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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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농선교회 구미지부, 영혼 구령운동에 앞장서다한국도농선교회 구미지부(지부장 정희수 목사)는 지난 19일 구미동부교회(담임목사 정희수)당에서 정기모임을 갖고 구미시의 복음화를 위한 기도회를 열었다. 한국도농선교회는 도시와 농촌지역의 개척교회 및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이 모여 영혼 구령운동에 힘쓰고 있는 초교파 전도모임 단체이다. 회원들은 매달 정기모임과 금요연합기도회를 통해 많은 동력을 받아 전도에 열정을 쏟고 있으며, 미용 봉사와 리모델링 봉사 등을 통해 지역민을 섬겨나가고 있다. 현재는 21명의 목회자가 구미지회 회원으로 협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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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축제한마당 “국적·고향은 달라도 우리는 이웃”경주시(시장 주낙영)와 경주YMCA(이사장 이광오)가 주최하는 지구촌 축제 한마당 행사가 지난 10월 28일(일) 경주 황성공원 내 실내체육관에서 열렸다. 이 행사는 이주민과 시민이 함께 어울려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소통과 나눔을 통한 화합하는 축제를 통해 지역사회 연대감을 형성하기 위해 마련됐다. 이날 축제는 전통놀이와 외국인 근로자 동아리공연, 세계아동 패션 퍼포먼스와 국가별 민속 공연을 선보이는 등 이국적인 문화를 만끽할 수 있는 자리였다. 특히, 경주시의사회와 한의사회, 약사회에서는 평소 의료 혜택을 받기 어려웠던 외국인 주민에게 의료상담과 무료진료를 위한 건강존(Health Zone)을 운영했다. 또한, 알뜰장터, 친환경 전통 공예품, 환경지킴이 체험을 위한 환경존(Eco Zone)을 비롯해 각 나라별 전통음식을 체험하고 무료시식을 할 수 있는 음식존(Food Zone)을 운영해 시민과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다양한 볼거리와 먹을거리, 즐길 거리를 가득 제공했다. 주낙영 경주시장은 “이번 축제가 상호 간 소통을 통해 진정한 사회통합을 이루는 토대가 되길 바란다”며, “앞으로 다양한 다문화정책을 확대해 이주민들이 한국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지원을 확대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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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애국자·인간 박상동 목사(1)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박상동 목사 (朴尙東, 1894~1949) 들어가면서 안동교회 제4대 담임목사(1925~1928)로 시무한 박상동(朴尙東, 1894~1949) 목사는 아버지가 목사였고, 목사의 아들을 두었으며, 한국교회에서는 단 한 자릿수에 불과한 직계목사 손자를 둔 4대 목사 가문(家門)의 중심이었다. 그의 조부(祖父)·부친(父親)뿐 아니라 그 역시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였다. 그래서 고등학생 신분으로 6개월의 옥고(獄苦)를 치르기도 했다. 극일(克日)하기 위해 박상동 목사는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일본유학을 떠났다. 일본에서 4년 동안 신학을 공부하며 오사카와 고베에 거주하고 있던 재일교포를 위해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했다. 귀국한 후 안동교회를 섬기면서 전도, 사회봉사, 교회조직의 변화, 다음 세대의 신앙교육 등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의 헌신을 통해 안동교회는 새롭게 리모델링(Remodeling)되어 시대에 맞는 교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박상동 목사는 이민자의 삶의 고단함과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고 안동교회 사역을 중단한 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와 나고야, 그리고 인근 지방의 복음화와 교회개척에 거룩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당시 한국과 재일교회를 위한 사도바울과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일제 말엽 그는 교포들의 인권개선노력과 민족독립운동의 죄목으로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생사(生死)의 고비에서 해방과 함께 석방되어 귀국한 박상동 목사는 끝없는 복음의 열정으로 교회를 섬기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박상동 목사는 복음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초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의 등에 십자가를 지는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성도와 자녀에게는 인자하고 겸손한 목사요 아버지였다. 그는 음악을 좋아했으며 자식들에게 사랑의 아버지로 기억되고 있다. 이 글은 박상동 목사의 일생을 기록한 소고(小考)이다. 하지만 이 글에는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믿음의 가문, 믿음의 사람의 거룩한 흔적을 포함하고 있다. 이제 독립운동가요, 복음전도자요, 교육자요, 아버지요, 음악을 좋아한 사람이요, 목사요, 인격자인 인간 박상동을 감사한 마음, 기대하는 마음으로 만나보자. 1. 마태복음 1장의 ‘낳고, 낳고, 낳고’를 재현(再現)한 가정 마태복음 1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 그 족보는 아담에서 시작하지 않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한다. 박상동 목사 집안도 초창기 한국교회 믿음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는 명문가문이다. 