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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6·끝)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6·끝)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안대선 선교사 (W.J.Anderson, 1890~1960) 목차 서문 1. 안대선의 출생지 2. 안대선의 출신대학과 신학대학원 3. 안대선의 결혼과 사별 4. 안대선의 안동선교부 부임 5. 안대선과 안동기독청년면려회 6. 안대선과 전국기독청년면려회 7. 안대선의 그 외 사역 8. 안대선의 퇴임 및 별세 7. 안대선의 그 외 사역 1) 순회전도 및 교회개척 사역 안동선교부에서 안대선의 사역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청년면려회 사역, 성경교수 사역, 그리고 순회전도 사역이다. 안대선은 다른 선교사들처럼 골골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고, 교회가 없는 마을에는 교회를 개척했으며, 이미 세워진 교회들이 견고히 서갈 수 있도록 돌보는 등 여느 선교사들처럼 순회전도사역에 최선을 다했다. 안대선은 안동을 근거지로 영주, 의성, 예천, 청송 지역 등을 찾아가 복음을 전했다. 1922년 서울로 선교지를 옮긴 안대선은 청년면려회 사역뿐 아니라 계속해서 순회전도를 통해 복음을 전했다. 서울의 여러 곳에 교회를 개척했으며, 이미 설립된 교회가 든든히 서갈 수 있도록 평신도들을 양육하고 돌보는 일에도 열심을 다했다. 참고로 그는 1926년 6월 6일, 서울 마포교회를 개척했다. 2) 찬송가 사역 안대선은 찬송가 사역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한국의 찬송가 발전에 한 축을 담당했다. 1924년에 조선 기독교 연합공의회가 새로 조직되었는데, 그 첫 사업으로 1924년 장·감연합공의회는 새로운 찬송가의 간행을 계획하여 1931년 314곡의 찬송가를 편집 간행했다. 이것을 ‘신정 찬송가’라고 부른다. 특히 1935년 11월에는 신정 찬송가에서 70여 곡을 선정하고, 성결교회 복음가 중에서 새로운 곡 100장을 증보한 후 모두 400장으로 된 ‘신편 찬송가’가 발행되었다. 이 일에 현재명과 황재경 등이 참여했는데, 안대선은 실무적인 일을 진행했다. 신편찬송가는 장로교단이 새로운 찬송가를 제작하여 출판한 찬송가로 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에서 직접 발간하였다. 3) 어린이 문서사역 안대선은 어린이 잡지를 통해 신앙으로 어린이들을 세워가는 문서선교에도 최선을 다했다. 1926년 3월 10일에 창간된 ‘아이생활’(Children’s Friend)은 1944년 1월까지 18년간에 걸쳐 통권 218호를 발행한 우리나라 소년소녀 잡지 중 가장 장수한 잡지이다. 창간 이후 ‘아희생활’로 쓰다가, 1930년 11월호부터 ‘아이생활’로 바꾸었다. 허대전, 반우거, 안대선 등이 발행인으로 참여했으며, 편집인도 한석원, 정인과, 허봉락, 송관범, 전영택, 이윤재, 주요섭, 최봉칙, 강병주, 장홍범 등으로 이어오다가 종간되었다. 편집내용은 동화·동시·소설 등 문예작품과 역사사화·성경이야기·위인전기·세계명작 소개 등의 교양물, 그리고 일기·동화·동시작법 등으로 다양하여 많은 어린이에게 꿈과 소망을 심어준 잡지였다. 아이생활은 기독교 가정의 어린이와 주일학교 학생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의 모든 어린이에게 널리 읽히는 잡지가 되었다. 4) 교수사역 안대선은 안동성경학교의 교사로 헌신했을 정도로 성경을 가르치는 교수 사역에 익숙한 선교사였다. 서울에서는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의 원장으로 수고하기도 했다. 피어선성경학원은 설립초기부터 초교파적 복음주의 연합교육기관으로 북장로교와 남·북감리교 선교부가 협력하며 공동운영하였으나,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감리교 선교부가 1935년 경영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이후 북장로교 선교부가 주도하여 경영을 맡기도 하였으나 창립이념인 초교파적 연합정신을 고수하였다. 뿐만아니라 안대선은 어린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에도 열심을 내었다. 8. 안대선의 퇴임 및 별세 1917년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한국으로 출발한 20대 후반의 신혼부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오지인 안동으로 내려와서 사역을 시작한 선교사 초년병 부부. 안대선(Wallace)과 안의리(Lillian)는 한국 선교 역사에 선명한 획을 그은 선교사 부부다. 그가 소개한 청년면려운동은 기독청년들이 어떤 목적을 갖고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깨닫게 했다. 1920년대 초에 시작한 면려운동은 3년 만에 한반도를 정복하여 전국연합회를 조직할 수 있었다. 그후 안대선은 10년 동안 전국면려연합회의 상임총무로 봉사하면서 면려운동을 위해 목숨을 걸고 한반도의 남북을 오르내리고 동서로 횡단했다. 1921년에 시작하여 1938년 해산될 때까지 17년 동안 청년면려운동은 한국교회의 체질을 바꾸고, 한국교회를 건강한 교회로 만들기 위해 사용된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였다. 24년 동안 거룩한 사역을 감당한 안대선은 사랑하는 딸과 아내를 이 땅에 묻었다. 1919년 6월 12일에 출생한 첫 딸 도로시는 7개월 만인 1920년 1월 25일, 풍토병인 이질로 세상을 떠났다. 핏덩어리 도로시를 안동에 묻은 안대선은 슬픔에 잠겨 있을 여유도 없이 청년면려회를 준비하고 소개하는 데 최선을 다해 1921년 2월 5일, 안동교회에서 최초로 면려회가 조직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안의리도 1934년 11월 추수감사절을 보낸 42세 어느 날, 심장마비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안대선은 사랑하는 그를 양화진에 묻었다. 1941년 일제의 강제 추방 명령으로 안대선은 부인 안의리와 첫딸 도로시를 조선 땅에 남기고 세 딸과 함께 일본을 거쳐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다. 24년 동안 한국에서의 사역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강제로 한국을 떠나는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또한, 7년 전 하늘나라로 간 아내 안의리의 묘를 뒤로 하고 떠나는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안의리의 묘비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Till He Comes)”라고 적혀있다. 안대선은 안의리의 묘비에 새겨진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를 생각하며 로스엔젤레스 듀알트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70세가 되던 1960년 12월 5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아희생활’의 표지(사진7) ▲피어선(A.T. Pierson)은 수많은 대학 청년들에게 선교 비전을 심어주었고, 그 영향으로 많은 선교사가 한국과 중국으로 왔다. 피어선은 1910년 조선을 방문해 성경공부를 인도했으나, 병이 악화되어 1911년 6월 3일 뉴욕에서 74세로 별세했다. 사진은 1912년에 세워진 피어선기념성경학교로 출범한 피어선신학교로 현재 평택대학교로 발전했다.(사진8)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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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지역 교회의 연합을 위해 힘쓸 것” 다짐경북기독교총연합회, 신임 대표회장에 방영팔 목사 취임 ▲ 대표회장 방영팔 목사(좌)와 직전회장 신재영 목사. 