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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 목사의 논문 원문(7)- 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목사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목사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임학수 목사(林鶴洙, 1884-1969) 임학수 목사는 안동 땅에서 출생하고 안동 땅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나라에 갔다. 그는 안동 땅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안동지역에 있는 교회를 섬겼다.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교회, 크고 작은 교회를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섬겼다. 그래서 그가 시무한 교회는 든든히 설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가 교회를 섬긴 시대 상황은 결코 만만한 세월이 아니었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강압적으로 통치하던 시대였다. 보통 사람들인 백성의 삶도 고단했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삶은 더 고난의 연속이었다. 황국신민화를 강요하는 일제의 정책 하에서 예수 믿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임학수 목사는 단순한 성도로서가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인 목사로 살아야 했기 때문에 더 큰 믿음과 용기, 그리고 인내와 소망이 필요했다. 그러나 임 목사는 어려운 시기에 교회의 지도자와 경안노회의 중심인물로 그 사명을 잘 감당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황금만능주의와 세속화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위기를 맞고 있다. 거룩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교회, 영적 리더십을 가진 존경받는 주의 종,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성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현실을 보며 낙망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다가 교회가 영영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게 된다. 그러나 교회의 능력은 분명히 회복될 수 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교회는 과거의 교회와 과거의 선배들이 남겨놓은 교훈을 배워야 한다. 교회역사를 올바로 이해해야 하며, 거룩한 영향력을 끼친 믿음의 선배의 삶을 본받아야 한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임학수 목사다. 그는 분명한 소명의식을 갖고 헌신한 사명자였다. 그는 신실한 하나님의 일꾼인 동시에 도전하는 교회의 일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학수 목사의 신앙과 삶을 연구하고 정리한 글은 이교남 목사가 쓴 ‘한학자 임학수 목사’ 외에는 거의 없다. 그가 안동지역이라는 복음의 변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선교부가 위치해 있었지만 안동은 작은 도시였기 때문에 안동지역에서 활동한 교역자나 평신도들은 한국교회에 알려지기 보다는 묻혀 있을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한계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임학수 목사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흔적을 남긴 주의 종이었다. 그래서 임학수 목사의 성품, 인격, 신앙을 포함한 삶은 오늘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큰 도전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소논문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연구되었다. 연구 결과 필자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고 영원히 잊혀 질 수 있었던 임 목사의 신앙과 삶을 새롭게 발굴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 일평생 단 한 번도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고 충성을 다한 믿음의 대선배인 임학수 목사가 걸어간 거룩한 구원사역의 흔적을 찾아보도록 하자. 1. 임학수(林鶴洙), 믿음의 조상(祖上)이 되다 임학수는 1884년 6월 23일 부친 임보현과 모친 정덕희 사이에서 장남으로 안동군 녹전면 매정리(일명 갈골)에서 출생했다. 특히 1885년은 원두우(元杜尤, Horace Grant Underwood) 선교사와 아편설라(亞扁薛羅, Henry Gerhard Appenzeller) 선교사가 인천 제물포에 첫발을 밟은 해로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임학수의 본관은 부안으로 호는 영온(嶺穩) 혹은 영루(嶺樓)이다. 령(嶺)은 재, 산봉우리라는 의미를 갖는다. 온(穩)은 ‘평온하다’와 ‘곡식을 거두어 모으다’는 뜻을 갖는다. 따라서 영온(嶺穩)은 ‘평온한 산봉우리’라는 의미로 산봉우리가 조용하고 평안한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가 평온하기를 소망했던 것 같다. 또한 영온(嶺穩)은 ‘곡식을 거두어 모으는 산봉우리’라는 의미로 산봉우리 같은 하나님의 교회가 자신의 사역을 통해 구원받은 알곡과 같은 성도들이 넘쳐나기를 소원했던 것 같다. 또한 루(樓)는 다락의 뜻으로 영루(嶺樓)는 산봉우리에 있는 다락과 같은 망대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임학수 목사는 악한 세력이 성도들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조망하고 감시함으로써 교회와 성도들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학수는 1894년 박계남과 결혼하여 임상경, 임상교 남매와 손자 1명과 손녀 4명을 두었다. 1911년 10월 23일, 임학수는 매정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모친인 정덕희는 1913년 6월 14일에, 처(妻)인 박계남은 1916년 2월 16일에, 장남 임상경은 1922년 매정교회에서 각각 세례를 받았다. 임학수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난 후에 모든 식구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임학수는 한 가문에 있어서 믿음의 조상(祖上)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1909년 9월, 임학수에 의해 설립된 매정교회를 섬기던 임학수 가정은 1923년 5월 10일 안동의 어머니(母) 교회인 안동교회로 이명(移名)했으며, 이명한 후에는 온 가족이 줄곧 안동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임학수 목사의 장남(長男)인 임상경은 안동교회에서 장립집사와 장로의 직분을 받았으며, 오랫동안 제직회 서기, 당회서기로 봉사했다. 임학수 목사의 자부(子婦)인 강신덕은 교회학교 교사, 청년회, 성가대에서 헌신했다. 특히 강신덕은 당시 내매교회를 섬기고 있던 백부(伯父) 강병주 목사의 조카로 대구 신명여학교를 졸업한 신식 여성으로 학창시절에는 육상, 테니스 등 운동도 잘 했다고 한다. 당시 임학수 목사와 강병주 목사가 친밀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임상경과 강신덕은 결혼하게 되었다. 