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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동안 한 교회를 섬긴 여성지도자 김점향 권사(4‧끝)한국기독역사의 발자취(5) 김승학 목사 논문 연재(5)-김점향 권사(4‧끝)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점향 권사 (1907~1998) 목차 1. 할머니 등에 업혀 안동교회 첫 예배에 참석한 아기 2. 믿음의 분위기에서 성장하고 결혼한 여성 3. 안동 3·1 만세운동 당시 태극기를 흔든 어린이 4. 여자성경학교에서 공부한 교회의 재원(才媛) 5. 성전건축을 위해 쌀 한가마를 헌금한 가정 6. 안동교회 첫 권사 3인 중 한 명 7.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의 산 증인(證人) 8. 개척교회를 적극적으로 도운 여성 9. 여교역자 복지의 효시인 경안성로원 첫 원장 10. 90년 동안 안동교회의 뛰어난 지도자 9. 여교역자 복지의 효시인 경안성로원(慶安聖老院) 첫 원장 경안노회는 복지에 관한 한 국가나 다른 노회보다 앞서간 노회다. 복지에 관한 지대한 관심은 은퇴 여성교역자를 위해 1953년 경안성로원을 설립하게 했다. 경안성로원은 은퇴 여교역자의 생계와 여생을 돌보아줌을 목적으로 세워졌다. 성로원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으로는 경안노회와 영주노회에 소속된 은퇴 여교역자로서 경안노회 또는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에서 추천을 받아 성로원 이사회의 입원 승낙을 받아야 했다. 현재 운영은 경안노회 보조, 이사의 후원회비, 여교역자회의 후원, 여전도회 연합회와 지 교회에서 보내온 성탄헌금으로 운영하고 있다. 현재 경안성로원에는 5명의 은퇴한 여교역자가 생활하고 있다. ▲경안성로원은 반피득 선교사가 기증한 금곡동 183-1번지 소재 52평의 한옥에서 시작되었다. 이 가옥에는 처음으로 여교역자 4명이 거주했으며, 현재 안동성소병원 신관 입구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진의 우측 초가집이 경안성로원 첫 가옥으로 알려져 있다. 6·25 전쟁이 끝난 후 경안노회에서는 노쇠하고 병약하며 무의무탁한 은퇴 여교역자들의 노후를 배려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다. 당시 은퇴한 김순애 전도사가 당장 거처할 처소가 없게 되자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는 경안성로원 설립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53년 제24회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 총회는 은퇴 여교역자를 위한 생활관을 건립하기로 결의했다. 그 결과 1953년 8월 금곡동 183-1번지 가옥에서 경안성로원이 문을 열게 되었다. 당시 반피득 선교사가 기증한 52평의 한옥에는 처음으로 여교역자 4명이 거주했으며, 현재 안동성소병원 신관 입구에 위치했다. 1954년에는 2명이 거주했고, 이후 입주자는 김순애, 김정숙, 양정애, 안주봉 등이 있었다. 후에 김구암, 권성찬, 김병규, 윤손흥, 권귀출, 김순교, 문초야 등도 입주했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의 기존 가옥으로 인해 성로원 신축건물의 요청은 계속되었고, 1956년 금곡동 138번지에 경안성로원이 준공될 수 있었다. 당시 조운선·설의돈 선교사가 건축비와 운영비를 담당하였고, 안동 선교부, 미국 인디아나교회,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 안동교회, 안동동부교회 등이 건축을 위해 후원했다. 1956년 제27회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는 조운선 선교사를 경안성로원 원장으로 선출했다. 그 후 1978년, 금곡동 180-3번지에 소재한 경안신학원 여기숙사를 매입하여 이전하였다. ▲경안성로원은 성소병원 옆 금곡동 2차선 도로 건너편 주차장인 금곡동 180-3번지에 소재한 경안신학원 여기숙사를 매입하여 이전하였다. 현재 서후면 저전리에 위치한 경안성로원을 신축하여 이전하기 전까지 22년 동안 사용하였다. 김점향은 여기숙사를 구입하기 위해 예전의 성로원과 성로원 소유의 밭을 팔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현재 임만조 장로가 사는 주택은 예전에 성로원 소유의 밭이었는데 임 장로가 구입하게 되었다. 결국 처음의 성로원 가옥과 성로원 소유의 밭을 판 것으로 여기숙사를 살 수 있었다. 이곳은 20여 년 동안 은퇴한 여교역자의 휴식처로 사용되었다. 그 후 2000년 2월 서후면 저전리 292-1번지에 건평 148평 규모의 경안성로원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로원의 원장은 누리는 높은 자리가 아니다. 인내하며 겸손히 섬겨야 하는 가장 낮은 자리이다. 노쇠하고 병에 걸린 여성 교역자들을 돌보고 섬기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김점향의 자부인 박춘희 권사(안동교회)의 증언에 따르면 초기 성로원의 재정이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기관 등을 방문하여 후원을 받아 성로원을 어렵게 운영하다가 시(市)에서 배급하는 식량을 받게 되어 어느 정도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성로원이 설립된 1953년부터 1978년까지는 조운선 선교사가 원장으로 근무했지만 김점향은 실질적인 원장의 자리에 있었다. 김점향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참고 인내하면서 무려 25년 동안 원장으로 은퇴 여교역자들을 위해 헌신했다. 