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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국민대회’ 이승만 광장에서 열린다!전광훈 목사, 시국 긴박성 강조하며 5,200만 전국민 참여 호소 문재인 대통령 탄핵을 모토로 내건 ‘8.15 국민대회’가 오는 8월 15일(토) 낮 12시 서울 광화문 이승만광장에서 개최된다. 이 대회를 앞두고 그동안 문재인하야범국민투쟁본부(범투본) 대표로서 광화문과 청와대 앞에서 반정부 시위를 주도해 왔던 전광훈 목사가 호소문을 발표하는 등, 적극 홍보와 독려에 나서고 있다. 이번 대회는 8월 15일 오후 12시부터 ‘청년 학생의 시간’을 시작으로, ‘여성의 시간’, ‘시민단체의 시간’, ‘한국교회의 시간’이 각각 30분씩 주어진다. 이어 2시부터 3시까지는 본 대회, 3시부터는 각 단체별 자유 행진이 진행될 예정이다. 전 목사는 최근 특별 호소문을 통해 “문재인 정부는 하나부터 열까지 대한민국을 해체하는 일에만 전력을 다하고 있다”며, “이제 온 국민은 대한민국을 해체하고 북한으로 가는 것을 선택하든지, 아니면 간첩들과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을 청소하고 다시 한 번 대한민국을 재정돈하여 제2의 건국을 이루어낼 것인지 마지막 선택을 해야 한다. 8월 15일 모든 국민이 광화문 이승만 광장으로 뛰어나오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전광훈 목사의 호소문 전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했던 대로 대한민국이 해체되기 직전에 왔습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터지고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탄이 터졌을 때, 우리 한반도는 두 가지의 선택을 강요받았습니다. 바로 이승만을 선택할 것인가, 김일성을 선택할 것인가 입니다. 여기서 북한은 김일성을 선택했고, 남한은 이승만을 선택하므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한미동맹, 기독교 입국론의 4대 기둥으로 건국되어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영광스러운 대한민국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 당시 극렬히 저항했던 남로당의 찌꺼기와 북한에서 내려온 주사파들이 연합하여 70년 동안 대한민국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공작해왔고, 그 결과 청와대와 대한민국의 각계각층을 완전점령하여 이제 낮은 단계의 연방제 개헌을 통하여 북한으로 가려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표를 완수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대한민국을 방해해왔습니다. 대한민국의 건국 선거인 1948년 50선거를 방해하기 위하여 대구에 2.7폭동, 영천폭동, 구미폭동, 제주도 4.3폭동을 일으켰으며, 무엇보다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강행하여 대한민국을 적화하려 했고, 김신조 특수부대를 청와대에 침투시키는가 하면, 학교를 비롯한 각계각층에 간첩들을 투입하여 대한민국을 혼란케 해왔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연설할 때마다 48년 8월 15일에 선포된 대한민국 건국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해왔고, 동계 올림픽에서 간첩 신영복을 존경한다는 말을 했으며, 2019년 평양 연설에서 자신을 가리켜 남쪽 정부 대표로 왔다고 말함으로써 대한민국이 아직 건국되지 않은 나라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등 문재인 대통령 스스로 대한민국 대통령임을 포기했습니다. 근래에 일어난 여러 가지 부동산 문제, 경제파탄, 종전 협정, 북한 및 미국과의 관계도, 결국은 그들이 마지막 일을 만들기 위한 공작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금주에 일어난 물난리 사태도 이명박 대통령이 4대강을 통하여 4대강 보를 완성했기 때문에 대홍수를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4대강 보를 해체하려고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원자력 발전을 파괴하고 태양열 발전을 한다며 산의 산림들을 베어내고, 중국제 태양열 전기판을 설치함으로 금번 폭우사태를 통하여 산사태를 일으키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명박의 4대 강보는 절반이 완성된 상태이며, 4대강의 지천을 새로 정돈하지 아니하면 앞으로도 지역적인 홍수는 막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부터 끝까지 문재인 정부는 대한민국을 해체하는 일에만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마지막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대한민국을 해체하고 북한으로 가는 것을 선택하든지, 아니면 간첩들과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을 청소하고 다시 한 번 대한민국을 재정돈하여 제2의 건국을 이루어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8.15일 광화문 이승만광장에 모든 국민들이 다 뛰어나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해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미친 자에게 운전대를 맡길 수 없기 때문에 국민 여러분들은 8월 15일 이승만광장으로 전력 달려 나와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이 메시지를 수신하는 분들은 오늘부터 열 명 이상에게 본질을 전파하여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봅시다. 