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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길을 열어 주시는 주님장 재 효 목사 서울성은장로교회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1절)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5절)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8절)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하였느니라(10~11절) 오늘 우리의 일상이 너무나 불안하고 또 코로나 전염병으로 인해서 여러 가지로 위축된 심령들에게 때를 따라 주시는 말씀을 통해 이를 능히 극복하고 승리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는 내용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한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우리에게 이를 본보기로 삼고 동일한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시험을 당할 때는 피할 길을 주신다는 사실도 함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일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셔서 이 말씀을 선포하게 하셨는데, 1절부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일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홍해를 건너게 하셨는데 이를 세례받은 것이라고 바울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반석에서 구멍이 나게 하시고 물이 솟아 모두가 갈증을 면하는 흡족한 물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신령한 반석이라고 표현하였는데 그 반석을 예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요즘처럼 코로나 전염병이 많은 사람을 위협하고 있지만,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은 목이 마르고 힘들 때가 있어도 반석이신 예수님이 동행하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으며 새 힘을 얻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반석에서 물이 나와 먹고 살게 된 사건을 통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말씀을 통해서 살아야 함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광야교회의 모습을 고린도교회의 현재 모습과 동일시하여 광야교회가 어려움을 당한 일과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이유를 깨닫고 그 사건을 거울삼아 우리도 천국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 백성 다수를 멸망하심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5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끌어 가시는 과정인데, 왜 그들을 원치 않으셨을까? 그 이유에 대해 히브리서 3장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40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17~19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조금만 어려우면 애굽이 좋았다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외치며 원망하고 불평하기만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은 불신앙의 행동을 한 것이었지요. 그들의 불신앙이 결국은 그들로 하여금 약속받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해서 광야에서 다 엎어져 죽게 한 것입니다. 불신앙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3.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당하게 된 4가지 사건 사도 바울은 구약시대 광야교회에서 있었던 불행한 일들, 4가지 사건을 열거하면서 그들이 왜 멸망당하게 되었는지 그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사건(7절)은 출애굽기 32장에 기록된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호렙 산에 올라간 모세를 기다리다가 지쳐 아론을 통해 금송아지로 우상을 만들고 숭배한 사건입니다. 두 번째 사건(8절)은 민수기 25장에 기록된 것으로 광야교회가 싯딤에 이르렀을 때 모압 여인들의 꼬임에 빠져 간음하고 우상숭배에 이르게 되므로 하루에 2만 3천 명이 죽게 된 사건을 말합니다. 세 번째 사건(9절)은 민수기 21장에 기록된 것으로 광야교회가 가나안땅으로 진행할 때 에돔 땅을 지나가는 것이 쉬운 길이였으나 에돔이 거절하여 사해 오른쪽으로 돌아 산과 계곡을 지날 수밖에 없음에 백성들이 길이 험하여 불평함으로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사 그들을 심판하신 사건입니다. 네 번째 사건(10절)은 민수기 13장에 기록된 것으로 광야교회가 가데스바네아에 이르러 가나안땅에 12명의 정탐꾼을 보내어 40일을 탐지하였는데, 백성들이 희망과 승리를 말한 2명의 보고를 듣지 않고 절망과 불평을 보고한 10명의 말에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한 사건입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광야교회는 40년간 광야를 헤매다가 출애굽 할 때의 1세대는 승리의 보고를 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다 광야에서 죽고 20세 미만의 2세대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4.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주신 본보기 광야교회의 이러한 행적들이 오늘 코로나 전염병으로 어려움을 겪는 우리에게 경계의 말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6절),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11절).” 이런 일들은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경계의 교훈거리로 성경에 기록하게 하셨다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기록하게 하신 말씀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나도 그러면 안 되겠구나” 하는 경계거리로 삼아 분발하도록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광야교회가 불행한 사건들로 멸망당한 일은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귀한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악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가면 살 길이 열릴 것입니다. 5. 피할 길을 주시는 하나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피할 길을 내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13절) 하나님은 믿음직스러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시험당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실 뿐만 아니라 시험당할 때 피할 길을 열어 주셔서 그 죽을 지경에서 벗어나 살아날 수 있게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여기 전염병이 돈다 할지라도 그 죄를 철저히 회개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어지면 그 사람은 그 죽음의 환란에서 피할 길을 열어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것을 성령으로 깨닫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회개할 때, 성령이 알게 해 주시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피할 길이 무엇일까요?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약5:13)라는 말씀처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철저히 회개하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회복되고 모든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권면의 말씀) 코로나 전염병으로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환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벌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광야교회의 불행한 사건을 교훈으로 삼고 악에서 돌이키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 길을 주시고, 피할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전염병의 두려움으로 불안해할 것이 아니라 철저히 회개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50:15)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피할 길임을 믿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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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의 섭리장 재 효 목사 서울성은장로교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3~26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39절~40절)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41~42절) 본문의 내용은 요한복음 11장에 기록된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은 것을 살리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올해 부활절을 맞아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계획을 통해 부활의 섭리를 깨닫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 병든 나사로가 죽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으며 오늘 본문 부활의 주인공인 나사로와 두 여동생인 마르다와 마리아, 세 식구가 사는 동네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제자들과 동행하실 때 가끔 베다니의 나사로 집에 머무시곤 했습니다. 어느 날 나사로가 병이 들어 예수님께 두 자매가 사람을 보내며 소식을 전하게 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병들었나이다”(3절)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속히 오실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지체하시며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십니다.(6절) 그 후 예수님께서 도착해 보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나 지난 상태였습니다.(17절) 마르다는 예수님을 보며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절)하고 안타까워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기 전에 병을 고쳐 주실 것으로 여겼지만 이미 죽은 지가 나흘이나 지났으니 예수님이시라도 어찌하지 못하실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수심에 가득 찬 마르다를 향하여 예수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23절)하고 위로해 주셨지만 마르다는 믿지를 않았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분이심을 미처 알지 못한 것입니다. 2.