임학수 목사의 손녀인 임화자 권사는 어머니 강신덕를 이렇게 기억한다: 어머니 강신덕은 신앙이 두터운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 신학문을 배운 여성으로 깊은 신앙과 지혜로 슬기롭게 어려운 목사 가정의 살림을 잘 꾸렸다. 대가족 집안일도 많았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주일학교 반사, 여전도회 임원, 구역권찰로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 열정적으로 헌신했다. 사경회나 교회행사 때마다(크리스마스 새벽송 찬양대 식사) 식사 준비로 봉사를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목사관 뜰에서 몇 백 명의 밥을 큰 가마솥 3개에 불을 지펴서 하는 일은 늘 어머니의 몫이었다. 강신덕의 가정은 초기 한국교회부터 오늘날 까지 믿음의 큰 산맥을 이룬 가정이다. 큰 아버지인 강병주 목사는 평양신학교 14회 졸업생으로 내매교회, 영주교회, 그리고 풍기교회를 담임하면서 6차례 경안노회장을 역임했으며, 1933년 총회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임지를 옮겨 총회 산하교회의 신앙교육과 교사양성과정을 책임지며 교사양성에 주력한 분이다. 또한 서울의 새문안교회를 담임한 강신명 목사는 강병주 목사의 장남이기도 하다. 이처럼 임학수 목사의 후손은 뿌리 깊은 믿음의 가정으로 어디서나 주님의 교회에 헌신하는 일꾼들이 되었다. 노후에 장남을 따라 부산으로 이사한 강신덕은 거성교회에서 권사로 임직을 받았다. 임상경 부부는 거성교회를 섬기다가 별세하였다. 임학수 목사의 장녀인 임상교는 권사로 대구 신암교회에서 시무하였으며, 손자 임재오는 부산 거성교회에서 장로로 시무하였다. 친손녀인 임순오는 부산 수영로 교회에서 권사로, 임양자는 안동교회에서 집사로, 임화자는 서울 밀알교회에서 집사로 헌신하고 있다. 부모세대의 믿음과 헌신을 계승하여 후손들이 계속해서 아름다운 믿음의 가문을 이어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임학수 목사의 평소의 삶은 비단 신앙 뿐 아니라 인격, 품성 등에 있어서 자녀손들에게 선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적어도 임학수 목사로 인해 교회를 이탈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만큼 임학수 목사는 목사로서의 삶도, 부모로서의 삶도, 또한 인간으로서의 삶도 모자람이 없는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임학수가 한 가정의 믿음의 조상이 됨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하 내용은 논문원문 첨부파일 참조)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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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8)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8) 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임학수 목사 (林鶴洙, 1884-1969) 목차 서론 1. 임학수, 믿음의 조상이 되다 …………………………… 16. 지역의 중심(中心) 교회를 섬기다 17.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지 않다 18. 최고의 한학자(漢學者)가 되다 19. 은퇴 후에도 목회를 계속하다 20. 후학을 위해 매진하다 결론 20. 후학(後學)을 위해 매진하다 예천교회를 마지막으로 공식적으로 은퇴한 임학수 목사는 안동 지역의 작은 교회들을 섬기고 돌보았을 뿐 아니라 후학을 양성하는 사역에도 매진했다. 그는 은퇴 후에도 수년간 경안신학원 전신인 경안고등성경학교에서 성경과 한문을 가르쳤다. 임학수 목사로부터 여호수아서를 배웠던 경안노회 은퇴목사 권영택 목사는 많은 연구에 기초한 임 목사의 강의는 역사학자처럼 전후 맥락을 잘 연결시켜 여호수아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고 증언한다. 더욱이 임학수 목사가 언제나 제자들에게 존댓말을 썼으며, 제자들을 나무라는 말을 절대로 하지 않았을 정도로 고매한 인격을 갖춘 선비로 권영택 목사는 임 목사를 기억한다. 역시 제자인 장세문 목사는 임 목사가 말년에 한문을 가르쳤는데, 언제나 흐트러짐 없는 정갈한 모습이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77세 할아버지 목사님이 칠판에 반듯반듯 정자체로 한자를 한 자 한 자 쓰실 때엔 양복저고리 왼쪽 어깨가 밑으로 축 처져 있어서 쓰시기를 마친 목사님은 학생들 쪽으로 돌아서시면서 저고리를 바로 입으시곤 하셨다.” 임 목사가 사랑하고 가르친 경안신학원은 1912년 여자성경학원으로부터 시작했다. 선교사들은 앞으로 지역교회를 지도해 갈 여성 지도자를 양육할 목적으로 학교를 세웠던 것이다. 그러다가 1914년 안동선교부에 부임한 인노절 선교사는 보다 체계적이고 확대된 성경학교를 운영하게 되었다. 그 결과 여자성경학교는 1920년 4월 10일 남녀성경학교로 확대개편 되었다. 인노절 선교사가 1922년 별세한 뒤에는 그의 부인 캐더린 선교사의 노력으로 ‘성경학교(Bible Institute)’란 이름으로 새로 건축됐으며, 1925년 새로운 교사와 생활관 건물이 준공된 후에 ‘인노절기념성경학교’로 개명되었다. ▲1922년 인노절 선교사가 하늘나라에 간 후 부인 캐더린 선교사의 모금과 경안노히 교회들이 힘을 합해 1925년 준공한 인노절기념성경학교로 반지하 1층, 지상 1층 건물로 건축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는 강제로 학교가 폐쇄되었지만, 해방 후에 교장인 이원영 목사는 무너진 교회를 위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1946년 9월, ‘경안고등성경학교’란 이름으로 다시 개교했고, 1962년 3월 ‘경안성서학원’으로 개명되었다가 ‘경안신학원’으로 다시 개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2005년 3월 10일 개교한 경북 북부지역 유일한 대학원 대학교인 ‘경안신학대학원대학교’가 개교하게 되었는데, 여자성경학교가 경안신학대학원대학교의 모체가 되었던 것이다. 비록 경안신학원은 안동이라는 소도시에 위치했지만 한국교회에 끼친 거룩한 영향을 생각한다면 진정으로 큰 학교라고 할 수 있다. 이 학교에서 가르치고 공부하고 신학훈련을 받았던 사람 중에 한국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많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70회를 넘도록 배출한 경안신학원의 총 동문은 무려 2,000명 가까이 된다. 이들은 국내에서, 혹은 세계 열방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살아가고 있다. 바로 이 역사적인 경안고등성경학교에서 임학수 목사는 당시 소명과 사명에 불타는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당시 신학생들에게 임학수 목사는 사랑과 정성과 고매한 인격으로 제자들에게 본이 된 스승이었다. 신학생들은 임학수 목사의 강의를 통해 성경과 한문을 배웠을 뿐 아니라 인격과 목회를 배웠다. 그가 목회 실습과 같은 과목을 가르친 것은 아니지만, 그의 강의에는 50여 년 넘는 동안 섬긴 열정과 사랑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임학수 목사의 제자들은 선지동산인 신학교에서 육신적으로는 노쇠했지만 영적으로 충만한 믿음의 선배요 스승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제자들은 임학수 목사를 여전히 위대한 스승으로 흠모하고 있었다. 임학수 목사는 날마다 새벽에 가정예배를 드림으로 자녀·손들에게 신앙을 훈련시키고 전수(傳授)하는 일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손녀인 임순오 권사에 의하면 예배 시에는 항상 찬송가 58장인 ‘지난밤에 보호하사’를 불렀다는 것이다. 