김점향과 가까이 살고 있던 임만조 장로는 김점향이 성로원에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헌신했음을 기억하고 있다. 임 장로가 1972년 경안여자중학교의 교감이 되었을 때, 성로원 일로 김점향에게 밤낮없이 전화가 왔고 그때마다 옆에 사는 김점향에게 연결해주었다고 한다. 숨기지 않는 성격을 갖고 있던 김점향의 통화를 듣게 된 임 장로는 자연스럽게 성로원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1970년대 중‧후반 임 장로는 성로원의 이사로, 또한 이사장으로 봉사하게 되었다. 힘이 남아있을 때까지 김점향이 붙들고 헌신한 것은 성로원에서 은퇴한 여교역자를 돌보는 일이었다고 임 장로는 기억하고 있다. 하나님께 은혜를 값없이 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를 이웃에게 갚는 것이 바로 섬김이라는 사실은, 김점향으로 하여금 무려 4반세기 동안 경안성로원장 자리를 지킬 수 있게 했다. 10. 90년 동안 안동교회의 뛰어난 지도자 김점향은 교회의 모든 일에 앞장서서 헌신한 분이었다. 그는 맡겨진 일에 적극적으로 임한 인물이다. 일평생 안동교회 여전도회의 중심인물이었을 뿐 아니라 주일학교 교사, 부장으로 수고했다. 그는 안동교회의 여러 분야에서 여성 평신도의 리더였다. 또한 그는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의 존경받는 여성지도자였다. “비록 나보다 연배가 20세 정도는 어렸지만 김 권사님을 존경할 만한, 본 받아야 할 만한 영적 어른으로 삼았다.” 한 집사님의 이와 같은 증언은 김점향의 영적 권위와 위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처럼 김점향은 여전도회 회원들에게 있어서 선배나 후배들의 롤 모델이었다. 김점향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그를 여걸로 기억하고 있다.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기골이 장대했으며, 음성도 우렁차 여장부로서 손색이 없었다는 것이다. 전경상 장로는 김점향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 탁월한 여성지도자라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청년연합회 활동으로 당시 경안신학원 원장이었던 김기수 목사님께 인사하기 위해 사택에 갔을 때 김점향이 있었다고 기억한다. 인사했을 때 김점향은 “잘하라”라고 격려했는데, 그 말이 어떤 사람의 말보다 존경할 만한 권위와 강한 힘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이유는 김점향에게 지도자로서의 덕망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점향은 교회 안과 밖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남성과 여성에 관계없이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는 잊을 수 없는 여성지도자였다. 아니 그를 굳이 여성지도자라고 국한할 필요가 없다. 그는 안동교회가 낳은 지도자였다. 외할머니 등에 업혀 안동교회에 처음으로 출석한 1909년 8월 8일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1998년 10월 19일까지 90년 동안 안동교회를 떠나지 않은 믿음의 사람이었다. 김점향은 교회에 출석한 이후 90년 중 오랜 세월 동안 안동교회와 경안노회를 위해 헌신한 믿음의 사람으로 남녀 성도 모두가 결코 잊을 수 없는 교회의 지도자였다. 그래서 이런 지도자를 안동교회에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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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지를 찾아서(10) -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전경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소개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은 한국교회의 밑거름이 되었던 순교자들의 순교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관이다. 기념관이 추진된 것은 한국기독교 선교 100주년을 맞았던 1984년이다. 당시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는 영락교회 정이숙 권사가 기증한 경기도 용인시 추계리의 대지 36만㎡를 바탕으로 건립 사업을 추진해 1989년 기념관의 문을 열었다. 3층 건물인 기념관 1층 입구에는 한국의 초기 교회 역사를 알 수 있는 그림 40여 점이 전시돼 있다. 2층 예배실에는 1930년대 이전 개화기의 한국교회와 사회의 모습을 담은 사진 120여 점이 보관돼 있다. 3층 순교자 기념실에는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 등 순교자들의 초상화와 약력을 담은 글이 보관돼 있다. 또 1866년 대동강에서 참수된 토마스 선교사 등 해외 선교사에 관한 기록도 볼 수 있다. 1884년 이 땅에 복음이 전해진 이래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숨진 순교자는 주기철 목사를 비롯하여 2,66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며, 이 중 600여 명의 순교자 명단이 순교자기념관에 헌정되어 있다. 