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신 예수님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신 것은 예수님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4절)고 하셨음을 그 근거로 들 수 있습니다. 이는 나사로의 죽음이 아주 죽는 죽음이 아니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하시어 그 부활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입체적으로 확실히 보여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의 권세로 시체가 썩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아나게 하심으로써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41절)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질병만 고치시는 분이 아니라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망 즉 복음을 믿도록 하기 위하여 병든 나사로를 죽을 때까지 기다리시고 죽은 후에 가셔서 그를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이것은 나사로의 죽음과 그의 부활을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부활에 대해 실제로 눈앞에서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고 기별을 받았음에도 이틀을 더 머무신 것입니다. 그 이틀 동안 죽기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3. 다시 살아난 나사로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보고 “잠들었다”(11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잠들었다고 표현하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께 쓰임 받다가 육신이 죽을 때 그것은 영원히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생명부활에 참여할 소망이 있음을 믿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사로가 그때 죽었지만 다시 살아날 것을 미리 아신 까닭에 “잠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여 나사로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면 병이 나을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나사로에 대한 예수님의 계획을 알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야 예수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무덤에 가셔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르다가 믿지 않자 예수님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40절)고 명하자 그제야 사람들을 시켜 돌을 옮겨 놓았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향하여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43절) 하고 부르시니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사로가 나오며 다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4. 나사로의 부활이 주는 의미 나사로가 부활한 일로 인하여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내세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병든 자가 고침 받는 일도 기적이지만 죽은 자가 살아난 것은 더 큰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사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고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일을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데 쓰임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예수님이 택하신 그 시간부터 남은 평생을 예수님께서 쓰실 계획을 세우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앞으로 어떻게 쓰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이 기대되지 않습니까? 부활은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있고 또 일시적 부활이 있습니다. 나사로처럼 죽었다가 살아나더라도 육체의 생명이 다하면 다시 죽는 것을 일시적 부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확실히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절)고 말씀하신 것처럼 일시적 부활보다 더 중요한 생명의 부활에 참여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믿지 않는 자들도 부활합니다. 그것이 바로 심판의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부활한 몸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으니까 생명의 부활은 천국 가서 예수님과 영원히 사는 것이지만 심판의 부활은 예수님 앞에 그들의 행위록에 의한 재판을 받고 불못에 던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20:13~15절)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반드시 믿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불못에서 영원한 고통 속에 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하고 예수님이 물으실 때 우리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절)라고 말한 마르다의 고백처럼 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마지막 날 주님이 오실 때 생명의 부활로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할 것입니다. (권면의 말씀)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죽임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예수님만이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하실 분이심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망을 영생으로 바꾸어 주신 유일한 분으로 부활의 소망을 품게 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절)고 말씀하신 부활의 소망을 만천하에 선포하고, 예수님이 가라 하면 가고, 예수님이 하라 하시면 하고, 예수님 뜻대로 쓰임 받기를 힘써 보시기 바랍니다. 생명의 주권자이신 예수님만 믿고 의지하며 순종함으로 쓰임 받아서 생명의 부활에 성도 여러분도 빠짐없이 다 참여 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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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볼로의 중생장 재 효 목사 서울성은장로교회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24~25절)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26절)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함으로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더니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27~28절) 본문의 말씀은 성경에 대해 지식으로는 능통하였으나 성령을 받지 못한 아볼로라는 사람이 바울의 동역자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 의해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성령을 받아 중생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 성경에 능통한 아볼로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서 성장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그 시대에 120만 명 이상이 모여 사는 세계에서 최고로 큰 도시로 동양과 유럽과 아프리카 3개 주가 연결되어 있고, 전 세계의 많은 학자가 모여 자신의 학설과 이론을 강론했던 학문이 세계에서 가장 특출난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세계적인 대학자로 알려진 사람이 아볼로입니다. 그는 유명강사로 많은 사람 앞에서 초청받아 강의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으로서 구약성경에도 능통했습니다. 또한, 그는 세례요한의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강론을 했습니다. 그러나 25절에 보면 “아볼로는 예수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쳤지만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볼로는 그때까지 예수님이 성경에서 예언된 그리스도로 믿어지지도 않았고, 진정한 회개도 못 한 한마디로 성령을 받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고전1: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아볼 수 없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에게는 성령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보게 하시고, 죄를 깨달아 믿어지게 하는 능력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볼로는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하고, 자신도 믿지 못하는 예수님을 전하는 어리석은 짓을 행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볼로를 통하여 무엇인가를 기대했기 때문에 그를 초청해 말씀을 들었지만, 구원 얻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늘날 아볼로와 똑같이 성령 받지 못한 상태에서 예수님을 지식으로 전하고 대접받으려는 목회자들이 많이 있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아볼로처럼 지식만 가지고는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오직 성령을 받고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2. 복음을 듣게 된 아볼로 마침 바울의 동역자였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의 집회에 우연히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성령 받지도 못하고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아볼로가 예수님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성령 충만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성령을 받지 못한 채 자신도 모르게 지옥으로 가고 있는 아볼로를 보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볼로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는 것을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 즉 예수님에 대해 더 정확하게 풀어 가르쳤습니다.(26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전하는 말씀이 성령으로 전했기 때문에 아볼로는 대학자임에도 불구하고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주십니다. 