지키지 못한 자는 누릴 수 없습니다. 국민혁명의장 전광훈 목사 드림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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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애굽기(15)나의 출애굽기(15) 드보라 40. 조국(북한)에 대한 배신감이 들다. 식사를 하고 2~3시간 정도 흘렀을까…. 뱃속이 엉망이 되었다. 계속 화장실에서 설사했다. 눈앞이 흐려지고 의식을 붙잡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도 먹어야 하니 식사시간에 나오는 국물을 계속 먹었다. 그렇게 먹고 설사를 하기를 3일 정도 지나니 항문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 날도 설사가 나서 화장실에 갔는데 너무 어지러운 나머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겨우 눈을 떴더니 사람들이 “이년이 아직 안 죽었다…” 하고 수군거렸다. 알고 보니 화장실에서 쓰러진 나를 사람들이 발견하고 끌고 왔지만 온종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간수는 내가 깨어난 것을 보더니 “이 간나 뒤지지 않고 살았네. 명도 길다.” 하고는 별일 없었다는 듯이 지나쳤다. 간신히 깨어난 나는 내 처지를 곰곰이 생각했다. 너무나 억울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체포와 북송, 조사와 고문을 겪으며 정신이 없었는데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니 너무 섭섭했다. 사람이 죽을 지경인데 아무런 약도 쓰지 않고 방치했을 뿐 아니라 깨어난 사람에게 명이 길다며 조롱하며 지나가는 간부의 모습에서 조국이 나를 심하게 천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깨달아졌다. 비록 탈북은 했지만 내가 조국이 싫어서 강을 건넜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중국 시골 깡촌에 있었지만, 사람들이 북한의 실정을 지적하고 김정일을 욕할 때 앞장서서 김정일 장군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위해 애쓰시는지 아느냐며 변호했고, 어머니 조국을 그리워했다. 그런데 그렇게 내가 악을 쓰며 변호했던 조국은 내가 죽어갈 때 돌보는 시늉도 하지 않았고 약 한 주먹 주지 않았다. 원래 배신감이 더 억울하게 다가오는 것일까? 서러움과 억울함이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올랐다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내가 어떻게든 살아야겠다. 살아서 이 나라를 고발해야겠다.’ 라는 생각이 뼛속까지 사무쳤다. 41. 감옥 탈출을 결심하다. 두려움에 떨다가 갑자기 분노와 고발의 의지가 생기자 이상하게 담대해졌다.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탈출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 당시 중국에서 공안들의 추적에 걸려 집에서 잡혀 온 탈북 여자는 보통 노동단련대 형을 받았지만, 한국행을 하다가 걸리면 예외 없이 교화소행이었다. 기간도 최소 4년 이상이었다. 열악한 감옥의 위생과 식사, 심한 강제 노동, 악화된 건강상태 등을 생각할 때 4년 징역은 거의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한국행을 하다가 붙잡힌 나는 당연히 교화소행일 것이고, 이 몸 상태로 교화소에 가면 죽음이 가깝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했다. 살려면 도망쳐야 했다. 어떻게 도망칠 수 있을까? 그 죽음의 장소에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있었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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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9·끝)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9·끝) 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임학수 목사(林鶴洙, 1884-1969) 목차 서론 1. 임학수, 믿음의 조상이 되다 …………………………… 16. 지역의 중심(中心) 교회를 섬기다 17.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지 않다 18. 최고의 한학자(漢學者)가 되다 19. 은퇴 후에도 목회를 계속하다 20. 후학을 위해 매진하다 결론 결론 임학수 목사는 1884년 안동 녹전면 매정리에서 출생했다. 한학에 능했던 임학수는 20세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리로 등용되었지만, 관직을 포기하고 후학을 기르기 위해 낙향하여 있다가 1909년 장터에서 노방 전도하는 선교사의 복음을 듣고 회심하였다. 