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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지역 최초의 순교자, 소텔 선교사(3)안동지역 최초의 순교자, 소텔 선교사(3) 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소텔 선교사(Chase C. Sawtell, 1881-1909) 목차 1. 서론 2. 소텔 선교사의 가정(家庭) 3. 소텔 가정의 신앙(信仰) 4. 소텔 선교사의 소명(召命) 5. 소텔 선교사의 성품(性品) 6. 소텔 선교사의 파송(派送) 7. 소텔 선교사의 사역(使役) 8. 소텔 선교사의 순교(殉敎) 9. 소텔 선교사의 부인, 캐더린 10. 캐더린 선교사의 특별한 공헌(貢獻) 11. 결론 7. 소텔 선교사의 사역(使役) 부산선교부의 배위량 선교사가 안동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는 1893년 5월 5일 안동에 도착했는데, 이 날 배위량 선교사 일행이 안동에 머문 시간은 하루도 되지 않았지만 이 때 뿌려진 복음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 후 1902년 3월, 대구선교부의 안의와 선교사가 조사 김기원과 함께 안동의 시장에서 복음을 전하였고, 이후 방위렴, 부해리, 맹의와, 어도만 선교사도 안동을 중심으로 경북 북부지방을 순행하며 복음전파에 열심을 내었다. 안동을 포함한 경북 북부지역에 그리스도인들이 급속도로 증가하자 안의와 선교사와 부해리 선교사는 안동에 선교부가 설립되어야 함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소텔 선교사는 대구선교부에서 주어진 사역을 잘 감당하고 있었다. 그는 다재다능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재정 서류 작성도 능수능란했고, 건물의 기계적 문제도 거뜬히 해결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대구 동산병원에 물을 상시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작은 풍차를 만들어 세우기도 했다. 이처럼 소텔 선교사는 대구선교부에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선교사였다. 그러나 안동, 영주, 청송 등 경북북부지역의 복음화 필요성이 대두되자 선교협의회는 1908년 안동선교부 설치를 확정하고 소텔 선교사가 초대 주재선교사로 임명되었다. 소텔 선교사는 1908년 12월 1일 대구를 출발하여 안동에 도착하여 선교기지가 될 임시주택 한 채를 구입하였다. 또한, 1909년 2월 강원도 원주에서 사역하던 오월번 선교사가 조사인 김영옥과 함께 안동으로 내려왔다. 이후 의료선교사인 별리추가 원주에서 안동으로 전임함으로써 안동선교부는 비로소 선교부로서의 완전한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안동선교부의 초대 주재선교사로 도착한 소텔 선교사의 주된 사역은 캠프를 개설하여 성경공부반을 운영하는 일이었다. 7일 동안 계속된 캠프에는 무려 150명이 참석했는데, 소텔 선교사는 이들을 조 편성하여 낮에는 전도하고, 밤에는 집회를 열어 하루 일과를 나누었다. 그 결과 안동읍 유일한 교회였던 안동교회는 매일 밤 신자들로 가득했다. 안동선교부가 개설된 이후 1년도 경과하지 않은 상황에서 안동으로 온 소텔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결신하였고, 결신한 자들을 모아 훈련시켰으며, 훈련받은 이들을 마을로 보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게 했다. 소텔 선교사의 복음전도 패러다임은 전도, 양육, 파송의 방식이었다. 낮에 복음을 전하고 돌아온 사람들과 복음을 수용한 사람들, 또한 복음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을 모아 밤에 집회를 열었는데 무려 200명이나 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비록 소텔 선교사가 안동선교부에서 활동한 기간은 길어야 1년, 짧으면 수개월에 불과했지만 안동선교부가 조직된 지 1년 만에 이루어진 놀라운 성과는 이와 같은 소텔 선교사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후 복음이 활발하게 전파되고, 훈련된 평신도들의 증가로 인해 안동 땅에 자생적인 교회들이 세워질 토양을 만드는데 소텔 선교사가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소텔 선교사가 구입한 안동선교부의 첫 임시주택. 오월번 선교사 가족도 1910년 6월 3일 안동에 도착하여 7월 7일 두 번째 주택으로 이사하기 전 까지 한 달 남짓 거처했다. 8. 소텔 선교사의 순교(殉敎) 1909년 가을, 소텔 선교사와 오월번 선교사는 안동에서 수일 동안 전력을 다해 복음을 전한 이후 소텔 선교사는 안동에서 북쪽으로, 오월번 선교사는 서쪽으로 나누어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도의 길을 떠난 지 10일 만에 소텔 선교사는 장티푸스에 걸렸다. 소텔 선교사는 선교 후원금을 아끼려고 인내하면서 조랑말을 타고 대구에 도착했다. 처음에 소텔 선교사의 병은 중한 것이 아니었지만 별세하기 이틀 전부터 심각한 상태가 되어 안타깝게도 1909년 11월 16일, 28세라는 젊은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소텔 선교사의 무덤은 현재 대구동산병원 경내의 은혜정원에 있다. 남편을 먼저 보낸 부인 캐더린 선교사는 남편의 묘비에 “나는 그들(조선인들)을 사랑하겠노라”라고 적었다. 그런데 이 문구는 소텔이 오마하 신학교에 다닐 때 자신이 한 말이다. 소텔의 신학교 동창인 월트 레이놀즈가 기억하고 있다가 묘비에 새긴 것이다. 소텔 선교사는 조선을 사랑했기 때문에 내한했고, 조선과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나라로 갔으며, 지금도 하늘나라에서 한국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안동 땅에 순교의 피를 뿌린 최초의 순교자였다. 안동 선교는 이처럼 피를 흘림으로써 시작되었던 것이다. 안동선교부의 초대 선교사로 부임한 소텔 선교사가 1909년 11월 16일, 장티푸스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자 안동 선교부의 정상적인 선교활동이 다소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동지역의 선교는 결코 지체될 수 없는 일이었다. 순교의 피가 뿌려진 지 2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1910년 1월, 권찬영 선교사가 안동에 부임함으로써 안동선교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권찬영 선교사는 소텔 선교사가 순교한 지 1년이 지난 후 소텔 선교사의 동서가 되었다. 안동에 발령받은 그는 별세한 소텔 선교사의 처제인 엘렌과 1911년 2월에 결혼하였으며, 정년으로 1950년 미국으로 귀국하기 전까지 무려 40년 동안 안동지역의 선교에 온 힘을 다 쏟았다. 권찬영 선교사가 소텔 선교사가 졸업한 미국 오하마 장로교 신학교 동문이었다는 사실은 안동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로 안동에서의 구원사역은 큰 단절 없이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09년 10월경 사진. 오른쪽이 오월번 선교사, 왼쪽이 소텔 선교사이고, 그 옆에 김영옥 조사가 서있다. 김영옥은 1911년 9월, 안동교회 초대 담임목사가 되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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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 목사의 논문원문(6) - 안동지역 최초의 순교자, 소텔 선교사안동지역 최초의 순교자, 소텔 선교사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소텔 선교사 Chase C. Sawtell, 1881-1909) 남북 전쟁이 끝났을 때 미국은 분열된 상태였다. 1865년부터 1918년까지의 미국의 역사는 남북 전쟁 후에 미국 재건이 시작되어, 산업화가 진전된 시대였다. 사회의 급격한 변화로 많은 노동조합이 탄생했고 파업이 이어졌다. 특히 약 50여 년 동안(1865년~1918년) 유럽을 중심으로 다른 대륙에서 2,750만 명이나 되는 이민자가 미국으로 몰려들어 저렴한 노동력을 제공했고, 캘리포니아 주(州)와 같이 개발되지 않은 지역에 다양한 지역사회가 형성됐다. 대부분의 인디언 부족은 작은 거류지로 이주 당했고, 백인 농장주와 목장주의 소유가 되었다. 공장 노동자는 학대와 폭력에 시달렸고, 그것에 수반하여 노동 운동을 낳게 되었다. 이러한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소텔(史佑大, Chase Cranford Sawtell) 선교사는 1881년 1월 9일, 네브라스카(Nebraska) 주(州) 소재 티케이마(Tekamah)에서 출생했다. 