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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출발 합시다!이정우 목사 안동서부교회 2020년 희망찬 새해를 맞았습니다. 1000년대에서 2000년대 새로운 밀레니엄(Millennium)을 맞이할 때의 감격이 엊그제 같은데 그 후 20년이 흘렀습니다. 바라기는 2020년을 맞이하며 또 다른 설레임과 희망을 간직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새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경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들임을 뜻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얽매이거나 미련을 두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야 할 사람입니다. 새로운 사람은 새롭게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기보다는 변질되고, 퇴색되고, 힘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신앙인들의 삶은 해가 바뀐다고 새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의 능력을 힘입을 때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 능력은 말씀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 100주년을 맞이했던 한국교회는 곳곳에서 종교개혁 정신을 외쳤습니다. “Ad Fontes(아드 폰테스)” 즉, “본질로 돌아가자”였습니다. 이것은 핵심의 회복을 말합니다. 신앙인의 핵심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바로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기본을 다시 붙잡는 사람이 다시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올해는 특별히 찬양과 말씀으로 한 해를 활짝 열어나갑시다. 말씀의 조명 아래서 우리 삶의 먹구름은 사라질 것입니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다시 회복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우렁찬 찬양은 곡조 있는 기도가 되어 믿음의 승리를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0년은 찬양과 말씀과 기도로 새 희망을 노래합시다. 말씀으로 승리하고 찬양으로 영광 돌리는 모든 교회 공동체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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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촛불이정우 목사 안동서부교회 대림절(Advent)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심을 기다리며, 정결한 마음과 경건한 생활로 자신의 삶을 닦아 가장 경건하고 정결한 모습으로 주님을 맞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대림절의 색깔은 보라색입니다. 보라색은 설레임과 동시에 겸손과 근신을 상징합니다. 2019년 12월 1일은 대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교회력은 대림절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때 교회와 각 가정과 직장, 사업 터와 공공장소에 성탄절 장식을 해서 내년 1월 6일(주현절-동방박사가 경배한 날)까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합니다. 대림절 기간의 첫 번째 주일은 희망의 촛불(보라색)을, 두 번째 주는 평화의 촛불(연보라색)을, 세 번째 주일에는 기쁨의 촛불(분홍색)을, 네 번째 주일은 사랑의 촛불(흰색)을 켭니다. 성탄절에는 그리스도의 촛불(가운데 흰색)을 켜면서 대속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며 경배합니다. 초의 색깔이 차츰 밝은 색으로 바뀌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오심을 상징합니다. 평화의 왕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우리나라와 남북 관계를 넘어 온 세계가 평화의 촛불도 켜는 2019년도의 성탄절이 되길 소망해 봅니다. 시성 괴테는 “평화는 인류 최고의 이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원자탄을 만들었던 로버트 오펜하이머 박사가 미국 의회에 출두하여 의원들로부터 질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 한 젊은 의원이 “이 무기의 가공할 파괴력을 예방할 수 있는 길이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오펜하이머 박사는 조용히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단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평화입니다.” 젊은 의원은 다시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 평화를 어디에서 얻을 수 있습니까?” 오펜하이머 박사는 고개를 떨어뜨리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화가 꼭 필요하다는 사실과 그것을 이루어 가려는 노력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평화가 어디에서부터 올 수 있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평화의 진정한 근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옴을 밝히고 있습니다. 