그 결과 그는 한 가정, 심지어 매정이라는 한 마을의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임학수는 그 자리에서 상투를 자르고 예수님을 영접한 결단력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기독교에 입문한 임학수는 녹전에서 20리 떨어진 영주 내매교회에 다니다가 고향인 매정교회를 개척했다. 그 후 권찬영 선교사의 서기가 되었고, 권 선교사의 조사(助事)로 아곡교회, 원림교회, 예천군 섭밧교회, 장사리, 국곡, 덕봉, 아탑실, 수동, 하화교회 등에서 충성스럽게 하나님의 집을 섬겼다. 38세인 1921년 평양신학교 입학하여 1925년 제18회로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안동교회를 시무할 때 임학수 목사는 주일학교에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소년·소녀부를 공식적으로 출범시켰다. 임학수 목사는 모든 일을 성경과 교회 규칙에서 어긋나지 않도록 합당하게 적용하여 처리했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유연하게 사역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목회자였다. 그가 시무할 때 안동교회는 공식적으로 신학교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게 된다. 이 장학금은 안동교회가 지출한 최초의 장학금이다. 더욱이 임 목사는 환등사진을 통한 혁신적인 전도와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노방전도를 통해 지역을 복음화하는 일에 앞장섰다. 또 사경회를 중심으로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일에 집중함으로써 안동교회와 지역 교회를 말씀에 기초한 든든한 교회를 이루어 나갈 수 있었다. 임 목사는 열심히 기도하는 주의 종이었다. 특별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온 교회가 함께 기도시간을 가질 정도로 기도사역에 집중했다. 임학수 목사는 교인들이 안동 읍내 전역에 퍼져 있음을 감안하여 교인들의 편의와 지역 전도를 생각하며 안동교회를 중심으로 동·서편에 새로운 교회를 설립할 의지를 갖고 안기교회(현 안동서부교회)와 신세교회(현 안동동부교회)를 분립함으로써 안동의 복음화를 앞당겼다. 또한, 임 목사는 성탄헌금의 1/2은 노회로 보내 노회 경내의 가난한 교회를 위해 사용하고, 나머지 1/2은 교회 내의 가난한 성도들을 구제하는 일에 사용하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1934년 7월 안동이 대수해로 큰 피해를 당했을 때 신속하게 수해연보를 하고, 그것을 노회로 보내 수해를 당한 교회를 도왔다. 임 목사는 전형적인 부흥강사는 아니었지만 인기 있는 성경사경회 강사였다. 그의 설교는 성령 충만했다. 언변도 뛰어났지만 그의 설교에 인품이 묻어났기 때문에 회중들은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웃고, 눈물을 흘렸다. 또한, 임 목사는 자신의 장점인 한학을 목회 현장에 도입하여 성도들을 위로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히 세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목회의 도구로 사용하였다. 현재 안동교회의 돌집예배당은 임학수 목사가 안동교회에 시무하실 때인 1936년 초여름에 착공하여 이듬해인 1937년 4월에 준공되었다. 건축을 위해 임 목사는 사재(私財)를 하나님께 드리는 솔선수범을 보였다. 성도들도 어려운 살림살이 속에서 정성스럽게 건축헌금을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다른 교회들과 선교사, 선교부도 건축에 협력했다. 교회를 건축하는데 무려 8,000여 개의 화강암이 사용되었다. 착공한 지 330여 일이 지나, 웅장하고 신비스러운 돌집예배당이 마침내 준공되었다. 임 목사는 경북 북부지역에서 풍요로운 영적 자산을 간직하게 될 안동교회 석조 예배당 건축을 시작하고 완성한 리더였다. 임학수 목사는 경안노회 경내의 중심교회를 섬기며, 교회들이 본연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교회들을 든든히 세웠다. 안동의 안동교회, 영양의 영양읍교회, 풍기의 풍기교회, 예천의 예천교회와 상락교회 등이다. 임 목사는 작은 교회도 최선을 다해 섬겨 사명을 감당했다. 목사 임직 후 하화·옹천·지곡·연당·매정·안흥·녹내·방하교회 등을 섬겼다. 은퇴 후에도 당시 목회자가 없는 교회인 용상교회, 문수교회, 태화교회, 예천교회 등을 돌보았다. 일제 말엽 경안노회장이었던 임 목사가 일제의 정책에 협력한 것은 분명한 오점이지만, 당시 노회장으로서 교회를 지키고 보호하려 했던 노력은 뒤늦게라도 올바른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이 마땅하다. 한학자인 임 목사가 남긴 흔적은 오늘까지도 강하게 남아있다. 경안성서학원, 경안학원, 도원교회, 영광학원 등의 이름이 바로 임 목사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또한, 임 목사의 신앙은 무척 포용적이었다. 6·25 전쟁으로 먹을 것이 없던 1950년대, 열린 집 대문으로 탁발 승려가 들어와 시주하라는 말에 승려를 보지 않고 굶주리고 있는 한 사람을 먼저 보고 그에게 시주할 정도로 폭넓고 열린 신학을 갖고 있었다. 또 임 목사는 가정에서도 믿음의 삶을 살았다. 그는 날마다 새벽에 가정예배를 드림으로써 후손들에게 믿음을 유산으로 남기는 데 최선을 다했다. 