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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금권 선거 의혹 목사, 감리회 지도자 자격 없다”▲전준구 목사가 지난 10월 31일 감리회 총회에서 신상 발언을 하고 있다. 기독교대한감리회(전명구 감독회장, 이하 감리회) 경기연회 오산지방이 성폭력과 금권 선거 의혹을 받고 있는 전준구 목사(로고스교회)를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감리회 교단지인 기독교타임즈는 9일 오산지방의 성명서 발표 내용을 보도했다. 지방회로는 처음으로 오산지방이 전준구 목사의 서울남연회 감독직 수행과 관련해 “침묵하고 있는 감리교도들이 깨어나야 한다”는 입장을 담아 성명을 발표했다고 매체는 전했다. 감리회 총회는 지난 31일 여성단체와 새물결, 청년회 등이 서울남연회 감독당선자인 전준구 목사의 성폭력 가해 혐의를 이유로 감독취임을 반대하면서 결국 이·취임식이 열리지 못한 채 폐회했었다. 오산지방은 성명서에서 “참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 목소리를 내며 참여해달라”고 촉구했다. 이어 “전 목사가 감리교회 지도자로 일하면 선교 동력을 상실하고, 수많은 목회자와 교인에게 상처를 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오산지방은 전준구 목사와 함께 교단도 비판했다. 성폭력 문제가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데 치리를 하지 않고 오히려 감독에 선출되도록 방관·비호했다는 것이다. 이미 고발이 됐지만, 기존에 행태로 볼 때 공정한 법 집행이 될 수 있을지 불안한 마음도 든다고 했다. 오산지방은 “감독회장과 총회특별심사위원회, 총회특별재판위원회는 제기된 재판을 명확하게 판단해 무너지는 하나님 공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했다. ▲지난 10월 31일 감리회 총회에서 여성 총대들이 전준구 목사의 감독 취임을 반대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아래는 성명서 전문. 제33회 총회 이후 감리교 상황에 대한 오산지방 성명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개종자 한 사람을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하나가 생기면 그를 너희보다 배나 더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마 23:15)."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한 것은 교회의 타락이었음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당시의 교황들의 영성과 도덕성은 처참하게도 무너져 있었다. 이노센트 8세는 사치와 방종에 빠져 있었으며 여러 명의 여인들에게서 16명의 자녀들을 두었고 알렉산더 6세는 건축하는 일과 사치하는 일로 많은 돈을 소비하였다. 이렇게 교황들이 타락하자 성직자들도 타락하여 추기경들이 정부情婦를 두는 것을 공공연하게 여겼으며 이에 따라 보르기아 추기경은 정부情婦에게서 네 아이를 가지기도 하였다. 하위 성직자들은 예배 때 사용하는 라틴어의 뜻도 모르면서 주문처럼 외우기만 함으로 민중들의 경멸을 받기도 하였다. 오늘의 감리교회를 살아가는 이들은 위의 내용이 낯설지가 않다. 오늘의 감리교회는 권력 쟁탈전을 하는 일에 여념이 없고 그 일을 위하여 많은 돈을 사용하는 것을 서슴치 않는다. 성폭력 문제가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데도 교단은 그것을 치리하기보다는 성폭력 가해 혐의가 있는 이가 감독으로 선출되기까지 방관과 비호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고 해 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교권에 의해 얽혀 있어서인가? 아니면 금권에 얽혀 있어서인가? 언젠가부터 감리교회는 법적인 공정성을 기대할 수 없는,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는 어떤 우상에 집중하는 집단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수없이 경찰서를 드나들며 성폭력 문제로 수사를 받고 선거에서도 금품을 제공한 혐의가 있는 전준구 목사가 감리교회의 지도자로 일을 한다면 감리교회는 선교의 동력을 상실할 것임과 동시에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수많은 목회자들과 교회를 지켜 내는 평신도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줄 것이 명확하다. 역시 총회가 끝난 이후 해당 연회 실행위에서 여성 입법 총대를 제명하는 결의를 했다 하니 향후 그 행보가 심히 우려가 된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이 교단 재판에 회부되어 있으나 지난 시간 감리교회가 보여 준 행태로 볼 때 공정한 법 집행이 되지 않을 것에 대하여 불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으며 또한 의외로 많은 감리교회의 구성원들이 이러한 상황을 알지 못하고 있음과 알고 있음에도 침묵하고 있는 상황에 대하여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오산지방의 모든 교역자들과 평신도 단체장들은 이러한 상태를 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이 성명서를 발표한다. 우리는 먼저 침묵하고 있는 감리교도들이 깨어나 이 난국을 헤치고 참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 목소리를 내며 참여해 주기를 촉구한다. 감리교의 감독회장과 총심위, 총특재는 제기된 재판을 명확하게 판단하여 무너지고 있는 하나님의 공의를 바르게 세우기를 촉구한다. 2018년 11월 8일 경기연회 오산지방 감리사 황창진 목사 오산지방 교역자 및 평신도 단체장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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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기도(1)브라더 앤드류 오픈도어 설립자 우리는 예수께서 주의 기도로써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을 따라 기도할 수 있다. 나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의 기도를 외우거나 암송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주의 기도를 모형 삼아 기도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믿는다. 