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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시, 저소득노인 무료 백내장 수술 업무협약상주시 ⇔ 상주중앙로타리클럽 ⇔ 서울안과의원‧제일안과의원 상주시(시장 강영석)와 상주중앙로타리클럽(회장 김용한), 서울안과의원(원장 오영삼), 제일안과의원(원장 권오극)은 6월 15일(화) 오후 4시 시청 대회의실에서 ‘저소득노인 무료 백내장 수술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은 백내장으로 시력에 장애가 있는 상주시 거주 저소득층 가운데 경제적으로 어려운 노인에게 무료로 수술을 받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무료 수술을 희망하는 사람은 다음 달 1일부터 내년 6월 30일까지 읍면동 행정복지센터에 신청하면 맞춤형복지팀에서 대상자를 추천한다. 수술 대상은 400 안구(눈 숫자 기준)이며, 수술비는 상주중앙로타리클럽에서 지원한다. 수술을 담당하는 서울안과의원과 제일안과의원은 안과질환에 대한 예방과 관리 교육도 병행해 수술 전후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김용한 회장은 “고령화 사회에 백내장 무료 수술을 지원해 활기차고 건강한 노년의 삶을 지역 어르신들에게 돌려드리고 싶다. 대상자 발굴 및 선정에 도움을 주신 상주시와 수술 전후 불편함이 없도록 눈 건강 관리교육을 약속한 서울안과의원과 제일안과의원에 감사드린다”라고 말했다. 강영석 상주시장은 “상주중앙로타리클럽과 서울안과 ․ 제일안과의원의 무료 백내장 수술 업무협약 체결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저소득노인들의 눈 건강 개선과 건강 증진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라며 “앞으로도 밝고 건강한 지역사회를 위해 상생과 협력의 복지 상주를 이루어가자”고 말했다. 상주중앙로타리클럽은 2007년 창립돼 회원 86명이 활동하고 있다. 주거환경 개선사업과 해외봉사 및 나눔의 집 무상급식 봉사, 상주지역자활센터 카페 설립 지원 등 지역사회의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나눔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저소득 노인 백내장 수술 지원은 이번이 처음이다. 상주 김종환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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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4)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4)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정숙 전도사 (金貞淑, 1880~1969) 목차 서론 .............................................. 5. 담임목사의 부재(不在)를 메꾼 여성교역자 6. 다음세대 전문사역자 7. 안동교회 최초의 전도사 8. 경안노회 여전도회 연합회 리더 9. 일제에 저항한 애국운동가 10. 평신도 사역자 결론 5. 김정숙, 담임목사의 부재(不在)를 메꾼 여성교역자(2) 임학수 목사는 전도, 교육과 봉사로 교회를 부흥시켰으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2층 석조예배당을 건축하며 헌신했다. 현재 안동교회의 돌집예배당은 임학수 목사가 안동교회에 시무할 때인 병자년 1936년 초여름에 착공하여 이듬해인 정축년 1937년 사월에 준공되었다. 이 예배당의 건축과 준공 현장에 김정숙 전도사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김정숙 전도사는 석조예배당 건축 과정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교인들을 돌보고 사역을 감당하면서 교회의 안정에 적지 않은 역할을 감당했을 것이다. 어느 교회나 교역자의 위치는 중요하다. 특히 교역자가 떠나고 부임하는 사이의 기간은 교회가 불안정할 가능성이 크다. 안동교회 역시 담임목사가 비어있는 기간 당회와 안동선교부의 선교사들은 교회의 안정을 위해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담임목사 부재 시 안동교회는 다른 교회와 분명한 차이가 있다. 1920년대와 1930년대 부교역자를 둔 교회는 거의 없었지만, 안동교회는 담임목사와 여성교역자가 동역하고 있는, 당시로 보면 매우 특별한 교회였다. 김정숙 전도사는 2대 이대영, 3대 정재순, 4대 박상동, 5대 임학수 목사와 함께 전도사로 교회를 섬겼으며, 초대 담임목사를 역임한 이후 6대 담임목사로 다시 부임한 김영옥 목사, 그리고 7대 김광현 목사와 함께 평신도로 교회를 섬겼다. 그가 전도사로 또는 평신도로 안동교회를 섬긴 기간은 60년에 이른다. 특히 담임목사의 이임과 부임 사이의 공백 기간 동안 여성 교역자인 김정숙은 전도사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며, 심방을 통해 교회의 사역을 중단 없이 이어가고 교회의 안정을 지켰을 것이다. 안동교회 당회록은 그가 담임목사 부재(不在) 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맡겨진 역할을 잘 감당함으로써 교회가 흔들리지 않고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음을 알려준다. 김정숙의 영적 리더십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6. 김정숙, 다음세대 전문사역자 1) 청년사역 김정숙은 1922년부터 안동교회의 전도사로 공식적인 사역을 시작했다. 특히 그의 사역 기간은 기독청년면려회의 태동과 성장 기간과 겹친다. 이대영 목사가 안동교회 2대 담임목사로 시무를 시작한 1921년, 3·1운동의 좌절 이후 의식 있는 청년들이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기독청년면려회는 기독교 청년운동의 첫 출발을 알리는 교회 조직으로 1921년 2월 5일, 한국교회 역사상 최초로 안동교회가 공식적으로 승인하여 출범할 수 있었다. 청년면려회 운동은 청년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일본 식민지하의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독립된 국가의 내일을 준비할 수 있게 한 역사적 청년운동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기독청년면려회는 놀랍게 성장해 나갔다. 