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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1)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1)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정숙 전도사 (金貞淑, 1880~1969) 목차 서론 1. 출생과 결혼 2. 최초의 순교를 목도한 시댁 3. 여성복음전도의 선구자 4. 평양여자성경학원의 유학생 5. 담임목사의 부재(不在)를 메꾼 여성교역자 ................................................... 10. 평신도 사역자 결론 서론 한국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성경 말씀 그대로 남녀노소, 빈부, 계층에 관계없이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귀족보다는 평민,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조선 시대 말기의 여성은 유교적 전통으로 인해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한국 전통사회 안에 뿌리 깊은 성차별의 문화와 여필종부, 삼종지도, 칠거지악, 남녀칠세부동석, 부부유별 등의 가부장적 가치관은 여성의 인권을 철저히 억압했다. 무지와 가난, 고된 노동과 억압된 삶을 살던 여성은 한(恨)을 품은 존재였다. 조선 시대 말기에 입국한 선교사들의 눈에는 누구보다 한국 여성들이 복음의 대상이요 구원받아야 할 존재로 보였다. 이런 환경에 있던 여성들은 한국 땅에 도착한 선교사들에게 누구보다 우선적으로 중요한 선교대상이 되었다. 특히 1885년 4월 5일 인천항에 함께 도착한 미국 장로교와 미국 감리교 선교사는 선교대상으로서 여성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1893년 장로교와 감리교의 양 교파 연합모임에서 선언한 10가지 한국선교정책 중에서 두 번째가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였다. 감리교의 경우는 의료사업, 교육사업, 자선사업, 여성의 인권회복 등에 치중했고, 여성의 계몽과 교육에 있어서 장로교에 비해 앞서 나갔다. 직접적인 복음전파를 강조한 장로교는 우선적으로 가난한 자와 낮은 계층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사회 계층 중에서도 가장 소외된 여성들을 선교의 타깃으로 삼았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여성들이 다른 계층에 비해 더 쉽게, 더 빨리 복음에 반응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여성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성들에게 복음이 전해진 첫 10년 동안 여성 복음화의 속도는 매우 느렸다. 여성들이 소극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여성들이 매우 적극적으로 복음을 수용하고 복음에 응답함으로써 복음전파가 급속히 이루어졌다. 그 결과 사회적 활동에 수동적인 여성들이 전도사역과 계몽사업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뿐 아니라 일제의 압제 가운데서 애국 여성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1. 김정숙, 출생과 결혼 “임진(臨津) 이북의 땅은 다시 오랑캐의 땅이 될 터이니 몸을 보전하는 것을 논할 수 없다”는 예언으로 불안해하던 이북 사람들 중에는 이남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이들이 가장 선호한 지역은 정감록(鄭鑑錄)에서 언급하고 있는 ‘십승지’의 첫 번째 승지인 경상북도 풍기였다. 정감록의 예언을 믿고 있던 북한 사람들이 실제로 이남으로의 이주가 시작된 것은 1890년대 후반부터였고, 이어서 1920년대에는 개성·평양에서 약 100여 가구가 풍기로 집단 이주를 했다. 현재 이들 후손들이 1,000가구 정도 남아 있다고 한다. 1907년 창립된 풍기성내교회는 지역 토착 주민들과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온 이주민들이 함께 신앙공동체를 이룬 것으로 성내교회 100년사는 기록한다. 김정숙(金貞淑)은 1880년 11월 10일 김병연(金秉淵)의 장녀로 풍기에서 출생했다. 그는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정숙한 여인으로 성장했다. 김정숙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가 비록 체구는 작았지만 단정하고 고상하며 강직한 성품을 갖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더욱이 그는 자식과 손자뻘 되는 교역자를 존경하고 귀애했다고 안동교회 김광현 원로목사는 기억한다. 김정숙은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성숙한 성품은 지역사회에 복음을 전하는 전도부인으로, 또한 교회에서는 전도사로서 목회 사역을 빛나게 만들었던 것이다. 김정숙은 1898년 19세 때 김규립(金奎岦)과 결혼했다. 김정숙의 시부인 김수업은 성균관 진사에 합격했으나 당시 일본과 러시아 등 열강의 침입으로 인해 정국이 어수선한 1894년, 친척들과 함께 평양에서 풍기 금계리로 이주하여 생활하고 있었다. 김수업이 이주한 시기는 북한 사람들이 풍기로 이주한 1차 때였다. 따라서 김수업의 후손은 무려 100여 년 전 풍기로 이주하여 현재까지 생활하고 있는 셈이 된다. 김정숙은 결혼한 지 8년이 지난 1907년, 28세 때 병에 걸린 남편이 세상을 떠나 혼자가 되었다. 그는 슬하에 단 한 명의 자녀도 없이 청상과부로 홀로 남게 되었다. 중병(重病)에 걸린 남편을 헌신적으로 간호하면서 마지막까지 살리려고 했던 김정숙의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잘랐던 열부(烈婦)였다. 