특히, 임학수 목사는 은퇴한 후 쉬지 않고 후학을 위해 경안고등성경학교(현 경안신학원)에서 성경과 한문을 가르친 교육자였다. 안동에서 출생한 임학수 목사는 안동에서 예수를 영접하고, 경안노회 경내의 교회를 섬기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안동 땅을 사랑했고, 안동에 살고 있는 영혼을 사랑했으며, 안동의 교회들을 사랑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무엇보다 귀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한눈팔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걸었다. 임학수 목사의 올곧은 신앙과 신실한 삶은 오늘의 교역자들과 성도들에게 거룩한 떨림과 울림을 동시에 준다. 오늘의 교회는 임학수 목사가 남긴 거룩한 흔적을 기억하며 새로운 비전과 도전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이 시대가 요구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거룩한 사역을 용기 있게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안동교회 100주년기념예배에 참석한 故 임학수 목사의 가족과 금승학 목사(뒷줄 왼쪽 세번째).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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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여름 주바라기 온라인 선교비전캠프 무료로 연다”1차, 8월 8일(토) 오후3시 / 2차, 8월 15일(토) 오후3시 주바라기 유튜브 채널 통해 실시간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2020년 여름 주바라기 온라인 선교비전캠프가 오는 8월 8일과 15일, 2차에 걸쳐 무료로 개최된다. 하재호 목사(주바라기선교회 대표)는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교회들을 다시 세우는 기회로 삼기 위해 이번 캠프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올해는 연초부터 시작된 코로나19로 인해 각 교회에서의 대중집회 환경이 조성되지 않아 대부분 행사 및 교회수련회가 취소됐으며, 교회들은 다음세대 교육의 방향에 대한 대안을 찾지 못해 고민하는 실정이다. 하재호 목사는 “선교회에 전국 각지 교회에서 캠프에 대한 문의가 빗발치지만 정상적인 캠프를 진행하지 못해 안타깝다”며, “매년 동절기 캠프에 7천여 명, 하계 캠프에 1만여 명의 청소년과 교사들이 참석하는 집회의 맥이 끊겨 많은 교회들과 함께 고민이 깊었다”고 설명했다. 이에 하 목사는 “그동안 매년 주바라기선교비전캠프를 찾아줬던 교회들을 생각하면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며 “어려운 때일수록 다음세대를 위한 사역의 끈을 늦출 수 없어 올 여름 선교비전캠프를 ‘온라인캠프’로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주바라기선교회가 주최하는 ‘주바라기 선교비전캠프’는 매년 400~500여 교회에서 약 1만여 명의 청소년과 청년들이 참여해 헌신을 다짐하는 전문적인 청소년 캠프로 알려져 있다.(캠프 문의:042-631-2000) 이예진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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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장신대, 98년 역사 첫 내국인 여성 총장한일장신대 제7대 총장에 채은하 교수(63·사진)가 선출됐다. 학교법인 한일신학은 지난 8일 이사회를 열고 신학과 채은하 교수를 차기총장으로 최종 결정했다. 채 교수는 “지체장애가 있는 키 작은 총장이자 낮은 사람으로서 대학 2세기를 향해 정직하고 겸손한 여성 리더십으로 헌신하겠다”면서, “서서평 선교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섬김과 돌봄의 하나님의 대학으로 만들고, 교회와 세상에 희망을 만드는 일꾼들을 양성하겠다”고 밝혔다. 채 교수는 장신대 기독교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장신대 신대원과 호주 멜본신학대에서 석사학위, 장신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예장통합 전주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온양농아교회를 개척했고, 전주 효자동교회 협동목사로 봉직하고 있다. 한일장신대는 1922년 미국남장로교 선교부에서 파송한 서서평 여성 선교사가 전도부인 양성학교로 시작했다. 채은하 교수가 취임하면 98년 대학 역사상 초기 외국 여성 선교사 교장들을 제외하고 내국인 첫 여성총장이 된다. 취임식은 11월에 열릴 예정이다. 이예진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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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COVID19) 봉쇄 중의 동남아 박해지역 오픈도어 사역국가들의 봉쇄와 이동제한으로 인해 오픈도어와 현지파트너들은 박해받는 성도들에게 구호품을 지원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집중하게 되었다. 