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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3)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3)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론 1. 첫 번째: 기독서원(基督書院) 2. 두 번째: 선교사 임시주택 3. 세 번째: 선교사 주택 4. 비공식 예배처소: 텐트 교회 5. 네 번째: 16칸 ‘ㄱ’자 예배당 6. 다섯 번째: 목조 2층 예배당 7. 여섯 번째: 2층 돌집예배당 결론 3. 세 번째 예배처소 : 선교사 주택(2) 초기 안동선교 보고와 사진에 따르면 금곡동 선교사 영구사택은 1910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던 것 같다. 에비여사의 글에 따르면 1910년 10월 24일 지부를 세울 대지를 구획, 땅을 고르기 시작했음을 밝힌다. 또한, 안동교회 80년사는 4차례에 걸쳐 건축된 선교사 주택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안동선교부 초기 두 달씩 발행된 선교 캘린더에 사용된 사진의 배경은 당시 선교사 주택과 안동의 생활상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때 안동교회는 어떤 이유였는지 모르지만 선교사들이 새로 구입한 임시주택으로 세 번째 예배처소를 옮겼음을 안동교회 80년사는 기록한다. 이에 대해 김광현 목사는 선교부지 동산을 구입하고자 했지만 주민들이 쉽게 팔지 않아 할 수 없이 동문 밖 안동교도소 자리 일부를 구입했고, 이 주택을 수리해 예배처소로 사용했다고 증언한다. 선교사들이 거주할 영구사택을 건축하는 동안 임시로 사용할 주택을 구입했는데, 이곳이 안동교회 세 번째 예배처소였으며, 위치는 구(舊) 안동교도소 자리에 있던 기와지붕 건물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당시로 볼 때는 첫 번째 예배를 드렸던 처소로부터 동쪽으로 무척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새로운 예배처소는 거리뿐 아니라 1년여 동안 익숙하게 모였던 예배처소에 비해 생소했을 것이고, 따라서 회중들이 불편하게 느꼈을 가능성이 있다. 오월번 선교사 가족은 1910년 7월 7일 이곳으로 이사했다. 안동교회 첫 ‘ㄱ’자 예배당이 1910년 10월 30일 입당했기에, 약 4개월 가까이 이곳은 안동교회의 세 번째 예배당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선교캘린더 중에서 1911년 3·4월용 캘린더에 수록된 한 장의 사진과 에비여사가 소장한 사진은 안동교회의 세 번째 예배처소를 추정할 수 있게 한다. 사진 5는 오월번 선교사 가족이 기독서원 건너편에 존재하던 첫 번째 거주지를 떠나 두 번째로 거주했던 임시주택이다. 그런데 오월번 선교사 가족은 첫 번째 임시가옥에서 약 1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머물렀기 때문에 이 두 번째 주택을 안동의 ‘첫 번째 가정’(First home in Andong)으로 부르는 것으로 생각된다. 오월번 선교사의 부인인 새디(Sadie) 선교사가 1910년 6월 미국에 있는 친구들과 후원자들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오월번 선교사 가족은 안동읍 동쪽 끝에 위치한 가옥에서 살고 있었고, 안동교회의 당시 모임 장소는 수리하여 별의추 선교사가 일부 사용하고 있던 임시 선교기지였다. 바로 이 주택이 앞서 언급한 구 안동교도소에 위치한 오월번 선교사의 두 번째 가옥인 동시에 안동교회의 세 번째 예배처소로 추정된다. 에비여사에 따르면 이곳에서 여성을 위해 매주 목요일마다 부인성경공부반이 열렸는데, 첫 번째 모임에 무려 75명이 모였지만 진심으로 성경공부를 원하는 사람을 추려낸 결과 25명으로 한 반을 구성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여성성경공부반은 일주일에 두 번씩 오월번 선교사 사택에서 모여 새디 선교사가 월요일에는 젊은 여성반, 목요일에는 중년 여성반을 인도하였다. 하지만 이 주택은 사용하기 불편해 철거했고, 철거한 후 가옥에 사용되었던 목재는 폐기처분을 하지 않고 1911년 처음으로 시작한 사립 초등학교인 계명학교를 건축할 때 사용되었음을 안동교회 80년사는 기록하고 있다. ▲금곡동 선교부지에 사택을 준공하기 전 까지 오월번 선교사 가족이 생활했던 주택으로 오월번 선교사는 이 주택을 안동의 '첫 번째 가정'(First home in Andong)으로 부른다. 이 사택을 철거할 때 수거한 건축자재로 금곡동에 계명학교를 건축하였다. 후에 안동교회가 서 있는 현재 위치로 계명학교는 이전했다.(사진 5) 4. 비공식적인 예배처소 : 텐트 교회(Tent Church) 오래전부터 현재 까지 전해 내려오는 두 장의 사진은 거의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안동지역 교회에 전해져 내려오는 선교 초기 사진으로 텐트(Tent)와 초가집을 볼 수 있다. 안동에서 활동했던 선교사 중의 누군가가 직접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두 장의 사진 앞면과 후면에는 이 천막을 천막 교회(Tent church)임을 명기하고 있다. 한국선교 초기 사진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텐트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것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고, 특히 안동지역의 경우는 안동교회 예배당을 신축하기 전에 임시 예배처소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사진 6의 뒷면에는 안동교회의 첫 번째 신축 예배당에 관해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될 만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익명의 선교사가 사진 후면에 직접 쓴 두 글을 볼 때 사진 6은 안동교회 최초의 예배당인 16칸 ‘ㄱ’자 예배당을 건축하는 동안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는 장소로 천막(Tent)을 쳤고, 천막 옆 마당에는 예배당 신축을 위해 만든 진흙 벽돌과 건축자재가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텐트 교회는 안동 최초의 병원과 함께 사용되었다. 이 병원은 주일에는 교회로, 평일에는 병원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진 6은 오랫동안 안동 최초의 병원인 안동성소병원으로 추정되고 있는 사진이다. 또한 마당에는 진흙 벽돌과 건축 기자재가 쌓여 있는데, 선교사가 사진 뒤에 기록한 글을 보면 실제 교회(real church)를 건축하기 위한 자재라고 기록한다. 따라서 이 텐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것은 안동교회 최초의 16칸 ‘ㄱ’자 예배당을 건축하기 전의 예배처소로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텐트 교회는 사진 배경을 고려할 때 오늘날 안동교회 터의 일부에 속할 가능성이 크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는 텐트(Tent)와 초가집, 밭고랑, 인근의 여러 초가집, 그리고 마당에 있는 진흙벽돌과 건축 자재가 눈길을 끈다. 특히 분명한 흰색의 십자가가 텐트 위에 있다.