1) 1대 박영화 목사박상동은 1894년 경북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에서 박영화(朴永和, 1859~1923)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박영화는 1902년경에 김인옥, 이성준의 전도를 받고 전 가족(부친인 박용한과 3남 8녀) 모두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군위군 호암교회에 출석하다가 다음 해인 1903년 쌍계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그는 특별히 교육에 관심을 갖고 1910년 농촌지역 복음화와 인재양성을 위해 쌍계교회에 정림학교(1920년 폐교)를 설립하여 운영한 명망 있는 지역의 지도자였다. 이런 박영화는 1914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8년 제11회로 졸업하고 동년 6월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쌍계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시무했다. 그는 1919년 3·1 의성 만세운동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후 경남 거제시 사능교회 초대담임 목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박영화 목사는 거제도와 통영 등 경남지역 초기 교회의 존경받는 목회자로 자리매김하였다. 2) 2대 박상동 목사이러한 신앙적 분위기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박상동은 아버지와 기독교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대구 계성학교 출신으로, 부친과 함께 3·1 만세운동의 옥고를 치른 후 일본 고베에 있는 칼빈계 고베중앙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1925년 귀국하여 안동교회 강도사로 부임하였다. 박상동은 안동교회 강도사로 시무하면서 평양신학교에서 별신학(別神學) 과정 1년간을 수학하였다. 박상동 목사는 1926년 9월 경안노회(제11회)에서 목사안수 후 안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885년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41년 만에 직계(直系)로 부자(父子)가 목사 임직자가 됨으로써 아버지, 아들 목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3) 3대 박대선 목사경북 의성군 비안면에서 박상동 목사의 장남으로 출생한 박대선 목사(1916~2010)는 1940년 일본관서학원대학교 영문과와 1942년 동 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1955년 미국 보스톤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구약신학전공으로는 한국인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40년부터 1942년까지 니시노미야시 한인교회의 담임전도사로 사역했으며, 귀국하여 1942년부터 1950년까지 평양 창광산교회, 박구리교회, 중앙교회, 서평양교회 등을 섬겼다. 박대선 목사는 1945년부터 1950년까지 평양성화신학교 교장대리 역임, 1955년부터 1964년까지 서울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역임, 1959년부터 1962년까지는 서울 광화문감리교회에서 담임목회를 했다. 특히 1964년부터 1975년까지 연세대학교 총장을 역임하다가 3선 임기 중 저항 운동에 나선 교수의 복직을 반대하던 당시 정부와 심한 불화를 겪다가 사임하였다. 4) 4대 박태기 목사박대선 목사의 차남인 박태기 목사는 공학박사로서 KIST의 책임연구원으로 있다가 소명을 받고 감신대를 졸업한 후 목사가 되었다. 중진 과학자로서 인정받고 안정된 생활을 하다가, 일생의 여름과 같은 때에 성직의 길에 들어섬으로써 대(代)를 이어 직계 4대 목사 가문(家門)을 이어가고 있다. 2. 애국자 박상동 의성에서 3·1 독립만세가 크게 울려 퍼진 날은 1919년 3월 12일이다. 11일에 의성군 비안공립보통학교 학생 150여 명이 학교 뒷산에 올라가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친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쌍계리에서 쌍계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만세운동의 중심인물은 김원휘 조사, 김충한, 쌍계교회 박영달 장로, 박영화 목사, 그리고 대구 독립만세 시위운동(3월 8일)에 참여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박상동(당시 대구 계성학교 2학년생) 등이다. 이들은 3월 12일 정오, 박영신의 집 앞에 모인 2백여 명의 시위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였다. 이렇게 촉발된 의성지역의 만세시위는 4월 3일 가음면 구천시장의 ‘1인 만세시위’까지 23일간 계속되었다. 이후 박상동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부친과 그의 형제들, 그리고 박상동은 함께 의성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독립운동가정이었다. 6개월의 옥고를 치른 박상동은 일본을 올바로 알아야 일본을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일본 고배중앙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생활은 고베, 오사카, 교토 등에 거주하고 있던 재일동포를 위해 교회를 개척하고 섬기는 기간이었다. 졸업 후 1925년 귀국하여 3년여 동안에는 안동교회를 섬겼다. 특히 이 기간에 박상동 목사의 민족의식이 나타난 것은 1928년 3월 경안노회 여전도회 도사경회와 5월 23일부터 1주일 동안 계속된 성경사경회였다. 당시 일본 경찰의 요시찰 인물이었던 길선주 목사가 안동을 방문했다. 약 200명이 참석한 성경사경회의 주제는 ‘애굽의 금자탑’으로 자유와 해방을 갈망하는 많은 백성에게 희망을 주었다. 한편, 사경회 기간 중 길선주 목사는 일경에 체포되었으며. 구류 20일 후 출소한 길선주 목사는 예정대로 사경회를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갔는데 이 사건은 사경회에 참석한 교인에게뿐 아니라 주위 교회 성도들에게도 깊은 도전을 주었다. 이후 박상동 목사는 1928년 파송 받아 다시 오사카로 돌아가 순회목사로 교회를 섬기는 일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일제 말엽 박상동 목사는 또다시 투옥되었다. 박상동 목사는 1941년부터 1943년까지 일본 각지를 순회하며 민족의식의 고취, 일제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통치 비판, 기독교도의 동방요배와 신사참배 반대 등의 운동을 하기도 하였다. 1941년 나고야 동부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 박상동 목사는 당시 지역 교회지도자들 10명과 함께 예비 검속되어 체포되었다. 