많은 성도가 일을 할 수 없게 되면서 가족의 일용할 양식조차 없는 상황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크리스천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국가의 공적지원에서 차별을 당한다. 이들은 동료 크리스천들의 도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아시아지역에서 오픈도어는, 구호품 지원 및 온라인 프로그램과 함께, 사역의 첫 번째 우선순위를 ‘격려하고 용기를 주는 것’에 두고 있다. 가능한 모든 수단-인터넷, 전화, 개인방문-을 동원하여, 박해받는 형제자매들에게 이러한 위기 속에도 전 세계 교회의 한 가족이 그들 곁에 있음을 보여주기 원하고 있다. 어떤 물품들이 전달되고 있나? 인도와 네팔에서 배포한 긴급구호 물품에는, 밀가루, 쌀, 콩, 차, 식용유, 카레가루, 설탕, 소금, 성냥, 말린 고추, 간식, 비누, 마스크, 소독제가 포함된다. 가정마다 3~5주간 먹을 수 있는 분량의 식량이 전달되고 있다. 동남아시아지역 방글라데시, 말레이시아, 스리랑카, 인도네시아와 남부 필리핀에서 배포한 식량은 쌀, 밀가루, 인스턴트 국수, 달(녹두와 비슷한 작은콩), 감자, 식용유, 소금, 설탕, 간장, 차, 식품 쿠폰 등이다. 각 가정엔 2~4주간 먹을 수 있는 분량이 전달되고 있다. 긴급 구호 수혜자들의 이야기 •시골 주부 사이샤 :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우리는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요. 나는 ‘하나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홀로 버려두지 않으셨지요, 그들을 굶주리게 하지 않으시고, 먹을 것과 마실 물을 주셨지요…. 그와 같이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주시고, 우리를 구해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내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형제님(오픈도어 현지 파트너)을 통해 다 공급해 주셨어요. 후원자님들, 선교회, 이 모든 물품을 사오느라 수고하신 형제님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 이 선교회 사역을 축복하옵소서!” 오픈도어 코로나 긴급 구호 사역은? 오픈도어는 5월 초까지 현지 파트너들을 통해 아시아 박해지역에서 총 20,000명의 크리스천들을 지원하고 추가로 50,000명을 더 지원할 계획이다. 구호물품 패키지는 약 25달러 상당이고 이는 5명 한 가족의 1개월 생존을 도울 수 있다. 코로나 후원계좌 : SC제일은행 221-10-011008(한국오픈도어선교회) (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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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애굽기(14)나의 출애굽기(14) 드보라 38. 1주일 만에 북송 … 고문과 구타를 당하다. 나는 1주일 만에 북송을 당했다. 다리 건너 북한 땅으로 오자마자 공기가 달라졌다. 보위부 요원들은 우리에게 쌍욕을 하면서 혹시 중국에서 숨겨온 돈이 있으면 지금 바치면 40%는 국가에 바치고 60%는 다시 돌려주겠다고 하며 돈 숨긴 것을 내놓으라고 했다. 물론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개중에 몇 명이 돈을 바치기도 했지만 약속대로 돈을 돌려받은 사람은 없었다. 이어서 신체검사를 빙자한 고문이 시작되었다. 보위부원의 지시를 따라 모든 사람이 옷을 벗어야 했다. 옷을 다 벗자 이번에는 반복해서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고문을 시켰다. 소위 펌프 고문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나는 집에서 가져온 돈을 자궁 안에 감춰 놓았었다. 혹시나 그 돈이 빠질까 조마조마해가며 앉았다 일어났다를 하기 시작했다. 보위부원은 300번 앉았다 일어났다를 시켰다. 조심한다고 했지만, 보위부원의 ‘똑바로 하라’는 호통 소리에다가 붙잡힌 이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허약한 상태였던 지라 곧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돈이 빠지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했지만 한 50번쯤 했을까…. 아니나다를까 자궁 안에 숨긴 돈이 뚝 떨어지고 말았다. 급한 마음에 아직 간부가 못 봤을 때 다시 숨기려고 손으로 돈을 집으려고 했지만, 간부의 발길질이 먼저 날아왔다. “이 간나 XX, 이 더러운 돈 좀 보라우, 어딜 속이고 돈을 숨기고 있는 기야!” 결국, 나는 돈을 다 뺏기고 심하게 두드려 맞았다. 때리는 매도 아팠지만, 그보다 먼저 “내 생명줄이 끊어졌구나…”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39. 열악한 환경의 보위부 감옥 생활. 보위부 감옥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 땀내, 화장실 냄새가 진동하였다. 잘 때 다리를 쭉 뻗고 잘 수 없어서 다리 위에 다리가 겹쳐서 누웠다. 식사시간이 되니까 밥을 주는데 밥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물건이었다. 누런 옥수수 국수를 물을 한가득해서 끓인 것인데 국물 색깔만 누런빛이 있었다. 게다가 국에서 썩은 냄새가 났다. 그것을 작은 공기에다가 3-4숟가락 퍼주면 쭉 마시는 것이다. 나는 너무 냄새가 메스꺼워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내가 코를 막고 불편한 속을 붙잡고 있으니까 옆에서 안 먹을 거면 자기 달라고 했다. 