기념관 건물 밖에는 여러 교회에서 기증한 성경 돌비와 순교자를 기념하는 시비(詩碑) 및 개인 기도 장소가 있다. (이용 문의: 031-366-2825) ▲ 253명의 순교자 존영이 걸린 전시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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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동안 한 교회를 섬긴 여성지도자 김점향 권사(3)한국기독역사의 발자취(5) 김승학 목사 논문 연재(5)-김점향 권사(3) 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점향 권사 (1907~1998) 목차 1. 할머니 등에 업혀 안동교회 첫 예배에 참석한 아기 2. 믿음의 분위기에서 성장하고 결혼한 여성 3. 안동 3·1 만세운동 당시 태극기를 흔든 어린이 4. 여자성경학교에서 공부한 교회의 재원(才媛) 5. 성전건축을 위해 쌀 한가마를 헌금한 가정 6. 안동교회 첫 권사 3인 중 한 명 7.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의 산 증인(證人) 8. 개척교회를 적극적으로 도운 여성 9. 여교역자 복지의 효시인 경안성로원 첫 원장 10. 90년 동안 안동교회의 뛰어난 지도자 7.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의 산 증인(證人) 안동교회는 첫 예배를 드린 후 부인전도회가 조직되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13년 2월 7일 여전도회가 조직되었고, 1년이 지난 1914년에 다비다회란 이름으로 비공식적으로 활동하다가 수개월 후 당회의 허락을 받아 정식 여전도회로 발족했다. 인근 교회들에 화제 거리가 될 정도로 안동교회 여전도 회원들은 전도와 봉사에 적극적이고 열성적이었다. 특히 매주일 마다 회원들끼리 우승을 겨룰 정도로 회원 전원이 열심히 활동했다. 당시 여전도회 회원 자격은 교회에 출석하는 모든 여성이 아니라 세례 받은 여성에 제한했다. 자격을 갖춘 성도들이 참여케 함으로써 처음부터 질(質) 높은 여전도회가 되게 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김점향을 키운 외조모 김남홍은 안동교회의 초대교인으로 여전도회 활동에도 열심을 낸 여성이었다. 아마 김점향은 외조모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거의 일평생 안동교회 여전도회에 헌신한 김점향 권사는 1920년대 안동교회 여전도회 회원이 30~40명 정도 되었다고 증언했다. 그때 중심회원은 원홍이, 원화순, 김남홍, 정선희, 이인홍 장로 모친, 장경영 권사의 모친과 고모 등 제씨였음을 김점향은 기억한다. 이들은 본래 여전도회 목적대로 일상에서 개인적으로 전도하는 일에 힘을 쏟았고, 이들의 전도는 초기 안동지역 교회의 부흥을 가져오게 했다. 1928년 2월 19일 안동교회에서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가 창립되었다. 그러나 이미 안동선교부는 경안노회 경내의 여전도회 회원들을 위한 사경회를 1917년부터 매년 개최하고 있었다. 사경회는 처음에 교회 단위로 실시되다가 지역 내 여러 교회들이 연합해 연합사경회로 모이게 되었고, 이것을 도사경회라고 불렀다. 이런 배경 속에서 안동지역의 첫 도사경회는 1917년 1월 21일에 열렸는데, 강사는 이희봉 목사와 맹의와 선교사였다. 이 때 모인 수는 남녀 합하여 230명 정도나 되었다. 경안노회 여전도회는 안동교회 여전도회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창립되었다. 당시 발기인은 권애라 선교사, 안동교회 김정숙 전도사, 안동교회 성도 김향란, 김정희, 안주봉, 김순애 제씨, 그리고 권신희 집사와 김화석 은퇴 장로의 조모인 권순옥 집사가 포함되었다. 특히 초대회장에 김정숙, 회계 김정희, 부서기 김순애, 회계 권신희, 부회계 권순옥 등 임원 대부분을 안동교회 여전도회 회원들이 맡았다. 또한, 1929년부터 안동교회 임학수 목사가 고문을 맡음으로써 안동교회는 노회 내 여전도회 사역에 더욱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되었다.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 10주년 기념사진. 맨 아래 왼쪽 네번째가 김점향 권사. 김정숙 전도사는 둘째줄 정중앙. 아래 두번째 줄 좌측에 4명의 여선교사.(왼쪽부터 매켄지 선교사, 권애라 선교사, 옥호열 선교사의 부인, 안두조 선교사의 부인) 1928년 2월 19일 창립된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 제10회 총회 때 사진을 보면 당시 경안노회 여전도회를 이끌었던 여성 지도자들의 면면을 볼 수 있다. 특히 여성선교사들이 보이는데, 그들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배후에서 헌신했다. 연합회는 비록 여성선교사들의 도움은 받았지만 지역출신 여성들이 주체적이고 자율적으로 여전도회를 이끌어 갔다. 당시 22세인 김점향도 사진에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는 이미 연합회에서 책임 있고 적극적인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점향은 거의 일평생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를 위해 헌신했는데, 1932년부터 1956년까지 무려 24년 동안 연합회 서기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토록 오랫동안 서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회장은 단 일회에 그쳤다. 그는 겸손히 낮은 자리에서 여전도회를 섬긴 여종이었던 것이다. 당시 서기는 여전도회의 사업을 추진하고 살림살이를 챙겨야 하는 실무 책임자였다. 