또한, 오래 참고 항상 부지런히 일하고 열심을 다해 주님을 섬기라는 조부의 말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신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칠 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믿음의 후배를 양성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임학수 목사는 가족에게 인격과 신앙의 롤 모델과 같았다. 또한, 안동교회 후임자인 김광현 목사에게도 직·간접적으로 목회를 전수했을 가능성이 있다. 임학수 목사는 불편한 몸으로 노년을 보냈다. 그때 김광현 목사는 거의 매일 임학수 목사의 집을 방문해 문안하면서 임 목사가 좋아했던 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두 분은 마치 부자관계처럼 사이좋게 지내면서 전임자와 후임자의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안동교회의 전임 담임목사와 후임자의 아름다운 관계는 이미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두 목사님은 만나 바둑도 두었겠지만 자연스럽게 교회와 성도들, 노회와 목회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을 것이다. 이때 안동교회 전임 담임자요 목회 선배, 그리고 인생 선배인 임학수 목사는 여러 면에서 직·간접적으로 조언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김광현 목사가 경안노회와 총회, 그리고 한국교회의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게 한 요인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1969년 1월 7일, 임학수 목사는 85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경안노회는 임 목사의 공적을 인정하여 경안노회장(葬)으로 결정하였고, 그가 11년 동안 헌신한 안동교회에서 장례예식을 치르고 운구하여 안동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1969년 1월 안동교회 예배당 앞에서 진행된 임학수 목사의 장례식.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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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2)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2) 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임학수 목사 (林鶴洙, 1884-1969) 목차 서론 1. 임학수, 믿음의 조상이 되다 2. 예수 믿기로 결단하다 3. 고향 매정에 교회를 설립하다 4. 권찬영 선교사의 서기가 되다 5. 목사로 임직(任職)하다 6. 주일학교에 비상한 관심을 갖다 7. 한국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다 8.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하다 9. 지역의 복음화에 앞장서다 10. 사경회에 온 힘을 쏟다 4, 권찬영 선교사의 서기가 되다 1908년 안동에 선교부가 조직되고 최초의 주재선교사로 소텔 선교사가 부임했다. 그러나 1909년 가을, 소텔 선교사는 안동에서 북쪽으로 전도를 떠난 지 10일 만에 장티푸스에 걸렸고, 28세라는 젊은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소텔 선교사의 순교의 피가 뿌려진 지 2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1910년 1월, 권찬영 선교사가 안동에 부임함으로써 안동선교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권찬영 선교사는 안동에 부임한 후 무려 40년 동안 안동에 머물며 지역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안동을 사랑했고, ‘Mr. 안동’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안동 땅의 사람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았다. 임학수는 1910년 권찬영 선교사의 서기(書記)로 일했는데, 아마 한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권찬영 선교사가 한국의 문화와 언어에 서툴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권찬영 선교사와 함께 생활하면서 설교도 하고 예배도 인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임학수는 빨리 조사가 될 수 있었다. 그 결과 그는 권찬영 선교사의 선교 구역인 아곡교회, 원림교회, 예천의 지보 섭밧교회에서 조사로서 사역을 잘 감당했다. 그 후 1919년 제6회 경북노회에서 공식적으로 조사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1922년 경안노회가 조직된 후에는 장사리, 국곡, 덕봉, 아탐실, 수동, 하화교회 등 6처 교회에서 조사로 봉사했다. 1923년 5월, 임학수 가족이 안동교회로 이명한 후에도 임학수는 조사의 직분을 가졌기에 주일마다 여러 교회를 찾아다니며 성도들을 돌보는 일을 감당했을 것이다. 이후 그의 조사 사역은 계속되어 1924년에는 국곡, 아곡, 수동, 장사리, 소호리, 원림, 구미교회에서 역시 조사로 사역했다. 5. 목사로 임직(任職)하다 1901년 5월, 마포삼열 선교사는 자신의 사랑채에서 김종섭, 방기창 등 2명을 모집하여 신학교육을 시작했다. 이어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미국북장로교, 미국남장로교 등 4개의 장로교선교회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학교 설립이 요청되었고, 1904년 평양에 장로회신학교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평양신학교의 당시 입학조건은 까다로운 편으로 상당한 학식과 자격을 갖춘 자로 제한했다. 평양신학교는 총 5년간의 교육과정으로 진행됐는데, 매년 3개월은 학교에서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나머지 9개월은 거주하고 있는 교회에서 사역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1920년에 이르러 1년 2학기 3년 과정의 학제를 가진 전문학교 제도를 도입했다. 조사로 교회를 돌보던 임학수는 1921년 가을, 비교적 늦은 37세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1921년 제9회 경북노회에서 특별 신학생으로 임학수의 평양신학교 입학이 허락되었으며, 별(別) 신학과에 입학한 지 3년 후인 1925년 1월 7일, 제7회 경안노회가 회집된 안동교회에서 문답을 거치고 나서 임학수는 목사 임직을 받았다. 임학수는 임직 후에 소호리교회 등 5개 교회를 섬겼으며, 고향인 녹전교회에서도 목회를 했다. 또한 경안신학원의 전신인 인노절 기념 성경학원 강사로 수년간 제자들을 양성했다. 6. 주일학교에 비상한 관심을 갖다 1926년에 대한제국의 순종황제가 별세한 후에 6·10만세 운동이 발생했다. 6·10만세 운동에서 학생운동 조직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이후 학생은 독자적인 운동 주체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기독교는 더욱 일제의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임학수 목사는 조국의 미래가 다음 세대의 교육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고 인재양성에 매진하였다. 무엇보다 그는 주일학교에 관한 관심이 지대했다. 1930년에는 새롭게 주일학교 임원을 구성했는데, 담임목사를 주일학교 교장으로 결의했다. 이것은 담임목사가 주일학교 신앙교육에 책임을 지고 지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임학수 목사가 부임하기 1년 전인 1928년 9월 경안노회 역사상 처음으로 제1회 경안주일학교대회가 안동교회에서 열린 적이 있었다. 