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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애굽기(2)나의 출애굽기(2) 드보라 5. 외할아버지에 대한 회개 기도 나는 한국에 왔을 때 ‘가족 중에서 내가 처음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남한에 와서 사는구나, 집에서 따돌림 왕따 차별받았는데 내가 드리어 쓰임 받는구나!’라고 생각했었다. 성경을 읽으면서 나는 특히 요셉 이야기에 감정이입을 많이 했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버림받았지만 결국에는 크게 되고 쓰임 받았던 요셉과 같이 하나님께서 가족들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나를 요셉과 같이 이끄신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모임에서 목사님이 보여주신 책 사진을 볼 때 하나님은 나를 깨우쳐 주셨다. 바로 외할아버지의 기도와 헌신이 나를 하나님께로 인도했고, 이 땅에 오게 했고, 통일의 비전을 꿈꾸게 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자는 중에 꿈인지 환상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중에 생생한 장면 하나를 보았다. 김일성 초상화를 바닥에 엎어놓고 무릎 꿇고 엎드려 예배하는 외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여 나는 벌떡 잠에서 깨었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나는 내가 사랑받지 못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형제들에게 버림받았던 요셉인 줄 알았는데, 그리고 나중에 가족을 구원할 믿음의 첫 사람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 핍박 속에서도 기도하셨던 할아버지의 기도가 나를 살게 했다. 나야말로 외할아버지의 눈물의 기도 열매였고, 정말 큰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다. 사실 전혀 사랑받을 자격 없었던 내가, 어릴 적부터 질투와 욕심, 짜증만 부리던 자였던 내가 그 사랑을 받았다는 감동에 나는 회개와 감사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고난 중에 가족에게도 나누지 못한 채로 그렇지만 믿음을 지키신 외할아버지를 생각하며 눈물로 고향을 위해 기도했다. 내 안에 남아있던 쓴 뿌리들이 그 눈물 속에 씻겨져 나갔다. 안타깝게도 그 당시에는 그러한 사실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6. 북한에서의 학창시절 그 당시 북한은 그래도 경제 사정이 괜찮았다. 어릴 적만 해도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김일성 수령을 신으로 받드는 북한의 교육과 사상통제 안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아니 하나님을 모욕하며 살았다. 나도 역시 김일성 수령을 민족의 어버이요 신과 같은 존재로 믿고 그렇게 살아왔다. 외할아버지의 눈물 어린 기도가 있었는지 전혀 모른 채, 사람이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임은 꿈에도 알지 못한 채 살았다. 나는 여전히 가족들은 날 미워한다 생각하며 심술을 부리면서 그렇게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갔다. 집과 학교의 이중생활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항상 집에서는 말썽꾸러기, 천덕꾸러기였지만 학교에서는 공부 잘하는 상당히 성실한 학생이었다. 그 당시 학교에서는 외국어로 2개 반을 운영했다. 러시아어 반과 영어 반이었는데 나는 영어 반을 선택했었다. 그 당시에는 영어가 우리가 그토록 증오하는 미제가 사용하는 언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고 그저 영국에서 쓰는 언어라고만 알고 있었다. 배웠던 영어 발음도 영국식이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6학년 졸업이 2년 남은 4학년 때부터 시험을 보고 경연을 해서 뛰어난 학생들을 추렸다. 그리고는 그 학생들을 따로 모아서 공부를 시켰다. 북한의 학교가 여기서 말하는 비평준화 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학교 체면이 중요하다 보니 좋은 대학을 많이 보내려고 했다. 내가 있던 학교는 한 학년에 약 200~300명 정도 됐는데 그중에 1반 정도를 수재반으로 따로 구분을 시켰다. 7. 딸의 교육을 반대하신 아버지 나는 평소 좋은 학업 성적 덕분에 그 반에 들어가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집에서는 내가 공부하고 또 대학 가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머릿속에 여자 대학생들은 ‘집안 살림은 안 하고 입만 여물어서 남자를 깔보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러시아에서 돌아오신 뒤에 배치받은 직장은 외부 출장이 잦았는데, 출장 다니시면서 여자 대학생들을 이리저리 지나칠 기회들이 많으셨다고 한다. 그렇게 요즘도 그렇지만 그 당시 아버지 세대에는 남존여비사상이 심했다. 아버지는 그래서 공부에 대해 부정적이셨고 집에서 생활 살림이나 잘하라고 하셨다. 집에서 공부를 못하게 해서 나는 숙제도 학교에서 다 해서야 귀가할 수 있었다. (오픈도어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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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Better Country(본향)이정우 목사 안동서부교회 명절이 되면 사람들은 누구나 고향을 그리워하며 고향을 찾아갑니다. 