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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5)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5)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안대선 선교사(W.J.Anderson, 1890~1960) 목차 서문 1. 안대선의 출생지 2. 안대선의 출신대학과 신학대학원 3. 안대선의 결혼과 사별 4. 안대선의 안동선교부 부임 5. 안대선과 안동기독청년면려회 6. 안대선과 전국기독청년면려회 7. 안대선의 그 외 사역 8. 안대선의 퇴임 및 별세 6. 안대선과 전국기독청년면려회(2) 1) 전국청년면려회 조직(2) 안대선은 전국청년면려회 상임총무로 전국 교회를 순회하며 면려회 운동을 확산하는 데 큰 역할을 감당했는데, 창립총회부터 창립 10주년이 되는 6회 총회 시까지 상임총무를 역임했다. 안대선은 기관지인 진생(眞生)을 통해 “면려회가 1927년 6월 현재, 창립된 지 6년 만에, 전국연합회가 조직된 지 3년 만에 엄청나게 발전해서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라고 말했다. 조선면려연합회는 당시 전국에 300여회, 회원이 10,000여명, 노회를 구역으로 한 연합회가 7처나 되었다. 하지만 안대선은 “면려회연합회가 지금의 발전에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이 될 만한 기념사업을 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청년면려회 사역은 아동성경학교와 성경구락부를 통한 계몽 활동으로 확산되어 학생들을 위한 전도와 신앙교육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대사회적으로는 절제운동, 물산장려운동, 폐창운동 등을 통해 신앙과 생활을 일치시키는 데 큰 역할을 감당했다. 특히 절제운동은 술, 아편, 축첩, 매음, 잡기 등 사회악에 대한 정화운동으로 강력한 호응이 있었으며, 물산장려운동도 사치를 배격하고 검소한 생활을 강조한 것으로 이 두 운동은 당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특히 안대선은 면려회의 성격에 대해 분명하게 밝힌 바 있다. 면려회가 연회(宴會)나 사교적 기관으로 준비된 조직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면려회가 교회 청년들의 친교의 장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면려회 사업의 주요부분이 아닌 종속사업으로 편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안대선의 소견은 1927년 당시 면려회 안에서 남·여 청년들의 교제 문제로 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는 면려회가 남·여 교제의 장(場)으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유연하게 대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기독청년면려회 후원 기독청년면려회는 1925년에 기관지 진생(眞生)을 발간하여 전국 교회에 보급하면서 문서선교를 통해 청년들의 신앙훈련에 큰 도움을 주었다. 안대선은 면려회 기관지인 진생에 기고한 많은 글을 통해 면려회의 발전에 최선을 다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안대선이 진생에 기고한 글이다: ‘면려회를 재미있게 진행시키는 방법’(제3권제3호, 제3권제4호), ‘면려회 원칙에 대하여’(제4권제3호, 제4권제4호, 제4권제6호, 제4권제11호, 제4권제12호). 또한, 1929년 9월에 개최된 제18회 장로교 총회는 매년 2월 첫째 주일(창립주일)에 전국교회가 면려주일로 지키도록 결의함으로써 전국의 교회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라는 표어대로 그리스도와 교회에 헌신할 수 있게 했다. 1932년 9월에 개최된 제21회 장로교 총회는 면려부를 상설부서로 두기로 결의함으로써 면려운동이 한층 더 강조되었다. 따라서 청년면려회는 더욱 확산되어 많은 교회들이 면려회를 조직하여 1934년에는 전국에서 1,067개 교회가 면려회를 조직했고, 26개 지방연합회가 조직되었으며, 전국의 회원 수는 3만명이 훨씬 초과할 정도였다. 3) 전국청년면려회 총무 안대선과 부총무 권중윤 권중윤은 1900년 2월 3일 안동교회가 위치한 안동군 법상동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대구 계성학교 학생으로 대구 3·1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검거되어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애국청년이었다. 계성학교를 졸업한 후 안동으로 내려온 권중윤은 안동교회에 출석했으며, 안대선이 소개한 청년면려회에 적극적으로 활동한 결과 초대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이후 안대선은 권중윤과 함께 호흡을 맞춰 1921년 6월 안동지역 청년면려회가 조직될 수 있었다. 1922년 귀경한 안대선과 권중윤은 청년면려회를 전국에 소개하는 일에 헌신했으며, 1924년 12월 2일 서울 피어선신학교에서 열린 기독청년면려회조선연합회 총회에서 안대선은 총무, 권중윤은 부총무로 피선되었다. 안대선은 권중윤의 활동상을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군(君)이 도와주던 면려회 사업만은 점점 더 흥왕하여 이 회를 전국적 운동으로 만든 동기도 여기서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권중윤은 안대선과 함께 기호지방과 호남지방 순회활동을 하다가 1927년 1월 30일, 2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인(死因)은 과로로 알려져 있다. 