경북기독교총연합회 제23회 정기총회가 2월 25일(금) 오전 11시 포항 호텔마린 대연회장에서 23개 시·군 기독교연합회 임원과 회원, 내빈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이날 대표회장 신재영 목사의 인도로 드린 1부 예배는 상임회장 김승학 목사 기도, 상임서기 최기목 목사 성경봉독, 증경회장 이정우 목사(안동서부교회)의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갑시다’ 제하 설교, 대표부회장 방영팔 목사 축도 순으로 진행됐다. 이정우 목사는 “교회의 연합을 위해 조직된 연합회를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일”이라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바른길로 나아가는 지도자들이 되길 바라며, 하나님께 감동을 드리는 23개 시·군 연합회와 교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씀을 전했다. 이어 사무총장 김대원 목사의 내빈소개, 증경회장 배진기 목사·포항중앙침례교회 김중식 목사의 축사, 증경회장 김영호 목사의 격려사가 있었다. 2부 총회에서는 신임 대표회장에 방영팔 목사(포항 은빛침례교회)가 추대됐으며, 대표부회장 김승학 목사(안동교회)를 비롯한 신임임원들이 선출됐다. 신임 대표회장 방영팔 목사는 “코로나로 인해 전반적으로 어려운 때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23개 시·군 연합회와 2,500여 개 교회가 더불어 힘을 모으면 모든 어려움을 넘어 하나님의 축복의 자리까지 나아갈 줄 믿습니다. 함께 해주시고 기도해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인사했다. ◎신임 실무임원 △대표회장:방영팔 목사 △대표부회장:김승학 목사 최두원 장로 △상임회장:김영달 목사 △수석상임부회장:안상훈 목사 △본부장:김길동 목사 △사무총장:도영수 목사 △상임총무:곽금배 목사 △상임서기:최기목 목사 △회의록서기:허정문 목사 △회계:김재석 장로. ▲ 경북기독교총연합회 제23회 정기총회가 2월 25일(금) 오전 11시 포항 호텔마린 대연회장에서 개최됐다. 사진은 참석한 내빈, 신임임원, 증경회장단의 기념촬영.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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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5)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5)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안대선 선교사(W.J.Anderson, 1890~1960) 목차 서문 1. 안대선의 출생지 2. 안대선의 출신대학과 신학대학원 3. 안대선의 결혼과 사별 4. 안대선의 안동선교부 부임 5. 안대선과 안동기독청년면려회 6. 안대선과 전국기독청년면려회 7. 안대선의 그 외 사역 8. 안대선의 퇴임 및 별세 6. 안대선과 전국기독청년면려회(2) 1) 전국청년면려회 조직(2) 안대선은 전국청년면려회 상임총무로 전국 교회를 순회하며 면려회 운동을 확산하는 데 큰 역할을 감당했는데, 창립총회부터 창립 10주년이 되는 6회 총회 시까지 상임총무를 역임했다. 안대선은 기관지인 진생(眞生)을 통해 “면려회가 1927년 6월 현재, 창립된 지 6년 만에, 전국연합회가 조직된 지 3년 만에 엄청나게 발전해서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라고 말했다. 조선면려연합회는 당시 전국에 300여회, 회원이 10,000여명, 노회를 구역으로 한 연합회가 7처나 되었다. 하지만 안대선은 “면려회연합회가 지금의 발전에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이 될 만한 기념사업을 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청년면려회 사역은 아동성경학교와 성경구락부를 통한 계몽 활동으로 확산되어 학생들을 위한 전도와 신앙교육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대사회적으로는 절제운동, 물산장려운동, 폐창운동 등을 통해 신앙과 생활을 일치시키는 데 큰 역할을 감당했다. 특히 절제운동은 술, 아편, 축첩, 매음, 잡기 등 사회악에 대한 정화운동으로 강력한 호응이 있었으며, 물산장려운동도 사치를 배격하고 검소한 생활을 강조한 것으로 이 두 운동은 당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특히 안대선은 면려회의 성격에 대해 분명하게 밝힌 바 있다. 면려회가 연회(宴會)나 사교적 기관으로 준비된 조직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면려회가 교회 청년들의 친교의 장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면려회 사업의 주요부분이 아닌 종속사업으로 편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안대선의 소견은 1927년 당시 면려회 안에서 남·여 청년들의 교제 문제로 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는 면려회가 남·여 교제의 장(場)으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유연하게 대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기독청년면려회 후원 기독청년면려회는 1925년에 기관지 진생(眞生)을 발간하여 전국 교회에 보급하면서 문서선교를 통해 청년들의 신앙훈련에 큰 도움을 주었다. 안대선은 면려회 기관지인 진생에 기고한 많은 글을 통해 면려회의 발전에 최선을 다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안대선이 진생에 기고한 글이다: ‘면려회를 재미있게 진행시키는 방법’(제3권제3호, 제3권제4호), ‘면려회 원칙에 대하여’(제4권제3호, 제4권제4호, 제4권제6호, 제4권제11호, 제4권제12호). 또한, 1929년 9월에 개최된 제18회 장로교 총회는 매년 2월 첫째 주일(창립주일)에 전국교회가 면려주일로 지키도록 결의함으로써 전국의 교회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라는 표어대로 그리스도와 교회에 헌신할 수 있게 했다. 1932년 9월에 개최된 제21회 장로교 총회는 면려부를 상설부서로 두기로 결의함으로써 면려운동이 한층 더 강조되었다. 따라서 청년면려회는 더욱 확산되어 많은 교회들이 면려회를 조직하여 1934년에는 전국에서 1,067개 교회가 면려회를 조직했고, 26개 지방연합회가 조직되었으며, 전국의 회원 수는 3만명이 훨씬 초과할 정도였다. 3) 전국청년면려회 총무 안대선과 부총무 권중윤 권중윤은 1900년 2월 3일 안동교회가 위치한 안동군 법상동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대구 계성학교 학생으로 대구 3·1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검거되어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애국청년이었다. 계성학교를 졸업한 후 안동으로 내려온 권중윤은 안동교회에 출석했으며, 안대선이 소개한 청년면려회에 적극적으로 활동한 결과 초대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이후 안대선은 권중윤과 함께 호흡을 맞춰 1921년 6월 안동지역 청년면려회가 조직될 수 있었다. 1922년 귀경한 안대선과 권중윤은 청년면려회를 전국에 소개하는 일에 헌신했으며, 1924년 12월 2일 서울 피어선신학교에서 열린 기독청년면려회조선연합회 총회에서 안대선은 총무, 권중윤은 부총무로 피선되었다. 안대선은 권중윤의 활동상을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군(君)이 도와주던 면려회 사업만은 점점 더 흥왕하여 이 회를 전국적 운동으로 만든 동기도 여기서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권중윤은 안대선과 함께 기호지방과 호남지방 순회활동을 하다가 1927년 1월 30일, 2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인(死因)은 과로로 알려져 있다. 안동에서 서울로 이임한 지 5년 만의 일이었다. 