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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부르심(4)브라더 앤드류 오픈도어 설립자 쿠바의 젊은 세대가 길을 잃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쿠바교회를 도와야겠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 카스트로 의장을 만나고 싶었지만, 대신해서 문화부 장관과 마주 않자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사람이 쿠바의 기독교 박해를 주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당신이 언제 쿠바에 와서 어떤 일을 했는지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의 모든 행적과 내가 만난 사람들이 자세히 적혀 있는 경찰 보고서를 보여주었다. “오늘부터 쿠바에서 설교를 해서는 안 됩니다.” 쿠바를 다니면서 이런 경우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래서 질문을 했다. “좋습니다. 장관님, 만약 설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는 것은 괜찮을까요?” 장관은 잠시 말을 멈추고 나서 대답했다. “질문 정도라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나는 원하는 답을 얻기 위해 신중을 기하면서 “그렇다면 사람들이 저에게 던지는 질문에 답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장관은 잠시 망설이더니 “그 정도라면 역시 별 문제없을 것 같군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서 질문을 계속했다. “장관님, 러시아 교회가 진정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러시아 혁명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그는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나는 확실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지구상에 있는 많은 기독교인에게 진정한 신앙심이 없다는 사실이 어찌나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혁명은 지속적으로 확산될 것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막을 수 없지요. 우리의 목적은 하나, 세상을 차지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당신네 교회 사람들은 현실적인 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하늘만 쳐다보고 사는 것 같더군요.” “자기의 믿음대로 나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애쓰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경의를 표할 겁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그런 사람이 거의 없더군요.” 장관은 비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날 이후 나는 교인들 앞에서 말씀을 전할 때면 늘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여러분에게 몇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러분 가운데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신 분은 얼마나 됩니까?” 이런 질문들을 청중에게 던지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나서, 그들의 질문을 받았다. “자, 이제 여러분의 질문을 받겠습니다. 혹시 저에게 질문이 있으신 분은 말씀하세요.” 그러면 신자들이 손을 들고 나에게 질문을 했다. “어떻게 해야 거듭날 수 있습니까?”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참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이런 질문을 받고 나면, 나는 성경을 펼쳐 들고 신자들의 질문에 대답했다.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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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교회 증축 건물 불법 파괴 3,000명의 교인들 항의지난 5월 20일, 이집트 나일 델타 서부의 한 마을(Koum Al Farag)에서 200명의 경찰이 한 교회 건물을 파괴했다. 이에 항의하는 교인들은 폭행을 당하고 경찰에 붙잡혀갔으며, 성직자도 폭행을 당해 기절했다. 