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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애굽기(27)나의 출애굽기(27) 드보라 65. 북송 당했던 집사님의 소식을 듣게 됨 다시 그 집사님에 대해서 듣게 된 것은 남한에 와서였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그날은 특별히 탈북자 강연이 있었다. 같은 탈북자로서 이야기가 쏙쏙 귀에 들어와 집중해서 듣고 있는데 그 탈북자가 감옥에서 만난 어떤 집사님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감옥에서 집사님을 만났는데 원래 어디 살던 사람이고 중국의 어느 동네에 있었다가 북송 당해서 자기와 같은 감옥에 갇혔다고 한참 이야기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아는 바로 그 집사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강연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그 강연하신 탈북자를 만나서 인사를 하고 혹시 그 집사님 성함이 ○○○ 아니냐고 물었다. 그분은 그 이름을 듣더니 눈이 똥그래져서 나를 보며 어떻게 그분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분께 집사님이 어떻게 되셨는지 계속 여쭈었더니 자초지종을 들려주었다. 그 집사님은 감옥 안에서도 복음을 열심히 전하다가 기독교 간첩으로 소문이 나서 결국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셨다고 했다. 너무나 안타까운 소식에 나는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강연하신 분과 나는 한동안 눈물지으며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집사님을 함께 추억했다. 비록 이 글에서도 공개적으로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봉사와 수고를 베푼 집사님이시지만 주님께서는 기억하시고 큰 상급으로 보답하시리라···. 지금도 그분의 사랑을 생각하며 혹시나 살아계실지 모르는 집사님의 안위를 위해 기도한다. 66. 중국 땅에서 백인 선교사님을 만나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나를 영적으로 인도해주셨던 집사님의 북송 소식을 듣고서 나의 마음은 크게 낙심되었다. 그렇게 별 기력 없이 해야 할 일만 하면서 지내고 있는데, 같이 성경공부 하던 한 탈북자 동생이 나에게 북한 출신 엄마를 잃어버린 고아들과 아이들을 돕는 좋은 분이 계신다면서 만나보면 격려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초청을 했는데 오시기로 했던 조선족 선생님뿐 아니라 또 다른 사람이 함께 오셨다. 머리가 노랗고 피부는 하얀데 털이 복슬복슬하고 콧대가 높은 서양 사람이었다. 전에 이런 외국인을 본 일이 없었을 뿐 아니라 북에서부터 서양 사람, 특히 미국 사람은 악한 사람, 승냥이로 배웠던 것이 생각이 나서 너무 무서웠다. 그런데 그 무서운 사람이 나를 보고는 “안녕하십니까?”라고 했다. ‘조선말을 할 줄 알다니···’ 너무 깜짝 놀란 나에게 그분은 “저 나쁜 사람 아닙니다”라고 하며 웃었다. 당황스러웠지만 조선말을 잘하는 것을 보고 나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분들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내 깜짝 놀란 모습이 아니라 식탁 위에 놓여 있었던 성경책이었다고 한다. 그분들은 그 책을 보고 내가 신앙 안에서 더 성장하도록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그분들과 교제하게 되면서 나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분들은 나에게 신앙 교육도 해 주셨을 뿐 아니라 어려운 우리 살림에 보태라고 딸 아이 생활비도 지원해주시고 쌀도 가져다주셨다.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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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애굽기(26)나의 출애굽기(26) 드보라 63. 도시로 나와서 다시 새 삶을 시작함 집에서 나와 집사님 집에 일주일 정도 살았다. 그런데 집사님은 항상 바빴다. 모임도 많고 일도 많았다. 나는 주인 없는 집에 그냥 있기도 미안하고 해서 며칠 머물다가 근처에 아는 동생네 집으로 옮겼다. 