올해도 많은 사람들이 추석을 맞이하여 고향을 찾아 대이동을 하였습니다. 고향 가는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하고 많은 시간이 걸려도 고향을 찾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고향을 그리워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모든 인간이 잃어버린 낙원 즉 에덴동산을 그리워하듯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1. 사람에게는 고향이 있습니다. 고향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가 태어나 자라난 곳”입니다. 고향을 다른 말로는 본향(本鄕)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영어로 Native place 또는 Home town이라고 합니다. 사람에게는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로 “네 고향이 어디냐?”고 물을 때 “Where do you come from?”이라고 말합니다. 즉 “당신은 어디서 온 사람입니까?”라는 뜻입니다. 즉 사람은 어디서 태어나서 온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육신의 고향과 영혼의 고향이 있음을 말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육신은 흙으로 만드셨고 영혼은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최초의 인간은 아담입니다. 아담이라는 뜻은 ‘사람’ 또는 ‘흙’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지위고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육신은 본래의 고향인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영어로 “Return to his old home” 또는 “Return to his native home” 즉 “옛날 집 또는 본래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절을 맞아 고향을 찾는 것은 영원한 고향을 찾는 연습과 같고 고향을 찾아가면서 인생의 근본적인 교훈을 깨닫도록 한 것입니다. 2. 사람은 나그네 인생으로 삽니다. 성경의 인물들이 죽었을 때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다가 갔다고 했습니다.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다”고 하였습니다.(히11:13) 그러므로 우리는 한평생 나그네로 내 인생을 살다 가는 것입니다. 나그네를 영어로는 “stranger” 또는 “exile”이라고 합니다. ‘exile’이라는 단어의 뜻은 ‘타향살이’, ‘유배생활’, ‘유랑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신앙적인 용어로는 ‘순례자’라는 뜻을 가진 ‘Pilgrim’입니다. 즉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본향인 천국을 향해 가는 순례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 세상에서 외국인으로 나그네 인생을 살다가 본향인 저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이 세상이 영원한 본국인 줄 알고 세상에만 연연하다가 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거류민이요 나그네인 길손일 뿐입니다. 3. 사람은 본향을 사모하며 삽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영원한 본향을 향하여 달려가는 존재입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했습니다.(히11:16) 마치 자동차나 비행기가 가는 목적지가 있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길도 마지막 종착지인 본향을 향하여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본향은 ‘더 나은 본향’입니다. 그래서 ‘더 나은 본향’을 영어성경에는 ‘Better country’ 라고 하였습니다. 즉 ‘더 나은 나라’라는 뜻입니다. 나그네 삶을 사는 이 세상과 비교가 안 되는 더 나은 본향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천국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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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전도의 불을 지핀 사람, 정재순 목사(1)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정재순 목사 鄭在淳, 1878~1948) 1900년 초 어느 날 정재순 목사는 부해리(傳海利, H.M. Bruen) 선교사와 만났다.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만났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정재순이 20을 갓 넘은 나이에, 경산 어느 마을에서 부해리 선교사를 만났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이후 정재순은 단 한 번도 교회를 떠난 적이 없이 초창기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그는 교회 안에 세워진 기독교학교의 교사생활을 시작했으며,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함께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돌보는 일을 했다. 