가정의 평화도, 직장에서의 평화도, 인간관계 속에서의 평화도, 국가 간의 평화도 그리고 이 지구촌의 진정한 평화도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올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이름 중에 ‘야웨 샬롬’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평화가 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났을 때, 천사들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고 알렸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유언처럼 남기셨습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요14:27). 평화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도 평화를 방해하는 정치적, 사회적 요인이 무엇인가를 분석하고 이 세상을 좀 더 평화롭게 하려고 끊임없이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평화를 위협하는 적이 정치적, 사회적 요인이나 외적 환경에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평화의 깨뜨리는 무서운 적이 바로 죄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죄 문제의 해결이 없이는 평화라는 주제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 이 죽으심이 가져온 가장 놀라운 결과는 죄의 용서와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그분은 한 손에 아버지의 손을 쥐고 다른 한 손에 내 손을 쥐고 계셨습니다. 즉, 죄로 말미암아 단절되었던 하나님과 나 사이를 연결시키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죄의 대가를 치르신 것입니다. 그분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임마누엘의 메시아로 오시는 예수님을 대망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소망함으로 대림절 촛불을 하나씩 밝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Peace)로다 하니라”(눅2:14) 메리 크리스마스 !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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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친구이정우 목사 안동서부교회 네 종류의 친구가 있다고 합니다. 먼저 꽃과 같은 친구입니다. 꽃이 피어서 예쁠 때는 그 아름다움에 찬사를 아끼지 않지만 꽃이 지고 나면 돌아보는 이 하나 없듯 자기 좋을 때만 찾아오는 친구가 바로 꽃과 같은 친구입니다. 두 번째는 저울 같은 친구입니다. 저울은 무게에 따라 이쪽, 저쪽으로 기울듯이 자신에게 이익이 있는지, 없는지를 따져 이익이 큰 쪽으로만 움직이는 친구가 바로 저울과 같은 친구입니다. 다음은 산과 같은 친구입니다. 산이란 온갖 새와 짐승의 안식처이며, 멀리 보거나 가까이 가거나 늘 그 자리에서 반겨주듯이 생각만 해도 편안하고, 마음 든든한 친구가 바로 산과 같은 친구입니다. 마지막으로는 땅과 같은 친구입니다. 땅은 뭇 생명의 싹을 틔워주고, 곡식을 길러내며, 누구에게도 조건 없이 기쁜 마음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듯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지지해 주는 친구가 바로 땅과 같은 친구입니다. 그러므로 친구가 많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 깊이가 중요합니다. 산과 같은 땅과 같은 친구가 있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 주위에는 꽃과 같은 친구, 저울 같은 친구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나는 산과 같이 땅과 같이 생각하고 믿어왔는데 정작 상대방은 저울추만 만지고 있었던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 생각하고 제자들을 부르시고 하나님의 뜻을 말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15:15)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 중 가룟 유다는 철저히 저울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신앙도 고백도 저울추 앞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에게 그의 대를 이어 왕이 될 아들 왕세자 요나단이 있습니다. 그때 블레셋의 침략으로부터의 위기에서 이스라엘을 구해낸 사람이 다윗입니다. 이 일로인해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다윗을 칭송합니다.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삼상18:7) 사울은 다윗의 공로를 인정하면서도 다윗을 자신의 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자기보다 더 칭찬받는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 때문에 자신의 욕망과 악령에 이끌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왕위 계승자요 이스라엘의 영웅이지만 다윗에게 친구로 다가갑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골리앗을 어떻게 이겼는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한낱 양치기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요나단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그러하기에 서로를 생명처럼 사랑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요나단은 왕권을 물려받지 못했지만, 그의 일생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은 다윗의 둘도 없는 친구로서 우정을 간직한 것입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 왕으로부터 다윗의 생명을 지켜내었습니다. 다윗도 요나단이 죽은 후 요나단에게 받았던 사랑과 배려를 절름발이 장애를 가진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자신의 왕자들과 같이 왕의 상에서 함께 먹고 마시게 합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산 같은 우정을 간직한 관계입니다. 