예수께서 원래 그 기도를 암송하라고 하신 것은 아니다. 그는 “이같이 기도하라”고 하셨다. 에베소서 3장에서 우리는 주의 기도와 똑같은 요소가 많이 들어 있는 바울의 기도를 읽을 수 있다(엡 3:14-21). 주의 기도는 이와 같은 식으로 사용해야 한다. 주의 기도를 우리 중보기도의 모형으로 사용하면(마 6:9-13), 우리는 막연한 기도 태도에서 벗어나 매우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기도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도의 구성과 구체화를 위하여 주의 기도를 살펴보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에서 시작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다. 때때로 나는 “우리 아버지”로 기도를 시작하여 두 시간 동안 다른 기도를 하지 못하고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위해서만 기도한다. 나는 각 개인을 생각한다. 나는 그 또는 그녀와 나를 동일시한다. 나는 각 교회 또는 교파에 속한 개개인을 기억하며 그 교회와 교파를 위해 기도한다.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 나와 그들은 서로의 일부가 되는 진정한 가정을 이루게 된다. 내가, 고난을 겪고 있는 교회에 속한 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세상은 작아진다. 나는 그들의 고통을 느끼며, 그들의 문제를 안고 씨름하며, 나의 기도는 강력하고 열정적으로 일어나 그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고난당하고 있는 교회의 신자는 내가 특별한 부담을 갖고 기도하는 제목이다. 나의 중보기도는 대부분 그들을 위한 것이다. 나는 수용소와 감옥이 어떤 곳인지 알게 되었으며, 비밀 교회를 방문했으며, 폭력으로 파괴된 집에서 잠도 잤다. 나는 시체와 몸이 잘려나간 아기들과 굶주림과 고통을 보았다. 나는 다음과 같이 기도할 수 있다. “아버지, 당신은 나의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그들의 아버지이시기도 합니다. 이렇게 비참하게 고통 받는 당신의 자녀들을 위하여 제가 좀 더 일할 길을 보여 주십시오. 저에게 자는 교회를 깨울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그리하여 우리 모두, 고립되어 상해를 당하며 고통을 겪고 있는 형제자매들을 돌보라는, 당신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일단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하면 점점 더 구체적으로 집중하여 기도하게 되고, 더 효과적으로 기도하게 된다. 이러한 일 모두 우리가 “우리 아버지시여”하고 기도하기 시작할 때 생기는 일이다. 그런 다음 이제 주의 기도를 한 구절씩 살펴볼 수 있다. 각 구절을 말하면서 우리는 하나님께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어볼 수 있다. (오픈도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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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피해 영덕 주민, 생계걱정에 다시 무너진다!태풍 콩레이가 지난 5일~6일 영덕을 지나가면서 많은 비를 뿌려 영덕에서는 1명이 사망하고 주택 1300여 채가 침수된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특히, 영덕읍과 강구면, 축산면 일대에는 말 그대로 물 폭탄이 쏟아졌고 강구 전통시장과 축산면 두 곳에 피해가 집중됐다. 그로부터 1주일 뒤, 지난 13일 오후 강구시장 일대는 북적여야 할 장날이지만 손님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스산했다. 7,000여 명 자원봉사자들 덕분에 골목 곳곳을 가득 메웠던 버려진 가전제품과 집기들은 하나둘씩 자취를 감췄지만, 주민들은 당장 연말 생계 걱정으로 우울했다. 의류장사를 하는 김석출 할머니(82세)는 수백만 원의 옷과 이불을 다 잃었다. 보일러 교체에 80만 원이 들었다는 손후규 할머니(69세). 남편과 무너진 담장을 수리하던 할머니는 무료급식 방송을 듣자마자 꿈의교회 급식소로 급히 걸어갔다. 법적으로 피해주민에게 지급 가능한 재난지원금은 가구당 최대 1백만 원. 조만간 영덕군이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면 각종 세제를 추가로 감면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다 합쳐도 태풍피해 이전 수준으로, 일상생활로 복귀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피해주민은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받거나 주변에서 빚을 내야 하는 상황을 걱정하고 있다. 이들이 기대고 싶은 곳은 전 국민의 관심과 도움이다. 자연재난으로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고통에 대한 공감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그리고 의연금(성금)도 삶의 의지를 크게 북돋아 줄 수 있다. 지금까지 많은 기관과 기업, 개인과 단체가 동참해 성금규모는 11억 원에 이른다. 하지만 점점 여러 가지 사건 사고로 전국적인 관심은 점점 멀어지고 있다. 군 관계자는 “피해주민 형편이 정말 힘들다. 구걸이라도 하고 싶다. 언론의 관심도 갈수록 줄고 있어 걱정이다. 많은 분들이 저희 피해주민의 아픔을 보듬어 주시기 바란다”고 전했다. ◆성금모금:국민은행054990-72-003752(예금주:재해구호협회)◆ARS기부: 060-701-1004(1통화당 2,000원) ◆문자기부 : #0095(1건당 3,000원) ◆모금주관처 : 전국재해구호협회(☎1544-9595 ◆구호물품접수처 : 영덕군청 주민복지과(☎054-730-6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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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전도의 불을 지핀 사람, 정재순 목사(3)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정재순 목사(鄭在淳, 1878~1948) 8. 안동교회 담임으로 칭빙(請憑) 받은 목사, 정재순 대구 3·8만세운동으로 체포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루고 석방된 후 정재순 목사는 신정교회로 복귀했다. 