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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하나신문 창간 13주년 축사 - 장세용 구미시장꿈과 비전을 제시하는 경북하나신문이 되길! 장 세 용 구미시장 경북의 2,700여 교회들과 그 사명을 함께 이루어가고자 세워진 경북하나신문의 창간 13주년을 구미시민과 함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지난 13년 동안 척박한 지역 환경 속에서도 교회의 소식뿐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소식을 공유하며 시민들의 알 권리 충족을 위해 노력한 경북하나신문의 임직원 여러분께도 축하와 함께 그간의 노고에 박수를 보냅니다. 지방시대를 맞아 지역 언론의 역할이 중요한 이때, 시대가 바뀌고 환경이 달라져도 진실보도로 시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는 언론의 사명은 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경북하나신문은 그간 지역민의 눈과 귀가 되고, 지역의 상생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며, 올바른 비판과 언론 본연의 사명을 위해 지역민들과 함께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구미시도 ‘확실한 경제성장, 지역 활력 회복’을 최우선에 두고 공직자 모두가 혼신을 다하고 있습니다. 구미시가 나아가는 한 걸음 한 걸음에는 언론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성원과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창간 13주년을 맞은 경북하나신문이 온·오프라인이 포괄된 종합 미디어로서 더 많은 독자들에게 꿈과 비전을 제시하는 신문으로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하면, 무궁한 발전과 임직원 여러분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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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상락교회 백승룡 목사 위임 및 장로‧권사 임직예식 열려예장통합 예천 상락교회에서는 4월 25일(주일) 오후 3시에 백승룡 목사 위임 및 장로‧권사 임직예식이 있었다. 1부 예배는 위임국장 조영광 목사(영주노회장, 동촌교회) 인도로 드렸으며, 전 노회장 송인화 장로(성내교회) 기도, 예남시찰 서기 임순금 목사(신암교회) 성경봉독 후 전 노회장 강성효 목사(장수교회 은퇴)가 ‘너는 나를 따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2부 목사 위임식은 위임국장 조영광 목사 집례로, 영주노회 서기 황현석 목사의 백승룡 목사 소개, 위임받는 목사 서약, 교우 서약, 위임기도, 선포, 부노회장 김영수 목사(예천교회)의 권면, 백승룡 목사 인사 순으로 진행됐다. 3부 임직식에서는 조현창 전재일 박인배 장로와, 김선화 김순덕 권사가 임직을 받았다. 임직자 소개, 임직자‧교우 각각 서약, 안수기도, 선포, 성의착용 등의 순서가 있었다. 이어 4부 축하 시간에는 전 예남시찰장 김윤기 목사와 박성욱 목사가 권면과 축사를 했으며, 영주제일교회 허승부 원로목사의 축도로 모든 순서를 마쳤다. ▲백승룡 위임목사(둘째줄 가운데)와 임직자, 당회원의 기념촬영. 영주 우병백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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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염광교회, 은퇴 및 임직예식 열려예장통합 영주염광교회(담임목사 이명희)에서는 4월 25일(주일) 오후 3시 은퇴 및 임직예식이 열렸다. 1부 예배는 당회장 이명희 목사 인도로, 영동시찰장 김순분 목사(이산제일) 기도, 김병근 목사(예천지보)의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란 제목의 말씀 선포 순으로 드렸다. 이어진 2부와 3부에서는 그동안 충성을 다해 교회를 섬겨왔던 김도태 장로를 비롯한 8명의 장로‧집사‧권사에 대한 은퇴식과 김형식 장로를 비롯한 임직자 8명에 대한 임직식이 정해진 순서대로 진행됐다. 4부 축하시간에는 전 노회장 천정명 목사(오계)가 권면을, 영주노회장로회 회장 최경도 장로(춘양)가 축사를, 임직자 대표로 김형식 장로가 답사를 했으며, 당회장 이명희 목사 축도로 모든 순서를 마쳤다. 이날 예식에서 은퇴를 한 직분자는 △장로은퇴: 김도태 유홍호 △집사은퇴: 김형래 △권사은퇴: 최점숙 임운희 권사이며, 새롭게 세워진 임직자는 △장로임직: 김형식 강인구 △집사안수: 석원균 △권사임직:강금자 홍명란 남이수 김미자 이정숙 권사이다. ▲임직식에서 5명의 권사에 대한 안수기도가 진행되고 있다. 영주 우병백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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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백석) 경북노회 제80회 정기노회신임 노회장에 최기성 목사 취임 ▲경북노회 제80회 정기노회를 마치고 노회원들의 기념촬영. 