권중윤은 기독청년면려운동을 위해 헌신하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최초의 순직자라고 할 수 있다. 4) 기독청년면려회의 해체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의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전시체제 하에서 한국 주재 선교사들을 더욱 감시하고 탄압하였다. 특히 1930년대 신사참배 저항의 배후에 선교사들이 있다고 판단한 일제는 선교사들에 대한 탄압과 회유를 병행했으며, 통제와 단속을 더욱 강화하였다. 결국 교회와 기독교 단체에 대한 일제의 탄압으로 1938년 9월에 개최된 제27회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직후인 9월 19일 기독청년면려회도 해체되었다. 일제는 1940년대에 들어와 서양 국가들과의 외교관계가 점차 악화되자 한국의 외국인 선교사들을 본국으로 송환시켰고,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대부분 선교사들은 억류·추방되었다. ▲해방 후 재건된 기독청년면려회는 1947년 10월 새문안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청년회 전국연합회 창립총회를 통해 조직이 정비되었다. 사진은 1954년 4월 22일 안동교회에서 개회된 장로회 제39회 총회에서 ‘기독청년면려연합회 제5차 전국대회’ 모습.(사진6)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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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기독교총연합회, 제1회 신년 조찬기도회 개최“코로나 위기 극복과 경북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함께 기도 ▲ 경북기독교총연합회가 ‘제1회 신년 조찬기도회’를 1월 21일 구미 금오산호텔에서 개최했다. 사진은 참석한 내빈들과 경북기총 임원들의 기념촬영. 경북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신재영 목사)가 경상북도의 발전과 경북지역 교회의 부흥을 위한 ‘제1회 신년 조찬기도회’를 지난 1월 21일 구미 금오산호텔에서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는 강성조 경북도 행정부지사, 장세용 구미시장을 비롯한 도내 정관계 인사들과 경북기총 초대회장 김승동 목사를 비롯한 기독교계 지도자들, 경북기총 임원진, 지역의 목회자와 장로들이 참석해 뜻을 같이했다. 본회 대표부회장 방영팔 목사(은빛침례교회)의 인도로 드려진 예배에서는 ‘사랑의 배려’라는 제목으로 대표회장인 신재영 목사(새김천교회)가 메시지를 전했다. 신 목사는 설교에서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원하는 대로 땅을 내어주면서 배려를 한 것처럼, 소외된 자와 연약한 자를 위하여 사랑과 은혜를 베풀며 기독교인의 사명을 감당하는 경북의 교회들이 되기를 소망한다”라고 권면했다. 이어서 상임회장 김승학 목사(안동교회)의 인도로 기도회가 진행됐다. 참석자들은 △경상북도와 도지사 △23개 시·군 단체장 △대통령과 위정자 △코로나19의 극복 △경북기총과 경북 복음화 △차별금지법과 동성애법방지 △이단 사이비의 방지 △한반도 평화통일 등 7가지 기도제목을 가지고 뜨겁게 기도했다. 신재영 대표회장은 “코로나가 빨리 종식되고 코로나 위기를 함께 극복하자는 데 뜻을 두고 경북지역의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기도의 자리를 마련했다”면서, “이 자리를 통해 경북 도정과 23개 시·군 자치단체를 이끌어가는 분들에게도 기독교계의 위로와 격려 메시지가 잘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라고 인사했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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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4)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4)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안대선 선교사 (W.J.Anderson, 1890~1960) 목차 서문 1. 안대선의 출생지 2. 안대선의 출신대학과 신학대학원 3. 안대선의 결혼과 사별 4. 안대선의 안동선교부 부임 5. 안대선과 안동기독청년면려회 6. 안대선과 전국기독청년면려회 7. 안대선의 그 외 사역 8. 안대선의 퇴임 및 별세 5. 안대선과 안동기독청년면려회(2) 3) 청년면려회의 교회 내 공식 활동 안동교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승인을 받은 청년면려회는 안대선 선교사의 지도하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청년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교회도 청년면려회의 사역을 도왔다. 공적인 주일예배를 마친 후 모든 회원은 다시 모여 헌심(獻心) 예배를 드렸으며, 성경을 공부하고 암송하며, 기도 생활에 열심을 내고, 받은 은혜를 간증하며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교회의 부흥에 청년들도 일조하기 시작했다. 또한, 면려회의 한 조직인 음악부는 찬송가를 가르치는 사역을 진행하여 주일예배 시 특별찬양을 하기도 했으며, 음악회도 개최하여 교인들과 지역주민들에게 새로운 음악을 소개하고 보급하는 역할도 했다. 또 특별한 은혜를 받았을 때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뿐 아니라 십일조 헌금도 교육하였다. 아울러 청년면려회는 농촌계몽운동, 금주금연운동 등 신앙을 통해 주민을 계몽함으로써 사회개혁에 앞장섰다. 토론회와 강연회를 개최했으며, 운동을 통해 친교하며, 서적을 공급함으로써 지식의 진보를 이루었다. 물산장려, 문맹퇴치, 농촌사업 등 범국민운동을 전개했으며, 청년면려운동을 통해 은혜받은 청년 회원들의 헌신으로 교회는 부흥했다. 4) 청년면려회의 안동지역 확산 처음 청년면려회를 시작했을 때 일부 교역자들과 선교사들은 면려운동을 급진적으로 생각하고 위험하다고 하면서 반대하고 냉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안대선 선교사는 면려회가 성경과 믿음에 기초한 운동임을 강조하며 설득했다. 그가 강조한 것은 기도, 예배출석, 성경읽기 등이었다. 그는 청년면려회의 목적에 대해 “주의 능력을 의지하여 청년들을 주 예수께로 인도하여 입교케 하며, 믿음이 부족한 사람으로 예수를 견고히 믿게 하며, 모든 회원들이 주의 은혜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했다. 당회로부터 면려회 조직을 공식적으로 승인 받은 후 안대선과 권중윤 등은 농촌과 산골을 찾아다니며 보다 적극적으로 청년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4개월여 만에 예천 상락교회, 안동 녹전교회, 봉화 척곡교회 등 10여 처 교회에서 청년면려회가 조직되었다. 특히, 1921년 3월, 예천 상락교회에서 조직됨으로 전국에서 두 번째로 청년면려회가 조직됐고, 1921년 5월 13일에는 안동 녹전교회에서, 5월 19일에는 봉화 척곡교회에서 면려회가 조직됐다. 척곡교회 김영성 장로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청년면려회 회의 후에는 반드시 금주가를 불렀다고 한다. 5) 안동지방 청년면려회의 조직 안동지역의 청년면려회가 빠른 속도로 조직되고 크게 활성화되자, 1921년 6월 7일부터 9일까지 10여 지회, 약 200여 명이 안동교회에 모여 청년면려회 규칙에 따라 총회와 대회를 개최하였다. 권중윤은 기독신보에 기고한 글을 통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일뿐 아니라 안대선 선교사의 헌신임을 밝히고 있다. 더욱이 대구와 경상북도를 관할하는 경북노회는 1921년 6월 15일에 개회된 노회에서 모든 교회가 교회마다 청년면려회를 조직하는 것을 승인하였고, 면려회 조직을 권면하기로 결의했다. 따라서 면려회 운동의 확산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다. 