그 친구는 내 밥그릇을 받자마자 허겁지겁 그 국물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이렇게 밥을 한 끼 안 먹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너무 배가 고팠다. 별이 머리 주위를 빙빙 도는 것 같았다. 조사를 받고 자백서를 써야 하는데 글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리 냄새가 고약하고 먹을 만한 음식이 아니더라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식사시간이 되었고 이번에는 눈 딱 감고, 코 막고 그 옥수수 국물을 쭉 들이켰다. (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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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부르심(3)브라더 앤드류 오픈도어 설립자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광대하다. 특정한 국가나 집단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만민을 위하여 계획하신다.” 몇 년 전에 목이 아파 허브티를 마신 적이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산이었는데, 차에 달린 손잡이 꼬리표에 짧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앞장서지 않으면 꽁무니만 좇게 된다.” 그리 점잖지 못한 표현일 수는 있지만, 담긴 단순한 진리가 머리를 때렸다. 우리의 영적 부르심에 적용해 보았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우리에게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증거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할 만큼 당시에도 세상은 복음에 적대적이었다.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모두 오늘날 존재하는 폐쇄 국가만큼이나 배타적인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라는 명령을 하셨다. 제자들은 개척자가 되어야 했다. 말하자면 “앞장서서” 가야만 했다. 개척자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아야하며, 계획을 짜야 한다. 만약 우리가 새로운 선교지를 찾지 않는다면, 그리고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마다 안전한 곳을 선호한다면, 우리는 옛 생각의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며 똑같은 일만 똑같은 방식으로 되풀이 하게 될 것이다. 결국 세상에 그리스도 예수를 알리는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기가 요원해진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눈을 들어서 밭을 보아라 이미 곡식이 익어서 거둘 때가 되었다.”(요4:35) 농부가 한 해 전에 신중하게 계획을 세워두지 않으면 결코 가을에 추수할 수가 없다. 농사일은 과학이다. 땅을 일구고 추수하기까지 모든 과정을 염두에 두고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야만 한다. 복음을 전하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눈을 들어서 밭을 보아라! 눈을 들어서 중국을 보아라. 이슬람 세계를 보아라. 쿠바를 보아라.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를 보아라.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 이웃, 학교를 보아라. 모두 무르익어 거둘 때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 복음의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계획이 있어야 한다. 반드시 첫째 단계에 있는 예언적 말씀을 받고 실천에 옮길 계획을 세 워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나는 너희가 수고하지 않은 것을 거두게 하려고 너희를 보냈다.”(요4:38) 우리는 교회에서 씨를 뿌리는 일에만 열심을 내지 추수하라는 말만 나오면 온갖 경건한 어투로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저의 사명은 다른 데 있습니다.” “추수는 성령님의 일이잖아요.” 이러한 와중에도 세상은 그토록 애타게, 그토록 간절히, 다 준비된 상태로 추수를 기다리고 있다! (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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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성령 충만을!진상권 목사 경북하나신문 사목/양무리교회 최근 들어 점점 세계적인 코로나 확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코로나 확진자가 9백만 명을 넘어섰고, 사망자도 50만 명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동안 세계 역사를 볼 때 페스트나 사스 등 각종 전염병이 있었지만, 그것은 국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는 팬더믹, 즉 전 세계가 같이 겪는 대유행병이 되었습니다. 