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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기쁨의교회, ‘천국복음과 생활선교’ 세미나 개최박진석 담임목사 “하나님 나라 통치권 회복 기대” ▲포항 기쁨의교회 ‘천국복음과 생활선교’ 세미나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포항 기쁨의교회(담임목사 박진석)는 10월 10일(주일)부터 31일(주일)까지 4주간 ‘천국복음과 생활선교’를 주제로 세미나를 진행했다. 이 세미나는 코로나19로 목회 전반의 변화와 더불어 선교와 전도의 패러다임이 바뀜에 따라 선교 전략을 공유하고 천국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세미나에서는 복지, 문화, 일터, 교육이라는 4가지 영역의 강연과 사례발표로 진행했다. 복지 영역은 최무열 목사(전 부산장신대 총장), 문화 영역은 손은희 목사(총회문화법인 사무총장), 일터 영역은 최복이 본죽 대표, 교육 영역은 박혜경 한동글로벌학교 교장이 강연을 맡았다. 이 세미나를 통해 기쁨의교회는 교인들이 생활의 각 영역에서 생활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전을 받고 삶에서 적용 가능한 실천 과제들을 찾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세미나를 기획한 박진석 기쁨의교회 담임목사는 “이번 세미나를 통해 교우들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권을 각 영역에서 회복할 수 있는 지혜를 찾기를 바란다”라며 “교회가 시대의 흐름 속에 선교하기 위한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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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애굽기(28)나의 출애굽기(28) 드보라 67. 백인 선교사님을 통해 지식을 익히다 그렇게 도움을 받다가 하루는 그 백인 선교사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제안을 하셨다. “저희 생각에 드보라 씨는 더 나은 교육을 받고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저희가 드보라님께 성경뿐만 아니라 다양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나에게는 너무나 고마운 제안이었다. 고난의 행군과 중국 생활 속에서 주로 생계를 걱정하고 먹고살기 바빴던 나로서는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마치 꿈과 같았다. 나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을 귀하게 생각해주시다니 ···. 감사한 마음이었다. 그렇게 나는 권유대로 선교사님을 따라 좀 더 큰 도시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2일에 한 번씩 그 선교사님 집에 찾아가 여러 가지 지식을 익혔다. 선교사님 집에서 처음 접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컴퓨터였다. 선교사님은 나에게 컴퓨터도 가르쳐주시고 여러 동영상도 보여주셨는데 특별히 북한에 대한 영상을 많이 보여주셨다. 차인표씨 주연의 탈북자의 애환을 담은 영화 ‘크로싱’도 그 집에서 봤다. 그 영상을 함께 보면서 나는 거기 나오는 악역들을 보며 ‘이 나쁜놈들 저 나쁜놈들’ 하고 있는데 슬쩍 옆의 백인 선교사님을 보니 퍼런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북한 사람이 받는 고통에 나보다도 더 마음 아파하시는구나 ···. 무덤덤했던 내 마음도 왠지 뭉클해졌다. 내가 감동받을 일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 선교사님 댁에는 한 탈북민 갓난아기가 있었다. 아기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북송되면서 남겨진 아이였다. 마침 백인 선교사님의 사모님은 생후 10개월 되는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은 이유식 먹이고 그 젖을 그 아이에게 먹이셨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북한의 아이를 이 백인 선교사 가정이 얼마나 귀하게 돌보는지를 옆에서 지켜보며 나는 북에서 배웠던 각종 교육이 잘못되었음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백인 선교사라고 하면 미제 승냥이다 스파이다 악마 같은 사람이라고 욕했는데 이 사람은 자기를 원쑤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이렇게나 사랑하는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내가 북한에서 자유롭게 발언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북에서 가르친 내용이 다 거짓이라고 폭로하고 싶었다. 남조선 괴뢰도당이, 미제 승냥이가 오히려 우리를 더 생각하고 불쌍히 여기고 있다고 꼭 북의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68. 중국을 벗어나 복음 전할 기회를 갖기로 하다 그렇게 선교사님 덕분에 공부도 하고 생활도 지원받으면서 나는 중국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선교사님을 통해 공부도 하고 복음 안에서 나를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서 가만히 숨어서 생활해야 하는 이곳에 머물기보다는 더 자유롭게 복음도 전하고 기회 되는대로 북한의 형제자매들을 위해 일하고 싶었다. 선교사님도 내 생각을 듣자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나섰다. 처음에는 미국을 알아보았지만 미국으로 난민 신청을 하거나 이민을 가기란 쉽지 않았다. 난민 신청을 하고 국적취득 하는 데 최소 수년은 걸린다고 했다. 반면 한국은 국적취득이 어렵지 않다. 게다가 TV에 탈북민들 활동하는 것을 보고 남조선에 가도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오픈도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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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2)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2)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안대선 선교사 (W.J.Anderson, 1890~1960) 목차 서문 1. 안대선의 출생지 2. 안대선의 출신대학과 신학대학원 3. 안대선의 결혼과 사별 4. 안대선의 안동선교부 부임 5. 안대선과 안동기독청년면려회 6. 안대선과 전국기독청년면려회 7. 안대선의 그 외 사역 8. 안대선의 퇴임 및 별세 3. 