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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와 목자와 하나님과의 관계신자와 목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민수기 14장 20~45절) 장 재 효 목사 서울성은장로교회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한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23절)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24절) 교회에는 신자들이 있고, 또 그 신자들에게 영생의 소망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자인 목자가 있습니다. 이는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3:7)고 말씀하신 것처럼, 목자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 뜻에 따라 하나님이 지시하시고 명령하신대로 교회를 이끌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로 세우시고 애굽 땅에서 고통받으며 살던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그들에게 주시기 위해 12명의 정탐꾼을 선발하여 보내었으나, 열 명의 사람들이 불신앙으로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이를 듣고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불평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것에 하나님의 진노와 모세의 중보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말씀을 받는 우리는 불신앙을 버리고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믿음의 사람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1.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지내면서 바로왕의 핍박과 채찍에 시달리며 비참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고통을 보시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때가 이르매 모세와 아론을 보내시어 애굽 땅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러나 애굽의 바로왕이 강팍한 마음으로 완강히 저항하자 마지막 재앙으로 장자의 죽음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날 밤 바로왕은 결국 항복하고 그들을 보내게 됩니다. 이제 애굽을 떠나 바다와 믹돌 사이 비하히롯 앞에 갔었는데, 홍해가 일렁거리며 길을 막았습니다. 바로왕은 마음이 변하여 또다시 이스라엘 백성을 붙잡기 위해 군대를 보내 뒤쫓습니다. 앞에는 홍해요 뒤에는 애굽 군대가 가까이 다가오면서 그들이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앞에 있는 홍해가 갈라진 것입니다. 그 길을 따라 백성들이 거의 도착할 때에 갈라졌던 물이 합쳐져 애굽 군대를 모두 집어삼켜 버렸습니다. 백성들은 홍해를 무사히 건넌 후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사흘 길을 갔으나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마라라고 하는 곳에 물은 있는데 그 물이 써서 먹을 수가 없자 백성들이 모세에게 원망합니다. 모세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켜 그것을 물에 던지자 물이 달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원망하는 백성을 위해 목자의 역할을 다하였습니다. 모세의 기도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신 것은 그 백성들이 앞으로 계속 가나안에 갈 때까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해도 목자를 원망하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2. 가나안 땅의 정탐 보고 내용 민13장 말씀에 보면 백성들이 바란 광야에 이르렀을 때,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한 지파에 족장 한 사람씩 12명을 선발해 가나안땅을 40일간 정탐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왔을 때 10명이 보고하는 내용과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이 보고하는 내용이 달랐습니다. 10명은 근심하면서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다”(28절)고 보고했고, 갈렙은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30절)고 상반된 보고를 했습니다. 이에 10명은 또다시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31절)고 하면서, 그 땅을 악평하여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32~33절)고 말했습니다. 이 말 속에는 그들을 이끌어 가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믿지 못하는 불신앙이 들어있었습니다. 3. 백성들의 원망, 하나님의 진노하심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14:2~3)하며 절망합니다. 이 일로 그들의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셨습니다. 그 당시 백성들의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것도 아니고, 목자를 믿는 것도 아닌 애굽을 믿는 수준이었던 것입니다. 그 마음 깊은 곳에 애굽에 대한 미련의 뿌리가 내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렸습니다. 그때 여호수아와 갈렙이 옷을 찢으며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7~9절)고 말하였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철저히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오히려 그들을 돌로 치려 하였고, 그때 하나님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10절) 여호수아와 갈렙이 돌에 맞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4.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모세의 중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11~12절)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모세는 “이제 주께서 이 백성을 하나 같이 죽이시면 주의 명성을 들은 여러 나라가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가 이 백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에 인도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광야에서 죽었다 하리이다”(15~16절)고 말하면서, “이제 구하옵나니 이미 말씀하신 대로 주의 큰 권능을 나타내옵소서,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 같이 사하시옵소서”(17,19절)하고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그러자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20절)하고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에 대한 대가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는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22~23절)라고 맹세하셨습니다. 