그러나 이미 요시찰 인물이 된 정재순 목사가 일제의 감시 속에서 계속해 담임목사로 시무하는 것은 신정교회 입장에서 매우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또한 정재순 목사 자신도 교회에 부담을 주기 싫었을 것이다. 따라서 정재순 목사는 새로운 임지로 안동이 결정되어 안동교회로 전임하였다. ▲1913년 11월부터 공사가 착수되어 이듬해인 1914년 2월에 준공한 안동교회의 두 번째 신축 예배당으로 오늘의 100주년 기념관 바로 그 위치에 서 있었다. 예배당은 목조 함석지붕을 가진 건물로 반(半) 2층 구조형식으로 약 50~60평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동교회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의 지도자인 정재순 목사를 청빙한 것은 큰 결단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실 안동교회는 안동 3·18만세운동을 모의하고 실행에 옮긴 교회였다. 안동 3·18만세운동은 기독교와 안동교회의 위상을 높여주었지만 일제 탄압의 빌미를 제공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구 3·8만세운동의 주역 중의 한 사람인 정재순 목사가 안동으로 부임해 오는 것은 안동교회나 정재순 목사 개인적으로도 큰 부담이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동교회는 주저하지 않고 정재순 목사를 담임으로 결정했다. 투철한 신앙, 영적 리더십, 다양한 목회 경험과 민족과 함께하는 애국정신을 가진 정재순 목사는 안동교회에 적임자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1922년 6월 14일에 안동교회 3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정재순 목사는 1925년 5월까지 만 3년 동안 사역을 잘 감당하였다. 9. 안동 땅을 갈아엎은 기경자(起耕者), 정재순 정재순 목사가 가지고 있던 최우선의 목회방침은 지역전도였다. 그는 마치 복음전파를 위해 안동에 온 것처럼 안동교회를 전도중심의 교회로 만들어 나갔다. 전도를 통해 복음이 척박한 땅인 안동이 영적으로 기경되기 시작하였다. 정재순 목사가 시무하던 시기는 처음으로 현지 교회인 안동교회를 중심으로 복음이 널리 전파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정재순 목사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지역뿐 아니라 이미 복음이 전해졌지만 구원의 열매가 없는 땅에 전도인을 파송하였다. 그는 분명한 정책과 방법으로 지역전도에 매진했다. 그래서 그가 시작한 전도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또한, 정재순 목사가 추진한 전도는 무계획적인 것이 아니라 계획적이고 전략적이었다. 지금까지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는 우선으로 전도단을 보내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대중 집회를 가졌다. 그리고 전문적인 전도인을 파송하여 가가호호 방문하며 복음을 전했다. 뿐만 아니라 헌신적인 전도인들을 파송한 것도 정재순 목사의 전도전략이었다. 당시 안동교회 조사나 장로 중에는 전도에 헌신한 전문가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장로임직도 뒤로 미룬 채 전도하는 일을 가장 우선으로 감당했다. 또한, 당시 여자 성경학교의 학생들도 전도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안동교회의 전도활동은 노회적으로도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1924년 5월 노회록에 의하면, “안동교회 부인들이 가사를 중단하고 전도에 힘써 많은 신자를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 결과 척박한 땅이 기경되었고, 구원의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도의 결과로 호암교회(현 송현교회)와 수하리교회(현 수상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정재순 목사의 전도활동은 안동지역 복음전파에 변곡점이 된다. 정재순 목사가 안동에 와서 복음을 전파하기 이전은 선교사 중심의 전도였다고 할 수 있다. 안동선교부에 주재하고 있는 선교사들이 주로 전도를 주도했고, 한국인 조사나 남·녀 전도인들은 소극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경향이었다. 그러나 정재순 목사의 부임은 이러한 전도의 패러다임(Paradigm)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한국인 목사와 성도들에 의해 지역전도가 계획되었고 진행되었다. 이후부터 지역에 세워진 교회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교회 자체적으로 계획을 세워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정재순 목사는 열정적으로 여러 지역에 복음을 전한 전도자였다. 그는 안동교회를 전도에 집중하는 전도중심의 교회로 만들었고, 이것은 안동교회의 부흥뿐 아니라 교회가 없던 안동 읍 외곽지역에 교회가 세워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0. 교회분립을 통한 부흥의 촉진자(促進者), 정재순 1914년 1월, 안동교회의 두 번째 목조 함석지붕 2층 예배당(현 100주년 기념관 자리)이 신축됨으로써 교회와 경북북부 지역은 영적 지형의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교회 내적(內的)으로 넓은 예배 및 활동 공간의 확보로 인해 예배와 주일학교의 활성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부흥하고 있던 안동교회는 발상(發想)의 전환을 하게 된다. 안동교회는 설립된 후 10여 년 동안 계속적인 부흥을 이루었지만, 효과적인 안동 땅의 복음화를 위해 안동 읍을 세 개 지역으로 나누고 분가식(分家式)으로 교회를 분립(分立)하기로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게 된다. 안동교회를 중심으로 서쪽과 동쪽으로 교회를 분립하기로 하고, 안동교회 교인들을 거주지에 따른 분가를 추진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안동교회의 분립은 교회 내 분쟁(分爭)의 결과가 아니라 안동 땅의 복음화를 위한 자발적이고 창조적이며 아름다운 분리였다. 안동교회의 첫 분립 시도는 교회가 설립된 지 10여 년이 지난 후 시작되었다. 그 교회가 바로 안기교회다. 안기교회는 오늘의 안동서부교회다. 