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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7)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7)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임학수 목사 (林鶴洙, 1884-1969) 18. 최고의 한학자(漢學者)가 되다 임학수는 예천군 보문면에 위치한 옥천서원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손녀 임순오 권사는 “할아버지가 1905년 궁내부 주사시험에 급제하여 관료가 되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궁내부 주사는 6품 벼슬이고, 궁내부는 1894년 제1차 갑오개혁 때 신설되어 왕실에 관한 일을 총괄 맡은 관청으로 고종이 근대화와 관련된 사무를 궁내부에 배치시켜 자신이 직접 통제했다. 임학수는 한학을 전공하고 한학에 능한 선비였다. 그런데 임학수는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예수의 제자로 변화되었다. 그는 궁내부 주사의 길을 버리고 십자가의 길을 걸었다. 임학수 목사는 권찬영 선교사의 서기, 조사를 거쳐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일평생 목사의 길을 걸었다. 그는 한문 성경을 늘 지니고 있었으며, 한문을 사용한 한시(漢詩)로 설교했다. 특히 주일 설교 중에 한시를 자주 인용하여 교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다. 임학수 목사는 역사의식을 남기고 간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한시를 조건 없이 써주었고, 특히 상(喪)을 당한 성도에게 한시로 만장을 써서 상가를 위로했다고 한다. 임학수는 한학을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한학을 예수보다 우선하지 않았다. 다만 한학을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였다. 1937년 4월 6일, 안동교회는 역사에 남을 2층 석조 예배당을 준공했다. 그때 임학수 목사가 쓴 한시(漢詩)인 ‘법상동 예배당 건축기(法尙洞禮拜堂建築記)’는 1940년 4월 24일 자 장로회보에 실리기도 했다. 배흥직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임학수 목사는 은퇴 후에도 시간이 나면 한문 공부와 한시를 공부했다고 한다. 손녀 임순오 권사도 조부 임학수 목사 방안에는 한문책이 가득했다고 말 한 적이 있다. 또한, 임학수 목사는 생신날에는 지역의 한학자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점심을 대접하고 식후에는 한시경연대회를 열었다고 한다. 임학수 목사는 비록 평생 목회를 했지만, 한학을 완전히 잊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임학수 목사가 남겨 놓은 또 하나의 유명한 한시가 있다. 그것은 은퇴 이후인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 시절 개최된 전국 한시 백일장 대회에서 최우수작으로 당선된 시이다. 이 백일장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친히 ‘평화통일’이라는 시제(詩題)를 주었고, 임학수 목사가 쓴 한시가 참가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선정됨으로써 전국적으로 유명한 한시 작가가 되었다. 또한, 임학수 목사는 경안노회 경내의 기관이나 교회 이름을 작명(作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안학원, 경안성서학원, 영주의 영광학원, 도원교회 등은 성경과 한문을 결합한 그의 작품으로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들이다. 임학수 목사는 한학자였지만 목회의 길로 들어선 후에는 한학의 길을 걷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장점인 한학을 목회 현장에 도입함으로써 성도들을 위로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히 세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목회의 도구로 사용하였다.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 시절 개최된 전국 한시 백일장 대회에서 최우수작으로 당선된 임학수 목사의 한시. 임학수 목사는 이 시에서 한반도의 허리가 잘린 것을 통탄하고 있다. 모든 것이 옛날과 똑 같은데, 한반도만이 분단되었음을 슬퍼하고 있다. 