가을이 깊어갑니다. 친구가 더욱 그리워지는 계절입니다. 사랑을 받아서 행복한 사람이기보다는 사랑을 줌으로 행복한 사람이고 싶습니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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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혁명은 영적 변화입니다.이정우 목사 안동서부교회 변화에는 두 종류의 변화가 있습니다. 물리적 변화와 화학적 변화입니다. 물 분자는 산소 원자 1개와 수소 원자 2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물이 기화하면 물 분자의 운동이 활발해져 분자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지만, 분자를 구성하는 원자의 배열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물질의 성질이 그대로인 변화를 물리적 변화라고 합니다. 그러나 물을 전기 분해하면 물 분자를 구성하는 산소 원자와 수소 원자의 배열이 변하면서 산소 분자와 수소 분자를 형성하게 됩니다. 즉, 분자를 구성하는 원자의 배열이 변하여 분자의 종류가 달라집니다. 이처럼 분자의 종류가 달라져 성질이 전혀 다른 새로운 물질이 생성되는 변화를 화학적 변화라고 합니다. 나뭇잎에는 초록색을 띠는 엽록소를 비롯하여 붉은색을 띠는 카로틴, 노란색을 띠는 진토필 등의 색소가 들어 있습니다. 가을이 되어 기온이 낮아지면 엽록소가 파괴되면서 다른 색소들의 색이 드러나 붉은색이나 노란색의 단풍이 듭니다. 이때 엽록소가 파괴되는 과정에서 엽록소를 구성하는 물질이 다른 물질로 화학 변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이는 잎 속에서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가지고 있던 엽록소의 체계가 깨어진 것입니다. 이때 아름다운 단풍잎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런 모습들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과도 흡사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변화는 외적 변화가 아니라 내적 변화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가을의 산을 곱게 물들인 단풍처럼 아름다운 변화입니다. 이것은 물리적 변화가 아니라 화학적 변화들입니다. 성령으로 변화된 사람은 나뭇잎이 간직하고 있던 독특한 엽록소가 파괴되듯이 죄성으로 물든 우리들의 엽록소 즉, 특성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파괴됨으로 새로운 가치관으로 바뀌어 단풍잎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면에서 새롭게 탈바꿈을 이루는 혁명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변화입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라고 말씀하심의 의미일 것입니다. 진정한 변화는 물질의 화학적 변화처럼 모든 개념과 가치관의 혁명적 변화입니다. 랄프 네이버(Ralph W. Neighbour)는 그리스도인이 변해야 할 가치관을 그의 교재 「변화의 삶」에서 여섯 가지 혁명으로 설명했습니다. 첫째, ‘가치혁명’입니다. 옛사람의 옛 가치관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가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존재혁명’입니다. 아담의 자녀들은 행위로 존귀함을 얻고자 했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믿음으로 존귀함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물질혁명’입니다. 좀과 동록이 갉아먹는 세상에 물질을 쌓아 둘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영원히 보관할 수 있도록 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 ‘관계혁명’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바르게 하고, 교회에서 관계를 성실히 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과 진실된 관계를 형성하여 전도의 발판을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생각혁명’입니다. 인간적 갈등을 걸림돌로 보지 말고 영적 성숙의 디딤돌로 볼 때 갈등을 해결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섯째, ‘인생혁명’입니다. 몸과 영, 물질과 사람 등 내적인 기초석과 외적인 기초석을 바로 세울 수 있는 바른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변화된 삶이란 현실과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태산 같은 믿음으로 바른 가치관을 간직함을 뜻합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은 남부의 노예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전쟁을 했습니다. 남북전쟁의 운명을 가른 중요한 전투가 1863년 게티즈버그에서 있었습니다. 당시 전세는 북군에 매우 불리했지만 그럼에도 링컨은 평온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참모가 물었습니다. “국가의 장래가 불투명한 때 어떻게 이렇게 담대하고 평온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링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껏 기도하며 국가의 장래를 하나님께 맡겼소. 기도한 대로 되어질 것이오. 기도는 자신을 돌아봐 회개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요, 살아계신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기에 인생의 어떤 풍파에도 흔들림 없이 견고할 수 있습니다.” 링컨의 태도는 기도하는 자가 태산이 흔들려도 요동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변화를 위한 혁명은 랄프 네이버의 말처럼 세상 앞에 흔들리지 않는 가치, 존재, 물질, 관계, 생각, 인생의 혁명입니다. 