안대선의 결혼과 사별 안대선의 부인인 안의리는 1892년 8월 네브래스카 주 새드론(Shadron)에서 출생했지만 로스앤젤레스에서 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의리는 옥시덴탈 대학 재학 시절 켈로그 교수가 지도하는 성경 공부 모임에서 안대선과 만났는데, 이 시기는 북장로교 해외선교부가 안대선을 한국으로 파송하기로 결정한 이후였기 때문에 안의리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교제하면서 선교의 비전을 공유하고 한국에 관해 공부하면서 미리 선교지로 출발할 준비를 한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1917년 8월 결혼한 안대선과 안의리는 선교를 위한 준비 없이 한 달 만인 1917년 9월 한국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한국에 도착한 안대선 부부는 순회선교에 최선을 다했다. 안의리 선교사는 남편과 함께 안동지역의 농촌과 산촌을 방문하며 3·1운동의 실패로 실의에 빠져 있던 청년들에게 복음과 희망을 전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사역으로 생각했다. 특히 안의리는 교회 안팎에서 여성 교육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교회가 좀 더 여성교육에 노력하기를 강조했다. 안동선교부에서 사역할 때 안의리는 안동남녀성경학원에서 여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그는 한국인들에게 ‘절대 화내지 않는 선생’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로 후덕하고 온유한 성격의 교사였다. 안동에서 귀경한 안의리는 서울 정신여학교와 피어선성경학원에서 학생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또한 그는 수년 동안 여성 선교사 모임의 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활발한 여성 선교사였다. 안의리는 안동에서 출생한 지 7개월 된 딸 도로시(Dorothy)를 땅에 묻은 후 셜리(Shirley), 필리스(Phylis), 로라 베드(Lola Bete) 등 세 딸도 모두 안동에서 낳았다. 마을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교수함으로써 평신도 양육에 열심이던 안의리는 한국에 도착한 지 17년이 지난 1934년 11월 추수감사절을 보내고 42세에 심장마비로 하늘나라로 갔다. 비록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있는 그의 묘는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는 당시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할 사역을 감당하고 순교 당했기에 그의 죽음은 고결하다고 할 수 있다, 4. 안대선의 안동선교부 부임 1) 첫 딸의 죽음 1917년 가을, 서울에 도착한 안대선 부부는 곧바로 안동선교부로 부임했다. 안동선교부에는 1909년 부임한 오월번 선교사, 1910년에 부임한 권찬영 선교사, 그리고 1914년에 부임한 인노절 선교사가 주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1년 전인 1916년 오월번 선교사가 안동을 떠나 평양으로 이임했기 때문에 안대선 선교사는 결원이 생긴 안동선교부로 신속히 부임해야만 했을 것이다. 안대선의 이름은 1918년 1월 1일 저녁 7시 대구동산성경학교에서 회집된 제3회 경북노회에 처음 등장하는데, 이것은 그가 1917년 안동선교부에 부임했음을 알리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안대선 부부는 안동에 도착하자마자 큰 슬픔을 경험해야만 했다. 1919년 6월 12일에 출생한 첫 딸 도로시가 1920년 1월 25일 7개월 만에 당시 풍토병인 이질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안대선은 도로시의 묘비에 “예수님과 함께(With Jesus)”라고 적었다. 결혼하자마자 선교지인 한국으로 출발했고, 안대선과 안의리 두 사람의 사랑의 결실로 얻은 첫아기의 죽음으로 이들은 큰 상실감에 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슬픔을 이겨내고 주어진 사역에 열과 성을 다하여 안동선교에 있어서 새로운 사역의 장(場)을 마련했다. 참고로 안동 경안고등학교 정문 입구 좌측에 3기의 선교사의 무덤이 있는데, 하나는 인노절 선교사의 묘이고, 다른 두 기는 한 살도 되지 않은 안대선의 딸 도로시의 무덤, 그리고 옥호열 선교사의 2살 난 아들 윌리엄의 무덤이다. 2) 성경학교 교사 안대선은 안동선교부의 센터가 있는 안동을 근거지로 영주, 의성, 예천, 청송 지역 등지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우고, 이미 설립된 교회들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또한 안동지역 성도들에게 체계적으로 성경을 가르침으로써 평신도 양육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안동에는 1912년 처음으로 여자성경학원이 설립되어 평신도 여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하지만 안동지역 평신도의 성경공부에 관한 관심과 열망이 여타 지역에 비해 폭발적이어서 보다 체계적인 성경학교 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안동선교부는 1920년 4월 10일 안동남녀성경학교를 개교했는데, 이때 초대교장은 인노절 선교사, 교사는 권찬영 선교사와 안대선 선교사였다. 안동남녀성경학교는 남녀 모두를 대상으로 첫 입학생을 모집했는데, 1920년 가을에 1백30명이 등록했다. 성경뿐 아니라 수학, 한문, 음악 등 교양과목도 함께 가르쳤다. 그런데 학교의 교실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으므로 첫 학기의 수업이 성소병원 진료실에서 진행되었다. 이 학교는 학제를 1년에 두 학기로 나누었고 한 학기에 한 달간씩 수업을 진행하였다. 1922년 교장 인노절 선교사가 순교한 후 1925년 12월 안동성경학교 교사와 기숙사가 새롭게 준공되었으며, 학교의 이름을 개명해 ‘인노절선교사기념성경학교’라고 명명(命名)하였다. ▲안동선교부 기지에 선교사 사택이 준공된 후의 모습. 사진에는 준공된 여러 채의 선교사 사택을 볼 수 있는데, 좌측 숲은 현재 경안고등학교로 오월번 선교사 가족이 1911년 12월 27일 입주한 사택으로 알려져 있다.(사진2) ▲1925년 안동에 준공된 ‘인노절기념성경학교’의 모습. 2005년 철거되어 그 자리에 성소병원 신관이 건축되기 전까지 80년 동안 안동지역을 위한 목회자 양성을 넘어 한국교회와 세계선교에 헌신하는 주의 종들을 배출했다.(사진3)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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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다니엘기도회, 11월 1일부터 21일간 대장정 시작1만4천여 교회 참여 ··· 21일까지 유튜브 등 생중계 ▲김은호 오륜교회 목사가 11월 1일 개막한 ‘2021 다니엘기도회’에서 설교하고 있다. 기도회는 오는 21일까지 이어진다.(사진=다니엘기도회) ‘2021 다니엘기도회’가 지난 11월 1일 서울 오륜교회(담임목사 김은호)에서 개막했다. 올해는 1만4천여 교회가 참여했으며 유튜브와 홈페이지를 통해 생중계한다. 첫날 중보기도 시간에는 대전 지역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니엘기도회는 매일 저녁 본 기도회 시작 전에 1시간가량 국내 지역과 지역교회를 위해 함께 기도한다. 