이 시에서 임학수 목사가 분단된 조국의 평화통일을 정말 그리워했던 지도자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19. 은퇴 후에도 목회를 계속하다 1929년 1월부터 1939년 3월까지 11년 동안 안동교회의 담임으로 섬기다가 사임한 임학수 목사는 영양읍교회, 풍기교회, 창락교회, 풍기 성내교회, 예천읍교회, 예천교회, 예천 상락교회 등 지역의 모 교회, 중심 교회를 섬겼다. 그 후 임학수 목사는 1952년 12월, 고향 땅인 안동으로 돌아왔다. 고향을 떠난 지 14년 만이었다. 당시에는 목사의 시무연령 제한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학수 목사는 예천교회를 끝으로 69세에 현직에서 은퇴하고, 교역자가 시무하지 않는 작은 교회를 위해 남은 인생을 드리기 시작했다. 그에게 있어서 목회는 천직(天職)이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힘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아야 할 사명감에 불타 있었던 것이다. 안동으로 귀향한 임학수 목사는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6·25 전쟁이 끝난 후 안동에는 예배당이 무너지고 담임목사가 없는 교회들이 많이 있었다. 그는 담임교역자가 없는 용상교회, 문수교회, 태화교회 등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임학수 목사는 용상교회는 1952년 12월부터 1953년 12월까지, 문수교회는 1954년부터 1955년 5월까지, 그리고 태화교회는 1955년 6월부터 1962년까지 섬기는 투혼을 발휘했다. 특히 그가 마지막으로 섬긴 교회는 태화교회(지금의 도원교회)로, 그는 72세부터 시작하여 79세까지 마지막까지 목회의 끈을 놓지 않았다. 사실 그는 지역의 중심 교회만 섬긴 것은 아니다. 1925년 1월 7일 개회된 제7회 경안노회에서 목사 임직을 받은 이후 1926년에는 하회교회를, 1927년에는 노회 허락을 받아 옹천·지곡·연당·매정·안흥·녹내·방하 등 7처 교회에서 시무했다. 그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교회라면 교인 수의 다소를 생각하지 않고 교회를 돌보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했다. 그 결과 임 목사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의 장(場)을 어떤 경우에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 섬겼던 것이다. 임학수 목사는 예수님을 영접한 1909년 이후 1962년까지 50여 년 동안 경안노회를 단 한 번도 떠나지 않은 주의 종이다. 동시에 목회자가 없는 작은 교회에서 끝까지 투혼을 발휘하며 평생을 다해 양들을 돌보는 사역에 마지막까지 헌신한 신실한 주의 종임에 틀림이 없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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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박물관, 국보급 문화재 등 2,000여 점 기탁 받는다동양 최고의 농서 『사시찬요』 등 의성김씨 남악종택 소장유물 예천군(군수 김학동)은 21일 의성김씨 남악종택(용문면 구계리 소재)으로부터 조선시대 최초의 금속활자인 계미자(1403~1420년)로 인출된 농서 『사시찬요(四時纂要)』를 비롯한 2,000여 점의 유물을 기탁 받는다고 밝혔다. 의성김씨 남악종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퇴계 이황의 문인인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1541~1591)의 종택이다. 남악선생은 처가인 예천에서 살았던 인물로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전라도어사, 경주교수(慶州敎授), 풍기군수 등을 지냈다. 사후 안동의 사빈서원과 의성 봉산서원에 제향된 인물이다. 이번에 예천박물관으로 기탁되는 유물은 세계에서도 3점만이 남아 있는 국보급 유물인 『사시찬요』를 비롯해 『입학도설』, 『맹자언해』 등 보물급 유물과 『금곡서당창립회문』 등 도지정문화재 5점도 포함하고 있다. 예천박물관은 기탁 자료를 대상으로 훈증, 세척, 실측, 촬영 등 유물등록을 하고 유물 감정평가를 통해 유물보험 등 기탁 자료의 영구보존을 위해 노력하는 등 우수 문화재 상설전시를 통해 지역문화재의 우수성을 알려나갈 계획이다. 