이때 박상동, 추인봉, 김은석 목사도 포함되었다. 투옥된 박상동 목사는 밤마다 구타 등 고문을 당하는 고초를 당했다. 석방과 투옥을 반복하다가 그는 옥중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정부에서는 박상동 목사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의성군 비안면 ‘3.1운동 경상북도시발지 기념공원’에 세위진 기념탑 /논문 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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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 목사의 논문 원문(4)- 목사 · 애국자 · 인간 박상동 목사목사·애국자·인간 박상동 목사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박상동 목사 (朴尙東, 1894~1949) 들어가면서 안동교회 제4대 담임목사(1925~1927)로 시무한 박상동(朴尙東, 1894~1949) 목사는 아버지가 목사였고, 목사의 아들을 두었으며, 한국교회에서는 단 한자리 수에 불과한 직계목사 손자를 둔 4대 목사가문(家門)의 중심이었다. 그의 조부(祖父)·부친(父親) 뿐 아니라 그 역시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였다. 그래서 고등학생 신분으로 6개월의 옥고(獄苦)를 치르기도 했다. 극일(克日)하기 위해 박상동 목사는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일본유학을 떠났다. 일본에서 4년 동안 신학을 공부하며 오사카(大版)와 고베(神戶)에 거주하고 있던 재일교포를 위해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했다. 귀국한 후 안동교회를 섬기면서 전도, 사회봉사, 교회조직의 변화, 다음세대의 신앙교육 등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의 헌신을 통해 안동교회는 새롭게 리모델링(Remodeling)되어 시대에 맞는 교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박상동 목사는 누구보다 재일교포를 사랑했기 때문에 이민자의 삶의 고단함과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고 안동교회 사역을 중단한 채 일본으로 건너간 예민한 영성의 사람이었다. 그는 오사카와 나고야, 그리고 인근 지방의 복음화와 교회개척에 거룩한 발자취를 남겼다. 박상동 목사는 현해탄을 넘나들며 한국과 일본에 복음을 전한 위대한 전도자였던 것이다. 그는 당시 한국과 재일교회를 위한 사도바울과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일제 말엽 그는 교포들의 인권개선노력과 민족독립운동의 죄목으로 또 다시 옥고를 치렀다. 생사(生死)의 고비에서 해방과 함께 석방되어 귀국한 박상동 목사는 끝없는 복음의 열정으로 교회를 섬기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박상동 목사는 복음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초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의 등에 십자가를 지는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성도와 자녀에게는 인자하고 겸손한 목사요 아버지였다. 그는 음악을 좋아했으며 자식들에게 사랑의 아버지로 기억되고 있다. 이 글은 박상동 목사의 일생을 기록한 소고(小考)이다. 하지만 이 글에는 잊지 않고 기억해야할 믿음의 가문, 믿음의 사람의 거룩한 흔적을 포함하고 있다. 이제 독립운동가요, 복음전도자요, 교육자요, 아버지요, 음악을 좋아한 사람이요, 목사요, 인격자인 인간 박상동을 감사한 마음, 기대하는 마음으로 만나보자. 1. 마태복음 1장의 ‘낳고, 낳고, 낳고’를 재현(再現)한 가정 마태복음 1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 그 족보는 아담에서 시작하지 않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한다. 비록 아담이 인류 최초의 사람이긴 하지만 범죄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고,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신 믿음의 역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육신의 족보라기보다는 믿음의 족보요 하늘나라 백성의 계보라고 할 수 있다. 안동교회 4대 담임목사로 사역한 박상동(朴尙東, 1894~1948) 목사 집안도 초창기 한국교회 믿음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는 명문가문이다. 오늘도 박상동 목사의 가문은 한국교회의 살아있는 믿음의 역사를 중단 없이 써가고 있다. 130년의 한국기독교 역사에서 현재까지 4대 직계목사 가문을 이어가고 있고, 곧 5대 목사가 배출될 예정이라고 한다. 사실 목사의 아들이 목사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목사 아버지는 자신이 겪은 험난한 목회의 길을 자녀들이 겪기를 원치 않을 뿐 아니라 목사 자녀들도 목사 아버지의 좁은 목회의 길을 보며 쉽게 그 길을 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상동 목사는 아버지가 걸어간 목회의 길을 걸었을 뿐 아니라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목사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다. 1) 1대 박영화 목사 박상동은 1894년 경북 의성군 비안면(比安面) 쌍계리(雙溪洞)에서 박영화(朴永和, 1859~1923)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박영화는 1902년경에 김인옥, 이성준의 전도를 받고 전 가족(부친인 박용한과 3남 8녀) 모두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군위군 호암교회에 출석하다가 그 다음 해인 1903년, 많은 핍박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쌍계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하지만 박영화는 1908년 세례를 받았다. 그는 특별히 교육에 관심을 갖고 1910년 농촌지역 복음화와 인재양성을 위해 쌍계교회에 정림학교(1920년 폐교)를 설립하여 운영한 명망 있는 지역의 지도자였다. 더욱이 박영화는 당시 선교사의 조사(助事, Helper)로 활발히 사역한 인물이었다. 