선교지에서도 계엄령, 봉쇄 조치 등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보고가 들려옵니다. 참으로 불안하고 어려운 시기를 우리는 겪어내고 있습니다. 2천 년 전 이스라엘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이스라엘 상황도 그때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웠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언덕에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라고 대답하시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시선은, 우리의 관심은, 우리 마음의 중심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심장에는 여전히 성령의 불이 있는지요. 코로나로 인한 환경이 두렵고 무서운지요. 그러나 코로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고난받으신 주님, 부활하신 주님, 승천하신 주님, 재림하실 주님에 대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정말로 믿어지는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정말로 주님과 깊은 교제와 벗 된 사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500여 명이 현장을 지켜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후 열흘 동안에 380명의 사람들은 다 빠져나가고 마가다락방에는 120명의 성도만 남아서 성령을 사모하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기도하고 성령을 사모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기도가 깊어지는 삶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지금은 마지막 때이고 코로나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지만, 더욱 기도를 절실히 하면서 진정한 예배에 목숨을 거는 그런 알짜배기 교회가 되고 교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의 기름부으심’, 그것은 절대적인 선물입니다. 성령의 임재하심은 충만하심이고, 그것은 권능으로 나타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의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사람은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고 몰아가시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떠밀어 가십니다. 성령의 불이 아니면, 성령의 지혜와 기름부으심이 아니면 어떻게 우리가 이 험한 세상을 이기고 주어진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 때일수록 환경을 보지 마시고 오직 성령의 충만과 기름부으심이 넘치며, 그 성령 충만을 잘 유지하는 개인과 공동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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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8)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8) 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임학수 목사 (林鶴洙, 1884-1969) 목차 서론 1. 임학수, 믿음의 조상이 되다 …………………………… 16. 지역의 중심(中心) 교회를 섬기다 17.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지 않다 18. 최고의 한학자(漢學者)가 되다 19. 은퇴 후에도 목회를 계속하다 20. 후학을 위해 매진하다 결론 20. 후학(後學)을 위해 매진하다 예천교회를 마지막으로 공식적으로 은퇴한 임학수 목사는 안동 지역의 작은 교회들을 섬기고 돌보았을 뿐 아니라 후학을 양성하는 사역에도 매진했다. 그는 은퇴 후에도 수년간 경안신학원 전신인 경안고등성경학교에서 성경과 한문을 가르쳤다. 임학수 목사로부터 여호수아서를 배웠던 경안노회 은퇴목사 권영택 목사는 많은 연구에 기초한 임 목사의 강의는 역사학자처럼 전후 맥락을 잘 연결시켜 여호수아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고 증언한다. 더욱이 임학수 목사가 언제나 제자들에게 존댓말을 썼으며, 제자들을 나무라는 말을 절대로 하지 않았을 정도로 고매한 인격을 갖춘 선비로 권영택 목사는 임 목사를 기억한다. 역시 제자인 장세문 목사는 임 목사가 말년에 한문을 가르쳤는데, 언제나 흐트러짐 없는 정갈한 모습이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77세 할아버지 목사님이 칠판에 반듯반듯 정자체로 한자를 한 자 한 자 쓰실 때엔 양복저고리 왼쪽 어깨가 밑으로 축 처져 있어서 쓰시기를 마친 목사님은 학생들 쪽으로 돌아서시면서 저고리를 바로 입으시곤 하셨다.” 임 목사가 사랑하고 가르친 경안신학원은 1912년 여자성경학원으로부터 시작했다. 선교사들은 앞으로 지역교회를 지도해 갈 여성 지도자를 양육할 목적으로 학교를 세웠던 것이다. 