김학동 예천군수는 “예천박물관이 군민들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우리의 정신문화를 계승하는 지역문화 거점시설로 거듭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한편, 예천박물관은 신도청시대 군민의 문화적 자긍심을 고취하고 지역문화 융성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2017년 국비를 지원받아 지난해 10월 건축분야에 대한 리모델링 공사를 마무리 하고 올해 12월 재개관을 목표로 현재 유물확보와 전시물 제작설치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예진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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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29일까지 2차 일자리 특별지원 신청코로나19 피해 근로자 챙기기 무급휴직근로자·특수형태근로종사자·프리랜서 등 지원 예천군(군수 김학동)은 코로나19 확산으로 피해를 당한 근로자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2차 지역고용 대응 일자리 특별지원 사업 신청을 오는 29일까지 받는다. 군은 지난 2월 23일부터 3월 31일까지 코로나19로 일을 하지 못한 근로자, 프리랜서 등을 대상으로 1차로 지난 4월 467명에게 2억 5천여만 원을 긴급 지원했다. 이번 2차 사업은 국가 감염병 위기 경보수준 ‘심각’단계(‘20.2.23) 이후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4월 1일부터 4월 30일 기간 중 5일 이상 무급휴직을 한 100인 미만 사업장의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다. 또한, 5일 이상 노무 제공을 하지 못했거나 코로나19 이전 소득보다 25% 이상 감소한 학원·방과후학교 강사, 문화예술 종사자 등 특수형태근로자 및 프리랜서 등도 해당이 된다. 이번 대상 기간은 4월분(4월 1~30일)을 신청받고 있지만 3월분(2월 23일~3월 31일) 미신청자도 소급신청할 수 있다. 가용예산의 범위 내에서 최대 월 50만 원을 지원하며 경북도 재난긴급생활비와 중복 지급 받을 수 있다. 신청 및 접수는 18일부터 29일까지 예천군청 새마을경제과 일자리창출팀 또는 읍‧면행정복지센터 방문 접수가 가능하고 20일부터는 온라인(경북도청 및 예천군청 홈페이지) 접수를 시작해 신청접수 마감일 후 서류검토와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지원금을 신청인 계좌로 지급할 예정이다. 예천군 관계자는 “코로나19 장기화로 지역경제 위기상황에서 피해를 입고 실질적 지원을 받지 못해 사각지대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분이 이번 사업으로 조금이나마 해소가 되길 바라고 지역경제가 한시라도 빨리 회복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예진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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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강문화전시관 15일부터 유료 개관생활 속 거리두기 전환으로 본격적인 운영 들어가 예천군(군수 김학동)이 코로나19 확산으로 임시 휴관했던 강문화전시관(풍양면 삼강리 소재)을 생활 방역체계인 생활 속 거리두기로 전환됨에 따라 생활방역 수칙을 준수하면서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간다. 그동안 무료로 운영 중이었으나 15일부터 유료 관람으로 바뀌었으며 입장료는 소인‧청소년 2천 원, 어른 3천 원이며 예천군민 50%, 단체(10인 이상)는 20% 감면해준다. 만2세 이하 어린이와 장애인, 국가유공자, 다자녀 가정, 풍양면 삼강리 주민 등은 무료다. 관람시간은 하절기(4~10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동절기(11~3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며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과 추석 당일, 12월 31일, 근로자의 날은 휴관한다. 강문화전시관은 사업비 196억 원을 들여 총 연면적 4,874㎡,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지난해 11월 15일 개관하고 전시관 안에 상설전시실과 영상관, 어린이놀이터, 북카페 등 공간으로 구성돼 있으며 옥상에는 낙동강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자리하고 있다. 상설 전시실은 낙동강의 자연과 예천의 역사, 문화, 사람의 다큐멘터리 존(zone)으로 구성돼 있으며 한국과 세계의 강, 예천의 명당과 배출 인물, 국궁 제작과정, 노동요 영상, 회룡포 사계절, 삼강나루터 옛 모습 등 구역마다 다양한 프로그램 연출로 다채로운 볼거리를 제공한다. 