그는 지 교회의 여전도회가 본연의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가 김점향은 1965년에 개회된 제37회 총회 때 제9대 회장으로 피선되어 오래 동안 얻은 노하우로 여전도회를 잘 섬겼다. 그는 수십 년 동안 수면 밑에 감춰진 안동지역 교회의 실질적인 여성 지도자였던 것이다. ▲1965년 9월 13~16일 까지 있었던 여전도회대회 사진. 1965년 1월 제37회 경안노회여전도회 총회에서 회장으로 피선된 김점향은 경안노회여전도회 회장의 신분으로 참석했다. 8. 개척교회를 적극적으로 도운 여성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는 설립된 이후 지역의 교회들을 개척하는 데 앞장서 왔다. 1933년 의성 뒷골교회, 1948년 봉화군 물야교회, 1949년 임동면 사월교회, 1952년 월곡교회를 개척했다. 또한, 1955년부터 안동교회는 김수만 장로와 김금이 전도사를 개척지에 파송하여 길안 지역 전도를 시작했다. 이 때 연합회는 이를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연합회는 또 1955년 제26회 총회에서 신덕교회 개척, 사월교회 전도인 파송, 물야교회 전도사 파송을 결의했다. 이어 1956년 제28회 총회는 도산교회와 관덕교회를, 제31회 총회는 임하교회를, 제34회 총회는 송사교회를, 제40회 총회는 신촌교회를 돕기로 결의했다. 여전도회연합회는 교회를 세웠을 뿐 아니라 건축비 후원, 그리고 전도인 파송과 사례비까지 보조했다. 연합회는 지역을 복음화 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개척한 이후에도 교회들을 든든히 세우는 데 사명을 잘 감당했다. 오랜 세월동안 연합회를 서기와 회장으로 섬긴 김점향은 당연히 여전도회의 도움을 통해 세워진 교회들과 관련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김수만 장로가 길안 지역의 여러 교회를 개척할 때 연합회와 안동교회 여전도회에서 후원했다. 김수만 장로에 의해 송사교회와 금곡교회는 동시에 개척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송사교회를 개척할 때 김점향은 교인 4명과 함께 건축을 도왔다. 또한, 김점향은 길안의 금곡교회 개척을 여러 성도들과 함께 도왔다. 특히 그는 장남이 길안으로 발령을 받자 금곡교회에 나가도록 권면했으며, 다리가 불편한 김수만 장로를 금곡교회까지 이정자 집사(안동교회)의 남편이 지게에 지고 가도록 권면했다고 한다. 또 오산교회를 건축할 때는 너무 작은 예배당을 보고는 조금 넓은 공간의 예배당을 건축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오산교회가 준공된 이후 안동교회 여전도회는 계속해서 교역자의 사례를 일정 부분 책임졌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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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아름다운 우간다!◆ 우간다 선교 현장을 다녀와서 서 정 애 목사 청도 꽃동산교회 담임 ▲서정애 목사(좌)와 현지 교회 담임목사 부부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 14:28) 저는 몇 년 전, 지인 목사님을 통해 “아프리카 우간다에는 일천백만 원이면 교회를 지을 수 있고, 이 예배당에서는 200~300명이 예배드릴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2017년 2월, (사)유니온비전미션 우간다 단기 선교팀에 합류하게 됐습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의 선교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지를 돌아보는 내내 왠지 모르게 아무도 뭐라 말을 하지 않는데 제 눈에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기독교 5대째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지금까지 사랑과 복을 누리며 살아온 나의 삶이 그들 앞에서 미안해지고 부끄러워졌습니다. 한없이 눈물이 나서 남들이 볼까 봐 조용히 눈물을 훔치곤 했습니다. 그렇게 저의 단기 선교여행은 울고 갔다가 울고 돌아온 여행이었습니다. 김진현 선교사님을 통해서 유니온비전미션에서 진행하는 우간다 교회 재건축 사역에 대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무너지고 쓰러져가는 우간다 예배당이 우간다 목회자와 한국 후원자들의 연합으로 새롭게 건축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간다 목회자들은 눈에 불을 켜고 자신들이 섬기는 교회도 재건축되어 새로운 부흥이 일어나기를 위해 기도하고 노력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드디어 우간다를 향한 저의 선교의 비전도 결실이 맺어졌습니다. 2018년 2월, 청도 꽃동산교회 13주년 기념으로 우간다에 교회 1곳을 건축하고 선교지를 방문하고 왔습니다. 너무 감사해서 또 눈물이 났습니다. 2019년 2월에는 14주년 기념으로 1곳을 더 건축했으며, 저를 통하여 평생에 교회를 건축하고 싶어 하셨던 분들이 뜻을 모아 5곳을 건축하게 됐습니다. 2년 만에 총 7곳에 교회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될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올해 2월에 새로 건축했던 교회의 현지 담임목사님은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저희 센터 포 에반젤리즘 카무리교회는 예배당을 새로 건축할 힘도, 능력도 없어 절망 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니온비전미션 성경 컨퍼런스를 통해 성경을 배웠고, 다시 희망을 얻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입에서는 연신 “아멘, 할렐루야!”