이 건물은 15년 전에 세워졌고, 교인 수는 3,000명에 달한다. 크리스천 주민들의 결혼식과 세례식, 장례식이 행해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늘어나는 필요 때문에 교회 옆에 교육관 건물을 3층으로 짓기로 하면서 무슬림들의 박해가 시작됐다. 건축을 시작하자 극단주의 무슬림들이 공격해왔고, 이미 4개의 모스크가 있는데도 분란을 일으킬 목적으로 교회 바로 옆 농지에 불법으로 모스크를 짓기 시작했다. 이 불법건축에 대해 경찰은 교회건축이 원인이라며 둘 다 철거하는 것으로 해결책을 찾고, 교회 증축은 합법적인데도 철거를 단행했다.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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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2020’ 코로나19 영향으로 전격 취소소규모 문화축제로 탈춤 아쉬움 달랠 것 안동시와 (재)안동축제관광재단은 지난 13일 (재)안동축제관광재단 이사회를 열고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관광객 안전을 위해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2020’을 전격 취소하기로 했다. 탈춤페스티벌은 올 9월 25일부터 10월 4일까지 열흘간 탈춤공원과 하회마을 일원에서 개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 확산이 지속하고, 10월까지도 수그러들 가능성이 희박해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 무엇보다 코로나19로 해외공연단 섭외가 어려워 탈춤페스티벌이 지향하는 글로벌 축제로서의 위상을 온전히 갖추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고, 무엇보다 안동을 찾을 국내·외 관광객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했다. 탈춤페스티벌 미개최로 인한 아쉬움과 허탈감을 채우고 지역 문화인들의 활동을 보장하는 방안도 마련한다. 지역 문화인들을 위해 9월 중 소규모 문화축제를 열어 시민들의 문화욕구를 채우고 코로나19로 위축된 예술인들의 활동기회도 제공할 계획이다. 한편,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은 지난 2009년에도 신종인플루엔자 전염병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취소된 적이 있다. 안동시 관계자는 “코로나19로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2020을 개최하지 못하는 아쉬움은 크지만, 내년도 축제는 더욱더 알차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해 글로벌 축제의 위상을 보여 줄 것”이라고 말했다. 안동 한상덕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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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COVID19) 봉쇄 중의 동남아 박해지역 오픈도어 사역국가들의 봉쇄와 이동제한으로 인해 오픈도어와 현지파트너들은 박해받는 성도들에게 구호품을 지원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집중하게 되었다. 많은 성도가 일을 할 수 없게 되면서 가족의 일용할 양식조차 없는 상황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크리스천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국가의 공적지원에서 차별을 당한다. 이들은 동료 크리스천들의 도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아시아지역에서 오픈도어는, 구호품 지원 및 온라인 프로그램과 함께, 사역의 첫 번째 우선순위를 ‘격려하고 용기를 주는 것’에 두고 있다. 가능한 모든 수단-인터넷, 전화, 개인방문-을 동원하여, 박해받는 형제자매들에게 이러한 위기 속에도 전 세계 교회의 한 가족이 그들 곁에 있음을 보여주기 원하고 있다. 어떤 물품들이 전달되고 있나? 인도와 네팔에서 배포한 긴급구호 물품에는, 밀가루, 쌀, 콩, 차, 식용유, 카레가루, 설탕, 소금, 성냥, 말린 고추, 간식, 비누, 마스크, 소독제가 포함된다. 가정마다 3~5주간 먹을 수 있는 분량의 식량이 전달되고 있다. 동남아시아지역 방글라데시, 말레이시아, 스리랑카, 인도네시아와 남부 필리핀에서 배포한 식량은 쌀, 밀가루, 인스턴트 국수, 달(녹두와 비슷한 작은콩), 감자, 식용유, 소금, 설탕, 간장, 차, 식품 쿠폰 등이다. 각 가정엔 2~4주간 먹을 수 있는 분량이 전달되고 있다. 긴급 구호 수혜자들의 이야기 •시골 주부 사이샤 :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우리는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요. 