그러다가 1914년 안동선교부에 부임한 인노절 선교사는 보다 체계적이고 확대된 성경학교를 운영하게 되었다. 그 결과 여자성경학교는 1920년 4월 10일 남녀성경학교로 확대개편 되었다. 인노절 선교사가 1922년 별세한 뒤에는 그의 부인 캐더린 선교사의 노력으로 ‘성경학교(Bible Institute)’란 이름으로 새로 건축됐으며, 1925년 새로운 교사와 생활관 건물이 준공된 후에 ‘인노절기념성경학교’로 개명되었다. ▲1922년 인노절 선교사가 하늘나라에 간 후 부인 캐더린 선교사의 모금과 경안노히 교회들이 힘을 합해 1925년 준공한 인노절기념성경학교로 반지하 1층, 지상 1층 건물로 건축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는 강제로 학교가 폐쇄되었지만, 해방 후에 교장인 이원영 목사는 무너진 교회를 위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1946년 9월, ‘경안고등성경학교’란 이름으로 다시 개교했고, 1962년 3월 ‘경안성서학원’으로 개명되었다가 ‘경안신학원’으로 다시 개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2005년 3월 10일 개교한 경북 북부지역 유일한 대학원 대학교인 ‘경안신학대학원대학교’가 개교하게 되었는데, 여자성경학교가 경안신학대학원대학교의 모체가 되었던 것이다. 비록 경안신학원은 안동이라는 소도시에 위치했지만 한국교회에 끼친 거룩한 영향을 생각한다면 진정으로 큰 학교라고 할 수 있다. 이 학교에서 가르치고 공부하고 신학훈련을 받았던 사람 중에 한국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많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70회를 넘도록 배출한 경안신학원의 총 동문은 무려 2,000명 가까이 된다. 이들은 국내에서, 혹은 세계 열방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살아가고 있다. 바로 이 역사적인 경안고등성경학교에서 임학수 목사는 당시 소명과 사명에 불타는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당시 신학생들에게 임학수 목사는 사랑과 정성과 고매한 인격으로 제자들에게 본이 된 스승이었다. 신학생들은 임학수 목사의 강의를 통해 성경과 한문을 배웠을 뿐 아니라 인격과 목회를 배웠다. 그가 목회 실습과 같은 과목을 가르친 것은 아니지만, 그의 강의에는 50여 년 넘는 동안 섬긴 열정과 사랑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임학수 목사의 제자들은 선지동산인 신학교에서 육신적으로는 노쇠했지만 영적으로 충만한 믿음의 선배요 스승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제자들은 임학수 목사를 여전히 위대한 스승으로 흠모하고 있었다. 임학수 목사는 날마다 새벽에 가정예배를 드림으로 자녀·손들에게 신앙을 훈련시키고 전수(傳授)하는 일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손녀인 임순오 권사에 의하면 예배 시에는 항상 찬송가 58장인 ‘지난밤에 보호하사’를 불렀다는 것이다. 또한, 오래 참고 항상 부지런히 일하고 열심을 다해 주님을 섬기라는 조부의 말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신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칠 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믿음의 후배를 양성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임학수 목사는 가족에게 인격과 신앙의 롤 모델과 같았다. 또한, 안동교회 후임자인 김광현 목사에게도 직·간접적으로 목회를 전수했을 가능성이 있다. 임학수 목사는 불편한 몸으로 노년을 보냈다. 그때 김광현 목사는 거의 매일 임학수 목사의 집을 방문해 문안하면서 임 목사가 좋아했던 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두 분은 마치 부자관계처럼 사이좋게 지내면서 전임자와 후임자의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안동교회의 전임 담임목사와 후임자의 아름다운 관계는 이미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두 목사님은 만나 바둑도 두었겠지만 자연스럽게 교회와 성도들, 노회와 목회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을 것이다. 이때 안동교회 전임 담임자요 목회 선배, 그리고 인생 선배인 임학수 목사는 여러 면에서 직·간접적으로 조언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김광현 목사가 경안노회와 총회, 그리고 한국교회의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게 한 요인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1969년 1월 7일, 임학수 목사는 85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경안노회는 임 목사의 공적을 인정하여 경안노회장(葬)으로 결정하였고, 그가 11년 동안 헌신한 안동교회에서 장례예식을 치르고 운구하여 안동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1969년 1월 안동교회 예배당 앞에서 진행된 임학수 목사의 장례식.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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