가 흘러나왔습니다. 무릎을 꿇고 고마움을 표시하며, 눈에는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우간다 성도님들의 마음은 너무 순수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맑은 눈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전도하기에 딱 좋은 나라,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보이는 나라. 술, 담배가 절제되어 있고, 배움의 열정으로 가득 찬 나라가 바로 우간다입니다. 저는 청도 꽃동산교회 15주년이 되는 내년에도 3번째 교회 건축을 기도하면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의 기도를, 저의 생각과 말하는 것을 다 듣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두 손을 모아봅니다. 아름다운 우간다, 다음에 또 만나요. 샬롬! ▲우간다 <센터 포 에반젤리즘 카무리교회>의 입당예배 모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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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시찰회 베트남 다낭 의료선교▲김종순 목사(좌)가 선교물품과 선교비를 전달하고 있다. 예장(통합) 경서노회 상주시찰회(시찰장 김종순 목사) 주관, 경서노회 남선교회 후원으로 지난 3월 3일에서 8일까지 ‘베트남 다낭 의료선교 및 수련회’가 총 42명이 참여한 가운데 선교지(베트남 다낭·호이안·후에)에서 진행됐습니다. 선교지를 향해 출발 이번 베트남 다낭지역 의료선교는 베트남 국가의 특성상 선교지역에 직접 의료진을 대동하여 현지 주민들에게 진료하고 약을 조제하는 일은 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선교팀은 미리 준비한 의약품과 기념품, 그리고 학용품과 간식을 전달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다행히 이 지역에는 상주교회가 훈련해 파송한 퐁 목사님과 현지 목사님이 개척한 교회들이 있어서 선교 물품들을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1. 아촘2교회 3년 전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길이 험했는데 그동안 길이 잘 정비되어 있었습니다. 이 교회에 시무하시는 웬탄홍 목사를 반갑게 만나 기도회를 가진 후, 준비한 상비약(파스, 연고, 구충제, 감기약 등)과 타올, 학용품, 사탕, 3년 전에 찍은 사진, 그리고 선교비 600불을 전달했습니다. <아촘2교회>는 현재 주일에 250명이 모인다고 합니다. 특히 이곳엔 소수민족들이 신앙의 열정이 많아 더 많은 현지 교회를 지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고 합니다. 2. 푸란교회 <아촘2교회> 일정을 마친 후 우리는 <푸란교회>로 향했습니다. 부이 단력 목사가 시무하는 이곳에서도 서로의 만남을 환영사와 인사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에도 선교비 200불과 함께 준비해 온 상비약과 기념품, 3년 전에 찍은 사진을 전달했습니다. 3. 퐁 목사가 짓고 있는 M-center 방문 <푸란교회> 행사를 마친 후 다시 버스로 2시간을 달려서, 저녁 무렵 퐁 목사가 건축 중인 〈M-center〉를 방문했습니다. 이곳은 다낭지역 선교센터로 운영하기 위해 건축 중인 4층 규모의 건물입니다. 이곳에서 목회자 배출을 위한 수련은 물론 선교 전략을 짜며, 이 지역 어린이들을 위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게 됩니다. 건물 외관은 다 완공된 셈이고 이제 마무리 작업과 내부 집기만 들어오면 그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최신 센터입니다. 4. 빈쯩엉교회 〈빈쯩엉교회〉, 〈썬하교회〉를 방문하는 날은 오전 일찍 모여서 출발했습니다. 가는 길은 고속도로가 있어 좋았지만 길은 멀었습니다. 중간에 점심을 먹고 1시 20분에야 〈빈쯩엉교회〉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미 목사가 시무하고 있었습니다. 환영식을 한 후 준비해 온 비상약품과 타올, 학용품, 간식 등을 전달했습니다. 교회가 아주 깨끗하고 새로웠습니다. 교회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기념촬영을 한 후 〈썬하교회〉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5. 썬하교회 2시 50분쯤 〈썬하교회〉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갑 전도사가 시무하고 있었습니다. 이 교회는 정식 교회로 건축한 곳이 아니라 현지인 가정을 교회로 사용하고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도 환영인사와 의약품 및 기념품을 전달하고 기념촬영 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교회를 떠나왔습니다. 저녁 식사 장소에서는 경서노회 노회장 곽희주 목사가 주성권 선교사와 퐁 목사에게 선교비를 전달했습니다. 