대구제일교회의 경우 노회 결의에 따라 1921년에 청년면려회를 조직했고, 그 결과 헌신예배와 전도사업을 통해 교회봉사와 회원 상호 간의 친목에 크게 이바지하였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청년면려회의 급속한 성장으로 1921년 말에는 25여 지회, 600여 명의 회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6) 안동교회 소년면려회 안동교회는 청년뿐 아니라 소년면려회도 조직하여 청소년들을 신앙으로 양육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기존의 소년면려회를 1937년에 재조직하여 13·4세부터 17·8세까지의 청소년들이 매주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예배를 드렸다. 청소년의 활동 중에는 독서 시간을 확보하여 성경읽기를 지도했고, ‘운현궁의 봄’이나 ‘흙’ 등 한국소설을 읽어주기도 했다. 소년면려회는 단순히 신앙만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때 소년면려회의 책임지도교사는 김익현 장로의 장남 김희년이었고, 지도교사는 김삼한 장로의 장모이며 성소병원의 간호원이던 서복조와 그 외 몇 명이 봉사했다. 6. 안대선과 전국기독청년면려회(1) 1) 전국 청년면려회 조직(1) 청년면려운동은 이후 다른 지역으로 급속하게 확산되면서 전국에 200여 개 교회가 청년면려회 조직을 구성하게 되었다. 특히 1921년 9월, 제10회 장로교 총회에서 청년면려운동을 평신도운동으로 허락하여 전국의 지교회가 청년면려회를 조직할 수 있도록 결의했다. 안대선과 권중윤은 9월 총회 이후 경성, 전주, 광주, 김천 등을 순회하면서 면려회를 독려하여 전국적으로 급속히 성장하였다. 청년면려회를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일을 책임 있게 감당하기 초대회장은 박현식, 총무는 안대선이 맡았다.(사진5)위해 안대선은 1922년 안동에서 서울로 떠나야 했다. 그가 안동에서 사역한 기간은 1917년부터 1922년까지 5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의 안동 생활은 안동뿐 아니라 전국의 청년신앙운동에 새롭고 뚜렷한 공을 남겼다. ▲안대선 선교사와 권중윤의 헌신으로 1924년 12월 2일, 서울 피어선신학교에서 기독청년면려회조선연합회 창립총회가 열림으로써 본격적으로 면려운동이 펼쳐지게 되었다. 초대회장은 박현식, 총무는 안대선이 맡았다.(사진5)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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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3)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3)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안대선 선교사(W.J.Anderson, 1890~1960) 목차 서문 1. 안대선의 출생지 2. 안대선의 출신대학과 신학대학원 3. 안대선의 결혼과 사별 4. 안대선의 안동선교부 부임 5. 안대선과 안동기독청년면려회 6. 안대선과 전국기독청년면려회 7. 안대선의 그 외 사역 8. 안대선의 퇴임 및 별세 5. 안대선과 안동기독청년면려회(1) 1) 기독청년면려회 기독청년면려회는 미국에서 특정 교파를 배경으로 한 것이 아니라 청년들의 기도회를 통해 자발적으로 생겨난 운동이다. 면려운동은 미국 포틀랜드 시에 있는 윌리스톤교회를 섬기는 클락(F.E.Clark) 목사에 의해 처음으로 시작됐다. 1881년 2월 2일 교회 청년들과 함께 기독교청년면려회(CE)를 조직한 클락 목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For Christ and the Church)라는 표어를 갖고 기도와 성경연구 전도운동에 힘을 쏟았는데, 얼마 되지 않아 미국 전역에 번지게 됐다. 이후 인도, 영국, 캐나다 등에도 면려운동이 전해졌으며 1892년에는 클락 목사가 중국을 방문하면서 아시아에서도 조직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안대선은 미국에서 일어난 면려운동의 성과를 듣고 한국에 소개하기 위해 클락 목사와 여러 차례 서신교환을 하며 그에 대한 자료를 얻어 기독청년면려회를 안동교회 청년회에 소개했다. 면려운동의 근본정신은 기독교 청년의 품격을 교육하여 교회와 사회를 위해서 봉사하는 데 있다. 면려회의 표어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하여’(For Christ And The Church)이다. 3대 결의로는 다음과 같다. 표어는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자, 정직한 나가 되자, 사람에게 신의를 지키자”이고, 주장은 ‘쉬지 않고 나를 교양하자, 나의 교회를 돕자, 방방곡곡에 전도하자, 외지 전도에 힘쓰자’이며, 작정으로는 ‘매 회원 매년 1인 전도주의자가 되자, 회원마다 십일조를 바치자, 내 동리에 신앙운동을 일으키자, 외지의 한국 동포를 구하자’이다. 특히 강령(綱領)은 다음과 같다. ① 우리는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문답을 우리의 신조로 한다, ② 우리는 개혁주의 신앙과 생활을 확립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됨을 우리의 목적으로 한다, ③ 우리의 사명은 다음과 같다: 개혁주의 신앙의 한국교회 건설과 사회의 복음화와 개혁주의 신앙의 세계교회 건설과 세계의 복음화. ④ 우리의 생활 원리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 안대선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안동교회에서 청년면려회 조직 승인을 위한 분위기가 점차 무르익게 되었다. 청년면려회원은 실제로 그리스도를 위한 삶, 교회를 위한 삶을 살아야 했다. 특히 회원은 실생(實生)회원, 학습회원, 명예회원 등으로 구분되었다. 특히 실생(實生)회원의 자격은 나이 17세 이상 40세 이하의 세례교인이었으며, 그리스도의 품성을 가지고 그의 삶을 본받아 살겠다(實生)고 서약해야 했다. 서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봉행(奉行)하기로 힘쓸 것. ② 내가 정한 뜻으로 매일 기도하기와 성경읽기를 끝까지 힘쓸 것. ③ 내가 있는 교회의 진흥하는 일에 힘써 그리스도인의 본분인 의무를 지키기로 힘쓸 것. ④ 내가 본회의 일체 의무를 다 실행하되 매 주일 본회 예배시간에 출석하여 찬송하며 기도하며 성경 읽고 증언하는 일분자(一分子)의 직책을 담임하기로 힘쓸 것. ⑤ 내가 매삭 헌심회(獻心會) 때에 혹 출타하여 돌아오지 못하였든지 또는 부득이한 사고로 참회치 못할 경우에는, 호명할 때에 대답으로 성경말씀 외울 절수를 기록하여 본회 회원에게 편지로나 전편으로나 신실하게 송부하여 대신 외워 정신적으로 참석함을 표하기로 힘쓸 것. 2) 안동교회 기독청년면려회 조직 19세기 말부터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국내에 여러 회(會)를 소개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기독청년운동도 소개했지만 신앙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하고 있었다고 안대선은 증언한다. 하지만 3·1만세운동 후 안동의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1919년 안동의 만세운동이 안동교회의 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나게 되자 의식 있는 많은 청년들이 안동교회로 모여들었고, 1920년 4월 8일 안동기독청년회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기독청년회는 시작할 때의 열정이 점점 식어져 유명무실한 청년회가 되었고, 신앙적인 면에서도 덕이 되지 않고 있었다. 더욱이 안동 기독청년회 조직을 이끌어가던 회장 김원진을 포함한 다수의 회원들은 불신자로 활동의 목적이 신앙운동이 아닌 사회운동에만 전념하게 되자, 당시 안동교회 동사목사인 권찬영 선교사는 일제의 교회탄압이 심해져 신앙생활이 방해받을 것을 염려했다. 교회는 안동기독청년회를 지도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순수한 신앙중심의 청년회 조직을 새로 구상하게 되었다. 