(사진 6)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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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교육청, ‘행복한 학교 만들기 캠페인’ 등 다양한 인성교육 강화교육공동체가 함께하는 인성교육 정책 펼쳐 ▲지난 15일 안동송현초에서 진행된 ‘행복한 학교 만들기 캠페인’에 임종식 교육감이 참석했다.(사진=경북교육청 제공) 경북교육청(교육감 임종식)은 장기간 원격수업으로 인한 대면 생활지도 부족에 따른 인성교육 어려움을 지원하기 위해 교육공동체가 함께하는 다양한 인성교육 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19일 밝혔다. 교육공동체가 함께하는 인성교육은 실천‧체험 중심 인성교육을 기본으로 유튜브, SNS 등 온라인 환경을 활용한 쌍방향 소통의 인성교육을 병행하는 것을 말한다. 경북교육청은 원격수업이 지속되면서 문화‧예술 체험 기회가 부족한 학생들을 위해 찾아가는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5개 권역(포항, 안동, 구미, 문경, 경산) 인성교육지원센터와 경상북도교육청연구원 인성인문학교육지원센터에서 공예, 다도, 천연염색, 저자와의 만남 등을 주제로 155개교를 대상으로 실시하고 있다. 또한, 원격수업 시 매시간 정보통신윤리교육을 하고, 온라인 활용 칭찬 릴레이, 시낭송, 도전! 성취프로그램 등 쌍방향 소통의 인성교육을 확대하고 있다. 원격수업으로 집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가정의 인성교육 기능도 강화한다. 학부모 집중 상담주간을 학기별 1회 이상 1주일간 운영하고, 초등학교 입학생 학부모를 위한 가이드북을 제작, 온라인에 탑재할 예정이다. 조부모와 손자녀의 소통을 위해 실시한 ‘세대공감 편지쓰기’는 48,000여 통이 접수됐다. 한편, 경북교육청은 인성교육 강화를 위해 ‘행복한 학교 만들기’ 현장 캠페인을 전개했다. 지난 8일 예천초에 이어 지난 15일 안동송현초에서 등교하는 학생을 대상으로 진행된 현장 캠페인은 선플달기, 바른말 고운말 쓰기, 칭찬하기 등을 주제로 실시했다. 현장 캠페인에 참여한 임종식 교육감은 “우리 아이들이 미래사회를 성공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성역량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도록 하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교육 환경에 발맞추어 학교, 가정, 사회가 지속적으로 인성교육에 관심을 가져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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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2)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2)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론 1. 첫 번째: 기독서원(基督書院) 2. 두 번째: 선교사 임시주택 3. 세 번째: 선교사 주택 4. 비공식 예배처소: 텐트 교회 5. 네 번째: 16칸 ‘ㄱ’자 예배당 6. 다섯 번째: 목조 2층 예배당 7. 여섯 번째: 2층 돌집예배당 결론 2. 두 번째 예배처소 : 선교사 임시주택 1909년 8월 8일 주일 첫 예배를 드린 안동교회는 1년이 지난 후 무려 75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5칸의 작은 기독서원은 예배드리기에는 너무도 공간이 협소하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 신축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마땅한 예배처소가 없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거주하고 있던 임시주택으로 예배처소를 옮겼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안동교회 80년사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오늘날 안동교회 부지 안에 선교사 임시주택(구 교육관 건물 자리)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안동교회 80년사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진술한다: “안동교회는 처음에 매서 김병우의 인도로 서원(기독서원)에서 모이다가 그해 11월 원주 주재 선교사 오월번 목사와 조사 김영옥 씨가 내안(來安)하여 정착하게 되므로 교회를 인도하기에 이르렀다. 선교사들의 임시주택(1910년)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니 장소는 현 교육관 자리에 있었던 한옥집이었다.” ▲독신인 안동성소병원의 초대 원장인 별의추 선교사와 권찬영 선교사의 임시 선교기지로 사용된 가옥의 일부로 여겨진다. 오월번 선교사의 편지에 의하면 이 가옥에는 200여 명이 충분히 앉을 수 있는 규모의 공간을 소유한 대저택으로 안동교회가 첫 번째 ‘ㄱ'자 예배당을 건축하기 전에 예배처소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사진 3) 1910년 2월부터 3명의 선교사들이 모두 안동에 체류함으로써 안동선교부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하자 몇 채의 선교사 사택이 필요하게 되었을 것이다. 김광현 목사는 이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 해에 안동에 새로 선교부가 설치되었다. 선교부는 선교사 임시주택으로 쓰기 위하여 바로 그 서점 북쪽에 있던 큰 기와집 두 채를 사들여 수리하고 한 집(옛 교육관)은 독신 선교사였던 별의추 의사와 권찬영 목사가, 다른 한 집(지금의 예배당 자리)은 오월번 목사 가족이 살게 했다. 그래서 서점에서 모이던 교회는 선교사들의 임시주택인 별·권 양씨가 사는 집에서 모이게 되었다.” 에비여사는 당시 선교부가 세 채의 가옥을 구입했음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안동선교부를 시작할 때 하나님의 압도하는 섭리에 의해 선교사들이 거주하기에 가장 편안한 가옥을 구입했다. 18칸짜리 기와지붕의 한옥을 구입해 선교사 가정이 거주할 수 있도록 수리를 하고, 다른 두 채의 한옥도 구입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수리하였다.” 1911년 3·4월 선교캘린더에 수록된 한 장의 사진은 별리추 선교사와 권찬영 선교사가 사용한 가옥이 임시 선교기지였음을 추정하게 한다. 사진 3에는 당시 의료선교사인 별리추와 권찬영 선교사가 머물렀던 임시 선교기지 내 가옥 앞에서 별리추 선교사가 검은색 양복을 입고 손을 뒤로 한 채 서 있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임시선교기지 내에 있던 가옥 일부가 계속 부흥하고 있던 안동교회의 예배처소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에비여사는 추측하기도 한다. ▲안동선교부의 첫 임시주택으로 오월번 선교사 가족이 거처했던 골기와 한옥으로 안동교회의 두 번째 예배처소로 잠시 동안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월번 선교사 가정은 1910년 6월 3일 안동에 도착하여 7월 7일 안동읍 동편 끝에 위치한 두 번째 주택으로 이사함으로 이 임시가옥에서는 한 달 남짓 동안 잠시 거처한 것으로 오선교사의 부인인 새디 선교사는 선교편지에서 밝히고 있다.