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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기독교총연합회 2020 신년교례회▲구미시기독교총연합회(회장 한상일 목사)는 1월 16일 금오산호텔에서 신년교례회를 개최하고 구미시의 복음화와 지역 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했다. 구미시기독교총연합회(회장 한상일 목사)는 1월 16일 오후 6시 구미 금오산호텔에서 신년교례회를 개최하고 구미시의 복음화와 지역 교회의 부흥을 기원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날 행사에는 지역 국회의원, 시의원을 비롯한 기관단체장, 목회자, 성도 등 150여 명이 참석했으며, 구미시립합창단의 식전 공연, 1부 예배, 2부 교례회 순으로 진행됐다. 총연합회장 한상일 목사의 사회로 드려진 1부 예배는 장로총연합회장 정규진 장로 기도, 선산중앙교회 중창팀의 찬양, 직전회장 안정현 목사의 ‘주님이 쓰실 때 기적을 만들라’ 제하 설교, 특별기도, 증경회장 서귀석 목사(구미서현 원로) 축도 순으로 진행됐다. 안정현 목사는 “가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아귀까지 물을 채웠을 때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면서 “포도주가 떨어진 것과 같은 낭패의 순간에도 예수님을 찾고 의지하고 말씀에 순종함으로 기적을 체험하는 2020년이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특별기도 시간에는 ‘한국교회와 구미시복음화를 위해’(여성연합회 부회장 강수경 권사), ‘나라와 구미시정 및 경제를 위해’(평신도연합회장 전희식 장로) 합심으로 기도했다. 2부 교례회는 교역자연합회장 문종수 목사의 사회로 진행됐다. 총연합회 임원 소개 및 인사, 내빈 소개 및 축사에 이어 증경회장 이기택 목사가 ‘하나님의 영광과 구미시의 복음화, 구미시의 발전’을 위해 축배를 제의했고, 참석자들은 새해 인사를 나누며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이예진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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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3)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3) 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임학수 목사(林鶴洙, 1884-1969) 목차 서론 1. 임학수, 믿음의 조상이 되다 2. 예수 믿기로 결단하다 3. 고향 매정에 교회를 설립하다 4. 권찬영 선교사의 서기가 되다 5. 목사로 임직(任職)하다 6. 주일학교에 비상한 관심을 갖다 7. 한국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다 8.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하다 9. 지역의 복음화에 앞장서다 10. 사경회에 온 힘을 쏟다 7. 한국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다 임학수 목사가 시무할 때 안동교회는 공식적으로 신학교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함으로써 신학생을 키우는 일에 협력하는 사역을 시작하게 된다. 이 장학금은 안동교회가 지출한 최초의 장학금이다. 임학수 목사가 안동교회에 시무하던 기간에 교회에서 중심 역할을 하던 권중한·박두영 두 장로와 권중한 장로의 아들 권태희가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하게 되어 권중한 장로는 1934년에, 박두영과 권태희는 1936년에 각각 목사로 임직받았다. 그리하여 1936년 2월 안동교회가 박두영과 권태희에게 장학금으로 후원했던 것이다. 임학수 목사는 당시 정규 신학교를 졸업한 교역자가 부족한 시절에 안동교회 출신 3명을 후원하여 목사를 양성하여 배출시켰다. 더욱이 안동교회 80년사는 권찬영 선교사가 개인적으로 미국 후원자의 도움으로 권태희를 목사로 육성하고, 그의 형인 권태호를 일본에 유학시켜 성악가로 키웠음을 기록하고 있다. 신학생을 후원함으로써 한국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는 일에 임학수 목사와 권찬영 선교사가 뜻을 모아 함께 힘썼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938년 제33회 경안노회에서 권중한 목사는 노회장으로 피선되었고, 박두영 목사는 후에 경동노회로 이명했으며, 권태희 목사는 임직과 동시에 동부교회 제3대 담임목사로 시무하다가 대구로 가서 이후의 사역을 감당했다. 8.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하다 유능한 한학자에서 예수쟁이로 변한 임학수의 사고는 자유로웠다. 