사실 안동교회는 이미 오래전부터 안기동 지역에 전도인을 파송하여 집중적으로 전도를 했고, 그 결과 정재순 목사가 시무하고 있던 1924년 1월 초가 6칸을 포함한 160평 대지를 매입할 수 있었다. 이 가옥을 안기지역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예배처소로 사용하고 안동교회 기도실로 명명했던 것이다. 안동교회는 주일 저녁과 수요일 저녁마다 조사, 장로, 집사를 안동교회 기도실에 파송하여 예배를 인도하게 함으로써 공식적인 교회가 속히 설립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왔다. 이때 봉사한 사역자들은 옥호열 선교사, 김익현 장로, 권점필·신석준 집사였다. 하지만 안기교회의 분립은 당시 안동교회 담임인 정재순 목사의 결단도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가 시무한 기간의 제직회록에는 안동교회 전도대의 활동보고가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전도 결과에 따라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고 세우는 일에 온 힘을 쏟았다. 이후 안기교회가 안동교회로부터 공식적으로 분립하여 완전한 독립교회가 된 것은 1932년 8월이었다. 이때 1924년에 구입한 초가 6칸 가옥을 매도한 후 안기동 130번지의 100평의 대지 위해 30평 규모의 예배당을 새롭게 건축하고 안기교회라 칭하고, 그해 12월 초대목사로 이원영 목사가 부임하게 되었다. 이처럼 정재순 목사는 누구보다 안동 땅에 복음의 씨가 굳게 뿌리를 내리도록 헌신한 사람이다. 그는 안동읍의 부흥을 누구보다 소망하면서 안동교회의 분립을 결정하고 인적자원과 재정을 아낌없이 지원했던 인물이었다. 그 결과 안동읍 최초교회인 안동교회의 독점적인 지위는 사라지고 안동의 영적 부흥을 위한 선의의 경쟁시대로 돌입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안기교회의 분립을 통해 안동 땅의 부흥이 촉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재순 목사는 분립 개척을 위해 1924년 안기동에 초가 6칸을 매입, 예배처소(안동교회 기도실)를 세운다. 이후 1932년 안기교회(현 안동서부교회)가 독립교회로 세워진다. 사진은 현재 안동서부교회 모습(이정우 목사 시무).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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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양검정으로 참외 건강검진 무료로 받으세요성주군(군수 이병환)은 PLS대응 안전농산물 생산과 영농비용 절감을 위해 매년 무료로 토양검정사업을 실시하여 농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특히 시설참외 재배토양 조성시기인 10월을 토양검정 집중 홍보기간으로 설정하여 운영하고 있다. 토양검정 적기는 작물재배 전 또는 수확 후 퇴비 살포하기 전이다. 특히 시설참외가 수확이 끝나는 8~9월부터 시작하여 작물재배를 준비하는 10월 한달간 매년 많은 농가에서 토양검정 수요가 집중되고 있다. 토양검정을 통해 토양산도, 전기전도도, 유기물, 질소, 인산, 칼리, 칼슘, 마그네슘 등에 대한 시비처방서를 발급받아 적절한 토양양분 소요량을 환산하면 불필요한 비료사용을 줄여 작물에 필요한 양분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고 특정양분의 부족 및 과다로 인한 장해를 사전에 예방하는 효과가 크므로,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건강검진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토양검정을 받고자 하는 농업인은 1필지 기준 5~10곳을 선정해 표면의 이물질(1cm 정도)을 제거한 후 표면에서부터 15cm 깊이로 시료 채취 후 골고루 혼합하여 500g 정도를 봉투에 담아 농업기술센터 토양검정실로 신청하면 된다. 김정애 농업기술센터소장은 "2019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PLS제도에 대비하여 토양검정 등 과학영농기술을 통한 농업 경영비 절감과 고품질 농산물 생산기반 조성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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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이 배출한 첫 해외선교사, 이대영 목사(2)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이 대 영 목사 (李大榮, 1887~1968) 5. 이대영, 낙심하고 있던 청년들의 부흥을 꿈꾸다 1919년 3·1만세운동의 실패로 많은 청년들이 낙심하며 실의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안동의 3·18 만세운동을 모의하고 주도했던 안동교회는 주민들에게 새로운 대안으로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분위기 속에서 성경공부를 통해 민족혼을 일깨우고, 절망에 빠진 청년들에게 소망을 주는 종교로 기독교가 인식되면서 의식 있는 청년들이 당시 안동읍 유일한 교회인 안동교회로 모여들게 되었다. 그 결과 1919년 9월 안동교회에서 안동기독교청년회 창립총회가 열리게 되었다. 하지만 다수 회원들이 비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에 신앙에서 벗어난 행동으로 인해 신앙에 기초한 청년회 조직을 새롭게 구상하게 되었고, 기독청년면려회(C.E.)가 대안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당시 안동선교부 주재 안대선 선교사는 기독청년면려회가 이에 가장 부합하는 청년운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하여’라는 목표를 가진 기독청년면려회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에 관한 책자를 홍콩으로부터 입수해서 번역하고, 그 지침에 따라 안동교회 청년회에서 도입하게 되었다. 이후 1921년 2월 당회의 허락을 얻어 한국 최초로 기독청년면려회 운동이 시작되었다. 당시 당회장은 안동교회 동사목사인 권찬영 선교사였으며, 이대영 목사는 안동교회 2대 담임목사로 막 부임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대영 목사는 기독청년면려회 운동의 출범에 가장 앞장서서 중요한 결정을 이끌었던 것이다. 기독청년면려회는 태동 이후 빠른 속도로 전국에 확산되어 1921년 6월 안동교회에서 경북연합대회가 개최되었다. 