그는 환경이 좋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의 종(從)으로 불러 선교사로 보내시려고 했을 때 소텔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무조건 순종했다. 네브라스카 주의 밸리뷰(Bellevue) 대학을 졸업한 소텔은 오마하(Omaha) 신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 졸업했다. 그 해 목사 안수(按手)를 받고 파송 받아 1907년 10월 16일 한국에 도착했다. 소텔 선교사 부부는 처음에 대구선교부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여러 면에서 뛰어난 재목이었던 그는 대구선교부에 있던 선교사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1908년 안동선교부가 신설되었을 때 소텔 선교사는 자원(自願)하여 대구보다 열악한 환경인 안동 땅으로 이사했다. 안동선교부의 초대 주재 선교사가 된 그는 헌신했다. 특히 1909년 11월 16일 순교하기 전 까지 1년 동안 그를 통해 안동 땅에 의미 있는 전도와 새신자 양육이 이루어졌다. 복음전도의 전형적인 패러다임(paradigm)인 양육, 파송, 전도를 통해 안동지역 부흥의 기초를 마련했다. 하지만 소텔 선교사는 풍토병인 장티푸스에 걸려 28세의 젊은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소텔 선교사는 무려 109년 동안 한국교회 속에서 잃어버린 선교사였다. 이 글을 통해 우리의 뇌리 속에서 잊혀진 소텔 선교사의 삶과 사역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소텔 선교사의 가정(家庭) 소텔 선교사는 1881년 1월 9일, 미국 네브라스카(Nebraska) 주(州) 소재 티케이마(Tekamah)에서 출생했다. 소텔의 아버지는 웨스트 버지니아(West Virginia) 주에서 출생한 해리 소텔(Harry C. Sawtell)로 그는 세 번 결혼했는데, 소텔 선교사는 두 번째로 결혼한 제시 소텔(Jessie D. Sawtell)에 의해 출생했다. 제시 소텔은 소텔 선교사와 리트를 낳았다. 소텔 선교사의 동생인 리트는 몬타나(Montana) 주 아나콘다 시에서 척추 전문의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텔 선교사의 부친은 1885년, 티케이마 북쪽으로 약 13Km 떨어진 실버 크릭(Silver Creek)으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소텔의 부친은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가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하이오(Ohio) 주의 댄빌(Danville)로 이사해 살기도 했다. 9세인 1900년, 소텔의 가정은 1870년에 거주한 적이 있던 아이오와(Iowa) 주 드모아 카운티 덴빌에서 살았다. 이 때 소텔 선교사 부친의 직업은 여전히 농부였는데, 상대적으로 다른 농부에 비해 가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세기 미국의 농업은 현저한 발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토지의 피폐, 자연 재해, 자급자족 비율 감소와 연방 정부의 적절한 법적 보호와 지원의 부족 등으로 농부들의 삶은 지처 있었다. 일반적으로 19세기 미국 소작농의 대다수는 빚에 쪼들렸고, 유일한 탈출구는 수확량을 높이 과잉 생산이었으나 과잉 생산은 판매 가격 하락과 소득 감소로 이어졌고, 그 결과 토지는 피폐하고 토지 소유자나 소작농 모두가 가난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따라서 다른 농부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빈곤했던 소텔의 가정은 가난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소텔 가정은 다시 네브라스카 주의 오마하(Omaha)로 이주했고, 그 이후에는 오마하 인근에서 계속 거주했다. 소텔 선교사가 한국으로 오기 전인 1907년 3월 5일에 작성한 미국 장로교 해외 선교부에 제출한 선교사 지원서에 따르면 그의 주소는 오마하 노스(North) 21가 3303번지였다. 따라서 성장한 이후 소텔 생활의 중심 무대는 네브라스카 주의 오마하라고 할 수 있다. 네브라스카 주 티케이마에서 출생한 소텔 선교사는 웨스트 버지니아, 몬타나, 오하이오, 아이오와 주를 전전하다가 오마하에 정착하였던 것이다. 소텔 가정은 믿음의 가정이었다. 비교적 자주 이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착한 지역에 있는 교회에 등록하고 출석했기 때문이다. 2. 소텔 가정의 신앙(信仰) 대구와 경북지역에서 선교 사역을 감당한 선교사의 삶과 사역을 추적하여 연구하고 있는 손상웅 목사에 의하면 소텔이 최초로 섬긴 교회는 네브라스카 주의 티케이마 교회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것이다. 여렸을 때 소텔은 여러 주(州)를 옮겨 다니며 생활했다. 4살 때인 1885년, 소텔의 가정은 티케이마에서 실버 크릭(Silver Creek)으로 이주했다. 소텔은 시골의 작은 교회인 실버 크릭(Silver Creek) 감리 교회에서 1897년 11월, 낙스 본디(Knox Bonde)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당시 실버 크릭에는 장로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가정은 감리교회를 다닐 수밖에 없었다. 소텔의 누나도 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아 소텔 가정이 실버 크릭으로 이사 온 이후 온 가족이 모두 실버 크릭교회에 출석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1861년 1월 11일, 공식적으로 오마하 제2장로교회(The Second Presbyterian Church of Omaha City)로 명명되었다가 1888년 4월, 오마하 제1장로교회(The First Presbyterian Church of Omaha)로 변경되었다. 따라서 소텔이 오마하로 이사해 교회를 정하고 등록할 당시는 교회 이름을 변경하기 이전(以前)이었기 때문에 오마하 제2장로교회가 옳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오마하에는 1867년에 설립된 또 다른 교회가 있었다. 이름은 오마하 중앙장로교회(Central Presbyterian Church)로 당시 해외선교를 특별히 강조하는 교회였다. 제1장로교회와 중앙장로교회는 오마하의 대표적인 교회로 교회가 설립된 이래 오마하 지역 교회들의 중심교회였다. 그러나 두 교회는 1950년대 최고로 성장했다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1917년 3월 11일에 준공된 오마하 제1 장로교회의 모습으로 1959년엔 교회 역사상 최고로 2188명이 등록하고 있었다. 타개책을 모색하던 두 교회는 2014년 합병(合倂)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하 내용은 논문원문 첨부파일 참조)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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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 목사의 논문원문(5) - 90년 동안 한 교회를 섬긴 여성지도자 김점향 권사90년 동안 한 교회를 섬긴 여성지도자 김점향 권사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점향 권사 (1907~1998) 안동교회 첫 예배는 4명씩 동수(同數)의 남·여가 함께 예배를 드 렸다. 외할머니 등에 업혀 예배를 드린 아기를 포함하면 4명의 남성, 5명의 여성이 된다. 안동교회는 시작부터 균형 잡힌 성(性) 비율로 하나님을 예배했던 것이다. 당시 상당한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지배하고 있던 안동 땅에서 동수의 남녀가 함께 예배를 드림으로 교회가 출범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남성중심의 교회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래도 교회 안에서 여성의 발언권도 무시할 수 없었다. 초기부터 뛰어난 여성 일꾼들이 안동교회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교사와 남성 교인들을 도와 새롭게 출범한 안동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본 글은 3살 때 외할머니 등에 업혀 안동교회 첫 예배에 참석한 이래 무려 90년 동안 안동교회를 섬긴 김점향 권사님에 관한 것이다. 