그날 밤 대학자 아볼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전하는 말씀을 듣고 깨달아 성령을 받았습니다. 3. 성령을 받고 중생한 아볼로 아볼로는 성령을 받고 비로소 중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아볼로에게 있어 터닝포인트가 된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해지니까 아볼로의 인생관이 완전히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생애에서도 꼭 한번은 있어야 할 사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옥으로 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구원 얻게 하려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만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전도자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될 때 성령 받음으로 중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의 역사에 굴복하여 깨지고, 지옥 갈 인생이 천국을 향하여 방향이 바꾸어지게 됩니다. 그 사람에게 성령의 임재가 시작되면서 삶의 방향이 정반대로 바뀌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 꼭 있어야 할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 교회 다니는 사람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기 이전의 아볼로의 상태와 같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 아볼로는 예수님에 대해 사람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에 성령의 계시와 조명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생각대로 믿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생각대로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예수님은 이런 분이실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입니다. 그러했던 아볼로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내외를 통해 복음을 들어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아볼로는 그때까지 예수님을 잘 아는 척하고 남들에게 가르치기도 했지만, “나는 그동안 지옥 가고 있었구나”를 깊이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볼로의 가치관이 완전히 달라진 것처럼 우리도 이제는 온전히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고 중생의 경험이 꼭 있어야 할 것입니다. 4. 복음 증거자가 된 아볼로 아볼로는 성령 받기 전에는 세상의 조건을 가지고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고 대접을 받으며 살았지만, 이제 예수님 앞에 회개하며 성령 받고 난 이후에는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너무너무 감사해서 “내가 어떻게 그 은혜를 보답할까?”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영적인 소망인 영광스러운 천국과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후 아볼로는 자신을 아가야 지방에 선교사로 파송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함으로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더니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다”(27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세상 지식으로 전했는데 이제는 성령의 도우시는 역사로 믿는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는 사람이 아볼로였습니다. 또한, 그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라고 증언하며 많은 사람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기었습니다.(28절) 즉, 예수님을 부인하는 유대인의 주장을 꼼짝 못 하게 만든 것입니다. 아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기 위한 헌신의 마음이 불일 듯 했습니다. 그는 성령이 주신 지혜를 가지고, “구약성경이 예언한 대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또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이 예수님이시니 그분을 믿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신 증거로 성령을 주신다”는 사실을 증거하였습니다. 이렇듯 아볼로가 구약성경을 예수님과 딱 맞추어 증거하자 예수님을 이단 취급하던 유대인들도 감히 대항하지 못하고 말씀 앞에 굴복하더니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권면의 말씀) 오늘날 교회에도 성령 받기 전 아볼로와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목자를 애타게 합니다. 목자의 사명은 맡겨 주신 양 떼들이 지옥 가지 않고 천국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애타게 성령께 간구합니다.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같이 흐른다(시119:136)’고 시편 기자가 고백한 것처럼, 양 떼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않으면 목자의 눈에는 시냇물처럼 눈물이 흐릅니다. 우리 중에 예수님을 지식으로 아는 데 머물러 있다면 진정으로 회개하여 성령 받고 중생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또한, 성령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더욱 힘쓰기를 축원합니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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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멸시한 자들의 형벌장 재 효 목사 서울성은장로교회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회중에게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려 하노라(20~21절) 만일 여호와께서 새 일을 행하사 땅이 입을 열어 이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소유물을 삼켜 산 채로 스올에 빠지게 하시면 이 사람들이 과연 여호와를 멸시한 것인 줄 알리라 그가 이 모든 말을 마치자마자 그들이 섰던 땅바닥이 갈라지니라(30~31절)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도다(41절) 고라의 일로 죽은 자 외에 염병에 죽은 자가 만 사천칠백 명이었더라(49절)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서 홍해를 건너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과정이 40년 걸렸는데 이 40년의 과정을 ‘광야교회 시절’이라고 표현합니다. 광야교회는 육적 이스라엘의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지상교회는 애굽을 상징하는 죄악세상으로부터 벗어 나와서 성령에 이끌려 천국 가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교회이고 영적 이스라엘의 교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민수기 16장의 내용으로 광야교회에 하나님께서 지도자로 세우신 모세와 아론을 고라 일당이 당을 지어 대적한 일에 대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형벌하시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기록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를 대항하는 것이 ‘하나님을 멸시한 일’이 되었기에 그들을 징계하신 일을 교훈으로 삼아 오늘 우리에게도 저들과 똑같은 죄를 범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1. 고라 일당이 저지른 죄 광야교회 시절 레위 자손 중에서 고라가 다단과 아비람과 온과 더불어 당을 지어 이스라엘의 250명 지도자들과 함께 모세에게 대항했습니다. 고라는 레위지파의 후손이었지만 하나님께 제사장으로 감당할 만한 믿음을 인정받지 못해 쓰임 받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모세와 아론에게 책임을 돌리며 반역하고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선동하는 앞잡이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3절)하고 반역한 것입니다. 또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13절)하고 불평하였습니다. 즉, 너희가 뭔데 너희 맘대로 우리들 위에 군림하는 왕이 된 것처럼 행세하느냐 하고 시비를 일삼은 것입니다. 2. 불평하는 고라 일당에게 모세의 항변 그래서 모세가 열심히 그들에게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너희를 구별하여 자기에게 가까이하게 하사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겠느냐 하나님이 너와 네 모든 형제 레위 자손으로 너와 함께 가까이 오게 하셨거늘 너희가 오히려 제사장의 직분을 구하느냐 이를 위하여 너와 너의 무리가 다 모여서 여호와를 거스르는도다 아론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너희가 그를 원망하느냐”(9~11절)하고 강하게 질책합니다. 하나님이 많은 레위 사람 중에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제사장으로 사용하시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마귀의 앞잡이가 되어서 이 백성을 반역하도록 선동하였던 것입니다. 3. 여호와를 멸시한 고라 일당의 형벌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원망하고 대적하며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시길 “너희는 이 회중에게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려 하노라”(21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몇 사람이 범죄 하였는데 전체 회중을 다 죽이려고 하십니까? 그러자 여호와께서 즉시 응답하시기를 “회중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장막 사방에서 떠나라”(2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즉시 회중에게 이르기를 “이 악인들의 장막에서 떠나고 그들의 물건은 아무것도 만지지 말라”(26절)고 전했습니다. 이 말을 마치는 순간 그들이 서 있는 땅이 갈라지고 사람들이 갈라진 구덩이에 떨어지고 땅이 합쳐졌습니다.(31절)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에게 소속된 사람들 전부가 땅속에 생매장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광야교회를 이끌어가는 모세에게 대항한 죄의 대가를 받은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께서 제사장 직분을 받지 않고서 스스로 제사장 행세를 소원했던 가짜 250명에게도 하늘에서 불을 내려 모두 불태워 죽이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직분도 받지 않고 직분자 행세하기를 좋아하던 사람들이 향로로 불 피워 하나님 앞에 섰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음을 경계의 교훈으로 삼게 하신 것입니다. 4.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에 대한 형벌 이렇게 심판을 당해도 어리석은 백성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징계 이후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에게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도다”(41절)고 비난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번에는 전염병으로 이스라엘을 치셨습니다. 