당시 남편이 괴로워하며 숨을 헐떡거릴 때 약지(藥指)를 끊었다고 한다. 남편이 약지에서 나오는 피를 먹으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은 김정숙은 부엌으로 가서 문지방에 약지를 놓고 부엌칼로 내리쳐 쏟아지는 피를 그릇에 받아 남편에게 먹였지만 결국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훗날 평양 여자성경학원에 입학한 김정숙은 선교사가 피아노를 배울 사람은 나오라고 했을 때 피아노 위에 놓은 손가락 중 왼손 넷째 손가락이 없는 것을 본 선교사가 이 손으로는 피아노를 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피아노 배우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2. 김정숙, 최초의 순교를 목도한 시댁 김정숙의 시댁(媤宅)은 한국 기독교 최초의 순교 현장을 목격한 가문으로 전해진다. 그의 남편 김규립의 조부인 김승걸은 평양에서 발생한 한국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인 토마스(R. J. Thomas, 1840년~1866년) 선교사의 순교를 직접 목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66년 8월, 토마스 선교사는 항해사 겸 통역관으로 제너럴 셔먼호에 탑승하여 대동강으로 올라왔다가 당시 평양감사 박규수에게 붙잡혀 9월 5일 26세로 평양 대동강 변에서 처형을 당했다. 토마스 선교사는 마지막 순간 자신에게 칼을 겨누던 한 병사를 위해 기도하고 성경을 전달했는데 그가 바로 박춘권으로,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내가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것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슨 말(기도)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웃으면서 나에게 받으라 권하였다. 내가 죽이기는 하였으나, 이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왔노라." ▲1840년 영국에서 출생한 토마스 선교사는 런던 선교회 파송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천주교인을 만난 계기로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갖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변에 좌초되어 1866년 9월 5일 순교당했다.(사진1)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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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동해안 최초! 자연친화적 울진군립추모원 임시 개원봉안당 5,922기, 자연장지 6,092기 수용 가능 장례로 인한 주민 불편 해소 기대 ▲울진군립추모원 봉안당 전경.(사진=울진군 제공) 울진군(군수 전찬걸)은 친환경·최첨단 시설을 갖춘 종합장사시설인 울진군립추모원을 오는 4월 2일부터 임시개원 한다고 밝혔다. 총 229억 원(국비 55억 원, 도비 12억 원, 군비 162억 원)의 예산으로 건립된 울진군립추모원은 경북 동해안 최초로 자연친화적으로 조성하였으며, 화장로 3기, 봉안당 5,922기, 자연장지 6,092기, 유택동산, 관리사무소, 주차장 등을 갖추고 있다. 당초 상반기 내 개원식을 한 후 운영할 계획이었으나 청명·한식을 맞아 개장수요가 증가할 것으로 판단, 군민들의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봉안당과 자연장지를 먼저 임시개원하고 추후 기반시설을 완벽히 갖춘 뒤 화장시설과 수목장림을 개원할 계획이다. 임시 개원되는 봉안당과 자연장지에 안치하기 위해선 반드시 화장된 유골이어야만 신청․접수가 가능하며, 이용료는 사망일 이전부터 6개월 이상 거주한 울진군민 개인 기준으로 봉안 60만 원, 자연장 60만 원이다. 전찬걸 울진군수는 “군립추모원 개원으로 화장률이 늘게 되면 국토훼손이 줄어들고 선진 장례문화가 정착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그동안 타 지역을 이용했던 군민들의 경제적 부담을 완화하고 다양한 장례문화 선택권을 제공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고 전했다. 이용자격 및 이용료, 이용방법은 『울진군 장사시설의 설치 및 운영조례』에 정하고 있으며, 기타 자세한 사항은 추모원운영팀 (☎054-789-6101~6104)으로 문의하면 된다. 이혜경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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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도, ‘세계 물의 날’ 우수기관 및 유공자 표창장 수여식 개최물은 미래와 통합의 상징, 물에서 경북의 내일을 찾다. ▲'세계 물의 날'을 기념하여 물산업 관련 우수지자체 및 유공자에게 표창을 수여했다.(사진=경북도청 제공) 경상북도는 22일 ‘세계 물의 날’을 기념하여 물산업 관련 우수지자체 및 유공자에게 표창을 수여했다. 이번 표창은 맑은 물 정책 추진에 앞장서 온 지자체 및 관련자를 격려하고, 물산업 정책의 중요성을 알리고자 마련되었으며, 3개 기관과 개인 9명(공무원 6, 일반인 3)에게 도지사 표창을 수여했다. 경상북도는 매년 ‘세계 물의 날’을 맞이하여, 기념행사를 통해 도내 물 관련 산업의 나아갈 방향을 공유하는 자리를 마련하였으나, 올해는 코로나 위기상황이 지속함에 따라 기념식 없이 유공자 시상만을 진행하였다. 