예장(백석) 경북노회는 지난 4월 12일(월) 구미 성문옥토교회(담임목사 최인숙) 본당에서 제80회 정기노회를 개최하고 신임 노회장에 최기성 목사(금호교회)를 추대했다. 최기성 목사는 “더욱 화합하고 발전하는 노회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며 “선배 목회자들이 솔선수범하고 후배 목회자들이 섬겨주는 노회를 이루어가겠다”고 포부를 전했다. 개회예배는 최기성 목사 인도로, 김시영 목사 기도, 강홍대 목사 성경봉독 후 노회장 이종만 목사가 ‘하나님의 회복하심’을 주제로 메시지를 선포했다. 증경노회장 최영식 목사 축도 후 진행된 회무시간에는 각 부와 위원회 보고, 시찰회 보고가 이뤄졌다. 이번 노회에서는 김일곤 목사, 김호곤 목사에 대한 목사 임직식이 거행됐으며, 경북노회는 노회 산하 나눔봉사단과 장학위원회를 더욱 활성화시켜 사랑의 손길을 펼칠 것을 다짐했다. 신임 임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노회장: 최기성 목사 △부노회장: 박경원 목사 △서기:김주광 목사 △부서기: 이상춘 목사 △회의록서기: 강홍대 목사 △부회의록서기: 장 준 목사 △회계: 황치오 목사 △부회계: 김삼일 목사. 청송 이상춘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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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개곡교회 여명천 목사 위임식 및 임직·추대식 열려장학금 600만원 마련, 다자녀 목회자 가정 6곳에 전달해 ▲위임국장 권헌서 노회장 집례로 진행된 목사 위임식에서 여명천 목사(오른쪽)가 선서하고 있다. 안동 개곡교회(예장통합, 담임목사 여명천)는 3월 14일 본 교회당에서 목사 위임식 및 임직·추대예식을 했다. 이날 행사는 경안노회 임원단과 안남시찰, 축하객 등 100여 명의 인원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1부예배에서 말씀을 전한 경안노회 부노회장 이재식 목사는 “하나님은 모세처럼 인정받는 충성된 주의 백성이 늘 세워지기를 기대하신다”며, “위임받는 목사는 주님이 인정하는 목회자가 되고, 임직자들은 하나님과 교회에 충성을 다해 칭찬받는 직분자들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어 진행된 위임식에서는 위임국장 권헌서 장로(경안노회 노회장)가 개곡교회 여명천 목사에게 위임패를 증정했으며, 경안노회목사회와 영신총동문회 경안지회에서 위임 축하 기념패를 증정했다. 임직·추대식에서는 임직자와 추대자가 소개됐고, 취임선서와 서약, 안수기도 등의 순서를 통해 하나님과 성도 앞에서 새로운 직분을 받았다. 임직 및 추대자는 △집사취임 윤현진 △권사임직 서부혜 권근헌 △명예권사 추대 손수남 황정자 장수자 이규숙 문옥자 정옥자 이다. 여명천 목사는 “에벤에셀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린다”며 “부족한 목회자를 신임해 준 성도들과 당회원께 감사를 전한다. 오직 주님만을 위해 기쁘게 사역을 감당하고, 부르심의 상을 바라보며 열심히 달려가겠다”라고 인사했다. 한편, 개곡교회는 이번 위임과 임직식을 진행하면서 600만원의 성금을 마련, 지역의 다자녀 목회자 가정 6곳을 선정해 각 100만원씩 총 600만원의 장학금을 전달해 큰 화제를 모았다. 안동 한상덕 기자, 사진=임만조 장로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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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통합 경안노회 제189회 정기노회 열려예장통합 경안노회(노회장 권헌서 장로)는 4월 6일(화) 오후 1시 안동교회(김승학 목사) 예배당에서 제189회 정기노회를 개회했다. 이번 노회에서는 본당과 100주년기념관을 회의장과 회의실로 활용해 330여 명의 총대를 분산 배치하는 등 방역수칙을 지키며 안전한 노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했다. 개회예배는 노회장 권헌서 장로의 사회로 부노회장 조창래 장로 기도, 전노회장 김승학 목사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이란 제하의 설교, 설교자의 축도 순으로 드려졌다. 이어진 회의는 전노회장 인사, 각 부‧위원회 보고, 총회 총대 선거, 중요사항 결의 등의 순서로 진행됐으며, 목사 임직 및 목사 은퇴 예식이 있었다. 이번 노회에서는 백남훈(추목샤론) 서대천(안동동부) 목사가 임직을 받았고, 김무년(안동의료원) 김중건(신양) 김대년(소망의집) 박응현(신덕) 목사가 은퇴했다. 권헌서 노회장은 “코로나19로 한국교회가 많이 위축돼 있지만, 위기일수록 교회의 본질적 사명에 집중하며 온 노회가 힘을 모아 난관을 극복해나가자”고 인사말을 전했다. ◈총회 총대 명단 ▲목사 : 김승학 이정우 이재식 서원수 차덕현 이연숙 김종배 김원택 ▲장로 : 권헌서 권오탁 이성덕 최종섭 정동한 박우주 이희사 오상윤 ▲경안노회 제189회 정기노회가 안동교회에서 열린 가운데, 권헌서 노회장의 사회로 회의가 진행되고 있다. 