하지만 갈렙에 대해서는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24절)하며 소망을 주셨습니다. 결국, 가나안 땅을 악평했던 불신앙의 사람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모두 죽게 되었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권면의 말씀)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여러분들은 열 사람 족장으로 인해서 실망하는 광야교회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아닙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계획에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아무리 어려워도 찬송하며 믿음으로 따라가는 백성입니까? 이것을 스스로 냉철하게 자기 자신을 한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몰라보는 무지, 또 전적으로 불신하는 불신앙 때문에 광야에서 40년을 고생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교회만 건성으로 다니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이런 성도는 광야에서 열 명의 족장이나 그들의 말을 듣고 함께 낙심, 원망, 불평, 대적하고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무리들과 똑같습니다. 교회가 어려운 이때에 불신앙을 회개하고 진리 안에서 하나님이 붙들어 쓰시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이 목자를 통하여 성령으로 말하게 하시는 진리의 말씀, 복음의 교훈을 깨닫고 회개해서 새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믿고 주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받고 따르기를 힘쓸 때, 하나님이 성령으로 그 사람을 가꾸어 천국까지 물려받게 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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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울리는 자들의 불행예수님을 울리는 자들의 불행(누가복음 19장 41~44절) 장 재 효 목사 서울성은장로교회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41~42절)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을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43~44절) 성경은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능력’(롬1:16)이 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믿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될 수 없고, 또 그 말씀을 불순종하게 될 때 심판과 형벌이 훗날에 임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는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고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계1:3)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주신 말씀을 깨달아 복을 받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1. 애통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 본문에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41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 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서 떠나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이르자 그 성을 보시며 애통하는 마음으로 우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거부하고 불순종하는 자들로 인해 예루살렘 성이 무너질 것을 아시고 안타깝게 여기시며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신 기록은 본문 외에 요한복음 11장에도 나옵니다.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병들자 그 누이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어서야 그들에게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마리아가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를 어디 두었느냐” 하시니, 그들이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고 대답했고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신 이유는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해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셨다가 다시 살리러 가신 것으로,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거기 모여서 통곡하는 그 사람들을 보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생명을 살리시는 분이심을 믿지 못하고 절망하는 모습에 애통하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신 것은 요한복음과 본문의 내용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죄인들로 인해 애통해하시는 눈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2. 예수님을 울리는 자들의 불행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이 무너질 것을 예언하신 내용은 이전 바리새인들에게 심판하실 것을 미리 알려 주신 내용이기도 합니다. 눅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9개월쯤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잘난 척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오히려 백성들을 미혹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한데도 예수님께서는 암탉이 그 새끼를 낳아 날개 아래 품으려 한 것같이 이들을 향해 불쌍히 여기시어 수없이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돌아오지 않는 그들에게 심판이 있음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로 그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셨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시며 결국 심판이 임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자기 욕구를 쫓아 자기 방식대로 살겠다고 고집하면서 예수님 안에 들어가지를 않았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의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가 될 것이다’고 예수님이 예언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오도록 우리를 부르실 때 속히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으면 멸망당하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삽니다. 