조사로 여러 교회를 섬기던 정재순은 1912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던 1914년, 그가 섬기고 있던 대구 신정교회(현 대구 서문교회)에서 신정교회 초대장로로 임직하게 된다. 이후 1915년 평양신학교 제8회로 졸업한 후 목사임직을 받고 신정교회 첫 한국인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초임지인 대구 신정교회에서 정재순 목사의 사역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사역이었다. 여자 청소년을 위한 야간 학교를 개설했고, 대구 3·1만세운동에 깊이 관여했다. 1922년 6월 안동으로 사역지를 옮긴 후, 그는 전도중심의 사역을 통해 안동 땅을 기경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는 계속적인 그의 관심사인 학원선교를 위해 청소년을 위한 기독교학교를 설립했으며, 교회분립을 통해 안동 땅의 부흥을 위한 새로운 도전을 감행하기도 했다. 안동을 떠난 이후 대구를 근거지로 둔 정재순 목사는 본격적인 복음전파자의 길을 걸었다. 청도, 영천, 경산, 달성, 고령, 월성, 경주, 영일, 칠곡, 상주, 군위, 선산, 의성군 등에 28개 예배처소를 개척했다. 이때 그의 부인인 손주안 사모는 함께 교회를 개척하고 함께 성도를 섬기고 돌봄으로써 그의 소중한 동역자가 되었다. 정재순 목사는 60세에 그의 첫 담임 목회지인 대구 신정교회로 돌아가 사역을 마무리했다. 정재순 목사는 목회 전반전과 후반전을 똑같은 열정과 투철한 사명감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불꽃을 불사르며 살았을 뿐 아니라 성도들의 심장에 전도의 불을 지핀 믿음의 사람이었다. 1. 목사 임직 이전의 인간(人間), 정재순 정재순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으며 극히 단편적인 것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 교회역사 주영연구소장 이교남 목사의 연구에 의해 2013년 새롭게 밝혀진 정재순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부해리(傅海利, H.M. Bruen) 선교사 정재순은 1878년 5월 24일, 경북 경산군 남천면 신기동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정진호, 모친은 김소사의 2남 4녀 중 장남이며, 부인은 손주안이다. 정재순은 외동아들을 두었는데 아들은 정원조, 자부는 손기순이며, 그의 후손은 현재 대구에서 교회를 잘 섬기고 있다. 정재순 가문은 당시 여느 가문처럼 유학의 집안이었다. 따라서 그는 어릴 때부터 한문을 배우고 한학을 수학하며 유학을 따르는 집안에서 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재순 목사의 묘는 칠곡에 있었는데, 1982년에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정재순 목사가 안동교회에 시무할 때 교인으로 생존한 성도들이 기억하고 있는 정재순 목사는 천성이 어질고 중후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성도들은 후덕하고 인정이 많은 교육자요 목회자인 그를 신앙과 인격 모든 면에서 존경하며 영적 리더십에 순종했을 것이다. 정재순 목사는 교인들을 포함한 주변의 여러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주는 주의 종이었다. 2. 선교사를 만나 회심(回心)한 사람, 정재순 유교가 뿌리 깊은 가정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정재순은 처음에 기독교에 심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재순 목사의 증손자에 따르면 정재순이 선교사를 구타하고 쫒아내려고 선교사를 찾아갔다가 부해리 선교사를 만나 전도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정재순 목사는 부해리 선교사를 찾아갔을 때 선교사의 사냥개가 빵을 다리 위에 놓고 주인이 먹으라는 명령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개도 기도하고 난 후에 밥을 먹는데, 사람인 나는 당연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되지 않겠는가?”하고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1900년 초 대구·경북 지방은 대구선교부 소속 선교사들이 지역을 정해 선교에 열심을 내고 있었다. 부해리 선교사, 안의와 선교사, 방위렴 선교사는 각각 경북 서부지방, 동부지방, 북부지방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선교사들은 다른 지역의 선교와 교회에 어느 정도는 관여하고 있었다. 정재순의 거주지인 경산 사월교회는 1898년 4월 안의와 선교사가 설립했으며, 부해리 선교사와 맹의와 선교사가 뒤이어 2대, 3대 담임 목사를 맡았다. 부해리 선교사는 1905년 사월교회에 부임했지만, 이미 1903년 이전에 경산을 방문해 복음을 전했던 것으로 추측되며, 따라서 정재순은 1903년 이전에 부해리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 회심했다고 보여진다. 3. 어린이 기독교학교의 교사(敎師), 정재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정재순은 당시 어린이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교사로 봉사하기 시작했다. 