사실 한학을 공부한 사람은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특히 그는 기독청년면려회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는데, 예배 이외의 행사도 예배당에서 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1921년 청년면려회가 시작된 이후 안동교회는 적극적으로 청년들의 사역을 도왔다. 1925년 2월 17일 예배시간에 청년면려회가 주최한 “현세에 유행하는 이혼의 폐습이 남자에게 있느냐 여자에게 있느냐”는 주제의 토론회를 허락했다. 특히 임학수 목사가 시무할 때인 1929년 청년면려회가 금주·금연 강연을 위해 안동교회 예배당을 사용하게 허락해 달라는 장소청원을 허락했다. 본 예배당을 순수 예배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도록 허락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90여 년 전, 안동교회는 예배만을 위한 목적이 아니더라도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는 토론회나 세미나, 행사라면 언제든지 예배당의 문을 열 정도로 열린 교회요, 당시 담임인 임학수 목사도 열린 목회자였다. ▲1938년 결혼식 주례 후 안동교회 예배당 앞에서 기념 촬영.(뒷줄 중앙 임학수 목사) 또한, 안동교회는 교회예식을 준수하며 결혼예식을 한다면 언제든지 예배당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오늘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주(主) 예배실이 교회의 특정한 기관이나 행사를 위해 사용되기도 하지만 지금부터 90~100년 전의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성경과 교회 규칙에서 어긋나지 않도록 합당하게 적용하여 처리한 목회자가 바로 임학수 목사이다. 임학수 목사는 성경과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유연하게 사역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목회자였던 것이다. 9. 지역의 복음화에 앞장서다 임학수 목사의 부임은 온 교회가 합력하여 환경에 맞는 새로운 전도를 시도하게 했다. 안동교회 제225회 당회록은 “오늘 저녁부터 6일 저녁까지 예배당에서 환등사진 전도를 하기로 가결하다”고 기록한다. 선교사의 도움을 받은 환등사진을 통한 전도는 당시로 보면 혁신적인 전도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환등사진 전도는 불신자들을 교회로 초청하여 예배당에서 환등사진을 보여주며 전도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영화, 사진 등 영상을 통해 전도하는 방식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임학수 목사는 문명의 이기에 배타적이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효율적인 도구로 사용할 줄 아는 지혜로운 목회자였다. 또한, 임학수 목사는 체계적으로 전도대를 조직하여 노방전도에 최선을 다했다. 1929년 3월 4일 제직회의록에 따르면 부활주일을 전후에 마을마다 가가호호 방문하여 전도지를 배부하기로 결의했다. 이것은 임학수 목사가 이전과는 다른 보다 과학적이고 치밀한 전도계획을 세워 지역의 복음화를 추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31년 7월 6일 제직회는 안동을 방문하는 평양 숭실전문학교 학생들의 전도활동을 돕기로 하고 이들을 맞이할 위원까지 구성했다. 당시 숭실전문대학교 학생들로 조직된 전도대는 안동교회가 매진하고 있던 전도에 큰 힘을 보탤 수 있었을 것이다. 이외에도 1935년 4월 8일의 제직회의록은 계명학교에 나오는 학생 중에 예수를 믿지 않는 학생의 가정을 방문해 복음을 전하도록 의논했다. 이 전도방법 역시 오늘의 맞춤 전도와 흡사한 방식으로 타겟(Target)을 정해 집중적으로 전도하여 높은 결신율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임학수 목사는 수하리 교회에 신실한 믿음을 가진 서무선 집사를 권찰로 임명하고, 주일학교의 헌신자로 권돌석을 파송해서 수하 지역이 부흥되어 기도처에서 벗어나 비로소 교회가 되게 했다. 그 교회가 수하교회(오늘날의 수상교회)이다. 또한, 안동교회가 세운 삼마골 기도실(오늘의 이하교회)에 김성진, 전계원을 집사로 임명해 보내기도 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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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 건강한 한국사회 위한 ‘백만국민대회’ 연다2월 29일 ‘차별금지법‧낙태반대‧중독예방 위한 백만국민대회’ 예정 교계가 동성애, 낙태, 중독으로부터 한국사회를 지켜 건강한 한국사회를 만드는 일에 앞장선다. ‘차별금지법‧낙태반대‧중독예방 위한 백만국민대회’ 준비위원회는 7일 오전 코리아나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다음 달 29일 서울시의회 앞에서 ‘차별금지법‧낙태반대‧중독예방 위한 백만국민대회’를 연다고 밝혔다. 이번 대회는 매년 논란 속에서도 계속되는 퀴어축제, 차별금지법의 제정 시도, 낙태금지법 위헌 결정 등 한국사회의 건강을 해치는 모든 행위로부터 한국사회를 지켜 건강하게 만드는 일에 한국교회가 앞장선다는 취지에서 마련됐다는 게 준비위원회의 설명이다. 