이것이 복음의 진수이며 핵심입니다. 3. 예루살렘 성의 멸망 예수님께서 그 성을 보고 우시며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42~44절) 하신 것은 앞으로 되어질 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어떤 사람들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을 것인지 묻자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눅21:20)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때가 A.D 30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40년 뒤 A.D 70년에 로마의 티투스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게 됩니다. 티투스장군이 대군을 거느리고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며 아무도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하게 토성을 쌓습니다. 그러자 안에 갇힌 사람들이 굶어 죽게 되어 자녀들을 서로 잡아먹게 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예언하신 그대로 예루살렘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무너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에 들어오라 하실 때 회개하고 들어가는 사람은 심판도 지옥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서 이미 영생에 들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아니할 때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옵니다.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이처럼 심판의 날이 임한다는 것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4.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예수님이 골고다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길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고 있었습니다.(눅23:27) 예수님은 울고 있는 그들을 향해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28절)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을 따라왔던 여인들은 예수님을 위해 헌신해 온 여인들로, 십자가를 지고 죽임당하실 예수님의 고통에 슬피 울었던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그 길을 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친히 죄인들을 위해 대신 벌 받아 주기 위한 목적이므로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능히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회개의 눈물로 애통하고 자복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나와 나의 자녀들을 위해 철저히 회개하는 애통의 눈물을 흘려야 마땅할 것입니다. (권면의 말씀) 신약성경에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약속은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잊혀진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려고 오래 참으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18:23)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악인이라 할지라도 심판하시길 원하지 아니하며, 오히려 회개하여 그 죄악의 길에서 떠나 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할 기회를 주었는데도 끝내 돌이키지 아니하면, 본문 말씀처럼 예루살렘 성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또한 명심해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신 기회를 놓치지 말고 속히 회개하시어 죄를 용서받고 예수님 안에 거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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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부활절 메시지 - 유원식 목사부활의 기쁨이 온 세상에 가득하기를 유 원 식목사 포항시기독교교회연합회 회장 포항엘림교회 할렐루야! 봄의 기운이 온 대지에 가득하고 온 산과 들에 아름다운 꽃들이 피는 계절에 올해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부활의 소망과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온 인류의 기쁨이요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부활이 없었다면 믿음으로 사는 우리들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대로 죽으시고 말씀하신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기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과 소망을 소유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힘입어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이 부활의 주님을 뜨겁게 만나고 기쁨과 감격으로 충만하여, 부활의 주님을 온 세상에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사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다시 사신 부활의 기쁜 소식이 물결처럼 온 세상에 퍼져 나가서 코로나로 힘겨워하는 온 세상에, 그리고 전쟁의 아픔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 땅과 산불피해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해안지역의 이웃들에게도 전해지도록 기도합시다. 2022년 부활절을 맞이하여 부활의 기쁨과 은혜, 부활의 감격과 능력이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충만하시기를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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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산불 이재민, 임시조립주택 입주 시작29일 북면 신화 2리, 소곡1리, 고목3리 27세대 첫 입주 ▲울진 산불 피해 이재민들이 임시조립주택 입주를 하고 있다.(사진=울진군 제공) 울진군 산불 피해 이재민들이 29일 임시조립주택 입주를 시작했다. 첫 입주가 시작된 곳은 북면 신화2리와 소곡1리, 고목3리 등 총 3개 마을로, 덕구온천호텔과 마을회관, 친척집 등에 머물던 이재민 27세대 44명이 이날 임시조립주택으로 입주를 마쳤다. 임시거주시설이지만 이재민들의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군은 임시조립주택 설치 후 필요한 소형가전과 물품을 추가지원하고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아 청소를 마친 후 이재민들을 맞았다. 또한, 죽변 농공단지와 개별단위 주택 등 임시거주시설도 조속히 조성을 완료하고 임시조립주택을 설치하여, 입주를 원하는 이재민들에게 안정적인 주거환경을 제공할 계획이다. 