이때 모세가 아론에게 “너는 향로를 가져다가 제단의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피워 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 여호와께서 진노하셨으므로 염병이 시작되었음이라”(46절)고 명령합니다. 형 아론이 모세의 지시대로 향을 피워서 회중에게로 들어가서 백성을 위해 속죄하자 염병이 그치게 됩니다. 모세는 스스로 광야교회의 지도자가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세우시고 쓰시는 지도자답게 어리석은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간절히 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모세와 아론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14,700명이 죽었지만 어리석은 백성들은 죄를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하나님이 세우신 모세를 비방하며 반란을 일삼았습니다. 모세는 원망을 들으면서도 자기 직분에 충실하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직분을 끝까지 감당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여기서 자신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백성들이지만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려는 목자의 심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5. 원망하는 말에 대한 하나님의 표징 하나님이 어느 날 모세에게 이스라엘 각 조상의 가문대로 지팡이 열둘을 취하여 수령의 이름을 각각 쓰고 레위의 지팡이에는 아론의 이름을 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한 단으로 묶어서 성막 안에 있는 증거 궤 앞에 갖다 놓으라고 하셨습니다.(17:1~4절)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에 대해 “내가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리니 이것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너희에게 대하여 원망하는 말을 내 앞에서 그치게 하리라”(5절)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룻밤이 지난 후 지팡이의 주인들에게 자기 지팡이를 가져가게 했습니다. 이 지팡이 중에 아론의 살구나무 지팡이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많은 지팡이 중에서 아론의 살구나무 지팡이에만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리도록 하셨습니다.(8절) 이 사건을 통해 지팡이의 주인인 아론은 스스로 제사장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임명하여 쓰시는 하나님이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만방에 알리셨습니다. (권면의 말씀) 고라 일당은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에게 동등한 대우를 원하며 대적함으로 하나님의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지상교회도 하나님이 맡겨 주신 직분에 대해 겸손한 마음으로 섬기며 지도자들을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원망하고 대적하는 행위는 악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동으로 여기시고 그에 대한 형벌을 내리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직분은 스스로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쓰시기 위해 세우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기억하여 자신에게 주신 직분을 귀하게 여기고 충성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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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신앙 변천이 주는 교훈장 재 효 목사 서울성은장로교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31절)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3~34절)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40~41절) 오늘은 베드로의 신앙 변천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에 대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1. 예수님을 처음 만난 베드로 베드로는 갈릴리 벳새다 사람이고 직업은 어부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내용(눅5:1~11절)을 살펴보면, 하루는 밤이 새도록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그물을 씻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그 현장에 찾아오셨습니다. 베드로의 배에 오르시더니 무리들에게 말씀을 전하시고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리자 두 배에 가득할 만큼 물고기를 많이 잡게 되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예수님 앞에 엎드리어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예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셨고, 그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2. 예수님을 따르며 기적을 체험하는 베드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베푸시는 이적과 기사를 곁에서 다 보게 되고 많은 체험도 하게 됩니다. 마8:14절 이하에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이 심하여 죽을 지경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자 그 장모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음식을 대접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에도 베드로는 제자로서 예수님이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또한 마17:1절 이하에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 올라가시더니 그들 앞에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희어지고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영안이 열려서 그들을 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 모습이 너무나 황홀하여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하여 초막 셋을 짓고 여기에 계속 살기를 원한다고 예수님께 제의하기도 했습니다. 베드로는 특별한 영적 체험을 하였습니다. 3. 예수님에 대해 신앙 고백을 하는 베드로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방문(마16:13절 이하)하셨을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히 기뻐하시면서 “이를 알게 하신 이는 내 아버지이시다”고 말씀하시며 베드로의 그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시고 죽을 것을 말씀하셨는데, 베드로는 자기의 입장만을 생각하며 그런 일이 절대 예수님께 있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반응은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칭하시면서 “네가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다”고 꾸짖으셨습니다. 4. 예수님을 부인하는 베드로 본문 3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33절) 하며 자신만만해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4절)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셨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부인하고 흩어졌습니다. 나중에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할 거라고 예언하신 말씀이 생각이 나서 통곡하고 회개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기도할 동안에 여기 앉아 있으라”(36절) 말씀하신 후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등 세 제자들에게는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38절) 하시고 따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고 있는 제자들을 보시며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40~41절)고 간곡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고 있었던 제자들은 결국 예수님의 말씀대로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예수님을 배신하였습니다. 5.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된 베드로 베드로는 제자들과 함께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있는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길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라 그리하면 잡으리라”(요21:6절) 하였더니 말씀대로 순종하자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육신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양식뿐만 아니라 육적인 양식도 공급하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곳에서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랑하사 사람 낚는 어부의 사명을 다시 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6. 오순절 날 성령 충만함을 받게 된 베드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부하시길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르자 기도하던 마가 다락방에 성령이 충만히 임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때 베드로도 성령을 받고 말씀을 전하자 3,000명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시작이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던 것처럼 기적도 많이 행하게 되었습니다. 성전 미문에 걷지 못한 자를 성령의 역사로 고친 일을 시작으로 룻다의 애니아라는 자가 8년간 중풍병으로 꼼짝 못 하고 병상에 누워 있던 것을 기도로 낫게 하였으며, 욥바의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병들어 죽은 것을 살렸습니다. 베드로가 자기 사명을 다 하여 많은 이적과 기사를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7. 복음을 위해 쓰임 받은 베드로 베드로와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자 대제사장과 관리들이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제자들을 잡아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회 앞에 서서 외치기를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5:29절)고 말하며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였습니다. 