이 대회는 안동, 영주, 예천, 봉화, 의성, 청송, 영양, 영덕 등 지역에서 2,300여 명이 참석하는 등 뜨거운 열기 속에 진행되었다. 이후 5년이 지난 1933년 4월 6일부터 5월 3일까지 제2회 경안주일학교대회가 역시 안동교회에서 열렸다. 임학수 목사는 5년 동안 중단되었던 안동지역의 주일학교 교사대회를 복원함으로써 교사들의 사명감을 회복시키고자 했으며, 각 교회의 주일학교가 든든히 서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다. 또한, 임학수 목사는 청소년에 관해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교회 주일학교는 초등학생을 양육하는 유년부와 장년 성도를 교육하는 장년부만 존재했다. 그래서 임학수 목사는 ‘안동 기독소녀회’(1928년 조직)란 기구를 1930년 ‘기독 소년·소녀회’로 규칙을 제정하고 그 대상을 남학생으로까지 확대했다. 또 청소년 활성화를 위해 소년·소녀 현상(懸賞) 동화대회를 열 수 있도록 협력했다. 이처럼 임학수 목사가 시무할 때 안동교회는 구체적인 청소년 사역을 시작하고 지원함으로써 청소년의 체계적인 신앙교육과 양육이 활성화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 제2회 경안주일학교대회.(1933년 4월 6일부터 5월 3일까지 안동교회에서 열렸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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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지역 최초의 순교자, 소텔 선교사(4‧끝)안동지역 최초의 순교자, 소텔 선교사(4‧끝) 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소텔 선교사(Chase C. Sawtell, 1881-1909) 목차 1. 서론 2. 소텔 선교사의 가정(家庭) 3. 소텔 가정의 신앙(信仰) 4. 소텔 선교사의 소명(召命) 5. 소텔 선교사의 성품(性品) 6. 소텔 선교사의 파송(派送) 7. 소텔 선교사의 사역(使役) 8. 소텔 선교사의 순교(殉敎) 9. 소텔 선교사의 부인, 캐더린 10. 캐더린 선교사의 특별한 공헌(貢獻) 11. 결론 9. 소텔 선교사의 부인, 캐더린 소텔 선교사는 1907년 8월 27일 캐더린 맥크롱과 결혼했다. 1884년 8월 2일 네브라스카 주 크레트에서 출생한 캐더린은 그곳에서 1년 동안 살다가 1885년 실버 크릭으로 이사하여 10년 동안 거주했다. 따라서 어린 시절 소텔과 캐더린은 한 교회를 다녔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3년이고, 실버 크릭 교회가 시골의 작은 교회였기 때문에 매 주일마다 주일학교에서 서로 만났을 가능성이 크다. 캐더린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1905년 네브라스카 주 크리트에 소재한 돈(Donne)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기독교 병원인 오마하 제너럴 병원 간호학교에서 간호사 교육을 받았다. 소텔과 결혼한 후 한국으로 파송 받던 해인 1907년, 23세의 꽃다운 나이인 캐더린은 5피트 10인치(약 178cm)로 당시에도 여성으로는 꽤 큰 키였다. 소텔 선교사 부부는 내한한 지 약 10개월 만에 딸을 출산하였는데, 이름은 메리이다. 선교지인 한국에서 딸을 얻은 기쁨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1909년 남편 소텔 선교사가 별세했으며, 이후 캐더린은 선교 사역을 계속하다가 1910년 딸 메리와 함께 미국으로 귀국했다. 캐더린은 1918년 경 밴더립 목사와 재혼했고, 1930년 전후하여 오마하 소재 크리프톤 힐 장로교회를 섬기면서 사회복지와 관련된 학교에서 교사로 봉사한 기록이 남아있다. 10. 캐더린 선교사의 특별한 공헌(貢獻) 안동의 교회음악에 처음으로 직접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권애라 선교사다. 권애라 선교사는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1909년 11월 소텔 선교사가 장티푸스로 순교한 후 그 후임으로 1910년 1월 안동에 파송된 권찬영 선교사의 부인인 동시에 소텔 선교사 부인 캐더린의 동생이다. 권애라 선교사는 초창기 안동에서 교회음악 외에 여러 선교사역의 중심역할을 감당했다. 남편 소텔 선교사가 순교한 후 부인인 캐더린 선교사는 대구에서 계속 사역을 감당했다. 이때 캐더린 선교사는 미국에서 만든 풍금을 안동교회에 기증했는데, 이 풍금으로 안동 땅에 교회음악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캐더린이 안동교회에 기증한 풍금은 안동지역 최초의 풍금이었으며, 훗날 이 풍금은 안동교회의 교회음악과 영남지역의 음악역사에 큰 공헌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봄나들이’ ‘꽃 피는 삼천리’ ‘무찌르자 오랑캐 몇 백만이냐’ 등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음악가 권태호 선생이 어렸을 때부터 안동교회에 출석했고, 안동교회에서 권애라 선교사로부터 풍금을 배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동의 초기 기독교 음악은 캐더린 선교사가 기증한 풍금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이 풍금이 훗날 안동교회 찬양대의 탄생을 도왔으며, 더 나아가 한국 근대음악의 선구자 중의 한 명인 권태호 선생을 낳게 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은 풍금 기증자인 캐더린 선교사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을 것이다. 11. 결론 1907년 9월 24일, 샌프란시스코 항에서 젊은 부부가 한국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남편의 이름은 소텔(C.C. Sawtell)로 나이는 만으로 26세였다. 아내의 이름은 캐더린으로 만 23세의 꽃다운 나이였다. 그들은 샌프란시스코 항을 출발한 지 22일 만인 1907년 10월 16일 마침내 한국에 도착했다. 소텔 선교사는 배속된 대구선교부에서 1년여 동안 맡겨진 사역에 최선을 다한 신실한 주의 종이었다. 그러나 1년 뒤인 1908년 안동선교부의 신설이 결정되자 자원하여 미지의 땅인 안동으로 왔다. 그는 안동선교부의 첫 번째 주재선교사였던 것이다. 안동선교부를 위해 그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임무는 선교사들이 머물 수 있는 임시사택을 구입하는 일이었다. 그는 현재 안동교회 부지 안에 있는 한 채의 사택을 구입함으로써 선교사들이 안동에 머물면서 사역할 수 있는 기반시설 조성을 완료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다했다. 소텔 선교사는 이후 복음이 활발하게 전파되고, 자생적인 교회들이 세워질 토양을 만드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안동에서 사역한 기간이 1년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가 남겨놓은 거룩한 흔적은 크고 무겁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소텔 선교사는 1909년 11월 16일, 28세라는 젊은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다음은 그의 묘비에 새겨진 글이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겠노라(I am going to love them).” 그는 조선을 사랑했기 때문에 내한했고, 조선과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나라로 갔다. 소텔 선교사는 안동 땅에 순교의 피를 뿌린 최초의 순교자였다. 안동 선교는 이처럼 거룩한 피를 흘림으로써 시작되어 안동 땅 곳곳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송하는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무려 109년 동안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선교사였던 소텔 선교사의 거룩한 삶은 교회가 침체되고 선교의 열정이 식어가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 복음의 능력과 전도의 열정을 새롭게 한다. 