임시조립주택에 입주하게 된 한 이재민은 “평생을 살아온 터전을 잃고 너무 절망스러운 심정이었는데, 조립주택을 지원받아 다시 마을로 돌아올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고 말했다. 전찬걸 울진군수는 “정부와 여러 기관 등의 도움으로 이재민들의 임시 보금자리가 마련되어 기쁘다”며, “주거안정뿐만 아니라 농축산시설·산림분야 피해 등 주민들의 생계와 관련된 피해 지원방안 마련에도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전했다. 이혜경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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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군 대가면, 참외 도난방지 특별방범활동 실시!본격 수확철을 앞두고 도난예방 홍보 활동 참외 본격 수확철을 앞두고 성주군 곳곳에서 참외 도난사건이 잇따르고 있어 대가면(면장 조형철)은 참외 도난방지 특별방범활동을 실시했다. 특별방범활동으로 도난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하고자 대가면 전 지역 현수막 게첨, 이장협의회, 주민자치위원회, 의용소방대, 자율방범대, 대가농협, 농촌지도자회 등에서 참여하여 참외재배단지의 방범활동과 함께 도난예방 홍보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대가치안센터에서는 특별순찰을 하고 있다. 지역 주민은 “도둑질 한 번으로 오랜 기간 준비한 농사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며 잇따른 참외 도난사건을 우려해 반드시 범죄자를 잡아내기를 바라고 있다. 조형철 대가면장은 참외를 훔치는 것은 사소한 도난이 아닌 중범죄로 여겨 범인 적발 등 절도 범죄에 대해 강력히 대응할 예정으로, 면민의 재산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종합적인 관리를 강화할 것이라 전했다. 이혜경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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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에서 감사로!염려에서 감사로! 이정우 목사 안동서부교회 인생의 어려운 문제들을 우리의 힘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얼마든지 바꿀 수는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정탐꾼들은 똑같은 가나안 땅을 정탐했지만, 그들의 관점에 따라 열 명은 큰 성과 큰 사람들을 보고 절망으로 불평과 원망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염려가 아니라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을 위해 준비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보고 가슴 벅차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그 둘은 말하기를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관점의 차이가 확신과 염려의 차이를 가져왔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보느냐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태산이 평지처럼 보일 수도 있고 평지가 태산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태산이 평지로 바뀌는 것은 기적이지만, 태산을 평지로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도하고 힘써도 질병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고,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거나, 실패한 삶이 성공의 삶으로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죽을 만큼 노력하고 몸부림을 쳐도 상황은 여전히 어렵고 현실은 여전히 막막하고 미래는 불투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우리의 관점을 하나님께 두고 우리의 시각을 바꿀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크고 비밀한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항상 염려로 충만하기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염려꺼리를 모두 다 없애 주셨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염려거리가 없어 걱정”이라고 또 염려하더랍니다. 염려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염려합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염려하는 자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약1:8)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염려한다’는 말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안정되지 못하여 분열 상태에 이르게 되다’는 의미입니다. 더 나아가 염려라는 말은 ‘목을 조르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염려하게 함으로 목을 조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마6: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건강과 풍성한 삶을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염려는 만병의 근원이며 불행의 쓴 뿌리이며 스트레스의 주범이기 때문입니다. 염려를 안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건강하고 풍성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수로 염려를 안 하고 살 수 있을까요? 주님은 불가능한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염려하지 않게 하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심히 큰 능력이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믿음은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좋다는 말은 ‘잘 맡긴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못 맡기는 것은 불신앙의 모습입니다. 믿음이 좋고 신앙의 연륜이 깊어도 얼굴에 항상 그늘이 가득하다면 우리의 ‘믿음 좋음’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면에서 보면 염려는 병의 일종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결심으로 의지로 안 되는 것이 염려입니다. 우리의 대적 마귀가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어떡하든지 염려꺼리를 줄뿐 아니라, 힘도 실력도 없으면서 주님께 맡기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은혜 중에 은혜는 ‘잘 맡기는 은혜’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네 모든 염려를 주께 다 맡겨버리라”(벧전5:7)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믿음의 정의는 염려를 주님께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염려하는 체질에서 잘 맡기는 체질로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으면 하나님께 맡길 수 있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게 됩니다. 