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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기도(4)브라더 앤드류 오픈도어 설립자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전 세계를 놓고 볼 때 한 사람의 기도가 무슨 일을 하겠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것을 핑계 삼아 기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면, 그 사람의 빛은 어둠 가운데서 더욱 빛나게 될 것이다. 5억 명 중에서 오직 한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대화를 한다면, 나머지 5억 명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코 말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천 근의 논쟁보다 한 근의 경험이 더 무게가 나가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에 관계된 모든 것을 기도한 후에 비로소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양식뿐만 아니라 영양과 힘이 필요한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위해 양식을 구하는 일이다. 우리는 영적, 신체적, 정서적 필요를 가지고 있는 우리의 가족과 친구 그리고 동역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기근과 유행병 또는 홍수와 지진 같은 재난 때문에 고난을 겪고 있는 전 세계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치유, 구조, 식량 공급 등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서 하라고 하시는 일을 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그것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를 “오늘날 나에게”로 바꾸지 마라. 기독교인들은 나의 복만을 구하는 이기적인 기도 습관을 가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복을 받기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 복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내가 이기적인 복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나에게 주실 수도 있다. 때때로 우리는 이기심의 결과를 경험하고서야 교훈을 터득하게 된다. 하나님은 “좋아, 사탕을 주마. 네가 병에 걸리기 원한다면, 병에 걸려야지. 그러면 아마 깨닫게 되겠지”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른다. 불행히도 많은 사람이 깨닫지 못하고, 사탕이 주는 달콤하고 잠시 동안 주는 기쁨에 취해서 치아가 썩게 되고 몸이 뚱뚱해지며 게을러지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사탕을 구하는 습관에 젖게 된다. 하나님은 고개를 저으시면서 말씀하신다. “그것이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안 된다고 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너는 그것을 얻는 결과로 인해 발생하는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이기적인 우리의 기도의 대가는 우리에게나 우리에게 영향을 받아 하나님을 믿게 되는 사람들에게나 거의 항상 두려운 것이다. 우리는 열매도 목적도 없이 효율성 없는 사람을 살게 되며 하나님의 계획이나 목적과는 무관하게 지내게 된다. (오픈도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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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기도(3)브라더 앤드류 오픈도어 설립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이다”(마 6:10)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드릴 때, 당신은 기도가 점점 개인적으로 변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시작하면 오래 지나지 않아서 막연하게 혹은 일반적으로 “추수할 일꾼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의 가족과 이웃과 이 도시를 구원할 수 있도록 나를 사용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는 모험적인 일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우리는 불타는 전선에서 싸우는 이들과 합류하게 될 것이며, 원수의 표적이 될 것이다. 우리를 선지자로 사용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한다면, 우리는 인기를 얻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의를 위하여 조롱당하고, 욕을 먹고, 핍박을 받을 것이다. 성경의 어느 선지자도 자기 동네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거나 인정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역사를 만들었다. 그것은 그들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권위를 입었기 때문이다. 지역 교회는 신병을 모집하여 기본적인 훈련을 시키며, 일선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후원과 보급을 하는 기지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오락, 사회활동, 자기 계발, 또는 거대한 건물을 지키는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교회의 모습이 이와 같다. 