대회장 류정호 목사(기성 총회장)는 “우리는 대한민국의 건강한 개인과 가정, 사회, 국가를 위해 3.1절을 앞두고 백만국민대회, 연합기도회, 천만서명운동 등을 전개하기로 했다”면서 “서로 연합하고 사회를 치유하고자 하는 것이 이번 대회의 목적”이라고 밝혔다. 이번 대회는 오는 2월 29일(토) 12시 서울시의회 앞에서 ‘한국교회 연합기도회’ ‘백만국민대회’와 서울광장에서 펼쳐지는 ‘사랑나눔문화축제(퍼레이드)’로 진행된다. 1부 ‘한국교회 연합기도회’는 ‘거룩한 나라 대한민국을 만들자’라는 주제로 진행되며, 2부 ‘백만국민대회’는 차별금지법 반대, 낙태 반대 등 이날 집회의 주제들을 놓고, 정부와 국민에 호소하는 시간으로 진행된다. 3부 ‘사랑나눔문화축제(퍼레이드)’는 다음 세대와 청소년들을 위한 문화축제로 건강한 가정, 건강한 성문화 확립을 위한 각종 공연 및 퍼레이드가 진행된다. 또한, 준비위원회에 따르면 1월과 2월에 걸쳐 ‘한국교회 특별기도회’, ‘한국교회 목회자 성도 금식 성회’ 등을 개최하고, ‘천만서명운동’을 펼쳐나갈 예정이다. 이예진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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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교총, NAP 독소조항 반대 서명지 청와대에 전달“인권은 존중하지만 질서를 파괴하는 그릇된 요구는 부정한다”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공동대표회장 김태영 류정호 문수석 목사)은 6일 동성애를 옹호‧조장하고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의 자유를 침해할 개연성이 높은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한다는 110만여 명의 서명지를 청와대에 전달했다. 이 서명지는 한교총 회원 교단들이 전개한 서명운동의 결과물로 주요 내용은 동성애 옹호와 보호를 위한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동성혼 법제화 반대, 국가인권위원회법에서 ‘성적 지향’ 삭제 등이다.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의 독소조항을 삭제하라는 내용도 담았다. 이번에 제출한 서명지의 원본은 분량이 많아 직접 제출하지 않고, 이를 축쇄판 7권으로 제작했으며, 서명지는 법무부와 인권위원회에도 전달해 교회의 입장을 정책에 반영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한편, 한교총은 동성애에 대해 지속해서 입장을 밝혀왔는데, “‘양성평등’을 ‘성평등’으로 대체하여 가정과 가족의 기본질서를 무너뜨리는 것과 ‘동성결혼’과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계속 표명해 왔다. 특히 한교총은 지난해 발표한 성명에서 “한국교회 정통 교단들은 ‘인간의 권리’(인권)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가치요 권한이라 믿으며, 대한민국의 독립과 모든 국민의 인권을 옹호하고 신장하기 위하여 노력해 왔다”고 말하고, “2018년 8월 7일 국무회의가 가결한 제3차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을 시행하는 것은 도리어 인권 보호에 역행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 명백하여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고 밝혔다. 류정호 대표회장은 “일반 국민 중에는 한국교회가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을 두고, 교회가 소수인권을 부정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한국교회는 인권으로 가장하여 자연적인 질서를 파괴하는 그릇된 요구를 부정하는 것이지,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진 그 인권에 대하여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전했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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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전국장로회연합회, 괴평교회에서 ‘구국금식기도회’ 개최“나라를 위해 금식하며 회개합니다” ▲말씀을 전하고 있는 김남식 목사 “하나님, 이 나라를 지켜주소서! 하나님, 한국교회를 회복시켜주소서! 하나님, 우리가 하나 되지 못함을 회개합니다!” 새해 벽두부터 전국에서 모여든 200여 명의 장로들의 부르짖는 기도 소리가 구미시 고아읍에 위치한 괴평교회 예배당을 가득 메웠다. 예장(합동) 합동전국장로회연합회(회장 양 원)는 1월 6일 오전 11시 괴평교회(노형욱 목사)에서 ‘2020 구국금식기도회 및 신년교례회’를 개회했다. 특히 괴평교회는 1901년에 설립된 이래 120여 년 동안 지역 복음화를 감당하면서 많은 목회자와 선교사를 배출한 신앙의 역사를 지닌 교회이기에 이곳을 찾은 의미가 더 컸다. 1부 예배는 부회장 권영근 장로의 인도로 드려졌으며 김남식 목사가 ‘주여! 