결혼 후 수년 동안 안동을 떠나 영주로 외도(外道)하기는 했지만 거의 100년 가까이 동안 한 평생 안동교회를 섬겼으며, 장성한 이후에는 안동교회 여전도회와 경안노회 여전도회의 중심인물로 여전도회를 든든히 세운 여성 지도자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무려 20년이 지난 지만 그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가 안동교회 뿐 아니라 경안노회를 대표하는 여성 지도자였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신앙과 인격, 그리고 품성은 그를 여성 지도자가 아니라 성(性)에 관계없이 교회와 노회의 지도자 반열(班列)에 올려놓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신앙과 관련된 김점향의 생애(生涯)를 살펴보자. 1. 할머니 등에 업혀 안동교회 첫 예배에 참석한 아기 1909년 8월 둘째 주일인 8일, 안동교회는 감격스러운 첫 예배를 드렸다. 안동 읍(邑) 최초의 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당시 안동 최초의 근대서점인 기독서원(基督書院)에서 8명이 모여 첫 예배를 드렸고, 안동 땅에 복음이 전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기독서원은 5칸의 초가가옥으로 현재 안동교회 앞 도로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첫 예배를 드린 초대교인의 이름은 김병우, 강복영, 원화순, 원홍이, 권중락, 박끝인, 정선희, 김남홍 제씨였다. 첫 예배가 드려졌던 1909년 8월 8일 주일 아침의 상황을 외손녀 김점향은 기억하고 있었다. 다음은 생전(生前)에 김점향이 기억하고 있는 내용이다. 김남홍의 집은 현재 100주년 기념관 바로 뒤편 화성동 언덕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날 아침 평소에 들을 수 없는 북소리가 들려왔다는 것이다. 주일 아침 누군가 북을 치면서 마을을 돌며 동네 사람들을 모았던 것이다. 김남홍이 무슨 생각으로 동내 아래에 있던 기독서원에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발걸음은 그를 예수 믿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 기독서원에 간 김남홍은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여기 오면 아들을 낳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했다고 한다. 그때 거기에 있던 사람들로부터 아들을 낳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큰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후부터 빠지지 않고 예배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김남홍은 안동교회의 첫 예배에 참석한 초대교인(初代敎人)이 되었다. 생전에 김점향은 매우 중요한 증언(證言)을 남긴 바 있다. 그것은 외할머니 김남홍의 등에 업혀 자신이 안동교회의 첫 예배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음력으로 1907년 6월 25일 출생한 김점향은 세 살밖에 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때 직접 본 상황을 그가 기억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아마 훗날 할머니 김남홍으로 부터 들은 것을 기억했을 것이다. 이 증언이 사실이라면 당시 안동교회의 첫 예배자는 8명이 아니라 9명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첫 예배 참석자의 수가 단순히 한 명 증가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첫 예배 참석자가 어른만이 아니라 아기도 포함되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안동교회가 다음세대와 장년세대, 즉 전세대가 포함되어 출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비록 한명의 어린 아기라도 이것은 안동교회의 미래를 미리 보여주는 거룩한 비전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첫 예배자의 성별과 연령은 다음과 같다. 3세 김점향(女), 27세 강복영(男), 21세 권중락(男), 31세 김병우(男), 38세 박끝인(男), 45세 김남홍(女), 53세 원홍이(女), 55세 원화순(女), 56세 정선희(女). 하나님께서는 안동교회가 어린이, 청년, 장년, 그리고 노년이 적절히 균형을 이룬 건강한 교회로 시작하게 하셨고, 그 이후 지난 100여 년 동안 어린이, 청년, 노인, 남성과 여성 등 전(全) 세대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게 하셨던 것이다. 외할머니 김남홍은 1910년 8월 18일에 학습(學習)을 받고, 1911년 8월 17일에 세례(洗禮)를 받음으로 안동교회의 세례교인이 되었다. 이것은 안동교회에서 베푼 두 번째 세례였다. 북소리에 이끌려 어떨 결에(?) 예배에 참석했지만 그 후 김남홍은 세례까지 받고 본격적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그는 1913년에 조직된 안동교회 여전도회의 중심회원으로 열심히 참여하였다. 당시 여전도회 회원들은 주로 개인적으로 전도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여전도회는 매월 첫 번째 주일 화요일 저녁에 월례회(月例會)가 있었고, 보통 약 30명 정도가 모였다고 전해진다. 월례회 순서에는 예배와 헌금 순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김남홍의 남편인 권정택은 안동교회 첫 세례자 9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 안동 읍에는 그리스도인이 거의 없는 상태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모두 그리스도인의 가정 분위기에서 외손녀인 김점향은 성장할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은 김점향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속에서 자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을 것이고, 그는 자연스럽게 믿음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 결과 김점향은 안동교회와 경안노회의 여성 사역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하 내용은 논문원문 첨부파일 참조)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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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 목사의 논문 원문(1) - 이 땅에 거룩한 흔적을 남긴 사역자, 김영옥 목사이 땅에 거룩한 흔적을 남긴 사역자, 김영옥 목사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영옥 목사 (金泳玉, 1871-1952) 1893년 베어드 선교사에 의해 안동지역에 복음이 전해진지 124년이 지났다. 오늘의 교회는 믿음의 선배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우리 모두는 너무도 잘 안다. 훌륭한 믿음의 선배 중에는 교역자들 뿐 아니라 평신도들도 포함된다. 이 분들의 헌신의 결과로 척박한 이곳 안동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뿌리를 내리고 자라 마을마다 교회가 서게 되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수고임을 알기에 감사할 뿐이다. 우리 모두는 지역 복음화를 위해 희생하신 믿음의 선배들이 언제나 우리 옆에 계실 줄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분들은 예외 없이 복음의 아름다운 발자취를 남기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또한 이분들의 헌신을 직접 눈으로 보고 선배들을 통해 들어 알고 있는 분들 역시 차례차례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런데 이분들이 행한 믿음의 수고와 헌신은 문자로 기록되지 못하고 대부분 구전(口傳)으로 전수되었다. 당시는 이분들의 선한 행적(行蹟)을 기록으로 남길 만한 여유도, 역사의식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는 믿음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유품(遺品)들을 보존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120년이 넘는 안동지역 기독교 역사는 이들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고 있다. 