안동에서 서울로 이임한 지 5년 만의 일이었다. 권중윤은 기독청년면려운동을 위해 헌신하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최초의 순직자라고 할 수 있다. 4) 기독청년면려회의 해체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의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전시체제 하에서 한국 주재 선교사들을 더욱 감시하고 탄압하였다. 특히 1930년대 신사참배 저항의 배후에 선교사들이 있다고 판단한 일제는 선교사들에 대한 탄압과 회유를 병행했으며, 통제와 단속을 더욱 강화하였다. 결국 교회와 기독교 단체에 대한 일제의 탄압으로 1938년 9월에 개최된 제27회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직후인 9월 19일 기독청년면려회도 해체되었다. 일제는 1940년대에 들어와 서양 국가들과의 외교관계가 점차 악화되자 한국의 외국인 선교사들을 본국으로 송환시켰고,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대부분 선교사들은 억류·추방되었다. ▲해방 후 재건된 기독청년면려회는 1947년 10월 새문안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청년회 전국연합회 창립총회를 통해 조직이 정비되었다. 사진은 1954년 4월 22일 안동교회에서 개회된 장로회 제39회 총회에서 ‘기독청년면려연합회 제5차 전국대회’ 모습.(사진6)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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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합동)대구경북지역남전도회연합협의회 신년하례회 개최“선교 사명을 더욱 힘써 감당하자” 다짐 ▲ 예배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 오정호 목사. 예장합동 대구경북지역남전도회연합협의회(회장 정해영 장로)는 1월 12일 영주동부교회(김상준 목사 담임) 예배당에서 신년하례회를 개최하고, 새해에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더욱 잘 감당할 것을 다짐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준비위원장 최병도 장로 사회로 드린 1부 감사예배는 증경회장 윤선율 장로 기도, 서기 최영호 장로 성경봉독, 복음가수 김문기 장로(새에덴교회) 특송, 오정호 목사(새로남교회) 설교, 김상준 목사 축도로 진행됐다. 오 목사는 설교에서 “지금 우리는 코로나로 인해 어려움이 많지만, 지금이야말로 영혼의 거품을 뺄 때이다. 비본질에서 본질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라며, “무늬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심장까지도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주님의 지엄하신 명령을 깨닫고, 하나님과 가까이하면서 순종의 열매를 많이 맺는 올 한해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예배에 이어 하례회에서는 안동장로회 증경회장 김만영 장로, 총회 부총회장 노병선 장로, 총회 회계 홍석환 장로가 회원들을 환영하고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전했으며, 총무 권택성 장로가 내빈 소개 순서를 맡았다. 회장 정해영 장로는 “코로나로 인해 선교사역이 어려운 가운데에도 주님의 복음 전파 명령을 따르기 위해 협력하며 달려오신 회원들께 감사하다”면서 “올해도 부르심의 상을 바라보며 선교 사명을 힘껏 감당하는 연합회가 되자”고 인사했다. ▲ 대구경북지역남전도회연합협의회 신년하례회에 참석한 내빈과 회원들이 선교 사역에 힘쓸 것을 다짐하며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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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노회남전도회연합회, 제25대 회장에 박도식 장로 취임구미노회남전도회연합회, 제25대 회장에 박도식 장로 ▲ 명예회장 박병윤 장로가 신임회장 박도식 장로(우)에게 남전도회기를 인계하고 있다. 예장합동 구미노회남전도회연합회는 1월 13일 오후 7시 구미사랑의교회(담임목사 안재호) 예배당에서 제25회 정기총회를 열고 박도식 장로(구미사랑의교회)를 신임 회장으로 선출했다. 총회에 앞서 회장 박병윤 장로의 사회로 드려진 1부 예배에서는 구미사랑의교회 안재호 목사가 말씀을 전했고, 구미노회장 임병만 목사가 축도했다. 안재호 목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끝없이 사단과의 영적 전쟁이다. 그러므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성령충만을 먼저 받아야 한다”면서 “날마다 성령충만을 사모하며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예수 증인의 삶을 살아가자”라고 권면했다. 이어 2부 축하 시간에는 구미노회 전도부장 안재호 목사와 증경회장 이해규 장로가 격려사, 대구경북남전도회연합협의회장 정해영 장로가 축사를 통해 남전도회 회원들의 수고를 치하하며 격려했다. 신임 회장 박도식 장로는 “코로나로 인해아직도 선교 현장은 많이 어렵지만, 하나님복음 전하는 사역은 멈출 수가 없다”며 “증경회장님들과 회원들과 함께 협력하여 주님의 일을 잘 감당하도록 저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인사했다. 