안동교회 당회가 조직을 승인한 후 경북 지방으로 신속히 확산되어 4개월이 지난 그해 6월 7일부터 9일까지 기독청년들이 안동교회에 모여 경북지역연합대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는 무려 26개 지회에 600여 명의 면려회원들이 참여해 교회와 사회를 위한 헌신을 결의했고 실제로 자신들의 삶에서 그 다짐을 실천했다. 다시 그해 9월 10일부터 15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0회 총회에서는 청년면려회를 전국 교회에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선교부 내에 면려청년위원회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이후 면려운동은 더욱 확산 일로를 달렸고, 마침내 1924년 12월 2일부터 8일까지 서울 피어선성경학원에서 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안동지역에서 기독청년면려회의 출범과 활동, 그리고 성장에 있어서 여성 교역자인 김정숙 전도사는 일정한 역할을 감당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당시 청년면려회는 남·여가 함께 모였는데, 모든 목사가 남성이었던 시대에 안동지역의 유일한 여성 교역자였던 김정숙 전도사가 여성 회원들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김정숙 전도사의 나이는 40대 후반이었다. 때로는 청년들의 어머니로, 때로는 이모로, 때로는 고모 역할을 통해 청년들의 삶을 돌보고 기독청년면려회 중심의 안동지역 청년운동이 신앙과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지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2) 어린이·청소년 사역 안동교회 4대 담임 박상동 목사는 주일학교를 통한 다음세대의 신앙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처음으로 어린이 주일에 유아세례를 베풀었음을 안동교회 80년사는 언급한다. 또한 그는 주일학교 구조를 전면적으로 개편하여 오늘날의 교회학교 조직과 거의 동일한 조직을 갖추게 하였다. 주일학교 교장은 담임목사, 부장은 평신도로 개편하고 조직을 새롭게 정비함으로써 주일학교 발전에 새로운 기틀을 놓았다. 이것은 박상동 목사가 다음세대의 신앙교육에 깊은 관심과 연구를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여름성경학교와 동일한 하계아동성경학교의 경우, 평신도가 교장을 맡게 함으로써 평신도와 함께 동역하는 성숙한 모습을 안동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유년주일학교를 거친 청소년의 신앙 교육을 위하여 오늘날의 중·고등부에 해당하는 안동기독소녀회를 창립하여 어린이와 장년 신앙교육 사이에 끼여 방치되었던 청소년의 신앙교육에 교회가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김정숙 전도사는 박상동 목사의 중점적인 사역인 어린이·청소년 사역의 지도교역자로 활동했다. 1927년에 김정숙 전도사는 당회의 허락을 받고 소녀회 고문으로 소녀들을 지도하였음을 당회록은 적시한다. 고문은 아마 소녀회 지도교역자의 다른 표현일 것으로 추측된다. 온화하고 차분하며 자상한 성품을 갖고 있던 김정숙 전도사는 주일학교의 어린이들과 청년들을 지도하는 데 매우 적합한 교역자였을 것이다. 김정숙 전도사는 어린이와 청년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하고 칭찬하며 격려하는 어머니와 같은 분이었다. 따라서 어린이와 청소년에 관한 사랑, 관심과 열정, 그리고 헌신과 전문성을 갖고 있는 김정숙 전도사에게 교회가 소녀회 고문의 직을 맡긴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1954년 4월 23일부터 27일까지 안동교회에서 개최된 제39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시 독립운동가 이원영 목사가 총회장으로 피선되었으며, 기독청년면려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전날인 4월 22일에 제5회 전국대회를 개최했다.(사진5)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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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곡교회, 교회 창립 114주년 및 척곡면려회 창립 100주년 기념세미나 통해 ‘청년면려회 정신’ 재조명해 ▲피아노를 치며 ‘금주가’를 부르고 있는 김영성 원로장로(97세). 봉화 척곡교회(담임목사 박영순)가 5월 16일(주일) 본교회당에서 ‘교회 창립 114주년 및 척곡 청년면려회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감사예배를 드렸다. 박영순 목사 인도로 드린 1부 예배에서는 경안대학원대학교 박성원 총장이 ‘역사의 저장과 재생’이라는 제목으로 메시지를 전했고 최갑도 목사(풍기성내교회 원로)가 축도했다. 2부 기념행사는 김영성 장로(척곡교회 원로) 회고사, 이교남 목사(한국기독교교회사 주영연구소 대표)와 임만조 장로(안동교회 원로) 기념사, 조승호 목사(춘양교회) 축도 순서가 있었다. 3부 세미나에서는 장로회신학대학교 임희국 명예교수가 ‘늘푸른 청년 봉화척곡교회’라는 주제로 강의하며 청년면려회의 역사와 정신을 재조명했다. 김영성 장로는 “1921년 5월 19일 척곡교회 청년면려회 창립 당시 회의록이 전국에서 유일하게 문화재 자료로 지정돼 남아있는데, 올해 창립 100주년을 맞아 제1회 기념예배를 드리게 돼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했다. 역사에 따르면, 1907년에 창립된 척곡교회는 청년 교회로 시작했으며 향후 기독청년들의 독립운동 회합장소로 사용됐다. 1920년대 장로교회는 교회 부흥회, 주일학교운동, 청년면려회운동을 진행했고, 이후 전국적으로 면려회가 확산 조직됐다. 당시 청년들은 면려회운동을 통해 신앙성숙과 성경읽기, 절제와 경건 생활을 도모했다. 청년면려회는 오늘날 남선교회로 이름을 바꿔 활동하게 됐다. 한편, 이날 행사 마지막에는 97세인 김영성 장로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당시 면려회가인 ‘금주가’를 다같이 불렀다. 