당시 청년들은 전국적인 기미년(1919년) 3·1운동의 실패로 인해 좌절을 경험하고 있었고, 일제의 탄압이 날로 심해져 독립의 희망은 점점 사라지고 국민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 겨우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한 청년들은 신학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교회를 통해 애국 운동을 하려는 의욕이 더해졌다. 이때 안대선 선교사가 소개한 면려운동은 청년들에게 호감을 끌기에 충분했다. 안대선 선교사는 1921년 1월 하순, 청년면려회를 조직키로 작정하고, 당회의 허락을 받고 1월 23일 안동교회에서 청년면려회 창립총회를 개최하며 임원과 위원을 선정하였다. 면려운동을 활발하게 추진한 안동교회 주요회원들은 권연호, 권중윤, 김재성, 홍범순, 서순이, 장경영 등이었고, 권중윤은 회원들의 만장일치로 초대회장에 선출되었다. 안동교회 당회는 1921년 2월 5일 전국 최초로 기독청년면려회를 승인함으로써 청년신앙운동으로서 교회봉사와 대사회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으며 안동교회는 한국 기독청년면려회의 발상지 교회가 되었다. ▲안동교회 당회는 1921년 2월 5일 기독청년면려회 조직을 승인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전국에서 최초로 기독청년면려회가 출범하게 되었다. 당시 당회장은 권찬영 선교사였으며, 안동교회 2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이대영 목사도 참석했다.(사진4)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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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2)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2)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안대선 선교사 (W.J.Anderson, 1890~1960) 목차 서문 1. 안대선의 출생지 2. 안대선의 출신대학과 신학대학원 3. 안대선의 결혼과 사별 4. 안대선의 안동선교부 부임 5. 안대선과 안동기독청년면려회 6. 안대선과 전국기독청년면려회 7. 안대선의 그 외 사역 8. 안대선의 퇴임 및 별세 3. 안대선의 결혼과 사별 안대선의 부인인 안의리는 1892년 8월 네브래스카 주 새드론(Shadron)에서 출생했지만 로스앤젤레스에서 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의리는 옥시덴탈 대학 재학 시절 켈로그 교수가 지도하는 성경 공부 모임에서 안대선과 만났는데, 이 시기는 북장로교 해외선교부가 안대선을 한국으로 파송하기로 결정한 이후였기 때문에 안의리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교제하면서 선교의 비전을 공유하고 한국에 관해 공부하면서 미리 선교지로 출발할 준비를 한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1917년 8월 결혼한 안대선과 안의리는 선교를 위한 준비 없이 한 달 만인 1917년 9월 한국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한국에 도착한 안대선 부부는 순회선교에 최선을 다했다. 안의리 선교사는 남편과 함께 안동지역의 농촌과 산촌을 방문하며 3·1운동의 실패로 실의에 빠져 있던 청년들에게 복음과 희망을 전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사역으로 생각했다. 특히 안의리는 교회 안팎에서 여성 교육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교회가 좀 더 여성교육에 노력하기를 강조했다. 안동선교부에서 사역할 때 안의리는 안동남녀성경학원에서 여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그는 한국인들에게 ‘절대 화내지 않는 선생’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로 후덕하고 온유한 성격의 교사였다. 안동에서 귀경한 안의리는 서울 정신여학교와 피어선성경학원에서 학생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또한 그는 수년 동안 여성 선교사 모임의 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활발한 여성 선교사였다. 안의리는 안동에서 출생한 지 7개월 된 딸 도로시(Dorothy)를 땅에 묻은 후 셜리(Shirley), 필리스(Phylis), 로라 베드(Lola Bete) 등 세 딸도 모두 안동에서 낳았다. 마을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교수함으로써 평신도 양육에 열심이던 안의리는 한국에 도착한 지 17년이 지난 1934년 11월 추수감사절을 보내고 42세에 심장마비로 하늘나라로 갔다. 비록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있는 그의 묘는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는 당시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할 사역을 감당하고 순교 당했기에 그의 죽음은 고결하다고 할 수 있다, 4. 안대선의 안동선교부 부임 1) 첫 딸의 죽음 1917년 가을, 서울에 도착한 안대선 부부는 곧바로 안동선교부로 부임했다. 안동선교부에는 1909년 부임한 오월번 선교사, 1910년에 부임한 권찬영 선교사, 그리고 1914년에 부임한 인노절 선교사가 주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1년 전인 1916년 오월번 선교사가 안동을 떠나 평양으로 이임했기 때문에 안대선 선교사는 결원이 생긴 안동선교부로 신속히 부임해야만 했을 것이다. 안대선의 이름은 1918년 1월 1일 저녁 7시 대구동산성경학교에서 회집된 제3회 경북노회에 처음 등장하는데, 이것은 그가 1917년 안동선교부에 부임했음을 알리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안대선 부부는 안동에 도착하자마자 큰 슬픔을 경험해야만 했다. 1919년 6월 12일에 출생한 첫 딸 도로시가 1920년 1월 25일 7개월 만에 당시 풍토병인 이질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안대선은 도로시의 묘비에 “예수님과 함께(With Jesus)”라고 적었다. 결혼하자마자 선교지인 한국으로 출발했고, 안대선과 안의리 두 사람의 사랑의 결실로 얻은 첫아기의 죽음으로 이들은 큰 상실감에 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슬픔을 이겨내고 주어진 사역에 열과 성을 다하여 안동선교에 있어서 새로운 사역의 장(場)을 마련했다. 참고로 안동 경안고등학교 정문 입구 좌측에 3기의 선교사의 무덤이 있는데, 하나는 인노절 선교사의 묘이고, 다른 두 기는 한 살도 되지 않은 안대선의 딸 도로시의 무덤, 그리고 옥호열 선교사의 2살 난 아들 윌리엄의 무덤이다. 2) 성경학교 교사 안대선은 안동선교부의 센터가 있는 안동을 근거지로 영주, 의성, 예천, 청송 지역 등지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우고, 이미 설립된 교회들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또한 안동지역 성도들에게 체계적으로 성경을 가르침으로써 평신도 양육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안동에는 1912년 처음으로 여자성경학원이 설립되어 평신도 여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하지만 안동지역 평신도의 성경공부에 관한 관심과 열망이 여타 지역에 비해 폭발적이어서 보다 체계적인 성경학교 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안동선교부는 1920년 4월 10일 안동남녀성경학교를 개교했는데, 이때 초대교장은 인노절 선교사, 교사는 권찬영 선교사와 안대선 선교사였다. 안동남녀성경학교는 남녀 모두를 대상으로 첫 입학생을 모집했는데, 1920년 가을에 1백30명이 등록했다. 성경뿐 아니라 수학, 한문, 음악 등 교양과목도 함께 가르쳤다. 