이러한 혁명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가능해집니다. 이 가을에 붉게 물든 단풍처럼 우리 안에 영적 변화로 위대한 인생의 가치관을 열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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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친구가 있습니까?진짜 친구가 있습니까? 이정우 목사 안동서부교회 단명하는 사람과 장수하는 사람들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미국인 7,000명을 대상으로 한 9년간의 추적조사에서 아주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흡연량, 음주량부터 일하는 스타일, 사회적 지위, 경제 상황, 인간관계 등에 이르기까지 정말 세세하고 철저한 조사를 통해 의외의 진실을 찾아냈습니다. 우선,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담배나 술은 수명과 무관하지는 않지만 이색적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러면 일하는 스타일일까? 사회적 지위일까? 그것도 아니면 경제 상황이 영향을 주었을까?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결정적 요인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오랜 조사 끝에 마침내 밝혀낸 장수하는 사람들의 단 하나의 공통점은 놀랍게도 ‘친구의 수’였다고 합니다. 친구의 수가 적을수록 쉽게 병에 걸리고 일찍 죽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많고 그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을수록 스트레스가 줄어들고 더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결론입니다. 친구란 어떤 사람일까? 친구란 환경이 좋든 나쁘든 늘 함께 있었으면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친구란 제반 문제가 생겼을 때 저절로 상담하고 싶어지는 사람입니다. 친구란 좋은 소식을 들으면 제일 먼저 알리고 싶은 사람입니다. 친구란 다른 사람에게 밝히고 싶지 않은 일도 말해주고 싶은 사람입니다. 친구란 마음이 아프고 괴로울 때 의지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친구란 쓰러져 있을 때 곁에서 무릎 꿇어 일으켜 주는 사람입니다. 친구란 슬플 때 기대어서 울 수 있는 어깨를 가진 사람입니다. 친구란 내가 울고 있을 때 그의 얼굴에도 몇 가닥의 눈물이 보이는 사람입니다. 친구란 내가 실수했다 하더라도 조금도 언짢은 표정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친구란 필요에 따라서 언제나 진실한 충고도 해주고 위로도 해주는 사람입니다. 친구란 나의 무거운 짐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친구란 갖고 있는 작은 물건이라도 즐겁게 나누어 쓸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5절에 예수님은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너희가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15:14)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은 이 땅에 우리의 친구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가장 멋진 친구를 가장 가까이에 두고 친구가 없어 외로워하며 슬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찬송가 369장 가사에 보면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친구 되신 주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우리 약함을 아시고 품어주시고 위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연인보다도 더 가까운 친구 되신 분입니다. 연인은 싸우면 깨질까 봐 두려워하지만 친구는 싸우는 도중에도 내일 함께 뭐 하고 놀까를 생각합니다. 연인은 힘들 때 전화하면 위로해주고 기댈 곳을 만들어 주지만 친구는 힘들 때 전화하면 당장 뛰어와 같이 울어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연인은 기분 좋으면 더 기분 좋아 질 수 있게 띄워주지만 친구는 기분 좋으면 덩달아 기분 좋아 기뻐해 줍니다. 연인은 같이 있으면 떨리고 짜릿한 행복이 오지만, 친구는 같이 있기만 해도 편안하고 행복해지는 사이입니다. 연인은 멀리 떨어지면 마음도 멀어질까 봐 두려워하지만, 친구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변하지 않는 산 같은 존재입니다. 연인은 항상 전화해서 힘든지 확인해 주지만, 친구는 나를 위해 몰래 혼자 울어주는 사람입니다. 친구는 찾는 게 아니라 뒤돌아보면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복음성가 ‘나의 등 뒤에서’에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습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주시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평안히 길을 갈 땐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 내미시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때때로 뒤 돌아보면 여전히 계신 주/ 잔잔한 미소로 바라보시며 나를 재촉하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힘을 주리니/ 일어나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주님이 바로 그 분이십니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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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이 복입니다.