김영성 장로는 “나라가 어지럽고 교계가 침체된 오늘, 1세기 전 척곡기독청년들의 뜨거운 열정이 되살아난 듯한 감동을 받았다”고 소감을 전했다. ▲척곡교회는 5월 16일(주일) ‘교회 창립 114주년 및 척곡 청년면려회 창립 100주년’ 기념 감사예배를 드렸다. 영주 우병백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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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군체육회, 새로운 도약 위한 발판 마련법인설립 위한 창립총회 개최 ▲고령군체육회가 법인설립을 위한 창립총회를 하고 있다.(사진=고령군 제공) 고령군체육회(회장 이재근)는 5월 18일(화) 14시 대가야문화누리 3층 여성단체 회의실에서 법인설립을 위한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이번 총회에서는 전환승 법인설립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한 4명이 참석한 가운데 체육회 법인 정관 승인안, 임원 선임안, 재산출연안, 주 사무소 설치안 등 법인설립을 위한 안건을 심의·의결했다. 고령군체육회는 고령군에 법인설립 인가를 받아 오는 6월 8일까지 설립 등기를 마치고, 오는 6월 9일부터는 국민체육진흥법에 따른 특수법인으로 출범하게 된다. 이재근 체육회장은 남은 일정 고령군과 원활한 협의를 통해 고령군체육회가 차질 없이 법인화가 되어, 생활 체육을 더욱 활성화하여 군민의 건강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이혜경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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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1)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1)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정숙 전도사 (金貞淑, 1880~1969) 목차 서론 1. 출생과 결혼 2. 최초의 순교를 목도한 시댁 3. 여성복음전도의 선구자 4. 평양여자성경학원의 유학생 5. 담임목사의 부재(不在)를 메꾼 여성교역자 ................................................... 10. 평신도 사역자 결론 서론 한국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성경 말씀 그대로 남녀노소, 빈부, 계층에 관계없이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귀족보다는 평민,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조선 시대 말기의 여성은 유교적 전통으로 인해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한국 전통사회 안에 뿌리 깊은 성차별의 문화와 여필종부, 삼종지도, 칠거지악, 남녀칠세부동석, 부부유별 등의 가부장적 가치관은 여성의 인권을 철저히 억압했다. 무지와 가난, 고된 노동과 억압된 삶을 살던 여성은 한(恨)을 품은 존재였다. 조선 시대 말기에 입국한 선교사들의 눈에는 누구보다 한국 여성들이 복음의 대상이요 구원받아야 할 존재로 보였다. 이런 환경에 있던 여성들은 한국 땅에 도착한 선교사들에게 누구보다 우선적으로 중요한 선교대상이 되었다. 특히 1885년 4월 5일 인천항에 함께 도착한 미국 장로교와 미국 감리교 선교사는 선교대상으로서 여성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1893년 장로교와 감리교의 양 교파 연합모임에서 선언한 10가지 한국선교정책 중에서 두 번째가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였다. 감리교의 경우는 의료사업, 교육사업, 자선사업, 여성의 인권회복 등에 치중했고, 여성의 계몽과 교육에 있어서 장로교에 비해 앞서 나갔다. 직접적인 복음전파를 강조한 장로교는 우선적으로 가난한 자와 낮은 계층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사회 계층 중에서도 가장 소외된 여성들을 선교의 타깃으로 삼았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여성들이 다른 계층에 비해 더 쉽게, 더 빨리 복음에 반응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여성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성들에게 복음이 전해진 첫 10년 동안 여성 복음화의 속도는 매우 느렸다. 여성들이 소극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여성들이 매우 적극적으로 복음을 수용하고 복음에 응답함으로써 복음전파가 급속히 이루어졌다. 그 결과 사회적 활동에 수동적인 여성들이 전도사역과 계몽사업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뿐 아니라 일제의 압제 가운데서 애국 여성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1. 김정숙, 출생과 결혼 “임진(臨津) 이북의 땅은 다시 오랑캐의 땅이 될 터이니 몸을 보전하는 것을 논할 수 없다”는 예언으로 불안해하던 이북 사람들 중에는 이남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이들이 가장 선호한 지역은 정감록(鄭鑑錄)에서 언급하고 있는 ‘십승지’의 첫 번째 승지인 경상북도 풍기였다. 정감록의 예언을 믿고 있던 북한 사람들이 실제로 이남으로의 이주가 시작된 것은 1890년대 후반부터였고, 이어서 1920년대에는 개성·평양에서 약 100여 가구가 풍기로 집단 이주를 했다. 현재 이들 후손들이 1,000가구 정도 남아 있다고 한다. 1907년 창립된 풍기성내교회는 지역 토착 주민들과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온 이주민들이 함께 신앙공동체를 이룬 것으로 성내교회 100년사는 기록한다. 김정숙(金貞淑)은 1880년 11월 10일 김병연(金秉淵)의 장녀로 풍기에서 출생했다. 그는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정숙한 여인으로 성장했다. 김정숙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가 비록 체구는 작았지만 단정하고 고상하며 강직한 성품을 갖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더욱이 그는 자식과 손자뻘 되는 교역자를 존경하고 귀애했다고 안동교회 김광현 원로목사는 기억한다. 