그런데 학교의 교실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으므로 첫 학기의 수업이 성소병원 진료실에서 진행되었다. 이 학교는 학제를 1년에 두 학기로 나누었고 한 학기에 한 달간씩 수업을 진행하였다. 1922년 교장 인노절 선교사가 순교한 후 1925년 12월 안동성경학교 교사와 기숙사가 새롭게 준공되었으며, 학교의 이름을 개명해 ‘인노절선교사기념성경학교’라고 명명(命名)하였다. ▲안동선교부 기지에 선교사 사택이 준공된 후의 모습. 사진에는 준공된 여러 채의 선교사 사택을 볼 수 있는데, 좌측 숲은 현재 경안고등학교로 오월번 선교사 가족이 1911년 12월 27일 입주한 사택으로 알려져 있다.(사진2) ▲1925년 안동에 준공된 ‘인노절기념성경학교’의 모습. 2005년 철거되어 그 자리에 성소병원 신관이 건축되기 전까지 80년 동안 안동지역을 위한 목회자 양성을 넘어 한국교회와 세계선교에 헌신하는 주의 종들을 배출했다.(사진3)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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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1)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1)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안대선 선교사(W.J.Anderson, 1890~1960) 목차 서문 1. 안대선의 출생지 2. 안대선의 출신대학과 신학대학원 3. 안대선의 결혼과 사별 4. 안대선의 안동선교부 부임 5. 안대선과 안동기독청년면려회 6. 안대선과 전국기독청년면려회 7. 안대선의 그 외 사역 8. 안대선의 퇴임 및 별세 1. 서문 1893년 5월 5일 장로교 부산선교부 소속의 배위량(W.M.Baird) 선교사는 안동에 복음을 처음으로 전했다. 그 후 안동을 포함한 경북 북부지방의 복음화는 1899년 설립된 대구선교부에 의해 주도되었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안의와(J.E.Adams), 부해리(H.M.Bruen), 방위렴(W.M.Barrett) 등에 의해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도보로 사흘 길에 위치한 대구선교부의 경북 북부지역 복음사역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1908년 안동선교부의 설립이 결정되었으며, 안동, 의성, 영주, 봉화, 청송, 영주 등 경북 북부지방의 복음화를 가속시켰다. 특히 안동선교부 초기에 부임한 사우대(C.C.Sawtell), 오월번(A.G.Welbon), 권찬영(J.Y.Crothers), 인노절(R.E.Winn), 안대선(W.J.Anderson) 선교사 등은 순회 전도를 통해 많은 교회를 개척함으로써 안동지역 복음화에 기여했다. 1917년 안동선교부에 부임한 안대선 선교사는 3·1운동의 실패로 좌절하고 있는 청년들에게 기독청년면려회(基督靑年勉勵會) 운동을 소개함으로써 청년들이 성경과 신앙으로 훈련되어 희망을 갖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게 했다. 특히 안대선 선교사가 소개한 기독청년면려운동을 안동교회는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전국 최초로 조직된 임원을 당회가 허락함으로써 한국에서 기독청년면려운동 효시 교회가 되었다. 2021년은 한국교회 최초로 안동교회 당회가 기독청년면려회를 승인한 지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기독청년면려회는 시대에 따라 명칭을 달리하며 한국교회를 위해 봉사해 왔다. 청년면려회가 한국교회의 개혁과 부흥에 끼친 선한 영향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본 소고는 기독청년면려회에서 가장 큰 역할을 감당한 안대선 선교사에 관한 연구 논문이다. 한국으로 오기 전 안대선 선교사의 미국 생활, 출신대학과 신학대학원, 안동선교부의 부임과 주된 사역, 특히 기독청년면려회 운동에 끼친 그의 영향력, 면려운동 이외에 그가 활동한 사역들, 그리고 그의 가정에 관한 글이 본 소고에 포함되어 있다. 1. 안대선의 출생지 안대선 선교사는 1890년 6월 10일 미국에서 출생했다. 하지만 그의 정확한 출생지는 알려진 바 없으나 그가 졸업한 대학과 대학원을 통해 추측할 수 있다. 안대선은 미네소타주 매캘러스터 칼리지(Macalester College)를 졸업했다. 졸업 후 안대선은 캘리포니아주의 유일한 미국 북장로교 신학교인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안대선은 로스앤젤레스에서 부인이 될 안의리(L.E.B.Anderson)를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안대선이 선교사직을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별세하기 전까지 생활한 곳은 로스앤젤레스 듀알트(Duart) 시(市)였다. 안대선이 미네소타주 출신인지, 캘리포니아주 출신인지 정확하게 알 길은 없다. 미네소타 출신이기 때문에 가까운 매캘러스터 대학에 입학했는지, 아니면 캘리포니아 출신이지만 매캘러스터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멀리 미네소타주까지 갔는지를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는 매캘러스터 대학 졸업 후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에 입학했고,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에 다니면서도 로스앤젤레스에 있던 안의리와 교제를 했다. 이러한 사실들로 보아 안대선이 로스앤젤레스 출신이거나 혹은 매캘러스터 대학 졸업 후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2. 안대선의 출신대학과 신학대학원 매캘러스터 대학은 미네소타주 램지군 세인트폴에 있는 4년제 사립 리버럴 아츠(Liberal Arts) 대학으로 미국 남북전쟁에서 군종목사로 종군한 목사 에드워드 더필드 닐(E.T.Neil)이 1874년에 세웠다. 그는 1849년 복음 전도를 위해 미네소타주를 여행한 후 두 교회처를 세우고 미네소타 대학교의 첫 총장이 되었다. 그는 장로교와 관계를 맺되 어느 종파에도 속하지 않는 대학을 구상하다가 필라델피아 출신의 사업가이자 독지가 찰스 매캘러스터가 건물을 기부하고, 장로교 교회와 새 대학의 이사회로부터 받은 추가 기부금을 바탕으로 다섯 명의 교수와 여섯 명의 신입생, 52명의 예비 학생들과 함께 매캘러스터 칼리지를 1885년에 문을 열었다. 매캘러스터 대학은 미국 장로교와 관계를 맺긴 했으나 미션 스쿨로 개교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안대선은 장로교 출신이라 할지라도 대학교 4년의 교육 기간 동안 한 교단에 국한된 사고가 아니라 초교파적 사고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안대선은 대학을 졸업하고 북장로교 직영신학교인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1885년부터 1910년까지 미국에서 한국에 온 선교사의 출신 신학대학원 분포는 맥코믹 신학교 18명, 프린스턴 신학교 16명, 유니온 신학교(리치몬드)는 9명, 오번 신학교는 6명, 유니온 신학교(뉴욕) 4명, 샌프란시스코 신학교는 3명 등이다. 참고로 19세기 미국 북장로교회의 신학은 프린스턴 신학으로 대변되는데, 개혁주의적 전통을 계승한 프린스턴 신학은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매우 강조했다. 그리고 신학교육의 목적은 “성경을 진실하게 믿고, 적절히 이해하며, 진정으로 사랑하고 명쾌하게 주해하는 복음 사역자, 그리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복음적인 구속을 철저히 전력을 다해 설파하는 복음 사역자를 훈련시키는데 있다”고 한다. 따라서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서의 신학적, 목양적 훈련은 안대선을 복음주의적 신앙으로 무장시켜 영혼을 구원하는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수 있게 했을 것이다. ▲1871년 개교한 샌프란스시코 신학대학원(San Francisco Theological Seminary, SFTS)은 미국 서부지역을 담당하는 미국 장로교(PCUSA) 직영신학교로 알려져 있다.