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우즈베키스탄에서 크리스천들은 왜 박해를 받는가?우즈베키스탄에서 크리스천들은 왜 박해를 받는가? 우즈베키스탄의 주요종교가 이슬람(수니파)이지만, 소련의 계승자인 정부는 철저한 세속주의로서 이슬람도 엄격하게 통제하기 원한다. 따라서 이슬람국가로서 크리스천을 박해하는 것이 아니라 권위주의 정권이 첫 번째 박해요인이다. 등록되지 않은 교회 크리스천들은 반복적인 경찰의 단속과 위협, 체포, 벌금부과를 겪게 된다. 또한, 우즈벡 사람들은 이슬람이 번영했던 과거를 자랑스러워하기에 무슬림 전통을 지키기 원한다. 이슬람에서 개종한 크리스천들은 가족, 친지, 공동체로부터 반대에 직면한다. 우즈베키스탄에서 크리스천들의 삶은 어떤가? 개종 사실을 가족에게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수치와 명예 문화’ 때문에 가족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이 사실을 숨기려고 한다. 러시아정교회 이외의 모든 교회 크리스천들은 지속적으로 정부기관원의 감시를 받는다. 크리스천들은 신앙 관련 이유로 벌금을 받는다. 심지어 스마트폰에 크리스천 노래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벌금 대상이다. 알려진 MBB 성도들은 필수적으로 종종 경찰서에 가야 하고 가서 위협을 당한다. 지역 무슬림공동체는 개신교도들을 전도행위로 고발하고 괴롭힌다. “우즈벡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우즈베키스탄 현 정부의 종교통제와 정책이 등록되지 않은 교회와 MBB까지 모든 크리스천들의 종교적 자유를 확대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올해 2월 폐쇄한 우즈베키스탄 가정교회 3곳이 재개되기를, 폐쇄 위기에 있는 카자흐스탄의 샤니락 교회가 지켜지기를 기도해주시고, 유사한 상황의 모든 중앙아시아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
나의 출애굽기(22)나의 출애굽기(22) 드보라 55. 시내로 나와 살면서 교회 집사님을 만남 중국에 와서 이리저리 알아보니 하나님, 예수님은 교회를 가야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워낙 외진 우리 동네에는 교회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쨌든 시내로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사정이 맞아떨어지면서 나는 아이를 데리고 시내로 나와서 집을 하나 얻었다. 아이 공부시키면서 뒷바라지를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시내에 나와 애를 유치원에 입학시키고 집에 있는데 같은 동네에 살던 중국 친구가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먼저 자녀 교육 때문에 시내에 나와 있던 친구다. 이 친구가 시내에 나와서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면서 나에게 조선족 선생님과 교회 집사님 한 분을 소개해 주었다. 그 선생님과 집사님께서는 처음 보는 나에게 “고생 많이 했죠··· 사랑해요.” 하고 나를 안아주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난생처음 듣는 터라 너무 느낌이 이상했다. ‘생판 남인데 왜 이리 반가워하고 사랑한다 하나’ 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졌다. 특별히 함께 온 집사님은 나중에 알고 보니 탈북자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왠지 남이 아닌 것 같이 친근하고 반가웠다. 선생님은 나에게 성경책을 하나 선물해주었다. 영접기도도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집사님께서 매일 집에 찾아오셨다. 원래 탈북자는 자기가 탈북자인 것을 숨기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지만 이 집사님은 자기 간증을 하고 이야기를 나눠주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내 처지와 비슷한 점이 많아 동질감이 생기고 너무 반가웠다. 집사님과 금세 친해졌고 많은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누었다. 56. 성경필사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 알게됨 집사님은 김일성 이야기도 해주었다. 김일성이 원래 기독교 집안이었고 교회학교도 다녔다는 사실도 알려주셨다.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에 깜짝 놀랐다. 집사님은 김일성이 자신의 권력을 위해 신앙을 버리고 교회를 탄압했다는 이야기를 하시며 우리가 비록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그래도 나와 당신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것은 가족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심이라고 믿는다며 담담하게 이야기를 나누셨다. 눈물이 났다. 