한편, 제24회기 남전도회연합회는 지난해에 필리핀 팔라완 아라마이완 구미남전교회를 지어 헌당했으며, 미래자립교회 돕기, 순회헌신예배, 전도 부흥집회 등을 통해 선교사역을 펼쳤다. ▲ 구미노회남전도회연합회 제25회 정기총회를 마치고 참석한 내빈과 회원들의 기념촬영.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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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4)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4)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안대선 선교사 (W.J.Anderson, 1890~1960) 목차 서문 1. 안대선의 출생지 2. 안대선의 출신대학과 신학대학원 3. 안대선의 결혼과 사별 4. 안대선의 안동선교부 부임 5. 안대선과 안동기독청년면려회 6. 안대선과 전국기독청년면려회 7. 안대선의 그 외 사역 8. 안대선의 퇴임 및 별세 5. 안대선과 안동기독청년면려회(2) 3) 청년면려회의 교회 내 공식 활동 안동교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승인을 받은 청년면려회는 안대선 선교사의 지도하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청년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교회도 청년면려회의 사역을 도왔다. 공적인 주일예배를 마친 후 모든 회원은 다시 모여 헌심(獻心) 예배를 드렸으며, 성경을 공부하고 암송하며, 기도 생활에 열심을 내고, 받은 은혜를 간증하며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교회의 부흥에 청년들도 일조하기 시작했다. 또한, 면려회의 한 조직인 음악부는 찬송가를 가르치는 사역을 진행하여 주일예배 시 특별찬양을 하기도 했으며, 음악회도 개최하여 교인들과 지역주민들에게 새로운 음악을 소개하고 보급하는 역할도 했다. 또 특별한 은혜를 받았을 때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뿐 아니라 십일조 헌금도 교육하였다. 아울러 청년면려회는 농촌계몽운동, 금주금연운동 등 신앙을 통해 주민을 계몽함으로써 사회개혁에 앞장섰다. 토론회와 강연회를 개최했으며, 운동을 통해 친교하며, 서적을 공급함으로써 지식의 진보를 이루었다. 물산장려, 문맹퇴치, 농촌사업 등 범국민운동을 전개했으며, 청년면려운동을 통해 은혜받은 청년 회원들의 헌신으로 교회는 부흥했다. 4) 청년면려회의 안동지역 확산 처음 청년면려회를 시작했을 때 일부 교역자들과 선교사들은 면려운동을 급진적으로 생각하고 위험하다고 하면서 반대하고 냉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안대선 선교사는 면려회가 성경과 믿음에 기초한 운동임을 강조하며 설득했다. 그가 강조한 것은 기도, 예배출석, 성경읽기 등이었다. 그는 청년면려회의 목적에 대해 “주의 능력을 의지하여 청년들을 주 예수께로 인도하여 입교케 하며, 믿음이 부족한 사람으로 예수를 견고히 믿게 하며, 모든 회원들이 주의 은혜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했다. 당회로부터 면려회 조직을 공식적으로 승인 받은 후 안대선과 권중윤 등은 농촌과 산골을 찾아다니며 보다 적극적으로 청년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4개월여 만에 예천 상락교회, 안동 녹전교회, 봉화 척곡교회 등 10여 처 교회에서 청년면려회가 조직되었다. 특히, 1921년 3월, 예천 상락교회에서 조직됨으로 전국에서 두 번째로 청년면려회가 조직됐고, 1921년 5월 13일에는 안동 녹전교회에서, 5월 19일에는 봉화 척곡교회에서 면려회가 조직됐다. 척곡교회 김영성 장로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청년면려회 회의 후에는 반드시 금주가를 불렀다고 한다. 5) 안동지방 청년면려회의 조직 안동지역의 청년면려회가 빠른 속도로 조직되고 크게 활성화되자, 1921년 6월 7일부터 9일까지 10여 지회, 약 200여 명이 안동교회에 모여 청년면려회 규칙에 따라 총회와 대회를 개최하였다. 권중윤은 기독신보에 기고한 글을 통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일뿐 아니라 안대선 선교사의 헌신임을 밝히고 있다. 더욱이 대구와 경상북도를 관할하는 경북노회는 1921년 6월 15일에 개회된 노회에서 모든 교회가 교회마다 청년면려회를 조직하는 것을 승인하였고, 면려회 조직을 권면하기로 결의했다. 따라서 면려회 운동의 확산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다. 대구제일교회의 경우 노회 결의에 따라 1921년에 청년면려회를 조직했고, 그 결과 헌신예배와 전도사업을 통해 교회봉사와 회원 상호 간의 친목에 크게 이바지하였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청년면려회의 급속한 성장으로 1921년 말에는 25여 지회, 600여 명의 회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6) 안동교회 소년면려회 안동교회는 청년뿐 아니라 소년면려회도 조직하여 청소년들을 신앙으로 양육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기존의 소년면려회를 1937년에 재조직하여 13·4세부터 17·8세까지의 청소년들이 매주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예배를 드렸다. 