나는 ‘하나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홀로 버려두지 않으셨지요, 그들을 굶주리게 하지 않으시고, 먹을 것과 마실 물을 주셨지요…. 그와 같이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주시고, 우리를 구해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내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형제님(오픈도어 현지 파트너)을 통해 다 공급해 주셨어요. 후원자님들, 선교회, 이 모든 물품을 사오느라 수고하신 형제님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 이 선교회 사역을 축복하옵소서!” 오픈도어 코로나 긴급 구호 사역은? 오픈도어는 5월 초까지 현지 파트너들을 통해 아시아 박해지역에서 총 20,000명의 크리스천들을 지원하고 추가로 50,000명을 더 지원할 계획이다. 구호물품 패키지는 약 25달러 상당이고 이는 5명 한 가족의 1개월 생존을 도울 수 있다. 코로나 후원계좌 : SC제일은행 221-10-011008(한국오픈도어선교회) (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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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와 선교 현장동아프리카 수단, 무슬림 민병대 크리스천 마을 습격 4월13일 월요일, 새벽 6시쯤 대부분이 무슬림인 *미시리야(Missiriya) 민병대가 *아브예이(Abyei) 시 남동쪽으로 25km 떨어진 ‘마북(Mabook)’이라는 마을을 공격했다. 마북은 수단과 남수단의 분쟁지역이다. 이 민병대는 4명의 크리스천들을 죽이고 어린이 2명(7세, 8세)을 납치해갔다. 이들은 주민들의 오두막집 50채와 피난처 8곳을 파괴하고, 교회 1곳을 파괴했다. 이 공격으로 인해 여러 곳으로 흩어진 주민들은 먹을 식량이 부족하다. 가족과 집을 잃고 흩어져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들을 위해 현지 사역자들이 기도를 부탁해왔다. (주: *아브예이(Abyei)는 비옥하고 석유가 나는 지역으로 수단과 남수단 사이에 있어 두 국가 모두 자기의 영토라고 주장. *미시리야 족은 소를 치는 반 유목민으로 1년 중 6개월을 아브예이에서 보냄) 코로나(COVID-19) 위기 속에 박해지역 성도들 이중고 4월 2일 BBC 방송은, 알카에다와 연계된 알-샤바브 단체가 무슬림들에게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에 주의할 것을 경고하면서, 이 바이러스는 “국가들에 침입해온 십자군들(크리스천들)과 이들을 지원하는 믿지 않는(비무슬림) 국가들”에 의해 퍼졌다고 말한 것을 보도했다. 방글라데시 현장사역자에 의하면, 이슬람 종교지도자들은 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비무슬림들을 향한 알라신으로부터의 저주라고 말하면서 다른 종교를 비난하고 조롱하고 있다. 성도들은 비난의 표적이 되는 한편, 대부분 환경이 열악한 박해지역들이 코로나 위기로 ‘봉쇄(lockdown)’에 들어가면서, 노동이나 소규모 장사로 생계를 이어가던 성도들은 일용할 양식과 생필품 부족의 위기에 처해있다. 또 구호품은 무슬림이 우선이고 기독교인은 제외되는 경우가 많다. (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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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의성경찰서, 중리교회 제1예배당예장(합동),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4호, 제5호로 지정 ▲제4호 사적지로 지정된 의성경찰서 앞에서 감사 예배 후 제막식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경중노회 제공) 예장(합동) 총회(총회장 전계헌 목사)는 지난달 13일 옛 의성경찰서 건물과 중리교회(구 빙계교회) 제1예배당을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4호, 제5호로 지정하고 감사예배를 드렸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와 옛 의성경찰서 건물 옛 의성경찰서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에 항거한 애국지사들이 갖은 고문과 수난을 당했던 애국 애족의 장소이다. 