단순히 경제봉쇄 때문에, 미제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우상숭배 때문이었구나 하는 것이 깨달아졌다. 그분이 나를 위해 기도해줄 때마다 눈물이 났다. 집사님의 권유로 성경필사를 시작했다. 에스더부터 시작해서 성경을 쓰고 이어서 신약을 썼다. 처음에는 동기부여 해준다고 페이지 1장당 1원씩 줬다. 없는 살림에 1원이 어디냐 싶어서 열심히 글을 썼다. 에스더를 쓰고 신약으로 넘어갔다. 복음서를 보니 수많은 기적이 나왔다. 물이 포도주가 되고 문둥병 낫는 이야기를 쓰면서 나는 솔직히 ‘이게 진짜인가? 가능한가?’ 하면서 필사를 했다. 그렇게 필사를 하다 보니 어느덧 신약을 다 쓰고 창세기로 넘어갔다.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하셨고 사람이 죄로 인해 저주를 받아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전에는 원숭이가 사람 되었다고 배웠는데 전혀 다른 이야기가 새로웠다. 특히 사람이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씀을 보며 ‘아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땅에 파묻는구나!’ 싶었다.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
이란에서 크리스천들은 왜 박해를 받는가?1979년 이란혁명으로 샤 국왕이 축출되고 이란은 이슬람공화국이 되었다. 시아파 이슬람지도자들이 지배하면서 서구의 영향을 금지했고 기독교를 서구가 이란의 이슬람정권을 잠식하려는 시도로 간주했다. 이란의 이슬람정부는 정권을 탄생시킨 1979년 혁명 가치수호를 최우선 목포로 한다. 기독교는 이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진다. 이란인은 나면서부터 무슬림으로 정해져 기독교로 개종하면 배교자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란어(페르시아어)로 이루어지는 모든 기독교 활동은 불법이다. “이란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최근 몇 년간 이란어로 예배를 드리는 거의 모든 교회들이 폐쇄를 당하고 지도자들이 체포되었습니다. 이란의 가정교회를 위해, 지도자들과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신앙생활과 교제를 이어가는 성도들의 보호를 위해 기도해주시고, 투옥 중인 성도들, 특히 무슬림에서 개종한 크리스천(MBB) 투옥자들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
나의 출애굽기(21)나의 출애굽기(21) 드보라 53. 무사히 탈북, 중국땅에 도착하다 용어는 북한식 용어지만 사실상의 헌신기도였다. 당연히 그 당시에는 내가 서원 기도를 드렸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고, 그저 강을 안전하게 건너고 싶다는 바램만 가득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또 일어났다. 군인을 포섭하지도 않았고 그냥 무작정 강을 건넜는데 누구에게도 발각되지 않았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탈북을 한 것이다. 강은 건넜지만 정신이 얼떨떨했다. 내가 진짜 중국에 와 있는 것인지···.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연락을 하기 위해서 강가의 불빛을 따라 어느 집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한껏 사정을 해서 전화를 빌렸다. 중국의 애 아빠한테 전화하기 위해서다. 애가 막 돌이 지났을 때 북송을 당했는데 그 아이는 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내 생각에 애가 잘못될 줄 알았다. 탈북 여성과 결혼한 많은 중국 남자들이 엄마가 북송되거나 도망가면 아이를 방치하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이다. 이 남자도 워낙 무딘 사람이라 아이를 잘 돌보았을지 확신이 없었다. 54. 딸을 찾아서 다시 중국 농촌집에 들어가다 전화기의 신호가 몇 번 울리고···. 다행히 반대편에서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를 통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편이다. 나는 다짜고짜 아이는 잘 있는지부터 물어봤다. 버벅대던 남편은 아이는 잘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다가 상황이 파악되었는지 대뜸 전화기로 욕이 한 바가지가 날아왔다. 이 여편네가 어디 갔다가 인제 연락하느냐며 나를 막 다그쳤다. 사실 남편 입장에서는 애를 옆집에 맡겨놓고 도망갔다가 몇 개월 만에 연락이 왔으니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처음 잡혀서 중국 감옥에 있을 때 곧 석방될 중국 죄수들에게 집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사정 설명과 아기를 잘 돌보아 달라고 연락을 부탁했는데 제대로 연락이 안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전화로는 모든 이야기를 설명할 수 없어서 나 잡혀서 북송되었다가 강 건너왔다고만 설명하고 나 좀 데리러 오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다시 남편을 만나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응답이요 은혜라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지는 못하고 그저 돌아온 것에 기뻐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의 기도를 잊지 않으시고 생각지도 못한 인도하심으로 나를 이끄셨다. 