큰 교회 중에 어떤 교회는 사회와 세상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교회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고, 자신을 ‘괜찮은 사람’으로 여기며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을 뽐내기 원하는 사람들의 호화 전시장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힘쓰고 열심을 내는 대신 교회 공동체의 세속적 행복을 추구하는 일에 열중하는 것이다. 그들은 끝없이 유명 인사와 재미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여서 기분전환과 극적인 것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충족시켜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마취되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고통을 느낄 수가 없게 된다. 나는 이런 교회를 많이 보았다. 그들 가운데 설교도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본 것 때문에 놀랐고 슬펐다. 신자들은 음악에 발을 맞추기 바쁘고 무대 위 연기자의 공연에 정신이 팔려 있다. 목사는 새 신자의 수를 세는 것과 교회 건물을 더 크고 으리으리하게 건축하여 일요일에는 그것을 감상하며 즐기는 일에 힘을 다 쓴다. 이로 인해 교회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고통당하며 죽어가는 소리를 듣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모습은 우리가 인간의 영혼을 구하려는 전투에서 패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진지하게 기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이제 알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알고 있는 모든 일을 살펴보고 그 일이 일어나기를 기도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오픈도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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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기도(2)브라더 앤드류 오픈도어 설립자 “이름이 거룩히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마 6:9~10) 우리가 “하늘에 계신”이라고 기도하며,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말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말하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심오한 말이며 기도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기도에는 불완전하고, 병들고, 불구가 되고, 죄 있는 모든 것 속에 변화가 일어나기를 구하는 뜻이 포함된다. 이 구절에 기초하여 우리는 이 사람, 이 상황, 이 나라, 이 부족, 이 교회, 이 정부가 변화되어, 정의와 의와 온전한 마음과 몸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이 근본 방침인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도록 기도할 수 있다. 여기에는 또한 기독교 교육,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 수호, 무죄한 자에 대한 보호, 성경 반입과 세상의 모든 어두운 구석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선교사의 입국을 위한 국경 개방과 같은 하나님 나라의 여러 가지 요소를 위한 기도도 포함된다. 여전히 공산주의의 지배를 받는 나라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를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오픈도어선교회 기도 동역자들은 이러한 기도를, 1989년 12월 14일, 그러니까 차우체스크 정부를 무너뜨린 루마니아 의거가 일어나기 정확히 사흘 전에 시작했다. 그 날짜의 주간 기도 제목은 다음과 같다. “어려운 상황에 있는 루마니아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또한 이 나라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를 위해 기도하자.” 같은 날 우리는 기도 동역자들에게 “아직 소련 감옥에 갇혀 있는 몇몇 그리스도인의 석방을 위하여” 기도를 요청했다. 하나님은 두 기도 모두 하룻밤 사이에 응답하셨다. 전 세계의 수 없이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것을 위해 기도했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우리가 모두 꿈도 꾸지 못한 방식의 응답이었다. 이것을 보고 우리는, 악랄하고 압제적인 정권이 사람들을 인질로 잡은 모든 곳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를, 더욱 담대하고 권위 있게 기도해야 한다. 이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에 대해 살펴보자.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반대나 도전을 받지 않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대단한 기도이며 대단한 과업이 아닌가! 