김정숙은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성숙한 성품은 지역사회에 복음을 전하는 전도부인으로, 또한 교회에서는 전도사로서 목회 사역을 빛나게 만들었던 것이다. 김정숙은 1898년 19세 때 김규립(金奎岦)과 결혼했다. 김정숙의 시부인 김수업은 성균관 진사에 합격했으나 당시 일본과 러시아 등 열강의 침입으로 인해 정국이 어수선한 1894년, 친척들과 함께 평양에서 풍기 금계리로 이주하여 생활하고 있었다. 김수업이 이주한 시기는 북한 사람들이 풍기로 이주한 1차 때였다. 따라서 김수업의 후손은 무려 100여 년 전 풍기로 이주하여 현재까지 생활하고 있는 셈이 된다. 김정숙은 결혼한 지 8년이 지난 1907년, 28세 때 병에 걸린 남편이 세상을 떠나 혼자가 되었다. 그는 슬하에 단 한 명의 자녀도 없이 청상과부로 홀로 남게 되었다. 중병(重病)에 걸린 남편을 헌신적으로 간호하면서 마지막까지 살리려고 했던 김정숙의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잘랐던 열부(烈婦)였다. 당시 남편이 괴로워하며 숨을 헐떡거릴 때 약지(藥指)를 끊었다고 한다. 남편이 약지에서 나오는 피를 먹으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은 김정숙은 부엌으로 가서 문지방에 약지를 놓고 부엌칼로 내리쳐 쏟아지는 피를 그릇에 받아 남편에게 먹였지만 결국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훗날 평양 여자성경학원에 입학한 김정숙은 선교사가 피아노를 배울 사람은 나오라고 했을 때 피아노 위에 놓은 손가락 중 왼손 넷째 손가락이 없는 것을 본 선교사가 이 손으로는 피아노를 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피아노 배우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2. 김정숙, 최초의 순교를 목도한 시댁 김정숙의 시댁(媤宅)은 한국 기독교 최초의 순교 현장을 목격한 가문으로 전해진다. 그의 남편 김규립의 조부인 김승걸은 평양에서 발생한 한국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인 토마스(R. J. Thomas, 1840년~1866년) 선교사의 순교를 직접 목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66년 8월, 토마스 선교사는 항해사 겸 통역관으로 제너럴 셔먼호에 탑승하여 대동강으로 올라왔다가 당시 평양감사 박규수에게 붙잡혀 9월 5일 26세로 평양 대동강 변에서 처형을 당했다. 토마스 선교사는 마지막 순간 자신에게 칼을 겨누던 한 병사를 위해 기도하고 성경을 전달했는데 그가 바로 박춘권으로,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내가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것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슨 말(기도)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웃으면서 나에게 받으라 권하였다. 내가 죽이기는 하였으나, 이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왔노라." ▲1840년 영국에서 출생한 토마스 선교사는 런던 선교회 파송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천주교인을 만난 계기로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갖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변에 좌초되어 1866년 9월 5일 순교당했다.(사진1)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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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교회 창립 110주년 기념 감사예배 드려원로장로 추대 및 장로 임직예식 ▲임직식에서 선임 당회원들이 신임 장로들에게 장로 가운을 착의해주고 있다. 예장(통합) 예천교회(위임목사 김영수)가 교회 창립 110주년을 맞아 2월 28일 오후 3시 본 교회 예배당에서 감사예배를 드렸다. 예천교회는 이날 권종대 원로장로 추대 및 황칠환 조동식 안경진 이용하 장로의 장로임직 예식도 같이 진행했다. 당회장 김영수 목사의 인도로 드려진 감사예배에서는 영주노회 전노회장 최갑도 목사(풍기 성내 원로)가 “역사의 도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이어 원로장로 추대식과 장로 임직식은 김영수 목사의 집례로 진행됐다. 예식에서 권면과 축사 순서는 전노회장 송치수 목사, 전노회장 천정명 목사, 영주노회장 조영광 목사가 맡았으며, 예천교회 황주룡 원로목사의 축도로 모든 순서를 마쳤다. 황칠환 장로를 비롯한 임직자들은 “부족한 저희들에게 귀한 직분을 맡겨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며 “앞으로 더욱 열심히 교회와 지역사회를 섬기는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겠다”고 인사했다. 예천교회는 1911년 2월 26일, 용문금곡교회 출석 중이던 권수도 성도가 노하리 교동댁 ‘ㄱ’자형 주택을 임대하여 김분이, 최악이, 김조균, 교동댁 등과 함께 5명이 첫 예배를 드림으로 교회가 시작됐다. 예천교회는 이후 110년을 지나오면서 지역사회 섬김과 봉사에 앞장서 왔다. 특히 교육사업, 사회봉사 활동(늘푸른대학, 예천연탄은행, 예천문화사랑방 등), 선교활동(단독선교사 파송, 국내·외 교회 및 기관 후원 등)을 통해 하나님 나라 확장에 힘을 쓰고 있는 교회이다. 예천 남종덕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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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 목사의 논문 원문(8)- 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 김승학(안동교회)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선교사들의 보고에 따르면 1908년 안동에 선교부가 세워질 당시 안동의 인구는 약 15,000명 정도였다. 