정재순의 증손자의 증언에 따르면 1905년 그는 경산 사월교회가 문을 연 계동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계동학교의 초대교사는 정재순, 전기식, 문사인 제씨였다. 계동학교는 오늘날 초등학교 수준의 학교로 신교육에 힘쓰며 인재양성에 앞장섰다. 이후 1910년경 경산에서 대구로 온 정재순은 대구 남성정교회가 운영하는 기독교 초등학교인 희도보통학교 전신(前身) 대남소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당시 교회 중심으로 세워진 기독교 학교들은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던 백성들에게 복음 뿐 아니라, 근대교육의 통로로 큰 역할을 감당하였다. 정재순은 경산에 이어 대구에서도 기독교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다음세대의 기독교 교육에 관심과 열정을 갖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의 주된 관심사 중의 하나인 다음세대 신앙교육에 관한 애정은 안동교회에 부임한 이후 곧이어 기독교 학교를 설립한 것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1911년 개교한 계동학교를 포함한 사월교회의 예배당과 종탑, 교회 정문과 화장실을 기억을 되살려 추정하여 그린 사진이다. 종탑을 사이에 두고 예배당과 계동학교가 나란히 서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아마 계동학교를 통한 다음세대의 교육을 그만큼 중시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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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이 배출한 첫 해외선교사, 이대영 목사(1)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이 대 영 목사 (李大榮, 1887~1968) 1887년 경상북도 예천군에서 출생한 이대영 목사는 시대를 앞서간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 믿기 힘든 유학이 강한 마을과 가정에서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도 혹독했다. 그는 더 이상 고향 땅에서 살지 못하고 객지로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일정한 훈련을 거친 후 하나님께서는 그를 고향으로 보내셨고, 뛰어난 복음전파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그 후 전도인, 조사로 활동하면서 평양신학교의 신학교육을 마치고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시무하며 기독청년면려회와 주일학교를 통해 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갈 뿐 아니라 지역복음화와 교회 부흥을 선도했다. 이후 총회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안동을 떠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파송 선교사로 1922년 6월 13일 중국 래양에 도착한 이대영은 그 땅에 머무는 동안 중국인들과 함께 중국인처럼 살았다. 1949년 중국의 공산화로 인해 선교를 포기하고 1955년에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이대영 목사는 33년 동안 중국인을 동족으로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함으로서 산동반도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수 있게 하였다. 그후 그는 오직 하나님 나라, 교회와 총회를 위해 헌신하다가 1968년 하나님이 부르심을 받은 믿음의 선배이다. 1. 이대영, 금당실 마을에서 출생하다 백사(白沙) 이항복의 후손인 이대영은 1887년 4월 23일,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에서 이유성(李裕成)과 김도혜(金道徯)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이대영이 출생한 마을은 금당실로 불러졌는데 선교사가 동네에 와서 복음을 전하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했다. 이대영은 괴당교회가 설립될 당시인 1907년 경, 복음을 소개받고 믿음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부모의 반대로 고향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가족과 함께 1910년 영일군 흥해면으로 이사했다. 그는 흥해교회에 출석하면서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특히 이곳에서 선교사로부터 신앙훈련과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전통적인 양반가문의 후예로서 비록 예수 믿는다고 집에서 버림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품으셨고, 훗날 중국 땅에서 복음전파의 귀한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이다. ▲이대영 목사의 가족사진 2. 이대영, 부해리 선교사를 만나다 안동을 포한한 경북북부지역에 복음이 처음으로 전해진 것은 1893년 배위량 선교사에 의해서이다. 이후 1902년 3월에 안의와 선교사가, 1903년 봄에 방위렴 선교사와 부해리 선교사가 안동을 직접 방문해 복음을 전했다. 