이 세상이 가고 있는 방향에 완전히 역행하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아는 구원받지 않은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를 기도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할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려 주실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뜻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막16:15)하는 것임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모든 미전도 지역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이웃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다. 의로움 또한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과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불의를 생각할 수 있다. 우리 모두 안에는 불의가 대단히 많이 있다. 우리의 불의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조처를 하고 있는가? (오픈도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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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애굽기(12)나의 출애굽기(12) 드보라 32. 술, 마작, 부부 싸움… 나는 다시 시골로 돌아왔다. 남편은 방황하는 내 모습을 보고, 특히 돈 벌겠다고 가출했다가 돌아온 나를 보고 걱정되었는지 술만 마시지 말고 밖에서 사람들하고 어울리라고 돈을 조금 쥐여주었다. 그렇지만 시골 마을에 사람들이 어울려 놀만한 거리가 별달리 있었겠는가? 그저 모이면 마작을 치는 것이었다. 나도 자연스럽게 마작에 재미를 붙였다. 마작하면서 돈을 잃으면 분해서 돈을 빌려서 또 하고 또 잃고 그랬다. 그렇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마작을 하고 있으면 남편은 나를 잡으러 왔다. 나는 괜히 집에 가서 또 남편과 싸웠다.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33. 위성 TV로 한국 드라마를 보다. 그렇게 하루하루 보내던 때에 우리가 자주 마작을 하던 집에 한국 위성 TV가 들어왔다. 그 집에서 마작을 놀다가 한국 드라마가 나오는 것을 봤다. 그전에도 한국 드라마가 방송이 안 된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중국어 더빙이 된 방송이었다. 그렇지만 그 집의 드라마는 한국말로 방송이 나오기 때문에 너무 집중되고 몰입이 되었다. 드라마에 빠지기 시작하자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남한이 너무 부럽고 멋있었다. 북에서 알던 그런 곳이 아니었다. 특별히 한국 남자는 남조선 괴뢰도당을 따라 포악하고 악랄한 줄로만 알았는데 드라마에서 한국 남자는 정말 보들보들했다. 여자들을 많이 배려해주고 말도 예쁘게 하고…. 드라마를 보다가 내 처지를 생각하면 기가 막혔다. ‘같은 여자로 태어났는데 누구는 이렇게 고생하고 누구는 저렇게 대우받는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드라마를 열심히 보다 보니 문득 나도 저런 이층집에서 잘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34. 북한 가족과 연락이 닿다. 그즈음 우리는 딸을 낳았다. 이 시골에는 학교도 제대로 없기 때문에 자식 핑계로라도 나중에 시골을 탈출할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우연찮게 이전에 거래하던 대방하고 연락되었다. 애가 막 2개월 되었을 때였다.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을 통해 북한의 가족까지 찾을 수 있었다. 대방에게 돈을 받지 못했던 형부는 결국 망하고 집은 이사를 해야만 했지만, 다행히 감옥까지는 가지 않고 다른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했다.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 가족들에게 송금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가족과의 연결점을 찾았으니 정말 기쁜 일이지만 그 일로 남편과 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싸우기가 일쑤였다. 나는 조금이라도 북의 가족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송금하려고 했고 남편은 돈이 없다고 막았다. 나는 속상해서 남편이 미웠고 가난한 집구석이 싫었다. 그 사이 우리 시골에도 단속의 손길이 뻗쳐왔다. 하루는 밤에 공안이 와서 아기가 없는 탈북자 2명을 잡아갔다. 너무 놀라고 무서웠다. ‘시내로 가면 안전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에서는 종종 대대적으로 탈북자를 잡으러 다니는 시기가 있다. 그럴 때는 시내의 남편 친척 집에 숨어있기도 했다. (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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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애굽기(11)나의 출애굽기(11) 드보라 29.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나가다. 그렇게 술에 취하고 남편과 싸우며 이렇게는 못 살겠다 싶었던 어느 봄이었다. 도시 사람들이 농촌 일손을 도와주며 일당을 벌려고 우리 동네를 찾아왔다. 