특히 신사 참배를 거부하여 평양에서 의성으로 압송당한 순교자 주기철 목사와 당시 의성 춘산면 지역에서 목회했던 권중하 전도사가 온갖 박해를 당했던 곳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예장(합동) 총회는 이곳을 2017년 9월 21일 제102회 총회에서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4호로, 당시 권 전도사가 시무했던 중리교회 제1예배당을 제5호로 지정했다. ▲제5호 사적지로 지정된 의성군 춘산면 중리교회(구 빙계교회) 제1예배당 전경. (사진=예장(합동) 총회역사위원회 제공) 감사예배는 유광수 목사(경중노회 주기철목사수난기념사업특별위원장)의 사회, 함성익 목사(부위원장)의 기도, 총회장 전계헌 목사의 설교, 김병준 목사(경중노회장)의 환영 인사, 부총회장 이승희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이어 사적지 지정식은 총회역사위원장 김정훈 목사의 사회로 진행됐으며, 박창식 목사(서기)의 사적지 소개, 추성환 목사(경중노회 주기철목사수난기념사업특별위원회 서기)의 경과 보고, 지정증서 증정, 박무용 목사(증경총회장)·최수용 장로(부총회장) 등의 축사 후 장영학 목사(총회역사위원회 전문위원)의 마침기도로 순서를 마쳤다. 순교자 소양(蘇羊) 주기철 목사 일제강점기 의성경찰서 수난기념사업 추진경과 2016.3.15. 수난기념사업 추진위원회 발족 2015.4.7. 경중노회 제122회 정기회 결의/ 총회 사업지원개발 청원 헌의 2016.7.7 경중노회 순교자 주기철목사 수난세미나 2016.9.29. 제101회 총회결의/ 총회역사위원회에 맡겨 시행-사적지지정 및 개발지원 2016.10.3. 경중노회 제125회 정기회 결의/ 특별위원회 조직 및 활동 - 총회 협력청원, 여론홍보 서명, 자료수집, 세미나, 사업자금 모금 2017.3.13. 총회역사위원회/ 수난기념사업 진행을 위한 의견청취 및 현지방문 조사 2017.9.21. 제102회 총회결의/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4호 지정 2017.11.22. 의성군/ “일제강점기 의성경찰서” 안내판 설치 2018.2.7. 의성군/ 전문기관 사업 용역의뢰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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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6)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론 1. 임학수, 믿음의 조상이 되다 …………………………… 15. 사경회 강사(講師)로 활동하다 16. 지역의 중심(中心) 교회를 섬기다 17.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지 않다 18. 최고의 한학자(漢學者)가 되다 19. 은퇴 후에도 목회를 계속하다 20. 후학을 위해 매진하다 결론 15. 사경회 강사(講師)로 활동하다 임학수 목사는 안동교회 시무 동안 여러 교회로부터 사경회 강사로 요청을 받았다. 1929년 11월 21일 안동교회 당회는 임학수 목사에 대한 오대교회의 사경회 강사 요청을 허락했다. 또한, 1930년 1월에는 의일교회 사경회 강사로, 1931년 1월 13일부터 18일까지는 아곡교회, 동년 9월 15일부터는 서사교회, 1932년 음력 정월부터 1주일 동안은 춘양교회의 부흥사경회 강사 요청이 있었고 당회는 이를 허락했다. 안동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고 주일학교를 다닌 경안노회 배흥직 공로목사는 “임학수 목사님이 친근감 있는 매력적인 목소리를 갖고 있었고, 그의 음성은 맑고 분명하여 알아듣기 쉬웠다”고 기억한다. 임학수 목사는 설교자가 가져야 할 자질들을 잘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임학수 목사는 전형적인 부흥강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성령 충만했다. 회중들은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웃고, 눈물을 흘렸다. 그는 언변도 뛰어났지만 인품이 그의 설교에 묻어났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학을 전공하고 한학 선생까지 한 그의 지식은 누구보다 성경을 잘 이해하게 했고, 또한 잘 풀어 설교할 능력을 갖추게 했던 것이다. 따라서 임학수 목사는 당시 경안노회 경내의 교회들에게 1주일 가까이 진행된 여러 교회의 사경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말씀의 종으로 사명을 잘 감당했다. 16. 지역의 중심(中心) 교회를 섬기다 일제는 1937년 중국 대륙을 침략했으며,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해 국가를 전시 체제로 바꾸었다. 이러한 시국에서 일제는 지역사회 중심 교회의 담임목사가 자신에게 우호적인 사람이기를 원했을 것이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임학수 목사는 1939년 3월 사임했으며, 경안노회는 5월 15일 안동교회 사임을 허락했다. 안동교회 80년사는 임학수 목사의 사임이 일제 말엽의 기독교 박해에 따른 것으로 적고 있다. 