반드시 기억해야할 안동지역의 복음화 과정과 하나님의 역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다. 믿음의 미담(美談)도 우리의 뇌리 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있다. 안동지역의 초기 기독교를 위해 헌신하고 이들의 수고를 기억하고 있는 분들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잊혀져가는 기억을 되살리고, 총회와 노회, 각 교회에 남아있는 기록물과 그들의 유품, 그리고 후손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흔적과 발자취들을 발굴하고 재조명(再照明)함으로써 안동지역의 기독교 역사를 재구성해야할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특히 우리의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있고, 이미 사라져버린 위대한 믿음의 선배들의 거룩한 흔적을 찾는 것은 교회의 시대적 사명과도 같다. 김영옥 목사는 한국선교 초기 거룩한 발걸음을 통해 거룩한 흔적을 남긴 위대한 선배이다. 필자는 그에 대한 조명이 너무 늦었음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그리고 경상북도에서 초개와 같이 모든 것을 버리며 교회와 국가를 위해 헌신한 김영옥 목사를 연구하여 탈고하니 그동안 목사님에게 가졌던 죄송스러운 마음이 조금이라도 보상받는 느낌이다. 이제 자애로운 아버지요 할아버지, 지역의 초대교회의 기초를 든든히 세워 중심교회로 서게 한 목사, 그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믿음으로 두려움 없이 애국한 김영옥을 소개한다. 1.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 결신한 청년, 김영옥 경상도의 첫 한국인 목사는 김영옥(金泳玉, 1871-1952)이다. 김영옥이 비록 영남지역 최초의 한국인 목사이지만 그의 고향은 북한으로, 그는 1871년 4월 12일 황해도 연백군에서 출생했다. 가난했던 그는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해 미국 하와이로 갈 꿈을 갖고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18세가 되던 1888년 어느 날, 평산 누님 댁에 갔다가 장로교 최초의 선교사였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선교사가 소래(松川)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미국으로 갈 방법을 찾기 위해 그를 찾아갔다. 그러나 언더우드 선교사로 부터 복음을 제시받은 김영옥은 미국 갈 결심을 포기함과 동시에 회심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결국 그는 장로교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로부터 세례까지 받게 되었던 것이다. 김영옥 목사의 손자인 김형태 목사(서울 연동교회 원로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증경총회장)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1888년 너무나 빈한하고 힘든 생활에서 벗어나 보고자 할아버님은 평산 누님 댁에 갔다가 리승만(할아버님 보다 2세 연하) 씨를 만나 사의하고 마침 황해도 장연 소래(松川) 교회에 미국 선교사가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는데, 이것이 그의 일생을 변화시킨 전환기가 되었다. 미국 북장로교 초대 선교사인 언더우드 목사는 1885년 내한하여 육척 키에 얼굴이 준수하고 말하는 것이 분명하여 총명하게 보이는 할아버님을 보고 예수 믿기를 권유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인재를 알아보고 키울 줄을 아는 안목이 있었다. 성령의 감화를 받은 할아버님은 그 때 결신하여 그에게서 세례를 받고 하와이 이민 대신 언더우드 선교사의 마부가 될 것을 결정했다. 전혀 뜻하지 않게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은 김영옥은 세례 까지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언더우드 선교사의 마부로 복음사역의 적극적인 도우미가 되었다. 참고로 소래교회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松川里)에 1883년 5월 16일에 세워진 교회다. 소래교회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인천항에 입국하기 2년 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소래교회는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 서상륜·서경조 형제에 의해 자생적으로 세워진 한국 최초의 자생교회(自生敎會)라고 할 수 있다. 서상륜은 로스(John Ross) 선교사를 도와 최초의 우리말 성경인 '예수셩교누가복음전셔'를 출간한 후 한국교회 최초의 권서인이 되어 고향 의주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발각되자 동생 서경조와 함께 외가인 황해도 소래로 내려와 복음을 전했다. 그 후 신자들이 생기자 1883년 5월 작은 초가집을 예배당으로 삼아 예배를 드림으로써 한국 최초의 자생적인 소래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2. 목사 임직 이전의 복음전도자, 김영옥 회심 이후 김영옥은 복음사역을 위해 하나하나 착실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복음전파사역에 관한 김영옥의 결심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까지 중단 없이 계속되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후 그는 단 한 번도 곁길로 간 적이 없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기 위한 준비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회심한 김영옥은 복음사역을 온전히 수행하기 위해 수년 동안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복음전도자가 갖추어야 할 것들을 성실하게 배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능동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 1년 만에 한문 신·구약 성경 모두를 통독(通讀)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또한 선교사들로부터 전도법과 장로교회에 관해 배웠으며 선교사들과 간단히 대화할 수 있는 영어실력도 갖추게 되었다. 모든 과정을 이수한 김영옥은 실력 있는 매서인(賣書人)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선교사를 도와 공식적인 매서인으로서 사역할 수 있었다. (이하 내용은 논문원문 첨부파일 참조)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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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지역 최초의 순교자, 소텔 선교사(2)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소텔 선교사 (Chase C. Sawtell, 1881-1909) 목차 1. 서론 2. 소텔 선교사의 가정(家庭) 3. 소텔 가정의 신앙(信仰) 4. 소텔 선교사의 소명(召命) 5. 소텔 선교사의 성품(性品) 6. 소텔 선교사의 파송(派送) 7. 소텔 선교사의 사역(使役) 8. 소텔 선교사의 순교(殉敎) 9. 소텔 선교사의 부인, 캐더린 10. 캐더린 선교사의 특별한 공헌(貢獻) 11. 결론 4. 소텔 선교사의 소명(召命) 1880년대 말에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의 대부분은 구(舊)학파의 신학 경향을 그대로 가지고 있던 프린스턴 신학교와 시카고 맥코믹 신학교 출신들이었다. 구학파는 원죄를 인정하고 회심이나 중생이 하나님의 전적인 사역이라고 하는 은혜의 교리를 견고히 지키려 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칭의 교리를 굳게 붙잡고 있었다. 당시 뜨거운 전도 열정을 갖고 미국과 영국을 누비면서 사역하던 복음전도자 무디(D.L. Moody)는 칼빈주의 개혁신앙을 고수하던 미국 장로교회 구학파의 신앙유산을 공유하고 있었고, 당시 미국 청년들에게 선교사의 소명을 불어넣은 주의 종이었다. 따라서 선교 초기 한국에 입국한 선교사들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 파송된 선교사들, 선교를 위해 동역한 많은 사람들은 무디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99년 9월, 소텔은 네브라스카 주 소재 밸리뷰 대학에 입학했다. 