다시 인근 도시에 나와서 식당 일자리 구해서 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름 열심히 성경도 읽고 필사도 하고 했지만 진정한 신앙과 믿음을 가지지는 못했던 부끄러운 모습이다. 나 같은 사람을 보살피고 복음으로 양육하려고 애쓰셨던 집사님과 선생님은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그분들의 귀한 희생과 보살핌을 생각하니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동생네 집에서도 한정 없이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다시 집에 돌아가면 계속 분란과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래된 저렴한 집을 세로 빌리고 시작했다. 일해서 번 돈은 그래도 딸아이를 남편이 돌보고 있었기에 집에 생활비도 보내고, 북송 되었을 때 단련대에서 나를 꺼내준 남동생에게도 보냈다. 한참을 그렇게 지내던 중에 중국으로 나온 막내동생을 만나게 되었고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첫째 동생이 감옥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막내동생은 중국으로 나올 때는 한쪽 손이 굽은 장애를 가진 상태였고 형의 죽음에 대한 상처로 분노와 악에 받쳐 있었다. 그렇지만 조선족 선생님의 도움으로 처소에서 생활하면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치유의 기적을 경험하고 다시 북으로 돌아갔다. 이 내용은 지난번에서 이미 언급한 내용이다. 64. 남편이 한국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게 됨 집을 떠나 열심히 돈을 벌며 생활하던 중에 남편이 한국에 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 번호로 전화가 왔는데 남편이 한국에서 건 전화였던 것이다. 남편은 취업 비자로 남한에서 일을 하고 돈을 벌겠다고 했다. 애는 아는 사람한테 돈을 주고 맡겨놓고 갔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 맡긴 집을 찾아서 딸아이를 데리고 새롭게 집을 잡아서 살았다. 이제는 남편이 생활비를 보내주었다. 꼴 보기 싫은 남편이었지만 그래도 뭔가 가정을 위해서 애쓴다는 생각이 들어서 전보다는 잘 연락하고 지내보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분주하게 이곳저곳 이동해가며 지낸 것이 시간이 꽤 흘렀다. 생계를 꾸리기 바쁘다 보니 고마운 집사님과도 제대로 연락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집사님의 남편분을 길에서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했는데 인사를 받아주시는 얼굴이 매우 어두웠다. 무슨 일이 있는가 싶으면서도 집사님 잘 계시냐고 안부를 물었는데 남편분이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다그치니 나지막하게 아내가 북송 당했다고 했다. 천지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 같은 망나니 같은 년에게도 사랑을 베풀고 귀하게 보살펴주시던 집사님이었는데 북송을 당하다니…. 그날 집에 돌아오는 나의 발길은 천근같이 무거웠다. 그 이후로 집사님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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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에서 크리스천들은 왜 박해를 받는가?인도네시아에서 크리스천들은 왜 박해를 받는가? 인도네시아는 최대의 무슬림 인구를 가진 국가이지만 이슬람이 국교는 아니며, 공식적으로 6개 종교(이슬람, 카톨릭, 개신교, 힌두교, 불교, 유교)를 인정하고, 이 공식적인 종교들 사이에서 타종교로의 개종은 불법이 아니다. 그러나 무슬림이 크리스천으로 개종할 경우에는 가족으로부터 박해를 경험한다. 최근 몇 년간 과격파 이슬람 단체들의 영향이 증가하고 있다. 대표적인 단체가 “이슬람수호전선(FPI)”이다. 다음 세대가 점점 더 이슬람주의 관점을 견지하고 급진주의 이슬람 이념에 노출돼 있다. 때문에 크리스천을 향한 사회적 차별과 폭력의 증가가 우려된다. 인도네시아에서 크리스천들의 삶은 어떤가? 개종은 경멸을 당하고 많은 경우 가족들에게 심하게 반대를 받는다. 가족에게서 쫓겨나고 자녀를 빼앗기는 사례들도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개종한 이들이 새 신앙을 숨기고 조용히 사는 편을 택한다. 지난 3년간, 크리스천들은 공개적으로 자신의 종교적 의견을 나누는 것을 매우 조심한다. 