영상관은 태백 황지에서 부산 을숙도까지 낙동강 1,300리를 따라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과 강문화의 다양한 모습을 360도 와이드 촬영 영상으로 담아 또 다른 감동을 전해준다. 강문화전시관은 개관이래 누적 관람객이 3만1천여 명으로 삼강나루 캠핑장이 6월 정식개장을 앞둔 가운데 삼강문화단지는 회룡포와 삼강주막을 연결하는 모노레일 설치사업이 마무리되면 지역 관광의 시너지 효과를 높여 가족단위의 체류형 관광지로 거듭날 것으로 기대된다. 이예진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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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코로나19’ 9일 기준 자가격리자 전원 해제예천지역을 긴장 속으로 몰아넣었던 4월 9일부터 추가 발생한 코로나19 확진자(예천7번~예천44번)의 접촉자로 분류됐던 554명의 자가격리가 지난 8일 24시를 기준으로 모두 해제됐다. 이로써 예천군 지역사회가 진정 국면에 접어들어 일생생활을 보장하면서 감염예방 및 차단활동을 함께 전개하는 생활 속 거리두기를 이어가게 됐다. 예천군은 지난 2월 21일 첫 확진자 발생 후 3월 7일까지 6명의 확진자가 발생했다. 이후 32일간 추가 확진 없이 멈추는 듯 했으나 4월 9일 7번째 확진자 발생부터 4월 30일까지 총 37명의 지역사회감염 사례가 연이어 발생해 지역사회를 공포와 불안에 떨게 했다. 지난 달 9일부터 5월 8일까지 2차로 발생했던 확진자 37명 중 19명은 완치되어 퇴원했고 17명은 입원 치료중이지만 안타깝게도 입원 치료 중이던 85세 할머니가 사망하는 안타까운 소식도 있었다. 예천군 방역당국은 철저한 방역 예방소독으로 감염병 전파 경로를 사전에 차단함은 물론 질병관리본부 매뉴얼 보다 더 선제적으로 범위를 확장해서 1,936건 검체검사를 실시했고 강화된 자가격리로 적극 모니터링하면서 대응했다. 김학동 예천군수는 “지역사회를 공포와 불안에 떨게 한 폭풍우는 지나갔으나 아직 코로나19는 끝나지 않았다”며 “그 동안 어려운 상황에도 적극 협조해 주신 군민께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생활 속 거리두기를 철저히 실천해 안전한 예천, 안심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고 협조를 당부했다. 이예진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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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6)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론 1. 임학수, 믿음의 조상이 되다 …………………………… 15. 사경회 강사(講師)로 활동하다 16. 지역의 중심(中心) 교회를 섬기다 17.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지 않다 18. 최고의 한학자(漢學者)가 되다 19. 은퇴 후에도 목회를 계속하다 20. 후학을 위해 매진하다 결론 15. 사경회 강사(講師)로 활동하다 임학수 목사는 안동교회 시무 동안 여러 교회로부터 사경회 강사로 요청을 받았다. 1929년 11월 21일 안동교회 당회는 임학수 목사에 대한 오대교회의 사경회 강사 요청을 허락했다. 또한, 1930년 1월에는 의일교회 사경회 강사로, 1931년 1월 13일부터 18일까지는 아곡교회, 동년 9월 15일부터는 서사교회, 1932년 음력 정월부터 1주일 동안은 춘양교회의 부흥사경회 강사 요청이 있었고 당회는 이를 허락했다. 안동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고 주일학교를 다닌 경안노회 배흥직 공로목사는 “임학수 목사님이 친근감 있는 매력적인 목소리를 갖고 있었고, 그의 음성은 맑고 분명하여 알아듣기 쉬웠다”고 기억한다. 임학수 목사는 설교자가 가져야 할 자질들을 잘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임학수 목사는 전형적인 부흥강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성령 충만했다. 회중들은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웃고, 눈물을 흘렸다. 그는 언변도 뛰어났지만 인품이 그의 설교에 묻어났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학을 전공하고 한학 선생까지 한 그의 지식은 누구보다 성경을 잘 이해하게 했고, 또한 잘 풀어 설교할 능력을 갖추게 했던 것이다. 