그가 입학한 기독교 대학인 밸리뷰 대학교도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대학이었다. 밸리뷰 대학에서 소텔은 자치활동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로티-퍼스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대학 토론 클럽에서도 활동했다. 또한 1902년에는 운동에 관심을 갖고 미식 축구부에서 활동했다. 이처럼 소텔은 대학 시절 활발하게 친구들을 사귀며 리더십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소텔의 대학 시절 중 가장 중요한 활동은 YMCA에서였다. YMCA는 소텔에게 선교사적 소명과 비전을 심어준 공간이었다. 1890년대 말 미국 YMCA는 해외선교에 큰 관심을 갖고 깊이 동참하고 있었다. 소텔이 직접 작성한 선교사 지원서에 따르면 19세인 1900년부터 선교사가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기록됐다. 여러 문헌을 검토한 결과 소텔은 두 가지 이유로 해외 선교사로 지원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밸리뷰 YMCA에서 받은 소명이다. 또한, 1904년 모친인 제시(Jessi)의 죽음도 소텔에게 선교를 결심하게 한 큰 요인이었음이 지원서에 기록되어 있다. ▲1902년 당시 밸리뷰 대학의 풋볼 팀 사진. 1898년부터 1916년까지 7번이나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강팀이었다. 5. 소텔 선교사의 성품(性品) 소텔은 매사에 즐거운 마음으로 일했던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기쁜 마음으로 선교사역을 준비했을 것이며, 선교사로 파송 받은 한국에서도 열악한 환경을 인내하면서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사역을 잘 감당했을 것이다. 특히 소텔은 온화하고 친절한 성품을 갖고 있었다. 신학교를 다닐 때 학비를 벌기 위해 양로원에서 일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노인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무엇이든지 도와드려서 칭찬을 들었다. 이와 같은 그의 따뜻한 성품은 선교지에서 동료 선교사들을 대할 때도 잘 드러났다. 그는 대구선교부에 있던 선배 선교사들에게 호감을 주었으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소텔의 대학생활 모토는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는 것으로 이 생각은 선교사로 내한할 때도 동일했다. 그는 이 모토를 정할 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기억했을 것이다. 소텔은 이 모토를 늘 기억하면서 언제 어디서나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비전을 품고, 믿음으로 준비하고, 믿음으로 행동했을 것이다. 또한, 신장이 6피트(약 183cm)이며 갈색 눈에 코가 곧게 솟았고, 중간 크기의 입에 턱이 뾰족했던 그는 돋보이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내적인 품성과 외적인 모습을 가진 소텔 선교사는 늘 기쁘고 즐거운 성격을 가진 매력적인 청년이었다. 특히 1908년 안동선교부의 신설이 결정되었을 때 안의와 선교사는 자원하여 사역할 선교사를 찾았다. 이때 소텔 선교사는 스스로 안동선교부로 갈 것을 결심했다. 소텔 선교사는 대구선교부에 도착하여 어느 정도 환경에 익숙해질 즈음인 1년 후, 정말 떠나기 힘든 시간에 스스로 안동으로 떠날 것을 결심했던 것이다. 당시 대구 선교부에는 여러 명의 선교사가 사역하고 있었지만, 대구보다 열악하고 불확실한 땅인 안동에서 사역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단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소텔 선교사는 하나님의 일이라면 환경과 조건의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 편에 서는 결단의 사람이었다. 6. 소텔 선교사의 파송(派送) 1904년 5월, 밸리뷰 대학을 졸업한 소텔은 동년 9월 오마하 장로교 신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에 졸업하였다. 신학교 재학 시절 소텔은 3개 교회를 섬김으로써 목회자로서 필요한 자격을 갖추는 데 열심을 다했다. 목회 현장인 지역교회에서 목사로 임직을 받기 위한 과정을 잘 소화하고 훈련받은 소텔은 오마하 신학교를 졸업한 1907년, 네브라스카 대회 소속 베네치아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대학교 1학년 때인 1900년 이미 선교사 소명을 받은 소텔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있던 수많은 이방인들에게 예수님이 유일한 그리스도가 되심을 전하고 싶어 했다. 처음에 소텔은 남아메리카의 푸에르토리코에서 사역할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는 자신의 뜻과는 전혀 다른 한국으로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텔은 기쁜 마음으로 한국으로의 파송을 받아들였다. 오마하 신학교 친구인 레이놀즈에 따르면 1907년 6월 어느 날 오후, 레이놀즈가 소텔을 만났을 때 “어떻게 조선인을 전도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소텔은 주저하지 않고 웃으면서 “나는 조선인을 사랑하겠노라(I am going to love them)”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1907년 5월 29일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뉴욕 본부 사무실에서 열린 제10차 연례 신임 선교사 대회에서 소텔은 한국으로 파송 받은 신임 선교사 6가정(8명) 중의 한 선교사였다. 이후 소텔 선교사 부부는 내한하기 위해 오마하를 떠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여권을 발급받은 지 일주일이 지난 9월 24일, 소텔 선교사 부부는 다른 세 선교사와 함께 샌프란시스코 항구에서 출발하여 임지인 한국을 향했다. 약 22일간의 항해 끝에 10월 16일 마침내 한국에 도착했다. 소텔 선교사는 한국에 도착 이후 얼마 동안은 임지를 배정받지 못하고 있다가 미국 북장로교 대구선교부에 배속되어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다. ▲1907년 9월 소텔이 한국에 오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작성한 여권신청서.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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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기총, 광복 74주년 ‘8·15 나라사랑 구국기도회’ 성료김승학 목사 · 김운성 목사 초청 강사로 “신앙의 순수성과 거룩성 회복하자” 강조 ▲말씀을 전하고 있는 김운성 목사 경북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이정우 목사)가 주최하고 경북 23개 시·군연합회가 후원한 ‘8·15 나라사랑 구국기도회’가 8월 12일 안동교회(김승학 목사 시무)당에서 성황리에 개최됐다. 이번 행사는 찬양과 특강, 예배, 구국기도회 등 4부로 나눠 진행됐으며, 현재 국내·외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상황들을 기도 제목으로 놓고 600여 명의 참석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기도했다. 1부 찬양에 이어 2부 특강은 안동교회 김승학 목사가 ‘안동지역 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주제로 강연했다. 김승학 목사는 ‘신사참배와 장로교회, 신사참배 거부운동, 경안노회의 신사참배 회개와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취소’ 등에 대해 설명하고, “일제 치하에서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기 위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순교하신 분들을 존경한다”며 “한국교회가 믿음의 선진들을 기억하고 신앙의 순수함을 회복해 새롭게 일어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3부 예배는 대표회장 이정우 목사의 인도로 드려졌으며, 서울 영락교회 김운성 목사가 ‘선지자가 먼저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했다. 김운성 목사는 “적이 누구인지 알아야 우리는 우리의 자리를 찾을 수 있다”며 “시대를 하나님의 눈으로 해석해 주는 일이 교회의 사명이다”고 말했다. 