(사진1)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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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 목사의 논문 원문(9)- 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 김승학(안동교회)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정숙 전도사(金貞淑, 1880~1969) 한국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성경 말씀 그대로 남녀노소, 빈부, 계층에 관계없이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귀족보다는 평민,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조선시대 말기의 여성은 유교적 전통으로 인해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한국 전통사회 안에 뿌리 깊은 성차별의 문화와 여필종부, 삼종지도, 칠거지악, 남녀칠세부동석, 부부유별 등의 가부장적 가치관은 여성의 인권을 철저히 억압했다. 무지와 가난, 고된 노동과 억압된 삶을 살던 여성은 한(恨)을 품은 존재였다. 조선시대 말기에 입국한 선교사들의 눈에는 누구보다 한국 여성들이 복음의 대상이요 구원받아야 할 존재로 보였다. 릴리아스 호튼 언더우드(Lillias Horton Underwood) 릴리아스 호튼 선교사는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이다. 의료선교사인 그는 언더우드보다 8년 연상이었다. 호튼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여의사였다. 여사는 당시 한국 여성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조선여자들은 대체로 아름답지 않다. 나는 그들을 누구 못지않게 사랑하고 내 형제처럼 여기지만 그 생각은 털어놓아야겠다. 슬픔과 절망, 힘든 노동, 질병, 애정의 결핍, 무지 그리고 흔히 수줍음 때문에 그들의 눈빛은 흐릿해졌고 얼굴은 까칠까칠해졌고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그래서 스물다섯이 넘은 여자에게서 아름다움 비슷한 걸 찾는 건 헛일이다. 다만 아직 무거운 걱정거리나 힘든 노동에 시달리지 않은 나이어린 소녀들과 젊은 색시 중에는 종종 예쁘고 깜찍한 그리고 가끔 드물기는 하나 아름답기도 한, 활짝 핀 우아한 모습을 한 이를 볼 수가 있다. 이런 환경에 있던 여성들은 한국 땅에 도착한 선교사들에게 누구보다 우선적으로 중요한 선교대상이 되었다. 특히 1885년 4월 5일 인천항에 함께 도착한 미국 장로교와 미국 감리교선교사는 선교대상으로서 여성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1893년 장로교와 감리교의 양 교파 연합모임에서 선언한 10가지 한국선교정책 중에서 두 번째가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였다. 하지만 여성선교정책에 관한 장로교와 감리교의 강조점은 차이가 있었다. 사회적인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던 감리교의 경우, 처음부터 의료사업, 교육사업, 자선사업, 여성의 인권회복 등에 치중하셨다. 따라서 감리교는 여성의 계몽과 교육에 있어서 장로교에 비해 앞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직접적인 복음전파를 강조한 장로교는 우선적으로 가난한 자와 낮은 계층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사회 계층 중에서도 가장 소외된 여성들을 선교의 타깃으로 삼았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여성들이 다른 계층에 비해 더 쉽게, 더 빨리 복음에 반응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여성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성들에게 복음이 전해진 첫 10년 동안 여성 복음화의 속도는 매우 느렸다. 여성들이 소극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여성들이 매우 적극적으로 복음을 수용하고 복음에 응답함으로써 복음전파가 급속히 이루어졌다. 그 결과 사회적 활동에 수동적인 여성들이 전도사역과 계몽사업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뿐 아니라 일제의 압제 가운데서 애국 여성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1. 김정숙, 출생과 결혼 “임진(臨津) 이북의 땅은 다시 오랑캐의 땅이 될 터이니 몸을 보전하는 것을 논할 수 없다”는 예언으로 불안해하던 이북(以北) 사람들 중에는 이남(以南)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이들이 가장 선호한 지역은 정감록(鄭鑑錄)에서 언급하고 있는 ‘십승지’의 첫 번째 승지(勝地)인 경상북도 풍기(豊基)였다. 당시 난리 중에에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불안해하던 평안북도의 박천, 영변 지역에는 “풍기로 가야 산다”는 말이 떠돌았다고 한다. 정감록의 예언을 믿고 있던 북한 사람들이 실제로 이남으로의 이주가 시작된 것은 1890년대 후반부터였고, 이어서 1920년대에는 개성·평양에서 약 100여 가구가 풍기로 집단 이주를 했다. 이어 1945~50년 사이에 이북 전역에서 약 600가구가 이주를 했는데, 1가구에 5명만 따져도 600가구이면 3000명에 해당한다. 결국 약 4000~5000명의 사람들이 논과 밭, 가옥을 처분하여 풍기에 정착했는데, 현재 이들 후손들이 1000가구 정도 남아 있다고 한다. 특히 풍기로 이주해 온 사람들 가운데서 다수가 서도지역인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이었다. 1907년 창립된 풍기성내교회는 지역 토착 주민들과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온 이주민들이 함께 신앙공동체를 이룬 것으로 성내교회 100년사는 기록한다. 정감록을 믿고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도 성내교회에 출석하였다. 황해도 중에서 특히 해주와 개성출신의 이주자들은 풍기지역에서 인삼재배를 주도하였고, 평안도 출신 이주자들은 1920년에 시작된 과수재배와 직조업을 주도하였다. 이들이 풍기지역의 경제를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6·25전쟁 전후로 다시 북한에서 많은 이들이 이곳으로 이주해왔는데, 이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전쟁으로 파괴된 직조공장이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 (이하 논문 내용은 첨부파일 참조)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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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7‧끝)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7‧끝)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정숙 전도사(金貞淑, 1880~1969) 목차 서론 1. 김정숙, 출생과 결혼 2. 최초의 순교를 목도한 시댁 3. 여성복음전도의 선구자 .............................................. 7. 안동교회 최초의 전도사 8. 경안노회 여전도회 연합회 리더 9. 일제에 저항한 애국운동가 10. 평신도 사역자 결론 10. 김정숙, 평신도 사역자 1934년 12월 17일 오후 4시 경안노회 주관으로 한국선교 50주년 희년기념식 및 기념축하예배가 안동교회에서 거행되었다. 크고 작은 축하기를 들은 안동교회, 안기교회, 신세교회 교인과 주일학교 학생들 약 1,000여 명은 찬송을 부르며 시가지를 행진하며 전도지를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4시 30분 다시 안동교회로 모여 경안노회 만세를 삼창하고 기념식을 마쳤다. 