그렇게 다시 탈북하여 중국의 가정으로 돌아온 지 얼마나 지났을까? 시간이 흘러 딸아이가 유치원 갈 나이가 되었다. 그런데 워낙 촌 동네라 딸아이가 갈 유치원이 없었다. 유치원 보내려고 하니 근처 읍이나 도시에 나가야 했다. 한편 나는 개인적으로 심적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강을 건너면서 할머니가 알려준 대로 하나님께 소원을 빌면서 ‘들어주시면 죽을 때까지 하나님 충성하겠습니다’라고 맹세했던 기억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
하나님의 부르심(10)브라더 앤드류 오픈도어 설립자 겨울밤이었다. 나도 나아만처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는 모두 잠들기를 기다렸다. 나는 조용히 침대를 빠져나와 차가운 마룻바닥을 기어서 목욕탕으로 갔다(허리 통증 때문에 걸을 수가 없었다). 목욕탕 문을 걸어 잠그고는 철로 만든 고풍스런 대형 욕조를 쳐다보았다. 여러 명이 들어가도 남을 커다란 욕조였다. 그때 그 욕조는 요단 강이었다. 나는 욕조 옆으로 기어가서는 찬물을 틀었다(나아만이 요단 강에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에 나도 들어가기 싫은 찬물을 틀었다). 나는 욕조에 물을 가득 채우고 안간힘을 써서 차가운 물 속에 몸을 던져 넣었다. 찬물에 몸이 어찌나 놀랐던지 숨이 막힐 뻔했다. 그리고 다시 안간힘을 써서 물 밖으로 나와서는 바닥에 누워 몇 분간 기다렸다. 허리는 끊어질 듯이 팠다. 두 번째로 몸을 담그고 나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세 번, 네 번, 나는 허리 통증과 추위로 의식을 거의 잃을 뻔했다. 피부는 벌써 감각을 잃어버린 듯 차가운 바닥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일곱 번 들어갔다 나와야 했다. 나아만도 일곱 번 몸을 씻기 전에는 병이 낫지 않았다. 어떻게 일곱 번을 왔다 갔다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어쨌든 나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일곱 번을 들락거렸다. 내 몸에 변화가 느껴졌다. 그러나 불행히도 상태가 악화되는 변화였다. 마지막에는 죽는 줄만 알았다. 나는 욕조에 물을 빼고 물기를 깨끗이 닦은 다음 지친 몸을 이끌고 침대로 돌아왔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생각한 일을 완수했기에 육신은 죽을 듯했지만, 마음만은 날듯이 기뻤다. 이튿날 아침 허리 통증은 여전했다. 다음날에도, 그 다음 주에도, 2년 뒤에도 기다리던 변화는 없었다. 모든 과정을 수료하고 학교를 떠나던 날 교장 선생님은 악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앤드류, 자네는 선교사 지원을 할 필요가 없겠네. 여행을 떠나기에는 몸이 너무 약해서 안 되네.” 간단히 말해 내가 선교사후보에서 탈락하는 순간이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싶었다. 내 몸은 파선한 배와 같았다. 내 몸만 놓고 본다면 앤드류는 활동적인 선교사감이 아니라는 해석이 자연스럽게 나오고, 그것은 하나님의 뜻처럼 보였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선교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버리는 게 어떨까? 신체 건강하고 효율적으로 사역을 감당할 사람에게 말이다. 나 같은 처지라면 누구나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안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가라!”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았다. 어떤 말을 들을까? 건강이 사역의 걸림돌이 된다 해도, 그리고 다른 어떤 장애물이 있다 해도 모두 하나님께 맡기고 신뢰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학교 지하실에서 공산주의 잡지를 집어 들고 바르샤바에서 열리는 대회에 관한 기사를 읽는 순간 “가겠습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가야 했다. 그때 그 길이 공산 세계를 종횡무진 누비게 되는 여행길이 되었다.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