참석자들은 대전 지역 2,700여 교회들이 복음 안에서 연합을 이루고, 대전 시민들이 복음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중보기도 했다. 이어 첫날 간증자로 나선 다니엘기도회 운영위원장 김은호 목사는 ‘이제 역전되리라(삿 11:1~11)’를 주제로 설교했다. 김 목사는 “길르앗 사람 입다는 기생의 아들로서 불행의 분깃을 안고 태어났으며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결국 민족을 구원할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인생 역전의 은혜를 경험한 것”이라고 했다. 김 목사는 “인생을 살다보면 내 의지와 관계없이 불행할 수 있다. 심각한 병에 신음할 때도 있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처한 상황을 운명론적으로 받아들이지 말라. 우리의 믿음에 따라,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따라, 하나님께서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고 선포했다. 아울러 김 목사는 온·오프라인으로 참석한 모든 성도들을 향해 “교단과 교파가 다르고 섬기는 교회가 다르고 처한 상황이 다르지만,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며 “21일 동안 주의 보혈에 의지해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자. 기도회가 끝나면 우리 모두 간증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올해 다니엘기도회는 21일까지 매일 오후 8시부터 시작된다. 말씀 선포 시간에는 김은호 목사를 시작으로 이은상 선교사, 장진숙 작곡가, 류응렬 목사, 차길영 대표, 이옥 선교사, 지선 전도사, 김윤상 선교사, 신용백 목사, 박성현 교수, 김희아 집사, 김혜숙 선교사, 이승제 목사, 이수영 집사, 고성준 목사, 김명애 교수, 최명환 대표, 권오희 목사, 장세호 목사, 강내우 대표 등이 강사로 나선다. 마지막 21일은 간증의 밤으로 다양한 분야의 목회자와 평신도 사역자들을 통해 은혜로운 말씀과 간증이 선포될 예정이다. 한편, 1998년부터 시작된 다니엘기도회는 매년 11월 1일부터 진행되며, 20여 년 만에 1만여 교회와 40만여 성도가 참여하는 초교파적 연합기도회로 성장했다. 지난 2020년에는 13,991 교회에서 총 40만여 명의 교인이 참여하고 102개 국가 522개 해외 교회에서 접속했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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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대한감리회, 연회 12곳에서 5~6곳으로 축소 재편한다제34회 총회 입법의회 결의 ··· 감신·협성·목원 3개 신대원 통합도 추진 ▲기독교대한감리회 이철 감독회장(가운데)이 제34회 총회 입법의회를 진행하고 있다. 기독교대한감리회(감독회장 이철 목사, 이하 감리회) 제34회 총회 입법의회가 지난 10월 26일~27일 강원도 평창 한화리조트에서 개최됐다. 이번 입법의회에서는 연회재편과 본부구조 개편, 신학대학원 통합 추진 등 다수의 개혁 입법안들이 통과된 것으로 알려졌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현재 총회 산하 국내외 12개 연회 구조를 절반 수준인 5~6개로 축소하기로 한 것이다. 해당 안건은 찬성 245표, 반대 165표, 기권 4표로 통과됐다. 연회 명칭과 경계 조정 등 세부사항은 차기 입법의회인 2023년에 결정해 2026년부터 시행하기로 했다. 현장에서는 연회를 통폐합할 경우 연회별 담당 지역이 상대적으로 커지는 만큼 선교적 측면과 지방 교회들의 형편과 현실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뒤따를 것이라는 반대 의견도 제기됐다. 그러나 조직을 슬림화하는 것이 오히려 지금과 같은 위기의 때에 대응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는 찬성 측 주장이 더 힘을 얻었다. 감신대와 목원대, 협성대 등 3개 교단 신학교의 신학대학원 통합안도 가결됐다. 신학생 감소 등의 이유로 각 대학 자율에 맡겨 신대원 통합 논의를 이어왔으나 속도가 부진해지자 교단이 나선 것으로 보인다. 감리회는 내년 2월까지 통합 합의를 이루지 못한 경우, 교단에서 직접 ‘웨슬리신학대학원’(가칭) 신설을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2024년 3월 개교가 목표이며, 통합 신대원이 생기면 기존 3개 대학 신대원은 폐쇄한다. 관심을 끌었던 ‘공유 예배당’ 안건도 통과되어 감리회 헌법 교리와 장정 ‘개체교회의 설립’ 조항에 ‘예배처소 공유’ 부분이 추가됐다. 장정개정위원회 최헌영 위원장은 “코로나 시대에 임대료를 내지 못하는 등 어려운 교회 배려 차원의 제도”라며 “두세 교회가 건물을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이 밖에도 입법의회에서는 은급 문제, 이주민 선교사 및 부분 사역 부담임 신설, 사회법정 소송 관련 규정, 본부구조 개편 문제 등도 논의를 거쳐 개정이 이루어졌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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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1)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1)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안대선 선교사(W.J.Anderson, 1890~1960) 목차 서문 1. 안대선의 출생지 2. 안대선의 출신대학과 신학대학원 3. 안대선의 결혼과 사별 4. 안대선의 안동선교부 부임 5. 안대선과 안동기독청년면려회 6. 안대선과 전국기독청년면려회 7. 안대선의 그 외 사역 8. 안대선의 퇴임 및 별세 1. 서문 1893년 5월 5일 장로교 부산선교부 소속의 배위량(W.M.Baird) 선교사는 안동에 복음을 처음으로 전했다. 그 후 안동을 포함한 경북 북부지방의 복음화는 1899년 설립된 대구선교부에 의해 주도되었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안의와(J.E.Adams), 부해리(H.M.Bruen), 방위렴(W.M.Barrett) 등에 의해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도보로 사흘 길에 위치한 대구선교부의 경북 북부지역 복음사역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1908년 안동선교부의 설립이 결정되었으며, 안동, 의성, 영주, 봉화, 청송, 영주 등 경북 북부지방의 복음화를 가속시켰다. 특히 안동선교부 초기에 부임한 사우대(C.C.Sawtell), 오월번(A.G.Welbon), 권찬영(J.Y.Crothers), 인노절(R.E.Winn), 안대선(W.J.Anderson) 선교사 등은 순회 전도를 통해 많은 교회를 개척함으로써 안동지역 복음화에 기여했다. 1917년 안동선교부에 부임한 안대선 선교사는 3·1운동의 실패로 좌절하고 있는 청년들에게 기독청년면려회(基督靑年勉勵會) 운동을 소개함으로써 청년들이 성경과 신앙으로 훈련되어 희망을 갖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게 했다. 