그 사람들은 당시 20대 후반의 나이에 탈북자로 시골에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젊은 사람이 이렇게 외지고 어려운데 사느냐?”하며 안타까워했다. 시골은 항상 돈이 없었다. 그분들 중 한 분이 도시 나가면 돈 버는 데 많다며 내 연락처를 받아갔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는 전화를 받고는 무작정 짐을 싸서 도시로 출발했다. 30. 북경에 가서 마사지 일을 시작하다. 어렵게 이동해서 그 사람을 만났다. 처음에 그 사람은 대뜸 나에게 한국 가자고 했다. 나는 안기부 사람인가 싶어서 절대로 안 간다고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나에게 돈을 벌도록 도와줄 사람이라며 어떤 이상한 남자를 소개하더니 그 사람과 함께 나를 북경으로 보냈다. 북경에서 어떤 큰 건물 지하로 들어갔다. 으쓱하고 색깔이 뻘건 불이 많은 그곳은 사람들이 샤워도 하고 안마도 하는 그런 곳이었다. 다행히 사장은 연변 사람이라 조선말을 했다. 사장은 나에게 마사지를 배우라고 했다. 그곳에는 오후만 되면 엄청 예쁜 대학생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애들이 단체로 와서 마사지했다. 홀 같은데 남자들이 흰 가운을 입고 누워 있으면 그 아이들이 마사지하는 것이었다. 사장은 그중 어떤 여자한테 나에게 마사지를 가르치라고 맡겼다. 나는 마사지를 배워서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마사지에 전혀 소질이 없었다. 나는 열심히 주무르는데 남자가 아파하기 일쑤였다. 더는 못하겠다 싶어서 사정했더니, 사장은 다른 일을 소개해 주었다. 어느 공안의 집에 어머니를 모시는데 가정부를 하라는 것이다. 공안이라니… 당장 나를 잡아갈 수도 있는 사람 집에서 어떻게 가정부를 하라는 건지 눈앞이 캄캄했다. 그래서 안 하겠다고 하고 다시 나와 보니 또 마사지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31. 일을 접고 다시 시골로 돌아오다. 가슴이 답답하고 암담했다. 그러면서 괜히 감정이 북받쳐서 그냥 다시 집에 보내달라고 사무실에서 울기 시작했다. 한참을 울었더니 사장이 나를 데리고 기차를 태워서 다시 연길로 보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정말 아찔한 일이었다. 그 사람이 나를 다른 험한 곳으로 팔아먹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기차표까지 사주고 나를 보냈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도 큰 손해였을 것이다. 게다가 북경까지 왔다 갔다 한 것 자체가 사실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나중에 동네에서 친하게 지내던 예쁘장한 중국 언니에게 그 이야기를 하자 나에게 대뜸 “기차 칸에서 차표 검열 안 하디?”하고 물었다. 신분증 검사를 못해도 2번은 하는데 너는 어떻게 피했느냐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정신이 아찔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주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 외에는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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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애굽기(10)나의 출애굽기(10) 드보라 26. 낯선 생활… 술을 마시기 시작하다. 새롭게 남편 된 사람은 내가 왔다고 동네 사람들을 다 불러 동네잔치를 했다. 나는 이 상황이 너무 황망하고 창피해서 구석에 쭈그려 앉아있었다. 잔치가 끝날 때쯤 그렇게 쭈그리고 있는 나를 남편의 형님과 시어머니께서 오셔서 일으켰다. 나는 나도 모르게 감정이 복받쳐서 그분을 붙잡고 울기 시작했다. 다짜고짜 나 좀 보내 달라고 울었다. 남편이라는 사람은 나를 끌어안아 주면서 앞으로 잘 해주겠다고 하는데, 죽은 남편 얼굴과 비교되면서 이 아바이 같은 사람과 어찌 살지 갑갑하기만 했다. 나를 돈을 주고 사 오기는 했지만, 그 사람은 성품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는 왜 마음이 없는 사람하고 살아야 하는지 원통하기만 했다.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맑은 정신으로는 도저히 못 자서 술을 따라 마셨다. 그렇게 항상 취해있었다. 27. 시어머니 병시중을 들며 위로받다. 나는 그 집의 막내며느리였다. 시어머니는 몸이 불편해서 대소변도 누군가 받아드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나의 몫이었다. 나는 맘에 없는 그곳 생활 중에 시어머니를 많이 의지해서 그랬는지 대소변을 받아내는 것이 할만 했다. 나는 시어머니를 ‘할매 할매’ 하고 부르면서 내 이야기도 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시어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불쌍한 것, 너는 뭔 죄를 지었다고 이리 기구한 인생을 사느냐?” 하시며 안타까워하셨다. 시어머니를 통해 조금이나마 마음에 위로를 얻었다. 당시 그 집 맏시형은 촌의 촌장이었는데 통나무를 배어 팔다가 법에 걸려서 감옥 생활을 했다. 몇 년 후 감옥에서 나온 시형은 어머니는 맏아들이랑 같이 있어야 한다고 시어머니를 모셔가려고 했다. 시어머니는 안 가겠다고 하셨지만 맏시형은 마을 주민들이 욕한다고 억지로 어머니를 데리고 갔다. 28. 남편과 불화가 시작되다. 시어머니께서 큰 집으로 가시자 남편의 태도가 변했다. 그전에는 내가 술을 많이 먹어도 화를 내려다가 참더니 이제는 술을 먹고 오면 크게 화를 내고 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전에는 어머니 눈치를 보며 자제하던 것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나도 지지 않고 같이 화를 내고 싸웠다. 술도 계속 마셨다. 