학교를 남녀성경학교로 확대개편 하였다. 이때 인노절 선교사는 성경학교의 교장, 권찬영 선교사와 안대선 선교사는 교사였다. 개교 첫해인 1920년 가을, 비록 독립된 학교 건물은 없었지만, 무려 130명이 등록했으며 성소병원 진료실에서 수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성경 외에 위생, 산수, 한문, 음악, 개인전도법도 가르쳤다. ▲1920년 4월 10일 개원한 안동남녀성경학교 학생 중 1926년 촬영한 여자성경반 학생들 사진.(오른쪽 남성은 당시 안동교회 4대 담임인 박상동 목사) 배경 건물은 1925년 준공한 인노절기념성경학교로 후에 경안신학원으로 개칭하여 수많은 교역자와 장로, 권사 등 평신도를 배출했다. 김점향은 1920년 중반 여자성경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수학했다. 아마 성경학교의 졸업은 그로 하여금 보다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했을 것이다. 그는 20대 초반 이미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 젊은 여성의 중심인물이었다. 그 결과 1932년부터 1956년까지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의 서기였다. 무려 24년 동안 서기로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가 여자성경학교에서 체계적으로 성경과 기초적인 신학, 그리고 교회 등에 관해 공부했기 때문일 것이다. 5. 성전건축을 위해 쌀 한가마를 헌금한 가정 지금도 예배를 드리고 있는 안동교회 예배당을 돌집 예배당이라고 부른다. 이유는 화강암을 쌓아 건축되었기 때문이다. 안동교회 예배당은 1936년 봄에 기공하여 1937년 4월 6일에 기초면적 160평의 2층 건물이 준공되었다. 예배당 건축계획은 안동교회 4대 담임인 박상동 목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기성회를 조직하고 1926년 9월 19일 첫 번째 회의를 했다. 하지만 박 목사는 교회를 사임하고 새로운 임지인 일본 오사카로 떠나게 됐다. 따라서 돌집 예배당은 후임인 5대 임학수 목사로부터 본격화되었다. 또한, 경안노회는 1933년 2월 경안노회의 중심교회인 안동교회 본당 신축에 모든 교회가 힘써 헌금할 것을 결정함으로써 돌집 예배당 신축은 안동교회 성도 뿐 아니라 노회 경내 교회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졌다. 안동교회 석조 예배당의 설계는 권찬영 선교사의 의뢰를 받아 당시 일본에 와 있던 미국인 선교사인 보리스였고, 시공은 당시 최고의 건축회사인 서울 복음건축장을 운영하고 있던 중국인 왕공온(王公溫)이었다. 임학수 목사는 예배당 신축을 위해 선교사들을 꾸준히 설득했으며, 노회 경내의 여러 교회를 순방하면서 경안노회 중심인 안동교회 예배당 신축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건축모금도 계속했다. 또한, 예배당 건축에는 어린이·어른·남녀 구분 없이 온 성도들이 마음과 뜻을 다했다. ▲역사적인 안동교회 2층 석조예배당은 교인과 지역교회, 안동주재 선교사, 타지역선교부, 안동성소병원 의사들, 뜻있는 사람들의 합력으로 완성되었으며, 오늘까지 경북북부지역 교회 부흥의 센터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하고 있다. 이때 김점향의 가족도 동참했다. 당시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온 성도들이 힘을 모을 때 김점향의 남편인 강신효는 적극적으로 참여 의사를 밝혔다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굶더라도 교회 짓는 데 최선을 다해 헌금해야 한다.” 김점향 가정은 당시에 큰 금액인 쌀 한 가마를 건축헌금으로 했다고 한다. 또한 십 년 전 90을 넘긴 한 장로님은 예배당이 건축될 때 자신이 어렸지만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예배당 건축에 사용된 돌 2개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말씀하신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안동교회 온 성도들은 교회를 건축하는 데 한마음이 되어 낙동강에서 모래를 파오는 사람도 있었고, 돌을 지고 옮기는 사람도 있었다. 6. 안동교회 첫 권사 3인 중 한 명 1746년 존 웨슬리는 ‘권고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 권사(勸師)라는 직분을 만들었다. 권사는 목회자를 돕기 위하여 전도와 봉사, 심방, 그리고 권면 등을 위하여 선출되었다. 이 권사 직분은 미국 감리교회를 통해서 한국의 감리교회, 그리고 장로교회에서 사용되었다. 한국에서는 1955년 제40회 예수교장로교총회에서 봉사를 잘 감당하는 여성의 직분으로 권사를 주기 시작했다. ▲1985년에 있었던 기관별 경창대회에 참석한 여전도회 회원의 모습.(오른쪽 끝이 김점향 권사, 오른쪽에서 4번째가 송점출 권사) 1968년 첫 권사로 임직한 3명의 권사 중 김일애 권사는 1972년에 별세하여 이 사진에서 그 얼굴을 볼 수 없다. 비록 1955년 장로교단에서 권사가 시작되었지만, 안동교회의 첫 권사는 13년이 지난 후 1968년 8월 3일에 배출되었다. 이때 취임한 권사는 3명이었으며, 송점출, 김일애, 김점향 권사이다. 이들은 이미 안동교회와 경안노회를 위해 충성을 다해 헌신해온 전설적인 여성들이었다. 이들의 권사 취임으로 안동교회는 항존직에도 여성이 포함되는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었다. 