그가 안동교회를 떠날 때 모든 성도는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임학수 목사가 전도, 교육과 봉사로 교회를 부흥시켰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2층 석조 예배당을 건축한 헌신을 성도들은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학수 목사는 여러 지역의 중심 교회를 섬기며 사역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안동교회를 사임한 후 1940년, 임학수 목사는 영양지역의 중심 교회인 영양교회를 섬겼으며, 풍기로 임지를 옮겨 1941년부터 1946년까지 영주의 모교회인 풍기교회(현 풍기성내교회)를 담임했다. 풍기교회를 섬기면서 1년 동안은 예천의 중심 교회인 예천교회를 겸하여 섬겼다. 또 임학수 목사는 1946년 12월부터 예천교회를 섬기면서 1947년 10월부터 3년 6개월 동안 예천 상락교회를 동시에 담임으로 시무했다. 임학수 목사가 예천교회와 상락교회를 왕래하면서 동시에 시무할 수 있었던 이유는, 1938년에 신사참배문제로 평양신학교가 폐교되면서 교역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임학수 목사가 각 지역 중심 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했던 시기는 이처럼 어렵고 힘든 기간이었다. 그러나 일제 말엽, 교회들이 문을 닫아야 하는 위기 속에서 그는 교회를 지키려고 부단히 헌신했다. 또한, 광복과 함께 찾아온 극심한 혼란 속에서 무너진 교회를 세워나가야 할 사명이 그에게 있었다. 예천교회를 섬기던 1947년, 임학수 목사는 미군정 하에서 정부 수립을 위한 예천군 건국준비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사회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예천지역의 치안과 행정을 맡아 그 책임을 잘 감당했다. 그는 국가·사회적 현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행동하는 신앙인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임학수 목사는 일제 말엽과 광복이라는 격변기 속에서도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교회를 지키고 보수(補修)한 신실한 주의 종이었다. 17.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지 않다 일제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기독교를 만들기 위해 1939년 9월 신의주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8회 총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연맹’의 결성을 강요했다. 총회 직후, 각 노회는 지역별 노회지맹을 결성하여 교회의 모든 조직을 국민정신총동원 운동의 추진을 위한 조직으로 탈바꿈시켰다. 경안노회는 1939년 12월 12일, 국민정신총동원 결성식을 강압적으로 가졌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임학수 목사는 1940년 12월 17일, 경안노회장으로 취임했다. 일제는 1940년 12월 경안노회 시에도 궁성요배, 출전 명령과 장사를 위하여 황국서사낭송, 천황페하 만세 삼창을 하고, 국방헌금과 교회 안에 신사(神祠)를 봉안하는 것을 결의하게 했다. 이러한 강압적인 일제의 기독교 탄압정책은 1945년 해방될 때까지 극에 달했다. 손녀인 임순오 권사는 조부인 임 목사가 당시 경안노회장이었기 때문에 일제에 형식적으로 협조했다고 하면서, 8·15 해방을 맞을 때 임학수 목사는 감옥에 있었다고 증언했다. 일제로부터 해방되기 바로 직전 임학수 목사가 감옥에 간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투옥 이유가 일제의 눈 밖에 났기 때문임에는 틀림이 없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신사참배, 황국신민서사 암송, 지원병제도 등과 함께 1940년 2월부터 창씨개명을 시행했다. 그러나 임학수 목사는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당시 일제가 창씨개명을 위해 가한 압박은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비록 일제 말엽 어떤 이유로든 임학수 목사가 일제의 정책에 협력한 것은 분명한 오점이지만,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일제의 강압을 버티며 해방을 맞이했던 것은 뒤늦게라도 올바르게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이 마땅하다. ▲일제는 1940년 2월부터 창씨개명을 시행하고,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학교에 갈 수도 없고 식량 배급도 받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강압 속에서도 애국 인사들은 끝내 이를 