특히 안대선 선교사가 소개한 기독청년면려운동을 안동교회는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전국 최초로 조직된 임원을 당회가 허락함으로써 한국에서 기독청년면려운동 효시 교회가 되었다. 2021년은 한국교회 최초로 안동교회 당회가 기독청년면려회를 승인한 지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기독청년면려회는 시대에 따라 명칭을 달리하며 한국교회를 위해 봉사해 왔다. 청년면려회가 한국교회의 개혁과 부흥에 끼친 선한 영향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본 소고는 기독청년면려회에서 가장 큰 역할을 감당한 안대선 선교사에 관한 연구 논문이다. 한국으로 오기 전 안대선 선교사의 미국 생활, 출신대학과 신학대학원, 안동선교부의 부임과 주된 사역, 특히 기독청년면려회 운동에 끼친 그의 영향력, 면려운동 이외에 그가 활동한 사역들, 그리고 그의 가정에 관한 글이 본 소고에 포함되어 있다. 1. 안대선의 출생지 안대선 선교사는 1890년 6월 10일 미국에서 출생했다. 하지만 그의 정확한 출생지는 알려진 바 없으나 그가 졸업한 대학과 대학원을 통해 추측할 수 있다. 안대선은 미네소타주 매캘러스터 칼리지(Macalester College)를 졸업했다. 졸업 후 안대선은 캘리포니아주의 유일한 미국 북장로교 신학교인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안대선은 로스앤젤레스에서 부인이 될 안의리(L.E.B.Anderson)를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안대선이 선교사직을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별세하기 전까지 생활한 곳은 로스앤젤레스 듀알트(Duart) 시(市)였다. 안대선이 미네소타주 출신인지, 캘리포니아주 출신인지 정확하게 알 길은 없다. 미네소타 출신이기 때문에 가까운 매캘러스터 대학에 입학했는지, 아니면 캘리포니아 출신이지만 매캘러스터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멀리 미네소타주까지 갔는지를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는 매캘러스터 대학 졸업 후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에 입학했고,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에 다니면서도 로스앤젤레스에 있던 안의리와 교제를 했다. 이러한 사실들로 보아 안대선이 로스앤젤레스 출신이거나 혹은 매캘러스터 대학 졸업 후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2. 안대선의 출신대학과 신학대학원 매캘러스터 대학은 미네소타주 램지군 세인트폴에 있는 4년제 사립 리버럴 아츠(Liberal Arts) 대학으로 미국 남북전쟁에서 군종목사로 종군한 목사 에드워드 더필드 닐(E.T.Neil)이 1874년에 세웠다. 그는 1849년 복음 전도를 위해 미네소타주를 여행한 후 두 교회처를 세우고 미네소타 대학교의 첫 총장이 되었다. 그는 장로교와 관계를 맺되 어느 종파에도 속하지 않는 대학을 구상하다가 필라델피아 출신의 사업가이자 독지가 찰스 매캘러스터가 건물을 기부하고, 장로교 교회와 새 대학의 이사회로부터 받은 추가 기부금을 바탕으로 다섯 명의 교수와 여섯 명의 신입생, 52명의 예비 학생들과 함께 매캘러스터 칼리지를 1885년에 문을 열었다. 매캘러스터 대학은 미국 장로교와 관계를 맺긴 했으나 미션 스쿨로 개교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안대선은 장로교 출신이라 할지라도 대학교 4년의 교육 기간 동안 한 교단에 국한된 사고가 아니라 초교파적 사고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안대선은 대학을 졸업하고 북장로교 직영신학교인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1885년부터 1910년까지 미국에서 한국에 온 선교사의 출신 신학대학원 분포는 맥코믹 신학교 18명, 프린스턴 신학교 16명, 유니온 신학교(리치몬드)는 9명, 오번 신학교는 6명, 유니온 신학교(뉴욕) 4명, 샌프란시스코 신학교는 3명 등이다. 참고로 19세기 미국 북장로교회의 신학은 프린스턴 신학으로 대변되는데, 개혁주의적 전통을 계승한 프린스턴 신학은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매우 강조했다. 그리고 신학교육의 목적은 “성경을 진실하게 믿고, 적절히 이해하며, 진정으로 사랑하고 명쾌하게 주해하는 복음 사역자, 그리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복음적인 구속을 철저히 전력을 다해 설파하는 복음 사역자를 훈련시키는데 있다”고 한다. 따라서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서의 신학적, 목양적 훈련은 안대선을 복음주의적 신앙으로 무장시켜 영혼을 구원하는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수 있게 했을 것이다. ▲1871년 개교한 샌프란스시코 신학대학원(San Francisco Theological Seminary, SFTS)은 미국 서부지역을 담당하는 미국 장로교(PCUSA) 직영신학교로 알려져 있다.(사진1)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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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 목사의 논문 원문(9)- 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 김승학(안동교회)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정숙 전도사(金貞淑, 1880~1969) 한국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성경 말씀 그대로 남녀노소, 빈부, 계층에 관계없이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귀족보다는 평민,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조선시대 말기의 여성은 유교적 전통으로 인해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한국 전통사회 안에 뿌리 깊은 성차별의 문화와 여필종부, 삼종지도, 칠거지악, 남녀칠세부동석, 부부유별 등의 가부장적 가치관은 여성의 인권을 철저히 억압했다. 무지와 가난, 고된 노동과 억압된 삶을 살던 여성은 한(恨)을 품은 존재였다. 조선시대 말기에 입국한 선교사들의 눈에는 누구보다 한국 여성들이 복음의 대상이요 구원받아야 할 존재로 보였다. 릴리아스 호튼 언더우드(Lillias Horton Underwood) 릴리아스 호튼 선교사는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이다. 의료선교사인 그는 언더우드보다 8년 연상이었다. 호튼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여의사였다. 여사는 당시 한국 여성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조선여자들은 대체로 아름답지 않다. 나는 그들을 누구 못지않게 사랑하고 내 형제처럼 여기지만 그 생각은 털어놓아야겠다. 슬픔과 절망, 힘든 노동, 질병, 애정의 결핍, 무지 그리고 흔히 수줍음 때문에 그들의 눈빛은 흐릿해졌고 얼굴은 까칠까칠해졌고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그래서 스물다섯이 넘은 여자에게서 아름다움 비슷한 걸 찾는 건 헛일이다. 