또 “거룩함이 남아있는 한 그 사회는 희망이 있다”며 “어려운 결말이 온다 하더라도 한국교회가 시대를 향한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하자”고 권면했다. 4부 구국기도회는 ‘북한구원과 탈북자와 지하교회를 위해’, ‘대통령과 위정자를 위해’,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해’ 등의 기도제목으로 기도했으며, 참석자 전원은 ‘동성애 반대’, ‘양성평등을 성평등으로 헌법개정 반대‘ 등의 구호를 함께 제창했다. ▲경북기독교총연합회 주최 ‘8·15 나라사랑 구국기도회’가 8월 12일 안동교회당에서 성황리에 개최됐다.(사진=이예진 기자)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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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회, ‘2019 열방의 빛 선교대회’ 개최▲‘2019 열방의 빛 선교대회’를 인도하고 있는 안동교회 김승학 목사.(사진=임만조 장로) 안동교회(담임목사 김승학)는 지역의 복음화와 세계선교의 비전을 공유하고자 지난 8월 5일~7일까지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를 주제로 ‘2019 열방의 빛 선교대회’를 개최했다. 올해로 5회째를 맞는 이번 선교대회는 3일 동안 다섯 번에 걸친 선교 특강과 저녁집회로 진행됐으며, 특별히 5개 국가의 선교사들이 강사로 초청돼 선교 사역의 비전을 함께 나누며 뜨겁게 기도했다. 특강과 집회에서 이극범 선교사(프랑스), 안승오 교수(필리핀), 조정희 선교사(동북아), 하필수 선교사(우간다), 정용구 선교사(인도)는 강연을 통해 ‘복음에 빚진 자’, ‘네 장막터를 넓히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아프리카 선교의 실제’, ‘위기의 인도, 기회의 인도’ 등을 제목으로 선교의 중요성과 한국교회의 책임감을 강조했다. 김승학 목사는 “이번 대회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지역을 넘어서 세계 열방으로 확산되기를 바라며 다음 세대가 세계 열방을 구원하는 빛이 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한편, 올해로 교회 창립 110주년을 맞는 안동교회는 교회가 창립된 8월 둘째주간을 기념해 2년에 한번 씩 선교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안동교회는 지난 8월 5일~7일까지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를 주제로 ‘2019 열방의 빛 선교대회’를 개최했다.(사진=임만조 장로) 한상덕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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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지역 최초의 순교자, 소텔 선교사(1)한국기독역사의 발자취(6)김승학 목사 논문 연재(6)- 소텔 선교사(1)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소텔 선교사 Chase C. Sawtell, 1881-1909) 목차 1. 서론 2. 소텔 선교사의 가정(家庭) 3. 소텔 가정의 신앙(信仰) 4. 소텔 선교사의 소명(召命) 5. 소텔 선교사의 성품(性品) 6. 소텔 선교사의 파송(派送) 7. 소텔 선교사의 사역(使役) 8. 소텔 선교사의 순교(殉敎) 9. 소텔 선교사의 부인, 캐더린 10. 캐더린 선교사의 특별한 공헌(貢獻) 11. 결론 1. 서론 남북 전쟁이 끝났을 때 미국은 분열된 상태였다. 1865년부터 1918년까지의 미국의 역사는 남북 전쟁 후에 미국 재건이 시작되어, 산업화가 진전된 시대였다. 사회의 급격한 변화로 많은 노동조합이 탄생했고 파업이 이어졌다. 특히 약 50여 년 동안(1865년~1918년) 유럽을 중심으로 다른 대륙에서 2,750만 명이나 되는 이민자가 미국으로 몰려들어 저렴한 노동력을 제공했고, 캘리포니아주와 같이 개발되지 않은 지역에 다양한 지역사회가 형성됐다. 대부분의 인디언 부족은 작은 거류지로 이주당했고, 백인 농장주와 목장주의 소유가 되었다. 공장 노동자는 학대와 폭력에 시달렸고, 그것에 수반하여 노동 운동을 낳게 되었다. 이러한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소텔(史佑大, Chase C. Sawtell) 선교사는 1881년 1월 9일, 네브라스카주 소재 티케이마에서 출생했다. 그는 환경이 좋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의 종으로 불러 선교사로 보내시려고 했을 때 소텔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무조건 순종했다. 네브라스카 주의 밸리뷰 대학을 졸업한 소텔은 오마하 신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 졸업했다. 그해 목사 안수를 받고 파송 받아 1907년 10월 16일 한국에 도착했다. 소텔 선교사 부부는 처음에 대구선교부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여러 면에서 뛰어난 재목이었던 그는 대구선교부에 있던 선교사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1908년 안동선교부가 신설되었을 때 소텔 선교사는 자원하여 대구보다 열악한 환경인 안동 땅으로 이사했다. 안동선교부의 초대 주재 선교사가 된 그는 헌신했다. 특히 1909년 11월 16일 순교하기 전까지 1년 동안 그를 통해 안동 땅에 의미 있는 전도와 새신자 양육이 이루어졌다. 복음전도의 전형적인 패러다임인 양육, 파송, 전도를 통해 안동지역 부흥의 기초를 마련했다. 하지만 소텔 선교사는 풍토병인 장티푸스에 걸려 28세의 젊은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소텔 선교사는 무려 109년 동안 한국교회 속에서 잃어버린 선교사였다. 이 글을 통해 우리의 뇌리 속에서 잊혀진 소텔 선교사의 삶과 사역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소텔 선교사의 가정(家庭) 소텔 선교사는 1881년 미국 네브라스카주 티케이마에서 출생했다. 소텔의 아버지 해리 소텔은 두 번째로 결혼한 제시 소텔과의 사이에서 소텔 선교사와 리트를 낳았다. 소텔 선교사의 동생인 리트는 몬타나주 아나콘다 시에서 척추 전문의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텔 선교사의 부친은 1885년, 티케이마 북쪽 실버 크릭으로 이사해서 농사를 지었으며, 이후 오하이오주의 댄빌로 이사해 살았다. 소텔 선교사 부친의 직업은 여전히 농부였는데, 상대적으로 다른 농부에 비해 가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텔 가정은 다시 네브라스카주의 오마하로 이주했고, 그 이후에는 오마하 인근에서 계속 거주했다. 소텔 선교사는 웨스트버지니아, 몬타나, 오하이오, 아이오와주를 전전하다가 오마하에 정착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소텔 가정은 믿음의 가정이었다. 비교적 자주 이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착한 지역에 있는 교회에 등록하고 출석했기 때문이다. ▲위 사진은 소텔 선교사가 어린 시절 출석하고 1907년 9월 한국으로 파송한 것으로 알려진 오마하 제2장로교회의 전경과 예배당 내부 모습이다. 3. 소텔 가정의 신앙(信仰) 대구와 경북지역에서 선교 사역을 감당한 선교사의 삶과 사역을 추적하여 연구하고 있는 손상웅 목사에 의하면 소텔이 최초로 섬긴 교회는 네브라스카주의 티케이마 교회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어렸을 때 소텔은 여러 주(州)를 옮겨 다니며 생활했다. 4살 때인 1885년, 소텔의 가정은 실버 크릭으로 이주했다. 소텔은 시골의 작은 교회인 실버 크릭 감리교회에서 1897년 11월, 낙스 본디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당시 실버 크릭에는 장로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가정은 감리교회를 다닐 수밖에 없었다. 소텔은 오마하로 이사한 후에 오마하 제2장로교회를 다녔다. 오마하 제2장로교회는 1888년 오마하 제1장로교회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소텔 선교사의 부친은 세 차례 결혼한 사람이었다. 소텔 선교사의 모친 제시 소텔은 두 번째 부인으로 좋은 신앙을 갖고 있었다. 