경안노회 70년사는 그가 의성 지역의 유력한 조사였음을 밝히고 있다. 더욱이 경상노회록에 의하면 박영화는 쌍계교회 장로로 임직 받고 노회 총대로 참석할 정도로 당시 의성 지역의 교회지도자였다. 1914년 12월 30일 부산진 여학교에서 회집된 제9회 경상노회 회의록에는 그의 이름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서기가 회원을 조명하니 참석원은 목사의 방혜법, 권임함, 김기원, 홍승한, 심취명, 김영옥, 왕대선, 매견시, 맹호은, 예알배, 라대벽, 권일두, 권찬영, 인로절, 제씨요. 장로의 허 일, 황재은, 정재순, 박영화, 박상순, 최경호, 리준섭, 권덕생, 김덕경, 김응진, 김복명 제씨라. 이런 박영화는 1914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8년 제 11회로 졸업하고 동년 6월 19일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쌍계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시무했다. 그는 1919년 3·1 의성만세운동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룬 후 경남 거제시 사능면에 위치한 사능교회 초대담임 목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박영화 목사는 거제도와 통영 등 경남지역 초기 교회의 존경받는 목회자로 자리매김하였다. 2) 2대 박상동 목사 이러한 신앙적 분위기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박상동은 아버지와 기독교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기독교학교인 대구의 계성학교 출신으로, 부친과 함께 3·1 만세운동의 옥고를 치룬 후 일본 고베에 있는 칼빈계 고베중앙신학교(神戶中央神學校)를 졸업하였다. 졸업한 박상동은 1925년 귀국하여 안동교회 강도사로 부임하였다. 1925년 6월 17일 안동교회에서 소집된 제8회 경안노회록은 “신학졸업생 박상동씨를 노회장이 임시노회를 소집하는 대로 강도사로 세워주기로 가결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박상동은 안동교회 강도사로 시무하면서 평양신학교에서 별신학(別神學) 과정 1년간을 수학하였다. 그 당시 외국에서 공부한 사람이 장로교 목사가 되려면 평양신학교에 가서 1년 동안 공부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1926년 6월 16일 안동교회에서 회집된 제10회 경안노회에서 안동교회는 박상동 강도사를 동사목사로 청원하였고, 노회는 임사부에 맡겨 처리하도록 결의하였다. “안동교회에서 박상동 강도사를 동사목사로 청원하노니 허락 주시되 헌법대로 오는 9월에 장립허락까지 달라는 청원은 임사부로, 박상동에 목사장립을 위하여 별노회 소집은 회장에게 위임하기로 가결하다.” 결국 1926년 9월 1일 영주읍 교회에서 개회된 경안노회(제11회) 임시노회에서 안수 후 안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885년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41년 만에 직계(直系)로 부자(父子)가 목사 임직자가 됨으로써 아버지, 아들 목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3) 3대 박대선 목사 박영화 목사 가문의 직계 3대 목사인 박대선 목사는 1916년 경북 의성군 비안면에서 박상동 목사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1928년 파송 받아 오사카에서 순회목사로 일본에 파송된 부친 박상동 목사와 함께 일본에 체류하면서 1940년 일본관서학원대학교 영문과와 1942년 동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1955년 미국 보스톤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구약신학전공으로는 한국인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에 체류할 당시인 1940년부터 1942년까지 니시노미야시 한인교회의 담임전도사로 사역했으며, 귀국하여 1942년부터 1950년까지 평양 창광산교회, 박구리교회, 중앙교회, 서평양교회 등을 섬겼다. 박대선이 어렸을 때 사람들이 “넌 이담에 커서 무엇이 될래?”라고 물으면 서슴없이 “난 목사가 될 겁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 한 이 대답은 대학생이 되어서도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을 정도로 박대선은 소명의식이 투철했다. 특히 1945년부터 1950년 까지 평양성화신학교 교장대리로 학교를 책임지고 경영하였다. 박대선 목사는 1955년부터 1964년까지 서울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를 역임했고, 1959년부터 1962년까지는 서울 광화문감리교회 담임으로 목회를 이어갔다. (이하 내용은 논문원문 첨부파일 참조)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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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농업명장에 윤여한(양봉, 예천), 우인오(산양삼, 상주)씨 선정경상북도는 농업 신기술개발 및 전파로 경북 농업발전에 공헌한 우수 농업인 2명을 ‘2018년 경북 농업명장’으로 선정하고, 지역 농어업 및 농어촌 발전에 공헌한 우수 농어업인 10명을 ‘2018 경북 농어업인대상’ 수상자로 선정·발표했다. 경북도는 9일(금) 도청 동락관에서 열린 농업인의 날 기념행사에서 경북농업 최고의 영예인 농업명장과 농어업인 대상 수상자에 대해 시상하고 상사업비 및 해외연수 기회를 부여한다. * 농업인의 날 : 매년 11월 11일 올해 농업명장에는 윤여한(양봉, 예천), 우인오(산양삼, 상주)씨가 선정되었으며 농어업인대상에는 여봉길(60세, 김천)씨가 전체대상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식량생산부문에는 이법우(64세, 의성), 친환경농업부문 곽용기(56세, 경주), 과수화훼부문 김재옥(77세, 청도), 채소특작부문 이용만(53세, 상주), 농수산가공유통부문 이철우(54세, 문경), 축산부문 김삼주(51세, 영주), 수산부문 김성호(49세, 포항), 농어촌공동체활성화부문 김창훈(58세, 영양), 여성농업인부문에는 이경순(60세, 영주)씨가 선정되었다. < 경북 농업명장 연도별 선정 현황(34명) > 연도 02 03 04 05 06 07 08 09 10 11 12 13 14 15 16 17 18 품목 사과 포도 참외 버섯 사과 쌀 버섯 복숭아 양돈 토마토 딸기 오미자 고추 양돈 시설오이 한우 양봉 양돈 양계 누에 인삼 양돈 한우 낙농 한우 인삼 마늘 배 참외 살구 토종벌 버섯 사과 산양삼 ☞ 양돈4, 한우3, 사과3, 참외2, 인삼2, 버섯3, 쌀1, 배1, 딸기1,포도1, 복숭아1, 토마토1, 오미자1 마늘1, 누에1, 양계1, 낙농1, 고추1, 살구1, 토종벌1, 양봉1, 시설오이1, 산양삼 1 한편, 9일 열린 ‘제23회 농업인의 날’기념행사에는 우리나라 토종씨앗 전시·나눔행사와 함께 도내에서 재배되고 있는 우수 쌀도 전시했으며 떡 만들기 체험도 해 눈길을 끌었다. 