따라서 임학수 목사는 당시 경안노회 경내의 교회들에게 1주일 가까이 진행된 여러 교회의 사경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말씀의 종으로 사명을 잘 감당했다. 16. 지역의 중심(中心) 교회를 섬기다 일제는 1937년 중국 대륙을 침략했으며,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해 국가를 전시 체제로 바꾸었다. 이러한 시국에서 일제는 지역사회 중심 교회의 담임목사가 자신에게 우호적인 사람이기를 원했을 것이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임학수 목사는 1939년 3월 사임했으며, 경안노회는 5월 15일 안동교회 사임을 허락했다. 안동교회 80년사는 임학수 목사의 사임이 일제 말엽의 기독교 박해에 따른 것으로 적고 있다. 그가 안동교회를 떠날 때 모든 성도는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임학수 목사가 전도, 교육과 봉사로 교회를 부흥시켰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2층 석조 예배당을 건축한 헌신을 성도들은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학수 목사는 여러 지역의 중심 교회를 섬기며 사역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안동교회를 사임한 후 1940년, 임학수 목사는 영양지역의 중심 교회인 영양교회를 섬겼으며, 풍기로 임지를 옮겨 1941년부터 1946년까지 영주의 모교회인 풍기교회(현 풍기성내교회)를 담임했다. 풍기교회를 섬기면서 1년 동안은 예천의 중심 교회인 예천교회를 겸하여 섬겼다. 또 임학수 목사는 1946년 12월부터 예천교회를 섬기면서 1947년 10월부터 3년 6개월 동안 예천 상락교회를 동시에 담임으로 시무했다. 임학수 목사가 예천교회와 상락교회를 왕래하면서 동시에 시무할 수 있었던 이유는, 1938년에 신사참배문제로 평양신학교가 폐교되면서 교역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임학수 목사가 각 지역 중심 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했던 시기는 이처럼 어렵고 힘든 기간이었다. 그러나 일제 말엽, 교회들이 문을 닫아야 하는 위기 속에서 그는 교회를 지키려고 부단히 헌신했다. 또한, 광복과 함께 찾아온 극심한 혼란 속에서 무너진 교회를 세워나가야 할 사명이 그에게 있었다. 예천교회를 섬기던 1947년, 임학수 목사는 미군정 하에서 정부 수립을 위한 예천군 건국준비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사회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예천지역의 치안과 행정을 맡아 그 책임을 잘 감당했다. 그는 국가·사회적 현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행동하는 신앙인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임학수 목사는 일제 말엽과 광복이라는 격변기 속에서도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교회를 지키고 보수(補修)한 신실한 주의 종이었다. 17.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지 않다 일제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기독교를 만들기 위해 1939년 9월 신의주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8회 총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연맹’의 결성을 강요했다. 총회 직후, 각 노회는 지역별 노회지맹을 결성하여 교회의 모든 조직을 국민정신총동원 운동의 추진을 위한 조직으로 탈바꿈시켰다. 경안노회는 1939년 12월 12일, 국민정신총동원 결성식을 강압적으로 가졌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임학수 목사는 1940년 12월 17일, 경안노회장으로 취임했다. 일제는 1940년 12월 경안노회 시에도 궁성요배, 출전 명령과 장사를 위하여 황국서사낭송, 천황페하 만세 삼창을 하고, 국방헌금과 교회 안에 신사(神祠)를 봉안하는 것을 결의하게 했다. 이러한 강압적인 일제의 기독교 탄압정책은 1945년 해방될 때까지 극에 달했다. 손녀인 임순오 권사는 조부인 임 목사가 당시 경안노회장이었기 때문에 일제에 형식적으로 협조했다고 하면서, 8·15 해방을 맞을 때 임학수 목사는 감옥에 있었다고 증언했다. 일제로부터 해방되기 바로 직전 임학수 목사가 감옥에 간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투옥 이유가 일제의 눈 밖에 났기 때문임에는 틀림이 없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신사참배, 황국신민서사 암송, 지원병제도 등과 함께 1940년 2월부터 창씨개명을 시행했다. 