이 나라를 살리소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김남식 목사는 “6.25 전쟁 당시 부산 초량교회에서 전국의 목회자와 성도가 모여 국가를 위해 금식기도회를 했던 것이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살려주신 것으로 본다”고 전제하며, “하나님이 주관하실 때 나라가 바뀌어진다. 지금은 온 국민이 회개하며 기도해야 할 때이다”고 강조했다. 이어진 2부와 3부 기도회에서는 김승동 목사(구미상모교회 원로)와 김성근 목사(노원한나라은혜교회)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하나가 된다는 것’을 주제로 말씀을 전했다. 참석자들은 오후 2시까지 금식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고, 이날 기도회는 강주성 목사(뉴비전교회), 김용제 목사(한영교회), 양승훈 목사(비채교회)가 인도했다. 4부 신년교례회는 서기 이해규 장로의 인도로 진행됐으며, 회장 인사, 전국영남교직자협의회 증경회장 이기택 목사 축사, 구미노회장로회장 최성도 장로 환영사 등의 순서가 있었다. 특별히 연합회는 이번 행사에서 화환 대신 받은 사랑의쌀 10kg 40포(110만 원 상당)를 고아읍에 전달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실천했다. ▲합동전국장로회연합회는 1월 6일 괴평교회에서 '2020 구국금식기도회'를 열고 나라를 위해 한 끼 금식하며 기도했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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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2돌,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윤 형 구 장로 경북하나신문 이사장 ‧발행인 먼저 12년 전 경북하나신문을 이곳에 세우시고 지금까지 인도하시고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경북하나신문이 경북을 대표할 수 있는 기독언론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그동안 관심을 가져주시고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주신 동역자 여러분과 독자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경북하나신문은 12년 전에 구미기독신문으로 시작했고, 경북기독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했다가 2015년부터 경북하나신문 제호를 사용하게 됐습니다. 2018년 9월부터는 ‘경북하나신문 하나굿뉴스(gbhana.com)’ 인터넷 신문도 발행하며 한층 독자에게 가깝게 다가가고 있습니다. 경북하나신문의 이름은 “경북이 하나 되어, 경북을 하나님의 나라로!”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에 더 많은 책임감을 느낍니다. 최근 한국교회가 전체적으로 위기라고 합니다. 연합보다는 분열이, 사랑보다는 불신이 앞서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저희 신문은 교회의 연합과 화합을 위해 복된 소식을 전하는 발이 되고 귀가 되고 손이 되고자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독언론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방향성이요, 선지자적인 영적 직관력이라 할 것입니다. 기독언론이 생각을 잃으면 교회들은 고민을 하지 않게 될 것이고, 한국교회의 미래는 어두워질 것입니다. 모든 교회들에 항상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살아있는지, 지도자들은 본이 되고 있는지를 언론은 지켜보고 감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장을 가지고…. 경북하나신문의 임직원들은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이런 부분들을 놓고 끊임없이 고민하며 방향을 잡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살피고 살리는 것, 그리고 그것을 올바른 방법으로 정직하게 전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더 많은 교회와 기관과 협력하면서 경북의 기독언론을 책임지고 이끌어간다는 마음으로 다가올 10년, 100년을 향해 나아가겠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할 수 있습니다. 많은 기도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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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출발 합시다!이정우 목사 안동서부교회 2020년 희망찬 새해를 맞았습니다. 1000년대에서 2000년대 새로운 밀레니엄(Millennium)을 맞이할 때의 감격이 엊그제 같은데 그 후 20년이 흘렀습니다. 