혼자서도 마시고 그루빠 사람들이 모이면 거기 가서 또 실컷 밤새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면서 현실을 잊고, 또 사람들에게 하소연하고 동정도 받고 또 술을 마셨다. (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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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애굽기(9)나의 출애굽기(9) 드보라 23. 중국에서 사기를 당하다. 위험을 무릅쓰고 강을 건넌 나는 우리와 일을 했던 대방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브로커를 통해 무역 대방의 친척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와 거래하던 대방이 중국 내에서 불법 활동으로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내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당장 대금을 받을 방도가 요원해졌기 때문이다. 대방의 친척 집에 잠시 머물면서 방도를 궁리해 보았다. 당장 급한 대로 돈을 마련해야 했다. 마침 강을 건널 때 혹시나 해서 집어 들고 온 약간의 골동품들이 있었다. 골동품을 살 사람이 연결되어 물건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진품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물건을 가지고 가서 1주일 뒤에 온다고 하더니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사기를 당한 것이다. 상황은 더 악화되기만 했다. 24. 중국에서 인신매매를 당하다. 머물던 집에서 공안의 단속이 심해서 위험하니 좀 더 내륙으로 들어가라고 권했다. 별다른 대안이 없었던지라 나는 택시기사를 소개받고 내륙으로 들어갔다. 가는 도중에 검문소가 곳곳에 있었고, 택시기사의 도움으로 검문을 피해 겨우 어느 마을에 도착했는데, 그 아저씨는 이름 모를 낯선 집에 나를 소개해주고는 자기 갈 길을 가버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집은 인신매매하는 집이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같이 주름 많은 얼굴에 키도 조그만 남자 한 사람이 그 집에 와서는 나를 데리고 갔다. 그때까지도 나는 북에서 인신매매라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었다. 그 할아버지같이 생긴 나이 든 남자는 나를 데리고 근처의 자기 누나 집으로 갔다. 거기서 3일 밤을 있었다. 도대체 뭔 일인가 싶어 보니 그 사람이 나의 남편 될 사람이라며 함께 살게 되었다고 했다. 25. 낯선 남자에게 팔려가 시골에서 살게 되다. 갑자기 맘에도 없는 남자와 함께 살아야 한다니 기가 막 힐 노릇이지만 사실 그때까지도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당장 인신매매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북으로 돈을 송금할 수 있을까였다. 만약 내가 중국에서 자리 잡고 여기서 물건을 떼어 북의 가족들에게 보내는 식으로 장사하게 되면 이번에 망가진 거래로 인한 대금을 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렇지만 그 남자는 지금 내가 돌아다니다가 잡혀가면 끝장이라며 지금 가는 곳은 농촌이라 외진 곳이지만 안전하다고 했다. 그 사람은 나를 데리고 더 깊은 시골로 갔다. 그곳은 얼마나 외진 곳이던지 눈에 보이는 것은 산밖에 없었고, 그 사람의 집은 북한에도 보기 힘들 정도의 허름한 낡은 시골집이었다. 장사 같은 것은 당연히 꿈도 꾸지 못할 곳이었다. (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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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애굽기(8)나의 출애굽기(8) 드보라 20. 자동차 사고에서 극적으로 살아나다 언니네를 기차로 가려니 한 달 넘게 걸릴 것 같아서 자동차를 얻어서 탔다. 담배 한 통을 뇌물로 찔러주고 짐을 가득 실은 써비차 위에 앉아서 갔다. 그렇게 길을 얼마나 갔을까…. 외진 길에 차가 가는데 갑자기 짐들이 한쪽으로 서서히 넘어가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어… 어 넘어간다.”하면서 막 뛰어내렸다. 그렇지만 나는 몸이 둔해서 미처 피하지 못하고 짐과 함께 넘어가 버렸고, 뒤집힌 차 아래 깔렸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었던 아찔한 상황이었는데 다행히 다리만 차에 깔려서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 사고로 2명이나 죽었다. 경찰은 그 운전수를 잡아가고 나머지는 버리고 갔다. 우리는 비를 맞다가 다른 차를 얻어 타고 길을 이어갔다. 나는 먼저 친정엄마네를 갔다. 남편이 죽었다는 말에 부모님은 안타까워하면서 나를 집에서 쉬게 하셨다. 내가 친정에 있는 동안 아버지는 나에게 재혼을 권하셨다. 초소에서 일하는 홀아비 군인을 소개해 주시겠다고 했다. 나는 그래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다. 신랑이 사망한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재혼을 생각하겠느냐며 펄쩍 뛰었다. 그렇게 재혼 건으로 부모님과 다투다가 나는 너무 화가 나서 집을 뛰쳐나왔다. 21. 언니네 집에서 일을 시작하다 나는 이어서 언니네를 찾아갔다. 언니는 나를 마땅치 않게 생각했지만 내가 혼자되었다는 소리를 듣자 그래도 가족의 정으로 동생 살 궁리를 함께 해주었다. 그 당시 형부는 외화벌이 사업소에서 일했기 때문에 그 어려운 시대에도 먹고 살 수 있었다. 나는 나중에 안정되면 아이들을 데리고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일단 형부의 일을 도우면서 지냈다. 형부네 업체는 일이 참 많았다. 