거부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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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성들이 겪는 박해“세계통계의 가장 큰 갭” 박해받는 크리스천 여성 ‘세계여성의 날(3월 8일)’을 맞아 9일부터 20일까지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행사들이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하루 행사로 축소된 가운데, 유엔사무총장은, 여성이 ‘세계통계의 가장 큰 갭’이라는 언급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통계에서 여성이 고려되지 못하고 빠지는 현상은 세계에서 가장 ‘숨겨진’ 학대를 당하고 있는 크리스천 여성들에게 더더욱 해당된다. 이들은 신앙과 가난과 여성이라는 사실 때문에 이중삼중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국제오픈도어의 보고서 ‘Genderspecific Religious Persecution Report 2020’에 의하면, 전 세계적으로 크리스천 여성과 소녀들이 겪는 가장 큰 두 가지 박해 형태는 ‘성폭력’과 ‘강제결혼’이다. 이것은 일종의 ‘산 죽음’이다. 특히 이슬람이나 불교에서 개종했을 경우 가장 심하다. 이러한 젊은 여성들은 숨겨지고 고립된다. 따라서 그들의 고난은 보고되지 않는 경우가 빈번하고, 크리스천공동체와 교회에서조차 잊혀진다. 기독교를 억압하기 위한 “여성 성적박해” ‘성폭력’과 ‘강제결혼’ 광범위하게 이뤄져 특히, 아시아, 중동, 북아프리카 등 기독교에 적대적인 국가에서 성적폭력은 범죄로 이어진다. 크리스천 소녀인 ‘니마’는 폭력사태로 가족들이 마을을 떠날 때 노예로 팔렸다. 박해자들은 그 틈을 타서 니마와 다른 60명의 소녀들을 타깃으로 삼았다. 약한 여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니마는 매를 맞고, 끌려가서 여러 차례 강간을 당했다. 2019년 보고들은 기독교공동체를 억압하기 위해서 ‘여성’에 대한 박해가 광범위하게 이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여성박해는 묻히기 쉽고 박해자들에게 보복의 위험이 낮고 매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아라비아반도에서는 크리스천 여성 가사도우미들이 조용히 성적 착취를 당하고, 사하라이남 아프리카에서는 민간 무장대들이 크리스천 마을의 여성들을 주기적으로 공격하거나 납치해서 성적노예로 삼는다. 기독교박해의 이러한 성적박해, 교회를 잠식하기 위한 이러한 방법들은 간과되기 쉽다. 여성을 집밖에 나가지 못하게 가두거나 성적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크리스천 여성들을 타깃으로 하는 흔한 박해 방법이다. 국제오픈도어 관계자는 “이 보고서의 사실들은 전 세계 교회들에게 분명한 사명을 일깨운다”고 언급하며, “우리는 남자와 여자, 어린이들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천부적인 존엄성을 성경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이로써 박해자들이 연약한 여성들을 타깃으로 공격하여 교회를 약화시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라고 호소하고 있다. (오픈도어 2020. 04. VoL. 216에 실린 글 발췌)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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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주기철목사수난기념관 건립 사업 활성화2022년 하반기 완공 목표 … 기독교역사 물품 기증 받는다 ▲주기철목사수난기념관으로 활용될 옛 의성경찰서.(사진=주기철목사수난기념관사업회 제공) 일제강점기 때 사용한 옛 의성경찰서는 주기철 목사의 남한 유일 수난지로서, 경중노회(노회장 추성환 목사)가 중심이 된 의성지역 기독교계의 노력으로 의성군 차원에서 주기철목사수난기념관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 지난 4월 21일(화)에는 이 기념관이 들어설 옛 의성경찰서 건물 복원과 신축 건물 설계를 맡을 건축사 EMA 대표와 의성군 관계자, 주기철목사수난기념관사업회(회장 신칠성 장로)가 만나 기념관을 올해 하반기에 착공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기념관은 2022년 하반기까지 완공을 목표로 의성군 예산 35억을 들여 지어질 예정이다. 한편, 경중노회는 이에 앞서 지난 4월 7일(화) 노회 회관에서 개최된 제132회 정기노회에서 기념관에 전시될 기독교역사 물품을 기증한 기증자들을 초청해 감사의 뜻을 표했다. 