이슬람에 반대하는 말로 인식될 경우 신성모독 혐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지역에서 교회는 전도활동에 감시를 받는다. 그들은 필요하면 교회예배를 위협한다. 최근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테러 ◾2020년 11월, 중부 술라웨시 시기(Sigi)에서 IS와 연계된 이슬람 테러단체 무자헤딘(MIT) 무장대원들이 주민들을 집 밖으로 불러내고 4명의 크리스천 살해, 가정집들과 임시교회 건물에 방화. ◾2021년 3월, 남부 술라웨시 마카사르(Makassar)의 카톨릭 성당 밖에서, 예배 직후 자살폭탄테러가 발생, 14명의 크리스천 부상자 발생. ◾2021년 5월, 중부 술라웨시 나푸(Napu)에서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로 4명의 크리스천 피살. ▲2018년 테러를 당했던 교회 중 한 교회의 예배.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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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에서 크리스천들은 왜 박해를 받는가?이집트에서 크리스천들은 왜 박해를 받는가? 대다수가 이슬람인 이슬람 문화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 크리스천들이 박해받는 가장 큰 원인이다. 크리스천들은 2류 국민으로 여겨지며 차별을 받는다. 크리스천들에 대한 증오를 선동하는 근본주의 이슬람인들로 인해 사회적 불관용과 적대감이 고조된다. 이슬람 무장 단체들은 지난 몇 년간 크리스천들을 폭력으로 공격했다. 특히 크리스천들이 교회 건물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으려고 할 때 폭도들의 공격이 많이 일어난다. 경찰과 당국자들은 질서유지를 위해 고발자와 공격자들 편에 서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무슬림들의 광적인 반응이 두려워, 크리스천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고 정의롭게 처리하지 않는다. 이집트에서 크리스천들의 삶은 어떤가? 신성모독 혐의로 고발이 쉽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대부분 크리스천들은 모르는 사람과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삼간다. 개종자들을 향한 사회적 적대감이 매우 높고, 개종의 소문이 나면 폭도들의 폭력을 불러올 수 있다. 특히 시골 지역에서 그렇다. 개종은 가족의 수치로 여겨져 가족으로부터 추방되거나 신앙을 부인하도록 강요받거나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 많은 경우 비밀 신자로 살아간다. “이집트 크리스천들을 위해 기도를!” 이집트에 있는 크리스천들을 위해 함께 기도해주세요. 크리스천들에게 공의가 실현되도록, 그들이 공개적으로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도록, 크리스천들이 가해자들을 용서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또한 예수님께서 극단주의 무슬림들을 만나 주시도록 기도해주세요! ▲WWL2021 박해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년간 이집트에서는 30명 이상의 크리스천들이 죽임을 당했고, 수십 개의 교회 건물, 주택, 사업장들이 공격과 폐쇄를 당했다. 사진은 이집트 카이로의 순교자 기념관.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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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애굽기(25)나의 출애굽기(25) 드보라 61. 유치원 일을 그만 두고 식당에서 일하게 됨 이렇게 한동안 일을 잘하고 있었는데 우연한 계기로 일을 중단하게 되었다. 하루는 원장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원장실 자리에 앉으니 원장선생님은 대뜸 나에게 “북한에서 오셨어요?”라고 물었다. 내 정체가 들키고 말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살던 마을 인근의 사람이 자기 손녀를 데리고 유치원 입학시키러 왔다가 나를 발견하고 원장에게 이야기했던 것이다. 원장선생님은 “탈북자를 불법 고용하면 정부의 제재를 받는다”면서 나에게 출근 못 할 것 같다고 하셨다. 일을 못 해서 해고당하는 거라면 납득을 하겠지만 단지 신분 문제라고 생각하니 억울했다. 