우리의 미래를 주께 맡김으로 염려가 변하여 아름다운 인생의 열매들을 맺는 감사의 계절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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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 목사의 논문 원문(9)- 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 김승학(안동교회)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정숙 전도사(金貞淑, 1880~1969) 한국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성경 말씀 그대로 남녀노소, 빈부, 계층에 관계없이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귀족보다는 평민,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조선시대 말기의 여성은 유교적 전통으로 인해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한국 전통사회 안에 뿌리 깊은 성차별의 문화와 여필종부, 삼종지도, 칠거지악, 남녀칠세부동석, 부부유별 등의 가부장적 가치관은 여성의 인권을 철저히 억압했다. 무지와 가난, 고된 노동과 억압된 삶을 살던 여성은 한(恨)을 품은 존재였다. 조선시대 말기에 입국한 선교사들의 눈에는 누구보다 한국 여성들이 복음의 대상이요 구원받아야 할 존재로 보였다. 릴리아스 호튼 언더우드(Lillias Horton Underwood) 릴리아스 호튼 선교사는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이다. 의료선교사인 그는 언더우드보다 8년 연상이었다. 호튼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여의사였다. 여사는 당시 한국 여성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조선여자들은 대체로 아름답지 않다. 나는 그들을 누구 못지않게 사랑하고 내 형제처럼 여기지만 그 생각은 털어놓아야겠다. 슬픔과 절망, 힘든 노동, 질병, 애정의 결핍, 무지 그리고 흔히 수줍음 때문에 그들의 눈빛은 흐릿해졌고 얼굴은 까칠까칠해졌고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그래서 스물다섯이 넘은 여자에게서 아름다움 비슷한 걸 찾는 건 헛일이다. 다만 아직 무거운 걱정거리나 힘든 노동에 시달리지 않은 나이어린 소녀들과 젊은 색시 중에는 종종 예쁘고 깜찍한 그리고 가끔 드물기는 하나 아름답기도 한, 활짝 핀 우아한 모습을 한 이를 볼 수가 있다. 이런 환경에 있던 여성들은 한국 땅에 도착한 선교사들에게 누구보다 우선적으로 중요한 선교대상이 되었다. 특히 1885년 4월 5일 인천항에 함께 도착한 미국 장로교와 미국 감리교선교사는 선교대상으로서 여성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1893년 장로교와 감리교의 양 교파 연합모임에서 선언한 10가지 한국선교정책 중에서 두 번째가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였다. 하지만 여성선교정책에 관한 장로교와 감리교의 강조점은 차이가 있었다. 사회적인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던 감리교의 경우, 처음부터 의료사업, 교육사업, 자선사업, 여성의 인권회복 등에 치중하셨다. 따라서 감리교는 여성의 계몽과 교육에 있어서 장로교에 비해 앞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직접적인 복음전파를 강조한 장로교는 우선적으로 가난한 자와 낮은 계층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사회 계층 중에서도 가장 소외된 여성들을 선교의 타깃으로 삼았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여성들이 다른 계층에 비해 더 쉽게, 더 빨리 복음에 반응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여성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성들에게 복음이 전해진 첫 10년 동안 여성 복음화의 속도는 매우 느렸다. 여성들이 소극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여성들이 매우 적극적으로 복음을 수용하고 복음에 응답함으로써 복음전파가 급속히 이루어졌다. 그 결과 사회적 활동에 수동적인 여성들이 전도사역과 계몽사업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뿐 아니라 일제의 압제 가운데서 애국 여성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1. 김정숙, 출생과 결혼 “임진(臨津) 이북의 땅은 다시 오랑캐의 땅이 될 터이니 몸을 보전하는 것을 논할 수 없다”는 예언으로 불안해하던 이북(以北) 사람들 중에는 이남(以南)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이들이 가장 선호한 지역은 정감록(鄭鑑錄)에서 언급하고 있는 ‘십승지’의 첫 번째 승지(勝地)인 경상북도 풍기(豊基)였다. 당시 난리 중에에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불안해하던 평안북도의 박천, 영변 지역에는 “풍기로 가야 산다”는 말이 떠돌았다고 한다. 정감록의 예언을 믿고 있던 북한 사람들이 실제로 이남으로의 이주가 시작된 것은 1890년대 후반부터였고, 이어서 1920년대에는 개성·평양에서 약 100여 가구가 풍기로 집단 이주를 했다. 이어 1945~50년 사이에 이북 전역에서 약 600가구가 이주를 했는데, 1가구에 5명만 따져도 600가구이면 3000명에 해당한다. 결국 약 4000~5000명의 사람들이 논과 밭, 가옥을 처분하여 풍기에 정착했는데, 현재 이들 후손들이 1000가구 정도 남아 있다고 한다. 특히 풍기로 이주해 온 사람들 가운데서 다수가 서도지역인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이었다. 1907년 창립된 풍기성내교회는 지역 토착 주민들과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온 이주민들이 함께 신앙공동체를 이룬 것으로 성내교회 100년사는 기록한다. 정감록을 믿고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도 성내교회에 출석하였다. 황해도 중에서 특히 해주와 개성출신의 이주자들은 풍기지역에서 인삼재배를 주도하였고, 평안도 출신 이주자들은 1920년에 시작된 과수재배와 직조업을 주도하였다. 이들이 풍기지역의 경제를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6·25전쟁 전후로 다시 북한에서 많은 이들이 이곳으로 이주해왔는데, 이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전쟁으로 파괴된 직조공장이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 (이하 논문 내용은 첨부파일 참조)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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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으로, 교회를 새롭게 세상을 이롭게”예장통합 제106회 총회, 류영모 신임총회장 취임 부총회장에 이순창 목사 이월식 장로 당선 ▲신임총회장 류영모 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제106회 총회가 지난 9월 28일 하루 일정으로 파주 한소망교회(류영모 목사 시무)에서 개최됐다. 이번 총회는 방역 수칙을 철저히 준수한 가운데 진행했으며, 총회 석상에서 다뤄야 할 헌법과 규칙 개정, 인사, 주요 총회 정책 수립 등의 안건만 신속히 처리하고 폐회했다. “복음으로, 교회를 새롭게 세상을 이롭게(신16:11, 막1:15, 행2:47)”를 주제로 열린 제106회 총회는 전국 69개 노회에서 목사총대 725명, 장로총대 719명, 총 1,444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회됐다. 총회 개회에 이어 진행된 임원선거에서는 총회 임원선거 조례에 따라 총회장에 제105회기 부총회장 류영모 목사가 자동승계했으며, 목사부총회장에는 이순창 목사, 장로부총회장에는 이월식 장로가 당선됐다. 