청소년의 활동 중에는 독서 시간을 확보하여 성경읽기를 지도했고, ‘운현궁의 봄’이나 ‘흙’ 등 한국소설을 읽어주기도 했다. 소년면려회는 단순히 신앙만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때 소년면려회의 책임지도교사는 김익현 장로의 장남 김희년이었고, 지도교사는 김삼한 장로의 장모이며 성소병원의 간호원이던 서복조와 그 외 몇 명이 봉사했다. 6. 안대선과 전국기독청년면려회(1) 1) 전국 청년면려회 조직(1) 청년면려운동은 이후 다른 지역으로 급속하게 확산되면서 전국에 200여 개 교회가 청년면려회 조직을 구성하게 되었다. 특히 1921년 9월, 제10회 장로교 총회에서 청년면려운동을 평신도운동으로 허락하여 전국의 지교회가 청년면려회를 조직할 수 있도록 결의했다. 안대선과 권중윤은 9월 총회 이후 경성, 전주, 광주, 김천 등을 순회하면서 면려회를 독려하여 전국적으로 급속히 성장하였다. 청년면려회를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일을 책임 있게 감당하기 초대회장은 박현식, 총무는 안대선이 맡았다.(사진5)위해 안대선은 1922년 안동에서 서울로 떠나야 했다. 그가 안동에서 사역한 기간은 1917년부터 1922년까지 5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의 안동 생활은 안동뿐 아니라 전국의 청년신앙운동에 새롭고 뚜렷한 공을 남겼다. ▲안대선 선교사와 권중윤의 헌신으로 1924년 12월 2일, 서울 피어선신학교에서 기독청년면려회조선연합회 창립총회가 열림으로써 본격적으로 면려운동이 펼쳐지게 되었다. 초대회장은 박현식, 총무는 안대선이 맡았다.(사진5)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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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통합 경서노회남선교회연합회, “선한 일에 더욱 힘쓸 것” 다짐제39회기 신임회장에 박종관 장로 선출 ▲직전회장 김광현 장로가 신임회장 박종관 장로(우)에게 남선교회기를 인계하고 있다. 예장통합 경서노회남선교회연합회 제39회 정기총회가 12월 4일(토) 오후 2시 구미시민교회(조민상 목사 시무) 예배당에서 개최된 가운데, 신임회장에 박종관 장로(구미시민교회)가 선출됐다. 남선교회연합회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연합하여 국내외 선교사업에 힘쓰며, 성서의 교훈으로 기독교적인 인격을 높이고, 하나님의 뜻을 지상에 이루기 위하여 교회와 사회에 봉사함’을 목적으로 두고 있는 기관이다. 이날 개회예배에서는 구미시민교회 조민상 목사가 ‘대장부가 됩시다!’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믿음의 대장부가 되길” 권면했고, 경서노회장 장영운 목사가 축도했다. 이어 남선교회전국연합회 수석부회장 강찬성 장로, 남선교회대구경북협의회장 하태환 장로 등의 격려와 축하 메시지가 있었다. 신임회장 박종관 장로는 “39회기에도 우리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해서 어려운 교회와 불우 이웃을 열심히 섬기고 봉사하며, 연합회가 더 친밀하게 결속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인사했다. ▲경서노회남선교회연합회 제39회 정기총회에 참석한 증경회장들의 인사. ▲경서노회남선교회연합회 제39회 정기총회에서 신임 임원들이 인사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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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3)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3)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안대선 선교사(W.J.Anderson, 1890~1960) 목차 서문 1. 안대선의 출생지 2. 안대선의 출신대학과 신학대학원 3. 안대선의 결혼과 사별 4. 안대선의 안동선교부 부임 5. 안대선과 안동기독청년면려회 6. 안대선과 전국기독청년면려회 7. 안대선의 그 외 사역 8. 안대선의 퇴임 및 별세 5. 안대선과 안동기독청년면려회(1) 1) 기독청년면려회 기독청년면려회는 미국에서 특정 교파를 배경으로 한 것이 아니라 청년들의 기도회를 통해 자발적으로 생겨난 운동이다. 면려운동은 미국 포틀랜드 시에 있는 윌리스톤교회를 섬기는 클락(F.E.Clark) 목사에 의해 처음으로 시작됐다. 1881년 2월 2일 교회 청년들과 함께 기독교청년면려회(CE)를 조직한 클락 목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For Christ and the Church)라는 표어를 갖고 기도와 성경연구 전도운동에 힘을 쏟았는데, 얼마 되지 않아 미국 전역에 번지게 됐다. 이후 인도, 영국, 캐나다 등에도 면려운동이 전해졌으며 1892년에는 클락 목사가 중국을 방문하면서 아시아에서도 조직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안대선은 미국에서 일어난 면려운동의 성과를 듣고 한국에 소개하기 위해 클락 목사와 여러 차례 서신교환을 하며 그에 대한 자료를 얻어 기독청년면려회를 안동교회 청년회에 소개했다. 면려운동의 근본정신은 기독교 청년의 품격을 교육하여 교회와 사회를 위해서 봉사하는 데 있다. 면려회의 표어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하여’(For Christ And The Church)이다. 3대 결의로는 다음과 같다. 