유치원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다른 일거리를 찾아야 했다. 나는 식당에서 잡부 일을 시작했다. 조개구이집이었다. 월급을 유치원보다 오히려 많이 줘서 나는 차라리 잘되었다고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편이 말썽이었다. 남편이 밖에서 일하는 나를 믿지 못해서 자꾸 이상한 트집을 잡았다. 조개구이집은 원래 술 먹는 식당이고 남자도 많으니까 남편이 매일같이 의심했다. 일을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오면 “오늘은 누구랑 술 먹었냐?”라며 시비를 걸었다. 심지어는 내가 일하는 식당 근처에 와서 멀리서 나를 감시하기도 했다. 나중에서야 남편의 감시를 알게 된 나는 숨이 턱턱 막혔다. 62. 남편과의 불화··· 집사님 댁으로 다시 옴 살얼음판을 걷는 듯했던 남편과의 관계는 결국 화를 불러오고 말았다. 하루는 남편의 큰조카 부부가 집에 놀러 왔다. 함께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를 같이하고 술을 마셨다. 그런데 술이 들어가자 남편은 조카 부부 앞에서 나를 욕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내가 해명을 해도 나를 못된 여자로 몰아세우고, 또 하필 조카들이 찾아온 그 자리에서 억울하게 욕을 들으니 너무 수치스러웠다. 점점 언성이 높아지고 악다구니를 쓰면서 더 흥분하게 되고 상황이 험악해졌다. 그간 쌓인 억울함이 폭발하면서 술기운에 악이 받혀 나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바퀴벌레약을 입에 털어 넣고 말았다. 조그만 통에 쌀알같이 담긴, 벌레가 나올만한 길목에 뿌리는 약인데 아주 독한 독약에 가까웠다. 그러고는 5분 정도 지났을까? 나는 입에서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희미해진 의식 가운데 조카들은 안절부절못하는데, “내비 둬라, 저거 쇼하는 거다”라고 말하는 남편의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렸다. 남편의 매정한 말이 귀에 들려오자 너무 화가 나서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는 문을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는 무작정 택시를 탔다. 택시 기사 아저씨는 입에 거품을 문 사람이 헝클어진 머리로 택시를 타니 너무 놀라셨다. 택시는 탔지만 내가 갈 만한 곳은 집사님 댁뿐이었다. 택시 타고 집사님 댁에 갔다. 문을 열어주셔서 들어가자마자 나는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눈을 떠보니 내가 아직 안 죽고 살아있었다. 집사님은 나를 안고 울면서 기도하고 계셨다. 집사님은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나를 보고 손가락 넣어서 먹은 것을 토하게 한 뒤 사탕가루 물을 먹여가며 나를 살린 것이다. 정신이 든 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하며 울먹이며 물어보셨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당분간 집사님 댁에 신세를 지기로 했다.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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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애굽기(24)나의 출애굽기(24) 드보라 59. 신앙을 갖게 된 막내 동생··· 북으로 가다 함께 슬퍼하다가 정신이 들었다. 막내에게라도 꼭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막내를 타이르고 예수님을 믿자고 했다. 그렇지만 막내는 형이 죽었는데 이딴 것이 다 무슨 소용이냐며 성질을 내며 행패를 부렸다. 도저히 내가 감당할 수 없어서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했다. 선생님은 막내를 보호 처소로 데리고 갔고 그곳에서 막내는 성경 통독을 하며 지냈다. 당장 머물 곳이 없으니 따라는 갔지만 막내는 여러 문제를 많이 일으켰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신지 억지로나마 통독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치유 역사로 굽었던 팔이 펴지는 기적을 경험했다. 