특히, 부해리 선교사는 1899년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미국 북장로교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파송 받아 1899년 10월 26일 대구에 도착, 초창기 대구·경북 지역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941년 일제의 탄압으로 추방되기 까지 40여 년 동안 한국선교에 평생을 바쳤다. 부해리 선교사를 포함한 여러 선교사들의 헌신의 결과, 1903년 미국 북장로교 연회보고에 의하면 경북·대구 지역 7개 고을에서 12명의 교인이 생겨났고, 1905년에는 20개 고을에 8개 교회, 2명의 세례교인, 19명의 학습교인, 79명의 원입교인이 생겨났다. 이러한 영적 분위기 가운데서 이대영의 회심에 관한 이야기는 두 가지 설로 나뉘어진다. 우선 박용규는, 1907년 경 이대영이 나만기에 의해 복음을 소개받고 예수를 믿게 된 것으로 추측한다. 이미 예천에 존재했던 그리스도인 나만기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고 복음을 들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러 자료들은 이대영이 부해리 선교사에 의해 예수를 믿게 되었음을 증거한다. 이대영은 한국교회의 최초의 대부흥이 일어난 1907년 당시 대구선교부 소속 선교사로 있던 부해리 선교사에 의해 복음을 전달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구·경북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부해리 선교사와의 역사적 만남으로 이대영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됐으며, 이후 전도인, 조사를 거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 임직한 이후 한국교회와 중국선교의 거룩하고 위대한 한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3. 이대영, 경북 북부지역 전도인·조사가 되다 복음을 접한 뒤 집안 어른들의 반대로 흥해로 이사한 이대영은 흥해교회에 출석하면서 본격적인 전도인 훈련을 받게 되었다. 특히 대구선교부의 중심교회인 남성정교회(대구제일교회의 전신)에서 열렸던 겨울남자성경반에서 수 년 동안 수학할 기회를 가짐으로써 목회자로서의 전문적인 소양을 쌓을 수 있었다. 선교사의 지도와 신학훈련을 받은 이대영은 전도인으로 본격적인 전도사역을 하게 되었다. 흥해교회에 출석하면서 훈련받은 6년 여 동안 이대영은 이미 전도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고, 경북노회는 그를 유급 전도인으로 인정하고 복음전도사역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그는 고향인 금당실에서 전도인으로 활동하기 이전에 예천 신전교회를 왕래하며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오게 됨으로써 신전교회가 부흥했다. 신학 기초과정을 거친 이대영은 목사로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는 당시 규정에 따라 목회자 수업을 위한 문답절차를 거쳐야 했다. 그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경북노회에서 목사후보생고시를 치러야 했으며, 1916년 6월 대구남성정교회에서 개회된 제1회 경북노회에서 평양신학교 입학을 허락받았다. 신학 입학을 허락받은 후 처음으로 이대영이 섬긴 교회는 경주군 외동면 말방리의 장산(長山)교회다. 이 때 이대영은 전도인에서 조사신분으로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4. 이대영,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 임직하다 이대영은 1917년 5년 과정의 평양신학교에 30세에 입학하여 목사를 위한 수학을 시작했다. 결혼한 지 10년이 지나 10살 난 아들 이 있었는데, 평양에서 공부하는 기간 동안 가족들은 섬기는 교회에 머물러 있었으며 이대영은 혼자 기숙사에서 동료들과 함께 생활했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후 이대영은 신학공부의 적응을 위해 섬기던 장산교회를 1917년 사임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918년 다시 부임하여 장산교회를 섬겼다. 평양신학교 졸업반인 1920년 이대영은 이만집 목사가 담임으로 있던 대구 남성정교회 조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이만집 목사는 3·1 만세운동으로 투옥된 상태로 있었기 때문에 조사로 청빙을 받은 이대영은 실질적으로 대구제일교회 전신(前身)인 남성정교회를 담임하게 된 것이다. 남성정교회는 대구·경북지역 최초의 교회로 이미 이 지역의 중심교회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는 동년 12월 2일, 17명의 동기생들과 함께 평양신학교 제14회로 졸업하고, 이듬해인 1921년 1월 12일 대구동산성경학원에서 개회된 제9회 경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 임직예식을 마친 이대영 목사는 안동지역의 중심교회인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청빙허락을 받아 부임했다. 이후 이대영 목사는 1921년 6월 15일 개회된 제10회 경북노회에 정식 노회원으로 참석하여 본격적인 노회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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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거룩한 흔적을 남긴 사역자, 김영옥 목사(1)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 영 옥 목사 (金泳玉, 1871-1952) 1893년 베어드 선교사에 의해 안동지역에 복음이 전해진지 124년이 지났다. 