(사진 4) 한편, 오월번 선교사의 선교편지에 의하면 오월번 선교사 가족의 임시처소는 1910년 1월에 구입하여 일주일에 사흘은 지역 교인들이 사용하였고, 나머지 나흘은 사랑방 사역과 선교지 건축을 위한 일을 하기 위하여 선교사들이 사용하였다고 밝힌다. 안동교회의 교인들이 주일을 포함한 사흘 동안 이 임시주택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안동교회 교인들이 첫 예배처소인 기독서원을 떠나 16칸 ‘ㄱ’자 첫 예배당으로 이전하기까지 이곳에서 임시로 예배를 드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선교사 임시주택이 사진 4다. 안동교회 80년사는 안동교회의 두 번째 예배처소가 1910년 선교사들의 거처였던 임시주택으로 안동교회 교육관 자리의 골기와 한옥(韓屋)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에비여사는 보관하고 있던 안동선교 여러 초기 사진 중에서 사진 4 속의 주택을 안동교회 두 번째 예배처소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안동교회 80년사의 기록과도 어느 정도는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사진 4는 안동선교부의 가장 초기 사진으로 사진 속의 가옥은 골기와 한옥이다. 사진 4의 두 사진은 동일한 사진이다. 사진 4의 우측은 당시 오월번 선교사 가족이 거주하던 주택이며, 좌측은 안동교회 교인의 일부가 기독서원에서 나와 바로 이 가옥에서 예배를 드린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당시 일부 교인들이 방 앞에 서 있는 것을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안동교회의 두 번째 예배처소로 가능한 곳으로 안동선교부 선교사들이 임시로 거처한 사택인 사진 4 속에 있는 가옥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즉 오월번 가족이 머물던 주택과 별리추 선교사와 권찬영 선교사가 함께 거주했던 임시선교기지일 가능성이 모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주택규모로 보았을 때 안동교회의 두 번째 예배처소는 별리추 선교사와 권찬영 선교사가 함께 거주했던 임시선교기지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3. 세 번째 예배처소 : 선교사 주택(1) 안동에 도착한 선교사들이 우선적으로 구입했던 임시주택에서 선교사들이 생활하기에는 당연히 불편했을 것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선교사를 위한 영구주택 건축이 제기되었을 것이다. 다만 선교사들은 영구 사택을 건축하기 전에 임시로 거주할 주택지가 필요했을 것이다. 안동교회 80년사에 따르면 당시 주임 선교사였던 오월번 선교사가 선교사 주택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작업에 착수했음을 기록한다. 실제로 안동선교부 부지(敷地)로 금곡동 북쪽 동산이 확정되어 그곳에 선교사 영구사택을 건축하기 시작된 것은 1910년 즈음이다. 안동에 체류하고 있던 장인차 의료선교사가 오월번 선교사에게 1910년 11월 26일 쓴 편지에 의하면 낙동강이 보이는 동산 기슭 앞에 100 야드 정도의 새로운 선교센터 부지는 잘 부서진 화강암 토질이고 배수도 매우 좋았다고 한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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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전염병 유행하면 명절차례 안 지냈다”이철우 도지사, 중대본회의서 조선시대 전염병으로 명절차례 중단 사례 소개 ▲18일 중대본 영상회의에서 이철우 경북지사가 조선시대 자료를 소개해 주목을 받았다. 이철우 경상북도지사는 18일 국무총리 주재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영상회의에서 조선시대에도 전염병 발생 시 명절차례 중단 사례를 소개하며,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이번 추석에는 고향방문을 자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철우 도지사는 이날 회의에서 “유교 최대 덕목이 봉제사 지내는 것이었던 조선시대에도 전염병 유행할 때는 명절차례를 지내지 않았다”며 조선시대 일기자료를 소개하고, “전 국민이 이 사례를 나누어 명절에 차례 안 지낸다고 미안한 마음 가지지 않길 바란다”고 말해 주목을 받았다. 또한, 이 지사는 “대구경북은 출향인사들에게 이번 추석에는 고향방문을 자제를 요청하는 편지를 쓸 예정”이라면서 경북도의 비대면 명절 보내기 시책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에 정세균 국무총리는 “대구경북에서 비대면 명절 보내기 캠페인에 나서주시길 바란다”고 응원했다.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이철우 지사님이 좋은 사례를 말씀해 주셨다. 중앙정부에서도 이 사례를 언론·방송을 통해 널리 알리겠다”고 화답했다. 한편, 이 지사가 소개한 조선시대 자료는 초간일기(1582년, 권문해), 계암일록(1609년, 김령), 청대일기(1756년 권상일) 등으로 전해졌다. 경북 예천에 사는 초간 권문해는 ‘초간일기’(1582년 2월 15일 자)에서 “역병이 나라 전체로 번지면서 차례를 지내지 못해 조상님들께 송구스럽다”라고 적었다. 안동 예안 계암 김령이 쓴 ‘계암일록’(1609년 5월 9일 자)에는 “역병 때문에 차례(단오)를 중단했다”라는 기록이 있고, 문경 청대 권상일은 ‘청대일기(1756년 1월 1일 자)에서 “마을이 전염병으로 매우 어수선하여 설날 차례도 못 하고 사당 참배도 할 수 없으니, 마음이 아프고 서운하다”라고 적었다. 또 안동 하회마을 류의목은 ‘하와일록’(1798년 8월 4일 자)에서 “마마(천연두)가 극성을 부려 마을에서 의논해 추석에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라고 기록했다. 이혜경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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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이 필요합니다> 포항 좋은교회 종탑 붕괴, 천장 누수 ··· 복구 지원 필요“태풍으로 교회 종탑이 ··· 무너졌어요 ···!” ▲태풍으로 인해 종탑이 전파된 포항 좋은교회. 지난 9월 초 한반도에 상륙한 제9호 태풍 ‘마이삭’과 제10호 태풍 ‘하이선’은 폭우와 강풍을 동반한 대형급 태풍이어서 해당 지역에 많은 재산 피해를 줬다. 특히, 태풍이 동해안을 통과하면서 영남지역에 피해가 컸는데, 각 교단이 파악한 바에 의하면 포항 지역에서 가장 피해 교회 수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중에서도 예장통합 교단에 속한 포항 좋은교회(담임목사 김영숙, 포항시 북구 법원로 8번길 58)의 피해 소식은 너무 안타깝다. 이번 태풍으로 교회 종탑이 전파됐으며, 건물에 누수가 발생해 복구가 시급한데도 교회 재정이 여의치 않아 손을 대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다음은 김영숙 목사가 본 신문사 앞으로 보낸 편지 내용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저희 좋은교회는 예장통합 포항노회 포항동시찰회에 소속된 교회로, 제가 2003년도에 부임했을 때는 교회에 빚만 1,300만 원 남아있는 매우 열악한 재정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도들과 힘을 합해서 1년 만에 빚을 정리했으며, 2007년에는 교회 부지를 매입하고 교회 건축을 시작해 아름다운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게 됐습니다. 