또한, 먹거리 부스에서는 최고급 한우·한돈·닭고기, 낙농가에서 생산한 우유, 치즈 등을 시식하고 곤충요리, 꽃차 등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음식들도 맛 볼 수 있었으며 농업인단체협의회(회장 박창욱)에서는 도내 요양원 한곳에 사랑의 쌀 880kg을 전달했다. 이철우 경상북도지사는 “올해 폭염, 태풍 등에도 불구하고 농촌현장을 묵묵히 지킨 농업인들이 자랑스럽다”고 격려하고 “수상자들은 뛰어난 능력을 농가에 전파하는 한편 청년‧귀농인 등 창업농들이 농촌에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선도적인 역할도 다해 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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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영양의 자랑거리 친환경농산물영양군(군수 오도창)은 청정 영양군 친환경농산물의 우수성을 대내외에 알리기 위해 지난 3일에서 4일까지 동안 대구 대백플라자에서 개최된 경상북도 친환경농산물 품평회에 영양고추, 산채 등을 출품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고 밝혔다. 이번 품평회는 (사) 경상북도친환경농업인연합회(회장 김안수)에서 주관하는 행사로 영양군에서는 고품질 친환경 농업으로 재배한 유기농 고추, 고춧가루, 눈개승마 등을 출품하였고, 영양군 일월면 정찬동(49세) 회원의 영양고 추가 채소 부문에서 특별상, 영양군 청기면 산운리 문종환(56세) 회원의 눈개승마가 채소·특작류부문에서 동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행사 기간 중 대백플라자에 마련된 홍보·판매 행사에서는 영양군에서 유기농으로 재배한 건고추, 고춧가루, 눈개승마 등을 홍보·판매하여 도시 소비자들의 큰 관심으로 영양군의 우수한 농산물을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됐다. 영양군 오도창 군수는 “농업인들이 의지를 가지고 친환경 농산물을 생산하고 있지만, 판로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아 많은 애로를 겪고 있는데, 이번 행사를 통해 소비자들에게 친환경 농산물을 판매하고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라고 하면서 앞으로도 안전하고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하여 생산자와 소비자가 상생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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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하지 않는 교회, 불 꺼진 교회는 희망이 없다’ ‘행복한 전도세미나’ 칠곡 약목중앙교회에서 개최 취재: 편집부장 최영열 장로 새봄을 맞아 각 지역·교회별로 전도에 관심이 높아지고 ‘전도 집회’와 ‘전도 세미나’가 속속 개최되고 있다. 지난달 19일 칠곡군 약목면 소재 약목중앙교회(담임목사 박종환) 본당에서도 국민미션 주관 ‘2016 행복한 전도세미나’가 개최, 150여명의 참석자들 가슴속을 주님 사랑과 뜨거운 전도 열정으로 불붙게 했다. 행복한 전도세미나는 교회에서 쉽게 적용할 수 있는 효과적인 전도법을 하루 동안 무료로 진행해 주는 프로그램이다. 이날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7시간 동안 진행된 세미나에는 ‘복음의 능력전도'이란 제목으로 황일구 목사와 ‘모유전도법'이란 제목으로 엄호섭 장로, ‘안 될 수 없는 부흥'이란 제목으로 박재열 목사, ‘전도에는 방학이 없다’란 제목으로 박상철 목사가 강사로 나섰다. 아래에는 이날 강의들을 간추려 정리했다. ‘성도님 전도가 너무 쉬워요’의 저자 새대구교회 황일구 목사 “문 닫는 교회가 늘어나고 그리스도인의 비율이 낮아지는 이유는 교회와 성도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전도하지 않고 이론과 방법으로만 전도하기 때문이다.” 황 목사는 “첫사랑을 잃어버린 것이 가장 큰 죄이며 그런 자에게 주님은 촛대를 옮겨 버린다고 주님이 말씀하셨다”(계2:5)고 전했다. ‘유럽에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유럽인들이 복지로만 사용하면서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무너져 가고 있다. 어려워지는 것이 정치를 잘못해서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예수를 안 믿기 때문이다’고 분석했다. 생계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5천년 동안 가난하게 살던 대한민국에 하나님께서 촛대를 꽂으시자 이 나라가 부유하고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아무리 미개한 나라도 주님이 촛대만 꽂으시면 잘 사는 나라가 된다. 그 촛대가 미국을 떠나려 한다. 현재 미국에는 동성애를 비판하는 설교와 길거리 전도를 하면 감옥에 가야 한다. 나와 이 나라 모든 성도도 첫사랑의 감격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그런데 지난 고난주간을 지나며 십자가의 주님을 얼마나 묵상했고, 감격과 통곡의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가? ‘전도하지 않는 교회, 불 꺼진 교회는 희망이 없다.’ 전도해야 믿음이 변질되지 않고 첫사랑이 식지 않는다. 전도는 사실 그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하는 것이다. 첫사랑을 유지하는 방법은 전도 외엔 없다. ‘성도가 가진 온 부동산을 다 팔아 헌금하는 것보다 더 많이 헌금할 수 있는 방법은 전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이다. 한국작은교회살리기운동본부장 박재열 목사(동선교회) “‘전도는 불신자를 데리고 와 예수 믿게 하는 것’이지, 작은 교회 교인을 데리고 오는 것은 ‘양 도둑질’일 뿐이다”라고 일갈(一喝)한 후 전도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을 것을 강조했다. 