오늘의 교회는 믿음의 선배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우리 모두는 너무도 잘 안다. 훌륭한 믿음의 선배 중에는 교역자들 뿐 아니라 평신도들도 포함된다. 이 분들의 헌신의 결과로 척박한 이곳 안동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뿌리를 내리고 자라 마을마다 교회가 서게 되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수고임을 알기에 감사할 뿐이다. 김영옥 목사는 한국선교 초기 거룩한 발걸음을 통해 거룩한 흔적을 남긴 위대한 선배이다. 필자는 그에 대한 조명이 너무 늦었음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그리고 경상북도에서 초개와 같이 모든 것을 버리며 교회와 국가를 위해 헌신한 김영옥 목사를 연구하여 탈고하니 그동안 목사님에게 가졌던 죄송스러운 마음이 조금이라도 보상받는 느낌이다. 이제 자애로운 아버지요 할아버지, 지역의 초대교회의 기초를 든든히 세워 중심교회로 서게 한 목사, 그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믿음으로 두려움 없이 애국한 김영옥을 소개한다. 1.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 결신한 청년, 김영옥 경상도의 첫 한국인 목사는 김영옥(金泳玉, 1871-1952)이다. 김영옥이 비록 영남지역 최초의 한국인 목사이지만 그의 고향은 북한으로, 그는 1871년 4월 12일 황해도 연백군에서 출생했다. 가난했던 그는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해 미국 하와이로 갈 꿈을 갖고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18세가 되던 1888년 어느 날, 평산 누님 댁에 갔다가 장로교 최초의 선교사였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선교사가 소래(松川)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미국으로 갈 방법을 찾기 위해 그를 찾아갔다. 그러나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제시받은 김영옥은 미국 갈 결심을 포기함과 동시에 회심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결국 그는 장로교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로부터 세례까지 받게 되었던 것이다. 전혀 뜻하지 않게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은 김영옥은 세례 까지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언더우드 선교사의 마부로 복음사역의 적극적인 도우미가 되었다. ▲1909년 9월부터 안동의 북부지역은 사우대 선교사가, 서쪽은 오월번 선교사가 책임지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전도여행을 떠나기 전의 모습으로 추측된다. 좌측 말에 탄 사람은 사우대 선교사이며 말 옆에 있는 사람은 당시 조사인 김영옥(1911년 안동교회 초대담임목사로 부임)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마부, 그리고 오른쪽 말에 탄 사람은 오월번 선교사이다. 2. 목사 임직 이전의 복음전도자, 김영옥 회심 이후 김영옥은 복음사역을 위해 하나하나 착실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복음전파사역에 관한 김영옥의 결심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까지 중단 없이 계속되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후 그는 단 한 번도 곁길로 간 적이 없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기 위한 준비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그는 능동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 1년 만에 한문 신·구약 성경 모두를 통독(通讀)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또한 선교사들로부터 전도법과 장로교회에 관해 배웠으며 선교사들과 간단히 대화할 수 있는 영어실력도 갖추게 되었다. 모든 과정을 이수한 김영옥은 실력 있는 매서인(賣書人)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선교사를 도와 공식적인 매서인으로서 사역할 수 있었다. ▲황해도 솔래(松川)에서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 18세 때(1888년) 회심하고 결신한 김영옥은 휴식도 없이 64년(1952년) 동안 서울, 강원도 철원과 원주, 경북 안동, 사월, 포항, 영주, 경주, 풍기, 문경, 그리고 의성 삼분 등 전국에서 교회를 세우고 돌보며 애국하다가 하나님의 나라에 입성하였다. 이후 서울로 올라온 김영옥은 1893년 모삼열(Samuel. F. Moore)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순교를 각오하고 서울 종로 5가, 4가 등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그 결과 몇 명의 성도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1894년 이들이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와 그의 조사(助事)인 서상륜과 함께 연지동 초가(草家)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오늘의 연동(蓮洞)교회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또한 김영옥은 조사로서 서울의 승동교회와 동막교회 설립에 관여함으로써 이 땅에 교회를 세우는 사역을 쉬지 않고 감당했다. 