이후 헤롯왕이 교회를 박해하자 야고보가 죽고 베드로는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감옥에서도 깊이 잠을 잘 정도로 담대해진 베드로를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마지막 순교할 때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게 됩니다. (권면의 말씀) 베드로의 신앙 변천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제자로 부르심을 받고 기적을 체험하였지만 자기 생각대로 할 때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랑하사 다시 그에게 기회를 주셨고, 그가 성령 받은 이후부터 성령에 이끌리며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을 위해 쓰임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성령 받기 전의 육신적인 베드로의 모습에서 벗어나 회개하고, 성령 충만하여 육신의 생각대로 살지 않고 성령에 이끌리어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힘쓰는 귀한 성도로 쓰임 받기를 축원합니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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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택을 잊지말라장 재 효 목사 서울성은장로교회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1~2절)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3~5절) 한 해가 저물어가는 가운데 한 해 동안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연합하고 또 믿음으로 하나님께 이끌리며 쓰임 받고 영광 돌리기를 힘써 왔는가를 뒤돌아보면서 오늘 주시는 말씀을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다윗은 먼저 하나님을 찬양하는 고백을 드리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송축하라는 말은 그냥 입술로만 찬양 드릴 것이 아니라 오장육부의 진액을 모아서 하나님께 구원의 은혜를 찬송 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은택’이라는 말은 영어로 ‘benefit’이라는 단어인데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혜택을 입어 지금 살고 있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너무나 하나님의 은혜가 크고 감격하여 그 은택으로 살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온갖 죄악으로 인해 지옥에 가야 마땅한 죄인인 나를 하나님이 택하시고 불러주셨으니, 그 대속의 은혜를 받아 내가 회개할 때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택을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1.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신 하나님 하나님의 은택을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다윗은 먼저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그 죄를 용서받음으로 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녀가 된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죄를 용서받음으로 저주와 형벌의 지옥에서 완전히 벗어났으며,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모든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죗값으로 왔던 질병도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그 은택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 우리의 생명을 파멸에서 건져주신 하나님 또 4절에 보면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파멸이라는 뜻은 파괴되어 죽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맞아죽던지, 폭탄에 맞아서 내 몸이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지던지 이런 상황 직전에 하나님은 나를 구원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앞에 고백하건데 저도 여러 번 죽을 고비를 겪었지만 하나님께서 살려 주셨습니다. 다라서 지금 살아있는 내 인생은 나 자신을 위해 살기 위함이 아니라 아직도 내가 해야 할 그 일을 감당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살려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 다 하나님의 은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3. 우리에게 관을 씌워주신 하나님 그다음엔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라고 말합니다. ‘인자’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지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신데,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슨 가치가 있다고 관을 씌워 주신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슨 자격이 있어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하시고 성령을 주시어서 자기 자녀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회개했더니 죄를 용서해주실 뿐 아니라 성령까지 주시어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인생의 최고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4. 좋은 것으로 우리를 만족하게 하신 하나님 다윗은 5절에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라고 하나님의 은택을 노래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을까”라는 고백은 구원받은 성도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내가 지옥 안가고 천국 가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택으로 이루어진 결과라고 깨닫게 될 때 내가 지금 살아있음도 모두 주님의 은혜라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것으로 우리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십니다. 독수리는 힘이 대단합니다. 그리고 날쌔고 빠르게 먹이를 잡아먹습니다. 청춘을 독수리로 비유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하여 열심을 다하지만 힘들고 지칠 때가 있을 것이고, 그럴 때 독수리처럼 새 힘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저도 설교할 때 체력적으로 힘들 때가 많지만 성령께서 붙들어 주시기 때문에 담대히 말씀을 전합니다. 이것이 내 육신의 체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붙들어 역사하시는 영력(영적인 힘)으로 말씀을 전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5.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6절) 이것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공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어 “그 행위를 모세에게, 그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다”고 고백합니다.(7절) 하나님은 애굽에서 430년간 노예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내시기 위하여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바로왕이 모세의 말을 거역하고 듣지 않자 하나님은 10가지 재앙을 내리심으로 결국 바로왕은 항복하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탈출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신 일이 바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6. 긍휼과 인자하심이 크신 하나님 다윗은 본문 8절 이하에서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기 때문에 항상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는 분이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따라 처벌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신 분”이라고도 합니다. 만일 우리가 나쁜 짓을 했을 때 즉시 그 죗값으로 처치해 버리셨다면 우리는 지금 지옥에 가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우리 죄를 따라 처벌하지 않는 이유가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고, “아비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같이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먼지뿐임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른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즉, 두려움으로 섬기기를 원하는 자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이 살리시고 함께 살아주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생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영원히 사는 것을 약속받았기에 하나님의 은택을 입은 자임을 알고 하나님께 항상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권면의 말씀) 이제 여러분은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육체의 입장만 위하여 살다가 지옥 갈 것입니까? 아니면 영적인 소망을 목적으로 오늘 이 시간 철저히 회개함으로 죄를 용서받고, 다윗처럼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은택을 잊지 않는 성도가 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생명을 파멸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영생을 주시고 영원히 함께하시는 분이심을 믿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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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기준장 재 효 목사 서울성은장로교회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41~42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43절)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44절)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종교지도자들의 외식과 높아지려는 마음을 삼가 하라고 가르치신 후 헌금함 앞에 앉아서 무리가 어떻게 돈을 넣는지를 보시며 제자들에게 설명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평가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고 나를 살리신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생의 방향이 바뀌고, 마음속 깊은 곳까지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1. 