총회 임원회 보고 시간에는 신임 사무총장에 김보현 목사가, 장로회신학대학교 김운용 신임총장이 각각 인준됐으며, 한국기독공보 사장 안홍철 목사 연임과 한국장로교출판사 신임 사장 박창원 장로의 인준도 통과됐다. 그 밖에 총회 석상에서만 처리할 수 있는 헌법 개정과 제 규칙·규정 제·개정안도 다뤄졌다. 특별히 헌법위원회가 목회지대물림 관련 헌법 시행 규칙 신설 조항을 삭제하고 청원한 ‘헌법개정 청원안’은 총회 석상에서 일괄 받아들여져 헌법개정위원회로 이첩됐다. 총회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보고 시, 교계의 관심사였던 인터콥선교회 재심과 이단옹호 언론 사면 해지 청원에 대해선 ‘현행대로 유지’ 등을 결의했다. 한편, 회무처리에 앞서 드려진 개회예배에서 106회기 총회장 류영모 목사는 설교를 통해 “코로나19가 1년 7개월이 지나고 있지만 교회는 결코 절망해서는 안 된다. 극한의 위기는 언제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싸인(sign)임을 인식해야 한다. 교회는 세상을 구원해야 할 역사적 책임을 가지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제106회 총회 임원 명단 ▲총회장: 류영모 목사 ▲목사부총회장: 이순창 목사 ▲장로부총회장: 이월식 장로 ▲서기: 조환국 목사 ▲부서기: 김한호 목사 ▲회록서기: 황세형 목사 ▲부회록서기: 허요환 목사 ▲회계: 전학수 장로 ▲부회계: 김진호 장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제106회 총회가 지난 9월 28일 파주 한소망교회(류영모 목사 시무)에서 개최됐다. ▲지난 10월 3일 한소망교회에서 열린 총회장 취임 감사예식에서 참석자들이 새롭게 출발하는 제106회 총회 류영모 총회장과 총회 임원들을 향해 파송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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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사명과 순교에 대한 예고베드로의 사명과 순교에 대한 예고(요한복음 21장 15~22절) 장 재 효 목사 서울성은장로교회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15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18절) 예수님은 베드로를 처음 만나던 날,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요1:42)고 말씀하시면서 베드로가 어떤 사명으로 살아가게 될지를 미리 알려 주셨습니다. 게바는 번역한즉 베드로(peter)로 반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바탕 위에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첫 사람으로 쓰임 받는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사명을 받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저주하며 부인한 것 때문에 괴로운 마음과 생활의 염려로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를 찾아오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몸으로 세 번째 만나신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1. 예전의 생활로 돌아간 베드로 요21:1~14절까지 내용을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베드로를 비롯하여 여러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는데도 예전의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베드로는 동료들과 함께 갈릴리로 가서 고기를 잡으러 그물을 내렸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허탕을 쳤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하고 물으니 “없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라고 말씀하셨고, 이에 그물을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였는데 잡힌 큰 물고기만 153마리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그 깊은 사랑을 깨닫고 주님을 떠났던 것을 철저히 회개하며 주님께로 다가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떡과 생선을 주셨을 때 제자들은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떠난 제자들이었지만, 앞으로 쓰실 계획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실패의 현장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애써 찾아가신 것입니다. 참 눈물겹도록 주님의 사랑이 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서 실패하고 절망 가운데 있는 제자들의 아픔을 예수님께서는 종합적으로 해결해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습니까? 예수님은 여러분들의 영혼만 천국에 가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육신이 땅에 사는 동안 먹고 사는 문제도 예수님이 책임져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질문하심 그러고 나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셨고, 베드로가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15절)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는 말씀은 ‘양육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또다시 베드로를 향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베드로가 같은 대답을 하자, 예수님은 “내 양을 치라”(16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을 치라’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양 떼가 되도록 그들을 잘 가르치고 훈련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세 번째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또 물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또한 주님께서 아실 것이라고 고백하였는데 왜 자꾸 되풀이해서 물으셨을까요? 베드로는 당황했습니다. 위축되고 불안한 마음으로 근심하면서 베드로는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17절)라고 다시 말씀하신 것입니다. 3. 베드로의 믿음이 회복되기를 원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왜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셨을까요? 이는 베드로가 그동안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제 예루살렘에 가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나를 잡아서 이방인의 손에 넘겨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나서서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며 큰소리를 쳤습니다. 