지난 1년간 상·하수도 분야 등 물 관련 정책과 수질개선 평가에 노력한 지자체에 주어지는 기관 표창에는 문경시가 최우수 기관으로 선정되어 도지사 표창과 500만 원의 시상금을 받았으며, 우수기관으로 선정된 경주시와 안동시는 표창과 각 250만 원의 시상금을 받았다. 올해 최우수 기관으로 선정된 문경시는 대규모 지방상수도 현대화 사업과 시설개선 추진에 앞장서고 있으며, 수도권과의 인접성과 천혜의 자연환경을 활용하여 물 관련 기업유치 및 지원에도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어, 향후 중부내륙철도 개통 시 경상북도 물 산업이 수도권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 역할을 맡을 것으로 기대된다. 개인표창 시상은 사회적 거리두기 차원에서 민간기업 종사자 3명만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특히, 안동시시설관리공단 권창석 대리는 최근 국내 최초 코로나19 백신을 생산중인 일반산업단지 내 폐수처리장의 원활한 운영을 통해 백신생산을 뒷받침하였고, 2017년부터 4년 연속 공공폐수처리시설 운영관리실태평가에서 최우수처리시설을 수상한 공로를 인정받아 도지사 표창을 수여해 코로나 시대 물관리 중요성을 보여주는 본보기가 되었다. 이철우 경상북도 도지사는 “지난 10년간 세계 물 갈등이 2배나 증가하고, 텍사스 한파로 인한 물 공급 어려움으로 미국 내 전기차 생산을 멈추었던 것처럼, 물은 국가안보와 미래 산업의 근간이 되고 있다”며, “앞으로도 미래 물가치를 위한 맑은물 정책 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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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쌤과 함께 떠나는 구미 봄맞이 랜선여행「퇴근길 랜선 타고 ON 굿 이브닝 구미」 2강 구미의 건강한 먹거리 홍보로 농가도 살리고, 건강도 지켜 코로나극복을 향한 응원의 메시지 담아 요르신과 제철음식 요리대결 펼쳐 ▲장세용 구미시장(오른쪽)과 김태훈 요르신(왼쪽)의 요리대결 장면.(사진=구미시 제공) 구미시(시장 장세용)는 3월 18일 「제1기 구미시정아카데미」 수강생 40명을 대상으로 2강 구미시 문화관광분야와 농특산물 수업을 진행했다. 첫 번째 시간에는 구미의 주요 농특산물 소개와 저렴하게 살 수 있는 방법 등에 관해 설명하며, 현재 주요역점사업인 구미형 푸드플랜 사업에 대해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특히, 장 시장은 <구미농산물을 부탁해> 코너에서 김태훈 요르신(고아읍 관심2리 이장)을 초청해 코로나19로 지친 시민을 위로하는 마음을 담은 구미농산물 레시피를 공개하고 함께 요리대결을 펼쳤다. * 요르신(요리하는 어르신), 「백파더, 요리를 멈추지 마」 출연 두 번째 문화·관광시간에는 구미시 최초 공립박물관으로 등록된 구미성리학역사관의 역사적 가치와 야은 길재부터 여헌 장현광으로 이어지는 성리학 5현에 대해 알아보고, 구미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왕산 허위, 장진홍, 박희광 선생의 일대기를 돌아보는 등 우리 지역의 역사를 깊이 있게 공부해 보았다. 이어진 <구미관광, 어디까지 가봤니> 영상코너를 통해 전국체전 마스코트 새롬이·행복이와 함께 구미의 관광지를 돌아다니며 봄맞이 랜선 여행을 떠나보는 시간을 가졌다. 장세용 구미시장은 “2강은 봄을 맞아 코로나19로 지쳐있는 시민을 위해 특별히 랜선여행을 준비했다”며 “믿고 먹을 수 있는 정직한 우리 농산물 많이 이용해주시고, 소개해드린 관광지에서 힐링되는 봄을 맞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구미시정아카데미」는 시의 주요정책을 시민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는 프로그램이며 산업경제, 문화관광, 사회복지, 도시환경 등 평소 시민들이 시정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강의내용으로 진행된다. 강의는 3월 11일부터 25일까지 매주 목요일 19시에서 20시까지 주 1회, 한 시간씩 진행되며, 모든 강의는 장세용 구미시장의 직강으로 운영된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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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시, 자격증 취득 온라인 평생교육 프로그램 무료 제공슬기로운 이(e) 학습으로 온(溫)종일 배움 ▲상주시, 슬기로운 이(e) 학습으로 온(溫)종일 배움 홈페이지.(사진=상주시 제공) 상주시는 시민의 평생학습권 보장을 위해 최근 KBS 미디어 평생교육센터와 업무협약을 체결함으로써 온라인 형식의 다양한 교육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게 됐다. 과목은 반려동물 관리사, 병원코디네이터 등 70여 개 자격증 취득 과정이며, 해당 자격증은 한국직업능력개발원에 정식 등록된 국가등록 민간자격증으로 취업 시 이력서에 정식 기재가 가능하다. 상주시민 누구나 평생학습원 홈페이지 시민 온라인 교육(민간자격증 취득 온라인 무료 강좌)에서 회원가입 후 신청이 가능하며, 수강료와 온라인 시험 응시 비용은 무료다. 단, 자격증 발급 희망자는 소정의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상주시는 지난해 경북 최초로 온라인 교육을 실시해 주목을 받았고, 올해도 온라인 민간자격증 취득 과정을 포함해 생애 주기별 온라인 교육 ‘온런 타래’와 ‘방구석 평생학습 TV’ 등 다양한 비대면 교육을 추진할 예정이다. 