안동에 체류하고 있던 장인차(張仁車, Woodbridge O. Johnson) 의료선교사가 오월번(吳越璠, Arthur G. Welbon) 선교사에게 1910년 11월 26일 쓴 편지에 의하면 안동은 소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본 도시 중에서 가장 깨끗하고 쾌적한 도시 중의 하나였다고 기록할 만큼 안동은 선교사들에게 매력적인 도시였다. 안동에 도착한 최초의 선교사는 부산에 주재하고 있던 배위량(裵偉良, William M. Baird)으로 그는 1893년 4월 17일부터 5월 20일 까지 경상북도 지방을 순행하며 전도했다. 이후 1899년 대구선교부가 설치되자 안동은 대구선교부의 관할 지역이 되었고, 안동을 포함하는 경북북부지역은 대구선교부의 주된 선교 타게트(Target) 지역이 되었다. 대구선교부 주재 부해리(傅海利, Henry Munro Bruen) 선교사에 따르면 함께 안동을 순회한 방위렴(邦緯廉, William M. Barrett) 선교사는 1903년 안동의 첫 학습자이자 안동의 첫 열매를 얻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특히 미국북장로회 선교회가 1908년 9월 정기총회에서 안동선교부를 설립하기 위한 예비 작업을 결정하고 1909년 9월 정기총회에서 안동선교부 설립을 최종 결정한 후 안동을 중심으로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선교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사진 1. 1910년대 안동시의 모습과 생활상으로 위 왼쪽은 낙동강으로 사진 아래의 대동강은 오기로 보인다. 마을과 낙동강 사이에 논이나 밭이 보이고 도로는 동에서 서로 향하는 안동-예천 도로이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안동교회는 1909년 8월 둘째 주일 8명이 첫 예배를 드린 후 몇 차례 예배처소의 변경이 있었다. 안동교회 7대 담임인 김광현 목사는 안동교회가 임시 처소 까지 포함해 여섯 곳에서 예배를 드렸음을 기록한다. 특히 이 기록은 안동교회 7대 담임인 김광현 목사의 기억을 토대로 한 것으로 김광현 목사는 안동선교부 최초의 선교사인 사우대(史佑大, Chase C. Sawtell)이 세상을 떠난 후 1910년 1월 안동선교부 선교사로 파송되어 1952년 한국을 떠난 권찬영(權燦永, John Y. Crothers) 선교사와 그 동안 안동지역에서 사역한 선교사들과 함께 오랜 세월 동역한 안동지역 교회의 리더였다. 김광현 목사는 일본 고베중앙신학교에서 유학 후 부산 초량교회를 섬기다가 1943년 1월 안동교회 7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이후 당시 안동 주재(駐在) 선교사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통해 누구보다 안동 초기 선교역사를 잘 이해하고 있는 분이었다. 김목사는 9년 전인 2006년 12월 14일, 93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는데, 안동교회 80년사는 그의 기억이 생생할 때 쓰여진 책이다. 특히 안동교회 80년사에 기록된 안동선교와 안동교회의 초기 역사는 안동교회의 당회록, 제직회의록, 세례·학습명부, 경북노회록, 그리고 경안노회록을 기초로 김광현 목사가 안동선교 시작부터 함께 했던 여러 선교사들로부터 전해들은 내용과 자료들을 첨가한 공식적인 문서로써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안동교회 80년사에 따르면 안동교회의 예배장소는 임시 예배소까지 쳐서 여섯 번에 걸쳐 옮겨졌다. 첫 번째 예배처소는 1909년 8월 둘째 주일, 최초의 교인 8명이 창립예배를 드린 곳인 대석동 129번지로 옛 대석상회가 위치한 기독서원이었고, 두 번째 예배 장소는 1910년 선교사들의 거처했던 임시주택으로 안동교회 교육관 자리의 골기와 한옥(韓屋)이었으며, 세 번째의 임시 예배장소는 선교사들이 사택 건축을 위해 선교사들이 매입하여 잠시 거쳐하였던 구(舊) 교도소 자리에 있던 기와지붕 건물이었다. 네 번째 예배장소는 1910년에 건축된 안동시 광석동 214번지에 소재한 ‘ㄱ’자형의 16칸 크기 예배당이었다. 다섯 번째 예배 장소는 현재 100주년 기념관에 위치했던 2층 목조 함석지붕의 건물로 1914년 2월 준공되었다. 여섯 번째 예배처소는 현재도 주(主) 예배실로 사용하고 있는 석조 예배당으로 1936년 초여름에 건축을 시작하여 1937년 4월 6일에 준공되었다. 본 소고는 1909년 8월 8일 둘째 주일, 8명이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시작된 안동교회의 예배처소 위치와 예배당의 변동을 연구함으로써 안동교회의 내·외적 변화와 부흥, 선교부의 정착과 선교사의 역할 및 생활상, 그리고 초기 안동지역의 복음화 진행과정을 살펴보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1. 첫 번째 예배처소 : 기독서원(基督書院) 100여 년 전 안동에는 성경과 기독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이 존재했다. 서점의 이름은 기독서원으로 이 서점은 안동 최초의 근대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안동교회 80년사는 대구선교부의 안의와(安義窩, James E. Adams) 선교사가 서문 밖 초가 5칸을 사들여 기독서원을 개원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기독서원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교회 앞 도로 건너편 버스 정류장이 있는 대석동 129번지다. 당시 김병우(金炳宇)가 언제 안동지역의 매서(賣暑)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안의와 선교사는 김병우를 기독서원의 매서로 활용했다. 하지만 기독서원의 정확한 개원(開院) 일자는 알 수는 없다. 다만 안동교회의 첫 예배가 기독서원에서 있었기 때문에 기독서원이 첫 예배일자인 1909년 8월 8일 이전에 개원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는 있다. 이 사실을 근거로 기독서원의 개원(開院)에 관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다. 1908년 9월 미국북장로회 선교회 정기 총회 이후 부산에서 열린 한국 선교 집행 위원회는 오월번과 그의 부인인 새디, 그리고 별리추 박사에게 안동의 새 지부 개설을 요청했고, 이들이 동의함으로써 안동선교부가 개설되게 되었다. 