박 목사는 매년 2,400여개 교회가 설립예배를 드리는 것에 비해 3,000여개 교회가 문을 닫고 있는 실정이라 국내 교회의 수는 자연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음과 전국 교회 중 75% 교회가 자립이 어려운 교회임을 인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15년 전 ‘작은교회 살리기운동’을 시작하게 됐다고 밝혔다. 박 목사는 “예수님께서 만드신 교회는 구원선(한국 교계의 0.5%에 불과)이지 유람선이 결코 아니며, 구원선의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 성도들이 유람선에 탄 승객처럼 편안함과 재미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또 “2년 전 학생들을 비롯한 310여명이 세월호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온 국민이 심한 좌절에 빠졌고 지금까지도 그 여파가 남아있다”며 “생명 존중의 마음이 존귀한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나라에서 매일 죽어가는 사람(750여명이 사망)이 얼마인지, 예수님을 알지 못해 지옥 가는 이들(불신자의 죽음 650여명)이 얼마인지도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중국에서 불에 타 죽어가는 이를 돕지 않고 40여 초 동안 동영상을 촬영해 비난을 받는 이가 있었다”며 “주변의 죽어가는 불신자들의 영혼을 보면서도 안타까워 않는다면 이와 다를 바가 무엇이냐?”고 반문했다. 김 목사는 특히, 불신자의 영혼은 사탄이 잡고 있기 때문에 뜨거운 기도, 많은 기도, 감동받을 정도의 사랑 베풀기, 맛있는 음식(먹어야 맘이 부드러워짐), 악착같은 전도를 실천하라고 당부했다. 어부가 물고기떼를 만나면 기뻐서 어쩔 줄 모르고 소리를 지르며 난리가 나는 것처럼, 경북은 ‘물 반 고기 반’의 상황이므로 전도자는 낚고, 잡기만하면 된다며 적극적인 헌신을 촉구했다. 반면, 마귀와 좌파들도 ‘영혼 구원’ 없는 ‘밥퍼’와 ‘나눠주기’, ‘자선 사업’을 좋아한다면서 영혼 구원을 우선하지 않는 어떠한 자선행위도 하나님과 관련이 없다고 못 박고 주의를 당부했다. 모유전도법으로 전교인 전도대를 만들고 있는 엘림전도훈련원장 엄호섭 장로 모유전도법은 어린아이가 태어나 스스로 걸어 다닐 수 있을 때까지 모유를 먹여 키우듯이 한 영혼이 교회에 등록해 서리집사가 될 때까지 ‘천번의 기도와 백번의 만남’을 가질 것을 강조하는 전도법이다. 하나님께서 전도에 대해 축복을 약속해 주셨지만, 사람들이 전도하지 않는 이유는 ‘전도를 은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도는 은사가 아니라 주님의 명령’이다. 마28:18 이하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이가 전도하고 제자 삼으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한 전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물질, 건강, 직장 등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실 것이다. 3가지 생활전도법의 첫째는 ‘무릎의 전도’이다. 전도할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둘째는 ‘손의 전도’이다. 전도 대상자를 사랑으로 섬기고 도와주는 것이다. 사랑의 수고는 ‘저 사람이 우리 형제보다, 우리 가족보다 고맙다고 할 때 복음이 전해진다. 셋째는 ‘발의 전도’이다. 전도대상자의 마음이 열릴 때까지 3년 이상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며 찾아보는 것을 말한다. ‘전 교인 전도대’는 전교인 모두가 전도대가 되어 모두가 움직이면 자연히 모두가 스스로 움직인다.(환경순응의 법칙)는 법칙에 따라 전교인을 기도, 물질, 노방전도대로 조직한다. 기도전도대는 1주일에 10번 이상 교회에 나와 기도하는 전도대이며, 물질 전도대는 1~2끼 금식하여 남긴 물질로 헌금하는 전도대를 말하며, 노방전도대는 나가서 말하기보다 들어주는 역할을 감당하며, 예수님 자랑과 교회 자랑, 목사님 자랑을 반드시 들려준다. 교회가 지역에 좋은 소문이 나지 않으면 전도는 끝이다. 전도에는 방학이 없다고 외치는 ‘호떡 목사’ 박상철 목사 인천의 온제자교회를 섬기는 박상철 목사는 교회 개척과 함께 겪었던 목회 사역을 진솔하게 나누며 그 가운데 역사하셨던 주님의 사랑과 능력, 예수님의 마음을 전했다. 지하 예배당을 마련해 개척 예배를 드리고 전도를 열심히 다녔지만 10개월 동안 교인이 단 한명도 찾지 않는 상황, 한 영혼의 소중함과 주님의 애타는 마음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후 동역자를 보내 주셨고 호떡 전도를 통해 초등학생들과 지역 사회의 호의적인 이미지를 구축, 전도의 열매를 거두기 시작했다. 7년째 계속되는 초등학교 정문 앞 호떡 전도는 아이들의 가슴 속에 “호떡 먹고, 예수 믿고, 천국가자, 온제자교회 가자”란 구호를 새겨 놓게 했다. 박 목사는 주님의 강권에 따라 밤 12시에 전도지를 갖고 밤거리에 나서게 된 간증을 통해 주님의 사랑과 예비된 동역자, 복음을 기다리는 안타까운 영혼들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그는 일이 꼬이거나 영적으로 그늘이 질 때, 열정이 식고 무기력해질 때 전도지를 들고 밖으로 나가면 성령 충만함과 문제 해결을 경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박 목사는 우리 인생의 남은 기간이 너무 짧고 촉박하기에 세상 것 다 가지려고 세월 허송하지 말고, 적당히 벌고 새벽기도 지키고 자녀 위해 기도하자고 당부했다. ‘커피 향에 취해 마음이 즐거워지고, 목구멍이 열림으로 마음이 열린다’ 커피와 한잔과 함께 복음을, 연천 군남교회 이재은 목사 ‘이게 뭐지, 이게 뭐야?’ 설립 60년 된 교회에 처음 부임 받아 예배당을 들어서면서 이재은 목사가 받은 첫 느낌이었다. 냄새나는 고무 실내화와 물새는 예배당에서 배어나오는 악취에 이 목사는 양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 성도가 중심인 노년층 성도 구성, 재정적으로 어려운 교회, 갈라진 벽채, 비새는 지붕, 물 올라오는 바닥, 침울한 교회 분위기 등 어느 것 하나 가능성이 엿보이지 않는 교회. 새는 비를 막으려니 벽이 부실하고, 벽을 고치려니 바닥마저 습기로 예배당 전체를 공사해야 할 상황. 암담해서 기도하며 울고 있는 이재은 목사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비전을 보여 주셨다. ‘기도실을 리모델링해 카페를 만드는 것’이었다. 공사를 시작하자 ‘교회가 망해서 업종 변경 한다’고 소문이 나고 ‘돈 많은 목사가 왔다’는 소문 등등 이 목사를 더욱 힘들게 했다. 카페 공사를 마치고 일터에 나가고 사람이 보이지 않는 시골 동네, 이 목사는 커피기계를 준비해 주민들을 찾아 다녔다. 절대 전도지를 지참하지 않고, 일단 사람을 만나면 준비해간 가방 속의 소형 커피 기계로 커피부터 내렸다. 