옛 의성署 건물 복원 35억원 투입 2022년 완공 목표 올 하반기 착공 초기 기독교 역사물품 기증 줄이어 지역 기독역사 산교육장 되길 기대 이날 정문섭 장로(탑리제일교회 은퇴)는 1920년대 발행으로 추정되는 구세군 노매실교회 설립자 박시학(1887~1959) 정교 유품인 ‘관주 신약성경’(눅1장~벧전5장) 1권, 이수석 장로(하령교회 원로)는 1922년도 발행 인쇄된 신약주석(에베소서~계시록) 1권을 기념관사업회에 기증했다. 하령교회(서정일 목사)는 일제강점기 때 사용했던 강대상(제작연도 미확인)과 강대상 의자(1960년대 제작)를 기증했다. 위 기증된 물품들은 주기철목사수난기념관에 지어질 의성기독교역사관에 전시된다. 사업회는 향후 부산에서 올라온 베어드 선교사의 여정을 통해 의성지역에 복음이 들어온 때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구‧경북지역 교회사 관련 역사물품들을 이곳에 전시할 예정이다. 특히 사업회는 타 기념관과는 차별을 두기 위해 주기철 목사 관련 자료는 물론, 경북 유일 신사참배 순교자 권중하 전도사, 의성농우회 사건 중심인물인 유재기 목사 등 교역자 관련물이나, 기독교 관련 서적, 사진, 교회 회의록, 교회 일지, 주일학교 관련물 등 기념이 될 만한 물품을 제한 없이 기증받기로 했다. (기증 문의는 010-3815-0802 추성환 목사). 한편, 본 주기철목사수난기념관이 들어설 옛 의성경찰서는 당시 일제에 항거한 애국지사들이 갖은 고문과 수난을 당했던 애국 애족의 장소로 기독교 역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곳이다. 특히 신사 참배를 거부해 평양에서 의성으로 압송당한 순교자 주기철 목사와 당시 의성 춘산면 지역에서 목회했던 권중하 전도사가 온갖 박해를 당했던 곳이다. 이에 예장(합동) 총회는 2017년 9월 21일 제102회 총회에서 이곳을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4호로 지정해 기념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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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5)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5) 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임학수 목사 (林鶴洙, 1884-1969) 목차 서론 1. 임학수, 믿음의 조상이 되다 …………………………… 13. 구제 사역을 시작하다 14. 안동교회 돌집 예배당을 건축하다 15. 사경회 강사로 활동하다 16. 지역의 중심 교회를 섬기다 …………………………… 20. 후학을 위해 매진하다 결론 13. 구제 사역을 시작하다 1929년 1월, 임학수 목사가 부임하여 사역을 시작한 이후 안동교회에는 여러 변화가 있었다. 그 중의 하나는 초대교회에도 중요한 사역의 하나였던 구제사역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1932년 1월 제직회에서는 1931년 성탄절 감사헌금을 구제하는 일에 사용할 것을 결의했다: “성탄헌금을 반으로 나누어 반은 노회 회계에게 보내고 반은 교회 가난한 교우에게 구제하기로 가결하다.” 1936년 1월 6일에 있었던 첫 제직회에서는 구제헌금을 장려하기로 결의하기도 했다: “교회 경상비 연도말 차인액의 1/3을 구제비로 쓰기로 하고 교인들에게 구제연보 장려하기로 하다.” 1936년은 석조 예배당을 기공하는 해로 건축비로 인한 재정적인 부담이 엄청났음에도 불구하고 임학수 목사는 구제헌금을 장려하여 상대적으로 가난한 교인들을 구제하고, 또한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인근 지역의 교회들을 돕고자 했던 것이다. 1930년 11월에는 어려운 형편에 있는 해외 동포를 위한 헌금도 결정하기도 했다: “만주에서 박해받고 있는 동포를 위해 헌금을 하기로 가결하다.” 만주에 있는 동포들 중에는 독립운동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임학수 목사가 시무하던 안동교회는 인근 지역을 넘어 해외로 까지 구제를 통한 섬김의 사명을 감당했다. 이것은 이 지역의 모교회인 안동교회가 당연히 감당해야할 넓은 어머니의 사랑과도 같았다. 또한 1934년 7월, 영·호남에 큰 수해가 발생했을 때 교회는 구제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당시 홍수로 인해 경부선, 호남선, 경남선, 마산선 등의 철도가 끊겼으며, 88명이 죽고 170명이 다치는 큰 피해가 있었다. 7월 23일, 안동에도 폭우가 쏟아져 안동시내 대부분의 가옥이 침수되고 낙동강 제방이 무너지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이때 안동교회는 신속하게 수해연보를 결정했다. 그리고 그것을 노회로 보내 수해를 당한 교회를 도왔으며, 또한 교회 내 수재를 입은 가정도 제직회에 보고했다. 