비록 남들에 비해 형편은 좋아 보였지만 형부도 수익을 내고 배정된 돈을 상납해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큰 부담에 시달렸다. 우리가 하는 일은 중고 물품 여러 개를 가져다 재조립해서 완제품으로 만들어 중국에 파는 일이었다. 수지가 잘 안 맞아서 물건 사이에 골동품도 끼워서 팔기도 했다. 그렇게 1년을 지냈다. 나름 일에 적응했다 생각하는 와중에 일이 터졌다. 우리와 거래하던 중국 대방이 갑자기 연락 두절이 되어서 물건의 대금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당장 당자금 입금일이 다가오는데 만약에 입금을 못 하게 된다면 큰 봉변을 겪을 것이다. 그렇지만 북한 안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22. 형부 일을 해결하기 위해 중국으로 탈북하다 다들 고민하고 발만 동동 굴리는 데 나라도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형부에게 중국에 잠깐 가서 거래했던 대방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형부는 “미쳤냐. 여자 혼자 어딜 가냐!”며 펄쩍 뛰었다. 그렇지만 며칠이 더 지나고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형부도 마지못해 허락했다. 그렇게 나는 탈북 아닌 탈북을 했다. 당면한 일만 제때 처리하고 오겠다고 넘어간 것이 그렇게 긴 여정이 될 줄을 당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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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18년째 기독교 박해지수 1위북한의 기독교 박해가 여전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오픈도어선교회는 지난 16일 서울 사랑의교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019 세계 기독교 박해 보고서’(World Watch List)를 발표했다. 북한은 18년째 연속 기독교 박해 국가 부동의 1위다. 다니엘 간사(북한)는 “최근 남북관계 진전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20~40만 명가량의 기독교인들의 생활은 여전히 통제돼 있다”며 “특히 북중 접경지역의 북한사역 선교사들과 탈북자들의 상황이 더 위험해지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의 뒤를 이은 국가는 아프가니스탄, 소말리아, 리비아, 파키스탄 순이었다. 특히 중국이 지난해 43위에서 올해 27위로 순위가 급등해 주목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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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애굽기(7)나의 출애굽기(7) 드보라 18.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나는 너무나 원통했다. 빨리 병원에라도 데려왔으면 살았을 텐데 하는 원망과 후회, 안타까움이 내 마음을 휘저었다. 의사 선생님은 죽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큰 침으로 남편의 발바닥을 찔렀다. 전혀 반응이 없었다. 의사 선생님은 남편이 죽은 지 이미 1시간 가까이 지났다고 했다. 남편이 이렇게 죽다니… 너무 허망했다. 근처에 있는 셋째 시형네서 남편의 장례를 치렀다. 장례를 치르자 아이들 생각이 났다. 아이들은 넷째 시형 집에 놓고 왔다. 갈 때만 해도 잠깐 병원 간다고 나왔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마음이 미어지는 듯했다. 넷째 형님네를 와 보니 시어머니는 이미 드러누우셨다. 시어머니도 30대 때 과부가 되어 남편 없이 자식들을 키웠기에 며느리 된 나의 아픔을 잘 아시고 걱정하고 불쌍하게 여기셨다. 그동안 내가 시댁을 잘 섬긴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시고 이제 내가 남이 된다는 데 안타까워하셨다. 우리는 시어머니와 함께 다섯째 시형 댁에 머물렀다. 다섯째 시형은 하도 술 먹고 부인을 패서 형님께서 그만 도망가버리셨다. 나를 중매해주셨던 형님이셨는데… 그래서 시어머니가 아들을 챙기신다고 그 집에 들어가셨고, 시어머니를 따라 우리 남은 가족도 자연스럽게 그 집에 살게 되었다. 삶은 여전히 고달팠다. 그 와중에 다섯째 시형은 제 버릇 못 고치고 술만 먹으면 아내 대신 엄마를 핍박했다. 19. 장사를 시작하다 살기 힘든 시기에 뭐라도 해서 먹고 살아야 했기에 다시 장사를 시작했다. 신랑도 없으니 거주지역도 옮겨야 하겠고 또 장사 거리도 얻어야겠다는 생각에 여행을 계획했다. 원래 집이 있던 마을에 가서 일을 처리하고, 그다음에는 언니네 집에 가서 도와달라 부탁을 해서 생선이라도 한 배낭 사서 팔면 옥수수 몇 킬로 살 수 있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시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시어머니께서는 내가 떠나는 것이 못내 불안하신지 한사코 말리셨지만, 가만히 있다고 생계를 해결할 뾰족한 수가 없어 보였다. 말리시던 시어머니께서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할 수 없이 내가 가는 것을 허락해주셨다. 길을 가려는데 다른 때는 할머니와 잘 있던 우리 애들이 그날따라 이상하게 내가 나가는 길에 졸졸 따라 나왔다. 그리고는 계속 “엄마 한 달이면 오지” 하고 물어보았다. 한 달 뒤에 꼭 오겠노라며 약속하고 길을 가다가 집을 돌아보는데 아이는 계속 길에 서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날 이후 나는 아이들의 모습을 예정보다 훨씬 오랫동안 보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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