바라기는 2020년을 맞이하며 또 다른 설레임과 희망을 간직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새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경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들임을 뜻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얽매이거나 미련을 두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야 할 사람입니다. 새로운 사람은 새롭게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기보다는 변질되고, 퇴색되고, 힘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신앙인들의 삶은 해가 바뀐다고 새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의 능력을 힘입을 때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 능력은 말씀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 100주년을 맞이했던 한국교회는 곳곳에서 종교개혁 정신을 외쳤습니다. “Ad Fontes(아드 폰테스)” 즉, “본질로 돌아가자”였습니다. 이것은 핵심의 회복을 말합니다. 신앙인의 핵심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바로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기본을 다시 붙잡는 사람이 다시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올해는 특별히 찬양과 말씀으로 한 해를 활짝 열어나갑시다. 말씀의 조명 아래서 우리 삶의 먹구름은 사라질 것입니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다시 회복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우렁찬 찬양은 곡조 있는 기도가 되어 믿음의 승리를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0년은 찬양과 말씀과 기도로 새 희망을 노래합시다. 말씀으로 승리하고 찬양으로 영광 돌리는 모든 교회 공동체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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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청소년 40%, “성인되면 교회 떠날 수 있다”정재영 교수, ‘기독청소년들의 신앙과 교회 인식 조사’ 발표 교회 이탈 시기 중학생 시절 50%로 가장 높아 현재 교회에 출석하는 청소년 중 61%만이 “성인이 되어도 교회에 계속 다니겠다”고 말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교회탐구센터(소장 송인규 교수)와 실천신대 21세기교회연구소(소장 정재영 교수)는 지난 6일 한국기독교회관에서 ‘기독 청소년들의 신앙과 교회 인식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조사는 전국의 기독교 중·고등학생 500명을 대상으로 온라인으로 이뤄졌다. 이번 조사에서 ‘교회에 계속 다니겠다’고 응답한 청소년들은 학생과 부모가 모두 교회에 다니는 비율이 높아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이 중요한 것으로 분석됐다. ‘그만 다닐 것 같다’고 응답한 학생들은 부모 모두가 비기독교인인 비율이 가장 높았다. 조사에서는 기독교 신앙은 있지만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가나안 청소년’에 대한 설문 결과도 나왔는데, 가나안 청소년들이 교회를 떠난 시기는 중학생 때가 50%로 가장 많았다. 고등학교 때는 25.5%, 초등학교와 그 이전은 24.5%였다. 이런 결과에 대해 정재영 교수는 “기독 청소년들의 교회 출석 여부가 부모의 신앙 상태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한편, 이 외의 항목에서 기독 청소년들은 전반적으로 교회와 삶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편으로 나타났지만, 한편으론 신앙생활이 가정 안을 벗어나지 못하는 ‘가족 종교화’의 조짐이 관찰돼 다음 세대 신앙 운동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으로 요청된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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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2)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2) 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임학수 목사 (林鶴洙, 1884-1969) 목차 서론 1. 임학수, 믿음의 조상이 되다 2. 예수 믿기로 결단하다 3. 고향 매정에 교회를 설립하다 4. 권찬영 선교사의 서기가 되다 5. 목사로 임직(任職)하다 6. 주일학교에 비상한 관심을 갖다 7. 