나의 출애굽기(20)나의 출애굽기(20) 드보라 51. 동생의 노력으로 집결소에서 출소하게 되다 드디어 그렇게 기다리던 동생이 집결소에 면회를 왔다. 동생은 내가 탈북하기 전에 군대에 갔던지라 이번 만남이 거진 10년 만이었다. 동생은 나를 만나자마자 욕을 한 사발 했다. “당과 수령을 배반하고 부모·형제를 배반했으면 잘 살아야지 이게 무슨 꼴이냐!” “동생아! 미안하다 미안하다…” 나는 동생 볼 면목이 없어서 그저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 모습을 보던 간부는 민망했던지 “야, 그만 욕해라 안 그래도 불쌍한데 뭐 그리 심하게 대하냐?” 하면서 말리다가 자리를 피했다. 그 사람이 자리를 피하자 동생은 그제야 울면서 “아! 누나가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하다”라고 했다. 간수들에게 혹시 잘못 보일까 봐 반가운 마음을 억누르고 그렇게 욕을 했던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동생은 결혼하고 가정을 잘 꾸리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나올 수 있겠는지 애써보겠다고 했다. 그 뒤로도 동생은 자주 면회를 왔고 여기저기 돈도 빌려서 나를 위해 뒷공작을 해주었다. 나의 출소를 위한 노력이 결실을 볼 즈음 동생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누나, 내가 꺼내줄 수 있는데 꺼내주면 중국 갈 거지?” ”아냐, 난 안 간다… 두 번 다시 이런 일 없다.” “약속한 거지? 알았어, 그러면 누나를 꺼내줄게.” 나는 동생을 만난 지 2달 만에 출소할 수 있었다. 52. 북한 땅에 정착을 하지 못하고, 다시 탈북을 시도하다. 동생과 약속한 대로 어떻게 해서든 북에서 살아보려고 마음을 굳게 먹고 나왔다. 그런데 나와 보니 하루도 못 살 것 같았다. 중국에서는 비록 잘 살지는 못해도 하고 싶은 말은 마음대로 했는데 여기는 말도 맘대로 못하고 통행증 없으면 어디 가지도 못했다. 숨 막히는 답답함이 나를 짓눌러왔다. 이전에는 어떻게 지냈는지 모를 정도로 북한은 말 그대로 감옥 그 자체였다. 온 사방의 감시가 느껴졌다. 숨이 막혔다. 나는 언니도 찾고 북에 두고 나갔던 아들딸도 찾아야 했다. 그러나 돈은 1원도 없고 이동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사람을 찾아 “중국 가면 돈을 보내겠으니 내 아들딸 좀 찾아주오….” 하고 주소를 쥐여주고 부탁을 했다. 그런데 돌아온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시어머니와 큰아버지 모두 다 죽었고 우리 아이들은 찾지 못했고, 꽃제비가 되었다는 소식만 들었다고 했다. 가슴이 무너지고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북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진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중국에 놓고 온 갓난아이 생각이 간절했다. 며칠 이렇게 마음을 잡지 못하다가 결심을 했다. 무작정 강을 건너기로 한 것이다. 그 전에 장마당 가서 쥐약을 사 왔다. 혹시 붙잡히면 다시 감옥생활은 도저히 할 수 없겠다 싶어서 잡히면 먹고 죽을 생각으로 사 온 것이다. 그렇게 각오를 하고 강을 건너러 갔다. 깊은 밤, 손에 쥐약을 쥐고 강가에 서서 할머니에게 배운 대로 문구를 외우고 기도 아닌 기도를 했다. “하나님, 건너게 해주시면 죽을 때까지 하나님께 충성하겠습니다.”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
하나님의 부르심(9)브라더 앤드류 오픈도어 설립자 나는 여러 해 동안 심한 요통으로 고통스럽게 지냈다. 1953년 WEC 선교사 훈련 학교에 입학하던 바로 그 해, 내 허리가 ‘나가버렸다’. 척추 디스크였다. 더구나 여러 디스크가 탈장되어 심한 통증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빗질이나 옷을 입는 것조차 고통스러울 때가 있었다. 참을 수 있는 한 버텨봤지만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마루나 거리에 주저앉을 때도 있었다. 곁에 사람이 없는 경우에는 누군가가 나를 발견하고 도와줄 때까지 그대로 누워 있어야 했다. 그리고 업혀서 내 방에 와서는 통증이 가라앉고 다시 힘이 생길 때까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몇 주 동안 침대에만 누워 지낸 적도 있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2년 동안 하루도 통증 없이 편할 날이 없었지만, 내가 맡은 학교 일과 선교 여행 등을 꾸준히 하면서 공부를 해나갔다. 그러나 허리가 아파오기 시작하면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 되고 말았다. 허리만 생각하면 막막했다. 의사들도 수술을 거부했는데 당시에는 디스크 수술에 많은 위험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내 허리에 손을 대고 기름을 붓고 중보기도를 해주었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치유되는 기미는 조금도 나타나지 않았다. 한 번씩 내 소명이 선교사가 아니라 다른 일이 아닐까 의구심에 빠지기도 했다. 나는 허리에 무리가 가지 않는 일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루는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팠다. 그날 우연히 열왕기하 5장에 나오는 군대 장관 나아만의 이야기들 읽었다. 나아만은 히브리인도, 하나님을 믿는 성도도 아니었지만, 엘리사 선지자는 그의 문둥병을 치유해주었다. “하나님, 나아만 같은 이방인도 이렇게 낫게 해주셨다면 하나님의 자녀인 제 병은 확실히 낫게 해주시겠지요?” 