다만 아직 무거운 걱정거리나 힘든 노동에 시달리지 않은 나이어린 소녀들과 젊은 색시 중에는 종종 예쁘고 깜찍한 그리고 가끔 드물기는 하나 아름답기도 한, 활짝 핀 우아한 모습을 한 이를 볼 수가 있다. 이런 환경에 있던 여성들은 한국 땅에 도착한 선교사들에게 누구보다 우선적으로 중요한 선교대상이 되었다. 특히 1885년 4월 5일 인천항에 함께 도착한 미국 장로교와 미국 감리교선교사는 선교대상으로서 여성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1893년 장로교와 감리교의 양 교파 연합모임에서 선언한 10가지 한국선교정책 중에서 두 번째가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였다. 하지만 여성선교정책에 관한 장로교와 감리교의 강조점은 차이가 있었다. 사회적인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던 감리교의 경우, 처음부터 의료사업, 교육사업, 자선사업, 여성의 인권회복 등에 치중하셨다. 따라서 감리교는 여성의 계몽과 교육에 있어서 장로교에 비해 앞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직접적인 복음전파를 강조한 장로교는 우선적으로 가난한 자와 낮은 계층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사회 계층 중에서도 가장 소외된 여성들을 선교의 타깃으로 삼았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여성들이 다른 계층에 비해 더 쉽게, 더 빨리 복음에 반응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여성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성들에게 복음이 전해진 첫 10년 동안 여성 복음화의 속도는 매우 느렸다. 여성들이 소극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여성들이 매우 적극적으로 복음을 수용하고 복음에 응답함으로써 복음전파가 급속히 이루어졌다. 그 결과 사회적 활동에 수동적인 여성들이 전도사역과 계몽사업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뿐 아니라 일제의 압제 가운데서 애국 여성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1. 김정숙, 출생과 결혼 “임진(臨津) 이북의 땅은 다시 오랑캐의 땅이 될 터이니 몸을 보전하는 것을 논할 수 없다”는 예언으로 불안해하던 이북(以北) 사람들 중에는 이남(以南)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이들이 가장 선호한 지역은 정감록(鄭鑑錄)에서 언급하고 있는 ‘십승지’의 첫 번째 승지(勝地)인 경상북도 풍기(豊基)였다. 당시 난리 중에에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불안해하던 평안북도의 박천, 영변 지역에는 “풍기로 가야 산다”는 말이 떠돌았다고 한다. 정감록의 예언을 믿고 있던 북한 사람들이 실제로 이남으로의 이주가 시작된 것은 1890년대 후반부터였고, 이어서 1920년대에는 개성·평양에서 약 100여 가구가 풍기로 집단 이주를 했다. 이어 1945~50년 사이에 이북 전역에서 약 600가구가 이주를 했는데, 1가구에 5명만 따져도 600가구이면 3000명에 해당한다. 결국 약 4000~5000명의 사람들이 논과 밭, 가옥을 처분하여 풍기에 정착했는데, 현재 이들 후손들이 1000가구 정도 남아 있다고 한다. 특히 풍기로 이주해 온 사람들 가운데서 다수가 서도지역인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이었다. 1907년 창립된 풍기성내교회는 지역 토착 주민들과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온 이주민들이 함께 신앙공동체를 이룬 것으로 성내교회 100년사는 기록한다. 정감록을 믿고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도 성내교회에 출석하였다. 황해도 중에서 특히 해주와 개성출신의 이주자들은 풍기지역에서 인삼재배를 주도하였고, 평안도 출신 이주자들은 1920년에 시작된 과수재배와 직조업을 주도하였다. 이들이 풍기지역의 경제를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6·25전쟁 전후로 다시 북한에서 많은 이들이 이곳으로 이주해왔는데, 이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전쟁으로 파괴된 직조공장이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 (이하 논문 내용은 첨부파일 참조)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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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애굽기(27)나의 출애굽기(27) 드보라 65. 북송 당했던 집사님의 소식을 듣게 됨 다시 그 집사님에 대해서 듣게 된 것은 남한에 와서였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그날은 특별히 탈북자 강연이 있었다. 같은 탈북자로서 이야기가 쏙쏙 귀에 들어와 집중해서 듣고 있는데 그 탈북자가 감옥에서 만난 어떤 집사님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감옥에서 집사님을 만났는데 원래 어디 살던 사람이고 중국의 어느 동네에 있었다가 북송 당해서 자기와 같은 감옥에 갇혔다고 한참 이야기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아는 바로 그 집사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강연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그 강연하신 탈북자를 만나서 인사를 하고 혹시 그 집사님 성함이 ○○○ 아니냐고 물었다. 그분은 그 이름을 듣더니 눈이 똥그래져서 나를 보며 어떻게 그분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분께 집사님이 어떻게 되셨는지 계속 여쭈었더니 자초지종을 들려주었다. 그 집사님은 감옥 안에서도 복음을 열심히 전하다가 기독교 간첩으로 소문이 나서 결국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셨다고 했다. 너무나 안타까운 소식에 나는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강연하신 분과 나는 한동안 눈물지으며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집사님을 함께 추억했다. 비록 이 글에서도 공개적으로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봉사와 수고를 베푼 집사님이시지만 주님께서는 기억하시고 큰 상급으로 보답하시리라···. 지금도 그분의 사랑을 생각하며 혹시나 살아계실지 모르는 집사님의 안위를 위해 기도한다. 66. 중국 땅에서 백인 선교사님을 만나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나를 영적으로 인도해주셨던 집사님의 북송 소식을 듣고서 나의 마음은 크게 낙심되었다. 그렇게 별 기력 없이 해야 할 일만 하면서 지내고 있는데, 같이 성경공부 하던 한 탈북자 동생이 나에게 북한 출신 엄마를 잃어버린 고아들과 아이들을 돕는 좋은 분이 계신다면서 만나보면 격려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초청을 했는데 오시기로 했던 조선족 선생님뿐 아니라 또 다른 사람이 함께 오셨다. 