이날 오후 7시에 시작된 희년 축하예배 시 안동교회 악대의 주악과 찬양이 있었고, 권찬영 선교사의 설교 후 표창식이 있었다. 이날 20년 이상 경안노회 경내의 교회에서 시무한 교역자 12인 중 여성으로서는 김정숙 전도사가 유일했다. 참고로 12인으로는 김영옥, 권찬영, 김인옥, 강석진, 장사성, 김우일, 권수백, 김종수, 강우근, 권중한, 김익현, 김정숙 등이었다. 김정숙 전도사는 1934년에 이미 20년 이상 교역자로 봉사한 것으로 인정받은 것으로 보아 적어도 1914년 이전부터 노회가 인정하는 여성 교역자였음에 틀림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김정숙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가 세례받은 후 1년이 지난 1912년부터 생활의 근거지를 풍기에서 안동으로 옮겨 본격적으로 선교사들의 복음 사역을 도왔다고 증언한다. 그는 회심 이후 전도부인으로 투신하여 헌신한 여성 사역자였다. 또한 평양여자성경학원을 졸업한 이후에는 교회와 노회를 위해 충성을 다했다. 이처럼 그는 경안노회 여성 지도자 중에서도 가장 앞선 선각자(先覺者) 중의 한 사람이었다. 교역자로 봉사하던 김정숙 전도사는 1937년, 15년 동안 섬겼던 안동교회에서 사임함으로써 전도사직에서 은퇴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58세로 아직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도사직에서 은퇴한 것이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등을 강요한 일제는 황국 신민서사의 암송도 강요했다. 특히 1937년 10월, 총독부 학무국에서 교학쇄신(敎學刷新)·국민정신 함양을 목적으로 보급했다. 학교·관공서·은행·회사·공장·상점 등 모든 직장의 조회와 각종 집회 의식에서 황국 신민서사는 낭송이 강요되었다. 다시 말해 이때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치가 극성기에 달했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를 섬기는 교역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김정숙 전도사는 안동 3·1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민족 운동자였다. 이러한 김정숙 전도사의 이력은 일제의 눈에 가시와 같았을 것이며, 일제는 총력을 다해 황국신민화 정책에 걸림돌이 되는 교화와 애국자들을 탄압하고 제거했을 것이다. 임학수 목사도 일제 말엽의 기독교 박해(迫害)로 사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는 교회에 김정숙 전도사의 거취에 무언 혹은 유언의 압박을 가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마 김정숙 전도사는 자신이 교회에 부담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따라서 김정숙 전도사는 스스로 사임의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정숙은 은퇴 후 교역자 신분으로서가 아니라 평신도로 안동교회를 섬겼다. 이와 같은 사실은 앞서 언급한 김정숙의 사임 이유를 지지하게 한다. 더 이상 교회에 부담을 주지 않는 평신도 신분으로 김정숙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거룩한 일이라면 하나님과 교회의 부름 앞에 철저히 순종하며 마음과 정성을 다해 동참했던 것이다. 김정숙은 안동교회의 집사와 권찰로 봉사하다가 69세인 1948년에는 권사로 피선되었고, 1949년부터 1955년까지 여장년부 부장으로 충성을 다했다. 그는 안동교회 전도사직을 내려놓고도 평신도로 돌아가 교회를 섬기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정숙은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은 어떤 직책이든지 최선을 다해 감당한 신실한 하나님의 일꾼이었다. 그래서 1963년 1월 20일에 열린 당회는 20년 이상 안동교회를 위해 봉직한 것을 기념하는 예식을 갖기로 결의했는데, 대상자는 김광현 담임목사, 김재성·조흥노·이홍구 장로, 그리고 김정숙 전도사 등이다. 안동교회는 김정숙의 전도사 사역과 평신도 사역을 남녀 차별 없이 존중했던 것이다. 11. 결론 김정숙은 보신(保身)의 길을 갈 수 있었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일평생 험지(險地)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한 믿음의 선배다. 32세가 되던 1911년, 그는 안동선교부 선임 오월번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이후 안동지역의 노회와 교회를 섬기다가 1969년 90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안동지역 여성 사역의 개척자였다. 또한 그는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가 설립될 때 산파(産婆)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초기 경북 북부지역의 여성 복음화에 초석을 놓은 여성 지도자였다. 특히 김정숙은 1919년 3월 18일에 거행된 안동의 3·1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행동하는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이었으며, 일제 말엽에는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신사 참배를 거절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애국자였다. 그의 강직한 성품과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앙, 그리고 성령 충만한 전도사역은 교회와 노회의 후배들에게 사표(師表)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김정숙은 그의 후손이 6대 신앙을 지켜 올 수 있도록 초석을 놓은 신앙의 지주(支柱)요 믿음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조사와 전도사, 전도사직을 은퇴한 후에도 평신도로서 무려 15년 동안 안동교회의 권찰로, 서리집사로, 여장년부 부장교사로, 또한 주일학교에서 어린이 사역에도 헌신함으로써 자신에게 맡겨진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한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종이요 일꾼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난 이후부터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순간까지 오직 하나님과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 살다 간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김정숙의 일생을 회고하면 할수록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한 사도 바울의 육성이 들리는 듯하다.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 10주년 사진. 김정숙 전도사는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가 설립될 때 산파(産婆)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초기 경북 북부지역의 여성 복음화에 초석을 놓은 여성 지도자였다. 연합회의 초대 회장으로 수고한 김정숙 전도사는 두 번째 줄 정중앙에 앉아 있다. 맨 아래 줄 왼쪽에서 네 번째는 역시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의 산 증인인 김점향 권사를 볼 수 있다.(사진8)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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