선교지를 다녀와서 이번 선교여행은 선교에 눈을 뜰 수 있는 기회요 베트남을 알아가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현지 교회에 함께하심으로 모든 선교일정을 은혜롭게 마칠 수 있었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기록: 김재수 장로(경서노회 남선교회 부회장, 신봉교회 은퇴장로) 자료제공: 경서노회 상주시찰회 ▲베트남 빈쯩엉 회에서 선교물품을 전달하고 격려한 후 기념촬영.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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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기도(2)브라더 앤드류 오픈도어 설립자 “이름이 거룩히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마 6:9~10) 우리가 “하늘에 계신”이라고 기도하며,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말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말하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심오한 말이며 기도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기도에는 불완전하고, 병들고, 불구가 되고, 죄 있는 모든 것 속에 변화가 일어나기를 구하는 뜻이 포함된다. 이 구절에 기초하여 우리는 이 사람, 이 상황, 이 나라, 이 부족, 이 교회, 이 정부가 변화되어, 정의와 의와 온전한 마음과 몸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이 근본 방침인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도록 기도할 수 있다. 여기에는 또한 기독교 교육,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 수호, 무죄한 자에 대한 보호, 성경 반입과 세상의 모든 어두운 구석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선교사의 입국을 위한 국경 개방과 같은 하나님 나라의 여러 가지 요소를 위한 기도도 포함된다. 여전히 공산주의의 지배를 받는 나라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를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오픈도어선교회 기도 동역자들은 이러한 기도를, 1989년 12월 14일, 그러니까 차우체스크 정부를 무너뜨린 루마니아 의거가 일어나기 정확히 사흘 전에 시작했다. 그 날짜의 주간 기도 제목은 다음과 같다. “어려운 상황에 있는 루마니아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또한 이 나라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를 위해 기도하자.” 같은 날 우리는 기도 동역자들에게 “아직 소련 감옥에 갇혀 있는 몇몇 그리스도인의 석방을 위하여” 기도를 요청했다. 하나님은 두 기도 모두 하룻밤 사이에 응답하셨다. 전 세계의 수 없이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것을 위해 기도했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우리가 모두 꿈도 꾸지 못한 방식의 응답이었다. 이것을 보고 우리는, 악랄하고 압제적인 정권이 사람들을 인질로 잡은 모든 곳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를, 더욱 담대하고 권위 있게 기도해야 한다. 이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에 대해 살펴보자.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반대나 도전을 받지 않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대단한 기도이며 대단한 과업이 아닌가! 이 세상이 가고 있는 방향에 완전히 역행하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아는 구원받지 않은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를 기도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할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려 주실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뜻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막16:15)하는 것임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모든 미전도 지역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이웃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다. 의로움 또한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과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불의를 생각할 수 있다. 우리 모두 안에는 불의가 대단히 많이 있다. 우리의 불의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조처를 하고 있는가? (오픈도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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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대구경북기독교사적협의회 개최예장(통합) 총회 대구경북기독교사적협의회(회장 손산문 목사) 제2회 정기 모임이 지난 6일 대구제일교회 역사관에서 열렸다. 