커피를 준비하는 동안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고급 커피향에 주민들의 마음이 열려 먼저 말을 건네 오기도 했다. 가족 중에 신앙을 가진 이를 이야기하고, 옛날 어린시절 교회 다닌 이야기 등을 스스럼없이 건네는 등 주민들의 말을 다 들어주고 기도해주길 여러번, 결국 그들이 먼저 교회를 찾아 왔다. 이 목사는 “1년에 뿌리는 수만장의 전도지와 전도 물품으로 교회를 찾는 이가 없는 반면, 커피 전도는 먼저 커피 향에 취해 마음이 즐거워지고, 목구멍이 열림으로 마음이 열린다”고 설명했다. 그는 마음이 열린 상태로 1~2분간 간단히 전하는 복음이 훨씬 효과적이었다고 간증했다. 이후 교인들로 운영되는 카페는 ‘주님께 섬기듯 하자’는 이 목사의 뜻을 실천, 입 소문이 나면서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 되었고 더불어 교회도 한층 더 밝아졌다. 교회는 차를 타지 않고선 올 수 없는 시골에 있지만 하루 150~200여명이 커피와 함께 복음을 듣고 가는 카페 교회가 됐다. 한편, 국민미션은 ‘신바람나는 세상, 희망을 노래하는 교회’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문화콘텐츠를 통하여 한국교회 부흥과 성장 발전에 기여하고자 설립된 선교단체이다. 교회 창립행사, 새성전입당, 새생명전도축제, VIP 초청 전도, 이웃주민을 위한 음악회 등 각종 집회를 기획·제작, 건전한 문화 공간을 제공하는 교회 모습을 통해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지역복음화를 실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행복전도세미나는 광고 및 강사비, 포스터, 전단지, 현수막, 순서지 등 모든 경비를 국민미션에서 무료로 지원해 주고 주최하는 교회는 중식과 장소만 제공하면 된다. 세미나를 원하는 교회는 전화(02-782-7153)로 접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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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자비량 목회자 김경환 목사목록 본문 국내 자비량 목회자 김경환 목사 취재·정리: 편집부장 최영열 장로 사도 바울처럼 선교사역을 자비량(장막업-Tent maker)으로 감당하는 해외 선교사들이 있기는 하지만 국내 목회에 있어 자비량으로 사역을 감당하는 목회자는 많지 않아 보인다. 목회라면 당연히 풀타임 사역이라는 인식이 자리매김한 탓인가? 뭔가 자연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이 땅엔 아직도 많은 수의 미(未)자립교회들이 존재하고 시골 벽지엔 고령화된 성도들로 구성된 어려운 농촌교회들이 지역마다 산재해 있다. 그 삶의 터전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농촌교회 성도들을 위해 묵묵히 사역을 감당해 가고 있는 목회자들의 삶 또한 각박한 처지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때, 어려운 농촌목회자의 삶을 도우면서, 시골 교회를 세워가는 자비량 목회자가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경북 예천군 용문면에 소재한 ‘용문하금교회’ 김경환 담임목사가 그 주인공이다. 김 목사는 괴산에서 목회하던 중 고향인 울릉도에서 함께 신앙생활 했던 곽일부 목사가 용문하금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인사차 방문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만남은 곽 목사와의 은퇴로 인해 이뤄지지 못했고, 다만 목자 없는 양떼와 허물어져 가는 예배당의 모습을 보면서 이곳을 찾은 김 목사의 마음은 아파왔다. 당시 교회는 사례금을 드릴 수 없는 형편이라 목사님을 모시지는 못하고, 다만 은퇴 시점에 갈 곳 없는 목회자가 와서 물질에 상관없이 사역해 주길 기대하는 정도였다. 김 목사가 기도 후 교인들과 다시 만나 교인들이 조건을 들어 준다면 사역을 하겠다고 말했다. 먼저, 맡아 오던 기업이 있기 때문에 사택은 필요 없다. 둘째, 사례비는 전혀 없어도 된다. 마지막으로 거처하는 숙소가 멀기에 새벽기도는 인도할 수 없다는 조건이었다. 성도들이 근근이 예배를 인도하며 지켜오던 시골교회, 목회자 모시기를 위해 기도하던 성도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하여 2014년 8월, 김경환 목사는 용문하금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됐다. 김 목사는 먼저 비가 새는 예배당 공사를 비용을 들여 마쳤다. 이어서 공사용 철근이 밖으로 튀어나와 있을 정도로 농사용 창고보다 못한 교회 식당을 리모델링해야겠다고 제안하자 대부분의 교인들이 반대했다. 비용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김 목사는 출향 교인들의 지원과 김 목사의 부담, 은혜 받은 이들의 헌신을 합하여 결국 공사를 마무리했다. 또 외부 지원을 받아 종탑을 깔끔하게 해결했고, 식당에 비용을 들여 화목보일러를 설치, 교인들이 훈훈한 겨울을 날 수 있게 도왔다. 고난주간에는 교인들을 상대로 세족식 행사를 열어 섬겼고, 추수감사주일이 되면 김 목사가 직접 생산한 꿀을 교인들에게 선물했다. 명절엔 일체 목사에게 선물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김 목사가 준비한 현금 봉투를 교인들에게 나눠줬다. 특별한 날이 되면, 성도들에겐 김 목사가 키우는 염소를 잡아서 대접하고, 마을 잔치에는 돼지를 잡아 대접했다. 이렇게 선한 사업을 계속하다 보니 이젠 주위의 돕는 손길도 생겨 훨씬 더 즐겁고 보람되게 섬길 수 있게 됐다. 현재, 교회에서 헌금 1등은 김 목사이다. 이렇게 많은 물질로 지역 사회와 교회를 섬기고 교인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은 바로 김 목사가 운영하고 있는 사업체가 있기 때문이다. 김 목사가 현재 경영하는 사업은 양봉과 염소 농장이다. 군 제대 후 울릉도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던 중 양봉을 처음으로 접했다. 몇 번의 어려움을 겪고 난 후 깨달은 것은 벌을 지으신 하나님 관점에서 벌을 키워보자는 확신이었다. 새로운 시도로 인해 당시 벌을 키우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듣기도 했지만 결국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방법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늘었고, 현재는 많은 이들이 그를 따라 양봉을 하고 있다. 김 목사는 현재 선진 양봉을 교육하는 농업기술센터 주최 전국 강의를 제일 많이 다니는 강사이다. 