소텔 선교사는 좋지 못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믿음 안에서 잘 성장하여 한국으로 파송 받은 선교사로 살다가 안동지역 선교사 중에서 최초로 순교(殉敎)를 당했던 것이다. ▲1917년 3월 11일에 준공된 오마하 제1장로교회의 모습으로 1959년엔 교회 역사상 최고 2,188명이 등록하고 있을 정도로 오마하에서는 최고의 부흥한 교회였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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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동안 한 교회를 섬긴 여성지도자 김점향 권사(4‧끝)한국기독역사의 발자취(5) 김승학 목사 논문 연재(5)-김점향 권사(4‧끝)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점향 권사 (1907~1998) 목차 1. 할머니 등에 업혀 안동교회 첫 예배에 참석한 아기 2. 믿음의 분위기에서 성장하고 결혼한 여성 3. 안동 3·1 만세운동 당시 태극기를 흔든 어린이 4. 여자성경학교에서 공부한 교회의 재원(才媛) 5. 성전건축을 위해 쌀 한가마를 헌금한 가정 6. 안동교회 첫 권사 3인 중 한 명 7.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의 산 증인(證人) 8. 개척교회를 적극적으로 도운 여성 9. 여교역자 복지의 효시인 경안성로원 첫 원장 10. 90년 동안 안동교회의 뛰어난 지도자 9. 여교역자 복지의 효시인 경안성로원(慶安聖老院) 첫 원장 경안노회는 복지에 관한 한 국가나 다른 노회보다 앞서간 노회다. 복지에 관한 지대한 관심은 은퇴 여성교역자를 위해 1953년 경안성로원을 설립하게 했다. 경안성로원은 은퇴 여교역자의 생계와 여생을 돌보아줌을 목적으로 세워졌다. 성로원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으로는 경안노회와 영주노회에 소속된 은퇴 여교역자로서 경안노회 또는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에서 추천을 받아 성로원 이사회의 입원 승낙을 받아야 했다. 현재 운영은 경안노회 보조, 이사의 후원회비, 여교역자회의 후원, 여전도회 연합회와 지 교회에서 보내온 성탄헌금으로 운영하고 있다. 현재 경안성로원에는 5명의 은퇴한 여교역자가 생활하고 있다. ▲경안성로원은 반피득 선교사가 기증한 금곡동 183-1번지 소재 52평의 한옥에서 시작되었다. 이 가옥에는 처음으로 여교역자 4명이 거주했으며, 현재 안동성소병원 신관 입구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진의 우측 초가집이 경안성로원 첫 가옥으로 알려져 있다. 6·25 전쟁이 끝난 후 경안노회에서는 노쇠하고 병약하며 무의무탁한 은퇴 여교역자들의 노후를 배려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다. 당시 은퇴한 김순애 전도사가 당장 거처할 처소가 없게 되자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는 경안성로원 설립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53년 제24회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 총회는 은퇴 여교역자를 위한 생활관을 건립하기로 결의했다. 그 결과 1953년 8월 금곡동 183-1번지 가옥에서 경안성로원이 문을 열게 되었다. 당시 반피득 선교사가 기증한 52평의 한옥에는 처음으로 여교역자 4명이 거주했으며, 현재 안동성소병원 신관 입구에 위치했다. 1954년에는 2명이 거주했고, 이후 입주자는 김순애, 김정숙, 양정애, 안주봉 등이 있었다. 후에 김구암, 권성찬, 김병규, 윤손흥, 권귀출, 김순교, 문초야 등도 입주했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의 기존 가옥으로 인해 성로원 신축건물의 요청은 계속되었고, 1956년 금곡동 138번지에 경안성로원이 준공될 수 있었다. 당시 조운선·설의돈 선교사가 건축비와 운영비를 담당하였고, 안동 선교부, 미국 인디아나교회,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 안동교회, 안동동부교회 등이 건축을 위해 후원했다. 1956년 제27회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는 조운선 선교사를 경안성로원 원장으로 선출했다. 그 후 1978년, 금곡동 180-3번지에 소재한 경안신학원 여기숙사를 매입하여 이전하였다. ▲경안성로원은 성소병원 옆 금곡동 2차선 도로 건너편 주차장인 금곡동 180-3번지에 소재한 경안신학원 여기숙사를 매입하여 이전하였다. 현재 서후면 저전리에 위치한 경안성로원을 신축하여 이전하기 전까지 22년 동안 사용하였다. 김점향은 여기숙사를 구입하기 위해 예전의 성로원과 성로원 소유의 밭을 팔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현재 임만조 장로가 사는 주택은 예전에 성로원 소유의 밭이었는데 임 장로가 구입하게 되었다. 결국 처음의 성로원 가옥과 성로원 소유의 밭을 판 것으로 여기숙사를 살 수 있었다. 이곳은 20여 년 동안 은퇴한 여교역자의 휴식처로 사용되었다. 그 후 2000년 2월 서후면 저전리 292-1번지에 건평 148평 규모의 경안성로원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로원의 원장은 누리는 높은 자리가 아니다. 인내하며 겸손히 섬겨야 하는 가장 낮은 자리이다. 노쇠하고 병에 걸린 여성 교역자들을 돌보고 섬기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김점향의 자부인 박춘희 권사(안동교회)의 증언에 따르면 초기 성로원의 재정이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기관 등을 방문하여 후원을 받아 성로원을 어렵게 운영하다가 시(市)에서 배급하는 식량을 받게 되어 어느 정도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성로원이 설립된 1953년부터 1978년까지는 조운선 선교사가 원장으로 근무했지만 김점향은 실질적인 원장의 자리에 있었다. 김점향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참고 인내하면서 무려 25년 동안 원장으로 은퇴 여교역자들을 위해 헌신했다. 김점향과 가까이 살고 있던 임만조 장로는 김점향이 성로원에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헌신했음을 기억하고 있다. 임 장로가 1972년 경안여자중학교의 교감이 되었을 때, 성로원 일로 김점향에게 밤낮없이 전화가 왔고 그때마다 옆에 사는 김점향에게 연결해주었다고 한다. 숨기지 않는 성격을 갖고 있던 김점향의 통화를 듣게 된 임 장로는 자연스럽게 성로원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1970년대 중‧후반 임 장로는 성로원의 이사로, 또한 이사장으로 봉사하게 되었다. 힘이 남아있을 때까지 김점향이 붙들고 헌신한 것은 성로원에서 은퇴한 여교역자를 돌보는 일이었다고 임 장로는 기억하고 있다. 하나님께 은혜를 값없이 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를 이웃에게 갚는 것이 바로 섬김이라는 사실은, 김점향으로 하여금 무려 4반세기 동안 경안성로원장 자리를 지킬 수 있게 했다. 10. 90년 동안 안동교회의 뛰어난 지도자 김점향은 교회의 모든 일에 앞장서서 헌신한 분이었다. 그는 맡겨진 일에 적극적으로 임한 인물이다. 일평생 안동교회 여전도회의 중심인물이었을 뿐 아니라 주일학교 교사, 부장으로 수고했다. 그는 안동교회의 여러 분야에서 여성 평신도의 리더였다. 또한 그는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의 존경받는 여성지도자였다. “비록 나보다 연배가 20세 정도는 어렸지만 김 권사님을 존경할 만한, 본 받아야 할 만한 영적 어른으로 삼았다.” 한 집사님의 이와 같은 증언은 김점향의 영적 권위와 위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처럼 김점향은 여전도회 회원들에게 있어서 선배나 후배들의 롤 모델이었다. 김점향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그를 여걸로 기억하고 있다.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기골이 장대했으며, 음성도 우렁차 여장부로서 손색이 없었다는 것이다. 전경상 장로는 김점향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 탁월한 여성지도자라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청년연합회 활동으로 당시 경안신학원 원장이었던 김기수 목사님께 인사하기 위해 사택에 갔을 때 김점향이 있었다고 기억한다. 인사했을 때 김점향은 “잘하라”라고 격려했는데, 그 말이 어떤 사람의 말보다 존경할 만한 권위와 강한 힘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이유는 김점향에게 지도자로서의 덕망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점향은 교회 안과 밖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남성과 여성에 관계없이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는 잊을 수 없는 여성지도자였다. 아니 그를 굳이 여성지도자라고 국한할 필요가 없다. 