첫 권사로 취임한 3명의 권사 중에서 김일애 권사는 1972년 1월 16일 별세함으로, 송점출 권사는 1975년 3월 30일 정년으로 은퇴했다. 그리고 김점향 권사는 1978년 정년으로 은퇴했다. 1969년 11월 20일 경안노회 선교 60주년 기념식이 안동교회에서 있었다. 이때 경안노회 경내에 14명의 60년 이상 계속 믿음을 지킨 성도가 있었는데, 이 중에 김점향 권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안동교회에서 첫 권사가 취임 이후 두 번째 권사 취임은 1년 반이 지난 1971년 역시 3명의 권사가 취임했을 정도로 권사 취임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다. 설립된 지 70년이 되는 1970년대까지 안동교회에서 취임한 권사의 총수가 11명밖에 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김점향의 초대 권사 취임은 그만큼 상징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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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틋함, 섬김, 그리고 하나님의 때천석길 목사 구미남교회 목사의 큰 기쁨은 새 가족을 만나는 것이요 더 큰 기쁨은 예수 영접 모임에 들어와서 예수님을 영접하겠다는 결신을 보여 줄 때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생김새가 각기 다르듯이 교회에 나오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제각각 다른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쉽고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믿지만, 또 어떤 사람은 오래 걸리고 힘이 들기도 합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기까지는 누군가가 그를 위한 애틋한 마음으로 다가서는 섬김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의 가족이거나, 친구이거나, 옆집에 사는 이웃일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충분히 전달되어야만 합니다. 문제는 한두 번으로 되지 않고 여러 번 만나서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고 순수하게 자기를 사랑한다는 마음이 느껴지고 감동을 받아야만 목장과 교회에 나오는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이 구원받기까지는, 첫째로 우리의 섬김으로 흡족하게 채워진 이후에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을 구원하려면 섬김의 밑거름이 깔려 있어야 합니다. 섬김이 그의 마음에 감동으로 남든, 아니면 미안함으로 남든 섬김으로 충분히 차오른 그 때에 그가 목장을 만나면 마음을 여는 계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섬김이 지치지 않는 끈질김으로 이어지는 사랑은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그가 ‘한번 믿어 볼까?’ 하고 마음을 여는 때입니다. 결국, 마음은 본인이 열어야 합니다. 내 의지가 없이는 누구도 내 마음을 강제로 열지는 못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일이지만 아무리 싫던 일도, 그래서 내가 결코 하지 않을 것 같던 일도, 어떤 기회에 ‘해볼까?’ 하는 간단한 마음을 먹은 후에는 왜 그렇게 안 하려고 했을까 싶은 일들이 많습니다. 이처럼 신앙생활도 ‘믿어볼까?’ 하는 마음이 모든 것을 다르게 만듭니다. 세 번째는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나님의 때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이끌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의 때가 차야 합니다. 이 세 가지의 때, 즉 섬김이 채워지고, 그의 마음이 열리고,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에 그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 자는 반드시 거두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마음에 담고 멈추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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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동안 한 교회를 섬긴 여성지도자 김점향 권사(1)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점향 권사 (1907~1998) 안동교회 첫 예배는 4명씩 동수(同數)의 남·여가 함께 예배를 드렸다. 외할머니 등에 업혀 예배를 드린 아기를 포함하면 4명의 남성, 5명의 여성이 된다. 안동교회는 시작부터 균형 잡힌 성 비율로 하나님을 예배했던 것이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남성중심의 교회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래도 교회 안에서 여성의 발언권도 무시할 수 없었다. 