참석한 회원은 자천교회(사적 제2호) 손산문 목사 이상록 장로, 척곡교회(사적 제3호) 박영순 전도사를 비롯하여 9개 교회 12명이 참석했다. 이번 모임에서는 대구제일교회 역사관과 YMCA역사관 관람, 선교사들의 활동 영상 시청, 사적 지정식 보고, 각 교회와 사적지를 소개하는 팜플렛 및 소책자 제작 관련 협조 요청 등을 협의했다. 한편, 본 협의회는 대구 경북 지역에 있는 기독교 사적지를 네트워크하여 보다 체계적인 관리를 하고자 지난해 10월 창립되었다. ▲제2회 대구경북기독교사적협의회 회의에 참석한 후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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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4색 7080 찬양콘서트’ 개최극동방송 구미본부(본부장 조상덕)는 구미스튜디오 개설 기념으로 지난 10일 구미제일교회(김경택 목사 시무)당에서 ‘4인4색 7080 찬양콘서트’를 개최했다. 구미제일교회 본당을 가득 메운 1,000여 명의 성도들은 한국 가스펠의 역사를 썼던 장욱조, 노문환, 김석균, 김민식 4명의 찬양사역자가 부르는 ‘난 예수가 좋다오’ ‘주님 손잡고 일어서세요!’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불 속에라도 들어가서’ 등을 함께 부르며 은혜 충만한 시간을 가졌다. 또한, 공연을 통해 사랑과 나눔의 가치를 공감한 많은 성도들이 극동방송 방송사역에 동참하기 위해 전파선교사로 가입하기도 했다. 한편, 극동방송 구미본부는 대구‧경북의 복음 전파 사역 확장을 위해 지난해 12월 7일 스튜디오를 개설하고 방송사역을 시작했다. ▲콘서트를 진행하는 찬양사역자 노문환, 장욱조, 김석균, 김민식.(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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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동안 한 교회를 섬긴 여성지도자 김점향 권사(2)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점향 권사(1907~1998) 4. 여자성경학교에서 공부한 교회의 재원(才媛) 1908년 안동선교부가 세워진 후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성경공부 열풍이 불었다. 안동선교 초기인 1910년 선교사들의 보고에 의하면 영주 내매에서 개설되었던 6일간의 성경공부 모임에 무려 270여 명의 남자들이 참여했다. 또한 이듬해인 1911년에는 더욱 빈번한 성경공부 모임이 있어, 8차례에 걸쳐 1,340명이 성경공부 모임에 참여했다. 이것을 본 선교사들은 앞으로 지역교회를 지도해 갈 지도자를 양육할 목적으로 1912년 여자성경학원을 세웠다. 여자성경학원은 선교사 사택을 이용했다. 여성성경공부반은 일주일에 두 번씩 오월번 선교사 사택에서 모여 새디 선교사가 월요일에는 젊은여성반, 목요일에는 중년여성반을 인도하였다. 특히 1914년 안동선교부에 부임한 인노절 선교사는 보다 체계적이고 확대된 성경학교 운영을 위해 1920년 4월 여자성경학교를 남녀성경학교로 확대개편 하였다. 이때 인노절 선교사는 성경학교의 교장, 권찬영 선교사와 안대선 선교사는 교사였다. 개교 첫해인 1920년 가을, 비록 독립된 학교 건물은 없었지만, 무려 130명이 등록했으며 성소병원 진료실에서 수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성경 외에 위생, 산수, 한문, 음악, 개인전도법도 가르쳤다. ▲1920년 4월 10일 개원한 안동남녀성경학교 학생 중 1926년 촬영한 여자성경반 학생들 사진.(오른쪽 남성은 당시 안동교회 4대 담임인 박상동 목사) 배경 건물은 1925년 준공한 인노절기념성경학교로 후에 경안신학원으로 개칭하여 수많은 교역자와 장로, 권사 등 평신도를 배출했다. 김점향은 1920년 중반 여자성경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수학했다. 아마 성경학교의 졸업은 그로 하여금 보다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했을 것이다. 그는 20대 초반 이미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 젊은 여성의 중심인물이었다. 그 결과 1932년부터 1956년까지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의 서기였다. 무려 24년 동안 서기로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가 여자성경학교에서 체계적으로 성경과 기초적인 신학, 그리고 교회 등에 관해 공부했기 때문일 것이다. 5. 성전건축을 위해 쌀 한가마를 헌금한 가정 지금도 예배를 드리고 있는 안동교회 예배당을 돌집 예배당이라고 부른다. 이유는 화강암을 쌓아 건축되었기 때문이다. 안동교회 예배당은 1936년 봄에 기공하여 1937년 4월 6일에 기초면적 160평의 2층 건물이 준공되었다. 예배당 건축계획은 안동교회 4대 담임인 박상동 목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기성회를 조직하고 1926년 9월 19일 첫 번째 회의를 했다. 하지만 박 목사는 교회를 사임하고 새로운 임지인 일본 오사카로 떠나게 됐다. 따라서 돌집 예배당은 후임인 5대 임학수 목사로부터 본격화되었다. 또한, 경안노회는 1933년 2월 경안노회의 중심교회인 안동교회 본당 신축에 모든 교회가 힘써 헌금할 것을 결정함으로써 돌집 예배당 신축은 안동교회 성도 뿐 아니라 노회 경내 교회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졌다. 