강영석 상주시장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시민을 위한 온라인 무료 평생교육 프로그램이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며, 앞으로도 누구나 배움을 누릴 수 있는 평생학습도시를 만들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이예진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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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 기술닥터사업, 중소기업 기술 해결사로 자리매김2010년 ~ 2020년까지 11년간 중소기업 기술 문제 377건 해결 ▲구미시 기술닥터사업이 중소기업 기술경쟁력 향상에 독보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사진=구미시 제공) 구미시(시장 장세용)는 2010년부터 2020년까지 11년간 기술닥터사업을 통해 기업의 기술문제 377건을 개선하여 중소기업 기술경쟁력 향상에 독보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구미시 기술닥터사업은 기초자치단체 최초로 2010년부터 대학, 연구기관, 민간 분야 전문가를 기술닥터로 지정하여 중소기업의 애로기술을 종합적으로 해결해왔는데, 단기과제 275건은 2개월 이내에 신속히 처리하고, 중기 과제 102건은 6개월 내외로 지속적으로 관리해 문제를 해결했다. 그 결과 이차전지를 생산하는 A사는 2020년 현장 애로기술지원을 통해 애로기술 해결뿐 아니라, 관련 아이템의 사업화를 위한 정부지원까지 연계시켜 스마트 이동기기 개발에 성공했다. 또한, 2020년 벤처 창업한 B사는 기술닥터의 도움으로 소프트웨어 기술 인력 부족 문제를 극복하고, 홈쇼핑 전문업체와 공동으로 건강기능식품을 출시해 초도 3천만 원의 첫 매출 성과를 달성했다. 2021년 사업은 3월 10일에 구미전자정보기술원 홈페이지, 구미시 기업지원IT 포털을 통해 공고될 예정이며, 구미시에 소재한 중소 벤처기업은 어디든 신청할 수 있다. (구미전자정보기술원 홈페이지 www.geri.re.kr, 구미시 기업지원IT 포털 https://www.gumi.go.kr/biz) 장세용 구미시장은 “우리시는 중소기업이 가장 경영하기 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기업의 기술, 경영, 마케팅 등 전 분야를 지원하고 있는데, 특히 기술닥터 사업은 기업에서 풀지 못하는 기술적인 문제를 전문가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어 기술경쟁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라고 중소기업 지원 의지를 밝혔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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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 아동학대 신고 콜센터 본격 운영아동학대 24시간 신고접수 즉각 대응체계 구축 전국 최초 학대피해 아동 치료 검사 지원 전담의료기관 지정 ▲이강덕 포항시장이 포항시 아동학대 신고 콜센터를 방문하여 상담원 들을 격려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포항시 제공) 포항시는 신학기가 시작되면서 8일부터 아동학대 신고접수 및 현장조사 업무수행을 위한 24시간 포항시 아동학대 신고 콜센터(☎270-1391)를 본격 운영한다고 밝혔다. 콜센터 본격 운영에 앞서 지난 2월 25일부터 시스템 설치 후 약 2주간에 걸쳐 테스트 운영을 통해 미비점을 보완했고, 8일부터 운영에 돌입했다. 그동안 아동학대 신고접수는 경찰과 아동보호전문기관이 수행했으나, 공공화가 추진되면서 아동보호전문기관을 대신해 경찰과 함께 지자체가 직접 수행하고 있다. 포항시는 이번에 설치된 포항시 아동학대 신고 콜센터(☎270-1391)를 통해 아동학대 신고 건에 대해 24시간 신고접수와 함께 현장조사를 진행함으로써 즉각적인 아동학대 대응체계를 갖춘다는 방침이다. 이강덕 포항시장은 “단 한 명의 아동도 고통받는 일이 없도록 아동학대의 예방 및 방지를 위한 책임을 다하고 아동이 존중받고 건전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전했다. 한편, 정부의 포용국가 아동정책 발표(2019년 5월 23일)를 통해 아동학대 대응체계 및 보호체계가 개편됨에 따라 보호가 필요한 아동에 대한 국가의 공적 책임이 강화됐고, 이어 아동복지법 개정(2020년 10월 1일)으로 아동학대 신고접수, 현장조사, 응급보호조치 등의 업무가 시군구로 이관됨에 따라 현재 아동보호체계의 공공화가 진행되고 있다. 이에 따라 포항시는 아동보호체계 공공화 추진을 위해 지난해 7월 9일 교육청소년과 내 아동보호팀 신설을 시작으로 9월 29일에는 포항시 아동학대 예방 및 피해 아동보호에 관한 조례를 제정했다. 같은 해 12월 18일에는 전국 최초로 학대피해아동에 대한 치료와 검사를 지원하기 위한 아동학대 전담의료기관을 지정했으며, 올해 1월 정기인사에서 아동보호인력을 추가 배치하고 학대조사 대응인력에 대한 이론 및 전산교육을 통해 실무대응 능력을 강화하는 등 아동보호체계 공공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와 함께, 기존 아동학대 업무를 수행하는 아동보호전문기관으로부터 노하우 전수와 지속적인 교육을 통한 아동학대 초기대응 및 현장조사를 위한 아동학대전담공무원의 전문성과 현장 대응인력의 협업을 강화하는 등 공공중심의 아동보호체계 조기정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혜경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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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 목사의 논문 원문(8)- 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 김승학(안동교회)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선교사들의 보고에 따르면 1908년 안동에 선교부가 세워질 당시 안동의 인구는 약 15,000명 정도였다. 