안동 주재(駐在) 최초의 선교사인 사우대(Chase C. Sawtell)은 1908년 12월 1일 대구를 출발해 안동에 도착했지만 1909년 11월 16일 장티프스로 별세하였다. 이어 1910년 상반기에 오월번과 별리추 선교사, 권찬영 선교사가 안동으로 내려옴으로써 안동에는 3명의 선교사가 주재하게 되어 완전한 선교부의 조직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안동의 기독서원을 위한 가옥구입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당시 대구 주재 안의와 선교사에 의해 행해졌거나 안동선교부 주재 사우대, 오월번, 사우대 선교사 등에 의해 기독서원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모두 있을 것이다. 즉 안동에 선교부가 세워진 1908년 12월 이전이라면 안동이 대구선교부 관할이었기 때문에 안의와 선교사가 기독서원에 사용될 가옥을 구입했을 가능성이 크며, 1909년에 접어들어 기독서원이 개원되었다면 안동선교부에 의해 시작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하지만 안동교회 7대 담임인 김광현 목사에 의하면 안동에 교인이 증가하게 되자 대구선교부에서는 풍산교회 교인인 김병우를 매서인으로 하여 1909년 8월에 종교 서적을 파는 서점을 열게 했다고 증언한다. 사진 2는 안동교회의 첫 예배처소로 추정되는 기독서원 앞에서 성도들이 함께 촬영한 사진이다. 모임의 수나 모임 사람 대다수가 남성인 것으로 볼 때 남자성경공부반으로 추정되며, 첫 예배를 드린 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어느 때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사실 초기 한국교회가 곳곳에 세워진 것은 각 지역에 세워진 기독서원에 속한 매서와 권서의 활동과 깊은 연관이 있다. 교회가 없는 산간지방이나 외딴 지역에 매서를 통해 전해진 성경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매서들은 그 지역 그리스도인들이 모일 장소를 마련하고 예배를 인도하였으며, 이것이 훗날 교회로 발전했음을 여러 초기 자료들은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1909년 8월 8일 안동교회의 첫 예배가 당시 매서인 김병우에 의해 인도되었다는 것은 당시로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안동교회는 거의 1년 동안 이 기독서원에서 예배를 드렸다. 첫 예배 후 1년이 지날 즈음 교인의 수가 70명을 초과하여 예배공간이 비좁아 더 이상 예배를 드릴 수 없어 기독서원을 떠날 수밖에 없었음을 권찬영 선교사는 증언하고 있다. (이하 내용은 논문원문 첨부파일 참조)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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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7‧끝)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7‧끝)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론 1. 첫 번째: 기독서원(基督書院) 2. 두 번째: 선교사 임시주택 3. 세 번째: 선교사 주택 4. 비공식 예배처소: 텐트 교회 5. 네 번째: 16칸 ‘ㄱ’자 예배당 6. 다섯 번째: 목조 2층 예배당 7. 여섯 번째: 2층 돌집 예배당 결론 7. 여섯 번째 예배처소 : 2층 돌집 예배당(2) 1936년 6월 8일에 있던 제직회에서는 예배당 기초 공사를 배원달 씨에게 맡기기로 하고 교섭위원은 권중필 씨로 정함으로써 본격적인 건축에 돌입할 수 있게 되었다. 임학수 목사는 예배당의 정밀한 설계가 교우들의 생각에서 나왔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돌집예배당의 설계자는 미국인 보리수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건축의 심각한 문제는 돌집 예배당의 터가 습지였다는 것이다. 사실 습지라면 약한 지반을 가지고 있을 텐데 8,000여개의 화강암으로 세워진 육중한 예배당이 80년 넘게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튼튼한 기초 때문이다. 돌집 예배당이 지금까지 견고하게 서 있는 이유는 기초로 사용한 생소나무가 아직 썩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무가 썩지 않은 이유는 돌집 아래로 여전히 물이 흐르고 있고, 흐르는 물속에 생소나무가 잠겨 있기 때문이다. 안동교회는 이처럼 멈추지 않고 흐르는 생명수 위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김광현 목사는 그의 저서에서 ‘이 풍랑 인연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건축과정의 우여곡절을 밝혔다: “이렇듯 안동교회 2층 돌집 예배당은 어린이, 어른, 남, 여 노소, 뜻있는 사람들, 선교사, 선교회, 노회 경내의 교회 등 구분 없이 모두가 합심함으로써 병자년인 1936년 초여름 6월 공사를 시작하여 정축년 1937년 4월에 준공되었다. 돌집 예배당은 기초면적 160평의 2층 건물로 당시로 보면 대규모 예배당이라고 할 수 있다. 공사 기간은 삼백 삼십 여일이었고, 공사비 총액은 이만 이천 원이 넘는 거액이었다. 또한 지난 78년 동안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선교 중심지로 사용되었기에 돌집 예배당의 준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요 은혜라고 할 수 있다.” ▲안동교회의 역사적인 예배당 건축은 교인, 지역교회, 안동주재 선교사, 타 지역 선교부, 성소병원에 근무했던 의사, 또한 뜻있는 사람들의 합력으로 시작되었다. 공사기간은 1936년 초여름에서 1937년 4월이었다.(사진 12) 결론 1909년 8월 8일 둘째 주일, 8명이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시작한 안동교회는 지난 106년 동안 공식적으로 6차례 예배처소를 변경하였다. 6차례의 예배처소 중 3차례는 기독서원과 선교사 주택, 그리고 나머지 3차례는 안동교인들이 직접 건축한 예배당으로 이곳에서 온 교인들이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앞서 언급한 공식적인 예배당이 아닌 예배처소에서 드린 3차례 예배는 그 모두를 합해도 1년 수개월을 넘지 못한다. 