안동교회 석조 예배당의 설계는 권찬영 선교사의 의뢰를 받아 당시 일본에 와 있던 미국인 선교사인 보리스였고, 시공은 당시 최고의 건축회사인 서울 복음건축장을 운영하고 있던 중국인 왕공온(王公溫)이었다. 임학수 목사는 예배당 신축을 위해 선교사들을 꾸준히 설득했으며, 노회 경내의 여러 교회를 순방하면서 경안노회 중심인 안동교회 예배당 신축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건축모금도 계속했다. 또한, 예배당 건축에는 어린이·어른·남녀 구분 없이 온 성도들이 마음과 뜻을 다했다. ▲역사적인 안동교회 2층 석조예배당은 교인과 지역교회, 안동주재 선교사, 타지역선교부, 안동성소병원 의사들, 뜻있는 사람들의 합력으로 완성되었으며, 오늘까지 경북북부지역 교회 부흥의 센터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하고 있다. 이때 김점향의 가족도 동참했다. 당시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온 성도들이 힘을 모을 때 김점향의 남편인 강신효는 적극적으로 참여 의사를 밝혔다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굶더라도 교회 짓는 데 최선을 다해 헌금해야 한다.” 김점향 가정은 당시에 큰 금액인 쌀 한 가마를 건축헌금으로 했다고 한다. 또한 십 년 전 90을 넘긴 한 장로님은 예배당이 건축될 때 자신이 어렸지만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예배당 건축에 사용된 돌 2개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말씀하신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안동교회 온 성도들은 교회를 건축하는 데 한마음이 되어 낙동강에서 모래를 파오는 사람도 있었고, 돌을 지고 옮기는 사람도 있었다. 6. 안동교회 첫 권사 3인 중 한 명 1746년 존 웨슬리는 ‘권고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 권사(勸師)라는 직분을 만들었다. 권사는 목회자를 돕기 위하여 전도와 봉사, 심방, 그리고 권면 등을 위하여 선출되었다. 이 권사 직분은 미국 감리교회를 통해서 한국의 감리교회, 그리고 장로교회에서 사용되었다. 한국에서는 1955년 제40회 예수교장로교총회에서 봉사를 잘 감당하는 여성의 직분으로 권사를 주기 시작했다. ▲1985년에 있었던 기관별 경창대회에 참석한 여전도회 회원의 모습.(오른쪽 끝이 김점향 권사, 오른쪽에서 4번째가 송점출 권사) 1968년 첫 권사로 임직한 3명의 권사 중 김일애 권사는 1972년에 별세하여 이 사진에서 그 얼굴을 볼 수 없다. 비록 1955년 장로교단에서 권사가 시작되었지만, 안동교회의 첫 권사는 13년이 지난 후 1968년 8월 3일에 배출되었다. 이때 취임한 권사는 3명이었으며, 송점출, 김일애, 김점향 권사이다. 이들은 이미 안동교회와 경안노회를 위해 충성을 다해 헌신해온 전설적인 여성들이었다. 이들의 권사 취임으로 안동교회는 항존직에도 여성이 포함되는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었다. 첫 권사로 취임한 3명의 권사 중에서 김일애 권사는 1972년 1월 16일 별세함으로, 송점출 권사는 1975년 3월 30일 정년으로 은퇴했다. 그리고 김점향 권사는 1978년 정년으로 은퇴했다. 1969년 11월 20일 경안노회 선교 60주년 기념식이 안동교회에서 있었다. 이때 경안노회 경내에 14명의 60년 이상 계속 믿음을 지킨 성도가 있었는데, 이 중에 김점향 권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안동교회에서 첫 권사가 취임 이후 두 번째 권사 취임은 1년 반이 지난 1971년 역시 3명의 권사가 취임했을 정도로 권사 취임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다. 설립된 지 70년이 되는 1970년대까지 안동교회에서 취임한 권사의 총수가 11명밖에 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김점향의 초대 권사 취임은 그만큼 상징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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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장로총연합회, 구미샘물호스피스에 후원의 손길구미시장로총연합회(회장 이준욱 장로)는 지난 3월 28일(목) 구미샘물호스피스(이사장 이상영, 상임이사 이기우)를 방문하고 후원금 100만 원을 기탁했다. 이준욱 장로는 “지역에서 말기 암 등의 환우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보는 데 애쓰는 구미샘물호스피스의 봉사 활동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며 “봉사단체 및 선교단체들을 후원하는 일은 또 하나의 선교라고 생각해서 후원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기우 구미샘물호스피스 상임이사는 “귀한 나눔을 베푼 구미시장로총연합회 측에 감사드리며, 환우들을 위한 봉사활동에 소중한 후원금을 사용하여 이웃사랑의 뜻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한편, 구미시장로총연합회는 성탄트리점등식 주최, 미자립교회 목회자 지원, 해외선교사 지원, 군부대선교 지원 등 매년 선교와 지역 복음화 사업에 앞장서고 있다. ▲후원금을 전달하면서 구미시장로총연합회 임원진과 구미샘물호스피스 이사진의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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