표어는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자, 정직한 나가 되자, 사람에게 신의를 지키자”이고, 주장은 ‘쉬지 않고 나를 교양하자, 나의 교회를 돕자, 방방곡곡에 전도하자, 외지 전도에 힘쓰자’이며, 작정으로는 ‘매 회원 매년 1인 전도주의자가 되자, 회원마다 십일조를 바치자, 내 동리에 신앙운동을 일으키자, 외지의 한국 동포를 구하자’이다. 특히 강령(綱領)은 다음과 같다. ① 우리는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문답을 우리의 신조로 한다, ② 우리는 개혁주의 신앙과 생활을 확립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됨을 우리의 목적으로 한다, ③ 우리의 사명은 다음과 같다: 개혁주의 신앙의 한국교회 건설과 사회의 복음화와 개혁주의 신앙의 세계교회 건설과 세계의 복음화. ④ 우리의 생활 원리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 안대선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안동교회에서 청년면려회 조직 승인을 위한 분위기가 점차 무르익게 되었다. 청년면려회원은 실제로 그리스도를 위한 삶, 교회를 위한 삶을 살아야 했다. 특히 회원은 실생(實生)회원, 학습회원, 명예회원 등으로 구분되었다. 특히 실생(實生)회원의 자격은 나이 17세 이상 40세 이하의 세례교인이었으며, 그리스도의 품성을 가지고 그의 삶을 본받아 살겠다(實生)고 서약해야 했다. 서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봉행(奉行)하기로 힘쓸 것. ② 내가 정한 뜻으로 매일 기도하기와 성경읽기를 끝까지 힘쓸 것. ③ 내가 있는 교회의 진흥하는 일에 힘써 그리스도인의 본분인 의무를 지키기로 힘쓸 것. ④ 내가 본회의 일체 의무를 다 실행하되 매 주일 본회 예배시간에 출석하여 찬송하며 기도하며 성경 읽고 증언하는 일분자(一分子)의 직책을 담임하기로 힘쓸 것. ⑤ 내가 매삭 헌심회(獻心會) 때에 혹 출타하여 돌아오지 못하였든지 또는 부득이한 사고로 참회치 못할 경우에는, 호명할 때에 대답으로 성경말씀 외울 절수를 기록하여 본회 회원에게 편지로나 전편으로나 신실하게 송부하여 대신 외워 정신적으로 참석함을 표하기로 힘쓸 것. 2) 안동교회 기독청년면려회 조직 19세기 말부터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국내에 여러 회(會)를 소개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기독청년운동도 소개했지만 신앙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하고 있었다고 안대선은 증언한다. 하지만 3·1만세운동 후 안동의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1919년 안동의 만세운동이 안동교회의 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나게 되자 의식 있는 많은 청년들이 안동교회로 모여들었고, 1920년 4월 8일 안동기독청년회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기독청년회는 시작할 때의 열정이 점점 식어져 유명무실한 청년회가 되었고, 신앙적인 면에서도 덕이 되지 않고 있었다. 더욱이 안동 기독청년회 조직을 이끌어가던 회장 김원진을 포함한 다수의 회원들은 불신자로 활동의 목적이 신앙운동이 아닌 사회운동에만 전념하게 되자, 당시 안동교회 동사목사인 권찬영 선교사는 일제의 교회탄압이 심해져 신앙생활이 방해받을 것을 염려했다. 교회는 안동기독청년회를 지도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순수한 신앙중심의 청년회 조직을 새로 구상하게 되었다. 당시 청년들은 전국적인 기미년(1919년) 3·1운동의 실패로 인해 좌절을 경험하고 있었고, 일제의 탄압이 날로 심해져 독립의 희망은 점점 사라지고 국민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 겨우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한 청년들은 신학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교회를 통해 애국 운동을 하려는 의욕이 더해졌다. 이때 안대선 선교사가 소개한 면려운동은 청년들에게 호감을 끌기에 충분했다. 안대선 선교사는 1921년 1월 하순, 청년면려회를 조직키로 작정하고, 당회의 허락을 받고 1월 23일 안동교회에서 청년면려회 창립총회를 개최하며 임원과 위원을 선정하였다. 면려운동을 활발하게 추진한 안동교회 주요회원들은 권연호, 권중윤, 김재성, 홍범순, 서순이, 장경영 등이었고, 권중윤은 회원들의 만장일치로 초대회장에 선출되었다. 안동교회 당회는 1921년 2월 5일 전국 최초로 기독청년면려회를 승인함으로써 청년신앙운동으로서 교회봉사와 대사회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으며 안동교회는 한국 기독청년면려회의 발상지 교회가 되었다. ▲안동교회 당회는 1921년 2월 5일 기독청년면려회 조직을 승인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전국에서 최초로 기독청년면려회가 출범하게 되었다. 당시 당회장은 권찬영 선교사였으며, 안동교회 2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이대영 목사도 참석했다.(사진4)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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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기쁨의교회, ‘천국복음과 생활선교’ 세미나 개최박진석 담임목사 “하나님 나라 통치권 회복 기대” ▲포항 기쁨의교회 ‘천국복음과 생활선교’ 세미나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포항 기쁨의교회(담임목사 박진석)는 10월 10일(주일)부터 31일(주일)까지 4주간 ‘천국복음과 생활선교’를 주제로 세미나를 진행했다. 