머리가 노랗고 피부는 하얀데 털이 복슬복슬하고 콧대가 높은 서양 사람이었다. 전에 이런 외국인을 본 일이 없었을 뿐 아니라 북에서부터 서양 사람, 특히 미국 사람은 악한 사람, 승냥이로 배웠던 것이 생각이 나서 너무 무서웠다. 그런데 그 무서운 사람이 나를 보고는 “안녕하십니까?”라고 했다. ‘조선말을 할 줄 알다니···’ 너무 깜짝 놀란 나에게 그분은 “저 나쁜 사람 아닙니다”라고 하며 웃었다. 당황스러웠지만 조선말을 잘하는 것을 보고 나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분들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내 깜짝 놀란 모습이 아니라 식탁 위에 놓여 있었던 성경책이었다고 한다. 그분들은 그 책을 보고 내가 신앙 안에서 더 성장하도록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그분들과 교제하게 되면서 나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분들은 나에게 신앙 교육도 해 주셨을 뿐 아니라 어려운 우리 살림에 보태라고 딸 아이 생활비도 지원해주시고 쌀도 가져다주셨다.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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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나의 어머니, 김해선 권사님!나의 어머니, 김해선 권사님! 최 점 식 목사 길부교회 나의 어머니의 일생(1933년 9월 9일~) 어머니는 경북 군위군 의흥면에서 무남독녀로 어렵게 살아온 전형적인 가난한 농민의 딸이었다.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홀로 계시는 아버지 밑에서 살아오셨다. 그러면서도 바느질을 배워, 동네 어르신들의 옷과 버선도 만들어 드리며 살아오셨다. 손재주가 남달라 동네 어른들로부터 사랑과 칭찬을 많이 받으셨고, 아버지를 정성으로 섬기며 집안일도 어머니를 대신하여 잘 해내셨다. 그러던 어느 날 군위 우보 5일장에 다녀오신 외할아버지께서 당시 15세인 어머니에게 시집이라도 가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그렇게 자신보다 아홉 살이 많은 내 아버지를 만나 16세의 어린 나이에 5남매 중 장남과 결혼하여 시부모님과 함께 경북 군위군 우보면 이화동 1189번지에 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행복한 신혼의 꿈을 뒤로한 채 아버지는 군 입대를 하셨다. 남편도 없는 시집살이는 쉽지 않았고, 가정 형편 또한 넉넉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조금의 불평도 하지 않으셨고, 부모님께는 효도하고 형제들과는 우애를 다지며 힘든 환경 속에서 살아오셨다. 그러던 중에 농촌에서의 삶이 어려워지자 대구 산격동으로 이사를 하셨다. 생각해보니, 도시로 이사를 나온 것은 어머니의 커다란 용기였다. 지금도 종종 이러한 결단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도시의 생활이 시작됐으나, 별 직업이 없었던 아버지께서는 시장에서 리어카로 채소장사를 하면서 가정의 생계를 꾸려나가셨다. 동시에 어머니께서는 우리 4형제를 공부시키시기 위해 40대 초반의 나이에 식당에서 일을 하셨다. 그리고 어릴 때 배워둔 삯바느질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셨다. 어린 내가 봐도 두 분은 참으로 열심히 사셨고,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두 분의 모습이 지금 우리 형제들의 성실과 부지런함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믿음의 가문을 일구어내신 어머니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세 들어 살던 곳의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교회를 다니면서 나 혼자만 예수님 믿지 말고 어머니도 함께 믿게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어머니를 설득했고 하나님의 은혜로 어머니도 40대에 처음 교회에 나가시게 되었다. 어머니는 평소 몸이 좋지 않으셨는데, 교회를 다니신 후로 건강을 회복하며 하나님의 큰 은혜를 체험하셨다. 하지만 제사 문제 등을 이유로 주위 친척들의 심한 반대가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믿음이 성장하면서 제사를 없애고 추도 예배를 드릴 것을 제안하셨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족들이 예수를 믿게 해야 했다. 어머니는 기도하면서 최선을 다해 가족들을 전도하셨고,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우리 4형제도 교회에 출석하게 됐다. 그 후 우리는 형편이 나아지면서 새로운 집으로 이사도 하게 되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우리 형제들은 모두 중·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으나, 시장에서 채소를 운반하시던 아버지께서 갑자기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셨다. 하루아침에 우리 집은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나 아파 목이 메어 온다. 아버지 없이 우리끼리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하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이 점점 더 커졌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식당 일 등 돈이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밤낮으로 일하셨다. 어머니의 희생으로 우리 형제들은 굶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었다. 온 가족이 힘든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았으니,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장남인 나는 집안을 위해 사업을 시작했고 사업체를 운영하게 됐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업의 길이 아닌 목회자의 길로 인도하셨고, 신학의 길을 걸어가고자 마음먹었을 때도 어머니는 반대하지 않으셨다. 지금은 우리 4형제 중 2명이 목사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지난날 불신자의 가정에서 목회자가 배출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비록 농촌목회와 자비량 선교사의 길을 걷고 있으나 최선을 다해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어머니의 희생으로 무사히 고등학교를 입학하게 된 것이다. 입학 당시, 입학등록금이 없어 어머니는 끼고 계시던 금반지 세 돈을 팔아 입학등록금을 마련해주셨다. 또 2012년 어머니의 팔순 때, 어머니께서는 동생들은 모두 좋은 차가 있는데 장남인 내가 목사이면서도 소형 자동차를 가지고 있다며, 그랜저 3.0을 구입해 주셨다. 