박은숙 기자, 사진=임만조 장로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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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통합 경서노회 제139회 정기노회 개최총회 총대 선출, 회무처리 및 목사 임직식 ▲경서노회 제139회 정기노회가 4월 6일 구미시민교회 예배당에서 열린 가운데 정만익 노회장의 사회로 회의가 진행되고 있다. 예장통합 경서노회(노회장 정만익 목사)는 4월 6일(화) 오전 9시부터 구미시민교회(위임목사 조민상) 예배당에서 260여 명의 총대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139회 정기노회를 개회하고 총회 총대 선출, 주요 안건 처리 및 목사 임직식 등의 순서를 가졌다. 이번 노회는 코로나19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키는 가운데 진행됐으며, 회무처리를 간소화해 노회 일정을 단축했다. 개회예배는 부노회장 장영운 목사 인도로, 부노회장 홍종철 장로 기도, 노회장 정만익 목사의 ‘회복! 오직 성령으로’라는 제목의 설교, 은퇴 목회자를 위한 특별 헌금, 전노회장 진상권 목사 축도 순서로 드려졌다. 정만익 노회장은 설교에서 “코로나 사태로 인해 한국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지만, 이럴 때일수록 말씀을 붙들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기도해야 한다. 오직 성령의 충만한 능력이 임할 때 회복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라고 전했다. 이어진 회의에서는 개회선언, 전노회장 인사, 각 부·위원회 보고, 총회 총대 선거, 유가족을 위한 기도, 목사 임직식, 구미시민교회에 대한 감사패 수여, 각 시찰회 보고, 청원 사항 결의 등의 안건을 처리했다. 이번 노회에서는 홍명자 목사와 안영훈 목사가 목사임직을 받았다. ▣총회 총대 명단 ▲목사 : 정만익 김상기 이현세 곽금배 조민상 이교근 원명국 윤일국 ▲장로 : 홍종철 이병섭 장일규 손주식 박상도 이문영 양인주 김명환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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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교회 창립 110주년 기념 감사예배 드려원로장로 추대 및 장로 임직예식 ▲임직식에서 선임 당회원들이 신임 장로들에게 장로 가운을 착의해주고 있다. 예장(통합) 예천교회(위임목사 김영수)가 교회 창립 110주년을 맞아 2월 28일 오후 3시 본 교회 예배당에서 감사예배를 드렸다. 예천교회는 이날 권종대 원로장로 추대 및 황칠환 조동식 안경진 이용하 장로의 장로임직 예식도 같이 진행했다. 당회장 김영수 목사의 인도로 드려진 감사예배에서는 영주노회 전노회장 최갑도 목사(풍기 성내 원로)가 “역사의 도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이어 원로장로 추대식과 장로 임직식은 김영수 목사의 집례로 진행됐다. 예식에서 권면과 축사 순서는 전노회장 송치수 목사, 전노회장 천정명 목사, 영주노회장 조영광 목사가 맡았으며, 예천교회 황주룡 원로목사의 축도로 모든 순서를 마쳤다. 황칠환 장로를 비롯한 임직자들은 “부족한 저희들에게 귀한 직분을 맡겨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며 “앞으로 더욱 열심히 교회와 지역사회를 섬기는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겠다”고 인사했다. 예천교회는 1911년 2월 26일, 용문금곡교회 출석 중이던 권수도 성도가 노하리 교동댁 ‘ㄱ’자형 주택을 임대하여 김분이, 최악이, 김조균, 교동댁 등과 함께 5명이 첫 예배를 드림으로 교회가 시작됐다. 예천교회는 이후 110년을 지나오면서 지역사회 섬김과 봉사에 앞장서 왔다. 특히 교육사업, 사회봉사 활동(늘푸른대학, 예천연탄은행, 예천문화사랑방 등), 선교활동(단독선교사 파송, 국내·외 교회 및 기관 후원 등)을 통해 하나님 나라 확장에 힘을 쓰고 있는 교회이다. 예천 남종덕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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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 목사의 논문 원문(7)- 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목사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목사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임학수 목사(林鶴洙, 1884-1969) 임학수 목사는 안동 땅에서 출생하고 안동 땅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나라에 갔다. 그는 안동 땅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안동지역에 있는 교회를 섬겼다.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교회, 크고 작은 교회를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섬겼다. 