이 세미나는 코로나19로 목회 전반의 변화와 더불어 선교와 전도의 패러다임이 바뀜에 따라 선교 전략을 공유하고 천국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세미나에서는 복지, 문화, 일터, 교육이라는 4가지 영역의 강연과 사례발표로 진행했다. 복지 영역은 최무열 목사(전 부산장신대 총장), 문화 영역은 손은희 목사(총회문화법인 사무총장), 일터 영역은 최복이 본죽 대표, 교육 영역은 박혜경 한동글로벌학교 교장이 강연을 맡았다. 이 세미나를 통해 기쁨의교회는 교인들이 생활의 각 영역에서 생활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전을 받고 삶에서 적용 가능한 실천 과제들을 찾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세미나를 기획한 박진석 기쁨의교회 담임목사는 “이번 세미나를 통해 교우들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권을 각 영역에서 회복할 수 있는 지혜를 찾기를 바란다”라며 “교회가 시대의 흐름 속에 선교하기 위한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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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애굽기(28)나의 출애굽기(28) 드보라 67. 백인 선교사님을 통해 지식을 익히다 그렇게 도움을 받다가 하루는 그 백인 선교사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제안을 하셨다. “저희 생각에 드보라 씨는 더 나은 교육을 받고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저희가 드보라님께 성경뿐만 아니라 다양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나에게는 너무나 고마운 제안이었다. 고난의 행군과 중국 생활 속에서 주로 생계를 걱정하고 먹고살기 바빴던 나로서는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마치 꿈과 같았다. 나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을 귀하게 생각해주시다니 ···. 감사한 마음이었다. 그렇게 나는 권유대로 선교사님을 따라 좀 더 큰 도시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2일에 한 번씩 그 선교사님 집에 찾아가 여러 가지 지식을 익혔다. 선교사님 집에서 처음 접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컴퓨터였다. 선교사님은 나에게 컴퓨터도 가르쳐주시고 여러 동영상도 보여주셨는데 특별히 북한에 대한 영상을 많이 보여주셨다. 차인표씨 주연의 탈북자의 애환을 담은 영화 ‘크로싱’도 그 집에서 봤다. 그 영상을 함께 보면서 나는 거기 나오는 악역들을 보며 ‘이 나쁜놈들 저 나쁜놈들’ 하고 있는데 슬쩍 옆의 백인 선교사님을 보니 퍼런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북한 사람이 받는 고통에 나보다도 더 마음 아파하시는구나 ···. 무덤덤했던 내 마음도 왠지 뭉클해졌다. 내가 감동받을 일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 선교사님 댁에는 한 탈북민 갓난아기가 있었다. 아기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북송되면서 남겨진 아이였다. 마침 백인 선교사님의 사모님은 생후 10개월 되는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은 이유식 먹이고 그 젖을 그 아이에게 먹이셨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북한의 아이를 이 백인 선교사 가정이 얼마나 귀하게 돌보는지를 옆에서 지켜보며 나는 북에서 배웠던 각종 교육이 잘못되었음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백인 선교사라고 하면 미제 승냥이다 스파이다 악마 같은 사람이라고 욕했는데 이 사람은 자기를 원쑤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이렇게나 사랑하는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내가 북한에서 자유롭게 발언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북에서 가르친 내용이 다 거짓이라고 폭로하고 싶었다. 남조선 괴뢰도당이, 미제 승냥이가 오히려 우리를 더 생각하고 불쌍히 여기고 있다고 꼭 북의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68. 중국을 벗어나 복음 전할 기회를 갖기로 하다 그렇게 선교사님 덕분에 공부도 하고 생활도 지원받으면서 나는 중국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선교사님을 통해 공부도 하고 복음 안에서 나를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서 가만히 숨어서 생활해야 하는 이곳에 머물기보다는 더 자유롭게 복음도 전하고 기회 되는대로 북한의 형제자매들을 위해 일하고 싶었다. 선교사님도 내 생각을 듣자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나섰다. 처음에는 미국을 알아보았지만 미국으로 난민 신청을 하거나 이민을 가기란 쉽지 않았다. 난민 신청을 하고 국적취득 하는 데 최소 수년은 걸린다고 했다. 반면 한국은 국적취득이 어렵지 않다. 