다시 만난 막내는 새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행패를 부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오히려 나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확실하다며 자신의 팔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집사님께 나를 잘 부탁한다며 신신당부를 하고 막내는 북으로 들어갔다. 막내와는 그 후로 한동안 연락을 하다가 연락처가 바뀌면서 소식을 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수년이 지난 최근에 나는 다른 친척을 통해 막내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막내는 그 안에서도 신앙을 잘 이어갔으나, 안타깝게도 모종의 일로 신앙이 발각되어 끌려갔고 그 이후로 소식이 없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은 나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이 아파왔다. 그렇지만 이미 이 땅을 떠났다면 순교자의 영광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셨을 것이고, 혹시나 살아있다면 그 어려운 곳에서도 기도로 이겨내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 땅은 복음을 거부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멈춤 없이 나아가고 있음을 믿으며 나는 오늘도 막내 동생과 고향 땅을 위해 기도한다. 60. 탈북자 집사님의 도움으로 생계를 이어감 우리는 한 주에 한 번씩 탈북자 집사님 집에 모여서 성경공부를 했다. 성경 필사는 집에서 해오는데 한 달에 한 번 걷어서 필사한 장수대로 1원씩 지원을 받았다. 짬짬이 십자수 하는 것도 배웠다. 십자수로 주기도문, 예수님 초상화, 십자가 액세서리 등을 만들어서 가져다 드리면 집사님과 조선족 김 선생님께서 대신 팔아주시고 판 금액을 우리에게 주셨다. 중국 내 탈북자들은 대부분 생활 형편이 매우 열악했고, 나도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집사님과 선생님의 도움이 큰 힘이 되었다. 시내에 나와서도 생계를 위해 부지런히 일했다. 낮에는 유치원에서 아기 보는 일을 했다. 밤에는 야시장에서 설거지와 배달 등 허드렛일을 밤 11시까지 했다. 탈북자 신분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모두 정체를 숨기고 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고된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새벽에 불을 켜놓고 성경 필사를 하고 집안일을 하다가 3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애기 아버지도 농한기 때는 고향에서 나와서 나와 딸이 있는 시내에서 지냈다. 그런데 이 양반은 내가 밤에 성경을 필사하고 있으면 옆에서 불 끄라고 난리였다. 나는 이게 다 가계에 보탬이 되는 거라고 남편을 윽박지르고 계속 성경을 필사했다.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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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키나파소에서 크리스천들은 왜 박해를 받는가?부르키나파소에서 크리스천들은 왜 박해를 받는가? 부르키나파소는 아프리카 사헬지역에서 무슬림이 다수인 국가 중 하나이다. 역사적으로 이 나라는 다양한 종교가 조화롭게 공존해왔고, 2012년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 그러나 2015년 이후로 이슬람 지하디스트들이 사헬지역으로 남하하면서, 이전과 같은 종교적 관용을 잃고 이슬람 인구가 과격화되고 있다. 이슬람 지하디스트들은 마을을 공격하고 반기독교 캠페인을 하고, 일부 지역에서는 크리스천들을 주요 공격 표적으로 삼고 교회문을 닫도록 압박한다. 이들의 공격으로 많은 주민들이 거주지를 떠나 난민이 되고 있다. 2,000개 이상의 학교가 문을 닫았으며, 국내난민의 수는 현재 100만 명이 넘는다. 부르키나파소에서 크리스천들의 삶은 어떤가? 이슬람에서 개종한 크리스천들은 다른 사람과 신앙을 나눌 경우 적대적인 반응에 부딪힌다. 지하디스트들의 공격에 노출된 지역에서는 크리스천의 결혼식이나 명절도 축하하지 않는다. 개종한 크리스천들은 자녀를 기독교신앙으로 양육하기 어렵다. 마을 지도자들과 지하디스트들의 눈에 띄지 않게 보통 구두로 기독교신앙을 전수한다. 많은 지역에서 크리스천들은 항상 표적이 된다. 