그래서 그가 시무한 교회는 든든히 설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가 교회를 섬긴 시대 상황은 결코 만만한 세월이 아니었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강압적으로 통치하던 시대였다. 보통 사람들인 백성의 삶도 고단했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삶은 더 고난의 연속이었다. 황국신민화를 강요하는 일제의 정책 하에서 예수 믿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임학수 목사는 단순한 성도로서가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인 목사로 살아야 했기 때문에 더 큰 믿음과 용기, 그리고 인내와 소망이 필요했다. 그러나 임 목사는 어려운 시기에 교회의 지도자와 경안노회의 중심인물로 그 사명을 잘 감당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황금만능주의와 세속화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위기를 맞고 있다. 거룩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교회, 영적 리더십을 가진 존경받는 주의 종,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성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현실을 보며 낙망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다가 교회가 영영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게 된다. 그러나 교회의 능력은 분명히 회복될 수 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교회는 과거의 교회와 과거의 선배들이 남겨놓은 교훈을 배워야 한다. 교회역사를 올바로 이해해야 하며, 거룩한 영향력을 끼친 믿음의 선배의 삶을 본받아야 한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임학수 목사다. 그는 분명한 소명의식을 갖고 헌신한 사명자였다. 그는 신실한 하나님의 일꾼인 동시에 도전하는 교회의 일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학수 목사의 신앙과 삶을 연구하고 정리한 글은 이교남 목사가 쓴 ‘한학자 임학수 목사’ 외에는 거의 없다. 그가 안동지역이라는 복음의 변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선교부가 위치해 있었지만 안동은 작은 도시였기 때문에 안동지역에서 활동한 교역자나 평신도들은 한국교회에 알려지기 보다는 묻혀 있을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한계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임학수 목사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흔적을 남긴 주의 종이었다. 그래서 임학수 목사의 성품, 인격, 신앙을 포함한 삶은 오늘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큰 도전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소논문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연구되었다. 연구 결과 필자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고 영원히 잊혀 질 수 있었던 임 목사의 신앙과 삶을 새롭게 발굴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 일평생 단 한 번도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고 충성을 다한 믿음의 대선배인 임학수 목사가 걸어간 거룩한 구원사역의 흔적을 찾아보도록 하자. 1. 임학수(林鶴洙), 믿음의 조상(祖上)이 되다 임학수는 1884년 6월 23일 부친 임보현과 모친 정덕희 사이에서 장남으로 안동군 녹전면 매정리(일명 갈골)에서 출생했다. 특히 1885년은 원두우(元杜尤, Horace Grant Underwood) 선교사와 아편설라(亞扁薛羅, Henry Gerhard Appenzeller) 선교사가 인천 제물포에 첫발을 밟은 해로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임학수의 본관은 부안으로 호는 영온(嶺穩) 혹은 영루(嶺樓)이다. 령(嶺)은 재, 산봉우리라는 의미를 갖는다. 온(穩)은 ‘평온하다’와 ‘곡식을 거두어 모으다’는 뜻을 갖는다. 따라서 영온(嶺穩)은 ‘평온한 산봉우리’라는 의미로 산봉우리가 조용하고 평안한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가 평온하기를 소망했던 것 같다. 또한 영온(嶺穩)은 ‘곡식을 거두어 모으는 산봉우리’라는 의미로 산봉우리 같은 하나님의 교회가 자신의 사역을 통해 구원받은 알곡과 같은 성도들이 넘쳐나기를 소원했던 것 같다. 