비록 아직까지 건축비가 부채로 남아있기는 하지만(2억5천만 원 정도), 하나님 은혜로 4년 전부터 재정 자립도 하고 안정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올해는 노회 동반성장에 한 구좌를 감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태풍 ‘하이선’으로 인해 지난 9월 7일 오전 10시경 교회 종탑이 한순간에 전파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바라볼 때의 참담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 건물 내부 천장과 계단 쪽에 누수 현상으로 물이 새고 있어서 빨리 복구를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교회 재정이 넉넉지 않아 엄두가 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의지하고 간구하던 차에 동역자 여러분의 도움을 청하고자 이렇게 경북하나신문사 앞으로 편지를 쓰게 됐습니다. 저희 교회가 일어설 수 있도록 기도와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포항 좋은교회 후원 문의는 경북하나신문(054-714-1171) 또는 김영숙 목사(010-8225-5901). ▲포항 좋은교회의 원래 모습이다. 영주 우병백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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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아니하고는장 재 효 목사 서울성은장로교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3절)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4~7절) 사도 바울 당시 고린도 교회에 은사로 인하여 말할 수 없는 대혼란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이 그 사실을 보고받고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낸 내용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다양한 은사를 받았지만 많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편지를 통해 은사는 한 성령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오직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이며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나타나지 않는 것임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여러분도 깊이 깨닫는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1. 성령으로 예수를 ‘주’라 고백한다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성령)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3절)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성령과 악령을 구별하지 못하고 우상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이 함께하지 않는 자는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할 수 없으며 오히려 예수님을 저주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고백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즉 성령으로만 ‘예수는 주’라고 고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에 가보면 은혜와 사랑으로 서로 교제하고 음식을 나누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소망을 나누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성령으로 예수님을 주시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적인 소망을 가꾸는 곳에 드나들면서도 천국 갈 믿음이 없다면 불행하게도 하나님이 버리신 가룟 유다처럼 버림받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속히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2. 성령으로 여러 은사들이 나타난다 또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4절)라는 말씀처럼,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은사들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각 개인에게 나타나는 은사는 여러 가지라도 한 성령으로 은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은사(恩賜)’는 ‘값없이 은혜로 주어진 선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영어로는 gift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은사들을 값없이 주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7절)고 사도 바울이 설명하고 있음을 볼 때, 교회의 유익을 위해 성령으로 다양한 은사들을 선물로 주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에게도 성령으로 다양한 은사들이 나타나서 여러 가지 이적 기사가 나타나곤 했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응답이 즉석에서 나타나고 성령의 역사로 귀신이 쫓겨나갑니다. 항상 성령이 충만해 있으면 귀신이 역사하지 못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권능을 행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눅9:1)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받아 그 능력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3.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 여기 보면 은사라고 하는 것을 9가지로 쭉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은사란 각 사람에게 성령으로 행사하게 하시는 기술과 능력이 있는 은사인 것입니다. 기술만 아니라 능력까지 주시는 것입니다. 기술이 있고 능력이 있어야 그 기술이 제대로 그 능력을 힘입어 성과를 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은사 9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지혜의 말씀’(8절上) 은사입니다. 