섬유공장에 다니시면서 모아두신 돈으로 새 차를 사주신 것이다. 나의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는 사실을 70대를 바라보며 다시금 느끼고 있다. 현재 어머니는 경산에 거주하시는데 지금도 아들이 오면 커피를 손수 끓여주시며, “부모는 한 번 죽으면 다시 볼 수 없는데, 내가 살아있으니 커피라도 끓여준다”라고 말씀하신다. 아들로서 어머니에게 해드린 것이 한 가지 있다면 6년 전에 아내와 함께 의논해서 지금의 아파트로 모신 것이다. 다만, 더 해드리지 못해 항상 죄송한 마음이다. 부모 없는 자식이 어디 있겠는가? 자녀들에게 모범이 되신 어머니 어머니는 지난 1988년 88세로 세상을 떠나신 할머니를 수십 년간 모신 결과로, 1997년 5월 8일 어버이날에 대구광역시장으로부터 ‘장한 어버이상’을 수상하셨다. 이는 우리 가문의 영광이었다. 또 2020년 9월에는 아버님이 6·25 참전 국가유공자란 사실을 인정받게 되어 너무나 감격해하시기도 하셨다. 어머니는 지금은 89세로 연로하시지만, 40여 년간 출석하신 교회의 권사로서 주일예배, 삼일기도회, 금요구역예배 등 경산에서 대구까지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다니시는 모습에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언젠가 교회 화장실을 청소하시다가 락스가 눈에 들어가서 고생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교회 관리집사님도 있었지만 더러운 화장실을 그냥 볼 수 없어서 청소하셨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그런 분이시다. 어머니는 지금도 교회 어르신들에게 옷을 만들어 드리고, 봉사하시며, 길흉사에 빠짐없이 참석하신다. 국가에서 받는 노령연금과 자녀가 드리는 용돈으로 십일조, 감사헌금, 선교헌금을 내시며 교회 권사로 그 의무를 다하시니 아들로서 부끄러운 것밖에 없다. 아무쪼록 남은 삶 건강한 몸으로 계시다가 언젠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조용히 천국 가실 수 있도록 기도한다. 60대 중반에 있는 큰아들을 마치 어린아이로 생각하시는 것을 보면 부모의 마음이 어떠한지 가히 짐작해 본다. 나의 어머니 살아계실 동안에 건강하세요. 존경합니다. ▲2021년 2월 설날에 어머니(뒷줄 왼쪽 세 번째)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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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취재> 성은교회 장재효 목사, ‘호소문’ 통해 사임 의사 밝혀장재효 목사, “이제는 노종(老從)을 놓아주시고, 진리정통(眞理正統)하고 성령충만한 후임 목회자 구해주세요.” 51년 동안 장재효 목사를 중심으로 선교사명을 힘있게 감당해왔던 서울 성은교회(서울시 송파구 소재)에서 후임 목회자를 맞을 채비를 본격화하고 있다. 지난 5월경 장재효 목사는 “이제는 건강이 미약하여 더는 책임목회를 감당할 수 없으니 노종(老從)을 놓아달라”는 취지의 호소문을 교회 앞에 발표했으며, 이에 따라 성도들은 장 목사의 간곡한 뜻을 존중하여 후임목사 청빙의 단계를 밟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서 지난 8월 23일(월) 장재효 목사와 서윤석 장로를 비롯한 세 분의 장로가 본 신문사 사옥을 방문해 그간의 경위를 설명하면서 후임목사를 구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에 본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장재효 목사의 호소문 △성은교회 성도들이 장재효 목사에게 보낸 편지 △장재효 목사의 ‘목회자의 사명’에 대한 생각 등을 게시함으로써, ‘이 시대에 참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한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서울 성은교회 장재효 목사와 서윤석 장로를 비롯한 세 분의 장로가 지난 8월 23일(월) 본 신문사 사옥을 방문했다. 사진은 장재효 목사가 본지 임직원들과의 면담 자리에서 장 목사의 호소문 등을 낭독하고 있는 장면. 장재효 목사의 호소문(呼訴文) 사랑하는 성은교회 신도(信徒) 여러분 지난 세월 한결같은 사랑으로 모든 것이 부족한 종(從)을 주님의 사자(使者)라고 주님 대하듯 선대(善待)해 주셨고, 기도(祈禱)와 헌신봉사(獻身奉仕)와 어려운 형편에서도 적극적으로 협력(協力)해 주셔서 지금의 성은교회 성은동산을 세우게 하셨고 많은 나라에 선교(宣敎)하게 해주신 것을 뜨거운 중심(中心)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그 모든 정성(精誠)은 주님께 향기로운 제물(祭物)이 된 줄 믿습니다. 오늘은 부득이 죄송(罪悚)하고 죄송(罪悚)한 호소를 드릴 수밖에 없어 불초(不肖) 종(從)의 마음은 더욱 슬프고 괴롭답니다. 지나온 세월이 어언 반세기(半世紀)가 넘었지만, 늘 변함없으신 우리 주님의 사랑과 은혜(恩惠)로 우리는 주(主) 안에서 목양지간(牧羊之間) 성령(聖靈)으로 하나 되어 가(可)히 교회천국(敎會天國)으로 지내 온 것을 주님과 성도 여러분께 무한감사(無限感謝)를 드립니다. 부디 앞으로도 믿어지는 믿음으로 영적신앙(靈的信仰)을 끝까지 고수(固守) 하셔서 우리 모두 천국(天國)에서 다시 만나 주님과 함께 영생복락(永生福樂)을 누립시다. 불초(不肖) 종(從)이 노쇠(老衰)하고 기력마저 허약(虛弱)해져 책임목회(責任牧會) 사역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오로지 사명감(使命感) 하나로 지금까지 각고의 노력을 해봤으나, 성과(成果) 부실(不實)하여 주님께 송구스럽기 한이 없고 교회에도 죄송스러워, 심적(心的) 고통이 막심(莫甚)하여 주야(晝夜)로 번민(煩悶)하며 주님께 기도와 간구로 호소해 왔습니다. 목자(牧者)의 사명(使命)을 제대로 감당치 못하면서 당회장(堂會長) 자리만 보존(保存)한다는 것이 이 종(從)의 무딘 양심(良心)에도 너무나 괴롭고 두려웠습니다. 누구나 감당(堪當)치 못할 형편(形便)이면 자진(自進)해서 사직(辭職)하는 것이 모두를 위하여 현명(賢明)한 지혜(知慧)라 사료(思料)됩니다. 성은교회의 중흥(中興)을 위하여 심사숙고(深思熟考) 후 물러나기로 결심(決心) 했습니다. 이제 쓸모없는 노종(老從)은 놓아주시고, 진리정통(眞理正統)하시고 성령님의 다양한 은사(恩賜)와 능력(能力)으로 성은교회를 주님께로 잘 이끌어 줄 수 있는, 주님께 진실(眞實)되고 충성(忠誠)스러운 목자(牧者)를 모두가 합심해서 간절히 기도하시면 주님께서 필연적으로 응답(應答)해 주실 것입니다. 불초노종(不肖老從)의 서러운 고충(苦衷), 사명(使命)을 감당치 못해 애간장 태우며 통곡(痛哭)해야 하는 몸부림을 중단할 수 있도록, 너무나 죄(罪)스럽고 부끄럽지만 그토록 그립던 주님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성은교회와 여러분의 가정에 임마누엘(IMMANUEL)로 새로운 은혜(恩惠)와 평강(平康)이 넘치시길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祝願)드립니다. 2021년 5월 성은교회 당회장(堂會長) 불초노종(不肖老從) 피눈물로 드리는 호소문(呼訴文) 성은교회 당회장 목사님 전(前) 상서(上書) 반백년이 넘도록 한결같이 참 목자, 선한 목자로 책임 목회를 감당하시며 양떼들로 하여금 천국 들어갈 믿음을 알차게 가꾸어 주시고 영광스런 결실을 이루도록 불철주야 노심초사 하시는 당회장 목사님!