게다가 TV에 탈북민들 활동하는 것을 보고 남조선에 가도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오픈도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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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2)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2)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안대선 선교사 (W.J.Anderson, 1890~1960) 목차 서문 1. 안대선의 출생지 2. 안대선의 출신대학과 신학대학원 3. 안대선의 결혼과 사별 4. 안대선의 안동선교부 부임 5. 안대선과 안동기독청년면려회 6. 안대선과 전국기독청년면려회 7. 안대선의 그 외 사역 8. 안대선의 퇴임 및 별세 3. 안대선의 결혼과 사별 안대선의 부인인 안의리는 1892년 8월 네브래스카 주 새드론(Shadron)에서 출생했지만 로스앤젤레스에서 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의리는 옥시덴탈 대학 재학 시절 켈로그 교수가 지도하는 성경 공부 모임에서 안대선과 만났는데, 이 시기는 북장로교 해외선교부가 안대선을 한국으로 파송하기로 결정한 이후였기 때문에 안의리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교제하면서 선교의 비전을 공유하고 한국에 관해 공부하면서 미리 선교지로 출발할 준비를 한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1917년 8월 결혼한 안대선과 안의리는 선교를 위한 준비 없이 한 달 만인 1917년 9월 한국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한국에 도착한 안대선 부부는 순회선교에 최선을 다했다. 안의리 선교사는 남편과 함께 안동지역의 농촌과 산촌을 방문하며 3·1운동의 실패로 실의에 빠져 있던 청년들에게 복음과 희망을 전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사역으로 생각했다. 특히 안의리는 교회 안팎에서 여성 교육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교회가 좀 더 여성교육에 노력하기를 강조했다. 안동선교부에서 사역할 때 안의리는 안동남녀성경학원에서 여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그는 한국인들에게 ‘절대 화내지 않는 선생’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로 후덕하고 온유한 성격의 교사였다. 안동에서 귀경한 안의리는 서울 정신여학교와 피어선성경학원에서 학생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또한 그는 수년 동안 여성 선교사 모임의 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활발한 여성 선교사였다. 안의리는 안동에서 출생한 지 7개월 된 딸 도로시(Dorothy)를 땅에 묻은 후 셜리(Shirley), 필리스(Phylis), 로라 베드(Lola Bete) 등 세 딸도 모두 안동에서 낳았다. 마을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교수함으로써 평신도 양육에 열심이던 안의리는 한국에 도착한 지 17년이 지난 1934년 11월 추수감사절을 보내고 42세에 심장마비로 하늘나라로 갔다. 비록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있는 그의 묘는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는 당시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할 사역을 감당하고 순교 당했기에 그의 죽음은 고결하다고 할 수 있다, 4. 안대선의 안동선교부 부임 1) 첫 딸의 죽음 1917년 가을, 서울에 도착한 안대선 부부는 곧바로 안동선교부로 부임했다. 안동선교부에는 1909년 부임한 오월번 선교사, 1910년에 부임한 권찬영 선교사, 그리고 1914년에 부임한 인노절 선교사가 주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1년 전인 1916년 오월번 선교사가 안동을 떠나 평양으로 이임했기 때문에 안대선 선교사는 결원이 생긴 안동선교부로 신속히 부임해야만 했을 것이다. 안대선의 이름은 1918년 1월 1일 저녁 7시 대구동산성경학교에서 회집된 제3회 경북노회에 처음 등장하는데, 이것은 그가 1917년 안동선교부에 부임했음을 알리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안대선 부부는 안동에 도착하자마자 큰 슬픔을 경험해야만 했다. 1919년 6월 12일에 출생한 첫 딸 도로시가 1920년 1월 25일 7개월 만에 당시 풍토병인 이질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안대선은 도로시의 묘비에 “예수님과 함께(With Jesus)”라고 적었다. 결혼하자마자 선교지인 한국으로 출발했고, 안대선과 안의리 두 사람의 사랑의 결실로 얻은 첫아기의 죽음으로 이들은 큰 상실감에 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슬픔을 이겨내고 주어진 사역에 열과 성을 다하여 안동선교에 있어서 새로운 사역의 장(場)을 마련했다. 