이정우 목사 안동서부교회 예수를 믿고 복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 복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을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받아야 할 복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복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효자와 불효자가 있습니다. 효자나 불효자나 외형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효자도 불효자도 부모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그리고 효자나 불효자나 그 이름이 족보에 오릅니다. 둘 다 부모로부터 상속을 받습니다. 그러나 불효자가 받지 못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의 감동입니다. 효자는 부모를 보면서 마음에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그 마음속에 부모의 은혜를 잊지 못하면서 늘 흠모하는 자식입니다. 그러나 불효자는 그 중심에 부모를 향한 마음의 감동이 없습니다. 부모의 은혜를 모릅니다. 그래서 불효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무엇으로 받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마음의 감동으로 받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주님을 사랑하면 은혜를 받은 자요, 사랑하지 않으면 은혜를 받지 못한 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받는 특별한 은혜는 하나님께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세상 어디를 보든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동을 느끼는 사람들은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받고 싶어 하는 것이 감동입니다. 감동의 사전적 의미는 ‘깊이 느껴 마음이 움직임’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느끼는 행·불행과 쾌·불쾌도 감동 때문입니다. 감동이 있으면 행복과 쾌감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감동이 없는 세대’라고 하셨습니다.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11:17)라고 한탄하셨습니다. 감동이 없기는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우찌무라 간조는 “하나님이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질병이나 실패나 죽음 따위로 저주하시지 않고 성경을 읽어도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을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오지 않는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에 감동이 없는 것이 저주입니다. 그러나 감동은 은총이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감동이 있어 말씀을 깨닫게 되고, 말씀을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나고, 가슴이 벅차오르면 바로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찾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무엇인가를 가진 사람, 재능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마음에 감동되는 자를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만날 때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감동 시킨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기독교는 바로 감동의 종교입니다. 감동이 사람의 영혼을 삽니다. 감동이 십자가의 은혜 앞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중국의 석학 임어당(린위탕)이 기독교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이유를 사람들이 물었을 때 그가 한 대답은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쉽게 설명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말한 기독교의 본질은 구원의 감동이었습니다. 감동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지 성경을 많이 연구했고, 또 유교와 불교도 연구해 봤습니다. 종교를 비교해 본 결과 기독교에 구원의 감동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깊은 우물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날 살려 달라고 소리를 질렀더니 석가모니가 우물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때 그는 손가락질을 하면서 "전생에 얼마나 못되게 굴었으면 이렇게 죽게 되었느냐? 업보요, 업보"라고 하면서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하고 갔습니다. 그래서 불교를 바라보니 살 길이 없었습니다. 또 지나가는 사람에게 살려 달라고 소리를 질렀더니 이번에는 공자가 들여다보았습니다. 유교에는 내세가 없습니다. 죽으면 끝나는 것입니다. 기어이 종교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도덕적인 종교입니다. 공자가 손가락질을 하면서 "이 놈, 너 죽으려고 거기에 빠졌느냐? 빨리 나오지 못해?" 얼마나 책망을 하는지, 죽게 된 사람을 건질 생각은 않고 야단만 치고 갔습니다. 유교는 책망만 잘하는 종교입니다. 또 다시 지나가는 사람에게 살려달라고 했더니 예수께서 들여다보았습니다. 예수는 친히 줄을 매고 내려와서 나를 업고 다시 줄을 타고 올라가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구출해 주었습니다. 