반면 106년 역사 가운데 104년 9개월 여 동안 안동교회는 교인들이 직접 건축한 예배당에서 하나님을 경배할 때 안동교회에 임(臨)한 하나님의 은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런데 안동교회의 예배처소 변화는 안동 땅의 복음화 정도(程度)를 반영한다. 안동 읍에서의 공식적인 첫 예배는 5칸 기독서원에서 있었다. 기독서원은 쪽 복음 등 성경과 기독서적을 판매하는 곳이었다. 안동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장소인 서원에서 안동교회가 출범했다는 것은 안동교회에게 주어진 앞으로의 사명을 뜻하는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창립한 지 1년 동안 안동교회는 폭발적으로 부흥했다. 그 결과 기독서원은 비좁아 더 이상 온 교인들이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었고, 그 결과 첫 예배처소를 건축할 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다만 첫 예배당이 건축되기 전 까지 교인들은 옮겨 다녀야만 했으며, 그 예배처소로 선교사 임시주택을 사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기독서원을 떠난 후 그 기간은 불과 수개월에 불과하다. 1910년 10월 30일 주일, 역사적인 16칸 ‘ㄱ’자(약 30평 규모) 예배당의 입당으로 안동교회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여성·남성 성경공부반 등을 통해 보다 체계적인 양육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 첫 예배당도 오래가지 못했다. 교회의 폭발적인 부흥은 다시 새로운 예배당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오늘날 100주년 기념관이 서 있는 장소에 약 50평 규모의 2층 목조 함석지붕 예배당이 1913년 11월 착공되어 1914년 2월 준공하게 되었다. 이 2층 목조 예배당은 안동지역에 대규모 집회 시대를 열게 하였다. 여름성경학교, 도사경회, 경안주일학교대회, 경안노회 등 당시 경북 북부 지역의 중요한 대형집회가 바로 이곳 목조 2층 예배당에서 개최되어 안동지역의 교회가 부흥을 위한 기초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이 예배당에서 안동의 3·1 만세 운동을 모의하고 주도함으로써 교회의 존재를 지역주민들에게 각인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신축된 이후 2층 목조예배당은 23년 동안 안동 지역에 복음의 씨앗을 보다 적극적으로 뿌릴 수 있게 하였다. 안동교회 세 번째 예배당은 1937년 4월에 준공된 320평 규모의 2층 돌집예배당이다. 오늘까지 80년 넘은 세월 동안 사용하고 있는 2층 석조 예배당은 다양한 대규모 집회, 교육, 그리고 봉사 사역을 통해 안동지역의 복음화를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미 안동 지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석조예배당을 통해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여 열매를 수확할 수 있는 건강한 구원의 나무가 되었다. 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동은 하나님께서 지난 106년 동안 안동 땅에서 이루신 거룩한 사역을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선교 2세기를 맞는 안동 땅에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거룩한 건축물을 통해 안동 땅에 새롭고 거룩한 사역을 또 다시 펼치실지 모른다. 끊임없이 이어질 걷는 믿음의 발자취, 구속의 발걸음이 안동에서 계속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랄 뿐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동참했던 그 때 믿음의 선배들처럼 오늘을 사는 우리와 다음세대도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의 역사에 거룩한 도구로 사용되기를 기도한다. ▲돌집 예배당이 1937년 4월 준공된 후의 사진으로 78년이 지난 오늘의 예배당과 거의 동일하다. 다만 예배당 좌측 지붕에는 두 개의 굴뚝을 볼 수 있고, 예배당 건물 왼쪽 언덕에는 종탑이 서있다.(사진 13)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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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연일교회, 사랑의 성금 5천만원 전달포항연일교회(담임목사 김의환)는 1월 13일 포항시청을 찾아 코로나19로 인해 소외된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달라며 성금 5천만원을 기탁했다. 포항연일교회는 1월 9일 교회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지역사회를 기쁘게 섬기는 마음으로 성금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혜경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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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4)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4)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론 1. 첫 번째: 기독서원(基督書院) 2. 두 번째: 선교사 임시주택 3. 세 번째: 선교사 주택 4. 비공식 예배처소: 텐트 교회 5. 네 번째: 16칸 ‘ㄱ’자 예배당 6. 다섯 번째: 목조 2층 예배당 7. 여섯 번째: 2층 돌집예배당 결론 5. 네 번째 예배처소 : 16칸 ‘ㄱ’자 예배당 당시 인구 15,000명의 안동은 불교, 유교, 무교의 대표적 도시였다. 하지만 척박한 안동 땅에도 복음의 씨가 뿌려졌고, 결국 안동교회는 8명이 모여 1909년 8월 둘째 주일에 첫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새디(Sadie) 선교사가 ‘Korea Mission Field’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약 1년 전에 리더들과 7명(5명의 남성과 2명의 여성)의 성도로 시작한 안동교회는 첫 예배 당시 어느 누구도 세례를 받은 사람은 없었지만 1년이 지난 지금은 무려 75명의 성도로 성장했다”고 기록한다. 