그러나 임학수 목사는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당시 일제가 창씨개명을 위해 가한 압박은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비록 일제 말엽 어떤 이유로든 임학수 목사가 일제의 정책에 협력한 것은 분명한 오점이지만,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일제의 강압을 버티며 해방을 맞이했던 것은 뒤늦게라도 올바르게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이 마땅하다. ▲일제는 1940년 2월부터 창씨개명을 시행하고,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학교에 갈 수도 없고 식량 배급도 받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강압 속에서도 애국 인사들은 끝내 이를 거부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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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부족한 일손 농촌인력지원센터에 신청하세요!‘농촌 일손부족 해소&인력 알선’ 일손 부족 농업인과 구직자 간 징검다리 역할 톡톡 예천군(군수 김학동)은 코로나19 여파로 외국인 계절 근로자 입국이 지연되는 등 본격적인 영농기를 앞두고 인력난에 시달리는 농가를 위해 영농 구직자를 이어주는 농촌인력지원센터를 운영한다. 농촌인력지원센터는 코로나19로 다수 발생할 일시적 실업자와 일반 희망자를 사전에 확보하고 일손을 필요로 하는 농가를 연결해 고령화, 부녀화된 농촌의 고질 농가와 구직자들이 안정된 농작업을 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할 계획이다. 영농작업은 연중 일손이 필요하지만 농업의 특성상 특정시기에 일손이 집중적으로 필요로 할 경우 인력을 적기에 지원함으로써 농가의 일손부담을 덜어주고 유휴인력에 일자리를 제공해 징검다리 역할을 톡톡히 할 것으로 보인다. 예천군 관계자는 “코로나19 장기화로 국내외 근로자의 발이 묶이면서 영농기 일손부족이 예상됨에 따라 조기에 농촌인력지원센터를 운영하게 됐으며 농촌의 일손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농업인들의 경쟁력 향상과 소득증대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일손이 부족한 농가와 일자리를 희망하는 군민이라면 누구나 농촌인력지원센터(예천읍 군청길 11, ☎054-652-3252)를 통해 상담과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예진 기자 www.gba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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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불법 주정차 단속 유예 및 택시타기 운동 전개4월 말 까지 한시적 유예, 코로나19 사태로 침체된 지역 경기 활성화에 나서 예천군은 지속적인 경기 불황에 코로나19 사태까지 겹친 상황에서 갈수록 어려워지는 지역 소상공인의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불법 주정차 단속을 한시적으로 4월 말 까지 유예하기로 했다. 이번에 불법 주정차 단속 유예는 무인단속 카메라가 설치된 예천읍 7개소, 도청신도시 호명면 4개소를 대상으로 차량 소통이 원활할 수 있도록 계도 위주로 지도를 강화해 지역 경기 활성화 차원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구체적으로는 예천읍 예천초등학교, 천보당사거리 주변 등 상가, 시장 주변 등 무인단속 카메라 설치 전 구간(7개소) 및 호명면 우방 2차, 호명초등학교 등 전 구간(4개소)에 대해서 4월 30일까지 불법 주정차 단속을 유예할 예정이다. 다만, 4대 불법 주정차 금지구역인 버스정류장, 횡단보도, 소화전, 교차로 모퉁이 등 보행자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예천경찰서와 합동으로 강력하게 단속을 실시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또한, 예천군 공직자들은 코로나19 확산으로 택시 이용객이 급감해 영업률이 10% 미만으로 떨어져 어려움을 겪고 있는 택시운송업계 종사자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공무원 택시타기 운동을 펼친다. 