지혜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는 것은 성령이신데 그 성령을 따라 말씀을 선포할 때 듣는 사람이 그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것을 지혜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목자를 통하여 성도들에게 주시는 모든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내포되어 있는데 성령 받은 사람이 즉각 깨달아질 때 지혜의 말씀이 나타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지식의 말씀’(8절下) 은사입니다. 지식의 말씀은 지혜를 실생활에 적용하고 가르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지혜의 말씀은 목자를 통해서 선포되지만, 지식의 말씀은 성도들이 듣고 깨달아진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깨우쳐줄 수 있는 은사를 말합니다. 세 번째로, ‘믿음’(9절上) 은사입니다. 믿음도 성령의 은사로 주어집니다. 한 예로 들면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하나님께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믿음의 은사는 문제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믿음의 성과로 나타나게 하는 은사로 볼 수 있습니다. 네 번째로, ‘병 고침’(9절下) 은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실 때 병 고치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병을 고치는 일은 복음의 증거로 나타나게 합니다. 다섯 번째로, ‘능력 행함’(10절上) 은사입니다. 이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으로 이적 기사를 나타냅니다. 그 능력을 보고 예수님을 믿고 회개해서 구원 얻게 하도록 그렇게 능력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사도 바울도 죽었던 사람을 살린 능력으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그것이 능력 행하는 은사인 것입니다. 여섯 번째로, ‘예언’(10절中) 은사입니다. 장래의 일을 하나님이 미리 말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구원 얻는 일에 성령께서 미리 알려 주시는 것을 전하는 일이 예언의 은사입니다. 일곱 번째로, ‘영들 분별’(10절中) 은사입니다. 그 사람이 성령에 이끌리는 크리스천인지 아니면 악령의 앞잡이로 지옥에 끌려가고 있는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적으로 분별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 앞에 우둔하지 않고 영적으로 분별하여 책망하는 일에 쓰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영 분별의 유익입니다. 여덟 번째로, ‘방언’(10절下) 은사입니다. 이 방언의 은사는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오순절 날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자 그곳에 모였던 경건한 유대인들이 각기 자기 나라말로 들리는 방언’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방언의 좋은 점은 방언으로 기도하면 귀신이 도망을 갑니다. 그 방언에 무슨 능력이나 효과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방언을 하게 하는 이가 성령이시기 때문에 그래서 성령에 쫓겨서 귀신이 도망을 간다는 것입니다. 아홉 번째로, ‘방언 통역’(10절下) 은사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어서 방언을 통역해 주는 은사가 필요했습니다. (권면의 말씀)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불같이 일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성령을 통하여 다양한 은사들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은사 받은 사람들이 자기의 은사가 우월하다는 착각에 빠져 무분별하게 행동을 했습니다. 이 일로 교회가 그 은사로 말미암아 큰 혼란에 빠지게 되어 버렸습니다. 특히 방언의 은사는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혼자 떠들어대는 관계로 은사의 부작용을 초래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이 은사에 대해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11절)라고 말한 것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각별히 주의해야 할 것은 고린도 교회처럼 은사를 무분별하게 사용하거나 자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 성령 안에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각 개인에게 주시는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임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은사는 교회의 덕을 끼치는 일이 되어야 함을 깊이 새기시길 바랍니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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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1)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1)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론 1. 첫 번째: 기독서원(基督書院) 2. 두 번째: 선교사 임시주택 3. 세 번째: 선교사 주택 4. 비공식 예배처소: 텐트 교회 5. 네 번째: 16칸 ‘ㄱ’자 예배당 6. 다섯 번째: 목조 2층 예배당 7. 여섯 번째: 2층 돌집예배당 결론 서론 선교사들의 보고에 따르면 1908년 안동에 선교부가 세워질 당시 안동의 인구는 약 15,000명 정도였다. 안동에 체류하고 있던 장인차(Johnson) 의료선교사가 오월번(Welbon) 선교사에게 1910년 11월 26일 쓴 편지에 의하면 안동은 소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본 도시 중에서 가장 깨끗하고 쾌적한 도시 중의 하나였다고 기록할 만큼 안동은 선교사들에게 매력적인 도시였다. 안동에 도착한 최초의 선교사는 부산에 주재하고 있던 배위량(Baird)으로 그는 1893년 4월 17일부터 5월 20일까지 경상북도 지방을 순행하며 전도했다. 이후 1899년 대구선교부가 설치되자 안동은 대구선교부의 관할 지역이 되었고, 안동을 포함하는 경북북부지역은 대구선교부의 주된 선교 타게트 지역이 되었다. 대구선교부 주재 부해리(Bruen) 선교사에 따르면 함께 안동을 순회한 방위렴(Barrett) 선교사는 1903년 안동의 첫 학습자이자 안동의 첫 열매를 얻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특히 미국북장로회 선교회가 1908년 9월 정기총회에서 안동선교부를 설립하기 위한 예비 작업을 결정하고 1909년 9월 정기총회에서 안동선교부 설립을 최종 결정한 후 안동을 중심으로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선교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10년대 안동시의 모습과 생활상으로 위 왼쪽은 낙동강으로 사진 아래의 대동강은 오기로 보인다. 