그 결과 비좁은 기독서원과 선교사 사택 등에서 예배를 드리던 안동교회는 예배당 신축이 현안으로 대두되었을 것이다. 안동교회 80년사는 네 번째 예배장소가 1911년에 건축된 안동시 광석동 214번지에 소재한 ‘ㄱ’ 자형의 16칸 크기 건물이었다고 기록한다. 정확한 위치는 100여 년 전 구한말 진영(陣營)이 있던 터로 현재 안동여고 올라가는 사거리의 농협 뒤편에 있는 건영화물 자리이다. 당시 안동교회 성도들은 자신의 첫 예배당을 건축하기 위해 정성껏 헌금했다. 그 결과 첫 삽을 뜬지 1개월 후에 감격의 준공을 맛볼 수 있었다. 16칸 예배당은 약 30평 정도로 결코 작지 않은 규모였다. 공사비에 관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건축비를 알 수는 없지만, 선교사들이나 교인들의 헌신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안동교회 초대 담임인 김영옥 목사는 자신의 노새를 팔아 건축헌금을 한 것으로 손자 김형태 목사는 밝히고 있다. 드디어 준공된 첫 예배당에서 안동교회 교인들은 1910년 10월 30일 주일, 역사적인 입당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1910년 11월 1일 권찬영 선교사가 미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쓴 편지에 따르면 그동안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은 ‘ㄱ’자 예배당의 형태와 규모를 밝히고 있다: “교회는 “L”자 모양이고, 각 부문은 16x24 피트 면적이다. 각 부문 맨 끝에는 8x16피트 면적의 방들이 있는데, 한국식 화로(아궁이, 역자주)가 설치되어 있어서 저희가 여러 날에 걸친 성경공부반을 열 때면 사람들이 그곳에서 잠을 잘 수 있게 되어 있다.” ▲권찬영 선교사의 편지를 기초로 16칸 ‘ㄱ'자 예배당의 구조를 다시 설계한 것. 양쪽으로 남·여가 따로 출입했을 것으로 추측되며, 양 끝에 방 하나씩을 둠으로써 특별한 집회가 있을 경우 숙박할 수 있도록 했다.(그림 1) 당시 선교사들은 8x8 피트를 한 칸으로 생각했으며, 이 도안을 따르면 정확히 16칸 건물이 된다. <그림 1>은 16칸 ‘ㄱ’자 예배당을 재구성한 도안이다. 새디 선교사가 1910년 10월 25일 쓴 편지에 따르면 신축한 ‘ㄱ’자 예배당에는 무려 450명 정도가 앉을 수 있었고, 아직 바닥이 깔리지 않은 상태에서 흙바닥에 자리를 깔고 예배를 드렸지만, 곧 다가올 겨울을 위해 난로를 준비함으로써 성도들을 위해 배려하는 모습도 보였다는 것이다. ‘ㄱ’자 예배당이 준공된 후 곧이어 특별집회가 열렸다. 신축된 ‘ㄱ’자 예배당에서 1910년 11월 13일부터 20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의 길선주 목사의 특별부흥집회가 있었다. 길선주 목사는 1907년 평양대부흥 운동의 기수로 이미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강사였다. 안동교회는 이 집회를 위해 체계적인 준비를 했다. 이 집회에서 98명이 결신을 했는데, 이 수는 이미 안동읍에 존재하는 것으로 언급된 그리스도인의 수보다 많았다. 매 집회 시간마다 예배당에는 많은 사람이 모였다. 길선주 목사는 예수를 믿어야만 하는 이유를 공개적으로 선포했다. 집회 마지막 날 오전 10시 30분에 시작된 집회는 만원을 이루었다. 예배당은 꽉 찼다. 길선주 목사의 설교 후 한 남성이 죄 때문에 비명을 지르며 깨지는 일이 발생했다. 다음날 새벽기도회 후 집회는 마무리되었는데, 시내에서 유력한 두 명의 남성을 포함한 98명의 새 신자가 얻어졌다. 길선주 목사의 특별부흥집회는 안동지역 선교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새디 선교사는 1911년 6월 8일 여성성경공부반 모임을 마친 후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여신자들과 교회에 갔다. 아서(오월번 선교사)가 그들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여성들과 어린이들 뒤의 초가집이 안동교회가 처음으로 건축한 16칸 ‘ㄱ'자 예배당으로 추정된다.(사진 7) 신축된 예배당은 이런 형태의 집회를 위해 계속 사용되었다. 특히 ‘ㄱ’자 예배당의 신축은 여성과 소녀를 위한 성경공부반의 활성화를 가져왔다. <사진 7>의 ‘ㄱ’자 예배당 앞에서 찍은 사진에는 여성성경공부반을 마친 후 많은 여성을 볼 수 있으며, 이전 예배처소인 기독서원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에는 많은 남성을 볼 수 있다. 더욱이 1910년 11월 26일 의료선교사인 장인차가 쓴 편지에 따르면 안동교회의 첫 번째 예배당의 준공 이후 안동복음화는 보다 활성화되었다: “안동장은 아주 큰 장으로, 항상 수천 명의 상인과 손님들로 북적북적합니다. 장날에 150명이 넘는 열성적인 한국인 신자들이 성경책, 찬송가, 소책자 뭉치들을 들고 군중들 속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는 모습은 목도합니다. 그들의 열심과 불과 같은 열정, 반대에 직면하게 될 때 보여지는 천성적인 선한 인내심은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말씀을 전하면서 그들은 사람들에게 이날이 바로 안동에 구원이 임한 날이므로 즉시 믿을 것을 강권합니다. 그들의 전도를 받은 많은 사람이 비가 온 하루를 제외하고 매일 저녁 예배에 왔습니다. 교회는 사람들로 가득 찼고, 밖에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처럼 안동교회는 창립된 지 불과 1~2년 만에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오월번 목사의 조사였던 김영옥은 1911년 6월 평양신학교 4회로 졸업하고 동년 11월 대구제일교회에서 안수를 받은 후 안동교회에 부임했는데 그는 안동교회의 초대목사인 동시에 경북 북부지방 최초의 한인 목사였다. 안동교회는 경북에서는 대구제일교회 다음으로 한인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가 되었고, 김영옥 목사의 뛰어난 영적 지도력은 안동 지역의 복음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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