1921년 제10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안동의 청년면려회 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전국교회에 면려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함으로써 1923년에는 전국에 약 200여 교회에 기독청년면려회가 조직되게 되었다. 급기야 1923년 8월에는 조선연합 창립총회가 개최되어 기독청년면려회는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기독청년면려회는 오늘의 청년회전국연합회, 남선교회전국연합회로 이어져오고 있으며, 해방 후 고등CE, 청년CE, 장년CE로 분할되었으며 오늘의 고등부, 청년회, 남선교회 전국연합회로 발전했다. ▲1954.4.22안동교회에서 제 5차 기독청년 면려연합회 전국대회 6. 이대영, 다음세대의 주역인 주일학교를 활성화하다 이대영 목사는 1921년 1월 제9회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921년 2월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1922년 5월 중까지 교회를 섬기다가 사임하였다. 비록 14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대영 목사는 수려한 외모와 인격적 호감, 각별한 사역의 헌신으로 초기 안동교회가 든든히 서 갈 수 있는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그가 추구한 사역은 비단 개(個) 교회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성장에 롤 모델(Role Model)이 될 수 있었다. 이대영 목사가 각별히 관심을 가진 분야는 주일학교였다. 안동교회는 1921년에 접어들면서 주일학교 조직을 체계적으로 갖추기 시작했다. 안동교회의 주일학교 조직을 갖추고 교사들을 임명한 것은 초대 담임인 김영옥 목사였다. 그러나 이대영 목사는 주일학교 조직을 보안하기 위해 1921년 5월 제67회 당회에서 교사를 새롭게 임명하였다. 또한, 1922년 1월 30일에는 어린이들이 모이는 소아회가 운영되는 안기, 동부, 성내교회 등 3개 처소에 칠판과 분필을 보내기 위해 헌금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대영 목사는 자신이 담임으로 있는 안동교회에만 집중한 것이 아니라 안기, 풍기의 동부교회와 성내교회 등을 후원함으로써 안동지역의 전체에 걸쳐 어린이 부흥에 힘썼던 것을 알 수 있다. ▲제 1회 주일 학교대회(1928년) 7. 이대영, 전국적인 부흥사경회 강사로 사역하다 안동교회 당회록에 따르면 이대영 목사가 안동교회에서 시무하는 14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전국 각지를 방문하며 부흥사경회를 인도했음을 알 수 있다. 전국의 여러 교회는 이대영 목사를 부흥회, 사경회, 훈련 등 강사로 줄이어 초청하였다. 당회록에 기록된 첫 번째 초빙은 1921년 3월 29일부터 4월 6일까지 대구에서 갖게 되는 여 도사경회(都査經會)에 강사로 초빙 받았다. 그러나 3월 20일부터 이미 안동교회에서 부흥회를 결정했기 때문에 초빙에 응할 수가 없었다. 이후 이대영 목사는 중평교회, 웅천교회, 천촌교회(경주군 서면), 경남 함안읍교회, 상주읍교회 등의 교회에서 부흥사경회를 이끌었다. 또한, 전주군교회, 동산신명학교, 양림교회(전라도 광주), 남문외교회, 만촌교회, 하회교회, 대구지역 도사경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는 등 그는 전국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부흥강사였다. 이대영 목사는 평균적으로 한 달에 한번 꼴로 일주일 정도의 부흥집회 강사로 출타하였다. 그는 안동지역을 넘어 전국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강사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8. 이대영, 경안노회 창립회원이 되다 1907년 조직된 독(獨)노회는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세워지기까지 사실상 총회적 기능을 수행했다. 독노회가 조직된 이후 한국교회의 교세는 날로 부흥되어 독노회 산하에 경기, 충청(경충), 평북, 평남, 황해, 전라, 경상, 함경 등 7대리회(代理會)를 조직하여 각 지방을 관할하게 하였다. 이후 1911년 독노회에서 1912년에는 7대리회를 노회로 승격시켜 총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함에 따라 1911년 12월 부산진 예배당에서 경상노회가 조직되었다. 또한, 1916년 제5회 총회에서는 경상노회가 헌의한 노회분립안이 가결되어 경상노회를 경북노회와 경남노회로 분리하기로 결의하였다. 1921년 제10회 총회는 경북노회와 경안노회의 분립을 결의했다. 총회에서 정한 노회 경계선은 안동군, 영주군, 봉화군, 청송군, 의성군, 영양군, 예천군, 상주군, 영덕군 및 문경군 일부지역이 포함되었다. 경안노회는 조직회장인 권찬영 선교사의 소집으로 1921년 12월 경안성서학원 전신인 안동 여성경학교에서 개회되었다. 당시 경안노회의 한국인 목사회원은 김영옥, 이대영, 강석진 목사였고, 선교사 회원은 권찬영, 인노절, 안대선이었다. 그리고 장로회원은 신택희 외 22명이었다. 개회 후 임원이 조직되었는데 투표결과 회장 김영옥 목사, 부회장 권찬영 선교사, 서기 강석진 목사, 부서기 이대영 목사, 회계 조학규 장로, 부회계 인노절 선교사가 피선되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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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군, 관광객 30만 명 방문 기념 이벤트 실시울릉군은 2일 도동항 여객선터미널에서 울릉군수와 관계공무원이 참석한 가운데 울릉도 관광객 30만 명 방문 기념 이벤트를 실시하고 30만 번째 관광객에게 특산품 및 꽃다발을 증정했다. 이날 30만번째 관광객은 경기도 부천시에서 온 이영순씨(64)가족으로 2박3일 일정으로 자녀들과 함께 효도관광 차 울릉도와 독도를 방문했다가 행운의 주인공이 되어 더욱 뜻깊은 여행길이 되었다. 한편 아차상격인 299,999번째 관광객과 300,001번째 관광객 또한 경기도 부천시에서 온 김선욱(68), 이현미(41)씨가 선정되어 깜짝 행운의 기쁨을 누렸다. 이들 에게는 축하 꽃다발과 함께 울릉도 해풍이 길러낸 산채나물 세트를 비롯해 지역 관광시설물을 무료 이용할 수 있는 통합이용권이 제공됐다. 