헌금함에 헌금하는 여러 부자와 한 가난한 과부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헌금함 맞은편에 앉아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물 드리는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부자들은 와서 마치 자신을 자랑하듯이 많이 넣었습니다. 그 당시의 화폐는 금화나 은화, 혹은 구리동전을 사용했기 때문에 헌금함 안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울리면 얼마나 예물을 드렸는지 쉽게 눈치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즉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화폐 중에서 가장 가치가 적은 구리동전 두 개를 헌금함 안에 넣었습니다. 한 렙돈의 가치는 하루 일당의 1/16에 해당되는 돈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두 렙돈을 하루 일당에도 훨씬 못 미치는 돈이지만 하나님께 기꺼이 드렸던 것입니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43절) 참으로 희한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의 가치로는 금화가 은화보다 귀하고, 은화가 구리동전보다 귀한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두 렙돈을 더 높게 평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알 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조건도 하나님께 만족을 드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세상을 만드신 분에게 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 모인 부자들이 아무리 많은 것으로 드린다 한들 하나님께서는 만족하실 일이 없으시고 아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 마음을 보시고 귀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2. 부자들의 헌금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부자들은 가난한 과부보다 훨씬 많은 돈을 넣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그들은 다 풍족한 중에서 넣었다”고 하십니다.(44절)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 몫은 두둑이 챙겨 두고 일부를 드린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마음에서 드리는 헌금이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마음에도 없는 보이기 위한 헌금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부자들에 대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기도 했습니다. 재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역대상 29:10절부터 다윗이 감사의 신앙고백을 하였는데 11~12절에 보면,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에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라고 다윗은 고백하였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우리가 힘이 있어서 주께 드릴 수 있었겠는가’에 대해, ‘모든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 손에서 받은 것 중에서 주님께 다시 돌려드렸을 뿐이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3. 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예수님은 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들은(부자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44절)라고 평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과부는 있는 것, 즉 생활비 전부를 드렸습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몽땅 다 헌금으로 드렸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다 드렸다’는 것은 앞으로 사는 문제 모두를 하나님께 맡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영적인 소망과 육체의 생명, 생활의 모든 문제, 내가 하는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믿고 의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잘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있는 것 전부’라는 것은 그 여인의 그 날 생활비, 즉 그날의 양식을 구입할 전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자들은 ‘이것은 하나님께 드리고, 저것은 나를 위해 써야지’라는 마음으로 헌금을 드렸다면 과부는 자신의 입장과 생각은 다 버려두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마음의 고백을 보시고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그 과부가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4. 헌금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기준 하나님은 헌금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삼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없는 데서도 있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들과 한 가난한 과부의 사례처럼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중심이 예수님의 평가 기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자들은 자기 몫을 많이 남기고 풍족한 중에 많이 넣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보실 때, ‘아 저 인생은 아직도 자기 인생을 나에게 몽땅 맡기지 않는구나. 자기 인생을 자기 생각대로 자기 입장을 따라 자기 방식대로 계산하는구나’ 이렇게 평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과부가 자기 가진 것 전부를, 자기 생명까지 다 드린 것을 보시며 그 마음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적게 넣었지만 부자들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평가해 주신 것입니다. 잠언 23:26절에 보면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기뻐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아들은 믿음의 자녀들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구원 얻은 성도들에게 그들의 마음을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마음을 드리지 않는 사람은 재산이 아무리 많다고 한들 하나님 앞에서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영혼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령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기대 가운데 쓰임 받으면서 내 마음을 주께 드립시다! 내 마음을 드린다는 것은 내 인생을 몽땅 다 드리는 것이 됩니다.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일에 기쁨으로 동참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모든 것이 내 것이 될 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형편을 하나님이 책임져주시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권면의 말씀)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으로 드린 한 가난한 과부의 사정을 아셨으며, 없는 가운데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린 그 마음을 보셨습니다. 드릴 것이 적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본문의 가난한 과부는 가난한 것이 오히려 복이 되었습니다. 만약 부자들처럼 많은 것을 가졌더라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전부 드리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부자들의 외식과 높은 마음을 경계하고 가난한 과부처럼 모든 것이 하나님 것임을 알고 마음을 드릴 때 내 인생을 몽땅 다 드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천지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말씀을 통해 깊이 깨달으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쓰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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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과 저주의 기준장 재 효 목사 서울성은장로교회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1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2절)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3절)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불러내시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살펴보고 우리도 믿음으로 축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떠나라고 말씀하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1절)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생명의 무대, 생활 무대였던 정든 고향을 떠나고 가까운 친족조차 등진 채 하나님이 지시할 땅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떠나라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아브라함은 듣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손재주가 있어 고향인 갈대아 우르 땅에서 우상을 만들어 파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우상을 섬기는 문화로 가득 찼던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시기 전에 먼저 세 가지를 버리게 하셨습니다. 이는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신 것인데, 한마디로 그것들을 버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인연을 끊으며 옛사람을 벗어 버려야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의 옛사람은 아버지 데라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으로 가려고 할 때, 아버지 데라는 중간 지점인 하란에 머물며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을 따라 아버지를 떠나 지시할 땅으로 떠났습니다. 2.