마을과 낙동강 사이에 논이나 밭이 보이고 도로는 동에서 서로 향하는 안동-예천 도로이다.(사진1) 역사 기록에 의하면 안동교회는 1909년 8월 둘째 주일 8명이 첫 예배를 드린 후 몇 차례 예배처소의 변경이 있었다. 안동교회 7대 담임인 김광현 목사는 안동교회가 임시 처소까지 포함해 여섯 곳에서 예배를 드렸음을 기록한다. 특히 이 기록은 안동교회 7대 담임인 김광현 목사의 기억을 토대로 한 것으로, 김광현 목사는 안동선교부 최초의 선교사인 사우대(Sawtell)가 세상을 떠난 후 1910년 1월 안동선교부 선교사로 파송되어 1952년 한국을 떠난 권찬영(Crothers) 선교사와 그동안 안동지역에서 사역한 선교사들과 함께 오랜 세월 동역한 안동지역 교회의 리더였다. 안동교회 80년사에 따르면 안동교회의 예배장소는 임시 예배처소까지 쳐서 여섯 번에 걸쳐 옮겨졌다. 첫 번째 예배처소는 1909년 8월 둘째 주일, 최초의 교인 8명이 창립예배를 드린 곳인 대석동 129번지로 옛 대석상회가 위치한 기독서원이었고, 두 번째 예배 장소는 1910년 선교사들이 거처했던 임시주택으로 안동교회 교육관 자리의 골기와 한옥이었으며, 세 번째 임시 예배장소는 선교사들이 사택 건축을 위해 매입하여 잠시 거처 하였던 구 교도소 자리에 있던 기와지붕 건물이었다. 네 번째 예배장소는 1910년에 건축된 안동시 광석동 214번지에 소재한 ‘ㄱ’자형의 16칸 크기 예배당이었다. 다섯 번째 예배 장소는 현재 100주년 기념관에 위치했던 2층 목조 함석지붕의 건물로 1914년 2월 준공되었다. 여섯 번째 예배처소는 현재도 주 예배실로 사용하고 있는 석조 예배당으로 1936년 초여름에 건축을 시작하여 1937년 4월 6일에 준공되었다. 본 소고는 1909년 8월 8일 둘째 주일, 8명이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시작된 안동교회의 예배처소 위치와 예배당의 변동을 연구함으로써 안동교회의 내·외적 변화와 부흥, 선교부의 정착과 선교사의 역할 및 생활상, 그리고 초기 안동지역의 복음화 진행과정을 살펴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1. 첫 번째 예배처소 : 기독서원(基督書院) 100여 년 전 안동에는 성경과 기독 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이 존재했다. 서점의 이름은 기독서원으로 이 서점은 안동 최초의 근대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안동교회 80년사는 대구선교부의 안의와(Adams) 선교사가 서문 밖 초가 5칸을 사들여 기독서원을 개원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기독서원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교회 앞 도로 건너편 버스 정류장이 있는 대석동 129번지다. 당시 김병우가 언제 안동지역의 매서(賣暑)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안의와 선교사는 김병우를 기독서원의 매서로 활용했다. 사실 초기 한국교회가 곳곳에 세워진 것은 각 지역에 세워진 기독서원에 속한 매서와 권서의 활동과 깊은 연관이 있다. 교회가 없는 산간지방이나 외딴 지역에 매서를 통해 전해진 성경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매서들은 그 지역 그리스도인들이 모일 장소를 마련하고 예배를 인도하였으며, 이것이 훗날 교회로 발전했음을 여러 초기 자료들은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1909년 8월 8일 안동교회의 첫 예배가 당시 매서인 김병우에 의해 인도되었다는 것은 당시로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첫 예배처소인 기독서원으로 추정되는 5칸 초가집으로 1909년 8월 8일 8명이 첫 예배를 드렸다. 남성들이 주를 이룬 것을 보아 남성성경공부반 참석자 중심으로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사진2) 안동교회는 거의 1년 동안 이 기독서원에서 예배를 드렸다. 기독서원은 안동교회의 첫 예배처소로 오늘의 안동교회가 있게 했으며 안동지역 선교의 영적 자궁(子宮)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독서원의 운영에 관해 남아 있는 자료는 거의 없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 초창기에는 여러 도시에 세워진 기독서점은 그 지역의 선교부나 선교사들에 의해 직접 관리되거나 운영되었다. 따라서 안동의 기독서원도 선교사들에 의해 경영되었지만 어떤 시기부터 현지인인 한국인에게 운영권이 넘겨졌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기독서원의 규모는 5칸으로 선교사의 임시주택으로 옮기기 전까지 안동교회의 예배 처소로 사용되었는데, 위의 ‘사진2’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가옥은 초가집으로 안동교회 첫 예배를 드린 기독서원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에비(Ewy)여사(오월번 선교사의 손녀)나 필자의 소견이다. 왜냐하면, 사진2는 오월번 선교사가 남긴 초기 안동선교에 관한 사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회중들을 배경으로 한 초가집은 5칸 정도의 규모로 보인다. 또한, 1909년이나 혹은 1910년 초가집 ‘ㄱ’자 예배당을 건축하기 전에는 또 다른 예배처소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사진2의 초가집이 기독서원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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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교육청, 자기 성장을 위한 ‘도전! 성취프로그램’ 운영열정! 도전과 성취로 참 나를 찾다 ▲지난해 포항 연일형산초등학교 '버스킹'도전 과제를 선정으로 도전! 성취프로그램 운영.(사진=경북교육청 제공) 경북교육청(교육감 임종식)은 학생들에게 미래 교육의 핵심 역량인 창의성과 자기주도적 문제해결력을 키워주고, 협력과 도전 활동을 통해 참다운 자아를 발견하게 하는 ‘도전! 성취프로그램’을 특색사업으로 운영하고 있다. ‘도전! 성취프로그램’은 초등학교 3학년∼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인문, 예술, 체육, 봉사 등의 활동 영역에서 스스로 정한 목표를 성취해가며, 잠재능력과 끼를 발견하고 꿈을 향해 도전하는 자기 성장 체험 프로그램이다. 지난해 처음 시작된 ‘도전! 성취프로그램’은 선도학교 운영을 통해 운영 방안과 교육적 효과를 확인했으며, 올해 초등학교 96개교, 중학교 41개교, 고등학교 27개교, 특수학교 1개교 총 165개교로 확대 운영하고 있다. 도전! 성취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학교의 도전 과제는 ▲인문 영역에 시 암송과 낭송, 자서전 쓰기, 감사편지 쓰기, 독서, 한자 등 ▲봉사 영역은 재활용품 분리수거, 관광지 환경 정화 활동, 지역의 시설 방문, 학교 환경 가꾸기 등 ▲체육 영역은 줄넘기, 맨발 걷기, 국토 순례, 자전거, 배드민턴, 둘레길 걷기, 민속놀이 등 ▲예술 영역은 악기 연주, 공예품 만들기, 뮤지컬 동아리, 영상 콘텐츠 제작, 버스킹, 댄스, 그림 등 다양한 영역에서 학교별로 과제를 선정할 수 있다. 