울릉도를 방문한 관광객 수는 2011년 30만명을 훌쩍 넘어선 이래 2년만인 2013년 41만명을 돌파하였으나 2014년 세월호, 2015년 메르스 사태를 겪으며 주춤하였지만 2016년 이후 꾸준한 증가세를 이어오고 있다 2018년 울릉군 누적 관광객은 6월 지방선거와 7~8월 유례없는 폭염 등 전국적인 관광 불황의 악재에도 불구하고 35만명 돌파를 위해 순항중이다 이런 성과의 배경에는 독도를 자국 영토로 명기한‘2018년판 외교청서’발간 및 14년 연속 일본 방위백서 등을 통한 지속적인 독도 주권 훼손행위에 따른 ‘범국민적 관심’과 ‘전국민 독도 밟기 운동’, ‘여객선 복수노선 취항’, ‘군차원의 다각적인 홍보 활동’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김병수 울릉군수는 “2018년 울릉을 방문하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며“연간 관광객 35만을 넘어 50만을 목표로 전천후 대형여객선 유치, 울릉공항건설, 울릉일주도로 및 울릉사동항 2단계공사 등 대형 국책사업의 차질없는 완공을 통한 관광인프라 개선에 전 행정력을 집중해 대한민국 관광대島 울릉을 만들어가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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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거룩한 흔적을 남긴 사역자, 김영옥 목사(2)김 승 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영옥 목사 (金泳玉, 1871-1952) 4. 안동지역에 복음의 씨를 뿌린 교회개척자, 김영옥 안동에 복음이 처음으로 전해진 것은 부산을 거점으로 선교하던 배위량(W.M.Baird) 선교사에 의해서다. 그는 1893년 4월 17일 부산 동래를 출발하여 밀양, 청도, 대구, 낙동, 안동. 의성, 영천, 경주, 울산을 거처 5월 20일 부산으로 돌아가는 무려 1,240 리(里)나 되는 전도여행을 통해 복음을 전했다. 5월 5일, 그의 역사적인 안동 방문이 있었고, 이 날은 안동에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진 날이다. ▲1909년 9월부터 안동의 북부지역은 사우대 선교사가, 서쪽은 오월번 선교사가 책임지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전도여행을 떠나기 전의 모습으로 추측된다. 좌측 말에 탄 사람은 사우대 선교사이며 말 옆에 있는 사람은 당시 조사인 김영옥(1911년 안동교회 초대담임목사로 부임)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마부, 그리고 오른쪽 말에 탄 사람은 오월번 선교사이다. 이후 미국 북장로교는 1897년 대구선교부를 설립했고, 1902년부터 경북 지방을 세 구역으로 나눠 동부 지역은 안의와(J.E.Adams) 선교사, 안동을 포함한 북부는 방위렴(W.M.Berret) 선교사, 그리고 서부는 부해리(H.M.Bruen) 선교사가 각각 담당해 전도사역을 감당함으로써 경북북부지역의 복음화가 본격화되었다. 특히 안의와 선교사는 1902년 3월, 김기원과 함께 안동을 순행하였는데 이때 이들은 시장에서 전도를 하면서 복음서를 판매했다. 이 해에 안동 국곡과 풍산, 그리고 의성 비봉에도 교회가 설립되었다. 1908년 장로교 선교사 총회에서 안동선교부 설립 결의가 이루어졌다. 그후 안동 최초 주재 선교사로 사우대(C.C.Sawtell) 선교사가 안동에 도착했으며, 1909년 8월 8일 안동교회가 설립됨으로써 안동지역의 복음화가 활기를 띠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원주에서 선교하던 미국 북장로교 소속 오월번(A.G.Welbon) 선교사와 조사 김영옥도 1909년 선교지를 안동으로 임지를 옮김으로써 안동 땅에 복음의 바람이 강하게 불기 시작했다. 안동에 도착한 김영옥은 선교사들을 돕는 조사로 안동을 중심으로 경북 북부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는 이미 세워진 교회들을 돌보았으며, 특히 8월 둘째 주일 설립된 안동읍 최초의 교회인 안동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다. 5. 영남지역 독노회에서 최초로 안수 받은 한국인 목사, 김영옥 언더우드 선교사의 전도로 세례를 받은 김영옥은 여러 해 동안 선교사의 도움으로 성경을 공부했다. 당시 언더우드가 운영하고 있던 성경훈련반은 1년에 한 달씩으로 그 과목은 성경주해, 제목별 성경공부, 성경입문, 교회사, 성경지리, 교회정치, 찬송, 설교 등을 포함했다. 한국교회 최초의 신학교라고 할 수 있는 그곳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은 김영옥은 매서와 조사가 되었다. 조사로 활발하게 사역하던 김영옥은 1901년 개교한 장로교 최초의 신학교인 평양신학교에 만 30세에 입학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조사와 영수, 장로 등 여러 사역으로 인해 학교 공부에만 전력투구할 수 없었던 김영옥은 졸업하기 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만 40세인 1911년(제4회)에 마침내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9월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에서 개회된 제4회 독노회에서 홍승한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다. 따라서 1891년 영남지역(부산·경남·대구·경북 등)에 복음이 전해진 이후 대구에서 열린 첫 노회에서 김영옥, 홍승한은 목사로 임직을 받은 것이다. 한편, 영남지역에 있던 교회에서 목사 직분을 가지고 처음으로 시무한 한국인으로 경북교회사나 대구제일교회는 김천일 목사를 기록한다. 그러나 김천일 목사의 안수 일자는 자료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혼선을 준다(경북교회사는 1911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하편은 1912년으로 기록). 따라서 존재하는 자료를 종합할 때 영남지역 교회에서 최초로 목사로 시무한 한국인은 김천일이나 혹은 김영옥, 홍승한이라고 할 수 있다. 6. 안동지역의 복음화에 주춧돌을 놓은 사람, 김영옥 김영옥 목사의 부임(赴任)으로 안동교회는 경상도에서 처음으로 한국인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가 되었고, 그의 뛰어난 영적 지도력은 안동을 포함한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복음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안동교회는 놀랍게 부흥하여 1년이 채 지나기 전에 무려 75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발돋움했다. 안동교회의 첫 학습자는 강복영 외 14명(1910년 8월 18일), 첫 세례교인은 권중한 외 8인(1911년 3월 2일)이었다. 또한, 김영옥 목사가 담임으로 섬겼던 1911년부터 1921년까지 안동교회는 안동지역의 중심교회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다. 1911년에는 오늘의 초등학교 수준인 계명학교를 설립함으로써 교회가 섬김과 봉사로 지역사회와 소통할 수 있게 했다. 