이후 김영옥은 서울을 벗어나 더욱 활발하게 전도사역을 감당했다. 그는 경기 동쪽과 황해도 이남(以南)으로 순행하며 전도하여 백천, 평산, 금북, 금성, 양구, 화천, 양주, 포천, 등지에 여러 교회를 설립에 기여했다. 특히 김영옥은 1898년 모삼열 선교사와 함께 전도하고 개척한 고향인 황해도 백천군 운교(雲橋)교회에서 영수(領袖)와 장로로 섬기기도 했다. 운교(구름다리)교회는 교인들의 헌금으로 큰 한옥을 사서 새롭게 단장하여 예배처소로 사용한 그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로 김영옥은 주일예배를 인도하였다. 그는 새 신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신자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2주 내지 3주간씩 연속으로 사경회를 열기도 하였다. 김영옥은 전문적인 훈련을 거친 한국교회 초기 매서와 조사, 그리고 영수와 장로로 초기 한국교회의 뛰어난 평신도 지도자였던 것이다. 3. 영적 지도력을 갖춘 한국 장로교 평신도 리더, 김영옥 조사(助師)는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들이 그들의 고국과는 모든 것이 완전히 다른 이 땅에서 적응해갈 수 있도록 도운 사람들이다. 선교사들은 이들에게 한국어를 배우고, 부동산을 구입할 때 도움을 받았으며,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각 지방으로 순행할 때 큰 도움을 받았다. 만일 어느 누구도 선교사들의 복음사역과 현지 적응을 돕지 않았다면 이렇게 빠른 시간에 이 땅에서 복음의 씨가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여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김영옥은 조사로서 초기 한국교회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었다. 한국선교 초기 많은 조사들이 있었지만 조선장로교사기에 따르면 김영옥은 당시 활동하던 많은 조사 중에서도 영향력 있는 발언권을 가진 조사였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그는 공식적인 회의석상에서 중요한 발언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김영옥은 1903년 9월, 1904년 9월, 1906년 9월 세 차례에 걸쳐 선교사들과 함께 모인 장로교공의회 경성소회 총대 장로로 참석하여 발언하기도 했다. 1906년 9월 회의에서는 “교인으로는 교회를 순종하고 국민으로는 국가에 순종할 방침이란 문제”에 대하여 발언했는데, 이것은 분명한 기독교적 국가관을 가진 김영옥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7명의 한국인 목사가 처음으로 배출되기 전 까지 김영옥은 당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평신도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따라서 당시 활동하던 많은 조사 중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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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의 세계화, 경북도가 앞장선다... 국제심포지엄 및 패션쇼 연다한옥 국제심포지엄 및 패션쇼 참고사진(한복진흥원조감도)=(사진제공 경북도청) 경상북도는 3일(수) 문화역서울 284(RTO관)에서 대한민국 한복 명장을 비롯한 한복전문가, 한복 관련 기관 및 단체, 주한 대사관 관계자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복진흥원 건립 홍보와 활성화를 위한 ‘경상북도 한복문화 홍보 국제심포지엄 및 패션쇼’를 개최한다. 대구한의대 산학협력단 주관으로 열리는 이번 행사는 한복진흥원 건립 현황 및 운영 방향, 한복진흥원의 역할, 민족복식의 아카이브를 통한 세계화 방안 등에 대한 주제발표를 하고 참석자들의 열띤 종합 토론이 이어진다. 심포지엄에 앞서서는 일본과 미얀마 전통의복과 한복 상호 기증식을 가질 예정이며, 기증 받은 일본과 미얀마 전통의복은 향후 한복진흥원 개관시 전시한다. 심포지엄에 이어 열리는 패션쇼에는 ‘민족복식으로 예와 품위를 자아내다’라는 주제로 일본, 미얀마 전통의복과 한복 50여벌의 작품이 참여한다. 특히, 패션쇼에는 미얀마, 키르키즈공화국 등 11개국 주한 대사관 대사, 대사부인 등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돼 외국인들이 한복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경북도는 우수한 전통문화의 재발견과 가치 창출을 문화정책의 핵심과제로 추진하기 위해 안동 삼베, 영주 인견, 영천 천연염색, 상주 명주 등과 연계, 한복산업을 활성화하고 한류의 중심으로서 경북의 위상을 정립해 나갈 계획이다. ※한복진흥원 건립 : 225억원(국비112, 도비34, 상주시 79) ∙ 2015~2019, 부지 19,438㎡, 상주 함창 명주테마공원 일원 ∙ 한복전시홍보관, 한복전수학교, 융합산업관 및 연구원 등 김병삼 경북도 문화관광체육국장은 “한복은 한국의 전통미를 세계에 전달할 수 있는 강력한 문화브랜드로, 한옥․한식과 더불어 한국의 전통문화를 알리는 핵심요소인 만큼 경북이 그 중심에 앞장서서 한(韓)브랜드를 완성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며 한복 관련 기관 및 단체의 많은 관심과 협조를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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