초기부터 뛰어난 여성 일꾼들이 안동교회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교사와 남성 교인들을 도와 새롭게 출범한 안동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본 글은 3살 때 외할머니 등에 업혀 안동교회 첫 예배에 참석한 이래 무려 90년 동안 안동교회를 섬긴 김점향 권사님에 관한 것이다. 결혼 후 수년 동안 안동을 떠나 영주로 외도(外道)하기는 했지만 거의 100년 가까이 동안 한평생 안동교회를 섬겼으며, 안동교회 여전도회와 경안노회 여전도회의 중심인물로 여전도회를 든든히 세운 여성 지도자였다. 1. 할머니 등에 업혀 안동교회 첫 예배에 참석한 아기 1909년 8월 8일, 안동교회는 감격스러운 첫 예배를 드렸다. 안동읍 최초의 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당시 안동 최초의 근대서점인 기독서원(基督書院)에서 8명이 모여 첫 예배를 드렸고, 안동 땅에 복음이 전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첫 예배를 드린 초대교인은 김병우, 강복영, 원화순, 원홍이, 권중락, 박끝인, 정선희, 김남홍 제씨였다. 다음은 8월 8일 주일 아침의 상황에 대해 김남홍의 외손녀 김점향이 생전에 들려준 내용이다. 김남홍의 집은 현재 100주년 기념관 바로 뒤편 화성동 언덕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날 아침 평소에 들을 수 없는 북소리가 들려왔다는 것이다. 주일 아침 누군가 북을 치면서 마을을 돌며 동네 사람들을 모았던 것이다. 김남홍이 무슨 생각으로 동네 아래에 있던 기독서원에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발걸음은 그를 예수 믿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 기독서원에 간 김남홍은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여기 오면 아들을 낳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했다고 한다. 그때 거기에 있던 사람들로부터 아들을 낳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큰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후부터 빠지지 않고 예배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김남홍은 안동교회의 첫 예배에 참석한 초대교인이 되었다. 외할머니 김남홍은 1910년 8월 18일에 학습을 받고, 1911년 8월 17일에 세례를 받음으로 안동교회의 세례교인이 되었다. 특히 그는 1913년에 조직된 안동교회 여전도회의 중심회원으로 열심히 참여하였다. 또한 김남홍의 남편인 권정택은 안동교회 첫 세례자 9인 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 안동읍에는 그리스도인이 거의 없는 상태였지만,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모두 그리스도인인 가정 분위기에서 외손녀 김점향은 성장할 수 있었다. 이것은 김점향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속에서 자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을 것이고, 그는 자연스럽게 믿음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2. 믿음의 분위기에서 성장하고 결혼한 여성 김점향의 부친이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자 김점향의 외조모는 자신의 집에서 딸과 외손녀인 김점향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김점향이 3세 되던 때 외조모는 예수를 믿기 시작했고, 그 이후부터 외조모의 등에 업혀 성장한 김점향은 자연스럽게 찬송과 기도를 듣고, 선교사들과 성도들의 예배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믿음 안에서 성장한 김점향은 23세 때 영주 내매교회 출신인 강신효와 결혼하였다. 강신효의 바로 위의 형은 강신충 목사로 당시 영주에서는 믿음을 가진 유명한 집안이었다. 김점향은 결혼 후 영주로 가서 생활하다가 나중에 안동으로 다시 왔다. 강신효의 부친은 강신효에게 많은 재산을 주었다고 한다. 영주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안동으로 이사온 강신효는 정미소를 시작했는데, 안동 최초의 방앗간이었기 때문에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다. 하지만 경영을 잘하지 못하고 식구가 늘어감에 따라 가세가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으며, 6·25 전쟁으로 건물이 모두 타버려서 경제적으로 점점 힘들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서도 성숙한 믿음으로 성장한 김점향은 교회와 노회에서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하는 여성 지도자가 되었다. ▲1910년 영주 내매에서 열린 춘계 평신도 성경공부반 중 남자 성경공부반 모임.(중앙 맨 뒷줄에 권찬영 선교사.) 이 성경공부반이 모인 내매에는 이미 교회가 세워져 부흥하고 있었다. 3. 