특히 1913년에는 김병우를 장로 장립함으로써 안동지역에서 최초로 당회가 구성되었다. 주일학교와 여름성경학교를 통해 어린이들의 신앙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1913년 경북북부지방에서는 처음으로 여전도회를 조직하고 도사경회를 개최함으로써 여성들의 신앙교육에도 집중했다. 1920년 안동 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했으며, 1921년 전국 최초로 기독청년면려회를 조직함으로 청년의 신앙교육과 계몽에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안동에 주재하고 있던 안동선교부의 선교사들은 자신들에게 집중되었던 리더십을 김영옥 목사에게 조금씩 이양(移讓)해 한국인 목사의 지도력을 배양했다. 1913년 8월 9일에 있었던 안동교회의 역사적인 첫 번째 당회록은 이 사실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안동교회는 1909년 8월 8일 첫 예배를 드림으로 설립된 지 4년이 지나지 않은 1913년 7월 20일에 김병우를 장립함으로써 안동지역에서 첫 당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장로장립 20일 후인 1913년 8월 9일 안동교회 제1회 당회가 오월번 목사 댁에 모여 문답건과 예배당 건축 등 안건을 처리하였다. 위 사진 중 왼쪽은 제1회 당회록을 포함한 안동교회 당회록 제1권이며, 우측은 김병우의 장로장립을 확인할 수 있는 당회기록이다. 1913년 8월 14일에 있었던 제2회 당회록에는 8월 17일 있을 첫 세례와 성찬의 집례자로 초대 김영옥 목사를 기록한다. 교회의 사역에 중요한 역할을 하던 선교사가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회가 조직되자 첫 세례식과 성찬식 집례를 한국인 담임 목사에게 양보한 것이다. 이것은 선교사들의 크나큰 배려였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불과 5일 전에 있었던 안동교회 첫 당회의 회장은 오월번 선교사였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비록 자신들의 조사였지만 목사 임직을 받고 안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김영옥 목사를 존중하며 현지인 목사를 세워줌으로써 점차 자국민 중심의 리더십을 키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안동교회는 100년이 넘는 역사에서 부속건물이 아닌 본당을 단 3번 건축했는데, 첫 예배당은 그가 조사로 섬길 때인 1910년 10월 30일 준공한 16칸 ‘ㄱ’자 예배당이다. 이 예배당 건축을 위해 교인들은 10월 9일 주일 오후예배 시 특별헌금을 했으며, 당시 조사인 김영옥도 선교사들이 준 지방 순회 때 타고 다니던 노새를 팔아 건축헌금에 보탰다. 더욱이 예배당을 신축한 이후 특별부흥집회가 열렸는데 당시 최고의 부흥강사인 길선주 목사도 강사 중의 한 분이었다. 또한 여성과 소녀들을 위해 활발한 성경공부도 이루어졌다. ▲1913년 11월부터 공사가 착수되어 이듬해인 1914년 2월에 준공한 안동교회의 두 번째 신축 예배당으로 오늘의 100주년 기념관 바로 그 위치에 서 있었다. 예배당은 목조 함석지붕을 가진 건물로 반(半) 2층 구조형식으로 약 50~60평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건축기법 상 2층은 작은 규모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안동교회의 두 번째 예배당인 2층 목조 함석지붕 예배당은 첫 번째 예배당이 준공된 후 급속한 교인의 증가로 인해 1914년 초 준공되었다. 이때도 김영옥 목사는 선교사가 사준 가옥을 팔아 헌금했을 정도로 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두 번째 예배당의 준공으로 주일학교의 활성화가 이루어져 양적으로 또 질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1920년 7월, 안동지역에서 최초로 여름성경학교가 열렸으며, 이듬해에는 주일학교가 조직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더욱이 인근 지역 교회들이 연합하여 모일 수 있는 부인도사경회 등 대형집회가 가능하게 되었다. 김영옥 목사의 부임으로 안동교회는 사역의 내용, 교회의 건물과 조직 등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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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우리 아이국내 다문화 학생의 수는 2010년 31,788명에서 해마다 조금씩 늘어나 2017년에 109,387명으로 3배 가까이 증가했다.단순한 수치의 비교만으로도 우리나라는 다문화 학생의 비율이 점차 늘어 상대적인 비율은 급격하게 증가할 것이고 이로 인한 많은 변화가 올 것으로 예상된다. 경북교육청에서는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다문화교육 지원 체계를 구안하는 등 선제적인 대응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경북도내 다문화 학생은 전체 학생 273,336명 중 8,199명으로 약 3.0%를 차지하고 있으며, 초등학생은 129,305명 중 5,997명으로 5.0%를 넘어 이미 다문화 사회에 도달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다문화 학생의 구분은 국제결혼 가정의 자녀 중 국내에서 출생한 경우가 전체 8,199명 중 7,559명으로 92%를 차지해 가장 많으며, 이들은 한국에서 나고 한국에서 자란 일반 학생들이다.국제결혼으로 배우자가 데리고 온 중도입국 학생과 근로자 및 유학생 등이 데리고 온 외국인 가정 자녀는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아 문제가 되고 있다. 최근 몇 년간의 다문화 학생 수와 증가율 등을 살펴보면, 다문화 학생의 수는 2010년 1,812명에서 2014년에 4,221명, 2018년에 8,199명으로 매 4년마다 2배씩 증가하고 있다.전체 학생 수에 대한 비율은 2010년 0.5%에서 2013년에 1.07%, 2016년에 2.3%, 2018년에 3.0%로 2~3년 마다 2배씩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전체 학생 수의 감소와 다문화 학생의 증가에 따른 현상이며 날로 심화할 것으로 보인다. 다문화 교육의 지원은 크게 세 가지 과제로 나뉜다. 