참고로 안동 경안고등학교 정문 입구 좌측에 3기의 선교사의 무덤이 있는데, 하나는 인노절 선교사의 묘이고, 다른 두 기는 한 살도 되지 않은 안대선의 딸 도로시의 무덤, 그리고 옥호열 선교사의 2살 난 아들 윌리엄의 무덤이다. 2) 성경학교 교사 안대선은 안동선교부의 센터가 있는 안동을 근거지로 영주, 의성, 예천, 청송 지역 등지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우고, 이미 설립된 교회들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또한 안동지역 성도들에게 체계적으로 성경을 가르침으로써 평신도 양육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안동에는 1912년 처음으로 여자성경학원이 설립되어 평신도 여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하지만 안동지역 평신도의 성경공부에 관한 관심과 열망이 여타 지역에 비해 폭발적이어서 보다 체계적인 성경학교 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안동선교부는 1920년 4월 10일 안동남녀성경학교를 개교했는데, 이때 초대교장은 인노절 선교사, 교사는 권찬영 선교사와 안대선 선교사였다. 안동남녀성경학교는 남녀 모두를 대상으로 첫 입학생을 모집했는데, 1920년 가을에 1백30명이 등록했다. 성경뿐 아니라 수학, 한문, 음악 등 교양과목도 함께 가르쳤다. 그런데 학교의 교실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으므로 첫 학기의 수업이 성소병원 진료실에서 진행되었다. 이 학교는 학제를 1년에 두 학기로 나누었고 한 학기에 한 달간씩 수업을 진행하였다. 1922년 교장 인노절 선교사가 순교한 후 1925년 12월 안동성경학교 교사와 기숙사가 새롭게 준공되었으며, 학교의 이름을 개명해 ‘인노절선교사기념성경학교’라고 명명(命名)하였다. ▲안동선교부 기지에 선교사 사택이 준공된 후의 모습. 사진에는 준공된 여러 채의 선교사 사택을 볼 수 있는데, 좌측 숲은 현재 경안고등학교로 오월번 선교사 가족이 1911년 12월 27일 입주한 사택으로 알려져 있다.(사진2) ▲1925년 안동에 준공된 ‘인노절기념성경학교’의 모습. 2005년 철거되어 그 자리에 성소병원 신관이 건축되기 전까지 80년 동안 안동지역을 위한 목회자 양성을 넘어 한국교회와 세계선교에 헌신하는 주의 종들을 배출했다.(사진3)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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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다니엘기도회, 11월 1일부터 21일간 대장정 시작1만4천여 교회 참여 ··· 21일까지 유튜브 등 생중계 ▲김은호 오륜교회 목사가 11월 1일 개막한 ‘2021 다니엘기도회’에서 설교하고 있다. 기도회는 오는 21일까지 이어진다.(사진=다니엘기도회) ‘2021 다니엘기도회’가 지난 11월 1일 서울 오륜교회(담임목사 김은호)에서 개막했다. 올해는 1만4천여 교회가 참여했으며 유튜브와 홈페이지를 통해 생중계한다. 첫날 중보기도 시간에는 대전 지역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니엘기도회는 매일 저녁 본 기도회 시작 전에 1시간가량 국내 지역과 지역교회를 위해 함께 기도한다. 참석자들은 대전 지역 2,700여 교회들이 복음 안에서 연합을 이루고, 대전 시민들이 복음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중보기도 했다. 이어 첫날 간증자로 나선 다니엘기도회 운영위원장 김은호 목사는 ‘이제 역전되리라(삿 11:1~11)’를 주제로 설교했다. 김 목사는 “길르앗 사람 입다는 기생의 아들로서 불행의 분깃을 안고 태어났으며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결국 민족을 구원할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인생 역전의 은혜를 경험한 것”이라고 했다. 김 목사는 “인생을 살다보면 내 의지와 관계없이 불행할 수 있다. 심각한 병에 신음할 때도 있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처한 상황을 운명론적으로 받아들이지 말라. 우리의 믿음에 따라,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따라, 하나님께서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고 선포했다. 아울러 김 목사는 온·오프라인으로 참석한 모든 성도들을 향해 “교단과 교파가 다르고 섬기는 교회가 다르고 처한 상황이 다르지만,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며 “21일 동안 주의 보혈에 의지해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자. 기도회가 끝나면 우리 모두 간증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올해 다니엘기도회는 21일까지 매일 오후 8시부터 시작된다. 말씀 선포 시간에는 김은호 목사를 시작으로 이은상 선교사, 장진숙 작곡가, 류응렬 목사, 차길영 대표, 이옥 선교사, 지선 전도사, 김윤상 선교사, 신용백 목사, 박성현 교수, 김희아 집사, 김혜숙 선교사, 이승제 목사, 이수영 집사, 고성준 목사, 김명애 교수, 최명환 대표, 권오희 목사, 장세호 목사, 강내우 대표 등이 강사로 나선다. 마지막 21일은 간증의 밤으로 다양한 분야의 목회자와 평신도 사역자들을 통해 은혜로운 말씀과 간증이 선포될 예정이다. 한편, 1998년부터 시작된 다니엘기도회는 매년 11월 1일부터 진행되며, 20여 년 만에 1만여 교회와 40만여 성도가 참여하는 초교파적 연합기도회로 성장했다. 지난 2020년에는 13,991 교회에서 총 40만여 명의 교인이 참여하고 102개 국가 522개 해외 교회에서 접속했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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