안동에 체류하고 있던 장인차(張仁車, Woodbridge O. Johnson) 의료선교사가 오월번(吳越璠, Arthur G. Welbon) 선교사에게 1910년 11월 26일 쓴 편지에 의하면 안동은 소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본 도시 중에서 가장 깨끗하고 쾌적한 도시 중의 하나였다고 기록할 만큼 안동은 선교사들에게 매력적인 도시였다. 안동에 도착한 최초의 선교사는 부산에 주재하고 있던 배위량(裵偉良, William M. Baird)으로 그는 1893년 4월 17일부터 5월 20일 까지 경상북도 지방을 순행하며 전도했다. 이후 1899년 대구선교부가 설치되자 안동은 대구선교부의 관할 지역이 되었고, 안동을 포함하는 경북북부지역은 대구선교부의 주된 선교 타게트(Target) 지역이 되었다. 대구선교부 주재 부해리(傅海利, Henry Munro Bruen) 선교사에 따르면 함께 안동을 순회한 방위렴(邦緯廉, William M. Barrett) 선교사는 1903년 안동의 첫 학습자이자 안동의 첫 열매를 얻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특히 미국북장로회 선교회가 1908년 9월 정기총회에서 안동선교부를 설립하기 위한 예비 작업을 결정하고 1909년 9월 정기총회에서 안동선교부 설립을 최종 결정한 후 안동을 중심으로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선교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사진 1. 1910년대 안동시의 모습과 생활상으로 위 왼쪽은 낙동강으로 사진 아래의 대동강은 오기로 보인다. 마을과 낙동강 사이에 논이나 밭이 보이고 도로는 동에서 서로 향하는 안동-예천 도로이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안동교회는 1909년 8월 둘째 주일 8명이 첫 예배를 드린 후 몇 차례 예배처소의 변경이 있었다. 안동교회 7대 담임인 김광현 목사는 안동교회가 임시 처소 까지 포함해 여섯 곳에서 예배를 드렸음을 기록한다. 특히 이 기록은 안동교회 7대 담임인 김광현 목사의 기억을 토대로 한 것으로 김광현 목사는 안동선교부 최초의 선교사인 사우대(史佑大, Chase C. Sawtell)이 세상을 떠난 후 1910년 1월 안동선교부 선교사로 파송되어 1952년 한국을 떠난 권찬영(權燦永, John Y. Crothers) 선교사와 그 동안 안동지역에서 사역한 선교사들과 함께 오랜 세월 동역한 안동지역 교회의 리더였다. 김광현 목사는 일본 고베중앙신학교에서 유학 후 부산 초량교회를 섬기다가 1943년 1월 안동교회 7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이후 당시 안동 주재(駐在) 선교사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통해 누구보다 안동 초기 선교역사를 잘 이해하고 있는 분이었다. 김목사는 9년 전인 2006년 12월 14일, 93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는데, 안동교회 80년사는 그의 기억이 생생할 때 쓰여진 책이다. 특히 안동교회 80년사에 기록된 안동선교와 안동교회의 초기 역사는 안동교회의 당회록, 제직회의록, 세례·학습명부, 경북노회록, 그리고 경안노회록을 기초로 김광현 목사가 안동선교 시작부터 함께 했던 여러 선교사들로부터 전해들은 내용과 자료들을 첨가한 공식적인 문서로써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안동교회 80년사에 따르면 안동교회의 예배장소는 임시 예배소까지 쳐서 여섯 번에 걸쳐 옮겨졌다. 첫 번째 예배처소는 1909년 8월 둘째 주일, 최초의 교인 8명이 창립예배를 드린 곳인 대석동 129번지로 옛 대석상회가 위치한 기독서원이었고, 두 번째 예배 장소는 1910년 선교사들의 거처했던 임시주택으로 안동교회 교육관 자리의 골기와 한옥(韓屋)이었으며, 세 번째의 임시 예배장소는 선교사들이 사택 건축을 위해 선교사들이 매입하여 잠시 거쳐하였던 구(舊) 교도소 자리에 있던 기와지붕 건물이었다. 네 번째 예배장소는 1910년에 건축된 안동시 광석동 214번지에 소재한 ‘ㄱ’자형의 16칸 크기 예배당이었다. 다섯 번째 예배 장소는 현재 100주년 기념관에 위치했던 2층 목조 함석지붕의 건물로 1914년 2월 준공되었다. 여섯 번째 예배처소는 현재도 주(主) 예배실로 사용하고 있는 석조 예배당으로 1936년 초여름에 건축을 시작하여 1937년 4월 6일에 준공되었다. 본 소고는 1909년 8월 8일 둘째 주일, 8명이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시작된 안동교회의 예배처소 위치와 예배당의 변동을 연구함으로써 안동교회의 내·외적 변화와 부흥, 선교부의 정착과 선교사의 역할 및 생활상, 그리고 초기 안동지역의 복음화 진행과정을 살펴보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1. 첫 번째 예배처소 : 기독서원(基督書院) 100여 년 전 안동에는 성경과 기독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이 존재했다. 서점의 이름은 기독서원으로 이 서점은 안동 최초의 근대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안동교회 80년사는 대구선교부의 안의와(安義窩, James E. Adams) 선교사가 서문 밖 초가 5칸을 사들여 기독서원을 개원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기독서원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교회 앞 도로 건너편 버스 정류장이 있는 대석동 129번지다. 당시 김병우(金炳宇)가 언제 안동지역의 매서(賣暑)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안의와 선교사는 김병우를 기독서원의 매서로 활용했다. 하지만 기독서원의 정확한 개원(開院) 일자는 알 수는 없다. 