소텔 선교사의 심장을 날마다 뜨겁게 했던 이 말이 식어 차게 변해버린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의 심장을 다시 뜨겁게 만들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겠노라(I am going to love them). ▲ 좌측 사진은 소텔 선교사가 별세한 후 부인인 캐더린 선교사가 안동교회에 기증한 바로 그 풍금 앞에 양복을 입고 연주하고 있는 권태호의 모습이다. 우측 사진은 연로한 음악가 권태호가 연주하고 있는 모습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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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강진구 장로(前 삼성전자 회장) 재조명 학술 포럼 열려영주 내매 출신 … “신앙인의 사회적 역할, 교회사적 조명 가치 있다” ▲강진구 장로의 유가족들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경북 영주 내매에서 태어나 초기 기독교 교육의 영향 아래 성장한 故 강진구 장로(前 삼성전자 회장)를 재조명하는 학술 포럼이 지난 10월 12일 영주노회 역사위원회, 장로회, 내매교회 공동주최로 내매교회 본당에서 열렸다. 강진구 장로는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 삼성전자를 일궈낸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으며, 삼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이다. 포럼을 주최한 내매교회 윤재현 목사(대경기독교사적협의회 사무국장)는 “강진구 장로는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에서 장로로서 모범이 됐기 때문에 교회사적으로 증명해보고 재조명할 가치가 있어 이번 포럼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포럼에 앞서 드려진 예배는 영주노회장로회장 안병주 장로의 인도, 역사위원장 류재록 목사의 기도, 직전 노회장 강성효 목사의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제목의 설교 등의 순서가 있었다. 이어 포럼에서는 영남신학대학교 손산문 교수(자천교회)가 발제자로 나서 영주 내매교회와 국내 최초 기독사립학교인 내명학교에서 성장한 강진구 장로의 삶과 업적을 조명했다. 손 교수는 발제를 통해 “신앙의 인물이 우리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질 때는 교회사적인 조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손 교수는 ‘내매마을은 교회와 학교를 통해서 일찍부터 근대의식으로 개화된 마을’이었음을 주목하면서, “내매교회와 내명학교는 이곳을 고향으로 두고 있는 강진구 장로의 신앙과 삶의 뿌리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강진구 장로와 함께 반도체산업을 추진했던 박성배 대표(이삭 CPU 연구소, 前 삼성전자)와 자녀들이 증언자로 나서 강진구 장로의 신앙적인 면모와 열정들을 회고했다. 2017년 별세한 강진구 장로는 1927년 경북 영주 내매에서 강석경 장로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이후 대구사범학교 졸업(1946년), 서울대 전자공학과 졸업(1957년), 동양방송 입사(1963년), 삼성전자 사장(1974년), 삼성반도체통신 부회장(1988년), 삼성전자 회장(1990년)을 지낸 입지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윤재현 목사는 이번 포럼에 대해 “신앙과 삶이 분리되는 이원화된 한국교회의 현실 속에서 신앙인들이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계기가 됐다”며, 아울러 “한국교회의 정직성과 대사회적 신뢰성 회복을 위한 한 분의 표본을 발굴하게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강진구 장로(前 삼성전자 회장)의 신앙과 삶을 재조명하는 학술 포럼이 지난 10월 12일 영주노회 역사위원회, 장로회, 내매교회 공동주최로 내매교회 본당에서 열렸다. 우병백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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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지역 최초의 순교자, 소텔 선교사(3)안동지역 최초의 순교자, 소텔 선교사(3) 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소텔 선교사(Chase C. Sawtell, 1881-1909) 목차 1. 서론 2. 소텔 선교사의 가정(家庭) 3. 소텔 가정의 신앙(信仰) 4. 소텔 선교사의 소명(召命) 5. 소텔 선교사의 성품(性品) 6. 소텔 선교사의 파송(派送) 7. 소텔 선교사의 사역(使役) 8. 소텔 선교사의 순교(殉敎) 9. 소텔 선교사의 부인, 캐더린 10. 캐더린 선교사의 특별한 공헌(貢獻) 11. 결론 7. 소텔 선교사의 사역(使役) 부산선교부의 배위량 선교사가 안동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는 1893년 5월 5일 안동에 도착했는데, 이 날 배위량 선교사 일행이 안동에 머문 시간은 하루도 되지 않았지만 이 때 뿌려진 복음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 후 1902년 3월, 대구선교부의 안의와 선교사가 조사 김기원과 함께 안동의 시장에서 복음을 전하였고, 이후 방위렴, 부해리, 맹의와, 어도만 선교사도 안동을 중심으로 경북 북부지방을 순행하며 복음전파에 열심을 내었다. 안동을 포함한 경북 북부지역에 그리스도인들이 급속도로 증가하자 안의와 선교사와 부해리 선교사는 안동에 선교부가 설립되어야 함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소텔 선교사는 대구선교부에서 주어진 사역을 잘 감당하고 있었다. 그는 다재다능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재정 서류 작성도 능수능란했고, 건물의 기계적 문제도 거뜬히 해결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대구 동산병원에 물을 상시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작은 풍차를 만들어 세우기도 했다. 이처럼 소텔 선교사는 대구선교부에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선교사였다. 그러나 안동, 영주, 청송 등 경북북부지역의 복음화 필요성이 대두되자 선교협의회는 1908년 안동선교부 설치를 확정하고 소텔 선교사가 초대 주재선교사로 임명되었다. 소텔 선교사는 1908년 12월 1일 대구를 출발하여 안동에 도착하여 선교기지가 될 임시주택 한 채를 구입하였다. 또한, 1909년 2월 강원도 원주에서 사역하던 오월번 선교사가 조사인 김영옥과 함께 안동으로 내려왔다. 이후 의료선교사인 별리추가 원주에서 안동으로 전임함으로써 안동선교부는 비로소 선교부로서의 완전한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안동선교부의 초대 주재선교사로 도착한 소텔 선교사의 주된 사역은 캠프를 개설하여 성경공부반을 운영하는 일이었다. 7일 동안 계속된 캠프에는 무려 150명이 참석했는데, 소텔 선교사는 이들을 조 편성하여 낮에는 전도하고, 밤에는 집회를 열어 하루 일과를 나누었다. 그 결과 안동읍 유일한 교회였던 안동교회는 매일 밤 신자들로 가득했다. 안동선교부가 개설된 이후 1년도 경과하지 않은 상황에서 안동으로 온 소텔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결신하였고, 결신한 자들을 모아 훈련시켰으며, 훈련받은 이들을 마을로 보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게 했다. 