살 길은 여기에 있고, 문제 해결은 여기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의 구원관은 감동입니다. 기독교에 생명과 진리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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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기총, 광복 74주년 ‘8·15 나라사랑 구국기도회’ 성료김승학 목사 · 김운성 목사 초청 강사로 “신앙의 순수성과 거룩성 회복하자” 강조 ▲말씀을 전하고 있는 김운성 목사 경북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이정우 목사)가 주최하고 경북 23개 시·군연합회가 후원한 ‘8·15 나라사랑 구국기도회’가 8월 12일 안동교회(김승학 목사 시무)당에서 성황리에 개최됐다. 이번 행사는 찬양과 특강, 예배, 구국기도회 등 4부로 나눠 진행됐으며, 현재 국내·외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상황들을 기도 제목으로 놓고 600여 명의 참석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기도했다. 1부 찬양에 이어 2부 특강은 안동교회 김승학 목사가 ‘안동지역 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주제로 강연했다. 김승학 목사는 ‘신사참배와 장로교회, 신사참배 거부운동, 경안노회의 신사참배 회개와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취소’ 등에 대해 설명하고, “일제 치하에서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기 위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순교하신 분들을 존경한다”며 “한국교회가 믿음의 선진들을 기억하고 신앙의 순수함을 회복해 새롭게 일어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3부 예배는 대표회장 이정우 목사의 인도로 드려졌으며, 서울 영락교회 김운성 목사가 ‘선지자가 먼저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했다. 김운성 목사는 “적이 누구인지 알아야 우리는 우리의 자리를 찾을 수 있다”며 “시대를 하나님의 눈으로 해석해 주는 일이 교회의 사명이다”고 말했다. 또 “거룩함이 남아있는 한 그 사회는 희망이 있다”며 “어려운 결말이 온다 하더라도 한국교회가 시대를 향한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하자”고 권면했다. 4부 구국기도회는 ‘북한구원과 탈북자와 지하교회를 위해’, ‘대통령과 위정자를 위해’,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해’ 등의 기도제목으로 기도했으며, 참석자 전원은 ‘동성애 반대’, ‘양성평등을 성평등으로 헌법개정 반대‘ 등의 구호를 함께 제창했다. ▲경북기독교총연합회 주최 ‘8·15 나라사랑 구국기도회’가 8월 12일 안동교회당에서 성황리에 개최됐다.(사진=이예진 기자)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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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서부교회, 인도네시아 칼리만탄 섬에서 단기선교성경학교, 가정 심방, 마을잔치, 청소년집회 등 사역 펼쳐 안동서부교회(담임목사 이정우)는 지난 7월 15일에서 23일까지 인도네시아 단기선교팀을 파송했다. 고재광 목사 외 11명으로 구성된 이번 단기선교팀은 안동서부교회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라자왈리교회 청년들과 함께 칼리만탄 섬을 방문해 아장교회를 중심으로 사역을 펼쳤다. 선교팀은 성경학교, 가정 심방, 마을잔치, 학교 방문, 유치원 방문, 청소년집회 등 다양한 활동들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시간을 이어갔다. 특히, 이번 선교에서는 지역의 학교와 유치원을 찾아 한국을 소개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 꿈을 나누는 활동을 통해 그 지역에 기독 정신을 심는 기회가 되었다. 선교팀을 이끈 고재광 목사는 “현지의 땅을 밟고 교인들의 집을 방문해 그 지역의 어려운 현실을 직접 눈으로 보고 들으면서 하나님 마음으로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 되어 좋았고, 아울러 자카르타에 있는 라자왈리교회에서 주일예배와 간담회 등을 통해 두 교회 간의 협력과 선교에 대한 신뢰를 다지는 계기가 되어 유익했다”고 말했다. ▲가정 심방에서 사랑과 위로를 전하는 선교팀. ▲안동서부교회는 지난 7월 15일~23일까지 인도네시아 칼리만탄 섬에서 선교 사역을 진행했다. 한상덕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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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와 선한 영향력이정우 목사 안동서부교회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 속에서도 하나님의 질서가 나타났고 하나님의 섭리와 다스림에서도 질서가 나타납니다. 질서를 이루는 핵심은 리더십입니다. 리더십의 핵심은 힘(권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권세의 근원이시고 주인이 되십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13:1) 이러한 하나님께서는 그가 정하신 사람에게 권세를 주셔서 그가 원하는 백성들을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영적 리더십입니다. 200만 명 이상이나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인도할 때 가장 중요시 되었던 것은 인도자인 모세의 영적 지도력이었습니다. 출애굽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민족들을 인도하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심으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자 함이었습니다. 