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성은교회는 하나님의 목적 있는 섭리가운데 세우시고 붙들어 쓰시는 당회장 목사님을 통해 진리 정통하고 성령 충만한 교회로 계속 부흥 성장하며, 지역 복음화와 농어촌교회 지원과 세계 선교에 힘써 왔습니다. 또한 성은동산 봉헌으로 한국교회의 영적 부흥과 선교 확장에 쓰임 받는 보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주일 ‘당회장 목사님의 피눈물로 드리는 호소문’을 접하면서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고 연약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지 못하고 있음을, 영적 가치와 성과를 위한 일보다 세상일에 더 열심을 내고 있음을, 초대교회와 같았던 옥수동 성은교회에서의 처음 사랑과 열정이 식어있음을, 당회장 목사님의 아픔과 괴로움을 외면하고 그 심정을 헤아려 드리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 통회자복 합니다. 당회장 목사님께 송구하고 죄송합니다. 그럼에도 간곡히 요청 드립니다. 우리들은 부족하고 무지몽매하나 당회장 목사님께서는 우리들의 목자이시니 어떠한 경우라도 살리는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들을 계속해서 양육하여 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서서 말씀을 전하기 힘드시면 앉으셔서 하시고 앉으셔서도 힘드시면 누워서라도 전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머리되신 성은교회에서 당회장 목사님은 우리의 심장 같으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우리 영혼을 사랑하시며 성은교회 신도 한 사람도 낙오하지 않고 천국 백성으로서의 자격을 갖추는데 일평생을 헌신해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우리의 목자 당회장 목사님! 우리들을 목자 없는 양같이 버리고 떠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참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눈먼 양들을 끝까지 인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당회장 목사님처럼 하나님 말씀에 정통하며 성령님의 다양한 은사와 능력이 충만하여 당회장 목사님께 선한 목회를 잘 배울 수 있는 진실 되고 충성스러운 목회자를 구해 주십시오. 그래서 때가 되어 후임목사로 세워지면, 선대에 이어 다음세대도 성은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을 잘 받들어 하나님 나라 확장에 맘껏 쓰임 받는 교회되게 하여 주십시오. 이를 위해 성은교회 신도 모두가 합심해서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뜻하신다면 공고, 추천, 지명 등 다양한 방법으로 후임목사 청빙위원회도 본격적 역할을 할 것입니다. 성은교회가 하나님 뜻하심과 역사하심 가운데 후임목자 문제로 분란과 혼란을 겪지 않고 질서 있게 진행되어 세습이 판치고 금전이 오고가는 부덕의 세태에 아름다운 모본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는 후임목사님이 세워진다고 해서 당회장 목사님을 다시는 못 보게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원로 목사님으로 진리와 생명의 말씀을 계속 듣게 되는 복을 누리게 하여 주십시오. 세계 선교와 참된 목회자 양성에도 달려갈 길 마치는 그 날까지 맘껏 감당할 수 있도록 교회적 지원도 계속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우리의 목자 장재효 목사님! 목사님의 외롭고 서러운 고충, 사명의 무게로 애간장 태우시며 때로 통곡하시고 주야로 번민하며 몸부림치시는 그 심정을 우리는 제대로 헤아리지 못할지라도 주님은 다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합심으로 기도하며 당회장 목사님께 배운 대로 ‘믿어지는 믿음’ 가운데 영적 신앙 고수와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으로 교회적 사명 완수에 최선을 다해나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붙들어 쓰시는 당회장 목사님께서 오대양 육대주를 맘껏 누비시며 많은 구령성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눈동자같이 지켜주시길 바라며 저희는 항상 기도하겠습니다. 2021년 5월 8일 성은교회 교인대표 총무장로 서윤석 이하 성령님의 하나되게 하심따라 교회 제직원 일동 일심 동의함 ‘목회자의 사명’에 대한 단상(斷想)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불러내사 책임 지워 맡기신 양떼를 위해 세움 받은 직분입니다. 그래서 선한 목자는 양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책임목회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목회의 궁극적 목적은 양들로 내세 소망의 확신과 신령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인정받고 쓰임 받음으로 은총의 대상이 되게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목회 방침도 하나님 절대주의 신앙에 입각하여 말씀에 붙잡히고 성령에 이끌리는 영적 체질 신앙으로 바르게 가꾸어, 목자 자신에게보다 주님께 더욱 요긴한 존재들로 길러 드려야 할 것입니다. 목자는 양떼를 위하여 세움 받은 자입니다. 수제자였던 베드로에게까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깊이를 세 번씩이나 확인하신 다음에야 비로소 양떼를 맡기셨던 주님의 심정을 헤아려야 합니다. 주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분의 심정을 가진 목자라야 양떼를 소중히 여기며 책임 목회 사역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51년 전에 성은교회를 개척, 오늘에 이르도록 이상과 같은 사명 의지적 일념으로 애써온 것은 사실이나 교회 부흥과 선교 확장은 순전히 우리 주님의 경륜하시고 섭리하심을 따라 성령님의 불같은 역사로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또한, 가장 부족한 종을 예수님처럼, 또는 사도 바울같이 생각하며 기대하고 순종함은 물론, 재산과 생명을 바쳐 적극적으로 뒷받침해온 성은 양떼의 충정 어린 공덕으로 알고 눈물겹도록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참으로 성은교회야말로 목양지간에 하나로 결속, 혼연일체가 되어 오로지 우리 주님 더 잘 섬기는 기쁨을 위하여 이해하고 협력하며 순교적 사명 의지로 교세 확장과 인류 복음화를 위한 선교에 합심 전력하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성은교회를 ‘진리정통하고 성령충만하여 그리스도의 심장이 불타는 사명감’으로 오로지 구령성과를 위해 다양한 은사와 영역으로 교회부흥과 선교확장을 힘써 전심전력할 수 있는 후임목회자를 온 교회가 기도로 간구하고 있습니다. 2021년 9월 성은교회 당회장 장 재 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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