다만 안동교회의 첫 예배가 기독서원에서 있었기 때문에 기독서원이 첫 예배일자인 1909년 8월 8일 이전에 개원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는 있다. 이 사실을 근거로 기독서원의 개원(開院)에 관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다. 1908년 9월 미국북장로회 선교회 정기 총회 이후 부산에서 열린 한국 선교 집행 위원회는 오월번과 그의 부인인 새디, 그리고 별리추 박사에게 안동의 새 지부 개설을 요청했고, 이들이 동의함으로써 안동선교부가 개설되게 되었다. 안동 주재(駐在) 최초의 선교사인 사우대(Chase C. Sawtell)은 1908년 12월 1일 대구를 출발해 안동에 도착했지만 1909년 11월 16일 장티프스로 별세하였다. 이어 1910년 상반기에 오월번과 별리추 선교사, 권찬영 선교사가 안동으로 내려옴으로써 안동에는 3명의 선교사가 주재하게 되어 완전한 선교부의 조직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안동의 기독서원을 위한 가옥구입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당시 대구 주재 안의와 선교사에 의해 행해졌거나 안동선교부 주재 사우대, 오월번, 사우대 선교사 등에 의해 기독서원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모두 있을 것이다. 즉 안동에 선교부가 세워진 1908년 12월 이전이라면 안동이 대구선교부 관할이었기 때문에 안의와 선교사가 기독서원에 사용될 가옥을 구입했을 가능성이 크며, 1909년에 접어들어 기독서원이 개원되었다면 안동선교부에 의해 시작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하지만 안동교회 7대 담임인 김광현 목사에 의하면 안동에 교인이 증가하게 되자 대구선교부에서는 풍산교회 교인인 김병우를 매서인으로 하여 1909년 8월에 종교 서적을 파는 서점을 열게 했다고 증언한다. 사진 2는 안동교회의 첫 예배처소로 추정되는 기독서원 앞에서 성도들이 함께 촬영한 사진이다. 모임의 수나 모임 사람 대다수가 남성인 것으로 볼 때 남자성경공부반으로 추정되며, 첫 예배를 드린 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어느 때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사실 초기 한국교회가 곳곳에 세워진 것은 각 지역에 세워진 기독서원에 속한 매서와 권서의 활동과 깊은 연관이 있다. 교회가 없는 산간지방이나 외딴 지역에 매서를 통해 전해진 성경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매서들은 그 지역 그리스도인들이 모일 장소를 마련하고 예배를 인도하였으며, 이것이 훗날 교회로 발전했음을 여러 초기 자료들은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1909년 8월 8일 안동교회의 첫 예배가 당시 매서인 김병우에 의해 인도되었다는 것은 당시로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안동교회는 거의 1년 동안 이 기독서원에서 예배를 드렸다. 첫 예배 후 1년이 지날 즈음 교인의 수가 70명을 초과하여 예배공간이 비좁아 더 이상 예배를 드릴 수 없어 기독서원을 떠날 수밖에 없었음을 권찬영 선교사는 증언하고 있다. (이하 내용은 논문원문 첨부파일 참조)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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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교육청, 오는 3월 신설학교 개교 현황 점검석적중(신설)외 2교 개교 준비 상황 및 현장 안전 점검 ▲칠곡 석적중 개교현황 안전 점검 현장 모습.(사진=경북교육청) 경북교육청(교육감 임종식)은 지난 16일에서 19일까지 오는 3월 신설 개교 예정인 칠곡 석적중학교, 김천 운남중학교, 예천 단샘유치원을 방문해 개교 추진 상황 등 현장 안전점검을 했다. 이번 현장 안전점검은 신설학교 개교에 따른 인원 배치, 물품구입, 기기 시험가동 등 준비 상황 등을 점검하기 위함이다. 또한, 공사현장의 시공정밀도, 최초 사용에 따른 안전성, 유해요인 제거, 재난 발생 시 문제점 요인 등을 점검하고 보완 사항을 지시했다. 한편, 칠곡 석적중학교는 부지면적 13,071㎡, 지상4층, 지하1층 규모에 총사업비 257여억 원, 김천 운남중학교는 부지면적 14,041㎡, 지상5층, 지하1층 규모에 총사업비 282여억 원, 예천 단샘유치원은 부지면적 1,926㎡, 지상3층 규모에 총사업비 76여억 원으로 정상 개교에 차질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박태경 시설과장은 “모든 안전사고와 시설분야 문제점 등을 개교일까지 계속 모니터링 해 신입생과 학부모들에게 불편함이 없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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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 목사의 논문 원문(2)- 안동이 배출한 첫 해외선교사, 이대영 목사안동이 배출한 첫 해외선교사, 이대영 목사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이 대 영 목사 (李大榮, 1887~1968) 1887년 경상북도 예천군에서 출생한 이대영 목사는 시대를 앞서간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 믿기 힘든 유학이 강한 마을과 가정에서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도 혹독했다. 