학생들은 스스로 도전 과제를 정하고, 성취 단계별 기준에 맞게 한 단계씩 성장·발전해 가는 과정을 교사가 확인한 후 학교별로 학년도 말에 인증서를 수여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학생은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어 변화하는 시대에 능동적으로 도전하고, 꿈을 실현하고 역량을 키워 미래 사회의 주인이 되길 기대한다. 영주 이산초등학교는 코로나19로 등교수업이 이루어지지 않는 기간 동안 학생들이 가정에서의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부모님과 함께하는 도전! 성취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온라인 수업 기간 중 학생 스스로 도전 과제와 목표를 정하고 학교에서 마련해 준 성취인증 노트를 활용해 실천 결과를 부모님께 인증받도록 했다. 학생들이 실천한 도전 과제는 ‘어버이날 노래 만들어 불러드리기’, ‘줄넘기 2000번’, ‘로봇 운반기 만들어 부모님께 내가 만든 음식 배달하기’ 등 다양하고 재미있는 주제들이 많다. 경북교육청은 ‘도전! 성취프로그램’의 안정적이고 창의적인 운영을 위해 매뉴얼을 제작·배부할 예정이다. 또한, 운영 학교 담당자를 대상으로 온라인 연수회를 개최하고 지속적인 컨설팅을 통해 프로그램을 일반화할 계획이다. 임종식 교육감은 “우리 아이들이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한 단계, 한 단계 도전을 통해 성취의 기쁨을 맛보는 활동을 통해 협력과 극기력을 함양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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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 6·25전쟁 제70주년 행사 개최“참전유공자의 값진 희생,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6·25전쟁의 역사적 의의와 교훈을 상기시키고 안보 의지 다짐을 위한 ‘6·25전쟁 제70주년’ 행사가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경북지부 포항시지회 주관으로 25일 포항시청 문화동 대잠홀에서 거행됐다. 이번 행사는 이강덕 시장을 비롯한 6·25참전용사, 보훈단체장, 기관단체장, 군인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기념식은 6·25전쟁에 참전한 UN군 참전용사를 기리기 위해 태극기, UN기, 6·25참전국 국기 입장을 시작으로 국민의례, 유공자 표창, 감사 메달 전수, 6·25참전유공자회 포항시지회장의 회고사, 6·25전쟁 영상물 상영, 이우근 학도병 편지 낭독, 6·25 노래 및 군가 제창, 만세삼창 순으로 진행됐다. 이번 행사는 코로나19 감염 예방과 확산 방지를 위해 예년에 비해 참석인원을 대폭 줄이고 마스크 착용, 발열 체크, 두 팔 간격 건강거리두기 좌석 배치 등 생활 속 거리두기 수칙을 준수하며 행사가 진행됐다. 특히, 이날 행사에는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제작한 ‘포항의 6·25전쟁’ 영상물 상영과 당시 서울 동성고등학교 3학년으로 포항여중 전투에 참전하여 전사한 이우근 학도병의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 낭독 등의 시간에 참전용사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행사 말미에는 이석수 6·25참전유공자회 경북지부 포항시지회 고문의 선창으로 참석자 모두가 소형 태극기를 들며 만세삼창을 하는 퍼포먼스도 펼쳤다. 이날 이춘술 6·25참전유공자 포항시지회장은 회고사에서 “참전용사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평화와 발전을 위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도록 다 함께 노력해 줄 것”을 당부했다. 이강덕 포항시장은 “70년 전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내던진 순국선열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을 수 있음을 감사하고, 그 숭고한 정신을 영원히 잊지 않고 항상 기억해 나갈 것”이라며, “그들의 헌신에 보답하는 포항시가 되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이혜경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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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길을 열어 주시는 주님장 재 효 목사 서울성은장로교회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1절)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5절)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8절)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하였느니라(10~11절) 오늘 우리의 일상이 너무나 불안하고 또 코로나 전염병으로 인해서 여러 가지로 위축된 심령들에게 때를 따라 주시는 말씀을 통해 이를 능히 극복하고 승리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는 내용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한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우리에게 이를 본보기로 삼고 동일한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시험을 당할 때는 피할 길을 주신다는 사실도 함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일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셔서 이 말씀을 선포하게 하셨는데, 1절부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일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홍해를 건너게 하셨는데 이를 세례받은 것이라고 바울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반석에서 구멍이 나게 하시고 물이 솟아 모두가 갈증을 면하는 흡족한 물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신령한 반석이라고 표현하였는데 그 반석을 예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요즘처럼 코로나 전염병이 많은 사람을 위협하고 있지만,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은 목이 마르고 힘들 때가 있어도 반석이신 예수님이 동행하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으며 새 힘을 얻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반석에서 물이 나와 먹고 살게 된 사건을 통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말씀을 통해서 살아야 함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광야교회의 모습을 고린도교회의 현재 모습과 동일시하여 광야교회가 어려움을 당한 일과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이유를 깨닫고 그 사건을 거울삼아 우리도 천국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 백성 다수를 멸망하심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5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끌어 가시는 과정인데, 왜 그들을 원치 않으셨을까? 