또한 루(樓)는 다락의 뜻으로 영루(嶺樓)는 산봉우리에 있는 다락과 같은 망대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임학수 목사는 악한 세력이 성도들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조망하고 감시함으로써 교회와 성도들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학수는 1894년 박계남과 결혼하여 임상경, 임상교 남매와 손자 1명과 손녀 4명을 두었다. 1911년 10월 23일, 임학수는 매정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모친인 정덕희는 1913년 6월 14일에, 처(妻)인 박계남은 1916년 2월 16일에, 장남 임상경은 1922년 매정교회에서 각각 세례를 받았다. 임학수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난 후에 모든 식구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임학수는 한 가문에 있어서 믿음의 조상(祖上)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1909년 9월, 임학수에 의해 설립된 매정교회를 섬기던 임학수 가정은 1923년 5월 10일 안동의 어머니(母) 교회인 안동교회로 이명(移名)했으며, 이명한 후에는 온 가족이 줄곧 안동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임학수 목사의 장남(長男)인 임상경은 안동교회에서 장립집사와 장로의 직분을 받았으며, 오랫동안 제직회 서기, 당회서기로 봉사했다. 임학수 목사의 자부(子婦)인 강신덕은 교회학교 교사, 청년회, 성가대에서 헌신했다. 특히 강신덕은 당시 내매교회를 섬기고 있던 백부(伯父) 강병주 목사의 조카로 대구 신명여학교를 졸업한 신식 여성으로 학창시절에는 육상, 테니스 등 운동도 잘 했다고 한다. 당시 임학수 목사와 강병주 목사가 친밀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임상경과 강신덕은 결혼하게 되었다. 임학수 목사의 손녀인 임화자 권사는 어머니 강신덕를 이렇게 기억한다: 어머니 강신덕은 신앙이 두터운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 신학문을 배운 여성으로 깊은 신앙과 지혜로 슬기롭게 어려운 목사 가정의 살림을 잘 꾸렸다. 대가족 집안일도 많았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주일학교 반사, 여전도회 임원, 구역권찰로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 열정적으로 헌신했다. 사경회나 교회행사 때마다(크리스마스 새벽송 찬양대 식사) 식사 준비로 봉사를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목사관 뜰에서 몇 백 명의 밥을 큰 가마솥 3개에 불을 지펴서 하는 일은 늘 어머니의 몫이었다. 강신덕의 가정은 초기 한국교회부터 오늘날 까지 믿음의 큰 산맥을 이룬 가정이다. 큰 아버지인 강병주 목사는 평양신학교 14회 졸업생으로 내매교회, 영주교회, 그리고 풍기교회를 담임하면서 6차례 경안노회장을 역임했으며, 1933년 총회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임지를 옮겨 총회 산하교회의 신앙교육과 교사양성과정을 책임지며 교사양성에 주력한 분이다. 또한 서울의 새문안교회를 담임한 강신명 목사는 강병주 목사의 장남이기도 하다. 이처럼 임학수 목사의 후손은 뿌리 깊은 믿음의 가정으로 어디서나 주님의 교회에 헌신하는 일꾼들이 되었다. 노후에 장남을 따라 부산으로 이사한 강신덕은 거성교회에서 권사로 임직을 받았다. 임상경 부부는 거성교회를 섬기다가 별세하였다. 임학수 목사의 장녀인 임상교는 권사로 대구 신암교회에서 시무하였으며, 손자 임재오는 부산 거성교회에서 장로로 시무하였다. 친손녀인 임순오는 부산 수영로 교회에서 권사로, 임양자는 안동교회에서 집사로, 임화자는 서울 밀알교회에서 집사로 헌신하고 있다. 부모세대의 믿음과 헌신을 계승하여 후손들이 계속해서 아름다운 믿음의 가문을 이어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임학수 목사의 평소의 삶은 비단 신앙 뿐 아니라 인격, 품성 등에 있어서 자녀손들에게 선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적어도 임학수 목사로 인해 교회를 이탈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만큼 임학수 목사는 목사로서의 삶도, 부모로서의 삶도, 또한 인간으로서의 삶도 모자람이 없는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임학수가 한 가정의 믿음의 조상이 됨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하 내용은 논문원문 첨부파일 참조)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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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 목사의 논문 원문(3)- 심장에 전도의 불을 지핀 사람, 정재순 목사심장에 전도의 불을 지핀 사람, 정재순 목사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정재순 목사(鄭在淳, 1878~1948) 1900년 초 어느 날 정재순 목사는 부해리(傳海利, Henry M. Bruen) 선교사와 만났다. 