그는 더 이상 고향 땅에서 살지 못하고 객지로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일정한 훈련을 거친 후 하나님께서는 그를 고향으로 보내셨고, 뛰어난 복음전파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그 후 전도인, 조사로 활동하면서 평양신학교의 신학교육을 마치고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시무하며 기독청년면려회와 주일학교를 통해 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갈 뿐 아니라 지역복음화와 교회 부흥을 선도했다. 그가 시무할 때 시작된 기독청년면려회 운동은 3·1운동의 실패로 실의에 빠져있던 이 땅의 청년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갖고 미래를 준비하게 만들었다. 총회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안동을 떠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파송 선교사로 1922년 6월 13일 중국 래양에 도착한 이대영은 그 땅에 머무는 동안 중국인들과 함께 중국인처럼 살았다. 1949년 중국의 공산화로 인해 선교를 포기하고 1955년에 완전히 철수할 때 까지 이대영 목사는 33년 동안 중국인을 동족으로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함으로서 산동반도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산동반도에 거주하고 있는 재중동포들을 잘 돌보았던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1954년 4월 산동성에서의 완전 출수 후 오직 하나님 나라, 교회와 총회를 위해 헌신하다가 1968년 하나님이 부르심을 받은 믿음의 선배이다. 1. 이대영, 금당실 마을에서 출생하다 백사(白沙) 이항복의 후손인 이대영(李大榮)은 1887년 4월 23일,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에서 이유성(李裕成)과 김도혜(金道徯)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이대영이 출생한 마을은 금당실로 불러졌는데 선교사가 동네에 와서 복음을 전하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했다. 예천 땅을 처음 밟은 선교사는 부해리(傅海利, Henry Munro Bruen, 1874~1959)로 조사 이희봉과 함께 1907년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7년은 평양에서 시작한 대부흥으로 전국에 뜨겁게 부흥의 열기가 확산되고 있던 때이다. 따라서 인근지역인 안동, 영주, 문경, 상주, 의성에 선교사들과 조사들의 활동으로 이미 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있었다. 이러한 영적 분위기에 따라 예천 최초의 신자인 나만기(羅萬基)에 의해 당교회가 시작되었다. 특히 금곡(금당실)교회의 시작은 이러하다. 1893년 낙향해 금당실에 머물 던 이유직(李裕稙)은 양주 목사를 한 형 이유인(李裕寅)을 추모하며 99칸의 한옥 저택을 지어 생활했다. 하지만 동학혁명에 가담해 도망하던 이유직은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고, 그 때 복음을 전해 들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유교전통이 유독 강하고 불교 중심의 마을이었던 금당실은 복음이 전파되기 대단히 어려웠다. 따라서 이유직은 때를 기다리며 1899년 전후, 자신의 집에서 은밀하게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금곡교회의 첫 출발로 알려져 있다. 금곡교회는 선교사의 지도를 받으며 상곡교회라는 공식 교회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금곡교회는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교회가 아니라 선교사가 직접 복음을 전하기 전에 쪽 복음과 전도지를 읽고 복음을 접한 평신도에 의해 세워진 자생적 교회인 것이다. 그 후 점차 예배드리는 수가 늘어가 교회는 계속 부흥하게 되었다. 예천지역 초기 3대 교회는 상곡교회, 괴당교회, 그리고 상락교회라고 할 수 있다. 이대영은 괴당교회가 설립될 당시인 1907년 경, 복음을 소개받고 믿음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부모의 반대와 금당실의 영적 분위기에 의해 자신이 예수 믿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낼 수 없었다. 이대영 목사는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자신의 고집 때문임을 배태준 장로에게 고백한 적이 있다. “내가 처음 예수 믿을 때에 우리 집안에서 ‘양반 가정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하고 못 믿게 하는 것을 참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기고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이심을 믿고 죽기로 하고 고집을 피워서 된 것이고, 일제 말엽 신사참배 문제로 그렇고 극성을 피울 때에도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신앙의 정절을 지킨 것도 내 고집 때문이었고.” 한번은 아버지가 이대영에게 소의 여물인 짚을 자르는 작두에 목을 대라고 해서 그대로 대었더니 아버지는 결국 자식을 포기하는 길을 선택했다고도 한다. 이대영은 부모의 반대로 고향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가족과 함께 1910년 연일군 흥해면으로 이사하였다. 흥해에 도착한 이대영은 가족과 함께 흥해교회에 출석하면서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특히 이곳에서 선교사로부터 신앙훈련과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전통적인 양반가문의 후예인 이대영은 비록 가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복음사역을 위해 철저히 준비시키셨던 것이다. 