소텔 선교사의 복음전도 패러다임은 전도, 양육, 파송의 방식이었다. 낮에 복음을 전하고 돌아온 사람들과 복음을 수용한 사람들, 또한 복음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을 모아 밤에 집회를 열었는데 무려 200명이나 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비록 소텔 선교사가 안동선교부에서 활동한 기간은 길어야 1년, 짧으면 수개월에 불과했지만 안동선교부가 조직된 지 1년 만에 이루어진 놀라운 성과는 이와 같은 소텔 선교사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후 복음이 활발하게 전파되고, 훈련된 평신도들의 증가로 인해 안동 땅에 자생적인 교회들이 세워질 토양을 만드는데 소텔 선교사가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소텔 선교사가 구입한 안동선교부의 첫 임시주택. 오월번 선교사 가족도 1910년 6월 3일 안동에 도착하여 7월 7일 두 번째 주택으로 이사하기 전 까지 한 달 남짓 거처했다. 8. 소텔 선교사의 순교(殉敎) 1909년 가을, 소텔 선교사와 오월번 선교사는 안동에서 수일 동안 전력을 다해 복음을 전한 이후 소텔 선교사는 안동에서 북쪽으로, 오월번 선교사는 서쪽으로 나누어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도의 길을 떠난 지 10일 만에 소텔 선교사는 장티푸스에 걸렸다. 소텔 선교사는 선교 후원금을 아끼려고 인내하면서 조랑말을 타고 대구에 도착했다. 처음에 소텔 선교사의 병은 중한 것이 아니었지만 별세하기 이틀 전부터 심각한 상태가 되어 안타깝게도 1909년 11월 16일, 28세라는 젊은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소텔 선교사의 무덤은 현재 대구동산병원 경내의 은혜정원에 있다. 남편을 먼저 보낸 부인 캐더린 선교사는 남편의 묘비에 “나는 그들(조선인들)을 사랑하겠노라”라고 적었다. 그런데 이 문구는 소텔이 오마하 신학교에 다닐 때 자신이 한 말이다. 소텔의 신학교 동창인 월트 레이놀즈가 기억하고 있다가 묘비에 새긴 것이다. 소텔 선교사는 조선을 사랑했기 때문에 내한했고, 조선과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나라로 갔으며, 지금도 하늘나라에서 한국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안동 땅에 순교의 피를 뿌린 최초의 순교자였다. 안동 선교는 이처럼 피를 흘림으로써 시작되었던 것이다. 안동선교부의 초대 선교사로 부임한 소텔 선교사가 1909년 11월 16일, 장티푸스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자 안동 선교부의 정상적인 선교활동이 다소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동지역의 선교는 결코 지체될 수 없는 일이었다. 순교의 피가 뿌려진 지 2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1910년 1월, 권찬영 선교사가 안동에 부임함으로써 안동선교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권찬영 선교사는 소텔 선교사가 순교한 지 1년이 지난 후 소텔 선교사의 동서가 되었다. 안동에 발령받은 그는 별세한 소텔 선교사의 처제인 엘렌과 1911년 2월에 결혼하였으며, 정년으로 1950년 미국으로 귀국하기 전까지 무려 40년 동안 안동지역의 선교에 온 힘을 다 쏟았다. 권찬영 선교사가 소텔 선교사가 졸업한 미국 오하마 장로교 신학교 동문이었다는 사실은 안동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로 안동에서의 구원사역은 큰 단절 없이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09년 10월경 사진. 오른쪽이 오월번 선교사, 왼쪽이 소텔 선교사이고, 그 옆에 김영옥 조사가 서있다. 김영옥은 1911년 9월, 안동교회 초대 담임목사가 되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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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대 김영길 초대 총장 소천 ... 향년 81세한동대 초대 총장을 지낸 김영길전 총장이 향년 81세로 별세했다. 한동대에 따르면 김영길 전 총장은 지난 6월 30일 새벽 3시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소천했다. 김 전 총장은 지난 5월부터 숙환으로 서울 아산의료원과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왔다. 경북 안동 출신의 김 전 총장은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미주리주립대학교에서 금속공학석사, 렌셀러폴리테크닉대학교에서 재료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 전 총장은 온누리교회 장로와 한동대 초대 총장(1995~2014)을 역임하고, 2016년 6월부터는 한동대 명예총장을 맡아 학교 발전에 매진해왔다. 김 전 총장은 대표적인 크리스천 과학자로, 미국 NASA 발명상을 2회 수상했다. 국내에서는 국민훈장 동백장, 세종문화상, 올해의 과학자상, 한국기독교 선교대상 교육자부문, 한국기독교 학술상도 받았다. 한동대 초대 총장에 취임한 이후에는 혁신적인 커리큘럼과 기독교 정신 기반의 인성교육으로 대표되는 교육실험을 통해, ‘교육중심대학’이라는 새로운 교육모델을 제시했다. ‘공부해서 남 주자’ ‘Why not Change the world?’ 등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좌우명으로 한동대를 단기간에 신흥 명문사학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유가족에 따르면 김 전 총장은 “나는 죽어도 삽니다. 죽음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기쁨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윤형구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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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이희호 여사 향년 97세로 별세“사랑과 화합”, “평화통일” 유언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창천감리교회 장로,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가 지난 6월 10일 향년 97세로 별세했다. 이희호 여사는 “우리 국민들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해서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바란다.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국민을 위해,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유언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이희호 여사는 이화여고, 이화여전,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한 후, 귀국해서는 YWCA 초대 총무를 맡는 등 여성인권 향상에 앞장선 인물이다. 또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결혼하면서 야당 정치가의 아내로, 정치적 동지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해왔다. 지난 14일 치러진 창천감리교회 장례예배에서 이낙연 국무총리는 “우리는 한 시대와 이별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례는 ‘여성지도자 영부인 이희호 여사 사회장(社會葬)’으로 엄숙히 치러졌고,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 곁에 안장됐다. 