한국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다 8.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하다 9. 지역의 복음화에 앞장서다 10. 사경회에 온 힘을 쏟다 4, 권찬영 선교사의 서기가 되다 1908년 안동에 선교부가 조직되고 최초의 주재선교사로 소텔 선교사가 부임했다. 그러나 1909년 가을, 소텔 선교사는 안동에서 북쪽으로 전도를 떠난 지 10일 만에 장티푸스에 걸렸고, 28세라는 젊은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소텔 선교사의 순교의 피가 뿌려진 지 2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1910년 1월, 권찬영 선교사가 안동에 부임함으로써 안동선교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권찬영 선교사는 안동에 부임한 후 무려 40년 동안 안동에 머물며 지역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안동을 사랑했고, ‘Mr. 안동’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안동 땅의 사람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았다. 임학수는 1910년 권찬영 선교사의 서기(書記)로 일했는데, 아마 한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권찬영 선교사가 한국의 문화와 언어에 서툴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권찬영 선교사와 함께 생활하면서 설교도 하고 예배도 인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임학수는 빨리 조사가 될 수 있었다. 그 결과 그는 권찬영 선교사의 선교 구역인 아곡교회, 원림교회, 예천의 지보 섭밧교회에서 조사로서 사역을 잘 감당했다. 그 후 1919년 제6회 경북노회에서 공식적으로 조사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1922년 경안노회가 조직된 후에는 장사리, 국곡, 덕봉, 아탐실, 수동, 하화교회 등 6처 교회에서 조사로 봉사했다. 1923년 5월, 임학수 가족이 안동교회로 이명한 후에도 임학수는 조사의 직분을 가졌기에 주일마다 여러 교회를 찾아다니며 성도들을 돌보는 일을 감당했을 것이다. 이후 그의 조사 사역은 계속되어 1924년에는 국곡, 아곡, 수동, 장사리, 소호리, 원림, 구미교회에서 역시 조사로 사역했다. 5. 목사로 임직(任職)하다 1901년 5월, 마포삼열 선교사는 자신의 사랑채에서 김종섭, 방기창 등 2명을 모집하여 신학교육을 시작했다. 이어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미국북장로교, 미국남장로교 등 4개의 장로교선교회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학교 설립이 요청되었고, 1904년 평양에 장로회신학교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평양신학교의 당시 입학조건은 까다로운 편으로 상당한 학식과 자격을 갖춘 자로 제한했다. 평양신학교는 총 5년간의 교육과정으로 진행됐는데, 매년 3개월은 학교에서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나머지 9개월은 거주하고 있는 교회에서 사역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1920년에 이르러 1년 2학기 3년 과정의 학제를 가진 전문학교 제도를 도입했다. 조사로 교회를 돌보던 임학수는 1921년 가을, 비교적 늦은 37세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1921년 제9회 경북노회에서 특별 신학생으로 임학수의 평양신학교 입학이 허락되었으며, 별(別) 신학과에 입학한 지 3년 후인 1925년 1월 7일, 제7회 경안노회가 회집된 안동교회에서 문답을 거치고 나서 임학수는 목사 임직을 받았다. 임학수는 임직 후에 소호리교회 등 5개 교회를 섬겼으며, 고향인 녹전교회에서도 목회를 했다. 또한 경안신학원의 전신인 인노절 기념 성경학원 강사로 수년간 제자들을 양성했다. 6. 주일학교에 비상한 관심을 갖다 1926년에 대한제국의 순종황제가 별세한 후에 6·10만세 운동이 발생했다. 6·10만세 운동에서 학생운동 조직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이후 학생은 독자적인 운동 주체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기독교는 더욱 일제의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임학수 목사는 조국의 미래가 다음 세대의 교육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고 인재양성에 매진하였다. 무엇보다 그는 주일학교에 관한 관심이 지대했다. 1930년에는 새롭게 주일학교 임원을 구성했는데, 담임목사를 주일학교 교장으로 결의했다. 이것은 담임목사가 주일학교 신앙교육에 책임을 지고 지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임학수 목사가 부임하기 1년 전인 1928년 9월 경안노회 역사상 처음으로 제1회 경안주일학교대회가 안동교회에서 열린 적이 있었다. 