크리스천이 소수인 지역에서는 크리스천은 지역의 공동자원 이용을 제한당하고 있다. “부르키나파소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부르키나파소 성도들의 안전을 위해, 성도들과 교회가 강건하기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특히,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것이 더욱 심각해진 상황에서, 크리스천 난민들에게 필요한 것들이 공급되기를, 부르키나파소에서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세력의 폭력이 멈추기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부르키나파소에서 크리스천들은 항상 이슬람 민병대로부터 예측불허의 공격을 당할 위험에 처해있다. 그럼에도 교회에 모여 뜨겁게 찬양하고 있는 크리스천들의 모습.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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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에서 크리스천들은 왜 박해를 받는가?에티오피아에서 크리스천들은 왜 박해를 받는가? 에티오피아 정교회(EOC) 신자들은 대개 스스로를 유일한 참된 기독교 교파로 여기며 다른 크리스천들, 특히 복음주의자들을 에티오피아 민족주의와 문화에 대한 하나의 위협으로 여긴다. 에티오피아 북부지방과 중부지방의 인구 대다수가 EOC 신자들이다. 정교회에서 개신교로 개종하면 정교회 신자들로부터 신체적 공격을 당할 수 있고, 가족들에게 외면당한다. 2018년 4월 들어선 새 정부는, 종교적 자유를 제한하던 많은 법을 수정하였고, 많은 긍정적인 민주적 개혁들을 했다. 그러나 시골 지방정부 단위에서는 문제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에티오피아에서 크리스천들의 삶은 어떤가? 이슬람에서의 개종은 조상에 대한 배신이자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금지행위이고 처벌 대상이다.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엄청난 압박을 받는다. 시골에서 특히 심하다. EOC의 중심부인 북부지역에서는, 개신교로 개종하면 공동체에서 추방된다. 대조적으로, 남부지역과 오로미아에서는 개신교가 정상으로 받아들여지고 개종을 해도 박해에 직면하지 않는다. 일부 지역에선 크리스천 자녀들이 괴롭힘이나 공격을 당하며, 지역 사람들이 때때로 어린아이들을 보내어 교회와 크리스천 가정들을 염탐하게 시킨다. “에티오피아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에티오피아 교회와 목회자들은 과격파 이슬람 단체들에 의해 공격당하고, 교회재산이 파괴된 사례들이 많습니다. 또한, 에티오피아의 분쟁 속에서도 가장 큰 피해자는 크리스천들이라고 합니다. 에티오피아의 평화를 위해, 여러 가지 이유에서 박해받는 성도들과 교회, 교회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해주시고 크리스천인 아비 총리의 리더십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2020년 7월에 시작된 여러 도시의 시위에서 많은 크리스천이 사망했다. 사진은 폭력 사태 중 훼손된 성경.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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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에서 크리스천들은 왜 박해를 받는가?시리아에서 크리스천들은 왜 박해를 받는가? 시리아는 이슬람이 국교는 아니지만 헌법에서 대통령은 무슬림이어야 하고, 이슬람법이 입법의 주요근간이 됨을 명시하고 있다. 무슬림 위주의 사회로 수니파 무슬림이 74%이며, 알라위파, 이스마일리와 시아파 무슬림이 13%를 이룬다. 무슬림에서 개종한 크리스천들은 가족과 공동체에 의해 압박을 받는다. 개종은 이들에게 큰 수치이기 때문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이슬람 지도자인 셰이크가 개종한 이들의 처형을 허가할 수 있고, 무슬림이 그들의 재산, 심지어 그들의 여자들까지 빼앗도록 허가할 수 있다. 시리아에서 크리스천들의 삶은 어떤가? 이슬람 반군세력이 지배하는 지역에서는 이슬람에서의 개종은 보통 죽음으로 처벌받는다. 쿠르드족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무슬림들의 개종도 법적으로 허용되지만 가족으로부터의 압박은 있다. 무슬림 출신 크리스천 여성이 기독교 가정의 남성과 결혼하는 것은 거의 불법이다. 종교 간 결혼을 하면 엄청난 사회적 상처를 입는다. 배척과 차별, 박해 심지어 가족에 의한 살해까지 당한다. 시리아 전역, 특히 이슬람 반군들이 장악한 지역에서 크리스천들은 감시를 당한다. 크리스천들은 취업할 때 차별을 당한다. 