윤형구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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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동안 한 교회를 섬긴 여성지도자 김점향 권사(2)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점향 권사(1907~1998) 4. 여자성경학교에서 공부한 교회의 재원(才媛) 1908년 안동선교부가 세워진 후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성경공부 열풍이 불었다. 안동선교 초기인 1910년 선교사들의 보고에 의하면 영주 내매에서 개설되었던 6일간의 성경공부 모임에 무려 270여 명의 남자들이 참여했다. 또한 이듬해인 1911년에는 더욱 빈번한 성경공부 모임이 있어, 8차례에 걸쳐 1,340명이 성경공부 모임에 참여했다. 이것을 본 선교사들은 앞으로 지역교회를 지도해 갈 지도자를 양육할 목적으로 1912년 여자성경학원을 세웠다. 여자성경학원은 선교사 사택을 이용했다. 여성성경공부반은 일주일에 두 번씩 오월번 선교사 사택에서 모여 새디 선교사가 월요일에는 젊은여성반, 목요일에는 중년여성반을 인도하였다. 특히 1914년 안동선교부에 부임한 인노절 선교사는 보다 체계적이고 확대된 성경학교 운영을 위해 1920년 4월 여자성경학교를 남녀성경학교로 확대개편 하였다. 이때 인노절 선교사는 성경학교의 교장, 권찬영 선교사와 안대선 선교사는 교사였다. 개교 첫해인 1920년 가을, 비록 독립된 학교 건물은 없었지만, 무려 130명이 등록했으며 성소병원 진료실에서 수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성경 외에 위생, 산수, 한문, 음악, 개인전도법도 가르쳤다. ▲1920년 4월 10일 개원한 안동남녀성경학교 학생 중 1926년 촬영한 여자성경반 학생들 사진.(오른쪽 남성은 당시 안동교회 4대 담임인 박상동 목사) 배경 건물은 1925년 준공한 인노절기념성경학교로 후에 경안신학원으로 개칭하여 수많은 교역자와 장로, 권사 등 평신도를 배출했다. 김점향은 1920년 중반 여자성경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수학했다. 아마 성경학교의 졸업은 그로 하여금 보다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했을 것이다. 그는 20대 초반 이미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 젊은 여성의 중심인물이었다. 그 결과 1932년부터 1956년까지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의 서기였다. 무려 24년 동안 서기로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가 여자성경학교에서 체계적으로 성경과 기초적인 신학, 그리고 교회 등에 관해 공부했기 때문일 것이다. 5. 성전건축을 위해 쌀 한가마를 헌금한 가정 지금도 예배를 드리고 있는 안동교회 예배당을 돌집 예배당이라고 부른다. 이유는 화강암을 쌓아 건축되었기 때문이다. 안동교회 예배당은 1936년 봄에 기공하여 1937년 4월 6일에 기초면적 160평의 2층 건물이 준공되었다. 예배당 건축계획은 안동교회 4대 담임인 박상동 목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기성회를 조직하고 1926년 9월 19일 첫 번째 회의를 했다. 하지만 박 목사는 교회를 사임하고 새로운 임지인 일본 오사카로 떠나게 됐다. 따라서 돌집 예배당은 후임인 5대 임학수 목사로부터 본격화되었다. 또한, 경안노회는 1933년 2월 경안노회의 중심교회인 안동교회 본당 신축에 모든 교회가 힘써 헌금할 것을 결정함으로써 돌집 예배당 신축은 안동교회 성도 뿐 아니라 노회 경내 교회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졌다. 안동교회 석조 예배당의 설계는 권찬영 선교사의 의뢰를 받아 당시 일본에 와 있던 미국인 선교사인 보리스였고, 시공은 당시 최고의 건축회사인 서울 복음건축장을 운영하고 있던 중국인 왕공온(王公溫)이었다. 임학수 목사는 예배당 신축을 위해 선교사들을 꾸준히 설득했으며, 노회 경내의 여러 교회를 순방하면서 경안노회 중심인 안동교회 예배당 신축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건축모금도 계속했다. 또한, 예배당 건축에는 어린이·어른·남녀 구분 없이 온 성도들이 마음과 뜻을 다했다. ▲역사적인 안동교회 2층 석조예배당은 교인과 지역교회, 안동주재 선교사, 타지역선교부, 안동성소병원 의사들, 뜻있는 사람들의 합력으로 완성되었으며, 오늘까지 경북북부지역 교회 부흥의 센터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하고 있다. 이때 김점향의 가족도 동참했다. 당시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온 성도들이 힘을 모을 때 김점향의 남편인 강신효는 적극적으로 참여 의사를 밝혔다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굶더라도 교회 짓는 데 최선을 다해 헌금해야 한다.” 김점향 가정은 당시에 큰 금액인 쌀 한 가마를 건축헌금으로 했다고 한다. 또한 십 년 전 90을 넘긴 한 장로님은 예배당이 건축될 때 자신이 어렸지만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예배당 건축에 사용된 돌 2개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말씀하신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안동교회 온 성도들은 교회를 건축하는 데 한마음이 되어 낙동강에서 모래를 파오는 사람도 있었고, 돌을 지고 옮기는 사람도 있었다. 6. 안동교회 첫 권사 3인 중 한 명 1746년 존 웨슬리는 ‘권고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 권사(勸師)라는 직분을 만들었다. 권사는 목회자를 돕기 위하여 전도와 봉사, 심방, 그리고 권면 등을 위하여 선출되었다. 이 권사 직분은 미국 감리교회를 통해서 한국의 감리교회, 그리고 장로교회에서 사용되었다. 한국에서는 1955년 제40회 예수교장로교총회에서 봉사를 잘 감당하는 여성의 직분으로 권사를 주기 시작했다. ▲1985년에 있었던 기관별 경창대회에 참석한 여전도회 회원의 모습.(오른쪽 끝이 김점향 권사, 오른쪽에서 4번째가 송점출 권사) 1968년 첫 권사로 임직한 3명의 권사 중 김일애 권사는 1972년에 별세하여 이 사진에서 그 얼굴을 볼 수 없다. 비록 1955년 장로교단에서 권사가 시작되었지만, 안동교회의 첫 권사는 13년이 지난 후 1968년 8월 3일에 배출되었다. 이때 취임한 권사는 3명이었으며, 송점출, 김일애, 김점향 권사이다. 이들은 이미 안동교회와 경안노회를 위해 충성을 다해 헌신해온 전설적인 여성들이었다. 이들의 권사 취임으로 안동교회는 항존직에도 여성이 포함되는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었다. 첫 권사로 취임한 3명의 권사 중에서 김일애 권사는 1972년 1월 16일 별세함으로, 송점출 권사는 1975년 3월 30일 정년으로 은퇴했다. 그리고 김점향 권사는 1978년 정년으로 은퇴했다. 1969년 11월 20일 경안노회 선교 60주년 기념식이 안동교회에서 있었다. 이때 경안노회 경내에 14명의 60년 이상 계속 믿음을 지킨 성도가 있었는데, 이 중에 김점향 권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안동교회에서 첫 권사가 취임 이후 두 번째 권사 취임은 1년 반이 지난 1971년 역시 3명의 권사가 취임했을 정도로 권사 취임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다. 설립된 지 70년이 되는 1970년대까지 안동교회에서 취임한 권사의 총수가 11명밖에 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김점향의 초대 권사 취임은 그만큼 상징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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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애국자·인간 박상동 목사(5‧끝)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박상동 목사 (朴尙東, 1894~1949) 4) 나고야 동부교회 사역 ① 전도사역 개척정신이 누구보다 강했던 박상동 목사는 1938년 5월 29일 나고야교회를 사임하고 나고야교회가 분립한 나고야 동부교회로 이임하였다. 