목회자로서 김 목사는 양봉 강의의 기회도 놓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삼고 있다. 강의 중간중간 하나님과 인간, 구원에 관해서 설명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교육생들에 증거 하고 있다. 3박4일 강의 시엔 반드시 하루는 예배당에서 강의해 기독교엔 친근감을 느끼도록 노력하고 있다. 김 목사가 양봉(국사골양봉농원)을 통해 올리는 수익은 연간 약 1억원 이상, 그 중 1억원 가량을 선교비로 사용하고 그 나머지를 생활비로 사용한다. 생산한 꿀은 미자립 교회가 판매해 자립할 수 있도록 목회자들에게 저렴하게 공급해 준다. 또 양봉교육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꿀 생산이 어려운 이들에겐 꿀을 나눠주고 다음 해 생산을 많이 하면 그때 갚으라고 공급해 주기도 한다.(진대법 개념, 회수율 10%에 불과) 현재 특히 김 목사가 역점을 두고 시작한 사업은 염소농장이다. 호주산 염소인 ‘보아’ 종을 70여두를 사육하고 있는데, 300마리를 목표로 하고, 우수한 형질의 보아 원종 염소를 구하고 있다. 숙소도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셨다. 김 목사가 숙소와 농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집(유천면 소재)은 과거 법당으로 사용되던 건물로 칡넝쿨이 집안으로 들어올 정도로 폐허가 된 상황이었다. 부동산 중개업자 조차도 일반인이 살 수 없는 곳이기에 목사님 정도 되는 사람이라야 살 수 있는 곳이라고 할 정도로 기가 센(?) 곳이었다. 그곳은 과거 전국의 무당들이 모여 큰 굿을 하던 집이었으며 집 둘레 곳곳이 촛불을 켜고 지성을 드리던 곳이었다. 따라서 그 누구도 범접(?)지 못한 탓에 김 목사는 시가의 1/4 가격으로 건물을 구입할 수 있었고 지금껏 잘 사용하고 있다. 김 목사가 이렇듯 나눠주는 목회를 하게 된 데에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다섯명의 자녀를 잃고 낙심한 아버지는 무당을 찾아가 안타까움을 호소하자 무당이 말하길 “나하고는 안 맞고, ‘오랑캐당’에 가라 ‘야수교당’” 해서 절박한 심정으로 교회를 찾았고 예수님을 만났다. 이후 5자녀를 더 낳고 건강하게 양육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신 아버지는 이후 평신도로서 교회를 개척(울릉도 중령교회)하신 것은 물론, 좋은 것은 모두 교회에 갖다 드리며 하나님을 섬기기를 시작해, 형제들과 함께 무척이나 어렵고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어린 시절 점심식사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을 정도) 공무원으로, 성공한 사업가로 성장한 김경환 청년은 하나님 말씀인 성경의 실생활 적용에 많은 괴리감을 느끼고 갈등하고 방황하던 중 하나님의 큰 은혜를 경험했다. 곧 하나님의 심정을 깨달은 것이다. 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에서, 성경을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기록하신 하나님 심정으로 바라봄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 은혜에 감사해 신학을 하려 했지만 고생길을 가려는 아들을 어머니가 막으셨다. 수년이 흐른 후 37의 늦은 나이인 1997년 거부할 수 없는 부르심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울릉도에서 육지로 나왔다. 사역을 시작하면서 김 목사는 물질과 관련된 굳은 결심을 하게 된다. ‘목회자가 되면 나눠줄 수 있을 정도의 준비가 될 때 사역을 시작하자. 자비량 목회자가 되자. 생계도 어려울 정도로 가난한 교인 가정에서 헌금하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수입원 없어 생계를 걱정할 정도로 살아가는 용문하금교회 노인 성도들과 이웃 주민들이 헌금이 부담스러워 교회 못 나오는 일이 없도록 김 목사는 헌금을 하지 말라고 독려(?)한다. 헌금 부담 때문에 교회 못 나오는 것보단 차라리 하나님 말씀을 한번이라도 더 듣게 하는 것이 목회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현재, 교회는 귀농 2가정과 교회 인근 주민들, 공무원 가정 등 20여명이 출석해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 김 목사 1년에 1번씩 북한 땅과 철책이 보이는 통일전망대를 찾아간다. 굶주리고 있는 북한 주민들을 마음껏 먹이고 싶은데 안타까워 혼자 울고 내려온다. 또 세계 곳곳의 미(未) 전도 종족을 찾아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지원해 주고 싶은 큰 소망이 있다. 그래서 해외로 나갈 기회가 있으면 1달러짜리를 많이 바꿔서 나간다. 비판도 하는 이들도 있지만 복음을 30분 듣는 아이들에게 1달러씩 나눠줬다. 김 목사는 신령한 영적 양식인 복음을 전할 수 있어 좋고, 또한 가난한 아이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어 너무 기쁘다고 했다. 그는 또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너무나 좋지만, 머릿속 이론으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며, 추상적이지 않고 현실적인 설교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말씀이 실생활에 이뤄질 때까지 무슨 일에든 중간에 평가하려 말고, 말씀을 보고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라고 강조했다. 그 말씀의 열매들을 분명히 거둬 본 체험들이 확실하기에 그의 설교는 힘이 있다. 그는 이후에 하나님 주신 복음을 인근에 소재한 안동대나 경북대 상주캠퍼스 대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열망을 갖고 있다.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야 할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자신이 받은 은혜를 더 많이 전해주고 싶은 열망 때문이리라. 그의 나이 50대 중반, 세월이 유수처럼 빠르다는 것을 느끼기에 더욱 시간의 소중함을 생각하고 믿음으로 달려가길 열망하는 김 목사의 꿈이 주님 안에서 조속히 이뤄지길 두 손 모아 기도해 본다. 김 목사의 가족으로는 강은숙 사모와 2남인 정혁(대전침례신학대학원 재학), 창혁(대학 2년)이 있다. 국사골양봉농원(대표 김경환 목사 010-3795-2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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