오픈도어의 ‘중동에 희망을’ 사역 오픈도어는 2013년 이후로 9,108가정을 돕고 100만 개 이상의 식량꾸러미를 어려운 가정들에 전달했다. 2017년 이후로, 시리아 지역교회와 파트너십을 갖고 15개 도시에 40개의 “희망의 센터”를 세웠다. 500채 이상의 주택의 보수되었으며, 1,730개 이상의 수입창출 프로젝트들을 지원했다. 지난 5년간, 평균 15,000가정에 매년 겨울 후원패키지를 전달했다.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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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애굽기(23)나의 출애굽기(23) 드보라 57. 우리를 간섭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알게됨 그렇게 창세기를 지나고 출애굽기에 접어들었다. 출애굽기에서 10가지 재앙 부분을 쓰면서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10가지 재앙이 마치 북한이 당한 것처럼 느껴졌다. ‘아! 이거 우리가 북한에서 경험한 거구나’하고 깜짝 놀랐고, 그러면서 자연과 환경도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하심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북에 있으면서 항상 이런 질문이 있었다. ‘왜 강 사이에 두고 중국은 비가 잘 오고 곡식이 잘되는데 우리는 이 모양인가···.’ 나는 그 답을 출애굽기를 통해서 얻었다. 필사를 하는 와중에 나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마귀에게 막혀서 받지 못했습니다. 북한은 가시와 엉겅퀴만 내는 땅이 되었고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는 아비규환의 땅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완악했으면 그 땅이 이 지경이 되었겠습니까···.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나의 변화는 우리 가족에게도 큰 복이 되었다. 나를 집결소에서 꺼내준 첫째 남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기회가 되는 대로 돈을 보냈다. 그러다가 나중에 동생이 차를 한 대 사달라고 부탁했다. 차를 사면 장사를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껏 돈을 모아서 중고차를 살만한 목돈을 브로커를 통해 보냈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보위부에서 첫째 동생을 잡아갔다는 것이다. 후에 다른 친척을 통해 들으니 그 돈을 보내고 사용하는 와중에 보위부(현 보위성)에 꼬투리가 잡혀서 집결소로 붙잡혔다는 것이다. 58. 남동생의 죽음 ··· 복음을 전하지 못한 후회 돈을 보낸 내 입장에서 맘이 너무 슬프고 불편하고 안타까웠다. 하필 내가 보낸 돈 때문에 동생이 고통받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사님께서는 나에게 동생에게 돈만 보내지 말고 복음을 전했어야 하지 않았겠냐고 이야기해주셨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복음은 전하지 않고 돈만 열심히 보냈던 것이 역효과가 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잡혀서 집결소로 갔던 동생은 4개월 만에 공사 중에 사고를 당해서 결국 거기서 죽었다. 나중에 사망 소식을 듣고 엄청 울었다. 마태복음 4장 4절에 예수님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떡을 보내기에 급급했구나, 영혼을 구할 기회를 놓쳤구나 하는 생각에 너무 괴롭고 미안했다. 첫째 동생이 집결소에 갇히자 막내 동생이 형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막내 동생은 군대 가서 팔을 다쳐 팔을 펴지 못하는 장애인이 되었다. 그 후 막내는 성질이 사납고 술에 찌든 사람이 되었다. 막내는 형을 빼내는 데 실패하고 나서 한참 있다가 중국으로 나왔다. 중국에 나온 막내는 독기가 서려 눈이 벌겋고 옷에 칼을 숨기고 있었다. 혹시나 신변의 위협을 당할까 봐 가지고 왔다고 했다. 나를 만난 막내는 술을 마시면서 통곡을 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역시 돈을 전달한 그 브로커가 문제였다. 그 브로커 때문에 동생을 잃었던 것이다.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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