이와 동일하게 오늘날 하나님은 죄와 사망에 종노릇하며 멸망에 처한 우리들을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시는 선하시고 위대한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한명, 두 명이 아닌 무리와 집단이기 때문에 그 무리와 집단의 각 개인을 인도하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여 세우신 지도자의 지도력을 통해서 일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란 한 영적 집단을 위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와 권세의 통로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그 통로요 도구인 지도자가 어떤 지도력을 가졌느냐에 따라 그 집단의 유익과 무익, 승리와 실패, 전진과 후퇴가 결정됩니다. 단적인 예로, 출애굽 과정에 나타난 모세의 지도력과 아론의 지도력의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출 32장에 나타난 아론의 지도력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금송아지를 만드는 우상숭배라는 중죄를 짓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을 섬기게 한 죄, 백성을 방자하게 만든 죄, 그리고 백성 3,000명이 레위 자손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한 죄 등, 아론은 모세와 동일한 여건에서 지도자가 되었지만 아론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참담한 실패를 맛보아야만 했습니다. 진정한 지도력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 없는 인간적인 지도력은 바로 무너지고 맙니다. 이것은 지도력의 타락으로서 무서운 죄를 낳게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은 없고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지도력입니다. 결국 이러한 지도력은 상황과 여건에 야합하여 인기를 탐하는 인간적인 야심, 야망을 이루기 위한 지도력이 되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전략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먼저 기도하시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목적과 동기를 잃어버리면 결국 우리의 지도력은 자기를 위하여 도모하는 위험한 지도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없는 지도력은 위험한 것입니다.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길입니다. 진정한 리더십은 지위가 아니라 선한 영향력입니다. 리더십은 명령으로 권위를 세움이 아니라 솔선수범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적인 지도력은 결국 권위주의로 흐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위는 겸손과 섬김이었습니다. 교회의 지도력은 기업의 사장처럼, 군대의 상관처럼 아랫사람들을 무시하고 명령조로 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먼저 섬기려는 부드러운 리더십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교회에 군림자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그런 면에서 목사와 중직자들은 교회에서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교인을 섬기고 그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하나님의 종들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와 교인을 예수님처럼 섬길 때 영적 지도력이 세워지게 됩니다. 이때 비로소 교회는 질서와 선한 영향력을 회복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2019년의 후반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질서와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모든 크리스천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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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화해를 강조한 ‘산 순교자’ 이원영 목사봉경(鳳卿) 이원영 목사 61주기 추모예배 및 제4차 정신문화 포럼 안동서부교회(담임목사 이정우)는 봉경(鳳卿) 이원영 목사 61주기를 맞이하여 추모 예배와 봉경 정신문화 포럼을 개최했다. 이원영 목사(1886~1958)는 안동서부교회 초대 목사로 예안 만세 운동을 주도하고, 일제의 신사참배를 몸소 거부했으며, 용서와 화해를 강조한 안동이 낳은 ‘산 순교자’이다. 이번 추모예배는 김두진 장로의 인도, 최병영 집사의 기도, 이주희 집사가 성경봉독을 맡았다. 설교는 대구 대봉교회 박희종 목사가 ‘각각 자기가 일한대로’(고전3:8~15)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이어진 포럼에서는 계명대학교 황재범 교수의 진행으로 장신대 금주섭 교수가 “언더우드의 봉화선교와 대화의 기독교”, 한국국학진흥원 박경환 박사가 “전통학문과의 변화와 근대교육의 등장”, 내매교회 윤재현 목사가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근대보통학교 연구”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했다. 이날 행사에는 권영세 안동시장과 정훈선 안동시의회 의장 등 여러 내빈들이 함께 자리를 빛내어 이 지역의 교육기관의 흐름과 기독교의 정체성이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되었다. (자료 제공=안동서부교회) 한상덕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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