안동 3·1만세운동 당시 태극기를 흔든 어린이 안동지방의 기미년 3·1만세운동은 김재명과 강대극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들은 김영옥 목사와 이중희 장로 등 안동교회 지도자들과 의논한 결과 3·1만세운동 날짜를 3월 13일로 정했다. 그러나 거사 하루 전날 김영옥·이중희·강대극·김원진 등 주역 4인이 검거됨으로써 3·1만세운동은 좌절되는 듯 했다. 하지만 다음 장날을 거사일로 다시 정하고 세밀하게 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그리하여 3월 18일 낮 12시경, 김병우 장로와 김익현 조사의 ‘대한독립만세’ 소리를 시작으로, 안동교회 교인 30여 명은 삼산동 곡물전 앞에서 온 힘을 다해 만세를 불렀다. 이때 동문통에서 내려오고 있던 유림의 시위대와 합쳐지고, 장터에 모인 읍민들도 합세하면서 안동읍 최초의 대규모 만세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안동의 3·1만세운동에는 안동 최초의 여자 초등학교인 계명학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계명학교를 다니고 있던 김점향이 태극기를 들고 시내를 뛰어 다녔다고 김점향의 자부인 박춘희 권사는 증언했다. 어린 학생들에게는 태극기를 나누어 주지 않았지만 학생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와 읍내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일제는 그가 너무 어려서인지 체포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위가 격해지자 목성교에 시체가 하나 둘씩 늘어가기 시작했고 이것을 본 김점향의 할아버지는 더 이상 김점향이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또한 일제가 발포하기 시작했을 때 총알이 방안으로 들어온다고 하며 이불로 문을 막아놓았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였던 김점향은 자신이 외친 대한독립만세가 무슨 의미인지도 정확히 몰랐겠지만 전국에 타올랐던 3·1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안동 3·1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8일 열렸다. 안동교회 교인 30여 명은 삼산동 곡물전(현 신한은행 근처)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있는 힘을 다해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위 사진은 1925년 당시 삼산동 곡물전 근처 안동 장날의 번잡한 모습.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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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발전을 위한 유관기관 협의회’구성 및 첫 회의 개최경주시(시장 주낙영)는 유관기관 간 경주시 주요 현안사항을 협의하기 위해 ‘경주발전을 위한 유관기관 협의회’를 구성하고 19일 경주시청 대회의실에서 제1차 정기회의를 개최했다. 시는 그동안 유관기관 간 교류를 위한 기관장 모임이 있었으나 실질적인 협업 사항을 논의하는 장치가 부족한 실정이었다. 이에 최근 시민과의 대화 등에서 나타난 다양하고 복잡한 시민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기관 간 협업사항을 논의하기 위해 관내 주요 유관기관을 대상으로 협의회를 구성하고 회의를 추진하기로 했다. 협의회 참여기관은 12개 기관으로 경주시(시장 주낙영), 경북도 문화관관광공사(사장 김성조), 경주경찰서(서장 이근우), 고용복지플러스센터(소장 유인성), 경주대대(대대장 최기호), 경주소방서(서장 안태현), 국립공원공단 경주국립공원사무소(소장 김임규),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경주사무소(소장 정은모), 서라벌도시가스(대표이사 조항선), 재단법인 문화엑스포(사무처장 이두환), 한국전력공사 경주지사(지사장 정만길), 한국농어촌공사 경주지사(지사장 백승칠)가 참여했다. 주낙영 경주시장은 환영사를 통해 “경주시민들을 위해 더 살기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나아가 경주 발전을 위해 함께 협력해 나가자”며, “긴급한 민원사항에 대해 긴밀하게 대처하고 미래발전사업 발굴과 협업 사항 등 현안사항을 함께 추진해 나가자”고 유관기관장들에게 협의회 구성 취지를 밝혔다. 이번 회의에서는 경주국립공원 내 유해야생동물 포획, 교통사고 감소를 위한 교통안전시설 개선, 경찰서 이전에 따른 업무 협조, 보문관광단지 리모델링 사업, 스포츠마케팅을 통한 보문단지 관광 활성화 방안, 예비군‧현역 장병 일자리 지원을 통한 인구증가 방안이 논의됐다. 또 저수지 용수 확보 및 준설사업 추진, 가뭄 시 한국농어촌공사 관리 중인 용수 공동 사용, 전선 지중화사업 현안사항 논의, 남산 일원 묘지 이장 및 석물 정비, 2019 경주세계문화엑스포 행사 개최 등 다양한 의제가 다뤄졌고 기관별 협조사항 및 홍보사항 또한 전달됐다. 본 협의회에서는 주요 현안사항에 대해 지속적으로 대화하고 협의해 나갈 것이며, 주기적인 회의 개최와 유관기관 간 긴밀한 업무협조를 통해 경주발전과 시민복리증진을 위한 노력을 이어나갈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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