교회와 지역사회는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라는 사실을 안동교회는 이미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렵고 힘든 교회와 성도들, 나아가 지역주민을 위한 구제사역은 임학수 목사의 리더십을 돋보이게 한다. ▲1934년 7월 23일, 안동에 쏟아진 폭우로 낙동강 제방이 무너져 안동시내 대부분의 가옥이 침수되고 문화재가 소실되는 등 큰 홍수 피해를 입었다. 14. 안동교회 돌집 예배당을 건축하다 안동교회는 1926년 중반부터 몇 가지 이유 때문에 2층 석조예배당을 신축하기로 결정하고 추진했다. 예배당을 건축할 당시 일제의 수탈이 더욱 심해지고, 1934년 7월 안동시가 물에 잠기는 대 수재로 인해 경제적으로 몹시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안동교회가 대형 예배당을 신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계속된 교회 부흥 때문이다. 또한 안동교회는 당시 경안노회 지역의 중심교회였고, 경상북도 북부지역 교회의 성장과 함께 노회의 모임이 주로 안동교회에서 회집되었기 때문에 보다 넓은 공간이 필요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경안노회 중심교회의 상징으로서 2층 예배당 건축계획은 안동교회 4대 담임인 박상동 목사 때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건축 추진은 후임인 5대 임학수 목사 시무 때부터 본격화되었다. 예배당 신축을 위해 임학수 목사는 선교사들을 꾸준히 설득했으며, 그 결과 다른 지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도 건축에 협력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당시에는 선교회에서 노회중심의 교회 건축에 건축비의 1/3을 보조해 주는 규정이 있어서 보조를 받을 수 있었다. 아울러 임학수 목사가 가가호호 방문하는 등 건축을 위한 본격적인 행보에 교인들이 건축헌금을 작정하기 시작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금반지를 바치는 여성 성도들도 있었다. 많은 교인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다. 돌집 예배당 건축에 어린 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 드리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특히 임학수 목사는 자신의 사재 대부분을 예배당 신축을 위해 봉헌했으며, 노회 경내의 여러 교회들을 순방하면서 경안노회 중심인 안동교회 신축 예배당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경안노회는 1933년 2월 23일 경안노회의 중심교회인 안동교회 본당 신축에 모든 교회가 힘써 헌금할 것을 결정함으로써 안동교회 석조 예배당 신축은 노회 경내 교회들의 협력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돌집 예배당의 터는 이미 계명학교가 폐교가 된 후였기 때문에 계명학교가 서 있던 위치에 예배당을 건축할 수 있었다. 1936년 6월 8일에 있던 제직회에서는 예배당 기초 공사를 배원달 씨에게 맡기기로 하고 교섭위원은 권중필씨로 정함으로써 본격적인 건축에 돌입할 수 있게 되었다. 임학수 목사는 예배당의 정밀한 설계가 교우들의 생각에서 나왔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돌집예배당의 설계자는 미국인 보리스로 알려져 있다. 이 설계도를 기초로 성도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약간 변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돌집 예배당의 주석공(主石工)은 순천 매산학교 강당을 지었던 중국 기술자로 전해진다. 상량식(上梁式) 할 때 피로연을 하기로 결정했을 정도로 돌집예배당은 모두의 기쁨이었고 감사의 제목이었다. 1936년 초여름에 착공하여 1937년 4월 6일에 준공된 돌집 예배당은 기초면적 160평의 2층 건물은 당시로 보면 대규모 예배당이라고 할 수 있다. 공사 기간은 삼백 삼십 여일이었고, 공사비 총액은 이만 이천 원이 넘는 거액이었다. 건축위원장인 임학수 목사를 중심으로 온 교우의 피와 땀으로 건축된 독특한 형식과 외모를 가진 돌집 예배당이 준공되기 까지 건축기간 동안 작은 부상이나 상처는 없었는데,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이다. 또한 지난 80여 년 동안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선교 중심지로 사용되었기에 돌집 예배당의 준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요 은혜라고 할 수 있다. ▲1937년 4월 6일 돌집예배당이 준공된 후의 사진으로 81년이 지난 오늘의 예배당과 동일하다. 다만 두 개의 굴뚝이 예배당 좌측 지붕에 있고, 예배당 좌측 언덕에는 종탑이 서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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