어디에서, 언제, 어떻게 만났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정재순이 20을 갓 넘은 나이에, 경산 어느 마을에서 부해리 선교사를 만났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훗날 정재순의 행보를 보았을 때 이 만남은 우연적인 만남이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묘하신 섭리 가운데서 정재순이 부해리 선교사를 만나게 하셨다. 만남 후 정재순의 삶은 하나님께로 향한 삶이 되었다. 정재순은 이후 단 한 번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다. 따라서 언제 누구를 어디에서 만나느냐는 정말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삶의 방향과 내용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이후 정재순은 단 한 번도 교회를 떠난 적이 없이 초창기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그는 교회 안에 세워진 기독교학교의 교사생활을 시작으로 교회에 관계를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함께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돌보는 일을 시작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그를 전문적인 사역자로서 훈련시키셨다. 조사로 여러 교회를 섬기던 정재순은 1912년 평양신학교에 입하여 본격적인 신학수업을 쌓게 된다. 그러던 1914년, 그가 섬기고 있던 대구 신정교회(현 대구 서문교회)에서 장로로 임직하는데, 신정교회 초대 장로의 영예를 안게 된다. 1915년 평양신학교 제8회로 졸업한 후 목사임직을 받고 신정교회 첫 한국인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초임지인 대구 신정교회에서 정재순 목사의 사역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사역이었다. 여자 청소년을 위한 야간 학교를 개설했고, 대구 3·1만세운동에 깊이 관여했다. 1922년 6월 안동으로 사역지를 옮긴 이후, 그는 전도중심의 사역을 통해 안동 땅을 기경하기 시작했다. 계속적인 그의 관심사인 학원선교를 위해 청소년을 위한 기독교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교회분립을 통해 안동 땅의 부흥을 위한 새로운 도전을 감행하기도 했다. 안동을 떠난 이후 대구를 근거지로 둔 정재순 목사는 본격적인 복음전파자의 길을 걸었다. 청도, 영천, 경산, 달성, 고령, 월성, 경주, 영일, 칠곡, 상주, 군위, 선산, 의성군 등에 28개 예배처소를 개척했다. 이 때 그의 부인인 손주안 사모는 함께 교회를 개척하고, 함께 성도를 섬기고 돌봄으로써 정재순 목사의 소중한 동역자가 되었다. 연어가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서 산란하고 죽듯이 정재순 목사는 60세에 그의 첫 담임 목회지인 대구 신정교회로 돌아가 사역을 마무리했다. 그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정재순은 목회 전반전과 후반전을 똑같은 열정과 투철한 사명감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불꽃을 불사르며 살았을 뿐 아니라 성도들의 심장에 전도의 불을 지핀 믿음의 사람이었다. 이제부터 정재순에 관해 살려보자. 1. 목사 임직 이전의 인간(人間), 정재순 정재순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으며 극히 단편적인 것만 알려져 있다. 그의 집안이나 근무한 기관, 그리고 섬긴 교회도 그에 관한 것과 사역한 내용 등에 관해 남겨진 기록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지금까지 그의 성장배경이나 가족 관계 등 역시 제한적인 정보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결과 정재순 목사의 가정에 관한 연구는 전무하다 시피 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 교회역사 주영연구소장 이교남 목사에 의해 정재순의 가족 관계가 새롭게 밝혀졌다. 이교남 목사는 정재순 목사의 후손을 만나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정 목사에 관한 이야기나 그들이 보관하고 있던 귀한 자료들을 볼 수 있었다. 이교남 목사는 2013년 7월 제2회 안동지역 기독교 역사포럼에서 발표한 ‘정재순 목사의 목회사역과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라는 소논문에서 정재순 목사의 후손을 만나 확인한 새로운 사실을 공개한 적이 있다. 새롭게 밝혀진 정재순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정재순(鄭在淳)은 1878년 5월 24일, 경상북도 경산(慶山)군 남천면 신기동에서 출생(出生)했다. 부친은 정진호(金鎭鎬), 모친은 김소사(金召史)의 2남 4녀 중 장남이며, 부인은 손주안(孫主安)이다. 훗날 부인 손주안은 남편 정재순 목사의 동역자로 전도와 교회개척에 큰 공헌을 하게 된다. 정재순은 외동아들을 두었는데 아들은 정원조(鄭元祚), 자부는 손기순(孫琪順)이며, 그의 후손은 현재 대구에서 교회를 잘 섬기고 있다. 정재순 가문은 당시 여느 가문처럼 유학의 집안이었다. 