동부교회에 부임한 박상동 목사는 끊이지 않는 전도의 열정을 가지고 나고야교회의 추인봉 목사와 서부교회의 김은석 목사와 함께 연합하여 나고야 지방의 전도에 진력하였다. 그 결과 나고야교회 70년사에 따르면 나고야 동부교회는 등록교인 75명, 주일아침예배 출석 65명, 저녁예배 출석 38명, 금요기도회 36명, 헌금총액은 2,908엔(円)의 교세를 보였다. 이처럼 나고야 동부교회가 순조롭게 부흥하고 있을 때 일본제국주의의 핍박의 손길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② 일제의 탄압과 투옥1940년 4월 실시된 종교단체법의 실시로 교회에 대한 탄압은 점점 심해져 갔다. 일제는 복음의 기수인 교포교회를 민족주의 온상지로 생각했기 때문에 탄압의 강도는 점점 심해졌다. 1941년 12월 일제는 나고야 지방 교포교회의 지도자 11명을 검속하였는데, 이때 박상동, 추인봉, 김은석 목사도 포함되었다가 1943년 1월 26일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박상동 목사는 석방되어 후협(厚狹)교회에 부임했지만 거기서도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명으로 체포되어 옥중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5) 해방 후 사역 ① 대구중학교 영어교사해방을 맞아 1945년 10월 귀국한 박상동 목사는 미군정시대 통역을 하다가 당시 신우식 목사가 교장으로 있던 대구중학교에서 영어교사 생활을 하였다. 교사생활을 하면서도 반야월 교회를 섬겼는데, 콜레라(호열자)가 발생하여 거주하고 있던 대구 시내 중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한다. 대구중학교로 출근하기 위해서는 거주하던 대구 칠성시장 바깥으로 나가야 했지만 갈 수 없어 결국 박상동 목사는 교사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이 없었다면 아마 박상동 목사는 전임목회를 위해 교회로 돌아오는 시간이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고국에서 목회자로서의 사명을 마지막 순간까지 감당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남산교회 70년사에 의하면 박 목사는 강직한 성품과 인자한 성품으로 목양한 것으로 기록한다. “강직한 성품과 사리판단에 분명하지만 인자하고 겸손한 면이 특히 박상동 목사의 특징이다. 박 목사께서는 부임 후 지키며 가꾸어 나갈 여러분의 일꾼을 선발하여 일을 맡겼으며, 그의 심금을 울리는 설교와 생활에서 오는 단정하고 기품 있는 인격에다가 전도활동에 대한 열의로 전도목사제도까지 도입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오늘날까지도 그의 삶과 인생과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두고두고 기억하면서 그리워하는 성도들이 있음을 생각할 때 비록 그의 목회 기간이 짧은 기간이고 그의 활동영역이 제한되었지만, 성도들에게 남긴 애국자 박상동, 목사 박상동, 인간 박상동의 봉사 정신은 지금까지도 남산 가족의 가슴과 가슴으로 뜨겁게 전달되는 것이다.” ② 남산교회 사역남산교회에 부임한 후에도 박상동 목사의 영혼 사랑은 계속되었다. 박상동 목사는 부임 후 중단 없는 전도의 열정을 가지고 전도목사제도를 도입하여 지역 복음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특히 1948년 3월 6일 전도목사로 부임한 이명석 목사가 대봉기도실을 시작하였고, 그해 9월 12일 분교식을 거행했다가 11월 14일 대봉교회로 완전히 분립되었다. 남산교회를 섬길 때 일본에서 선교사들이 와서 다시 일본에 가서 함께 동포교회를 섬기자고 요청했을 때 남산교회에서 위임받은 목사인데 돌아갈 수 없다고 거절함으로써 투철한 소명감을 보여주었다. 6) 박상동 목사의 별세 박상동 목사의 3녀(女)인 박은수 사모에 따르면 목회 말년 박상동 목사는 직장암으로 고생했다. 처음에는 병명(病名)이 무엇인지를 몰랐다고 한다. 당시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경북대병원 고병관 박사에 의해 직장암으로 밝혀졌고, 수술을 거부하던 박상동 목사를 설득하여 3월말 입원하였고 결국 수술을 받게 되었다. 첫 수술은 약 4시간 30분 걸렸고, 이때 경북대학교 학생들이 수혈했다고 한다. 상태가 좋지 않아 병원에서 다시 수술을 권유했다. 박 목사는 거부 의사를 밝혔지만 결국 2차 수술을 마치고 난 며칠 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직장암으로 밝혀졌을 때 교회를 사임할 의사를 표했지만, 교회는 만류했고, 참을 수 없는 통증 속에서도 말씀을 선포하는 주의 종의 사명에 충성을 다하며 매 주일 어김없이 강단을 지키다가 1949년 5월 4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결론 박상동 목사는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는 주의 충성스러운 종(從)이었다. 그는 고단한 영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치 않고 달려갔다. 그의 투철한 소명의식은 구령(救靈)의 열정이 식은 오늘의 목사들을 부끄럽게 한다. 박상동 목사는 암으로 투병하면서도 자신의 몸을 돌보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붙잡고 강단을 지킨 주의 종이었다. 그의 사명감은 순간순간 사명감을 잃고 일신(一身)의 안락을 추구하는 오늘의 목사들이 얼굴을 들지 못하게 한다. 박상동 목사는 일본에서 두 차례, 한국에서 두 차례의 목회를 통해 하나님의 의(義)를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사역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이런 그의 삶은 목사가 걸어가야 할 표상(表象)과도 같았다. 그는 목사가 어떻게 교회를 섬겨야 하고 성도들 위해 봉사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박상동 목사는 국가와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였다. 그래서 그는 한국에서 한 차례, 일본에서 두 차례 투옥되는 고초를 당했다. 그는 이러한 삶을 통해 목사가 어떻게 국가와 민족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박상동 목사는 비록 강직한 성품을 갖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자상하고 인자함을 소유한 아버지였다. 삶 속에서 보여준 아버지의 사랑과 애정을 9남매 자녀들은 가슴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 이것은 가정의 위기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오늘날 목사들의 가정에 치유의 메시지가 된다. 이런 박상동 목사님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다. 다만 필자의 능력 부족으로 박상동 목사님이 품고 있던 하나님 사랑과 민족 사랑에 관한 그의 생각과 그의 의도, 그리고 그의 비전을 다 그려내지 못함에 아쉬움이 남을 뿐이다. 후일 이 소고가 박상동 목사님의 일생을 보다 완전하게 조명(照明)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뿐이다. ▲박상동 목사는 해방 후 귀국하여 대구남산교회에서 남은 목회 열정을 쏟았다. 박 목사는 마지막 투병 몇개월 동안에도 매 주일 간단을 지키다가 1949년 5월 4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사진은 1930년 대구남산교회 전경.)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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