나는 나아만의 기사를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생각’했다. 나는 ‘생각’했다는 말을 강조하고 싶다. 하나님께서 특정한 성경 본문을 통해 말씀하실 때 곧바로 깨닫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면서’ 불순종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생각’하며 순종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믿는다. 아무튼, 나는 하나님이 끔찍이도 고통스런 내 병을 치유해주시리라는 강한 믿음이 들었다. 더군다나 나아만과 똑같은 방법으로 낫게 하실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물속에 일곱 번 들어갈 생각을 했다. 성경 말씀을 보면, 엘리사의 사자가 나아만에게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면 병이 나을 거라고 전했다. 나아만은 화가 났다. 요단강은 더러운 강이기 때문이었다. 더러운 강에 뛰어들면 병이 나을 거라는 이야기에 발끈한 것이었다. 게다가 일곱 번을 씻으라니 그런 모욕적인 언사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결국 자존심을 버리고 요단강에 몸을 씻었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하나님은 그의 병을 고쳐주셨다.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
나의 출애굽기(19)나의 출애굽기(19) 드보라 49. 기도의 응답 … 동생을 만나게 되다 ”야, 그 친척 ○○○ 맞아?” “네 맞습니다.” “야 이 간나야, 니 친척 찾았다.”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그 악질 간부가 내 동생을 찾아서 내 소식을 알려준 것이다. 탈출에 실패해서 집결소에 있으면서 다음에는 어디로 끌려갈 것인가 걱정하며 나는 죽었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는데 이렇게 내 동생을 찾았다. 간부에게서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그 할머니 참 용하다.’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보답하고 싶어서 저녁에 받은 옥수수 국수면 절반을 봉지에 싸서 할머니에게 줬다. “야, 니 시킨 대로 했더니 동생 찾았다. 하나님인지 뭔지 참 용하다.” 할머니는 자기 일처럼 너무 기뻐하면서 “잘됐다 잘됐다.”하고 좋아했다. 나는 이렇게 동생을 찾았다. 그렇지만 나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할머니는 북에 남은 가족도 없으니 나갈 희망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자기가 빨리 나갈 것이라고 자주 이야기했다. 가족도 없는 사람이 어찌 나가는지 솔직히 믿지 않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할 일이 일어났다. 50. 할머니와 손자가 집결소에서 모범출소가 되다 그 할머니는 손자와 함께 북송되었는데 그 당시 손자의 나이가 15살이었다. 이 손자가 집결소 간부들의 이쁨을 받아서 할머니도 일도 보내지 않고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던 중에 여름이 끝나가고 날씨가 선선해졌다. 김장철이었다. 집결소에서도 대량으로 김장을 담갔다. 김장을 담그기 위해서는 당연히 배추나 무, 소금 등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북한에는 소금이 귀하고 가격도 상당히 나간다. 그런데 하루는 집결소 간부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 할머니 이름으로 중국 쪽에서 집결소로 자그마치 2톤이나 되는 소금을 선물한 것이다. 덕분에 이 할머니와 손자는 모범출소가 됐다. 가족도 없는 할머니의 안위를 걱정했던 나로서는 정말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할머니 말대로 정말 나보다도 먼저 집결소에서 나가게 된 것이다. 다만 지금도 아쉬운 것은 그 할머니의 이름이나 살았던 지역 등을 여쭙지 못했다. 인제 와서 사람을 찾고 싶어도 도저히 찾을 방법이 없다. 나에게 처음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 기회가 되었던 할머니…. 잘 지내시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던 나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이 감사하고, 또 나에게 기도를 가르쳐줬던 그 할머니의 헌신과 사랑이 생각나며 오늘따라 그 집결소에서 만난 할머니의 모습이 그립다. 아마 지금도 하나님의 공주로서 은혜가 충만한 삶을 살고 계시리라 생각한다.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