그 이유에 대해 히브리서 3장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40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17~19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조금만 어려우면 애굽이 좋았다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외치며 원망하고 불평하기만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은 불신앙의 행동을 한 것이었지요. 그들의 불신앙이 결국은 그들로 하여금 약속받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해서 광야에서 다 엎어져 죽게 한 것입니다. 불신앙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3.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당하게 된 4가지 사건 사도 바울은 구약시대 광야교회에서 있었던 불행한 일들, 4가지 사건을 열거하면서 그들이 왜 멸망당하게 되었는지 그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사건(7절)은 출애굽기 32장에 기록된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호렙 산에 올라간 모세를 기다리다가 지쳐 아론을 통해 금송아지로 우상을 만들고 숭배한 사건입니다. 두 번째 사건(8절)은 민수기 25장에 기록된 것으로 광야교회가 싯딤에 이르렀을 때 모압 여인들의 꼬임에 빠져 간음하고 우상숭배에 이르게 되므로 하루에 2만 3천 명이 죽게 된 사건을 말합니다. 세 번째 사건(9절)은 민수기 21장에 기록된 것으로 광야교회가 가나안땅으로 진행할 때 에돔 땅을 지나가는 것이 쉬운 길이였으나 에돔이 거절하여 사해 오른쪽으로 돌아 산과 계곡을 지날 수밖에 없음에 백성들이 길이 험하여 불평함으로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사 그들을 심판하신 사건입니다. 네 번째 사건(10절)은 민수기 13장에 기록된 것으로 광야교회가 가데스바네아에 이르러 가나안땅에 12명의 정탐꾼을 보내어 40일을 탐지하였는데, 백성들이 희망과 승리를 말한 2명의 보고를 듣지 않고 절망과 불평을 보고한 10명의 말에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한 사건입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광야교회는 40년간 광야를 헤매다가 출애굽 할 때의 1세대는 승리의 보고를 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다 광야에서 죽고 20세 미만의 2세대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4.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주신 본보기 광야교회의 이러한 행적들이 오늘 코로나 전염병으로 어려움을 겪는 우리에게 경계의 말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6절),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11절).” 이런 일들은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경계의 교훈거리로 성경에 기록하게 하셨다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기록하게 하신 말씀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나도 그러면 안 되겠구나” 하는 경계거리로 삼아 분발하도록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광야교회가 불행한 사건들로 멸망당한 일은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귀한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악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가면 살 길이 열릴 것입니다. 5. 피할 길을 주시는 하나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피할 길을 내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13절) 하나님은 믿음직스러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시험당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실 뿐만 아니라 시험당할 때 피할 길을 열어 주셔서 그 죽을 지경에서 벗어나 살아날 수 있게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여기 전염병이 돈다 할지라도 그 죄를 철저히 회개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어지면 그 사람은 그 죽음의 환란에서 피할 길을 열어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것을 성령으로 깨닫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회개할 때, 성령이 알게 해 주시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피할 길이 무엇일까요?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약5:13)라는 말씀처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철저히 회개하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회복되고 모든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권면의 말씀) 코로나 전염병으로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환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벌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광야교회의 불행한 사건을 교훈으로 삼고 악에서 돌이키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 길을 주시고, 피할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전염병의 두려움으로 불안해할 것이 아니라 철저히 회개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50:15)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피할 길임을 믿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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