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의 약속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2절) 이 말씀은 “네가 내 말을 듣고 나를 믿어서 내가 네게 허락한 땅인 가나안에 오기만 하면 내가 너에게 세 가지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첫째는 큰 민족을 이루게 하는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겠고, 둘째는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하게, 아주 위대한 사람이 되는 이름으로 만들어 주겠고, 셋째는 영적인 소망을 위하여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 메시야라고 하는 그리스도를 나게 해서 유대 민족은 물론 온 이방인들까지도, 전 세계 만민이 천국 가기 위한 길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3. 축복과 저주의 약속 그리고 그다음에 하시는 말씀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3절)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 중에 아브라함을 본받는 사람은 아브라함이 얻는 복을 얻고, 아브라함을 미워하고 대적하고 훼방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저주를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성도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그와 반대로 여러 모양으로 훼방하거나 대적하는 자는 하나님이 저주를 내리실 것입니다. 4. 축복과 저주의 기준 신명기 11장 26-32절에,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과 저주에 대해 말씀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거기에는 두 개의 산을 명기하고 있는데 하나는 세겜 땅 서쪽에 있는 그리심 산이고, 또 하나는 동쪽에 있는 에발 산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땅으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복과 저주를 동시에 선포하셨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 가지 길이 있고 그 선택에 따라 복과 저주가 임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기준이 무엇일까요? 27절에 보면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지고 순종했던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영혼 구원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뜻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28절에 보면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버리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만 한 다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완성하셨을 것입니다. 32절에서 보듯 “너희는 지켜 행할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씀을 아멘으로 듣고 믿음으로 실천하기 원하십니다. 5. 축복과 저주의 예화 서울에서 목회하시는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상가를 얻어 개척하고 2년쯤 지난 어느 날 열심히 교회를 다니던 김 집사님이 목사님께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저 산꼭대기에 사는데 교회 가까이 이사 와서 교회를 마음껏 섬기고 싶은데 가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저렴한 곳에 장사라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그 마음이 기특하여 가게를 알아봐 주고 축복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게는 입소문이 나면서 전국에까지 판로가 확장됐습니다. 가게도 더 늘리고 아들까지 가세하여 돈 버는 데 집중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이 너무 바쁜 관계로 예배도 빠지고 교회도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보다 못한 목사님이 그 집사님을 찾아가서 말하기를 “가게를 얻어 장사하도록 도와주면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다고 하고서는 통 교회에서 볼 수 없으니 어찌 된 것입니까?”하고 물었더니 그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세상 속담에 한평생 돈 벌 기회가 세 번 온다고 했는데, 우리는 그 첫 번째 기회가 와서 지금은 돈 벌어야 할 때인데 교회가 대수입니까?” 그 김 집사님도 같은 마음인 것을 알고 목사님은 “오늘 이 시간부터 사업이 잘 안 되더라도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돌아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집사님은 큰 부자가 되려는 욕심으로 교회를 떠났고, 1년 반이 지난 어느 날 목사님께 찾아와 지금 사업이 매우 어려우니 자신에게 축복 기도해 달라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여전히 세상 조건인 물질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통해서 다시 채워지기만을 기대하는 욕심뿐임을 보고 목사님은 안타까웠습니다. 그 후 김 집사님이 운영하는 사업체는 부도가 났고, 집사님은 감옥에 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끝까지 순종하였다면 축복을 받았을 것인데 세상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바람에 저주받은 인생이 된 것입니다. (권면의 말씀) 우리는 성령을 받게 되면 그 성령께서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보증해 주십니다.(롬8:16)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는 그다음부터 성령의 인도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게 되어 축복의 사람으로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유혹에 속아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죄를 지을 때는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고 세상 욕심에 빠져 산다면 저주가 임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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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부활로 영생 복락을!장 재 효 목사 서울성은장로교회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19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24절)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28~29절) 본문 내용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자 예수님이 그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1. 아버지(하나님)와 아들(예수님)은 하나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19절)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버지가 세우신 계획과 진행하시는 일들을 아들도 똑같이 진행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즉, 이것은 아버지께서 하시던 일을 그 아들이 계승자로 사역을 감당하러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다음 20절에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 말씀은 예수님이 생명의 주관자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28~30)고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에 대해 신성 모독으로 여겼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이심을 거듭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특권을 얻은 성도는 예수님으로 인해 만물보다 크신 아버지 손에 붙들려서 천국 길로 이끌리며 쓰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는 누구도 만물보다 크신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2.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러 오셨습니다. 21절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구약시대에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일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와 같이 이제부터 아들이신 예수님도 자기가 원하는 자를 살리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증거로 공생애 3년 동안에 예수님은 세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고, 또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슬퍼하는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고 하셨을 때, 마르다가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대답했지만, 실상은 마지막 날 부활할 때에 자신의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날 줄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시며 큰 소리로 나사로의 이름을 부르자 그 즉시 살아났습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처럼 이 땅에서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일을 실제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심판을 예수님께 맡기셨습니다. 22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심판을 예수님에게 맡기신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요 죄 없으신 예수님만이 모든 인류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신 분으로, 바로 그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심판하는 권세를 부여받은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어 23절에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아들이신 예수님 자신도 아버지와 같이 공경을 받으셔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공경은 헬라어로 “티마오”라고 하는데 이는 “영광을 돌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그 아들이신 예수님을 공경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고 마지막 때 심판주로 오실 것입니다. 4.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얻었다는 것은 이미 영생에 들어갔다는 완료형입니다. 영생에 들어갔다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합니까? 이는 성령 받은 그 순간 그 사람의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등록되는데 이것을 영생에 들어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영생은 아버지가 보내신 아들 예수님을 믿을 때 얻습니다. 영생을 얻은 성도는 하나님이 영원히 사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삽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 이 말씀처럼 영생을 얻은 성도는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5.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25절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죽은 자들을 누가 살리신 것입니까?