따라서 그는 어릴 때부터 한문을 배우고 한학을 수학하며 유학을 따르는 집 안에서 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재순 목사의 묘는 칠곡에 있었는데, 1982년에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정재순 목사가 안동교회에 시무할 때 교인으로 생존한 성도들이 기억하고 있는 정재순 목사는 천성이 어질고 중후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성도들로부터 호감을 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아 있는 정재순 목사의 사진에서 보여 지는 그의 인상(印象)은 성도들의 증언을 뒷받침한다. 사진으로 보여 지는 그의 인상은 후덕하고 인정이 많은 교육자요 목회자,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가 안동교회를 섬기는 3년 동안 성도들은 그의 신앙과 인격을 존경하며 영적 리더십에 순종했을 것이다. 또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고 대구제일교회 원로목사인 이상근 목사는 정재순 목사의 훈훈함을 이렇게 기억한다: “우리들이 약혼한 때는 1942년 여름, 음력으로 7월 7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견우직녀라면서 축하해 주었습니다. 약혼식은 정재순 목사님의 주례로 처가 대청에서 올렸습니다.” 정재순 목사는 교인들을 포함한 주변의 여러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주는 주의 종이었다. 2. 선교사를 만나 회심(回心)한 사람, 정재순 유교가 뿌리 깊은 가정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정재순은 처음에 기독교에 심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재순 목사의 증손자에 따르면 정재순이 선교사를 구타하고 쫒아내려고 선교사를 찾아갔다가 부해리 선교사를 만나 전도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대구 경북 조사인물편람에 따르면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루는 부해리 선교사가 ‘나의 설교 중 어느 말씀에 감동을 받아 예수를 믿게 되었는가? 라고 정재순 조사에게 물었더니 정재순 조사는 ’내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부해리의 설교가 아니고 당신이 키우고 있는 사냥개 마이크가 식사 기도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정재순 조사는 사냥개가 빵을 다리 위에 놓고 주인이 먹으라는 명령을 기다리는 순간을 식사 기도하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미천한 개도 음식을 놓고 기도하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이 어찌 기도하지 않겠는가? 하고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개도 기도하고 난 후에 밥을 먹는데, 사람인 나는 당연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이 들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정재순의 고백은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때만이 아니라 선교사의 행동 등을 통해서도 전해질 수 있음을 알게 한다. 그렇다면 정재순은 언제 회심했을까? 정재순의 회심은 경산에서 복음이 전해진 선교사와 기간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부해리 선교사는 1896년 프린스턴 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하고, 1899년에는 뉴욕 유니언 신학교(Union Th eological Seminary)를 졸업한 후 그해 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어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그해 10월 26 일 대구에 도착하였다. 결혼을 위해 대구를 떠났던 그는 1902년 5월 다시 대구 선교부에 귀환하여 경북 서부지방, 즉 김천, 선산, 군위, 고 령, 성주, 상주, 칠곡 등지에서 복음을 전해 수많은 교회를 설립하였다. 1903년 부해리 목사는 안의와(安義窩, James E. Adams)의 후임으로 대구제일교회를 담임하였고, 1904년에는 대구 성경학원의 남자 조사반을 맡았다. 또한 1916년까지 나환자 선교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12년 1월 경상노회의 조직에도 크게 기여하여 1913~14년에는 경상노회 7, 8회 노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또한 1915년에 대구 남산교회를 세워 1920년까지 당회장으로 시무하였다. (이하 내용은 논문원문 첨부파일 참조)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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