매주 화‧목요일 택시타고 출퇴근하기, 중식시간 식당 방문 시 택시 이용하기 등 택시타기 운동으로 위축된 택시운송업계의 경영난 위기 극복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김학동 군수는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소상공인을 돕기 위해 주정차 단속 유예 및 공무원 택시타기 운동으로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해 지역 상인들의 고충이 조금이나마 해소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예진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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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농산물 수출 날개를 달다!코로나19로 인한 경기 침체 속 적극행정으로 성과 이뤄 예천군은 24일 오전 10시 30분 제2농공단지 소재 해트리푸드(대표 은상진)에서 김학동 군수를 비롯한 신동은 군의장, 송문흠 농협지부장, 우일음료 강평모 사장 등 관계자 1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쌀과 단무지 수출 선적식을 가졌다. 이날 선적되는 예천 농산물은 쌀 36톤과 단무지 76.8톤으로 출향인이 운영하는 부산의 희창물산(대표 권중천)을 통해 미국 뉴욕 시애틀 등 H-마트(회장 권일연)에서 판매될 계획이다. 이번 수출은 코로나19로 세계 경기가 둔화된 가운데 이뤄낸 성과로 그동안 예천군이 민선 7기를 맞아 군정 추진 방향으로 유통활성화를 통한 농가 소득증대를 위해 적극 행정으로 접근해 노력한 결과다. 해외수출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희창물산 권중천 회장과 그의 두 동생인 권중갑 미국 뉴욕 호텔스탠포드 회장, 권일연 미국 H마트 회장의 고향에 대한 각별한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학동 군수는 “코로나19로 농산물 판매가 어려운 가운데도 고향 농산물 수출에 힘써주신 희창물산 권중천 회장님께 감사드리고 쌀과 단무지 수출로 농산물 판매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농가에 판로 안정은 물론 농가 소득에 도움이 될 수 있어 그 의미가 매우 크다”며 관계자들에게 예천농산물의 수출을 대폭 확대해 달라고 당부했다. 한편, 예천군은 희창물산 및 경북통상 등과 긴밀한 협조로 수출 품목과 물량을 늘려 나아가는 한편 수출업체에 포장재, 수출물류비 등을 지원해 수출 확대를 지원할 계획이다. 이예진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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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양파·마늘 의무자조금단체 회원가입 신청접수31일까지 읍‧면행정복지센터 방문 신청 예천군(군수 김학동)은 양파‧마늘 재배 농가를 대상으로 31일까지 자율적 수급 조절을 통해 안정적인 농업경영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의무자조금단체 회원 가입 신청을 받는다. 회원가입 신청자격은 1,000㎡ 이상 양파‧마늘을 생산하는 농업경영체로서(1,000㎡ 미만 농가라도 희망 시 신청가능) 희망자는 읍‧면행정복지센터를 방문해 신청서를 제출하면 된다. 의무자조금 승인을 받으려면 참여 농가 수가 품목 전체 농가 수의 50%를 넘거나 생산량, 재배 면적이 전국 생산량, 재배 면적의 50%가 넘어야 한다. 예천군 양파‧마늘 재배농가는 각각 405호(79ha), 313호(94ha)로 양파‧마늘의 주산지이나 25%의 저조한 가입률을 보여 농가의 적극적인 참여가 무엇보다 필요한 실정이다. 이에 따라 농림식품부 주관으로 경상북도에서 시군 및 읍‧면 담당자 설명회를 마쳤으며 예천군은 별도로 지난 1월 31일 주산지인 풍양면에서 농가의 이해도를 돕고 참여도를 높이기 위해 추가 설명회를 개최한 바 있다. 예천군 관계자는 “최근 양파‧마늘의 수급 불안정이 되풀이되고 있어 이로 인해 농가에서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 의무자조금단체가 설립되어 안정적인 생산과 소비 촉진으로 경쟁력 있는 품목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관내 재배농가들의 적극적인 가입을 부탁하고 이후 주요 채소류도 점차 확대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예진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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