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바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열쇠가 되는데 우리는 이미 죄악 가운데 마귀와 더불어 지옥 길을 가고 있었을 때 그것을 영적으로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바 그 부활의 복음을 듣고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게 되고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6.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올 것입니다. 예수님은 28~29절에,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성령에 이끌리며 쓰임 받는 성도입니다. 성령에 이끌리면 죄짓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선한 일을 한 성도는 생명의 부활로 일으켜질 것입니다. 반대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누구입니까? 이 사람은 마귀에게 사로잡혀서 마귀가 시키는 대로 악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악한 일을 한 사람은 심판을 받아 지옥 가기 위하여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행24:15)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의인의 부활은 선한 일을 행한 성도에게 해당하는 말하며, 악인의 부활은 악한 일을 행한 자에게 해당합니다. 사도 바울도 의인의 부활, 악인의 부활을 거론하며 예수님의 말씀과 동일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권면의 말씀)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행하십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영생을 얻은 성도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복을 누리고 선한 일을 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생명의 부활로 일으켜질 것입니다. 생명 부활로 영생 복락을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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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속의 은혜를 누가 받았느냐장 재 효 목사 서울성은장로교회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53:1~2)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53:4)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본문 이사야 53장은 고난의 종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이유와 의미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선지자를 통한 예언의 말씀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700년쯤 전에 기록된 예언입니다. 700년 전에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질 일들을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사야 선지자를 통한 성령의 계시로 예언하게 하신 것입니다. 즉, 700년 뒤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게 하시고, 택하신 자기 백성들의 죄악을 그 예수님에게 대신 담당시켜 벌 받도록 십자가 형틀에 못 박혀 죽임당하게 하실 계획이 오래전서부터 세워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언이 1~3절까지는 상당히 비관적인 말씀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하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는 육신의 사람들은 이 말씀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인 소망을 위해서 주시는 말씀인데 육신을 기준으로 육신의 입장에서 그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하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영적인 진리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회개하라 하시는데 타락한 인간이 육적인 자기 기준에서 받아 드리려고 해보지만 이해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선지자들이 애타게 하나님의 구원계획 진리의 말씀을 외치지만 아무도 믿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하고 반문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능력의 손길로 누구를 구원해 내셨느냐, 다시 말하자면 대속의 은혜를 누가 받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구원 못 받은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보다 더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당히 부정적인 예언처럼 보이지만 대속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외모의 모습 2절에서 예수님의 외모가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았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이는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는 수분이 없기 때문에 거의 말라 비틀어져 죽어가는 모습으로 간신히 살고 있는데, 예수님의 모습이 마치 습기가 없어 생기를 잃어버리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다는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육신의 시각으로 보면 듬직하지 못하고 믿음직스럽지도 못한 기대 이하였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 예수님은 미가서 예언의 말씀처럼 베들레헴에서 나셨는데 여인숙에서도 묶을 방을 얻지 못해 부득이 마구간에서 만삭이 된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 이유는 로마의 가이사 아구스도가 모든 나라 백성들에게 자기가 태어난 본향으로 돌아가서 호적을 정리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베들레헴 땅에 사람들로 붐볐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구간에서 낮고 비천한 몸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언의 말씀을 성취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구간에 나셔서 짐승만도 못하게 온갖 죄악을 일삼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가장 낮은 자리에 오신 것입니다. 또 3절에 보면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에게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외면하고 멸시했습니다. 얼마나 철저히 무시했으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멸시했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래서 간고를 많이 겪으셨는데 이것은 그의 육체가 가시에 찔리는 고통, 또 못 박히는 고통, 창에 찔리는 고통을 다 당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3.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에 대한 이유와 목적 죄도 없으신 분이신 예수님이 왜 그렇게 모진 고통과 채찍에 얻어맞을 때마다 신음하시면서도 참아내고, 목숨 끊어질 때까지 희생양이 되어 주시려고 그렇게 눈물로 기도하시며 그리스도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는 제물로 죽어 주셨을까요? 그의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이유와 목적이 4~6절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질병의 고통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벌 받아 낫게 해 주시고, 우리가 슬퍼하는 일을 예수님이 대신 희생양이 되심으로 우리를 영원한 기쁨에 두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병을 십자가에서 짊어지시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담당해 주셨건만 우리 생각에는 그가 자기의 허물과 죄로 하나님께 매를 맞고 고난을 당한다고 오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죗값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으신 것이요 우리의 나음을 위하여 그가 채찍에 맞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시면서 살이 터지고 피가 쏟아지는 그 모진 고통으로 내 죗값을 대신 담당해 주셨기 때문에 내가 오늘 회개하므로 죄를 용서 받을 수 있고, 지옥 길을 벗어 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속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죗값으로 시달리는 고통의 형벌을 내게서 걷어 내주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4.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신 현장 7~9절까지는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는 현장에서 되어 질 상황을 700년 전에 미리 예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실 때 어떻게 행하셨습니까?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7절). 예수님은 그 십자가를 지실 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참으시고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한 마디도 열지 않으시고, 그냥 우리를 위하여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가셨습니다. 우리가 죽을 죽음을 대신 당해 주시면서 끝까지 감당하시고 그 구원을 마침내 다 이루셨습니다. 5.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로 드려진 것 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시고, 질고를 당하게 하셨던 것은 그의 영혼을 죄로 인한 속건 제물로 삼으신 까닭이었습니다. 속건 제물은 자기로 인한 피해의 대상에게 충분히 그 배상을 한 후 그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받기 위해 속죄제를 겸하여 드리는 것이 속건 제물입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짐승을 하나님 앞에 속제 제물로 드리는데 이는 희생 제물을 제사장에게 드리고 난 다음 자기 죄를 고백하고 속죄제를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린 양으로 죄인들을 위하여 대신 벌을 받아 희생 제물 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권면의 말씀) 대속의 은혜를 누가 받았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의 참뜻을 깨닫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사건은 육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믿어지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하며 귀히 쓰임 받기를 축복합니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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