비록 예수 믿는다고 집에서 버림을 받아 객지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품으셨고, 훗날 당신의 필요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 가셨고, 결국 하나님의 때에 한국 땅에서 중국 땅에서 복음전파의 귀한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이다. 2. 이대영, 부해리 선교사를 만나다 안동을 포한한 경북북부지역에 복음이 처음으로 전해진 것은 1893년으로 당시 부산선교부에 있던 배위량(William M. Baird) 선교사가 부산을 출발하여 밀양, 청도, 대구, 상주, 안동, 영천, 울산을 순회하며 전도하고 부산으로 귀환한 것이다. 이후 1902년 3월에 대구선교부에 있던 안의와(James E. Adams) 선교사가 안동지역을 방문하여 복음을 열심히 전했다. “두 차례의 봄철 선교여행을 다녀온 후 곧 3차 여행을 시작했다. 1차는 3월과 4월에 경상도 북부지방을 다녔다. 이들 지방은 선교사들이 전혀 방문한 적이 없는 곳이었다. 이들 9명의 관리들을 만나고 많은 전도 서적을 팔았으며 장터에서 전도를 했다. 1개월 이상 장터를 돌며 전도하고, 약 1천 권 이상의 책을 팔았다.” 안의와 선교사의 안동 방문의 결과 안동지역을 포함한 경북북부 지방은 선교사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다. 안의와 선교사 안동 방문 후 1903년 봄 대구선교부의 방위렴(William M. Barrett) 선교사와 부해리 선교사가 안동을 직접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부해리 선교사는 1892년 미국 장로교 기숙학교인 블레어 홀 아카데미(Blair Hall Academy)에서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22세 때인 1896년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했다. 그 후 부친과 조부가 졸업한 뉴욕의 유니언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공부를 마친 후 1899년 졸업하고 그해 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어 미국 북장로교로 부터 한국 선교사로 파송 받아 1899년 10월 26일 대구에 도착하여 초창기 대구·경북 지역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1년 일제의 탄압으로 추방되기 까지 40여 년 한국선교에 평생을 바친 부해리 선교사는 경북 북부지역에 복음을 전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부해리 선교사를 포함한 여러 선교사들의 헌신의 결과, 1903년 미국 북장로교 연회보고에 의하면 경북·대구 지역 7개 고을에서 12명의 교인이 생겨났고, 1904년 보고에는 12개 고을에서 6개 교회에 7명의 학습교인, 33명의 원입교인이 생겨났으며, 1905년 보고에는 20개 고을에 8개 교회에 2명의 세례교인, 19명의 학습교인, 79명의 원입교인이 생겨났다. 복음의 불모지와 다름없던 경북북부 지방에 선교사들의 헌신으로 복음의 씨앗이 뿌려짐으로써 복음화의 불씨가 발아(發芽)할 날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영적 분위기 가운데서 이대영의 회심에 관한 이야기는 두 가지 설로 나뉘어진다. 우선 박용규는 1907년 경, 이대영은 나만기에 의해 복음을 소개받고 예수를 믿게 된 것으로 추측한다. 이미 예천에 존재했던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고, 그가 복음을 전달받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박용규의 추측처럼 1900년대 초 예천의 3대 교회 중의 하나인 괴당교회(槐堂敎會)를 설립한 나만기에 의해 복음을 전해 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여러 자료들은 이대영이 부해리 선교사에 의해 예수를 믿게 되었음을 증거한다. 이대영은 한국교회의 최초의 대부흥이 일어난 1907년 당시 대구선교부 소속 선교사로 있던 부해리 선교사에 의해 복음을 전달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대영 목사가 1956년 9월 41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할 당시 회계로 수고한 배태준 장로도 이대영이 20세 때 부해리 선교사를 만나 예수를 믿게 되었음을 밝힌 적이 있다고 그의 자서전에서 기록한다. “이대영 목사는 부해리 선교사에게서 복음을 들었으며 신앙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고집을 가지고 추진하였기에 중국 산동성에서도 중국인 목사나 외국인 선교사들에 비해 큰 부흥을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여러 자료들은 이대영이 부해리 선교사를 통해 전도를 받았음을 증거하고 있다. 대구·경북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부해리 선교사와의 역사적 만남으로 이대영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했으며, 이후 전도인, 조사를 거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 임직한 이후 한국교회와 중국선교의 거룩하고 위대한 한 도구가 되었던 것이었다. (이하 내용은 논문원문 첨부파일 참조)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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