이 대회는 안동, 영주, 예천, 봉화, 의성, 청송, 영양, 영덕 등 지역에서 2,300여 명이 참석하는 등 뜨거운 열기 속에 진행되었다. 이후 5년이 지난 1933년 4월 6일부터 5월 3일까지 제2회 경안주일학교대회가 역시 안동교회에서 열렸다. 임학수 목사는 5년 동안 중단되었던 안동지역의 주일학교 교사대회를 복원함으로써 교사들의 사명감을 회복시키고자 했으며, 각 교회의 주일학교가 든든히 서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다. 또한, 임학수 목사는 청소년에 관해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교회 주일학교는 초등학생을 양육하는 유년부와 장년 성도를 교육하는 장년부만 존재했다. 그래서 임학수 목사는 ‘안동 기독소녀회’(1928년 조직)란 기구를 1930년 ‘기독 소년·소녀회’로 규칙을 제정하고 그 대상을 남학생으로까지 확대했다. 또 청소년 활성화를 위해 소년·소녀 현상(懸賞) 동화대회를 열 수 있도록 협력했다. 이처럼 임학수 목사가 시무할 때 안동교회는 구체적인 청소년 사역을 시작하고 지원함으로써 청소년의 체계적인 신앙교육과 양육이 활성화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 제2회 경안주일학교대회.(1933년 4월 6일부터 5월 3일까지 안동교회에서 열렸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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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1)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1) 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학수 목사 (林鶴洙, 1884-1969) 목차 서론 1. 임학수, 믿음의 조상이 되다 2. 예수 믿기로 결단하다 3. 고향 매정에 교회를 설립하다 4. 권찬영 선교사의 서기가 되다 5. 목사로 임직하다 6. 주일학교에 비상한 관심을 갖다 7. 한국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다 8.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하다 9. 지역의 복음화에 앞장서다 10. 사경회에 온 힘을 쏟다 서론 임학수 목사는 안동 땅에서 출생하고 안동 땅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나라에 갔다. 그는 안동 땅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안동지역에 있는 교회를 섬겼다.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교회, 크고 작은 교회를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섬겼다. 그래서 그가 시무한 교회는 든든히 설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가 교회를 섬긴 시대 상황은 결코 만만한 세월이 아니었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강압적으로 통치하던 시대였다. 특히 임학수 목사는 단순한 성도로서가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인 목사로 살아야 했기 때문에 더 큰 믿음과 용기, 그리고 인내와 소망이 필요했다. 그러나 임 목사는 어려운 시기에 교회의 지도자와 경안노회의 중심인물로 그 사명을 잘 감당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황금만능주의와 세속화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위기를 맞고 있다. 거룩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교회, 영적 리더십을 가진 존경받는 주의 종,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성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현실을 보며 낙망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의 교회는 과거의 교회와 과거의 선배들이 남겨놓은 교훈을 배워야 한다. 거룩한 영향력을 끼친 믿음의 선배의 삶을 본받아야 한다. 그중의 한 사람이 바로 임학수 목사다. 임학수 목사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흔적을 남긴 주의 종이었다. 그래서 임학수 목사의 성품, 인격, 신앙을 포함한 삶은 오늘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큰 도전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소논문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연구되었다. 이제부터 일평생 단 한 번도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고 충성을 다한 믿음의 대선배인 임학수 목사가 걸어간 거룩한 구원사역의 흔적을 찾아보도록 하자. 1. 