이것은 제자로서 당연한 도리였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며 책망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시고 언약의 피를 흘리셔야 택하신 백성들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베드로는 영적으로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26:31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날이 다가올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며 확신 있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날 밤 예수님이 잡히신 후 베드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닭 울음소리를 듣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눅22:31~32절에서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이후에 믿음이 떨어질 것을 미리 아시고 그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신 이유는 베드로를 사랑하사 예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어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하신 것이었습니다. 3. 베드로의 사명과 순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신 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18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가 나중에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지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복음을 전하자 하루에 삼천 명, 오천 명이 예수님을 믿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갔을 때 “다시는 예수 이름으로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는 제사장들의 경고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라고 담대히 말합니다. 베드로는 사명을 완수하는 그 날까지 예수님의 은혜를 잊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네로 황제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로 말미암아 순교하게 됩니다. 마지막에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욕하고 부인한 그 죄책감 때문에 예수님과 똑같이 십자가에 매달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기를 자청하였습니다. 이 일은 이미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어떠한 죽임을 당할지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권면의 말씀)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한 뒤 절망하여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려 하였으나,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사 관계를 회복하도록 친히 찾아가셔서 복음을 증거 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말씀처럼 베드로는 담대히 복음을 전하며 사명을 감당하였고, 순교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자신의 믿음을 지키며 사명을 받은 직분대로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많은 영혼들이 다 구원 얻어 천국 가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우리가 합심 전력해야 합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는 마음으로 영혼 구원에 내 생애를 바치겠다는 다짐이 필요합니다. 이제 정신 바짝 차리고 이왕 믿으려면 진짜로 믿는 성도가 됩시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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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지 않는 사람변하지 않는 사람 조병우 목사 김천제일교회 어떤 목사가 목회를 하면서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자기 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기대가 무너졌을 때라고 했다. 결국 목회란 사람에 대한 기대를 마음에 품고 한평생을 기다리는 부모의 마음을 닮았다는 것이 솔직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기대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어서 마음속에 행복감을 심어주는 성도들도 많다고 했다. 목회하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사람들이 자신의 지난 삶에서 잘못된 것들을 털어내고 새 삶을 사는 모습을 보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이 사람에게 기대를 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고, 사람이 성숙했다는 것은 자기에게 주어지는 기대감을 의식하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기대감이 현실이 될 때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한 믿음을 마음에 새기게 된다. 모든 생명에는 기대감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런데 기대감이 실망이 될 때 기대감을 포기하는 대상이 되고 만다. 기대감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내 마음에서 내려놓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사람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내가 변해야 한다는 의식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성경에도 과수원을 가꾸는 품꾼의 이야기가 있다. 열매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3년을 기다리며 열심히 가꾸었지만, 아무 열매가 없게 되자 주인은 그 나무를 찍어버리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기대감을 더 이상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버림을 의미하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에게는 영적으로 기대할 것이 없다. 영적으로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을 접기 쉬운 상황 앞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에게도 기대감을 포기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자기 스스로를 점검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기대감을 포기한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포기이다. 미래에 대한 포기는 한 인생에게 느끼는 가장 무거운 절망감이다. 사람은 미래에 대한 연관성이 깊을수록 기대감을 크게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사람이 사는 곳이 다 그러하겠지만, 가정과 교회는 가장 기대감이 높은 곳이고 그 기대감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곳이 되었으면 한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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