첫째, 중도입국학생 및 외국인 자녀들의 한국어와 한국문화 교육지원을 위한 맞춤형 지원둘째, 일반학생 및 교직원 대상 다문화 감수성 증진을 위한 다문화 이해교육셋째, 유관기관과의 연계를 통한 효율적인 다문화 지원 ※2018년 경상북도교육청 다문화교육 추진 내용 체계 경북교육청에서 실시 중인 맞춤형 지원사업으로는 교육부 지원 정책학교 29교(예비학교 7교, 중점학교 13교, 유치원 7교, 연구학교 2교)와, 우리도 자체 지원 사업 학교 191개교(한국어교육지원 29개교, 이중언어교육지원 30개교, 다솜이사랑방 76개교, 한울동아리 13개교, 다문화유치원 23개원)를 운영하고 있다. 다문화 이해교육으로 전학교 2시간 이상 학생교육, 연간 1회 이상 학부모교육, 교원은 15시간 이상의 연수를 권장하고 있다.다문화 이해교육의 다양화를 위하여 글로벌 진로직업 체험단 운영, 다드림캠프 운영, 맞춤형 예술교육 프로그램 운영, 맞춤형 진로직업 교육 운영 등 다양한 외부 기관 위탁사업을 운영 중이다. 다문화 정책학교 및 지원 사업에 대한 컨설팅과 일선학교 이해교육 지원을 위한 경상북도교육청 다문화교육 지원단(일명 풀꽃지원단*)을 양성하여 운영 중이다. *풀꽃은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자세히, 오래 보아야 예쁘지만 동요의 한 구절처럼 어디 피어도, 어떤 색으로 피어도 우리 산천을 가득 메운 진짜 꽃들이다. 이들처럼 다문화와 일반학생들이 모두 잘 어우러져 우리 미래를 아름답게 채우도록 지원하자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다. 기초과정과 심화과정 연수를 거쳐 40여명이 선발되었으며, 6월부터 7월까지 정책학교 29개교에 대한 현장 집단 컨설팅을 실시하여 좋은 호응을 받았고, 이어 9월에는 지원사업 학교(한국어지원 및 이중언어 지원학교) 59개교에 대한 컨설팅을 진행 중이다. 도단위 가족센터와 연계하기 위하여 올해 연수 시에 경북다문화 가족지원센터에 우리도의 가족센터 현황에 대한 강의를 의뢰하여 참가자로부터 정말 실제로 필요한 연수라는 평을 받기도 했으며, 제6회 전국이중언어대회 경북대회 모국어심사를 또한 경북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 의뢰하여 진행하였다. 다양한 지원활동에도 불구하고 아직 다문화 교육에는 다양한 문제와 한계들이 존재하고 있다. 특히 맞춤형 지원의 경우 예비학교를 통해 집중적으로 지원을 하고 있지만, 현재까지는 희망학교를 지원받아 소규모로 지정하는 형편이라서 경주(2교), 경산(3개교), 칠곡(1교), 의성(1개) 등에서만 운영되고 있어 예비학교가 없는 시군 학교에 대한 지원이 어려운 실태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2019년부터는 다문화 예비학교와 중점학교 등을 함께 운영하는 다문화 친화적인 학교를 지원청별 1교 이상 지정하여 거점학교로 운영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경북도내 모든 지역에 1개교 이상의 예비학교가 준비되어 비정기적인 다문화 학생의 전입 시에도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하고자 한다. 거점학교는 중기적으로 지역별 지원 센터로 발전시키고, 더 나아가 한국어교육원 등을 설립하는 것이 장기적인 비전이다. 다문화 이해교육은 아직 형식적이고 단일 행사위주의 내용이 많은 편이나 풀꽃지원단의 일선학교 컨설팅 및 담당교사 연수를 강화하여 교육과정 속에서 다문화교육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지원할 예정이다. 마숙자 초등과장은 “다문화 학생에 대한 지원은 이미 거룩한 봉사활동이나 희생정신의 문제가 아니라 내 아이의 미래와 직결된 어쩌면 이기적인 현실의 문제입니다. 산들에 핀 모든 꽃들은 우리를 지키는 미래이며, 모두가 함께 키워야 하는 소중한 자산입니다. 한송이의 시든 작은 풀꽃도 안타까운 것처럼, 한아이도 놓칠 수 없는 필수 교육 사업, 경상북도교육청 다문화 교육의 모토입니다.”라며 체계적이고 선제적인 다문화 교육 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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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집에 앉아서 자동차등록 번호판을 부착할 수 있어요!경상북도는 10월 1일부터 집에서 인터넷으로 자동차 등록을 신청하고 자동차등록 번호판은 배송원이 집을 방문해 부착해 주는 자동차 온라인 등록 서비스를 시행한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경북도와 한국교통안전공단은 지난 28일(금) 도청 회의실에서 이런 내용을 주요 골자로 하는 자동차 온라인 등록 사무 위․수탁에 대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경북 도내에서 자동차 등록을 희망하는 민원인은 시군 자동차 등록관청에 갈 필요 없이 자동차민원대국민포털(www.ecar.go.kr)에 접속해 자동차 신규․이전․변경․말소․저당권 설정 등록이 가능해졌다. 신청된 온라인 민원은 김천시에 소재한 한국교통안전공단 산하 총괄센터에서 처리되고, 포항․안동․구미시에 설치된 3개 등록소에서는 차량 신규등록 번호판의 배송과 부착 서비스를 제공한다. 온라인 등록 방법이나 불편사항은 콜센터(☏1566-4682)로 문의하면 상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앞으로 자동차등록 관련 방문민원은 시군 자동차 등록관청에서, 온라인 민원은 한국교통안전공단에서 전담해 온라인 민원의 활성화는 물론 자동차등록 관련 서비스 품질향상이 기대된다. 또한, 자동차 온라인 등록 사무의 공단 위탁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온라인 신청이 20%에 달할 경우 경북 도내에는 104개의 좋은 일자리가 창출되고, 전국적으로는 359개의 고용유발 효과가 발생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정부에서는 2010년부터 온라인 행정서비스 강화를 위해 자동차 온라인 등록 서비스를 시행해 왔으나, 시군 등록관청에서 방문민원과 온라인 민원을 함께 처리하고 있어 2017년 기준 도내 온라인 민원은 194건(전체 자동차 등록민원 617,026건의 0.03%)에 불과하고, 전국적으로는 7,380건(전체 자동차 등록민원의 0.08%)으로 저조한 실정이다. 이에, 경북도는 자동차 온라인 등록민원 활성화를 위해 지난 3월부터 시군, 한국교통안전공단과 자동차 온라인 등록 사무의 위탁에 대한 협의를 추진해 왔으며, 이번 자동차 온라인 등록 사무 위탁은 전국 17개 시도 중 세종시(‘17년 5월)에 이어 두 번째다. 이철우 경상북도지사는 “자동차 온라인 등록 사무의 공단 위탁으로 서비스의 품질 향상은 물론 도내에 자동차 온라인 등록 총괄센터를 유치하게 되어 좋은 일자리도 창출하는 효과를 거두게 되었다”며 “앞으로도 유관기관과의 업무협력을 통해 행정서비스의 품질을 향상시키고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는데 모든 역량을 집중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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