임학수, 믿음의 조상이 되다 임학수는 1884년 6월 23일 부친 임보현과 모친 정덕희 사이에서 장남으로 안동군 녹전면 매정리(일명 갈골)에서 출생했다. 임학수는 1894년 박계남과 결혼하여 임상경, 임상교 남매와 손자 1명과 손녀 4명을 두었다. 1911년 10월 23일, 임학수는 매정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모친은 1913년에, 처는 1916년에, 장남은 1922년에 매정교회에서 각각 세례를 받았다. 임학수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난 후에 모든 식구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임학수는 한 가문에 있어서 믿음의 조상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매정교회를 섬기던 임학수 가정은 1923년 5월 10일 안동교회로 이명했다. 임학수 목사의 장남 임상경은 안동교회에서 장로의 직분을 받았으며, 오랫동안 제직회 서기, 당회서기로 봉사했다. 자부인 강신덕은 교회학교 교사, 청년회, 성가대에서 헌신했다. 임학수 목사의 장남 임상경은 부산 거성교회를 섬겼다. 장녀 임상교는 대구 신암교회 권사로, 손자 임재오는 거성교회 장로로 시무했으며, 친손녀 임순오는 부산 수영로교회 권사로, 임양자는 안동교회 집사로, 임화자는 서울 밀알교회 집사로 헌신하고 있다. 이처럼 임학수 목사의 후손은 뿌리 깊은 믿음의 가정으로 어디서나 주님의 교회에 헌신하는 일꾼들이 되었다. 그만큼 임학수 목사는 목사로서의 삶도, 부모로서의 삶도, 또한 인간으로서의 삶도 모자람이 없는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2. 예수 믿기로 결단하다 임학수는 1909년 안동에서 한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실을 권정국 장로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1905년 약관의 나이로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궁내부 주사로 왕실에서 근무했지만, 관직을 그만두고 선비로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낙향하여 제자들을 가르치던 중 한마을에 살고 있던 임경수와 함께 안동읍에 나갔다가 선교사를 만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임학수는 당시 안동선교부의 소텔 선교사를 만나 예수를 믿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선교사가 전한 복음을 받아들인 임학수는 자신의 상투를 자르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임학수가 상투를 잘랐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다시는 예수를 모르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단이었다. 예수 믿기로 결심한 임학수는 완전히 변해 있었다. 크고 작은 개울과 강을 무려 9번이나 건너야 하는 영주 내매교회를 다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추운 정월 초하룻날 120Km나 떨어진 대구에서 열린 사경회에 참석하였다. 당시 안동에서 대구까지는 3일 길로 눈보라가 치는 추운 겨울에는 더 오래 걸렸다. 그럼에도 말씀에 목말랐던 그는 춥고 험한 길을 마다 않고 집을 떠날 정도의 열정이 있었다. ▲임학수 목사의 아들 임상경 장로 회갑기념. 3. 고향 매정에 교회를 설립하다 당시 매정에는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임학수는 임도현, 임경수와 함께 매정에서 20여 리 길인 영주 내매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에게 전도하여 믿는 자들이 생겨나자 이들은 처음으로 신효균의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임학수는 신효균, 임도현, 임경수와 함께 1909년 9월 9일 매정교회를 설립했다. 기록에 따르면 임학수 임경수 두 사람의 마을 전도로 몇 달 만에 무려 70여 명이 예수를 믿고 교회를 건축하고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임학수, 임도현, 임경수가 함께 건축한 첫 예배 처소는 4칸짜리 초가집이었다. 이제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소리가 매 주일마다 매정에서도 울려 퍼지게 되었다. 매정교회의 설립은 임학수가 예수를 영접한 이후 그가 얼마나 구원의 감격과 열정을 갖고 살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는 예수를 만난 이후 세상적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의 참된 제자로 살았다. 교회가 설립됨으로써 매정의 복음화도 가속되게 되었다. 임학수는 매정이라는 마을의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다. ▲임학수 목사의 손자 임재오 장로 장로장립(부산거성교호회).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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