그는 안동교회가 낳은 지도자였다. 외할머니 등에 업혀 안동교회에 처음으로 출석한 1909년 8월 8일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1998년 10월 19일까지 90년 동안 안동교회를 떠나지 않은 믿음의 사람이었다. 김점향은 교회에 출석한 이후 90년 중 오랜 세월 동안 안동교회와 경안노회를 위해 헌신한 믿음의 사람으로 남녀 성도 모두가 결코 잊을 수 없는 교회의 지도자였다. 그래서 이런 지도자를 안동교회에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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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동안 한 교회를 섬긴 여성지도자 김점향 권사(3)한국기독역사의 발자취(5) 김승학 목사 논문 연재(5)-김점향 권사(3) 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점향 권사 (1907~1998) 목차 1. 할머니 등에 업혀 안동교회 첫 예배에 참석한 아기 2. 믿음의 분위기에서 성장하고 결혼한 여성 3. 안동 3·1 만세운동 당시 태극기를 흔든 어린이 4. 여자성경학교에서 공부한 교회의 재원(才媛) 5. 성전건축을 위해 쌀 한가마를 헌금한 가정 6. 안동교회 첫 권사 3인 중 한 명 7.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의 산 증인(證人) 8. 개척교회를 적극적으로 도운 여성 9. 여교역자 복지의 효시인 경안성로원 첫 원장 10. 90년 동안 안동교회의 뛰어난 지도자 7.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의 산 증인(證人) 안동교회는 첫 예배를 드린 후 부인전도회가 조직되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13년 2월 7일 여전도회가 조직되었고, 1년이 지난 1914년에 다비다회란 이름으로 비공식적으로 활동하다가 수개월 후 당회의 허락을 받아 정식 여전도회로 발족했다. 인근 교회들에 화제 거리가 될 정도로 안동교회 여전도 회원들은 전도와 봉사에 적극적이고 열성적이었다. 특히 매주일 마다 회원들끼리 우승을 겨룰 정도로 회원 전원이 열심히 활동했다. 당시 여전도회 회원 자격은 교회에 출석하는 모든 여성이 아니라 세례 받은 여성에 제한했다. 자격을 갖춘 성도들이 참여케 함으로써 처음부터 질(質) 높은 여전도회가 되게 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김점향을 키운 외조모 김남홍은 안동교회의 초대교인으로 여전도회 활동에도 열심을 낸 여성이었다. 아마 김점향은 외조모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거의 일평생 안동교회 여전도회에 헌신한 김점향 권사는 1920년대 안동교회 여전도회 회원이 30~40명 정도 되었다고 증언했다. 그때 중심회원은 원홍이, 원화순, 김남홍, 정선희, 이인홍 장로 모친, 장경영 권사의 모친과 고모 등 제씨였음을 김점향은 기억한다. 이들은 본래 여전도회 목적대로 일상에서 개인적으로 전도하는 일에 힘을 쏟았고, 이들의 전도는 초기 안동지역 교회의 부흥을 가져오게 했다. 1928년 2월 19일 안동교회에서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가 창립되었다. 그러나 이미 안동선교부는 경안노회 경내의 여전도회 회원들을 위한 사경회를 1917년부터 매년 개최하고 있었다. 사경회는 처음에 교회 단위로 실시되다가 지역 내 여러 교회들이 연합해 연합사경회로 모이게 되었고, 이것을 도사경회라고 불렀다. 이런 배경 속에서 안동지역의 첫 도사경회는 1917년 1월 21일에 열렸는데, 강사는 이희봉 목사와 맹의와 선교사였다. 이 때 모인 수는 남녀 합하여 230명 정도나 되었다. 경안노회 여전도회는 안동교회 여전도회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창립되었다. 당시 발기인은 권애라 선교사, 안동교회 김정숙 전도사, 안동교회 성도 김향란, 김정희, 안주봉, 김순애 제씨, 그리고 권신희 집사와 김화석 은퇴 장로의 조모인 권순옥 집사가 포함되었다. 특히 초대회장에 김정숙, 회계 김정희, 부서기 김순애, 회계 권신희, 부회계 권순옥 등 임원 대부분을 안동교회 여전도회 회원들이 맡았다. 또한, 1929년부터 안동교회 임학수 목사가 고문을 맡음으로써 안동교회는 노회 내 여전도회 사역에 더욱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되었다.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 10주년 기념사진. 맨 아래 왼쪽 네번째가 김점향 권사. 김정숙 전도사는 둘째줄 정중앙. 아래 두번째 줄 좌측에 4명의 여선교사.(왼쪽부터 매켄지 선교사, 권애라 선교사, 옥호열 선교사의 부인, 안두조 선교사의 부인) 1928년 2월 19일 창립된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 제10회 총회 때 사진을 보면 당시 경안노회 여전도회를 이끌었던 여성 지도자들의 면면을 볼 수 있다. 특히 여성선교사들이 보이는데, 그들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배후에서 헌신했다. 연합회는 비록 여성선교사들의 도움은 받았지만 지역출신 여성들이 주체적이고 자율적으로 여전도회를 이끌어 갔다. 당시 22세인 김점향도 사진에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는 이미 연합회에서 책임 있고 적극적인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점향은 거의 일평생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를 위해 헌신했는데, 1932년부터 1956년까지 무려 24년 동안 연합회 서기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토록 오랫동안 서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회장은 단 일회에 그쳤다. 그는 겸손히 낮은 자리에서 여전도회를 섬긴 여종이었던 것이다. 당시 서기는 여전도회의 사업을 추진하고 살림살이를 챙겨야 하는 실무 책임자였다. 그는 지 교회의 여전도회가 본연의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가 김점향은 1965년에 개회된 제37회 총회 때 제9대 회장으로 피선되어 오래 동안 얻은 노하우로 여전도회를 잘 섬겼다. 그는 수십 년 동안 수면 밑에 감춰진 안동지역 교회의 실질적인 여성 지도자였던 것이다. ▲1965년 9월 13~16일 까지 있었던 여전도회대회 사진. 1965년 1월 제37회 경안노회여전도회 총회에서 회장으로 피선된 김점향은 경안노회여전도회 회장의 신분으로 참석했다. 8. 개척교회를 적극적으로 도운 여성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는 설립된 이후 지역의 교회들을 개척하는 데 앞장서 왔다. 1933년 의성 뒷골교회, 1948년 봉화군 물야교회, 1949년 임동면 사월교회, 1952년 월곡교회를 개척했다. 또한, 1955년부터 안동교회는 김수만 장로와 김금이 전도사를 개척지에 파송하여 길안 지역 전도를 시작했다. 이 때 연합회는 이를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연합회는 또 1955년 제26회 총회에서 신덕교회 개척, 사월교회 전도인 파송, 물야교회 전도사 파송을 결의했다. 이어 1956년 제28회 총회는 도산교회와 관덕교회를, 제31회 총회는 임하교회를, 제34회 총회는 송사교회를, 제40회 총회는 신촌교회를 돕기로 결의했다. 여전도회연합회는 교회를 세웠을 뿐 아니라 건축비 후원, 그리고 전도인 파송과 사례비까지 보조했다. 연합회는 지역을 복음화 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개척한 이후에도 교회들을 든든히 세우는 데 사명을 잘 감당했다. 오랜 세월동안 연합회를 서기와 회장으로 섬긴 김점향은 당연히 여전도회의 도움을 통해 세워진 교회들과 관련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김수만 장로가 길안 지역의 여러 교회를 개척할 때 연합회와 안동교회 여전도회에서 후원했다. 김수만 장로에 의해 송사교회와 금곡교회는 동시에 개척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송사교회를 개척할 때 김점향은 교인 4명과 함께 건축을 도왔다. 또한, 김점향은 길안의 금곡교회 개척을 여러 성도들과 함께 도왔다. 특히 그는 장남이 길안으로 발령을 받자 금곡교회에 나가도록 권면했으며, 다리가 불편한 김수만 장로를 금곡교회까지 이정자 집사(안동교회)의 남편이 지게에 지고 가도록 권면했다고 한다. 또 오산교회를 건축할 때는 너무 작은 예배당을 보고는 조금 넓은 공간의 예배당을 건축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오산교회가 준공된 이후 안동교회 여전도회는 계속해서 교역자의 사례를 일정 부분 책임졌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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