하나님의 부르심(8)브라더 앤드류 오픈도어 설립자 목사님은 가벼운 마음으로 공원을 산책했다. 주변을 보니 유럽 여성 두 명도 산책을 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사람을 찾는 듯했다. 얼마 후에 그들과 눈이 마주친 목사님은 두 사람이 찾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서로 다른 곳에 있던 그들을 한자리에 모아주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앙스와 리네는 뜸 들일 사이 없이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그들은 목사님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 뒷좌석에 앉자마자 그들은 옷을 벗기 시작했다! 우리가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당시에는 보안상 성경을 몸에 지녔다가 전달해야 했다. 두 여성은 사람들에게 나눠주려고 옷을 여러 겹 입고 있었고, 속에 성경을 여러 권 숨겨 놓고 있었다. 그래서 할머니처럼 나이가 지긋한 두 여성이 나사로의 뒷좌석에서 몸을 꿈틀대면서 성경을 꺼내고, 여분의 옷을 모두 벗은 것이다. 목사님은 하나님의 인도와 공급에 놀란 나머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목사님은 앙스와 리네를 호텔로 데려다주었고, 두 여성은 호텔에 남아 있는 짐들을 모두 목사님에게 건네주었다. 목사님은 그들에게 감옥에 있을 때 브라더 앤드류라는 네덜란드 사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아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들은 목사님에게 바로 그 사람 때문에 자신들이 쿠바에 왔다고 설명했다. 성령님의 인도로 페레즈 목사님은 용감한 두 선교사를 만나고 흔들리던 신앙이 소생했다. 그는 새 힘을 얻어 목회 현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몇 년 후에 목사님은 쿠바에서 추방되었다. 너무나 많은 영혼을 주께로 인도한다는 죄목으로 말이다! 목사님은 현재 캐나다 토론토에 살면서 스페인교회 공동체를 이끌고 있다. 쿠바를 찾아간 사랑스런 두 네덜란드 여성이 내가 늘 강조하는 원리를 잘 보여준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신앙으로 박해받는 교회를 찾아가면 하나님께서 모든 길을 열어주신다.” 철의 장막(구소련-역주), 죽의 장막(중국-역주), 사탕수수의 장막(쿠바-역주), 폐쇄된 국경, 독재자, 테러리스트를 무론 하고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 무엇이든지 간에, 고통 받고 있는 우리 믿음의 가족을 돌보는 데 걸림돌이 되지 못한다. 실제로 걸림돌이 되는 것은 바로 우리 마음속에 있다. 바로 두려움, 의심, 이기심, 물질주의, 자기만족, 고난을 피하려는 마음, 그리고 수없이 많은 변명이다. 나도 몇 가지 핑계거리가 있었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사역을 하면서 힘든 여행을 그만두고 무엇이 되건 간에 평범한 삶을 시작하고 싶은 핑계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사실 건강 때문에 사역을 거의 접을 뻔한 적도 있었다.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
방글라데시, 코로나19 가운데 더 많은 영혼 구원, 15명 세례식코로나19 팬데믹 가운데 방글라데시 북동부 마을 오픈도어 파트너들은 더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온다고 하며 9월에 15명이 세례를 받은 소식을 전했습니다. 세례를 받은 이들에게는 개인성경이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특히 이들 중 일부는 오픈도어의 성인글자교실에 다니면서 믿음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성경을 선물로 받은 기쁨이 더욱 큽니다. 이제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지 사역자는 올해 2월에도 10명이 세례를 받았고, 또 10명이 세례받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코로나19 봉쇄가 시작되었다고 덧붙였습니다.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use'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8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skin'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9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use'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8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skin'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9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use'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8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skin'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